“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었다.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이토록 귀엽다니,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희한한 여인이다. “일단 오늘 하루만 남편을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 평생의 꿈이었던 현모양처가 저절로 되었다고 말하는 개그우먼 이성미. 한여름 오후의 데이트는 분명 귀여운 여인과 시작했는데 끝날 무렵에 보니 작은 거인과 앉아 있었다.
그 나이에 몸무게가 40kg도 안 나간다. 뭇 여인들에게 몰매 맞기 싫은지 실토했다. “안 먹어서 이래요~ 일할 때 많이 먹으면 졸리고 느긋해져서 집중력이 떨어져 할 수 없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고 자백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성미 또래의 여인들을 할머니로 생각했다. 지금은 필자 이봉규도 60이 되고 보니 이 또래의 보통 여인들이 할머니까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섹시한 향기가 나는 여인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성미는 여름철 농익은 살구처럼 귀엽고 섹시하다.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한량 이봉규가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프로의식을 되찾아 몰아치듯 인터뷰를 시작했다. “100세 시대에 사랑의 이모작을 위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이봉규의 다짜고짜 도발에 그녀는 “기운이 있어야 그런 모험이나 상상도 하죠!”라고 말한다. 한숨도 살짝 묻어나온다. 희극인답게 개그처럼 위장했지만 그 속내를 살짝 들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때는 션과 정혜영 커플이 부러웠다. 왜 나는 션 같은 남자를 못 만났을까?” 스스로 푸념도 해봤지만 결국 “내가 정혜영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고 지금의 남편에게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성미 남편은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연예기획사 웰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면서 국제대학교 조교수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은 이성미의 열애설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인터뷰하고 얼마 후 남편은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으며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그녀의 반응을 엿본 남편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저랑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 하며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나름 차분한 이성미는 “연하이고 게다가 기자는 싫다”고 잘라 말했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일각의 여지는 남겼다. “부모님께 허락을 먼저 받아와라!” 하며 돌려보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 남편은 이틀 뒤 찾아와서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다”며 “6개월과 1년 뒤 언제 결혼하고 싶냐?”고 이성미를 다그쳤다. 남편의 불도저식 박력에 이성미는 항복했고 4개월 뒤 결혼에 골인했다.
우리는 ‘묵은지 부부’
한 이불을 덮고 산 지가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한때 결혼생활이 살짝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권태기 시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두기 위해 캐나다에서 7년을 살기도 했다. 두 살 연하인 남편을 약간 무시하는 교만함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생각을 바꿔 자신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맞추기로 마음먹었더니 부부관계가 확 달라졌다.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이성미 휴대폰에 ‘존경하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뜬다. “일단 오늘 하루만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까 술술 풀리더라는 것.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구질 것 같은데 의외다. “아직도 방귀를 안 텄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성미의 꿈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현모양처다. ‘묵은지 부부’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냄새도 나고 매력은 없지만 깊은 맛이 있는 부부관계”라고 ‘묵은지 부부’에 관해 설명한다. 그녀의 현모양처 꿈이 이뤄진 것은 자식들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 같니?”라는 이성미의 질문에 아이들이 “하나님, 집, 가족”이라고 대답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술회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평생 꿈인 ‘현모양처’가 됐구나 하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이성미는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에 현모양처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 새엄마 밑에서 컸다.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또 다른 새엄마와도 살았다. “엄마가 네 명이나 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이 여유로워졌지만 어릴 적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편과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은 각오가 그녀의 가족을 행복하게 이끌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너무 여유로워진 걸까? 가끔 자식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개그맨답게 “이것들이 새엄마랑 안 살아봐서 이래!” 하며 다그칠 때도 있단다.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고2 딸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 이성미는 “도둑질 아니면 뭐든지 자식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은근히 지원사격이다. 그러면서 선배 입장에서 “딸의 성격이 대범해 연예인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다(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성품이라야 연예계에서 버틸 수 있다). 이성미가 자식들에게 무턱대고 관대한 것만은 아니다. 큰딸이 대학 1학년 때 입학을 보류시키고 1년간 알바를 시켰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알바를 하던 중 시간당 3만원 이상을 주겠다는 고액 알바광고 전화가 걸려왔다. 자세히 물으니 “아저씨들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는 꼬임이었다. 세칭 룸살롱,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로부터의 유혹이었다. 엄마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상의하는 딸이었다. 그때도 엄마와 상의했기에 딸이 어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100% 아이들을 믿는다. 믿는 만큼 아이들도 다 얘기한다”며 딸 자랑을 하는 이성미에게 이봉규가 태클을 걸었다. “글쎄~ 진짜 다 얘기할까? 그 나이 때는 엄마에게 숨기고 싶은 일도 발생하고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도발했더니 그녀는 “우리 가족은 각자 결정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걱정은 지들이 하는 거지 엄마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여태껏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도 한다. “흙에서 자란 아이는 용기로 크고, 아스팔트에서 자란 아이는 오기로 자란다”는 말을 20세 때 어디선가에서 듣고는 가슴에 새기고 아이들을 키울 때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성미의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돈 항아리’가 있다. 항상 5만원 정도 비치해놓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꺼내간다. 그녀의 ‘믿음 가정교육’에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귀여운 여인 그리고 작은 거인 아름다운 얘기만 하고 인터뷰를 끝낼 한량 이봉규가 아니라서 전매특허 질문을
훅~ 던졌다.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용서할 수 있나?”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것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금방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 바람은 피우지 않을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맹세했거든” 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녀의 표정에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이대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다. “아내로서 부족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의외의 답변을 한다.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애교도 없고 사랑 표현도 못한다.” TV 화면에 비치는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그렇다면 이성미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백조처럼 귀엽게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현모양처 이외의 앞으로의 꿈을 물으니, 교통부장관을 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밝힌다. 뉴스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운전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부연 설명한다. 교통부장관이 어려우면 사복경찰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체구는 작지만 사회봉사에 대한 포부는 무척 크다. 지금은 ‘CH 114’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교회를 찾아주는 사이트인데 올 9월에 오픈할 예정이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 달에 1만 명 정도나 된다니 믿기 힘들다. 이성미는 이들이 안타까워 이 같은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어릴 시절과 젊은 시절 한때의 불행을 슬기롭게 승화시킨 이성미는 현모양처의 평생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지금은 남 도울 생각에 골몰하며 살고 있다. 인터뷰 시작 때는 귀여운 여인이었는데 끝날 무렵에는 그녀가 작은 거인으로 오버랩된다.
돌아보니 남들과의 경쟁이 삶이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놓고 학우들과 경쟁했다. 명문학교에 가려고 치르는 입학시험도 경쟁의 확대판이었다. 군대에서 선착순을 시키면 기합을 면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 탈락자 대열에서 빠져야 했다. 취업도 승진도 경쟁이었다. 예쁘고 착하고 스펙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일도 많다. 학교에서 성적을 위한 경쟁은 의미가 약하다. 그 나이 때는 전력투구를 잘 모른다. 경쟁은 전력을 다했을 때 비로소 경쟁의 의미를 안다. 필자는 권투를 배울 때 만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각의 링에 올라가 둘이 시합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전문 선수가 아니면 한 라운드 3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길다.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숨도 쉬어야 하고 체력도 받쳐줘야 하고 기술도 상대보다 나아야 한다. 그러나 맞지 않기 위해 초긴장을 하고 공격하다 보니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양손을 다 쓰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진다. 그러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남과 겨뤄 이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하게 치고받고 난 뒤 서로 포옹해주며 경기를 끝내는 것이다.
골프나 당구를 즐기면서도 내기를 하면 초긴장 상태로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과 돈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 몸이 경직되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탈진해서 뻗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로 여겨야 한다. 승부에 너무 연연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기에 지면 돈으로 메우면 된다. 어떤 경우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한다.
마라톤 경기에서 일반인들이 무리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빨리 뛰어야 남보다 나은 기록이 나오겠지만 목표보다는 목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위권 성적이나 기록보다는 건강이라는 목적 때문에 참가한 것이라면 말이다. 댄스 경기 같은 단체전에서도 다른 선수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선수들이 있다. 경쟁 선수가 엔트리에 있으면 출전을 포기하거나 그 종목을 피해서 다른 종목으로 출전하는 것이다. 댄스가 직업인 프로선수가 아니라면 순위보다는 그냥 즐기면 된다. 댄스 경기에서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트너와의 친분과 교감이다.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을 이겨야 내 존재가 부각되고 자존심을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때 져주는 것이 오히려 이긴 것보다 나을 때가 많다. 이긴 사람은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겠지만,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좋은 감정을 갖지 않으니 적이 생긴다. 갈등이 생길 때 경쟁심을 풀고 상대를 동정적인 마음으로 대하니 얻는 것이 많다. 나이가 들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경쟁을 멀리해야 한다.
1963년 필자가 서둔야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호기심으로 동네 언니들을 따라 며칠째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화기애애함으로 수업을 하던 분위기가 그날따라 이상했다. 통곡을 하며 우는 선배 언니들도 있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야학 선배들의 선생님인 김진삼 선생님이 돌아가셨단다. 농사단 자취방에서 잠자다가 문틈으로 새어 든 연탄가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때는 야학생들이 농촌진흥청 강당을 빌려 공부를 했는데, 진흥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살고 있는 관사 한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이었다.
지난여름 아버지가 가시던 언덕
갈바람에 물들은 그리운 언덕
오늘도 그 언덕은 변함없건만
가신 아버지는 왜 안 오시나.
마룻바닥 안쪽 깊숙이 각목을 비스듬히 세워 고정시켜놓은 칠판에는 한동안 위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생전의 김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곡이었는데 누군가 선생님을 추모하려고 적어놓았던 것 같다. 사진으로 뵈었을 때 무척 선한 인상의 김 선생님께 필자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각별하셨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죽음을 안 언니들이 어찌나 슬프게 울던지 야학교가 떠나갈 듯했다. 울음이 그친 후 언니들의 눈은 하나같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비통함은 가히 피붙이를 잃은 것 이상이어서 김 선생님을 잘 모르는 필자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그 뒤 선생님들은 수업을 진행시키느라 애를 먹었는데 언니들의 슬픔이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진삼 스승 영전에
한 번 태어나 흙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에 쫓겨 님은 가셨나요.
책 속에 얼굴 묻고 목놓아 울부짖는
당신의 제자들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꽃잎들을 저버리셨나요.
자연의 울부짖음도 제자들의 눈물도
가버린 님께선 들을 수도 없을진대
그 슬픔 또한 덜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님이 묻힌 무덤가를 무심히
지나쳐버릴 이도 많을 테지만
주위에 소나무들만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듯
우러러보고 있어요.
한낮이 지나고 밤이 돌아오면
공민의 얼들 속엔 님의 가르침이
가득 아로새겨 있답니다.
님이여
영원히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작은 얼들과 함께 하시옵소서.
1964년 10월 10일
위의 시는 선배 형정순 언니가 김진삼 선생님을 추모하여 지은 것인데 그 당시 동아일보에 투고해 실렸다. 김 선생님이 늘 강조하시던 말은 ‘참’을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실제 생활에서도 참을 실천하며 사셨단다.
김 선생님의 강하면서도 선한 인품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화가 있다. 그분이 살고 있었던 곳은 농사단이었는데 농사단은 농대의 수많은 서클 중 하나로 탑동에 회원들의 합숙소가 있었다. 어느 날 세 명의 회원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남아 있는 밥이라곤 오직 한 그릇뿐이더란다. 그때 “나는 괜찮아요” 하며 선뜻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신 분이 김 선생님이었는데 상당히 늦은 시간이라 보통 허기진 것이 아닐텐 데도 끝끝내 당신 뜻을 굽히지 않으셨단다.
당시 같이 살았던 황건식 선생님 말에 의하면, 참으로 보기 드물게 선하신 분으로서 늘 남을 먼저 생각하셨고 주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단다. 이분의 생활신조인 ‘참을 사랑하라’는 그 후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야학생들은 선생님들께 늘 이 말을 들으며 살았다.
야학을 졸업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사를 하는 야학의 한 남자 후배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돈을 못 벌고 있다면서 푸념을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아무래도 ‘참’을 강조한 서둔야학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며 농담하듯 말했다. 장사를 하려면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밀이었다. 그만큼 ‘참을 사랑하라’는 말은 서둔야학 출신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무엇을 하든 ‘참을 사랑하라’는 생활철학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수유리 419 묘지 옆 한신대학교 정문 입구에는 문익환 목사의 시비가 있다. 네모의 유리 상자 속에 본인의 작품인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세로줄 시가 금관의 나비문양처럼 빛을 발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잠꼬대 하듯 소리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둘레를 돌아가며 빽빽하게 새겨진 뜻을 모은 지인들의 이름을 읽으니 금싸라기들이 금덩어리로 모여져 잠꼬대라는 언어를 최고의 예술품으로 형상화시켜 놓은 걸작임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그는 생전에 자기의 이상을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중얼거리며 분단시대의 산물인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지만 이 시비가 증명하듯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때 모든 시인들의 연인이었던 고정희 시인도 이 학교인 한신대 출신이다. 전남 해남군 송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 과정을 거쳐서 이 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인 김재준, 문익환 같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졸업한 후에도 사회 부조리와 싸우며 현실 인식과 비정한 역사의 증언을 담은 목적시를 치열하게 썼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고독과 눈물의 정서로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서정시를 쓰다, 1991년 지리산 등반을 하다가 실족사 했다. 그녀의 넋을 위로라도 하는 듯 여름철새들의 잠꼬대가 교정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인 란 시를 음미해보자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맛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인의 시 전문
형상화가 최고의 예술로 마치 신라의 왕을 만난 듯 황홀경에 빠져 넋을 놓고 귀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시비에 취해 나도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읖조려본다.
금관의 언어
문익환 당신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4.19 묘지 뒤쪽 한신대학교 정문에
금관 같은 시비로 환생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면서도 미로 같은 언어의 구도,
수런거리는 금관을 연상케 하는 시비입니다
당신의 잠꼬대는 당신이 듣지 못합니다.
나의 잠꼬대는 내가 듣지 못합니다.
반드시 타인을 통해서만 나의 잠꼬대는 들을 수 있듯이
당신의 잠꼬대는 우리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잠꼬대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늘 갈망하던 무엇인가가 당신의 영혼 속에 잠재해 있다가 당신도 모르게
잠꼬대로 튀어 나온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신라 천년 문화의 상징이 한신대 정문 입구에
화려하고도 중후하게 되살아나 역사를 증언하듯
금빛을 반사하며 잠꼬대로 두런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알아듣지 못해도 뭉쿨한 이 감동
내 안의 강을 뜨거운 피가 휘돌아 흐르는 느낌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두런거리는 금빛 언어들, 참 신기 합니다.
문익환 당신은 늘 이념의 붉은 딱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살다가
우주로 귀환한 뒤에야 금싸라기 땀방울들이 한데 모여
당신을 부활시켜 놓았습니다.
둥근 세계인 그 곳에서도 잠꼬대 같은 언어가 통용 됩니까?
당신이 남긴 잠꼬대의 금관은 우리의 발길을 잠시 머물게 합니다.
사각의 유리 안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살랑거리듯 신라 천년의 금관에
노랑나비 나풀거리듯 언어들의 고요한 속삭임이 들립니다.
저 금관은 아무리 써 보고 싶어도 호흡이 있는 자에겐 불가능 합니다.
발치에 있는 315기의 영령이 머리를 맛댄 4.19탑
그 오랜 시간의 표면에서 금빛 언어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햇살이 저들에게 언어의 금관을 씌워 놓은 것일까요.
잘 익은 살구처럼 햇빛을 받으면 더욱 황금빛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갈망하던 세계, 그 미완의 이상을 후배들이 완전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으니까요.
너무 일찍 떠난 고정희 시인도 모교인 당신 곁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잠꼬대하듯 시를 두런거리고 있습니다.
수유리 수유리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여울목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기를 갈망하는 그대여.
500년 늙은 소나무가 내려다보고 있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생가보다
모교인 한신대학교 교정에서 419영령들과 함께 비정한 역사의 증언과 더불어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독한 눈물의 정서를 시로 승화시키며 구도자처럼 살다가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여루시인이여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당신의 뒤로 오늘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때가 있다. 대학입학 때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걸”, 대학졸업을 할 때는 “스펙 좀 쌓아둘걸”, 결혼을 할 때는 “돈 좀 모아둘걸”, 직장을 다닐 때는 “좀 더 성공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3년에 출간된 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10여 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문득 자신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 모든 생활을 접고 호주에서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가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그 경험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는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걸” ④ “내 감정에 좀 더 충실할걸” ⑤ “도전하며 살걸”이다. 5070세대도 이런 후회를 해본 적 있을 것이다.
5070세대가 젊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일에 치여 야근이 일상이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아내와도 너무 멀어진 것 같다. 현역에 있을 때는 나름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연락은커녕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도 많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다. 과거 직장생활할 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병만 키우던 시간들,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5070세대인 듯싶어 씁쓸하다.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5070세대가 앞으로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돈·연금·봉사·기부 등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가족관계 측면에서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충전하라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 선생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간 월간 에 자전적 수필 ‘가족’을 연재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사후에 로 발간되었다.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여보, 나도 사랑해”였다고 한다. 황혼이혼과 졸혼이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최인호 선생이 세상에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달 고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퇴직한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그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선배는 퇴직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해 뜨기 전 눈뜨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해 뜨면 눈뜨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고 격려하며 지원하던 아내도 이제는 은근히 불편해하는 눈치 같아서 걱정이란다. 선배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여보! 우리 여행이나 같이 다닐까?” 하자, 동네 스포츠센터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여행 가기로 했으니 혼자 가란다며 푸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퇴직 전에는 늘 가족과 함께 여행 가자고 하던 아내가 이제는 자기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며 걱정한다. TV나 신문에서 퇴직 후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친 게 지금의 서먹함으로 이어진 것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5070세대가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0대의 70%, 60대의 60%, 70대의 50%가 그 정도밖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 인생이모작 교육에서 만난 어느 수강생의 이야기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아들이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불러볼까 하다가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이 거실에 있는 동안 나오지 않아 포기했단다. 부모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녀들과 서먹해진 걸까? 자녀교육을 시킬 때 무관심이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건 아닌지,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쉽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5070세대는 특히 은퇴한 뒤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에서 뜻밖의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조급해하면 가족 파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김치가 맛있어지려면 오랜 시간 익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관계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숙고하다 보면 이 기다림의 시간도 잘 여물어갈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늘리자
건강검진 후 “검진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앞으로 살 날이 9개월 정도 남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당황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다.
몇 년 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라는 카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광고가 있었다. ‘가족시간계산기’로 앞으로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내용이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 친구 만나는 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등을 빼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9개월! 참고로 필자의 경우는 약 11개월이었다.
‘가족시간계산기’는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참고1]의 ②번 기대여명은 통계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연령별 기대여명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귀찮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인 82세에서 자신의 나이를 빼고 계산하면 된다. ‘가족시간계산기’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가치소비를 통해 가족관계 강화해보자
‘가족시간계산’을 통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어떤 배우자, 부모가 될 것인지 액션플랜(action plan)을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배우자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데이트하기’, ‘배우자와 마주앉아 한 시간 이상 대화하기’, ‘배우자 또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와 삶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씩 옮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배우자와 자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왔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소비와 실천으로 꽉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보자. 처음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더라도 인내심과 배려심을 갖고 접근하면 봄눈 녹듯 그동안의 소통 단절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필자도 당장 실천하겠다.
부모님이 장기 투병하는 막내 동생을 간병하려고 수십 년 전에 서울로 이주하셨다. 고희를 넘긴 아버님은 답답함을 달래려고 자주 주위를 산책하셨다. 하루는 “애야, 서울에는 왜 작은 차가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큰 차로 많이 실어 나르면 될 터인데” 하루 한 번 다니면서 넓은 좌석에 웬만한 짐까지 실어주는 헐렁한 버스를 생각한 이야기였다.
새 옷을 입던 손자가 “옷이 작아서 불편해요” 하면서 벗어던졌다. 새 학년이 되면서 몸에 잘 맞고 예쁜 것으로 골랐던 옷을 제대로 입어 보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처지다.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조금 여유 있는 옷을 샀으면 좋았을 터이다. ‘몇 달 만에 아이가 부쩍 자랐나 보다’ 마음을 달랬다. 어머님이 사주셨던 헐렁한 옷가지와 신발이 문득 그리워졌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초등학교 시절에는 생활용품이 엄청 귀했다. 어머님은 일 년에 한 차례 설날이 되어야 몸에 헐렁한 옷과 신발을 사주셨다. 이유는 단 하나 한 해 동안 입고 신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옷의 긴 소매와 바짓가랑이는 적당히 접어서 바늘로 꿰맸다가 자라는 몸에 따라 조금씩 풀어 내렸다. 고무신을 아끼려고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한 자갈길에서만 신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발에서 잘 벗겨지지 않도록 고무줄로 동여매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신발이 낡아서 더 신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발에 꼭 맞았다. 작아서 못 신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낡기 전에 못 신을 형편이 되면 어김없이 동생에게 넘겨야 했다. 한 해 동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고차원 방정식을 풀면서 신발을 신어야 했다.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교복ㆍ교모를 착용하는 학생다운 모습으로 초등학생 동생들에게 폼 잡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꿈에 그리던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통고무신을 잊고 중학시절이 꿈 같이 흘렀다. 하지만 대도시 고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키 크기에 따라 번호를 정하기 위하여 처음 만난 친구들과 줄을 섰다. 중학생 때는 중간쯤이던 내 키가 대도시 고등학교에서는 제일 작았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탓에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 살 아래 동생들과 같은 학년이라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이던 때였다. 하물며 이들보다 키가 작아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아차!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비상대책을 찾았다.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에는 운동화를 신은채로 교실출입을 하였다. ‘옳거니, 바로 이거야’ 번쩍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키를 조금만 높여도 제일 작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았다. ‘1번 탈출 작전!’ 중학생 시절 신발이 젖으면 가끔 애용했던 대로 종이를 알맞게 말아서 운동화 바닥에 두툼하게 깔았다.
아 뿔 사! 헐렁한 신발이 싫어서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발에 꼭 맞춰서 내가 산 운동화에 발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태까지 어머님이 사주셨던 조금 헐렁한 것이었으면 충분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도리 없이 종이를 빼낸 후 ‘야속한 새 신발‘을 신었다. 키가 제일 작은 1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후 폭풍 성장하는 동안 몸에 꼭 맞는 것보다 헐렁한 것을 더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다 보면 필자의 최근 활동을 말하게 된다. 며칠 후 있을 음악회, 해외여행 정보, 문화센터 입학 정보 등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온다. 그러면 자기도 끼워달라며 사정하는 지인이 꼭 있다.
그러면 뒤늦었지만, 음악회 주관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잘 알아 특별히 몇 장 더 부탁한다. 보통 15만원~20만원짜리 초대권이다. 적은 금액이 아니다. 해외여행도 인원 제한이 있어 인솔자에게 특별히 인원 추가를 부탁해야 한다. 보통 성의가 아니다. 문화센터도 선착순 인원 제한이 있고 마감일이 있다. 평소 바쁜 탓에 기억력이 깜빡깜빡하기도 해서 얘기 나온 김에 술자리에서 바로 담당자에게 연락해 부탁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초대권을 구해줬는데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피가 마른다. 전화해보면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늦어 그냥 집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차가 너무 막힌다며 필자에게 신경질을 내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람도 있다. 대중교통이 편한데 굳이 차를 끌고 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정중하게 못 오는 사유를 문자로 보내온다. 결과는 마찬가지다. 뒷수습을 하면서 초대자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 초대할 생각 안 하고 아예 혼자 간다. 믿을 사람은 필자밖에 없는 것이다.
해외여행도 그렇다. 술자리에서는 기대에 부풀어 현지 얘기로 꽃을 피웠는데 며칠 지나고 나면 마음이 변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못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술자리에서 한 얘기들은 뭔가? 이번에도 뒷수습을 해야 한다. 인솔자는 필자를 믿고 다른 사람을 안 받았으니 필자가 다른 사람을 섭외해 채워야 한다.
문화센터 초대권도 마찬가지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라서 담당자에게 특별히 부탁해놓았는데 막상 그날이 되면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나중에 연락이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인터넷 신청서에 사진을 넣어야 하는데 할 줄 몰라서 포기했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다음 기회에 하겠다 등등 그 이유도 많다. 미안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해주고 싶지 않다.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아서 찾으면 몰라도 도와줄 생각이 없다.
시니어들의 약속은 현역 때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 지켜도 그만이지만, 기분에 젖어 약속을 했다가 술 깨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아예 입을 다물게 된다. 만남도 기피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더 큰 문제다.
“다음에는 꼭 불러달라”고 하지만 탈락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도 또 펑크를 내거나, 초대자에게 고마움도 표시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기 마련이다.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에게 굳이 오아시스를 가르쳐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필자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시골이긴 했어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는 지역 내 4개 초등학교가 모여 경쟁을 했다. 필자는 운 좋게도 전체 차석(次席)으로 입학시험 결과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 8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인 필자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해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은 물론이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말았다. 당연히 중학교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등록을 못하고 말았다. 차석이어서 수업료 절반을 면제받았는데도 나머지 3300원을 내지 못해 포기했던 것이다. 뒤늦게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교장선생님이 입학금 전액 면제라는 특별 혜택까지 줬지만 결국 중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입도 하나 덜고 배곯지 말라고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필자를 머슴살이 보냈다. 훗날 어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남들 다 보내는 중학교에도 못 보냈는데, 기죽고 풀이 죽어 있을 아이를 어쩌자고 한 입 덜겠다고 머슴살이를 보낸단 말이냐. 그것도 바로 이웃 마을로…”라며 미안하신 마음을 표현하시곤 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야 했던 필자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주산을 배워뒀던 필자는 집주인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 집으로 들어간 후 과수원과 큰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집주인이 가끔 식사를 마친 필자에게 “김군은 잠깐 남아 있어라” 했다. 그리고 일꾼들이 나가면 주판을 주고는 장부책을 펼쳐놓고 숫자를 쭉 불렀다. 그러면 필자는 주판알을 굴리며 열심히 계산을 했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이 일을 통해 어린 나이임에도 집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사모님도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수북하게 담긴 흰 쌀밥이 필자 앞에 놓여 있곤 했다.
어머니는 평생의 한처럼 말씀하셨지만 그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어떤 환경이든 다 자기 할 탓이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자 3개월이 금세 흘러갔다.
하루는 점심 무렵 닭 모이를 물지게에 지고 닭장으로 가던 중 초등학교 친구와 마주쳤다. 먼발치에서도 친구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필자는 창피한 마음에 지고 가던 지게와 닭 모이통을 내동댕이치고 숨어버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친구가 부럽기도 했고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창피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도회지로 나간 필자는 주경야독으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고 마침내 수업료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필자를 머슴 보냈던 아버지의 처사를 두고두고 원망하셨던 어머니는 말끝마다 “네 아버지의 주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 주책(?) 때문에 살아야 했던 3개월의 머슴살이가 필자에게는 오히려 많은 힘이 되었다. 오늘 문득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그리고 부모님도 보고 싶다.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