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중에..” 미루다 못 보고 떠나보낸 친구
-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되돌아보며 여러 가지 후회를 한다. “나중에 만나자”라며 미루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 일, 부모님을 찾아봬야지 하고 마음만 먹던 일,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야지 하고 마음만 먹은 일 등등.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중에’란 말은 어쩜 실현될 수 없는 시간 약속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한 번 더 보자고 마음만 먹고 미루던 친구를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그를 허망하게 보내면서 “나중에”란 말은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치료 중 휴대용 인공호흡기를 차고 다니며 힘들어 했던 4개월 전쯤에 고인은 친구들의 카카오톡 방에 이런 문자를 남겼다. “친구들이여. 나는 더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작별 인사 남기고 가네. 그대들과 청춘을 함께 해서 행복했었고 지금까지 무척 즐거웠네. 이제 하직할 시간이 온 것 같아. 모쪼록 건강하게 사시다가 오시게. 그때 다시 당구 한판 칩시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지난 11월 9일 부음을 받았다. 한번 만나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일찍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의 부음을 받고 영정을 보며 후회의 눈물만 흘려야 했다. 가봐야지 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만났더라면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얼굴,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오르면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기련다. 용서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곧 용서를 구하리라. 죽음을 예상하고 친구들에게 하직 인사를 남겼던 친구를 떠나보낸 후회를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련다. 유명을 달리한 친구처럼 상대방은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 2019-12-27 16:49
-
- 배추머리 김병조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죠”
-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 2019-11-19 09:26
-
- 산야에 은둔했으나 창작욕의 화톳불은 활활!
-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좀 과한 예찬일지도.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예술은 현실의 벽을 으라차차 걷어차는 행위라는 점에서 위력적이다. 종교, 사상, 철학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창작이란 지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끔찍한 싸움이다. 거역할 수 없는 유령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진짜 예술가’의 경우에 말이다. 도예가 신상호(72). 웅장한 창의적 행보로 ‘거장’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사나. 예술과 맞붙어 무엇을 얻나. 도예란 흙과 불을 다뤄 도자(陶磁)를 만드는 장르다. 그러나 신상호의 작업엔 이미 형식이 없으며, 경계가 없다. 일찍이 전통 도예의 권위자로 부상했던 그는 무적함대, 또는 해적선과도 같은 거침없는 도발과 활보로 혁신적 현대 도예를 구현했다. 그의 작업은 진즉에 조각으로, 회화로, 심지어 건축 영역으로까지 대차게 확장됐다. 실험적 현대 도예의 전위이자 전사다. 신상호의 작업실 ‘부곡도방’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야산 자락에 있다. 45년째 이곳에 산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직을 박차고 나온 2008년 이후엔 일체의 외부 일을 작파, 붙박이 장롱처럼 이곳에만 틀어박혀 창작에 진력해왔다. 부곡도방은 살림채, 작업실, 전시장, 휴게실 등속으로 이루어졌다. 놀랍게도 건물과 공간과 사물의 거의 모든 게 작품이다. 학교 운동장처럼 널찍한 마당에 늘비한 대형 조각과 소조들. 건물의 내부는 물론 외벽 도처에 조직적으로 부착한 세라믹 작품들. 창작에 혼을 빼앗긴 한 남자의 일상적 관습이 어떤 식의 지독한 양상인가를 한눈에 알게 하는 풍경이다. 가슴 깊이 제 할일을 품은 자는 제 할일 외엔 관심이 없는 법. 그는 무위(無爲)로 구하는 정신세계에는 더더구나 관심이 없으니 앉으나 서나 작업에 분망하다. 산야에 은둔했으나 심중엔 창작욕의 화톳불이 활활! 45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어릴 적에 경험한 어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에겐 자연을 찾는 본능이 있지 않던가. 그게 간절하면 회귀할 수밖에 없다. 흙과 불을 다루는 직업적 특성상 산야에 사는 게 적합하기도 하고.” 과거 청년기엔 경기도 이천에 작업장을 두었다. 당시의 작업 내용은 어땠나? “현대 도예와 전통 도예 작업을 병행했다. 한국인으로서 전통에도 애정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뭘 하든 도예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이천에선 판매 위주의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 회의가 몰려들더라고.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자! 그런 생각으로 이천과 작별했다.” 국내외로 신상호는 도예의 첨단을 활주하는 작가로 알려졌다. 많은 작가가 시대의 첨단 트렌드에 천착한다. 그들과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 “미술은 새로워야 예술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나만의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주력했다. 단순히 신사조를 뒤따라가는 식의 첨단성과는 다르다. 남이 이미 시도한 걸 비슷하게 흉내 내는 방식, 난 그런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예술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날마다 눈뜨면 자동으로 다시 맞이하는 새아침과 다르다. 시대의 증상을 읽는 안목과, 고도로 발달한 직관과 센스가 합세하지 않고서는 구하기 힘든 질료다. 신상호는 실험정신이라는 갈고리로, 범속한 세상 징후들의 안과 밖에 감춰진 새로운 테마와 소재를 찍어내는 것 같다. 실험정신이라는 에너지의 배양을 위해 그는 많은 여행을 했다. 여행 견문이 안목과 관점을 갱신해주기 때문에. 충실한 독서생활 역시 그의 수칙이다. 지적 단련이 선행되지 않으면 창의도 돋지 않아서겠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은 진리다 나는 신상호의 작품에 쓰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토템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가 제작한 동물 두상(頭像) 시리즈물에서였다. 이는 기묘한 추상 도조로 형상의 압도적인 이색, 그리고 관람자에게 즉각 원초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감염력으로 탁월했다. 전대미문의 도예로 평가된 이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금도 장작 가마로 작품을 굽는가? “미술도 과학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가마 작업이 중요한 도예엔 과학이 붙어야 한다. 장작 가마를 고집할 일이 아닌 거다. 난 나무 가마를 가스 가마로 전환한 최초의 작가였다. 비난이 쏟아지더군.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반면, 국내에선 오히려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아웃사이더다. 그게 나의 강점이지. 뭐 국내건 국외건, 평판엔 관심 없고. 나름의 정직한 작업을 계속해왔다는 걸 자족할 뿐이다. 게다가 작가로서 충분히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교환교수를 하면서는 세계의 흐름을 보고 듣고 배웠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할 필요성도 깨달았지. 그러나 이미 배운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는 건 우습다. 다 놔야 하지 않겠나. 고정관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었던 걸 거듭 놔야만 새로 채울 수 있다는 얘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은 “예술은 사기”라 했다. 혹세무민이나 착취가 없는데, 예술이 어떻게 사기가 되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 그거 진리다. 일테면 미술시장을 보라. 장삿속에 이골 난 화상들이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지 않은가? 이건 세계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안목 없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라 사기가 더 쉽지. 이렇게 예술작품이 사기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 풍토. 그걸 꼬집는 데에 백남준 선생의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소호의 길거리에서 난 자주 선생을 만났다. 그는 늘 말했다. ‘나, 사기치러 가!’ 하하핫. 여하튼,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유일한 세계적 작가였다.” 어떤 기자가 왜 뉴욕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범죄가 많아서 좋다”는 백남준의 답이 돌아왔다. “사회가 썩고 인생이 썩어야 예술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화통한 백남준은 때로 돈에 시달렸다. 지구 전체에 이름이 났지만 현실이 그랬다. 무소유가 좋다지만 그건 이미 가진 사람의 허세일 가능성이 크다. 세사에 둔하게 마련인 예술가에겐 흔히 궁핍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백남준 선생이 값싼 고물 TV로 작업을 한 것도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폭넓고 깊이 있는 예술작업을 일관해 성공했다. 특유의 천재적인 쇼맨십과 타협적 기질 역시 그의 강점이었지. 돈 문제에서도 그런 강점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데, 난 그게 안 된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가?” “안 팔려. 죽겠어.” 왜지? “비싸서.” 화상들이 드나들 것 아닌가? “내가 있어 보여서일까?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 약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파고들 텐데 그렇질 않아서일 거다. 저놈은 빈틈이 없다! 그렇게 보는 거겠지. 물론 나는 강인하고 직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내 인생은 허점투성이다.” 작가란 고난을 자양으로 해 성장한다. 불편과 불안을 절호의 찬스로 여기는 게 진정 자유로운 삶일 테고. “불편은 맛이 있다. 어떻게든 해결하게 되는 맛도 괜찮고. 그런데 왜 모두들 이악스럽게 돈 하나만 좇나? 돈에서만 행복이 나오던가? 나이 든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 생긴 폐단이라 본다. 거듭 자신을 씹어 고통스럽게 반추해야 한다. 정체되면 썩을 수밖에 없다. 어떤 화가가 그러더군. ‘내겐 돈 버는 게 예술이다’라고. 야, 별게 다 예술이구나.” 불편과 고독과 고난, 이 모든 고통을 예찬할 일은 아니지만, 고통을 일부러 추구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는 좀체 길이 열리지 않는다. 진흙을 딛지 않고 피는 연꽃이 있으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만, 불편에 쫓긴 작가는 퍼뜩 빛나는 작품을 건져 올리기도 한다. 일상의 불편과 치열하게 맞서는 힘. 그게 신상호의 타고난 근성이자 예술혼의 토대일지도. 후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도예 창작이란 왜가리가 유유히 강을 건너는 일과 달라 최후의 기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가능한 행위다. 정신을 쏟아야 하며, 흙을 움켜쥔 손으로 고강도의 노동을 치러야 한다. 그러자면 강건한 체력이 필수. 의외로 많은 작가가, 체력에 기반을 둔 집요한 깡이 결과를 가른다고 말한다. 신상호 나이 어언 70대. 그러나 그에겐 체력 여부를 초월하는 갈증과 열망이라는 게 있다. “나이 먹어서도 해낼 수 있는 작업을 찾으면 된다. 작업이 나를 늘 들뜨게 하는 것이지. 작업 외에 다른 것엔 관심도 미련도 없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가 오후 4시까지 일을 한다. 단순한 나날들이 이렇게 흘러간다. 요즘은 친구도 없다. 그게 난 좋다. 사람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니까.” 예술가는 창조의 충동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으로 다른 사람과 구분된다. 그들은 상식이나 모럴을 넘나든다. 자의식도 강해 누가 뭐라 하건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내린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들은 권력에 꼬리치지는 않지만,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에 취해 스스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말하길, 예술가의 열정은 순전한 이기심, 즉 명예욕에서 추동된다고 했다. 당신을 추동해온 동기는 무엇이라 보는지. “내게도 그런 게 왜 없겠는가. 평생 자신과의 싸움으로 작품을 해왔지만 강한 명예욕, 그걸 떨치긴 어려웠다. 허욕이고 허영이겠지. 그런 군더더기를 죽기 전엔 다 깎아내고 싶다. 내가 다 옳은 건 아니다.” 별안간 보고 싶어지곤 하는 얼굴이 있다면? “없다. 예전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었지만 일부러 다 끊었거든. 그런 내게 작가들에게 흔한 무슨 일탈 같은 건 없었다. 염문을 뿌린 적도 없고, 아내와 불편한 관계에 빠진 일도 없다. 연애감정과는 다른 돈독한 정, 아내와의 사이엔 그게 있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알고 보면 당신은 참 품성이 선해! 아내가 그렇게 치켜세우면 나는 설렌다.” 이제 와 생각하자니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후회? 그런 걸 왜 하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참혹한 실패의 경험으로 오래 괴로운 적은 있었다. 또 하나 자인할 것은, 나와 주변과의 관계를 객관화해서 느긋이 관조할 만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교양을 결여한 흠, 그것이다. 난 지금도 싫은 사람과 마주앉기를 질색한다. 당장에 쫓아낼 지경으로.” 추방령을 다반사로 내린다는 일. 그건 아마도 내부에 서린 파시즘이라기보다 홀로 생태계를 이룬 사람의 특유의 수비 방식이겠지. 미술작업이라는 믿을 만한 벙커에 들어앉은 자존감의 표명일 테고. 신상호가 살기등등한 송골매는 아니지만, 창작에 취한 그의 냉정한 열정엔 으스스한 뭔가가 들어 있다.
- 2019-11-11 08:41
-
- 논골담길을 아시나요!
- 대부분의 여행지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혹은 맛있는 음식으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해 매혹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와 각종 체험으로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그렇게 대부분의 여행지는 오감의 쾌락으로 여행자를 기쁘게 해준다. 가을이 한창일 즈음 찾아간 곳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반적인 여행지처럼 감각의 만족만을 주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도시’였다. 마치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와 프랑스의 투르빌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그곳은 한반도에서 해돋이로 유명한 해오름의 도시 ‘동해시’다. 동해시 묵호진동의 ‘묵호등대 담화마을’은 동해가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묵호 등대를 중심으로 묵호항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등대오름길을 따라 올라가 바람의 언덕에 서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탈리아 북서부 라스페리아 지방에 있는 다섯 개의 해안마을 ‘친퀘테레(Cinque Terre)가 떠올랐다. 해안 절벽의 가파른 지형에 테라스를 갖춘 화려하고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집들의 마을 풍경과 지중해를 따라 마을이 이어진 산책로로 유명한 곳이다. 묵호 등대 담화마을은 오랜 세월의 담에 지나온 시간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려 여행자들에게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켰다. 겹겹이 쌓인 골목의 담벼락들은 저마다의 굵직한 사연을 여행자들과 함께 한다. 한적한 골목에도 자기만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의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느끼면서,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고 곱씹을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노스탤지어가 아픔이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원천이 된다. 화려한 구경거리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이 빚어낸 삶과 추억의 기억들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941년 개항된 묵호항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마을에는 4개의 길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묵호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골목이 주제인 ’논골 1길‘, 떠난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 찾아올 사람들 모두가 기억하고 희망하는 묵호와 논골담길에 대한 사랑이 주제인 ’논골 2길‘, 묵호의 옛 이야기와 추억이 담겨있는 ’논골 3길‘, 새로운 희망과 바람에 관한 이야기로 지역사람들이 참여한 ’등대오름길‘. 시간의 흔적들이 있는 골목길을 걷다 보니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가 생각났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정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발아래로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니 마치 어두운 배경 속에 밝게 처리된 여인의 나신을 그린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처럼 바다의 한정된 일정 부분만이 가을 햇살에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슬쩍 내 옆에 누군가 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과거에 대한 후회가, 또 한 모금을 마시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졌다. 결국,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현재를 위협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마을 앞 해안을 따라 2km의 거리에는 도시풍 카페와 횟집들이 즐비한 풍경이다. 모네가 끝없이 변하는 바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배운 프랑스의 투르빌 해변이 떠올랐다. 그곳의 싱싱한 해산물처럼 이곳 역시 동해 어업기지로 갓 잡은 싱싱한 활어를 즉석에서 맛볼 수 있다. 언젠가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한편 동해시에는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 공간이면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의미 있는 곳으로 “북평 민속시장”도 있다. 전국에 있는 다른 장터와 달리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영동지방 최대의 전통 오일장이다.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열리는 장으로 200년 전통의 장터다. 1796년부터 시작된 이 장터에 가면 짙은 향토색과 서민들의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동해시는 이렇게 오래된 흔적들을 고택의 기왓장처럼 가지런히 쌓아놓은 느낌을 주는 도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사람들과 담과 골목의 이야기들이 넓디넓은 동해 옆에 살포시 앉아있다. 그래서 동해시는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설렘이 지속하는 특별한 곳이다.
- 2019-11-04 15:38
-
- 70대 보디빌더 임종소, 잠자던 무한 가능성, 일흔 넘어 깨어나다
- 이보다 더 화려한 등장이 또 있을까. 건강미 발산하는 젊음의 무대를 요즘 말로 제대로 씹어 먹었다. 그저 걷게만 해달라는 심정으로 체육관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박한 소망을 빌었을 그녀는 15cm 유리구두 위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제25회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 피규어 38세 이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임종소(林鍾昭·75) 씨를 만났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하는 살맛나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방송을 보면 유명인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살을 뺀다거나 피트니스대회에 나가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모습을 종종 접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때 잠시뿐. 화제성은 쉽게 가라앉고 만다. 하지만 지난 5월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이하 WBC)에 출전했던 75세 보디빌더 임종소 씨의 인기는 각종 매체를 타고 꾸준하게 전파되고 있다. 환한 미소에서 건강한 에너지와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제 모습이 저 처녀 때 성격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활달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부평에서 상업을 하셨는데 둘째 딸이었던 제가 장사를 거들었어요. 저 시집갈 때 친정에 가게를 사주고 온 사람이라니까요. 75세,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싱그럽고 통통 튀는 목소리를 가진 매력녀가 불과 몇 달 전 관중들 앞에서 멋진 근육을 드러내며 완벽한 포즈를 취하던 임종소 씨다. 그녀를 만난 시간은 오후 3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하고 왔어요. 주중 3시간씩 오전 11시 40분부터 오후 2시 40분까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요. 그 이후에는 체육관에 와서 운동하거나, 오늘같이 인터뷰가 있으면 약속 잡거든요. 저는 하루에 딱 3시간만 일하면 됩니다. 별거 없어요. PT(개인강습) 비용 내려고 다니는 거니까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딸네 집에서 생활한다는 임종소 씨는 자녀들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어서 돈 쓸 데가 생기면 필요한 만큼 벌어서 쓴다. “처음 일하러 갈 때 나이를 살짝(?) 속였어요. 한 달쯤 되어 세금 정산을 한다고 해서 신분증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더니 당황하시더군요. 그래도 한 달 동안 좋게 봐주셨나봐요. 1년 넘게 다니고 있으니까요.” 될성부른 보디빌더 알아본 관장님 그녀가 피트니스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허리 협착증 때문이었다. 맷돌을 다리에 맨 것처럼 몸이 늘 무겁고 힘들었다. “땅에 발을 디디면 미칠 듯이 아프더라고요. 뼈가 내려앉으니까 못 걷는 거예요. 제가 에어로빅을 35년 했어요. 강사증만 없을 뿐이지 안 해본 동작이 있겠어요?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 잘 걷지 못해 집에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봐요. 삶이 끝난 거잖아요. 진지하게 전동 휠체어를 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병원을 다녀도 잠시만 반짝 좋아질 뿐이었어요.” 담당의는 근육이 약해졌으니 근육강화운동을 해보라며 권했다. 마침 에어로빅 학원에 가던 길에서 봤던 체육관 입간판이 떠올랐다. “예사로 쳐다보고 다녔는데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맞춤운동, 재활운동이라는 문구가요. 곧장 체육관으로 가서 의사와 했던 얘기를 박용인 관장님께 했어요. 의사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등록했어요. 그날 오전 11시쯤 체육관으로 들어갔는데 PT 받을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더군요. 두 시간 기다려 바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정말 절실했어요. 이거 아니면 죽는다, 여기서 못 고치면 절름발이가 되거나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관장이 권하는 훈련을 믿고 했다. 협착 증세는 한 달 만에 좋아졌다. “휠체어를 타는 상상까지 하며 막막했는데 좋아졌잖아요. 정말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운동했어요. 일주일에 3회 받던 코칭을 2회로 줄이고 한 3개월쯤 됐을 무렵, 관장님이 ‘보디빌더 한번 해보세요’ 하더라고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러냐며 웃어넘기려 했는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작년 8월쯤이었어요.” 박용인 관장은 보디빌더 경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 심사위원 등으로 꾸준하게 활동해왔다. 임종소 씨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뜻이다. “관장님이 저처럼 근육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어요. 제 근육이 예쁘대요.(웃음) 저는 옆에서 부추기면 진짜 그런가 하고 또 따라요. 시니어 부문에 출전하면 무조건 입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입상을 떠나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여러 사람들한테요. 나이 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장님도 진짜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비키니는 잘못 없다 집중적으로 근육운동을 하면서 대회 준비를 하는데 비키니가 말썽이었다. 대회에 비키니를 입고 출전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비키니를 입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관장님이 부천시장기 제7회 부천보디빌딩 및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한다고 이미 등록을 해버렸더라고. 비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어요. 보석이 박혀서 그런지 50만 원에서 70만 원이나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거 살 능력 안 된다고 대회 출전 못하겠다고 했더니 예전에 출전했던 분의 옷을 빌려오셨어요.” 살아생전 입어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본 비키니를 입고 사람들 앞에 서야 했다. 옷을 가져다 놓고 안 입겠다고 이틀을 실랑이했다. “출전할 만큼 몸이 다져졌으니 나가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관장님이 그랬어요. 등록도 해버린 상태이고, 그 상황에서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대신 15cm 유리구두는 제가 샀습니다. 집에서 비키니를 입고 연습했어요. 우리 손녀가 하나는 대학교 2학년이고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할머니 멋쟁이’라고 ‘예뻐 죽겠다’고 해요. 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빠가 계시면 어림도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차피 시작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줬어요.” 첫 대회는 자유포즈와 지정포즈를 도대체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떨리는 마음으로 치렀다.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가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인터뷰를 하자고 했어요. 어떻게 나오시게 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관장님이 권유해서 나왔고,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입상은 못했는데 인기는 좋았어요. 그러고 나서 20일 후에 WBC대회에 또 참가했어요. 이미 벗은 거 한 번 더 못 벗겠느냐고 했죠.(웃음)” 규모가 큰 대회이기도 했고 첫 대회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자유포즈는 인터넷을 검색해 참고하면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포즈로 만들었다. 자다가도 연습할 정도로 자세를 외우고 집중했다. 그 결과 한창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2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지금이 가장 화려한 시절 WBC대회 이후 각종 매체에서 임종소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하고 보도를 이어갔다. 영국 BBC에서도 70대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건강한 한국 시니어 여성이라며 소개했다. 대회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매체와 만나 영상을 찍고 인터뷰에 응해주는 일이 많아졌다. 그 와중에도 식당에 잠깐 나가 용돈을 벌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평일에는 관장님이랑 운동하고, 토요일에는 모델 워킹 연습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실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더 있어요.” 임종소 씨는 35년간 했던 에어로빅을 나이 더 먹으면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4~5년 정도 됐어요. 에어로빅은 격렬하잖아요. 다리 아파서 못 뛰게 되면 찬찬히 할 수 있는 춤을 춰야지 싶어서 배우고 있습니다. 왈츠, 탱고, 자이브 등을 춥니다. 함께 배우는 친구들이랑 소셜 모임에도 가고요. 남녀가 함께 추는 거라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우리들은 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노후를 즐겁게 보내자 했습니다. 저는 왈츠가 좋아요. 제일 멋있는 거 같아요. 매일이 즐겁고 바빠요.” 에어로빅과 사교댄스를 배웠다는 얘기에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 WBC대회 영상 속 임종소 씨의 동작이 유연하게 리듬을 타면서 연결되는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 그저 1년 준비해서 갑자기 등장한 반짝 스타가 아니라 꾸준하게 관리해온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댄스를 위해 운동했지. 그래요, 맞아요. 건강을 잃으면 댄스고 뭐고 뒷방 늙은이 되는 거예요.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제가 좀 스타의식이 있나봐요. 많은 사람이 저한테 집중한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즐겼습니다.” 임종소 씨는 결혼한 뒤 아이들과 남편, 가족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다.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지, 누가 대신 안 챙겨주잖아요. 효자, 효부가 있어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나이 먹었다고 꿈을 접지 않았으면 해요. 자신감 잃지 말고, 뭐든 할 수 있으니 도전하자,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합니다.”
- 2019-10-22 13:40
-
- 옛 일터로 리턴! 한국지엠 게스트 엔지니어 최찬식 씨
- 후배들에게 넓은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인생 전반부의 정열을 바쳤던 첫 직장과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시니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역전의 용사는 다시금 회사로부터 부름을 받고야 말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른 곳으로의 항해 대신 회귀를 선택한 최찬식(59) 씨를 만났다. “정년 3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습니다.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그땐 기분 좋았죠. 얽매이는 생활 안 해도 되니까요. 인문학 강의도 듣고 요가와 요리도 배우고 알차게 살았습니다. 바빴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옆 카페에서 만난 최찬식(59) 씨는 지난 5월 마침표를 찍었던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명예퇴직하고 또다시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6년,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최찬식 씨는 대구에 있던 대우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 말 대우국민차 공장이 있던 창원으로 사간전보를 갔다. 1996년 4월 부평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외 자동차 공장 건설사업 분야에서 일했다. “인도, 이란, 이집트, 베트남, 태국 등 세계 각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많이 지었어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다 만들어야 했어요. 그 차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있는 설비를 현지에 가서 설치해야 했어요. 1998년까지는 참 좋았죠.”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부동의 1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아성을 대우차가 흔들었다. 이렇듯 대우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지으며 사업의 규모를 키웠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바로 IMF 금융경제위기. 해외 사업을 통 크게 벌였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중에서 자동차 사업의 인수 합병은 국가적 충격이었다. “그때 인생이 조금 힘들었어요. 월급이 3개월 정도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엠(General Motors) 사가 대우자동차를 흡수하면서부터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엠 공장에 자동차 설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현지에 나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양산할 때까지 관리했습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이 되면 철수하고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 2010년까지 해외 지사에서 일한 이후 팀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해외 사업을 지원했다. “물론 중요한 시점에는 공장을 짓고 있는 현지로 날아갔죠. 외국은 20~30군데 다녀온 것 같아요. 작년 3월 부장까지 달고 회사생활을 마쳤어요. 끝낼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인으로 1년 살기 회사를 관두고 한 달 남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좀 쉬었는지 몸이 근질거려 작년 5월부터 듣고 싶었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휴식을 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료증이 쌓였다. “5월부터 바삐 지냈습니다. 수료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닌데 연속으로 듣는 것도 있지만 두세 번만 들어도 수료증을 주는 데가 있다 보니 스무 개나 되더라고요. 중국어 공부도 하고, 재테크 관련 수업도 들었습니다.” 한국지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잠깐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지혜의 밭’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한 달 정도 기획과 관리를 도맡아 일했다. 설립한 지 1~2년 된 기업이었고 공연 예술 쪽 일을 하는 사업체였다. “제 입장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공장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대표는 예술만 아는 분이었죠.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팁을 조금만 줘도 무척 감사해하더라고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다고. 대표와 최찬식 씨가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하고 열정을 쏟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회사에 3~4명만 있어도 상황은 좀 나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지금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업의 수익 모델이 좋아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말에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퇴역 베테랑에게 날아온 SOS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한국지엠에서 연락이 왔다. 공장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해 달라는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이었다. 함께 일할 조직은 이미 구성돼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다시 회사에 들어와도 될까 싶더군요. 회사 측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존 기업에 대한 의리가 있잖아요. 다시 회사로 돌아갔더니 먼저 온 사람 몇몇이 있었어요.” 한국지엠 입장에서 봤을 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시간과 물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채용보다는 기존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쉬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직장 상사는 제가 퇴직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관계가 좋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저를 불렀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있었다면 부르지 않았겠죠. 회사가 시대의 풍파 속에 쓸리고 깎이기는 했지만 32년을 한결같이 다닌 오랜 일터였습니다.” 스스로도 인복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단다.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은인을 만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팀워크가 좋았고 헤어질 때도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워커홀릭! 좀 쉬셔요 “명예퇴직을 결심했을 때 조건이 좋았긴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30년 이상 하니 쉬고 싶었습니다. 또 들어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도 제가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찬식 씨가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에 대해 제일 반대하는 사람은 딸이다. “쉬려고 나왔는데 왜 계속 일을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사회적기업에 다닐 때도 출근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족히 걸렸어요. 딸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언젠가는 사회적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제가 직장생활에서 했던 경험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도와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온 것 같다고. “이런 얘기하면 우리 딸이 뭐라고 하냐면 ‘아빠는 못 쉬어, 두세 달 쉬면 또 뭔가를 할걸!’ 하고 말합니다.” 야심차게 은퇴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제2인생을 시작한 최찬식 씨. 시니어 전문가로서 다시 돌아간 새(?) 직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멋진 삶을 찾아가기를 기원한다.
- 2019-10-11 10:05
-
- 김한승 국민대 교수, 아무개의 인생 좌표는 4차원 지도 속에 있다
- 김한승(金漢承·52) 국민대학교 교수는 저서 ‘나는 아무개지만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다’의 여는 글에서 인간을 ‘평범하게 비범한’ 존재라 일컬었다. 이는 ‘평범하지만 비범하다’거나 ‘평범하고도 비범하다’는 말이 아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개개인은 저마다 비범하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그러하기에 인간의 비범함은 곧 평범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해서도, 차별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 그는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기 위한 토대로 ‘인류 원리’라는 다소 낯선 주제를 끌어왔다. 김한승 교수의 책을 읽은 이들의 감상평에는 공통된 선입견이 있었다. 대부분 제목만 보고 자존감에 대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치유서 정도로 여겼다는 것이다. 또 감성적인 위로를 건네리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논리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위안을 얻게 돼 흥미로웠단다. 물론 책에는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지만, 그 내용의 근간으로 삼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는 천체물리학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이러한 반응을 낳았다. “인류 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적당한 중력, 태양과의 적정 거리,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온도, 육지와 바다의 알맞은 비율 등 수많은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주 희박한 확률 속에서 각자의 특정성을 갖고 우주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비범한 존재’라 할 수 있죠. 다만, 이 기적 같은 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일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보는 거고요. 이렇듯 인류 원리는 우리가 평범하게 비범하다는 점에 착안해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게 합니다.” 아무개를 아무나로 여기는 ‘갑질’ 미국 소설가 마가렛 딜란드는 “‘아무개(somebody)’를 ‘아무나(anybody)’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nobody)’ 없다”고 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령 ‘아무개를 사랑한다’와 ‘아무나 사랑한다’ 등으로 대입해보면 그 뉘앙스가 확연히 드러난다. 책 제목 역시 이러한 의미를 살려 주제를 드러냈다. “아무개는 어떤 특성을 지녔지만 그것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나는 아예 그런 특성을 배제해버린 상태입니다. 때때로 타인을 아무개가 아닌 아무나로 여겼을 때, ‘갑질’ 같은 만행이 일어나곤 하죠. 우리는 상대를 아무개로 바라보는 동시에, 나 역시 그들에게 아무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근대철학에서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길 권하죠. 이는 달콤한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인류 원리의 관점에서 ‘나는 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즉 ‘아무개’라는 연대성을 통해 궁극적인 위안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인류 원리의 관점을 자칫 모든 존재를 획일화한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각자 다양한 특성을 가진 존재임이 같다는 것이지, 애초에 두 존재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 원리는 평범함과 비범함,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볼 기회를 마련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정확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단순히 주소처럼 공간적 좌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나는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시점에 살고 있는가?’,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과 나중에 태어날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나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행복할까?’ 등 삶과 죽음, 인류, 자아의 세계를 아우르는 훨씬 넓은 차원의 질문의 답을 요구하는 일이죠. 이때 자신의 위치를 짚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답을 찾으려면 공간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까지 그린 ‘4차원 지도’가 필요하지요. 물론 정확하고 자세한 4차원 지도를 인간은 손에 쥘 수 없겠고요.” 성공적 인생의 클라이맥스 앞서 언급한 4차원 지도에는 시간의 차원이 포함된다. 김 교수는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중장년일수록 ‘과거의 나’와의 연결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체된 도로를 지나는데 알고 보니 길 위에 떨어진 매트리스가 원인이었다고 가정해보죠. 누군가 매트리스를 치운다면 그의 선행에 감탄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지나칠 겁니다. 본인이 치른 비용은 이미 허비한 시간이고, 내가 매트리스를 치워 생겨날 이익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테니까요. 즉 매몰비용이라 간주한 거죠. 그러나 이는 현재 겪고 있는 일과 앞으로 겪게 될 일만을 염두에 둔 결과입니다. 비록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직접 매트리스를 치우고 스스로 보람을 느낀다면, 과거의 시간을 더 이상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짜증으로만 가득했을 그 시간을 훨씬 나은 경험으로 바꿔준 셈이죠.” 이처럼 대개 과거는 지난 일이고, 미래를 위해 현재에 충실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이러한 태도는 과거 자신의 노력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과거의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과거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일 때문에 후회하는 중장년이라면 이러한 태도 변화가 더욱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삶의 비극(?)일 수 있는데, 젊어서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많이 하지만 그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고, 나이 들어서는 혜안은 있지만 선택의 기회가 적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그때 이렇게 할걸’ 하며 때늦은 후회를 하곤 하죠. 하지만 매트리스 사례처럼 어떤 선택이 실패라고 판단할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노력을 얼마나 보람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결과는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는 반대로 과거의 성공 기억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어떤 상황에도 자신의 성공 방식만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인데, 자칫 ‘꼰대’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후에는 빛을 내야 할 과거, 잊어야 할 과거 등을 구별하면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잘 엮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령 음악회에서 교향곡을 듣는데 마지막에 이상한 소음이 발생했다면, 사람들은 이전의 좋은 경험은 다 잊고 결과적으로 망친 무대라고 판단합니다. 결국 클라이맥스 부분이 모든 것을 좌우해버리는 거죠. 그만큼 우리 인생 스토리도 뒷부분이 주는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장년은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죠. 실패, 후회,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일지라도, 현재의 노력을 통해 그 의미를 충분히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 2019-09-25 10:31
-
- “윷판에 두 번째 인생을 던졌습니다”
-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 한 모퉁이에 윷놀이 연구소가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긴 윷판이 부착돼 있고 박스와 작은 선반마다 윷놀이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랑 가까워서 이곳에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월세도 싸고요.”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많이 하는 조광휘 소장은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시원한 물과 커피를 내놓았다. 그저 명절이 되면 누군가 어디선가 꺼내 달력 뒤를 펴서 도, 개, 걸, 윷, 모 윷판을 매직펜으로 그려놓고는 동전 혹은 바둑알 색으로 편을 나누어 윳놀이를 한다. 언제부터 윷판 그리는 것을 기억해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잘도 그린다. 윷판 위에 말을 올리고 놓는 것도 수준급. 다들 알고 있는 이 윷놀이에 무슨 매력이 어떤 새로운 점이 있어 윷놀이 연구소까지 열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3년생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KB국민은행에서 27년 6개월 동안 일하다가 2017년 희망퇴직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윷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그가 회자될 때 불리는 직함은 바로 우리나라 1호 윷놀이전문강사(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 전문강사 양성과정 인증). 30년 가까이 고객 응대하던 친절한 행원이 한판 흥겨운 윷놀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뭘 좀 준비하고 회사 밖을 나왔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입행할 때 130명이 들어갔는데 현재 29명이 남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많으면 빨리 퇴직하더군요. 그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들도 회사생활을 마감하고요. 지점장이 안 된 사람들은 오래 근무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아오던 임금의 반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하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퇴직을 하는 거죠. 팀원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 사연 때문에 근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지점장은 아니고 팀원으로 퇴직했습니다. 굳이 진급 못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상급자에게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웃음)” 은행의 지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영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아련하기만 했다. 어제까지 선배 대우 잘해주던 후배도 임금피크제로 보직이 변경된 선배에게 색안경 끼고 행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곳에서 일해야 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희망퇴직도 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거든요. 특별 퇴직금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니까 60세에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과도 같은 직장을 박차고 나왔으니 솔직한 마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다니면서 땄던 자격증은 금융기관이 아니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새 삶을 살려면 옛것을 버려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시험도 보러 다녔습니다. 백세시대이다 보니 제가 노노(老老)케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일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자격증의 필요함을 느꼈다면 현직에 있을 때 땄겠지만 그때는 조직에 충성하기도 바빴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되어 시간이 많아졌다지만 자기계발하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 많은 직종이기도 하죠. 돈을 다루고 고객을 대하는 일이요. 지금은 비대면이 많지만 저는 온전하게 대면하는 은행원의 삶이었죠. 아무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생각한 것이 후회스럽긴 합니다.” 은행 생활에서 윷놀이를 발견하다 윷놀이에 대한 관심은 은행원 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 있을 때 서무파트 담당을 많이 하다 보니 야유회나 체육 행사 계획을 도맡게 됐다. “1박 2일 혹은 당일 코스로 계획을 짤 때마다 윷놀이를 포함했습니다. 소통 놀이로요. 은행에 팀이 4개였는데 토너먼트로 윷놀이를 하면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사람들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퇴직 후 보통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실질적인 구직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부에서 인가한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공덕동에 있는 노사발전재단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융전문강사 양성과정이 있었어요. 처음 1주 과정을 마치고 나니 저더러 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스피치를 준비할 때 재무관리, 은퇴설계, 노후관리 등을 대부분 고르더라고요. 저는 금융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윷놀이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마이크 잡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50세 넘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남들 앞에서 뭔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금융전문강사 강습을 받고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신경써보지 않았던 것을 배웠어요. 윷놀이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잘했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 심화과정 있다고 해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1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윷놀이가 주제였다. 반응이 또 좋았다. “15분 스피치 마치고 나서 며칠 후에 노사발전재단 강원센터에서 2시간 강의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2017년 1월에 퇴직했는데 그해 8월 윷놀이로 첫 강의를 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에 강사로 서게 됐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강사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윷판에 우리 역사와 삶을 담다 처음에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강의할까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말을 놓는 윷판에는 29개의 밭이 있습니다. 꺾어지는 곳은 모퉁이 밭이라고 해요. 윷판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북두칠성이기도 하고, 땅위의 밭이기도 합니다. 윷판을 골똘히 보면서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인터넷 검색으로 동서남북을 잡아 배치해서 윷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와도 접목했는데 그게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였어요. 그분들 일대기의 키워드를 윷판에 담았어요.” 윷판은 세상의 이치와 역사, 지도, 절기를 적절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였다. “첫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습니다. 스토리를 담은 윷판을 제작해 윷놀이 세트로 17개나 출시했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데 교육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주문받아서 납품해야 해요. 기자님 가시면요.(웃음)” 윷놀이연구소의 든든한 조력자는 바로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금융전문강사 과정을 들었던 동기들이라고 했다. 과정을 모두 이수한 13명 중 10명이 윷놀이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노인대학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 가면 200에서 300명 정도 되니까 혼자 가서는 감당을 못해요. 연구원 분들이 같이 가서 윷놀이 심판도 하고, 진행도 하십니다.” 물론 강사비가 발생하면 함께 나눈다. 앞으로 윷놀이 관련 강사 자격증도 만들 생각이다. “SNS에 윷놀이 전문 강사라고 띄워놓았는데 딴지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 보니 제가 1호가 맞나봐요.(웃음) 인터넷을 쭉 훑어봤는데 예전에도 윷놀이가 너무 좋은 전통놀이니까 판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분이 좀 있었나봐요.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니 중도에 그만두셨더라고요.” 윷놀이판을 벌여놓았으니 할 일이 많기도 많다. 우리 전통놀이라고는 하지만 윷놀이에 관련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 “구한말이던 1895년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의 놀이를 정리해서 쓴 ‘한국의 놀이(Korean Game)’에 보면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이를 반박하는 논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윷놀이가 인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인도에도 윷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동물 뼈로도 많이 하고요. 윷놀이는 원래 조개로 했는데 고동으로도 할 수 있어요. 제대로만 정리하면 윷으로 대단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을 제대로 만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하는 조광휘 소장. “몰라요. 윷에 미쳤습니다. 하루가 정말 즐겁게 갑니다. 일단 윷놀이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옛날에도 우리와 함께했고 먼 미래에도 남아 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며칠 전에 윷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천문도에 대해 강연하는 80대 강사를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도 나이 들어서 강의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그때 딱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안 본다. 윷놀이만 보자. 은퇴하고 오십 훌쩍 넘어 발견한 제 인생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윷입니다.”
- 2019-09-06 11:08
-
- 이근후 명예교수 "하루하루 쌓은 재미가 인생의 격을 높인다"
- 2013년 이근후(李根厚·85) 이화여대 의과대 명예교수가 펴낸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4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당시 책의 서두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했던 이 교수. 그러나 최근 저서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서는 시력이 나빠져 컴퓨터를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상실감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냈다. 이근후 교수는 오래전부터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상기했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어떤 고통의 상황에도 그것을 견뎌낼 만한 즐거움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었다. “컴퓨터로 해오던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 시력이 떨어져 이제는 못하게 됐어요. 청탁받은 원고들도 있던 터라 난감했죠. 할 수 없이 대학생 손주들에게 내가 구술한 것을 타이핑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르바이트로 시급도 챙겨줬고요. 손주들은 용돈벌이이든, 할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어서든 나름의 이유로 오겠지만, 그 핑계 삼아 아이들과 대화하니 좋습니다. 시력의 상실은 고통스럽지만, 그 슬픔을 손주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즐겁게 달래고 있어요.” 이 교수는 삶의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앞만 보고 살아왔다’고 토로하는 중장년 세대의 경우 ‘즐기는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매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이 교수는 ‘야금야금 실천하기’를 권했다. “우리 중장년 세대는 삶의 의미를 직업을 통해 찾아왔기 때문에 은퇴와 함께 큰 혼돈과 상실을 경험하게 되죠. 이때 덜 휘청거리려면 다채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 좋아요. ‘이 나이에 뭘 하나’ 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도 여든이 넘어 시작한 취미가 꽤 있어요. 뭐든 좋아하는 만큼만 즐기겠다고 마음먹으면 부담이 없죠. 취미를 찾고도 실천이 없으면 초조하고 머리만 복잡해지잖아요. 여유로운 마음으로 야금야금 실천해보세요. 가랑비에 옷 젖듯 점차 즐거운 일들이 눈에 띌 겁니다.” 노여움과 원한에서 벗어난 자유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펴낸 후 이 교수는 줄곧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살았느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언제 즐겁게 살았다고 했나,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지”라고 답했단다. 비슷한 편견(?) 중 하나는 그를 ‘무한 긍정의 아이콘’으로 바라보는 것. 이 교수는 “누구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게 마련”이라며 “다만 화가 나는 상황이라도 크게 노여워 않고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이중적인 게, 나이 든 거 몰라주면 서럽고, 노인 대접받기는 싫고 그래요.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나이 들수록 ‘노여움’이 생기게 되죠. 가능한 한 즐거운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화내고 후회하며 사느라 인생의 격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잖아요. 노여움에 갇혀 있는 상황은 자신을 애먹이는 일이에요.” 이 교수는 ‘노여움’과 더불어 나이 들수록 털어내야 할 감정 중 하나로 ‘원한’을 꼽았다. 흔히 원한은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해결되리라 여기지만, 그는 진정한 용서란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이뤄진다고 말했다. “남을 용서하는 건 반푼어치 용서입니다. 한 지인이 자신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많았는데, 다 용서했다고 말하더군요. 학창 시절 어머니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자신에게 소홀했다는 게 이유였죠. 저는 그건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했어요. 어머니에 대한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머니를 미워하는 맺힘이 내 마음에 있었다는 그 자체까지 용서하고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었죠. 온전한 용서는 곧 자유를 줍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돼야 비로소 편안한 노후를 살아갈 수 있고요.” 마지막 밥 한술처럼, 맛나게 살기 이 교수는 노여움, 원한 등 부정적인 감정을 슬기롭게 승화하는 방법은 ‘유머’라 일컬었다.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 소개된 그의 ‘팔순 기념일’ 일화에서도 그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80년 세월을 살아왔는데 생일 하루만 챙기기엔 아깝더라고요. 사람들 불러놓고 비싼 밥 먹으면서 형식에 얽매이는 잔치는 더욱 의미 없다고 느꼈고요. 팔순 핑계로 1년 내내 소중한 사람들을 따로 만나 함께 추억하고 감사를 나누고 싶었죠. 그렇다고 ‘팔순이니까 만나자’ 하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헤어질 즈음 ‘사실 오늘이 내 팔순이야’라고 얘기했어요. 그 해가 내 팔순인 건 맞으니, 거짓은 아니잖아요.(웃음) 살면서 돌, 결혼, 환갑, 칠순… 그렇게 따져보니 나를 위한 잔치가 얼마 없네요. 몇 안 되는 기념일까지 지루하게 보내지는 마세요. 찾아서 누리려 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늘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 그가 계획하는 다음 기념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 교수는 아직 뚜렷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상상 중인 일이 있다고 귀띔했다. “아는 선배 교수가 출판기념회에서 ‘와주셔서 고맙다. 내가 여러분에게 살아생전에 받는 문상으로 이해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죽으면 나는 모르는 거잖아요. 해외 TV 프로그램 중에 주변 사람에게 가짜로 자신의 부고를 알리고, 장례식을 몰래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런저런 반응을 보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에서 착안한 건데, 아직 말은 못했지만, 친한 선배에게 서로 조문을 써서 한 번씩 읽어주자고 하려고요. 죽은 사람은 들을 수 없으니 그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살아 있을 때 잘하자 이거예요.” 그는 끝으로 “여생이 짧다고 느낄수록 현재의 소소한 재미를 마음껏 누리길” 당부했다. “힘들었던 일도 ‘지나보니 즐거웠어’라고 느끼곤 하죠. 그러나 그건 젊을 때 이야기예요. 나이 들수록 ‘지나보니’가 어려워요. 그래서 그날그날 재미를 찾아야 합니다. 죽음은 당연히 두렵죠. 그러니 그 불안을 이겨낼 정도의 즐거움이 있어야 해요. 젊어서는 쌀 한 가마니 가득한 듯한 인생을 살았는데 그 쌀을 아무 생각 없이 퍼먹다가 이제 바닥이 보이니까 ‘아차’ 싶은 거죠. 우리가 마지막 밥 한 숟가락 조금씩 아껴서 맛있게 먹을 궁리 하는 것처럼, 남은 인생도 맛나게 잘 나눠 먹는 재미를 찾아보세요.”
- 2019-08-12 08:39
-
- 불효막심한 애제자 N 군에게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먼저 떠난 제자 N 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N 군, 그간 잘 있었나. 자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 전 자네 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던 때였구먼. 그리 서둘러 떠날 줄 알았으면 고급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 걸 후회가 되네. 이젠 먼 세상에 있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겠으나 위로와 후회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네. 제임스 힐턴의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제자들이 학교를 떠나도 칩스 선생에겐 앳된 제자들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제자들의 생장점은 멈추고 영원히 학창 시절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네. 그렇듯이 친애하는 제자 N 군 자네도 팔팔한 청년 시절 모습으로 내 기억에 살아 있네. 자네를 처음 본 것은 밀양 낙동강변 유천 소풍 때였네. 선글라스를 쓰고 풀밭에 누워 있던 모습이 마치 알랭 들롱의 현신 같았네. 우리 과에도 저런 멋진 청년이 있나 싶었지. 그 도도하고 거만하기조차 한 자네가 가장 친애하는 제자로 남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네. 그날 자네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지. 내게 자꾸 권하던 막걸리 덕분에 경부선 열차 추돌사고를 면한 기억이 나나? 수십 명의 인명 사고가 난 바로 그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자네가 권해서 마신 술 때문에 결국 다음 열차를 타고 말았지. “선생님 한잔 드시고 강물처럼 흘러가입시더.” 그 절묘한 표현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신 술 덕분에 결국 기차를 놓치고, 사고를 면했지.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자네는 인정도 많고 풍류를 아는 멋진 학생이었네. 넉넉지 않은 향토장학금으로 동기들,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인정을 베풀었지. 덕분에 등록금까지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들었네. 아마 대구대 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자네의 밥 한 끼, 술 한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살아 있는 산타요, 후원자였지.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지. 학과 행사에 빠지면 학점 제한까지 있었건만 자네는 그날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그리고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지.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었네. 자네 덕분에 나는 공부하는 학자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네. 1982년 여름부터 거창 산골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 자네가 소개해준 거창 할머니 집에 머물며 많은 글들을 썼지.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대부분 고향이 그곳이네. 선생님 영양보충 해준다며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그 까만 봉다리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네. 그 속엔 늘 소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지. 거창에서 위천까지 수십 리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내가 건국대로 옮긴 후에도 매년 여름마다 거창을 찾아가곤 했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그럴 때마다 자네는 잊지 않고 극진히 대해주었지. “선생님 내가 돈 벌어 별장 하나 마련하겠슴더. 그때까지 기다려주이소.”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휠체어를 탄 불구의 몸으로 사업에 정진했지. 장애인이 된 뒤에도 까만 봉다리는 계속 배달되었고. 한번은 내가 머무는 방을 훤하게 도배까지 해놓았더군. 자네의 세심한 배려 지금도 감동이네. 서울 올라갈 때는 창고에 묻어둔 양파며, 밤, 홍당무 등 귀한 농산물을 차 안에 하나 가득 실어주곤 했지. 40년간 여름마다 거창을 빠지지 않고 간 것은 결국 자네의 훈훈한 인정과 추억 때문이었네. 어느 날 한밤중에 자네 전화를 받고 나도 울었네. 우연히 MRI 사진을 찍다가 학창 시절 교통사고 때 생긴 어깨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었지. 그것이 신경을 짓눌러 평생 불구의 몸이 된 것이고. 그 사실을 전하며 통곡하던 자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 그 뼛조각 하나가 자네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인생이 그런 건가보네. 그러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지. 사업 실패도 무슨 보증을 잘못 서서라고 들었네. 결국 사람 좋아하고 쉽게 믿는 자네의 성품 탓이었네. 사업이 망하자 자네는 주변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혼자만의 고립된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지. 그렇게 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통과 절망의 세월, 자네는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냈네. 그리 많던 친구들, 믿었던 친구들 다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지. 그런 게 현실이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삭막한 인간관계. 그 배신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나 역시 부끄럽고 죄스럽네. 방문은 고사하고 자네가 좋아하던 책 한 권, 시디 한 장도 못 보내준 게 한스럽네. 그렇게 신병과 외로움을 초인적으로 버티다가 육십 고개에 들어서자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불구의 몸이 된 그때부터 30여 년의 세월, 홀몸으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섬에 갇힌 4년의 세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그 세월을 홀로 쓸쓸히 지키다가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부고 소식도 이미 땅속에 묻힌 지 반년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됐으니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작년에 공원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해 소주 한잔 나누지도 못했네. 그저 자네가 묻혀 있을 만한 무덤가에서 “문식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불러본 게 전부였네. 내 목소리 들었는가.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면 반대로 신제자(臣弟子)도 일체일 것이네. 스승보다 먼저 떠난 제자는 불효자인 셈이지. 은사인 내가 이리 살아 있는데 먼저 세상을 하직하다니 어찌 그리 무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천하의 불효막심한 제자가 됐지만 자네는 40년간 교단생활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였네. 자네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들고 오던 까만 봉다리, 그 모습으로 자네를 영원히 기억하겠네. 칩스 선생은 많은 제자를 세계대전에서 잃었지. 하지만 그는 기억 속에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믿었네. 자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은 것이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네도 살아 있는 셈이지. 영면을 비네.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잔 합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네. 안녕. 김영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군사관학교 전임강사,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말글학회·겨레어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2019-07-30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