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는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한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세대 차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20대 자녀, 혹은 회사의 막내 직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이 특별 구성, 오늘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구매를 서두르세요!” TV 홈쇼핑에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익숙한 멘트다. 하지만 TV가 아니다. 웬걸,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지금은 ‘라방’ 전성시대
최근 라이브 커머스 열풍이 거세다. 라이브 커머스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스트리밍 방송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덮치기 전까지만 해도 라이브 커머스 경쟁은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비대면 트렌드는 오프라인 소비를 위축시켰고, 유통업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라방’(라이브 방송)에 뛰어들었다. 현재 티몬·쿠팡·11번가 등 이커머스 업계 대부분이 자체 라이브 채널을 운영 중이며, 롯데·CJ·현대·신세계 등 전통 유통 강자들도 관련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3조 원가량으로 추정되던 라이브 커머스 시장이 2023년 8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퍼스널 쇼퍼처럼 친근하게
기사를 위해 며칠간 인기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아이쇼핑을 즐겼다. 네이버쇼핑라이브를 접속하자 동시 시청자 수가 1000여 명부터 많게는 20만 명에 달하는 채널이 즐비했다. 다양한 채널 중 관심 있는 의류 방송을 누르자 모바일에 최적화된 세로 화면이 나타나며 진행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궁금한 점 댓글로 마구 남겨주세요!”
라이브 커머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쌍방향 소통이다. 홈쇼핑을 보다 보면 상품이 마음에 들어도 몇 가지 의문점 때문에 구매가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다. 반면 라이브 커머스는 화면 하단에 위치한 채팅창으로 궁금한 점을 즉시 해소할 수 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요청 사항도 들어준다. 실제로 의류 방송을 시청하는 도중 판매하는 블라우스가 청바지와 어울릴까 싶어 댓글을 남겼더니 불과 몇 초 안에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청바지와 매치한 모습이 궁금하시다고요? 제가 한번 입고 와보겠습니다.”
이처럼 라이브 방송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격 없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러나 친근함과는 별개로 상품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허술하지 않다. 또 채팅창 아래 제품의 구매 링크가 띄워져 있어 방송을 시청하며 결제까지 가능하다. 진행자가 이 모든 과정을 안내해주니 마치 퍼스널 쇼퍼와 원격으로 쇼핑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쌍방향 소통의 특성상 각종 ‘애드리브’가 난무할 때도 있지만, MZ세대는 이 또한 유쾌한 콘텐츠로 여긴다. 이에 단순 정보성을 넘어 예능 포맷을 접목한 오락형 방송도 늘어나는 추세다.
시니어 ‘큰손’ 가능성 ↑
라이브 커머스가 젊은 세대의 이색 놀이 문화로 부상하면서 대부분의 플랫폼이 MZ세대를 겨냥하고 있지만,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시니어가 라이브 커머스 시장의 큰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롯데홈쇼핑이 지난해 라이브 방송 시청자의 연령대를 분석한 결과 40~60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주로 대형 가전이나 명품 의류 등 비교적 고가의 상품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SNS를 활발히 이용하는 중장년층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위한 상품과 콘텐츠를 선보여 고객층을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시니어 전용 라이브 채널이 형성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김익성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 겸 동덕여대 교수는 “모바일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판매자와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시니어에게 라이브 커머스는 효과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다”며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제품을 홍보하는 등 시니어의 니즈에 맞는 콘텐츠가 제작된다면 새로운 소비 시장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브 커머스의 세계로 빠져볼까?
네이버쇼핑라이브 검색이라는 막강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시장의 선두주자를 달리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 입점된 업체라면 누구나 방송을 할 수 있어 품목이 다양하고 빈도가 잦다. 접속 방법 네이버 모바일 앱 →‘네이버쇼핑’ 탭 →‘쇼핑LIVE’ 탭
카카오쇼핑라이브 네이버가 골라 먹는 뷔페라면 카카오는 코스 요리 같다. 하루 1~2회 정해진 시간에만 방송하지만, 명품 또는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시청자를 효과적으로 끌어모은다. 접속 방법 카카오톡 앱 → ‘쇼핑하기’ 탭 →‘라이브’ 탭
라이브11 11번가는 쇼핑과 예능을 결합한 콘텐츠로 승부수를 던졌다. 오프라인 매장 습격 방송 ‘털업’, 신상 리뷰 방송 ‘찐텐 리뷰’, 제철 특산물 먹방 ‘생쑈’ 등 재미를 더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접속 방법 11번가 앱 → ‘라이브방송’ 탭
배민쇼핑라이브 국내 1위 배달 앱 배달의민족도 최근 라방에 뛰어들었다. 각 지역 배달 맛집 소개, 레시피 전수, 먹방 등 다양한 푸드 콘텐츠로 이용자와의 접점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접속 방법 배달의민족 앱 → ‘생생하게 맛있는 쇼핑라이브’ 탭
땅끝마을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득하게 먼 느낌이다. 그래서 한 번 다녀오고 나면 언제쯤에나 또다시 가보나 늘 그래 왔던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무덥던 여름날 어린 아들 손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한 권 들려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남도 땅을 누비며 다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감흥을 다시 얻기는 어렵겠지만 땅끝마을 해남은 언제나 기대를 품게 하는 곳이다.
이 땅의 끄트머리 해남엔 바다를 내다보며 세상을 품은 듯이 장엄하게 우뚝 선 달마산(達摩山)이 있다. 그 장대한 산세에 천년고찰 미황사(美黃寺)를 있게 했다. 신라 경덕왕 8년에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온 돌배가 닿은 곳이 이곳 갈두항이다. 이때 경전과 불상을 싣고 앞서가던 소가 누운 곳에 절집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절 입구부터 위로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걸어서 닿은 미황사는 산에 스며있는 절이라는 인상을 준다. 산이 감싸 안은 안온함이 느껴진다. 산을 다듬어서 평지에 지어진 모습이 아니다. 높낮이가 다른 산에 그대로 맞추어 각각 앉혀졌다. 건물마다 비탈길이나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높낮이가 있다. 그래서 아래서 올려다보는 절의 처마나 기둥,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 내는 풍경소리가 남다르다.
비탈진 길을 따라 달마선원 뜰에 올라서 비로소 적요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간, 눈앞에 바다를 펼쳐 놓았고 남도의 들녘에 바람을 담아두었다. 그리고 저 멀리 매일 달라지는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일출은 낙산사, 일몰은 해남 미황사를 꼽았다고 한다.
이번 여행길에는 늘 하고 싶었던 템플스테이 일정이 있다. 비록 하루 머무는 짧은 프로그램이지만 깊은 산사에서 보냈던 그 시간은 깊은 힐링이었다. 방 배정과 함께 사찰 안내와 예절, 예불, 저녁 공양 후 참여했던 남도 문화체험은 해남 여행을 실감시킨다. 구수한 남도 소리를 바로 눈앞에서 들으며 함께 추임새도 넣어보는 시간, 비로소 우리 문화에 다가가 보았던 산사의 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하면서 내 머릿속이 정돈되고 살짝 기분 좋은 긴장감에 뿌듯하다.
꾸밈없이 정갈한 텅 빈 방에서 지낸 하룻밤. 새벽녘 정적을 울리는 목탁 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여니 어둠이 가득한 절 마당으로 가만히 오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린다. 조용히 일어나 내다본 산속의 사찰도 세수한 듯 신선하고 상쾌하다.
아침 공양 후 달마 선원의 찻방에서 금강 스님과 함께한 다도 시간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스님의 눈빛이 엄격한 듯 따뜻하다. 스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차를 두 손에 감싼다. “스님, 은은한 향이....이게 무슨 차인가요?”빙그레 웃으시며 스님이 말씀하신다. “차 이름은‘미황사 차’입니다.”이 무슨 바보 같은 물음이었는지.‘미황사 차’를 마시며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들려주신다.
“매일매일 살아있는 숲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산길을 걸은 후 기운이 충만해지길 바라요. 그리고 이 길이 천 년이 지나도 반가운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두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중장비나 기계가 아닌 호미와 삽, 괭이와 지게를 이용한 순수 인력으로 있는 그대로의 길을 내었다. 해마다 쌓이는 낙엽이 스며들고 그 길을 걷는 발아래 편안함이 있도록 자연 속의 흙과 돌을 그대로 고집했다. 길 가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걷는 도중에 큼직한 돌들이 쏟아져 내린듯한 너덜길을 몇 번쯤 만난다.
미황사를 둘러싼 뒤편의 달마산에 달마고도(達磨古道) 길이 차분히 열려 있다. 총 17.74km의 4개 코스다. 그중에 한 코스를 걷기로 했다.
달마 고도는 각 4코스가 있다. 총 17.74km / 약 6시간 30분 거리. 제1코스 2.7km 미황사~큰 바람재, / 제2코스 4.37km 큰 바람재~노지랑골,/ 제3코스 5.63km 노지랑 골~몰고리재, / 제4코스 5.03km 몰고리재~인길~미황사
땅끝마을에 명품 둘레길 달마고도(達磨古道). 그 길을 세 시간여 걸었다. 땅끝에서 산길을 걷고 돌길을 걸으며 속세의 고단함도 함께 한다. 태고의 매력 속에서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는다. 힐링 트래킹이다. 걸으며 사색과 명상을 하며 미약하게나마 성찰의 시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일지.
달마산의 숲에 난 조붓한 길은 적당히 걷기 좋았고 숲을 이룬 나무 사이로 햇살이 눈 부시다. 이렇게 걷는 행복을 만끽한다. 심신이 정돈되는 느낌이다. 평소에 운동하지 않는 편이다 보니 때로 숨차서 헉헉거리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다. 걸을수록 그 길을 걸어나갈 힘이 생겨난다. 언제라도 찾아와 걸어보고 싶은 길이 또 하나 생겼다.
생각만으로 막연히 멀다 했다. 이젠 언제라도 한반도 끄트머리 땅끝마을 해남으로 훌쩍 떠나볼 만하다. 그곳엔 붉은 동백이 피고 지고 있었고 애끓는 남도 창이 고단한 마음을 달래준다. 푸근한 인심과 맛있는 밥상엔 인정이 넘치던 곳, 지금 거기엔 싱그럽게 일렁이던 청보리가 누렇게 패고 있겠다.
*해남 미황사 가는 길 - 자동차로 약 6시간 정도 // *대중교통: 강남고속버스터미널(호남선)출발-해남터미널-미황사행 버스 // * 미황사. 달마고도(達磨古道)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해남군은 신종 코로나19 확산으로 나 홀로 여행자를 위한 한적하고 안전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6월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 미황사 일주문 앞에서 트레킹 가이드와 함께 출발한다.)
△ 주변에 더 가 볼 곳 & 맛집
*해남 청보리밭 - 두 눈이 시원하다. 황산 연호 보리밭은 바라만 보아도 싱그럽다. 구릉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린 완만한 지형이 자연스럽다. 고두심 주연의 영화 '엄마'의 한 장면이 이 청보리밭에서 연출되어 화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쯤 보리가 패어 누런 황금 물결이겠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482-2
*해남 공룡박물관 - 세계 최초로 익룡, 공룡, 새 발자국이 동일 지층에서 발견된 지역이 바로 해남이다.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마냥 평화롭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 길 234
*대흥사-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있는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흥사(大興寺)는 땅끝마을 해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천불전 남쪽의 동국 선원은 1978년 문재인 대통령이 머물며 사법 시험공부를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소박한 방에서 누군가의 큰 꿈을 이루어가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입구에 있는 100년 전통의 한옥 구조인 '유선관 여관'과 그 뜰의 누렁이가 유명하다. 이제 그 누렁이는 간데없고 근래엔 TV 예능 알쓸신잡의 잡학박사들이 이곳에서 토론을 하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76
*녹우당(綠雨堂)-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의 무대 비자림 숲.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든든히 지키고 있다. 바람이 불 때 정말 녹우(綠雨) 소리가 날까 귀 기울여 보라.
*땅끝마을- 한반도 육지의 남쪽 끝 43.5km 지점에 있는‘땅끝마을’. 마을 입구에 땅끝 표지석이 서 있다. 156m 갈두산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모노레일 이용 가능)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보리향기 - 음식점도 자그마하고 가족 느낌의 보리밥 정식. 고소하고 찰진 차조밥과 '자줏빛의 작은 새우'라는 뜻의 '자하젓'이 맛깔스럽다. 막걸리 한 잔이 잘 어울리는 남도의 밥상.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158-1 보리향기
*원조장수통닭 - 닭 한 마리로 다양하게 먹는 닭 코스 요리가 있다.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295
*미황사(美黃寺)에서 하룻밤 템플스테이 하면서 먹은 특별했던 ‘공양’. 단 한 가지도 나무랄 것 없이 모두 맛있다. 채식의 사찰요리여서 먹은 후 속도 편하다. 그리고 미황사 금강스님이 만들어주신 '미황사 차 한 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으뜸의 맛 기억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추어탕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 늘 물어본다. “진짜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 맛있나요?” 대부분 맛있다고 대답한다. 어떤 맛이냐고 다시 묻는다. 대부분 우물쭈물한다. 자꾸 캐물으면 그제야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어릴 적 먹었던 맛, 적당히 흙냄새가 나는 맛, 민물생선의 비린 맛, 미꾸라지의 고소한 맛.
민물생선의 비린내나 흙냄새는 이해가 된다. 글쎄, 고소한 맛은 모르겠다. 대부분 생선, 고기는 오래 씹으면 고운 입자로 변해 단맛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가열처리하거나 삶거나 구운 것이 그렇다. 날것은 고소한 맛을 느끼기 힘들다. 끓인 것이라지만, 미꾸라지의 고소한 맛? 이건 알 수 없다.
어릴 적 먹었던 추억 속의 맛은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맛은 그저 추억의 맛일 뿐이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던 닭죽, 된장찌개, 그리고 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가 사준 자장면. 대략 이런 음식들이 추억의 맛이다. 비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중국산 미꾸라지 사용에 대해 늘 논란이 있다. 이유가 있다. 살아 있는 모습을 비교해도 일반인들이 그 차이를 알기 힘들다. 하물며 싹 갈아서 이른바 ‘갈추(추어를 갈아 요리한 추어탕)’로 만들면 더 구별하기 어렵다. 더하여 산초가루까지 넣으면 사실상 구별이 불가능하다. 산초는 매운맛까지 덮을 정도로 강한 맛이다. 추어탕은 끓여놓으면 국산이든 중국산이든 맛과 모양이 비슷하다. 중국산, 국산을 두고 늘 추어탕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중국산으로 끓이고 국산이라고 내놓는 가게들이 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고등어 추어탕’도 마찬가지다. 고등어 살을 갈아 넣으면 맛은 더 좋아진다. 아무려면 민물고기인 미꾸라지가 등 푸른 바다생선 고등어의 맛을 따를 수 있을까? ‘맛’으로 따지자면 고등어 추어탕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고등어를 갈아 넣고 미꾸라지라고 우기고, 속이는 주인의 ‘도덕성’이 문제 있을 뿐이다. 원재료를 속이는 것은, 현행법상 불법이다. 자, 다시 묻는다. 추어탕을 두고 맛있는 것, 맛없는 것을 구분할 자신이 있는가? ‘없다’가 정답이다.
미꾸라지는 서민들의 음식이었다
우리는 미꾸라지를 오랫동안 먹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우리가 미꾸라지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의 발간은 1123년, 고려시대다.
고려 풍속에 (중략)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 전복[鰒], 조개[蚌], 진주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붉은게[紫蟹], 굴[蠣房], 거북이다리[龜脚], 해조(海藻), 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워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
‘鰌(추, 미꾸라지)’는 ‘鰍(추, 미꾸라지)’다.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는 이 둘을 혼용했다. 서긍이, 왜 ‘鰌’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대부분 ‘鰍’로 표기한다. ‘미꾸라지는 가을 물고기’라고 설명한다.
이 무렵부터 미꾸라지를 먹은 건 아니다. 그 이전, 더 오래전부터 먹었다. 그물, 선박, 항해기술 등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다. 배는 이른바 무동력선.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에 낡고 비루한 그물을 싣고 물고기를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바닷가에 사람이 사는 것을 금했다.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 바닷가에 살지 못했으므로 바다생선을 잡는 기회도 드물었다. 무동력선으로는 가까운 바다가 고작이다. 일반 서민들이 바다생선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미꾸라지는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서민들의 단백질이었다. 바닷물고기가 훨씬 크고 맛있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가까운 바다의 새우, 거북손, 조개 등을 구하는 게 한계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미꾸라지는 먹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 맛이 있어서 먹었던 식재료가 아니었다. ‘먹고 싶어’가 아니라 ‘이거라도 먹고’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땅히 취할 생선, 단백질이 없었던 세민(細民, 서민)들 음식이다. 별다른 레시피가 있을 리 없다. 가장 편한 방법으로, 비린내와 흙냄새를 감추면서 먹었던 식재료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꾸라지를 먹었지만, 추어탕을 파는 집은 1920~30년대에 처음 나타난다. 지금도 남아 있는 ‘형제추어탕’이나 ‘용금옥’, 사라진 ‘희망의집’이나 ‘곰보추탕’ 등이다.
서울식과 시골식 추어탕의 차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미꾸라지가 기록된 시기와 추어탕 파는 식당의 등장은 약 800년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추어탕을 정확하게 언급한 책은 두 종류가 있다.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와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다.
풍석의 ‘난호어목지’는 1820년쯤 발간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도 19세기 중반 정도에 펴낸 거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다. 미꾸라지 먹는 방법을 보면 두 사람은 다른 곳의, 다른 미꾸라지탕을 보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지만 세부 내용은 전혀 다르다. 풍석은 시골식, 오주는 서울식이다.
‘난호어목지’의 ‘밋구리탕’은 시골, 농촌의 미꾸라지탕, 추어탕이다. 이름도 한글로 ‘밋구리’라 했다. 내용도 상당히 정확하다. “(밋구리, 미꾸라지는) 기름이 많고 살찌고 맛이 있으며 시골 사람은 이를 잡아 맑은 물에 넣어두고 진흙을 다 토하기를 기다려 죽을 끓이는데 별미”라고 이야기한다.
미꾸라지가 음식으로 표현된다. 다만 탕이 아니라 죽이다. 미꾸라지와 함께 여러 가지 채소, 양념 등을 넣고 흥건하게 끓인 게 죽이다. 오늘날 추어탕에 밥을 말면, 풍석 서유구가 말한 ‘밋구리죽’이 될 것이다. 풍석의 밋구리죽은 오늘날 시골식 미꾸라지탕, 즉 영남의 추어탕이다.
영남의 추어탕은 ‘갈추’다. 미꾸라지를 삶아서 으깬다. 고운 체로 거르면 살이 아래로 떨어진다. 거친 뼈나 대가리 등은 제거하고, 부스러진 살과 부드러운 채소 등을 넣고 끓인다.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국물은 간장 혹은 된장 푼 물이다.
오주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장황하게 추두부탕(鰍豆腐湯)을 설명한다. 오늘날 추어탕과는 거리가 있다. 두부를 사용한 추어탕이다.
추두부탕(鰍豆腐湯). (전략) 솥에 물을 붓고 크게 썬 두부 몇 덩어리를 넣는다. (중략) 솥 아래에 불을 때면 솥은 점점 뜨거워진다. 미꾸라지 무리는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들어간다. 계속 불을 때면 솥이 끓으면서 미꾸라지도 익는다. 끄집어내서 썬다. 미꾸라지는 개개의 두부 속에 콕 박혀 있다. 참기름으로 지진다. 두부 전을 먼저 끓이고 메밀가루를 섞는다. 달걀 전(지단)을 얹는다. 이렇게 탕을 끓인다. 기름기가 넉넉하고 맛이 좋다. (후략)
서울식 추어탕은 풍석 서유구의 밋구리탕과는 다르다. 쇠고기 내장이나 살코기, 버섯, 달걀 등 화려한 고명이 들어간다. 오주가 말한 추두부탕은 정확한 서울식 추어탕과는 거리가 있다. ‘화려한 고명’은 닮았다.
요즘 서울 추어탕의 특징은, 붉고 매운 국물 맛이다. 아마도 산초를 널리 사용하지 않으면서 붉은 고춧가루로 매운맛을 더했을 것이다. 원형 서울 추어탕은 산초가루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오주의 추두부탕도 산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풍석 서유구의 추어탕도 산초를 언급하지 않지만, 오늘날 농촌의 추어탕들은 대부분 산초를 사용한다. ‘곱게 간 미꾸라지 살+얼갈이배추나 청방배추, 배추속대+간장 혹은 된장 국물’에 산초가루를 조금 더한다. 국물에 산초가루를 더해서 내오는 경우도 있다. 서울 추어탕의 매운맛은 결국 산초를 대신한 맛이다.
모든 게 뒤섞이면서 뒤죽박죽이긴 하다. 매운 서울식 추어탕을 내놓으면서 산초가루를 별도로 내오기도 한다. 시골식 추어탕에는 산초가루, 마늘 다진 것, 매운 풋고추 다진 것이 함께 나온다.
그까짓 미꾸라지탕이라며 천대할 일은 없다. 서민들의 음식이며 식재료 부족한 시절에 귀하게 먹었던 음식이다. 추어탕의 계절이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아, 이 추어탕은 서울식이네, 시골식이네” 하며 한 번쯤 되새겨보자고 이 글을 쓴다.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 적어도 내가 먹는 게 어떤 음식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캠핑카 혹은 카라반을 직접 끌면서 여행하는 것이 당장 어렵다면 편안하게 카라반 캠핑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캠핑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훌쩍 떠난 곳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여주 카라반’. 그런데 하필 비올 확률이 100%.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였으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라반에 들어가 체험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기에. 때론 100% 비 소식에도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진미. 하늘의 이치인 듯 상황에 적응하며 즐겨봤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카라반이나 캠핑카 등 바퀴 달린 것을 가지고 하는 캠핑을 알빙(RVing)이라고 부른다.‘카라반’은 주거시설을 갖춘 컨테이너를 차에 견인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고, ‘캠핑카’는 자동차 안에 캠핑을 할 수 있게 꾸민 것. 정식 명칭은 모터홈(Motorhome)이다.
카라반 파크와 카라반 체험장
외국의 경우 사막 혹은 너른 대지를 관통하는 도로 구간에 카라반 파크가 있다. 카라반, 캠핑카를 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장을 푸는 곳 말이다. 카라반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 그곳에 생활 터전을 잡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이들도 있다. 카라반에 관한 통상적인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많이 한다.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신 배경에 자주 카라반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초반 3~4개월 정도 카라반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농장이 많은 칠더스라는 곳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던 때 ‘슈가볼’이라는 카라반 파크에서 살았다. 구식이었지만 카라반에는 화장실 시설을 제외하고 소파와 주방, 개별적으로 분리된 침실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한국에서는 카라반 구경이 쉽지 않았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즐겨 보던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으니 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생활이었기에 그때의 카라반 생활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도 카라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여주 카라반은 외국의 사례처럼 오토캠핑족(차를 가지고 다니는 캠핑족)을 위한 장소는 아니고 말 그대로 카라반이 궁금한 이들에게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이색적인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체험 장소다. 4000여 평 규모의 대지에 평수와 형태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카라반이 초록빛 잔디와 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줄지어 서 있다. 나름 카라반 파크 현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재현해놓았으며 각각의 카라반에 개별적으로 데크와 어닝도 장착했다.
카라반을 이용해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도 가능하다고. 어쨌거나 카라반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마음 편하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험을 떠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중요 장소인 셈. 카라반을 엇비슷하게 본떠서 만든 카라반형 숙소 ‘아크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카라반이다.
여주 카라반은 미국의 포레스트리버 사의 카라반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들여왔다. 가장 큰 평수로 알려진 12평 규모의 ‘체로키 39KR’과 두 번째 규모인 ‘체로키 Q2’는 이곳이 아니면 체험하기 어렵다.
기자와 지인들이 묵었던 ‘체로키 Q2’에는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이 앞뒤로 두 개나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카라반 내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불편함은 없다. 뒤쪽 샤워장은 작게나마 욕실도 꾸며져 있지만 사우나를 즐길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대형 TV, 냉장고, 소파와 주방까지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간이 주거시설이라는 느낌을 넘어 가정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와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반 안에는 곳곳에 수납장이 마련돼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도로를 달릴 때 흔들림을 생각해 수납장 안에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 넣으면 떨어져 깨지거나 흩어질 일이 없다. 이곳 카라반의 수납장은 여닫이문을 달았지만 호주에서 이용했던 카라반 수납장 문은 미닫이였다. 차량 이동 시 충격에 의해 문이 열릴 수 있어 미닫이문으로 돼 있는 거라고 영국 친구가 설명해줬다. 체험장에 있는 시설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닫이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와 바비큐가 제법 잘 어울린 밤
주룩주룩 한없이 비가 내리던 그날, 카라반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짓고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바비큐는 실외에서 준비했다. 실내에서 연기를 피우면 경보장치가 울리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굽는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다행히 카라반 입구 앞 너른 공간을 어닝으로 가려줘 비를 피하면서 바비큐를 할 수 있었다.
카라반 체험을 함께한 지인이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등을 알뜰하게 준비해와 고마웠다. 곧 갖가지 채소와 구운 고기가 상 위에 올랐고, 우리는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각자의 새로운 관심사에 귀 기울였다. 공기 맑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10년 전에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지인은 “화장실 변기통을 비우고 물관, 전기 연결 등등 캠핑장에 도착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형 캠핑카로 변환한 점이 좋은 아이디어 같고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깔끔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피하지 않고 즐겼을 뿐인데 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비에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지만 카라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운치마저 느껴졌다. 태풍 걱정은 어느새 잊고 비의 낙차가 카라반 외벽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특별한 화음을 밤새 즐겼다.
카라반 생활 경험자가 본 여주 카라반
개인적으로 카라반은 내부 공간이 좁아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캠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집 밖을 나와 여행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는 자연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 눈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주에서 경험한 카라반은 호주에서 이용했던 것에 비하면 호화로웠다. 카라반 내부를 돌아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독거미, 운동화 속에 숨어 자는 생쥐가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국의 카라반 파크처럼 넓게 쓰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카라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돌아오던 날 아침, 100%의 비올 확률을 뚫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인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우짜우짜우짜짜’라는 ‘우스개 표현’이 있었다. ‘웃기는 짬뽕, 날으는(나는) 골뱅이’라는 표현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영화감독 이규형 씨다. 중식, 그중에서도 자장면, 짬뽕이 널리 퍼졌던 시기다.
자장면은 역사가 길다. 중국 서민의 음식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한반도로 건너온 가난한 이들, 화교들의 길거리에서 한 끼 때우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한반도에서 새롭게 만든 음식도 아니다. 원래부터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이다. 이것이 식당의 정식 메뉴가 되었다.
자장면은 한반도의 한식을 잘 보여준다. “자장면이 무슨 한식의 특징?”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많겠다.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중국의 원형 자장면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원본은 중국의 것이지만 우리의 ‘웃기는 짬뽕’이나 ‘우짜우짜’는 한반도의 음식이 되었다.
‘우짜’는 우동과 자장면(짜장면)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무실에서 야근을 할 때면 “난 우동, 난 짜장”이라고 외쳤다.
“우동이 웬 중식?” 하며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짬뽕의 원형은 우동이다. 짬뽕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우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지금도 ‘중화우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주카우동’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중화우동 메뉴를 없앴다. 대신 가락국수, 일본식 우동 그리고 짬뽕을 남겼다. 한반도의 짬뽕은 요란하다. 종류가 많아졌다. 해물짬뽕이 있는가 하면, 매운 짬뽕도 등장한다. 채소짬뽕, 김치짬뽕도 있다. 일부 지방에는 돼지고기를 얹은 돼지짬뽕이라는 메뉴도 있다. 그야말로 짬뽕 천지다.
자장면도 마찬가지. 중국에도 없는 간자장에 느닷없는 삼선자장까지 생겼다. 삼선은 ‘삼선(三鮮)’이다. 신선한 해물 세 가지라는데, 물론 엉터리 조어다. 원래 중식당에서 사용했던 ‘해선(海鮮)’과 ‘삼(三)’을 더한 한국식 조어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 발음으로 ‘자장미엔’쯤 된다. 자장미엔이 한반도에서 자장면으로 바뀌었다. 작장면(炸醬麵)의 ‘작(炸)’은 ‘터지다’, ‘튀기다’라는 뜻이 다. ‘튀기거나 터트린 장을 면에 얹은 음식’이 자장면이다. 기름을 두른 웍(wok)에 장을 볶으면 마치 기름에 장을 튀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열 상태에서는 장이 마치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웍에 장을 볶아보면 ‘자장[炸醬]’이란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중국 자장미엔의 핵심은 장(醬)이다. 장 중에서도 중국식 ‘첨면장(甛麵醬)’이다.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어우러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면장은 면을 달게 만드는 장이다. 국수를 먹는데 그 국수를 달게 만들어, 잘 먹게 만든다는 뜻이다.
국수에 볶은 첨면장을 얹어서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빈 우리 음식과 비슷하다. 가장 기본적인 서민의 음식이다. 중국 산동성 등에서 널리 먹었다.
흔히 ‘북경 자장면’이라고 하는데 북경 자장면도 유래는 산동성 언저리다. 중국 역시 1950~60년대에 ‘국민 건강을 위해’ 돼지고기 등을 널리 보급했다. 국수[麵, 면]에 장(醬)을 더한, 가난한 이들의 음식에 영양분이 많은 돼지고기를 더한 것이다. 중국 첨면장을 넣고 잘게 썬 돼지고기를 볶는다. 볶은 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서 먹는다. 현대적인 중국 자장면이다. 돼지고기와 기름이 장과 어우러져 맛을 더한다.
첨면장은 밀가루와 콩을 이용해 만든다. 콩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산동성 등지에서는 ‘밀가루+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도 첨면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춘장’이라고 부르는 장이다. 중국 첨면장의 변화는 한반도 자장면의 변화다. 첨면장이 바뀌면서 ‘중국 작장면’이 한반도의 자장면으로 바뀐다.
자장면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무렵이다. 많은 중국 병사가 한반도로 건너왔다. 군대가 움직이면 군인, 상인, 가난한 서민들이 따라 움직인다. 중국 대륙 역시 기근, 홍수,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가난한 이들이 군대를 따라 대거 인천으로 몰려들어 중국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항구는 교통의 요지다.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용역을 공급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이다.
자장면은 이들의 일상적인 식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릇 하나에 면과 볶은 첨면장을 더한 다음 비벼 먹었다. 이 음식이 당시의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중화요릿집 메뉴로 등재되었다.
당시 유명 식당 중 하나였던 ‘공화춘’의 후손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승반점’에는 유니자장이 있다. ‘유니[肉泥]자장’은 돼지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진 다음 첨면장에 볶아서 만든다. 일반적인 자장면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자장면이다.
중식당의 원래 이름은 청요릿집이었다. ‘청’은 청나라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후까지 중식당은 청요릿집으로 불렸다. 음식 가격은 비쌌다. 서민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 음식점도 아니고 요릿집이었다.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양장피 등 고급 안주, 요리를 내놓던 곳이었다. 자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싼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고급 청요릿집에 ‘주인공’으로 끼어들기는 힘들었다. 유니자장 같이 비교적 고급스러운 음식은 청요릿집 코스 중 하나였다.
첨면장의 진화, ‘자장면’
공식적으로 1955~65년까지 11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대량 공급되었다.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밀가루 대량 공급은 끼니가 힘들었던 가난한 한반도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국수 공장이 대거 들어서고 수제비가 가난한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중식당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한 그들 스타일의 ‘자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수+첨면장’으로 만드는 자장면. 밀가루가 해결되고 나니, 이번엔 첨면장이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까지 화교 중식당들은 인근 화교 가정에서 만든 첨면장을 사용했다. 일상적으로 먹고 남은 첨면장을 화교 식당에 공급했다. 자장면이 급속히 확대, 공급되었다. 문제는 역시 첨면장이었다. 화교 민가에서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어도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외식을 할 만한 식당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식당의 자장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공장에서 대량으로 첨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이 검지 않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검은 색깔? 캐러멜 색소로 해결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자장면, 첨면장은 진화한다.
원형 첨면장은 농도가 짙다. 뻑뻑하다. 잘 비벼지지 않는다. 지금도 북경 등에서 만나는 자장면은 뻑뻑해서 비비기가 힘들다. 그래서 자장 소스를 묽게 만들었다. 전분을 풀고 양파나 감자, 당근, 대파, 호박 등을 썰어 넣었다. 한국인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느끼한 음식은 반드시 채소와 더불어 먹는다. 그래서 자장 소스에 각종 채소, 캐러멜색소, 각종 감미제, 조미료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자장면 소스다. 중국 첨면장에서 출발했지만 한반도 방식으로 대거 바뀌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장면은 심하게 변화, 왜곡되었다. 원형 자장면은 돼지기름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 “동물성 기름보다는 식물성 기름이 건강에 좋다”는 엉뚱한 오해가 널리 퍼졌다. 전 세계의 중식당들은 대부분 ‘라드(rard)’라고 부르는 돼지비계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돼지고기 기름을 콩기름으로 바꿨다.
“중국에 자장면이 있다? 없다?”를 묻는 질문은 얼마 전까지도 상당히 어려운 퀴즈였다.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기도 하지만 없다고 해도 옳다. 이도저도 아닌 대답인데, 이게 정답이다. 한반도의 자장면은 변형이다. 비비기 좋고, 튀기거나 볶는 것보다는 채소를 많이 넣고 끓이는 방법을 택했다. 중국 자장면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우리 자장면을 ‘한청자장미엔[漢城炸醬麵]’이라고 부른다. 한성, 서울식, 한국식 자장면이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반’은 밥이다. ‘탕’은 국물을 뜻한다. 우리는 국물 없는 밥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 밥상에는 밥과 국이 있고, 반찬을 더한다. 밥과 국은 우리 밥상의 기본이다.
“일본에서도 밥과 국을 같이 먹더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등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종류가 한정적이다. 아침 밥상의 ‘미소시루(일본 된장국)’ 정도다. 낮이나 밤의 밥, 술자리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침에 먹는 국 한 종지 정도다.
한식 밥상은 국의 향연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오늘 저녁은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했다.
우리 밥상은 밥과 국을 빼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웬만한 밥상에는 늘 국이 등장한다. 국, 밥, 김치만 있는 밥상도 즐겁다. 탕반 음식은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음식문화다. 국도 여러 종류다. 고깃국, 생선국, 각종 채소국, 이도 저도 아닌 된장국까지 국물 없는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여름철에는 근대국과 아욱국을 따로 끓인다. 얼핏 보면 비슷한 아욱과 근대. 그러나 국으로 끓이면 그 맛이 각별하다. 콩나물, 미나리, 무, 시금치, 각종 시래기와 우거지까지. 한반도의 국물은 끝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탕, 국물이 없는 밥상은 ‘국물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관계를 끝낼 때도 “국물도 없다”고 말했다. 밥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이 국물이다. “넌 앞으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인간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것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밥을 먹으면 목이 메었다. “국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매정한 표현이다.
국물의 기본
국물의 기본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 고깃국물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시작, 바탕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무런 양념이나 부재료인 채소 없이 국을 끓이면 대갱이다.
‘대갱’은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으로 기본적인 양념을 대신했다. 대갱은 ‘매실이나 소금 양념’도 하지 않는, 고기를 곤 국물이다. 맛을 따질 일은 아니다. 맛이 있으면 양념한 화갱을 찾을 일이다. 국물에 채소나 양념을 넣으면 ‘화갱(和羹)’이다. 중국에는 화갱이나 대갱 모두 사라졌다. 화갱은 그나마 중식 코스 요리 중, 각종 채소를 넣고 생선이나 고기를 더한 국물 음식이 남아 있다. 한식에는 아직도 대갱이 살아 있다. 곰탕이 대갱이고, 제사상의 곰국, 곰탕이 바로 대갱의 변형이다.
우리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화갱이다. 채소에 고기를 넣고 끓여도, 채소만으로 끓여도 화갱이다. 고깃국, 채소, 생선이나 여러 가지 양념을 더한 것이 모두 화갱이다.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는 화갱이 늘 자리한다. 시래깃국, 김칫국, 배춧국, 뭇국, 시금칫국, 토란국, 아욱국, 근대국 그리고 해조류를 넣은 미역국, 톳을 넣은 국, 몸국(모자반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북엇국 등 숱한 국물 음식들이 그것이다.
곰탕과 설렁탕
곰탕과 설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다. 약 100년 이상 곰탕과 설렁탕은 경쟁하고, 상대의 장점을 서로 더했다. 두 국물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쇠고기 양지 부위를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은 반가의 음식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나주 등에서 곰탕이 유행한 이유도 간단하다. 서울, 한양은 궁궐이 있었던 도시다. 각종 관청도 많았다. 궁중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이 있다. 제사에는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쇠고기 도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곰탕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서울, 한양의 곰탕집들은 이런 쇠고기 소비문화를 뒤따른 것이다.
나주 곰탕도 마찬가지다. 나주는 큰 도시였고 큰 관청, 관사가 있었다. 역시 향교가 있고 외부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한양 도성에도 외국에서 온 사신과 외부 관리들의 방문이 잦았다. 역시 쇠고기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주 곰탕, 진주냉면이 발달한 까닭이다.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이 고기 곤 국물이라면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다. 때로는 소머리를 곤 국물도 더했다. 오늘날 서울 인근 경기도 몇몇 곳에 소머리 국밥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을 만들 때 소머리도 이용했다. 그 방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오늘날의 설렁탕에는 쇠고기도 더한다. 양지나 우둔살의 일부, 업진살 등을 넣는 설렁탕 전문점도 많다. 곰탕의 장점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발은 곰탕과 다르다. 내장, 소 머릿고기 등을 사골, 잡뼈 곤 국물에 더했다. 이른바 ‘부산물’들이다. 부산물은 정육의 대칭어다. 곰탕은 정육에서, 설렁탕은 부산물에서 출발했다.
육개장과 닭개장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닭은 귀한 달걀을 낳는 존재. 그나마 풀과 벌레가 흔한 여름철과 달리 추운 겨울에는 먹이가 마땅치 않았다. 봄에 병아리에서 시작, 늦가을 대부분 닭을 ‘정리’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급격히 발달한 주막에서 개장국을 끓인 것은, 그나마 개가 개체가 크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개장국은 주막의 주요 메뉴였다.
개장국은 ‘개고기+장(醬)+국[羹, 갱]’이다. 개고기는 일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명의록(明義錄)’은 정조대왕 즉위 원년(1776년)에 작업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한 책이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했던 세손, 정조대왕이 즉위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반대하고 궁궐에 자객을 침투시킨 반대파를 엄벌한 것이 정당했음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 ‘이산’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되었다. ‘이산’과 ‘역린’에 공히 정조 암살을 위해서 자객이 궁궐에 침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반대파에 의한 정조 시해 시도는 있었다. ‘명의록’의 공초(供招) 기록에 의하면 전병문, 강용휘 등 범인들은 궁궐에 침투하기 전 ‘궁궐 밖 개 잡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거사 실패 후 남대문 언저리로 도주, 다시 ‘개 잡는 집’에서 만난다. 사건 수사기록인 공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궁궐 밖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한양 도성 곳곳에 개 잡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장국은 저잣거리 주막의 평범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167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안동 장 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도 나온다. 개장국은 반가, 저잣거리를 따지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으로 바뀐다.
육개장은 ‘육[肉=쇠고기]+개장국’이다. 즉,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닭개장은 ‘닭고기+개장국’ 형태의 음식이다. ‘닭계장’으로 쓴 것은 틀렸다. 닭개장이 맞다.
개장국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청나라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개의 존재가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다르다. 개는 동반자 때로는 생명의 은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도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인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저잣거리에서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조선시대 말기 소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국가의 금육 정책도 힘을 잃는다.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 금육은 허물어진다. 쇠고기를 더한 육개장과 쇠고기로 끓인 곰탕, 소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끓여낸 설렁탕이 널리 퍼진다.
한반도의 국물 음식 중 으뜸은 곰탕, 설렁탕, 육개장 그리고 육개장을 중심으로 변형된 해장국들이다. 선지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이 있다. 선지에 각종 채소를 더한 것도 등장하고 장터에서 간단히 만들어 내놓았던 장터해장국도 선보인다.
한반도만의 국물 문화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는 라면이 있다. 동남아, 중동,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지만, 라면 국물을 알뜰하게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이들은 “듣기와는 달리 일본 라면이 짜더라” 말한다.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라면 국물을 우리처럼 알뜰하게 먹지 않는다. 일본은 면 중심으로, 우리는 국물 중심으로 라면을 먹는다. 면을 먹는 이들은 면에 국물이 배어든 맛을 즐긴다. 우리는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는다. “나트륨이 많은 국물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은 허망하다. 우리는 ‘국물도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면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수반(水飯)도 마찬가지다. 물에 만 밥. 입맛이 없거나 간단한 상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정식으로 수반을 내놓았다. 왕(성종)도 즐겨 먹었고, 아버지 묘소에서 간단하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왕도(정조) 있다.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일상적으로 먹는 나물국, 생선, 고깃국, 개장국과 설렁탕, 곰탕, 육개장 그리고 라면과 수반까지.
한반도만의 독특한 국물 문화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더운 여름철에 엉뚱하게 비빔밥 이야기를 한다.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보양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가 많다. 지난번에도 ‘보양식은 없다’고 말했다. 비빔밥이 여름철 보양식이다. 굳이 찾자면 우리가 ‘환자식’이라 부르는 죽(粥)이 바로 보양식이다. 한식에는 보양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 특집을 방송하는 지경이다.
외국 어느 나라도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을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들도 이렇게 ‘보양’을 찾아서 헤매지는 않는다. 우리만 튼튼하고 보양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들은 여름철이면 비실비실한가?
보양식 관련해서 한국은 문화적 후진국이다. ‘문화적 문맹’ 수준이다. 1년 내내 ‘치맥’을 먹는 한국인들이 보양식으로 또 닭을 먹는 것도 코미디다. 정작 인삼 소비는 나날이 줄고 있다. 일상에서는 인삼을 거의 찾지 않으면서, 복날에만 인삼 들어간 삼계탕을 먹는 것도 우습다. 치맥은 건강에 좋든 나쁘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뿐이다.
한식이 추구하는 바는 평(平)의 세계다. 음식을 평하는 게 하는 일이니, 여름철만 되면 보양식 원고청탁과 더불어 ‘보양식 강의’도 심심치 않다. 백화점 문화강좌나 공무원, 회사원 연수 프로그램 등에서도 ‘보양식 강좌’를 청한다.
강의를 할 경우 “한식은 평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보양식은 없다”고 미리 선을 긋는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하는 눈치다. 더러, “에이, 뭐야?” 하는 이도 있다. “오늘 낮에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었는데 보양식이 없다니 그럼 삼계탕, 자라, 장어, 민어를 먹고 힘이 나는 건 뭐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겨우 21일 자란 병아리 수준의 닭을 먹고, 내 몸에 보양을 했다고 좋아하는 것은 슬프지 않냐고 묻는다. 그 닭이 항생제, 성장촉진제 등을 먹으며 A4 용지보다 좁은 바닥에서 자랐음을 아냐고 묻는다.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내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반가에는 보양식이 있지 않았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다. 굳이 보양식으로 꼽자면 죽과 동짓날 팥죽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빔밥이다.
비빈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다
1994년,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동양과 서양,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과거와 현대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빈다. 그릇 속에서 여러 요소들이 뒤섞이고 충돌, 화합한다. 제3의 맛을 만들어낸다.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빔밥을 비빌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선두에 설 것이다.”
25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넷이 아직 민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스마트폰도 없었다. 백남준 선생은 마치 예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았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와서 여러 번 비빔밥을 먹었다고 자랑하지 말자. 어느 항공사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의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고 우쭐할 일도 아니다. 백남준 선생이 먼저 비빔밥, 비빔밥 문화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식재료를 동시에 섞고 비비는 것이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식재료를 골고루’라고 말한다. 이게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 골고루 먹으면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보양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여러 가지 식재료’를 섞은 맛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가 비빈 비빔밥이 제일 맛있다”는 표현도 있다.
전북 전주의 한 비빔밥 집에서는 늘 주인이 밥을 비벼준다.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는 이는 없다. 이 가게에 가면 필자도 늘 “비벼주세요”라고 청한다. 주인이 ‘숟가락 두 벌로’ 쓱쓱 비벼주면 희한하게 맛있다. 전주 사람들이 설마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랴? 현지 주민들도 늘 “비벼주세요” 한다.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빔밥을 위한 변명
비빔밥의 역사는 길고 넓다.
조선시대 중기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는 무관 전임(田霖, ?∼1509)과 혼돈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무관 전임은 조선시대 전기의 관리다. 15세기 중후반과 16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다. 지금을 기점으로 셈하자면 500년 훨씬 전의 사람이다. 그때도 비빔밥이 있었다, 100년 이상 뒤의 사람인 문신 박동량이 그 내용을 남겼다. 특별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혼돈반’이라고 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전임이 먹었던 것은 생선과 채소를 넣고 비빈 밥이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비빔밥을 ‘골동반’이라 부르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국물을 골동갱(骨董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만, 외국인에게 비빔밥은 어렵다.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씨는 “비빔밥은 양두구육의 음식”이라고 했다. ‘양두구육’은 전임의 혼돈반과 닮았다. “처음 그릇에 내올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그걸 마구잡이로 섞어서 먹는다.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음식이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한국 음식, 비빔밥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아름다움을 파괴한 음식이다. 처음은 멀쩡한데 막상 먹을 때는 뒤섞어서 엉망으로 만든 음식이다. 겉으로는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정작 ‘개고기’를 파는 식이다.
일본인들의 가마메시[釜飯, 부반]는 솥밥이다. 한국 비빔밥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비빔밥은 비비지만 가마메시는 간장을 얹어서 떠먹는 식이다. 한반도의 돌솥밥은 비비지만, 일본의 가마솥 밥은 마지막까지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가마메시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비빔밥이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가마메시는 닫힌 음식이다. 고명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 처음 나온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정해진 식재료와 정해진 방식을 따른다.
한국 비빔밥은 열린 음식이다. 정교한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닫힌 음식이 아니다. 비비다가 말고 나물을 더 넣기도 하고, 밥이나 장을 더하기도 한다.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비비는 비빔밥의 ‘설계도’를 머리에 넣고 있다.
비빔밥, 평(平)을 향하다
너른 들판. 동네 사람들이 두레로 일을 한다. 논주인은 새참과 식사를 준비한다. 광주리에 여러 나물을 준비하고 밥을 큰 그릇에 담은 다음, 들판에 와서 광주리를 펼친다.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광주리 주변에 모여든다. 큰 그릇을 하나씩 받아든다. 그다음부터는 자유다. 밥을 얼마나 퍼 담든, 어떤 나물을 담든, 모두 자유다. 싫어하는 나물은 먹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나물은 많이 넣어도 된다. 고추장을 넣든 된장을 넣든 모두 개인의 취향이다.
‘흔한 식재료를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한식의 길이다. 나물 잎사귀와 뿌리, 줄기의 맛이 다름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다. 전 세계에서 산나물을 이렇게 흔하게, 자주, 많이 먹는 민족은 없다. 산나물, 들나물로 밥상도 차렸다. 나물들을 넣고 비비면 산채비빔밥, 산나물비빔밥이다.
세상의 모든 산에는 산나물이 있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산나물을 넣고 비비는 ‘산채비빔밥’을 식당 메뉴로 내놓지 않는다. 산나물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건강식이다. 산나물을 이토록 다양하게 먹는 나라는 없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도 없다. 산나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보양식이다.
여름철이면 몸의 영양 균형이 무너진다. ‘영양 부족’이 아니라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균형이 허물어지면 영양을 더할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야 한다. 특정 고기와 생선 등을 탐할 일이 아니다. 다양한 식재료를 동시에 섞은 비빔밥이 보약이자 여름철 보양식이다. 여러 영양소와 미네랄, 효소 등으로 몸의 균형을 잡아주니 건강식이다.
현대인들은 영양 부족이 아니라 영양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름 파이프가 고장 난 차량에 자꾸 휘발유를 부을 일은 아니다. 영양 과잉으로 힘든 몸에 영양분을 더할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를 넣고, 섞고 비빈 음식, 비빔밥은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다. ‘더하는 음식’, 호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라 ‘빼는 음식’, 소박한 음식이 필요한 시대다. 여름철, 시큼한 열무물김치, 보리밥, 고추장 조금 넣은 열무김치비빔밥이 그립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