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풍경은? 여주미술관에 와서 보니 그 답은 미술관이다. 산기슭에 살포시 기대어 앉은 미술관의 유려한 자태를 바라보자면, 이보다 오롯한 낙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풀과 나무들은 사람의 가슴을 보듬어주고, 미술관 건축물은 저만의 미학을 두런거리며, 전시 작품들은 마음으로 스며들어 삶의 피로와 권태를 씻어주는 게 아닌가. 그러니 낙원이다.
일연 스님(1206~1289)은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난에 맞서 한민족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 5년 동안 5권 2책의 ‘삼국유사’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나름의 답을 했다.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한민족 역사의 대기록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밝힌 고조선과 단군신화, 14수의 신라 향가는 고대 문학사를 실증하고 있으며,
멀리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 신종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 속에서 즐겨볼 수 있는 여행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일상 속 여행. 홀로이 걸어서 다녀오기, 또는 자전거나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근교 여행,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대세인 요즘이다. 마이크로 투어라는 산뜻한 형태로 가뿐하게 즐길 수 있으니 나서는 기분도 가볍다.
산 아래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이내 숲속이다. 밋밋한 야산이지만 솔이 지천이라 푸르다. 길 오른편으로는 얼어붙은 도랑이 이어진다. 그러다 순식간에 풍경이 바뀐다. 옹골차고 미끈한 바위들이 계곡을 채운 게 아닌가. 송암폭포 일원이다. 바위 벼랑에도, 소(沼)에도 얼음장이 두꺼워 고적한 정취를 자아낸다. 해빙이 되고 봄비 내리면 물은 날듯이 활개를 치리라
조선 중기를 소란스레 살다간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이 머물렀던 별서(別墅)다. 남간정사(南澗精舍)라 이름 짓고 ‘남간노인’(南澗老人)이라 자칭했다. 집으로 얻은 안심도, 쌓인 정도 많았던가보다. 파란과 질풍노도의 한세월을 통과한 말년의 핍진한 마음 한 자락 여기에 걸쳐두고 살았으리라. 우암이 돌아간 지 300여 년. 집주인
독자는 입스(yips)에 걸려본 적 있는가? 입스가 뭐냐고? 앗! 이러면 얘기가 안 되는데. 골퍼이면서도 입스가 뭔지 모르는 독자는 행운아다. 서너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경험한다는데. 아예 뜻도 모른다고? 부디 앞으로도 모르고 살기를 바란다. 겪어보면 안다. 왜 모르는 게 낫다고 하는지. 일단 뜻부터 짚고 가자. 입스는 ‘느닷없이 마음이 완전히 움츠러
그는 직장 은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전에 가보지 않은 길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도래한 걸로 간주했다. 그런 그가 귀농을 선택한 건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서울이라는 기이한 대도시를 통쾌하게 벗어난 시골에서 삶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였다. 구체적으로는, 농업에의 투신이라는 미지의 모험을 통해 자신의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202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어제 진 해와 오늘 뜬 해가 다 같은 해이건만, 사람들은 1월 1일 아침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절대권력을 가진 구원자를 만난 듯 간절한 염원을 전합니다. “부디 신축(辛丑)년 새해에는 황소 뒷발차기에 걸려 코로나19가 영구히 종식되기를 기원한다”라고. 필자 또한 하루속히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조선 주자학의 적통을 이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살았던 집이다. 몹쓸 세상 버리고 은둔했던 곳이다. 독락당(獨樂堂)이라, ‘홀로 즐기는 집’이다. 고고한 고독을 벗 삼아 은거했나? 도학자의 본분은 ‘열공’에 있으니 세상을 등지고서야 학문에 표 나게 정진했나? 둘 다 누렸을 걸 어림짐작할 만하다. 분명하기론 회재의 낙심이 실린 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