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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쓴맛 안엔 보약도 들어 있다
-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11-1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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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산 산맥 아래 사뿐히 내려앉은 카자흐스탄의 보석! ‘알마티’
-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카자흐스탄 역시 먼 듯하면서도 가깝고, 낯선 것 같으면서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국영 항공 에어아스타나를 타고 6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알마티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경제문화관광 중심지다. 오랜 기간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카자흐스탄어 외에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13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를 믿지만 종교적 색채는 비교적 옅다. 음식과 풍경,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변국의 장점을 관대하게 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한국인에겐 의병 홍범도 장군이 생애를 마친 곳이자 10만 고려인이 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대자연과 유럽풍 시티라이프 체험 이륙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창밖을 보니 하얗게 이어진 선이 보인다. 구름인 줄 알았더니 길이가 무려 2000km에 달한다는 톈산 산맥이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4개국에 걸쳐 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병풍처럼 둘러싸인 만년설산 아래 녹색의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포근히 안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알마티에서의 시간은 차분하면서도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알마티(Almaty)라는 지명은 사과를 뜻하는 ‘알마’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아타’가 합쳐진 알마아타(Alma-Ata)에서 유래됐다. 그만큼 사과가 유명하다. 알마티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트 거리는 세련된 노천 카페들과 ‘스타벅스’, ‘망고’ 같은 글로벌 체인점들로 가득하다. 벤치와 분수대 주변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 대통령공원, 판필로프의 28인 기념비,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 젤료니 바자르 재래시장, 알마티의 남산타워 콕토베 케이블카도 있다. 이들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은 역사에 비해 너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87년과 1911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어 재건축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린 협곡’과 위구르족 마을 이튿날, 3시간여 차를 달려 차린 협곡으로 갔다. 도심을 벗어나자 차도 건물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 양쪽으로는 끝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양떼와 말들만 가끔 보이는 황량한 거리였다. 살짝 지루해질 무렵 점심을 먹을 겸 위구르족 마을에서 내렸다. 언젠가 가봤던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마을 모습과 닮아 있다. 세계는 이토록 신기하다. 어느 국경이든 그곳에는 교집합의 삶이 있고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여행자는 마치 깨달음의 퍼즐을 푸는 듯한 신기함을 느낀다.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서는 하미과(노란색 껍질의 멜론)를 비롯한 과일과 빵을 팔고 있다. 골목 안은 양꼬치 샤슬릭 굽는 연기로 가득했다. 샤슬릭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중국 신장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챙이’를 뜻하는 투르크어 ‘쉬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두툼하게 썬 양고기에 소금과 후추, 각종 향신료로 간을 한 후, 꼬치에 꽂아 숯불로 훈연한다. 특유의 풍미와 함께 씹을 때 느껴지는 풍부한 육즙이 일품이다. 다른 음식들도 대부분 맛있다. 우리나라 만두국과 비슷한 ‘펠메니’와 카자흐스탄의 대표 면 요리인 ‘라그만’으로 행복한 식사를 하고 난 뒤 보니 그제야 식당 안의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혼자 식사를 하는 촌로와 막걸리처럼 보이는 차를 마시는 호탕한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현지인의 얼굴엔 그 나라의 역사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차린 협곡. 15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겨난 계곡이다. 지질학적·생태학적 보호를 위해 200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 도착하니 몸을 날려버릴 듯한 세찬 바람이 격한 환영을 한다. 협곡 아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약 2km 트레킹을 했다. 황톳빛 기암괴석들과 ‘낙타가시’로 불리는 수풀 사이를 지났다. 닳고 닳은 관광지였다면 바위마다 이름을 붙이고도 남았을 터. 웨딩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핸드폰으로 추억을 담느라 바쁜 젊은이들의 모습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싱그럽게 다가왔다. 작심한 듯 트레킹 복장을 갖춘 유러피언들도 눈에 띄었다. 절벽 아랫길은 물론 윗길로도 트레킹이 가능하다니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장소임에 틀림없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엔 방갈로와 유르트(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쓰는 이동 가능한 주거 형태)가 갖춰진 에코파크리조트(Eco Park Resort)가 있어 숙식이 가능하다. 유르트에 머물면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도 보고 동틀 무렵의 협곡도 산책하며 하루쯤 문명과 동떨어져 쉬어가고픈 곳이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와 빅알마티 호수 알마티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는 사시사철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메데우 아이스링크를 지나 3단계에 걸쳐 케이블카를 나눠 타고 해발 3200m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구간 사이의 휴게소에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커피가 마련돼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독수리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다양한 즐거움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곧 맞이할 겨울 시즌을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정상에 올라 바에서 마신 맥주 한 잔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문득 스키를 좋아해서 세계의 스키장을 찾아다니는 친구가 떠올랐다. 사진을 찍어 보내주니 당장 올겨울 스키 여행지로 찜했다는 답신이 온다. 11월에부터 4월까지 스키를 탈 수 있어 겨울이 짧은 스키 마니아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과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로 선정될 만큼 자연설이 좋고, 별장부터 유르트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도 갖춰져 있다. 스키나 보드 장비 대여도 가능하다. 스키를 즐긴 후 근처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면 이보다 좋은 휴식이 없을 것 같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빅알마티 호수. 가는 길은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했지만 눈부신 에메랄드 호수를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은 달력 속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도 정겹다. 탐험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탐험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알마티 외 다른 도시들도 탐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2019-11-1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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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과 만나는 남도 답사 1번지
- 사의재 (四宜齎)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죽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늘이 되어주시던 주상이 승하하시고 나니 이 한 몸 간수할 곳이 없구나. 주상이야말로 나에겐 꽃이셨네. 꽃 잎인 한 분 형님은 순교하시고, 다른 한 분 형님은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유배되고...... 견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의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신유사옥(1801년) 때 유배를 당한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유배가 그렇듯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나이 40세. 그는 길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닌 마음의 길, 인생의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가 선택한 것은 미친 듯이 걷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라는 상실감이기도 했고, 끝나버린 인연의 아픔을 곱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치밀하게 준비했던 인생 계획표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진에 온 정약용의 초기 생활을 지켜보던 주막의 나이 든 주모가 어느 날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살려고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그는 변했다. 스스로 생활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사소한 기대를 통해 우선 현실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의미 부여와 노력을 통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태도를 바꾼 순간 다산은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4년 동안 그는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찾은 다산에게 이 시기는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묵묵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해서 본인이 묵은 방을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은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본래 경세제민을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이때의 시간이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구상하는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유배를 와서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를 복원하여 한옥 체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사의재가 있는 위치가 강진읍의 중심지여서 걸어서 ‘영랑 생가’와 ‘세계 모란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함과 함께 마루 턱에 앉아 고즈넉한 가을밤 달구경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가 울려오는 밤이 된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어머니가 문인인 윤선도의 딸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왔지만, 외가인 해남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다산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남의 외가에는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보관해 놓는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배기간에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는 외가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에서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나는 1818년까지 지냈다. 다산은 유배를 온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목민심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 실학과 조선 유학, 법의학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썼다. 그의 생애 업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게 학문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기본이 유학자이다 보니 먼저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의 기준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실학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을 메꿔준 이는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인 ‘혜장선사’였다. 그들은 대화하고 공감하며 화합하기 위해 초당 뒤 만덕산 백련사 가는 오솔길을 무수히 걸었다. 제한된 세상과의 통로였지만 소나무 숲길, 동백꽃 길, 차 밭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으며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두어진 하루하루는 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물리적 장치다. 하지만 다산은 초당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번뇌를 멈추고, 약천(藥泉)에 달인 차로 속기(세속의 기운)를 씻으며 스스로 인생의 격조를 올렸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한 것을 1957년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소나무 숲 ‘뿌리의 길’을 800m 정도 올라가면 고적한 유배 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ㆍ 차 달이는 부뚜막)’ 등을 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초당으로 가는 숲속 길에서부터 절제되고 제어된 기운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다산 학문의 핵심과 통하는 것이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아마, 동백꽃 핀 다산초당 숲길을 걷고 싶어서 그런지 모른다. 백운동 원림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의 감옥과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Notes from a dead house)”이라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감옥과 유배 생활을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집’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유배의 시간은 고통이고 지옥 같은 생활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본인 문학의 화두로 삼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유배 생활을 통해 무엇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고립이고 대립이며, 증오와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유배지의 폐쇄적 환경인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산이 선택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으로 나뉜다. 유배지에서 다산의 실천적 사랑은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다. 공상적 사랑은 초의선사, 이시헌 등과의 교류와 월출산 줄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과의 만남이었다.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강진의 자연을 만난 곳이 백운동 원림(園林)이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이담로가 조성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균형 잡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집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마당의 상지와 하지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화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다산은 그림을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스스로는 12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송하는 시를 읊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12곳이 ‘백운동 12 승경’이다. 1경: 옥판봉 (절경의 월출산 산봉우리) 2경: 산다경 (원림입구 동백나무 숲길) 3경: 백매오 (집 주변 언덕의 매화나무) 4경: 홍옥포 (대문 앞 단풍나무와 작은 폭포) 5경: 유상곡수 (마당의 여섯 굽이 물굽이) 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푸른빛 석벽) 7경: 정유강 (언덕 위, 용 비늘처럼 생긴 소나무) 8경: 모란체 (본채 아래 3단의 화단) 9경: 취미선방 (고즈넉한 세 칸의 초가 사랑채) 10경: 풍단 (창하벽 위 단풍나무) 11경: 정선대 (창하벽 위 정자) 12경: 운당원 (왕대나무 숲) 강진의 자연을 정원에 담은 이곳에서 다산은 견뎌냈다. 유배지에서의 견뎌냄은 사랑의 힘이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 원림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늘 그렇듯이 숲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온몸을 깨운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가을 햇살이 눈 부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문 앞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서려 있는 녹색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다. 낮은 담벽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은 수줍은 듯 여행자를 훔쳐본다.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청정한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앞마당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싶다. 다산처럼 건너편 차 밭에서 실려 오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자연과 통(通)하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 2019-11-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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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암 바로 알기’ 행사 열린다
- 불청객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암 극복 의지를 돕는 힐링의 장이 열린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암병원장 윤승규 소화기내과 교수)은 11월 4일부터 3일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소재 본관 지하 1층 대강당에서 2019 암 바로알기 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암 환자와 가족들의 암 극복의지를 돕기 위해 서울성모병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올해로 8번째다. 이 행사는 오전 9시30분부터 10개 암종에 대한 명의들의 강좌와 여성 암 환우 뷰티 강좌, 여행으로 푸는 인문학, 퓨전국악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었다. 첫째 날 대장암(이인규 교수), 유방암(윤창익 교수), 부인암(이근호 교수)과 둘째 날, 위암(김인호 교수), 폐암(김경수 교수), 갑상선암(배자성 교수), 마지막 날, 간암(장정원 교수), 췌담도암(홍태호 교수), 비뇨기암(하유신 교수), 골연부종양 · 전이암(정양국 교수) 관련 강연이 진행된다. 특강으로는 첫째 날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여성암 환우 뷰티 강좌), 둘째 날 정민아 여행작가의 ‘여행으로 푸는 인문학: 나를 만나는 시간, 여행’이 준비되어 있다. 셋째 날 이요셉하하TV대표 이요셉 소장의 웃음치료와 케이페라 린의 퓨전국악공연 등이 열린다. 행사장 주변에서는 환우ㆍ가족 수기 나눔, 환자치료사례 배너, 암병원 교원 칭찬 사연 보드 전시, 포토존, 희망 우체통이 마련되어 있다. 윤승규 암병원장은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의 우수한 의료진들과 다학제 협진 진료 시스템을 알리고 암 환우들을 위한 힐링의 장을 마련하여 참석하시는 모든 분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2019-10-3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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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中 여주 카라반, 운치를 벗삼다
- 캠핑카 혹은 카라반을 직접 끌면서 여행하는 것이 당장 어렵다면 편안하게 카라반 캠핑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캠핑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훌쩍 떠난 곳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여주 카라반’. 그런데 하필 비올 확률이 100%.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였으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라반에 들어가 체험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기에. 때론 100% 비 소식에도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진미. 하늘의 이치인 듯 상황에 적응하며 즐겨봤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카라반이나 캠핑카 등 바퀴 달린 것을 가지고 하는 캠핑을 알빙(RVing)이라고 부른다.‘카라반’은 주거시설을 갖춘 컨테이너를 차에 견인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고, ‘캠핑카’는 자동차 안에 캠핑을 할 수 있게 꾸민 것. 정식 명칭은 모터홈(Motorhome)이다. 카라반 파크와 카라반 체험장 외국의 경우 사막 혹은 너른 대지를 관통하는 도로 구간에 카라반 파크가 있다. 카라반, 캠핑카를 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장을 푸는 곳 말이다. 카라반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 그곳에 생활 터전을 잡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이들도 있다. 카라반에 관한 통상적인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많이 한다.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신 배경에 자주 카라반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초반 3~4개월 정도 카라반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농장이 많은 칠더스라는 곳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던 때 ‘슈가볼’이라는 카라반 파크에서 살았다. 구식이었지만 카라반에는 화장실 시설을 제외하고 소파와 주방, 개별적으로 분리된 침실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한국에서는 카라반 구경이 쉽지 않았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즐겨 보던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으니 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생활이었기에 그때의 카라반 생활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도 카라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여주 카라반은 외국의 사례처럼 오토캠핑족(차를 가지고 다니는 캠핑족)을 위한 장소는 아니고 말 그대로 카라반이 궁금한 이들에게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이색적인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체험 장소다. 4000여 평 규모의 대지에 평수와 형태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카라반이 초록빛 잔디와 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줄지어 서 있다. 나름 카라반 파크 현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재현해놓았으며 각각의 카라반에 개별적으로 데크와 어닝도 장착했다. 카라반을 이용해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도 가능하다고. 어쨌거나 카라반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마음 편하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험을 떠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중요 장소인 셈. 카라반을 엇비슷하게 본떠서 만든 카라반형 숙소 ‘아크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카라반이다. 여주 카라반은 미국의 포레스트리버 사의 카라반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들여왔다. 가장 큰 평수로 알려진 12평 규모의 ‘체로키 39KR’과 두 번째 규모인 ‘체로키 Q2’는 이곳이 아니면 체험하기 어렵다. 기자와 지인들이 묵었던 ‘체로키 Q2’에는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이 앞뒤로 두 개나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카라반 내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불편함은 없다. 뒤쪽 샤워장은 작게나마 욕실도 꾸며져 있지만 사우나를 즐길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대형 TV, 냉장고, 소파와 주방까지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간이 주거시설이라는 느낌을 넘어 가정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와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반 안에는 곳곳에 수납장이 마련돼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도로를 달릴 때 흔들림을 생각해 수납장 안에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 넣으면 떨어져 깨지거나 흩어질 일이 없다. 이곳 카라반의 수납장은 여닫이문을 달았지만 호주에서 이용했던 카라반 수납장 문은 미닫이였다. 차량 이동 시 충격에 의해 문이 열릴 수 있어 미닫이문으로 돼 있는 거라고 영국 친구가 설명해줬다. 체험장에 있는 시설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닫이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와 바비큐가 제법 잘 어울린 밤 주룩주룩 한없이 비가 내리던 그날, 카라반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짓고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바비큐는 실외에서 준비했다. 실내에서 연기를 피우면 경보장치가 울리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굽는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다행히 카라반 입구 앞 너른 공간을 어닝으로 가려줘 비를 피하면서 바비큐를 할 수 있었다. 카라반 체험을 함께한 지인이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등을 알뜰하게 준비해와 고마웠다. 곧 갖가지 채소와 구운 고기가 상 위에 올랐고, 우리는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각자의 새로운 관심사에 귀 기울였다. 공기 맑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10년 전에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지인은 “화장실 변기통을 비우고 물관, 전기 연결 등등 캠핑장에 도착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형 캠핑카로 변환한 점이 좋은 아이디어 같고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깔끔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피하지 않고 즐겼을 뿐인데 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비에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지만 카라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운치마저 느껴졌다. 태풍 걱정은 어느새 잊고 비의 낙차가 카라반 외벽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특별한 화음을 밤새 즐겼다. 카라반 생활 경험자가 본 여주 카라반 개인적으로 카라반은 내부 공간이 좁아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캠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집 밖을 나와 여행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는 자연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 눈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주에서 경험한 카라반은 호주에서 이용했던 것에 비하면 호화로웠다. 카라반 내부를 돌아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독거미, 운동화 속에 숨어 자는 생쥐가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국의 카라반 파크처럼 넓게 쓰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카라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돌아오던 날 아침, 100%의 비올 확률을 뚫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인 것을!
- 2019-10-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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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유예한다면 그게 무슨 인생?
-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 2019-10-0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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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중턱에 읽을 만한 신간
-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뒹구는 10월, 가을의 중턱에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취미로 직업을 삼다 (김욱 저ㆍ책읽는고양이) 일흔의 나이에 안락한 노후를 뒤로하고 취미였던 독서를 밑천 삼아 밥벌이를 시작한 늦깎이 번역가의 생존분투기를 그렸다. 저자는 젊은 시절 문학인이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신문기자의 길을 택한다. 퇴직 후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쫄딱 망해 남의 집 묘막살이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잠시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펼쳐보기로 한다. 그렇게 일흔이 넘어 시작한 제2직업을 통해, 15년 동안 무려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고 ‘폭주 노년’, ‘삶의 끝이 오니 보이는 것들’ 등의 저서를 펴내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우리는 모두 미지의 존재”라며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재능은 나이 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풍성해진다”고 용기를 갖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길 조언한다. 더불어 사회적 운명에 휘둘리며 보낸 과거를 벗어나 이제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길 강조한다. ◇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 저ㆍ스노우폭스북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의 전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어린아이, 청년, 노인, 그리고 저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각기 다른 죽음의 방식을 보여주고, 현재 삶의 의미를 고찰하게 만든다. ◇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임운석 저ㆍ시공사) 돈, 시간,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현대인들을 위한 짧은 걷기 여행 팁을 담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부터 빈티지 감성 골목길, 수도권 인근 바닷길 등 다양한 콘셉트에 따라 사시사철 걷기 좋은 40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 품위 있는 삶 (정소현 저ㆍ창비) 2019 이효석 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비롯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예기치 못한 죽음, 또는 준비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외면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 대한민국 요즘 여행 (옥미혜, 서준규 공저ㆍ알에이치코리아) 각종 빅데이터를 활용해 약 3년간 공들여 찾아낸 국내 여행지 32개 도시, 738개 장소를 명소, 맛집, 카페, 숙소 등으로 나눠 정리했다. 22가지 테마 여행 콘텐츠를 비롯해 휴대용 ‘베스트 150 지도’까지 담겨 있어 실용적이다.
- 2019-09-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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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 레저, 캠핑의 즐거움
- 현대인 대부분은 도시에서 삽니다. 패스트푸드와 공장에서 찍어낸 음식이 가득하고, 매일 국적도 모르겠는 음료수를 마시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삶이 반복되는 그 도시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거대 도시는 스트레스 공장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떨쳐버리려고 산소 공장인 자연을 찾고 캠핑을 합니다. 캠핑(camping)이란 무엇일까요? 수많은 종류의 여가활동이 있지만 캠핑은 특별합니다. 반드시 ‘자연’을 찾아가야 하거든요. 스쳐 지나며 눈에 담기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속으로 뛰어듭니다. 거기서 자연의 세심한 변화와 숨결,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교감합니다. 그러니까 캠핑은 자연 속에 온전히 함몰되는 아웃도어 활동인 거죠. 이보다 더 근사하게 자연을 누리는 방법이 있을까요? 단언컨대 캠핑은 자연을 만나는 가장 멋진 여행법입니다. 캠핑의 매력은 참 많습니다. 가족을 모이게 합니다. 넉넉하고 싱싱하고 맑고 평화로운 자연의 품속은 더 솔직하고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연은 그 어떤 환경보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묘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별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밤, 그윽한 달빛 아래 풀벌레 소리 정겨운 가을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는 밤, 빗방울 소리 감미로운 텐트 안에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술잔을 기울이노라면 어떤 철옹성도 무너지고 맙니다. 특급호텔이 주지 못하는, 자연이 가진 힘입니다. 진화하는 캠핑 문화 사실 자연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한데’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니 캠핑을 떠나려면 먼저 자연에 대해 이해하고 친근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풀과 꽃과 나무, 그곳을 터전삼아 사는 곤충과 새, 날씨와 계절의 변화까지. 기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캠핑은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모든 짐을 챙겨야 해서 수많은 장비를 갖춰야 합니다. 또 장비 사용법을 익혀야 하죠. 장비구입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많은 짐을 이동시키기 위해선 공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 짐을 꾸려야 해서 수납의 압박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캠핑장에 도착해서도 모든 세팅을 완료하기까지는 평균 한두 시간은 걸리고, 캠핑이 끝난 후 철수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캠핑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장비를 손질하고 다음에 사용하기 편하게 정비하는 데도 힘을 써야 하죠. 참 수고로운 일입니다. 그 수고와 불편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쉽고 편리하게 바뀐 캠핑 문화 그렇다고 부담스러워할 것도 아닙니다. 몇 해 전의 캠핑 열풍은 캠핑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쉽고 편리하게 바꿔놓았거든요. 먼저 캠핑의 형태와 방식이 크게 발전·변화했습니다. 캠핑장 정보가 풍부해졌고, 열악한 시설의 캠핑장들이 도태되며 전체적인 캠핑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모든 시설을 갖추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캠핑카가 흔해졌고, 어떤 이들은 직접 캠핑카를 제작하거나 자신의 차량을 개조하기도 합니다. 차량의 지붕에 텐트를 올리거나 짐칸에 맞춤한 텐트를 설치해 숙박을 하는 ‘차박’도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모든 시설이 갖춰진 곳에 먹을거리만 챙겨가서 캠핑을 즐기는 ‘글램핑’ 전문 캠핑장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캠핑이 국민 모두가 즐길 수 있게 가깝고 쉬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장비의 발전이 눈부십니다. 예전엔 텐트와 취사도구, 침낭이 장비의 모든 것이었죠. 요즘엔 캠퍼들이 캠핑을 하다가 필요성을 느껴 직접 개발한 수많은 장비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든 장비들은 더 가볍고 튼튼하고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어져 캠핑을 점점 쾌적하게 해주고, 수고도 덜어줍니다. 텐트 안에 서서 움직일 수 있는 대형 텐트인 리빙쉘에 커다란 타프를 설치하고, 그 속을 온갖 장비들로 가득 채워서 즐기는 캠핑이 부담스러운 이들은 최소한의 장비를 준비해 떠나는 ‘미니멀 캠핑’을 즐깁니다. 여기에 맞춰 소형 승용차 트렁크에 모두 싣고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의 작고 튼튼한 텐트와 타프, 부피가 작고 가벼운 장비가 많이 출시되었습니다. 요즘은 편리함에 더해 감성 캠핑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좀 더 분위기 좋은 재료와 모양, 기능을 갖춘 장비가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예전엔 접근이 쉽지 않은 전문 분야에 속하던 캠핑 방법이 다양해지고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이 낮아졌습니다. 간단한 기본 지식만 익히면 푸른 언덕, 맑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별을 헤며, 소쩍새 소리에 취하는 하룻밤 한뎃잠을 즐길 수 있습니다. 노년, 캠핑을 즐기기에 최적 얼마 전에 본 백발의 부부 캠퍼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함께 텐트를 세우고 장비를 펼친 후 장작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다정스럽고 귀해 보였습니다. 평생 자녀를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을 텐데, 이제는 까맣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나이가 되어 함께 오순도순 소꿉장난하듯 캠핑을 즐기시더군요. 젊은이들이 장비 자랑하며 하는 캠핑에서는 볼 수 없는 안정되고 편안하며, 아름다운 풍광이었습니다. 캠핑이 노년의 삶에 그리 잘 어울리는 것인 줄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백세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80~90은 어르신의 기본 나이가 되었습니다. 예전엔 60~70만 되면 철마다 관광버스를 타고 전국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획일적인 ‘효도관광’을 즐겼지만 그런 구태의연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해외 유명 트레킹을 떠나고, 배낭을 꾸려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며,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가 하면 캠핑카로 전국을 유랑하는 시니어를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건강하고 즐거우니 무엇인들 못할까요!
- 2019-09-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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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란 자신을 찾아가는 천직 여행”
- 인생을 2모작도 아닌 5모작까지 치르고 지금은 6모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람, ‘N잡러’ 장필규 행복 제1연구소 소장은 1955년생으로 정확히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100% 베이비부머다. 그는 요즘 프리워커로서 고용노동부 내공강사, 노사발전재단 전문강사, 경기도 6차산업 현장 코칭 컨설턴트, 인천농촌융복합 현장코칭 전문위원 등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년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는 셈. 장차 6모작을 넘어 9모작까지 완성하는 게 꿈이라는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삶과 잡(job)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제 인생의 4모작은 50플러스재단 컨설턴트였고, 5모작은 N잡러로 활동하는 지금이죠. 이제 6모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니어에게 일은 새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여행하듯이 즐거움을 찾는 거지요.” ‘N잡러’ 장필규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지방자치단체의 컨설턴트와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9모작을 최종 목표를 두고 6모작을 준비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어 케어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네요.(웃음)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대에도 취약 계층이 있을 거예요. 제 연배의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예전에 거창에서 일할 때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같은 입장이 될 텐데 이야기 들어주고 도와주니 즐겁더라고요.” 퇴직 없는 삶 위한 평생현역 꿈꿨으나… 그의 이름에는 베풀 장(張), 도울 필(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줄 때 베풀고 도와주라는 의미로 새긴 게 아닐까. 현재 그의 모습은 이미 숙명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1년 두산그룹 계열사인 배합사료 회사 두산곡산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펼쳐지던 시기였고 그의 삶 또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그도 사회적 환경에 따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에게 던져진 자리는 두산종합식품 식품사업 부문의 김치공장 관리부장.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공장으로 간 그는 관리부장, 공장장을 거치며 10여 년간 김치 제조의 일선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두산이 식품사업 부문 전체가 대상에 매각될 때 그는 6년 후배가 상사로 승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대상 소속으로 2년 정도를 더 지내다 2008년 4월에 퇴직한다. 끊임없는 도전, N잡러로 거듭나다 54세의 나이, 인생 1막이었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27년은 끝이 났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치주염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는 수술 후 재취업을 도와주는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법, 면접 스킬 등을 교육받은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농업 최고경영자 경영대학원 과정에 합격한 뒤 몇 번의 테스트까지 통과하며 마침내 울진농수산물유통농업회사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올라간 자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결국 대표 자리를 그만둔 그는 마침 일본 회사와 울진군의 합작 회사인 울진로하스코리아에서 대표 제안을 해와 CEO로서 3년을 지냈다. “인생 2막의 과정은 지방에서 CEO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재무 문제도 해결되고 가족관계는 물론 건강도 좋아졌죠.” 울진로하스코리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2년 말부터 일자리희망센터를 찾고 취업박람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진흥청에서 마케팅 전문위원으로 인생 3막을 펼쳤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하며 농가 500곳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어 서울시 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고용노동부 등지에서 강사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4막의 장을 펼쳤고 진정한 N잡러가 되었다. 수입 적더라도 즐거움 주는 천직 찾아야 “이제 베이비부머들은 잡(job)이 아니라 워크(work)를 해야 해요. 워크는 천직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시니어 구직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제2인생에서는 일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일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수입은 적더라도 길게 오래할 수 있는 천직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직업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세 개 내지 다섯 개는 가지고 있어야 과거 연봉의 절반 정도가 되죠. 특히 시니어는 공부를 위한 비용이나 손주들 용돈, 네트워크 유지비 등 지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관계의 유연성이다. “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제 주위를 보면 어떤 사람과는 케미가 맞지 않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건 취향이기에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순 없죠. 다만 기왕이면 유연성을 갖고 적을 만들지 말아야 평화롭고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 유연함으로 세상 대하기 그런데 삶의 부침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유연성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어느 접점에 있든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많아져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그는 도전적이라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해온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도 그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사학위를 가진 시니어도 일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인은 디테일에 약해요. 그래서 매뉴얼이 있어도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써먹지 못합니다. 습관화가 안 된 게 문제입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계속 반복하고 고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구직을 하려면 ‘어떻게’에 관한 디테일한 액션 플랜을 짜서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테스트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이기에 신뢰가 갔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천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는 그도 구직자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구직자들을 상담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양쪽을 다 경험해본 그에게 두 입장에 대해 물어봤다. “구직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게 세분화, 효율화되고 향상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시도가 진행되다가도 중간중간 끊기더라고요. 그게 아쉽죠. 그리고 구직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래도 구직을 위해 오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거예요. 흔히 퇴직하면 ‘또 직장생활을 해야 해?’, ‘날 찾아주는 데는 없어’ 하며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죠.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퇴직하는 순간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무책임한 거죠. 그런 심리를 어떻게 끌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그는 은퇴자 혹은 퇴직자들이 자기진단을 해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적합한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자신을 파악하고 일을 찾다 보면 현실의 갭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걸 인내하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인 중에 20년 동안 독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결론은 나를 찾게 되더라’ 하더군요.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준비하면 일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욕심의 분모 줄이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이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 더욱 의욕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0세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것’이라고 한 말을 다시 전한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어요. ‘60~65세가 자신의 황금기였다’는 김형석 교수님 말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N잡러 장필규 소장은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소욕지족(少欲知足)에 비유했다. 행복해지려면 욕심의 분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의 분모를 자꾸 키우면 내려놓기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100분의 60과 60분의 60을 비교해보세요. 후자는 60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죠. 이렇듯 분모를 줄이면 60분의 60이 1이 되듯 가벼워집니다. ‘1’과 ‘일’처럼 디테일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 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결국 ‘1’과 ‘일’처럼 은퇴 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죠.”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많고 적음을 떠나 돈과 건강, 관계, 여가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강조하는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고 여행하듯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담대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 2019-08-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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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속의 작은 섬 소무의도 한 바퀴
- 인천 무의도에 딸린 섬, 소무의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2년에 소무의도 둘레길인 무의바다누리길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무의도는 해안선 길이가 2.5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 여행의 매력을 다 갖췄으니 가성비 좋은 섬이라고나 할까. 섬 둘레를 걸으며 고깃배가 들락거리는 아담한 포구와 정겨운 섬마을 풍경, 74m 높이의 아담한 산과 푸른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 탑승▶광명항 하차▶소무의인도교길▶마주보는길▶떼무리길▶부처깨미길▶몽여해변길▶명사의해변길▶해녀섬길▶키작은소나무길▶광명항에서 1번 버스 탑승/하나개해수욕장 하차▶하나개해수욕장 촬영세트장▶해상관광 탐방로▶1번 버스 타고 용유역 하차 미니버스 타고 무의도로 가는 길 올해 4월 무의도에 연륙교인 무의대교가 놓였다. 배 출항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든 맘 편히 섬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의도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뚜벅이 여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 철도를 타고 용유역에 내린 뒤, 길 건너에서 무의도행 1번 미니버스로 갈아탄다. 거잠포와 잠진도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갯벌 위에서 낮잠 자는 작은 고깃배와 조개를 캐는 주민들이 보인다. 무의대교가 생기기 전,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를 무시로 오갔던 배 두 척은 먼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다. 승선 시간이 고작 5분이었지만, 뱃머리에 서서 섬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던 일이 영영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니버스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무의대교에 올라타자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한 미니버스는 고개 넘어 섬 끝 광명항으로 달린다. 미니버스가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리조리 잘도 달린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앉은 중년여성이 “아, 너무 좋네. 자주 와야겠다”라며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물으니 반문한다. “안 좋으세요? 무의도에 사세요? 전 서울에서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좋네요. 다음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겠어요.” 무의도의 매력을 오래전에 깨달은 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무의도의 진주,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미니버스의 회차 지점인 광명항(소무의도 입구)에 하차한 뒤 무의인도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가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잇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무의바다누리길 안내판을 훑어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소무의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마주보는길’, ‘몽여해변길’, ‘부처깨미길’ 등 구간이 8개나 되지만 총 거리는 2.4km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무의바다누리길의 1구간인 ‘소무의인도교길’를 건너며 소무의도를 굽어본다. 갯벌이 드러난 떼무리포구에서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길 기다린다. 포구 앞 서쪽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구멍가게에 들러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을 사 마시고 더위를 식힌다. 인상 좋은 주인에게 듣는 마을의 이모저모는 덤이다. 떼무리포구와 서쪽 마을 앞을 지나는 방파제길이 2구간 ‘마주보는길’이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면 관광안내소가 나오는데 안내소 옆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끝에서부터 그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당산이 있는 이 숲길이 3구간 ‘떼무리길’이다. 흙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4구간 ‘부처깨미(꾸미)길’ 안내판이 나온다. 전망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 소무의도 주민들이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부처깨미에서 다시 1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또 나오는데 이곳은 포토존이라 할만하다. 초승달 같은 몽여해변과 동쪽 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대부도, 영흥도, 선재도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해는 누렇다는 편견을 반박하듯 오늘따라 바다 빛이 푸르디푸르다. 전망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5구간 ‘몽여해변길’을 거닌다. 부모와 놀러 온 아이들은 갯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산과 바다를 여유롭게 즐기는 산책길 바다 풍광 좋은 몽여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생긴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주인이 바다 쪽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준다. 손님들이 “와 오늘 바다 예쁘다!” 환호한다. 빨간 파라솔 아래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나가는 고깃배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카페 가까이에 있는 바다이야기박물관을 지나면 곧 언두꾸미에 닿는다. 이곳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언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주목망 어업을 하는 곳이다. 언둘꾸미가 변해 언두꾸미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에 둘둘 말아놓은 그늘이 잔뜩 쌓여 있다. 언두꾸미를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를 타고 넘어 6구간 ‘명사의해변길’에 도착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휴양 왔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몽돌 해변이다. 바닷가에 하얀 굴 껍데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뚝 선 절벽이 해변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명사의해변을 지나면 안산 꼭대기로 오르는 숲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나무 계단도 기다린다. 숨을 조절하며 중간쯤 오르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녀도가 훤히 보인다. 옛날에 해녀가 물질하다가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해녀도 뒤로 섬들과 풍력발전기 대여섯 기가 아슴아슴 보인다. 바다와 섬 사이에 해무가 껴 섬들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길이 7구간 ‘해녀섬길’이며 무의바다누리길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정상에서 하도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하도정 주변에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8구간을 ‘키작은 소나무길’이란 이름 붙였다. 하도정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소무의인도교가 코앞에 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굽어보니 어느덧 바닷물이 차올라 갯벌에 박혀 있던 배들이 둥둥 떠올랐다. 광명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개해수욕장 해상관광 탐방로 하나개해수욕장은 ‘섬에서 가장 큰 개펄’이라는 뜻을 지녔다. 해변은 모래밭이고, 썰물 때는 진득한 갯벌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갯벌 흙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을 즐기며 일몰을 감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해변에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칼잡이 오수정’의 주택 세트장이 있다. 실내 관람은 할 수 없다. 세트장 뒤로 해안관광 탐방로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데크를 걷다 보면 호룡곡산 등산로와 해안관광 탐방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를 뒤로 하고 해안 쪽으로 내려선다. 해안관광 탐방로는 작년에 무의도 해안절벽 옆에 조성한 해상산책로다. 만조 때는 파도 때문인지 약간 흔들거린다.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꽤 스릴 있다. 해안절벽에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탐방로 난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억지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자꾸 안내판 사진과 비슷한 바위를 찾으려 애쓰게 된다. 밀물 때는 갯바위가 잠겨 일부만 찾을 수 있다. 가장 그럴싸한 바위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형상의 원숭이 바위다. 탐방로 끝 해안가에 있다. 이 탐방로는 한낮보다는 해질녘 바닷바람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다. 매일 물때가 변하므로 이곳에 갔을 때 바닷물이 싹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안내판 속 바위들은 다 찾을 수 있으니 밀물이어도, 썰물이어도 좋으리라. 탐방로 개방 시간은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이다. 주변 명소&맛집 무의도의 휴양지 실미도 실미도는 무의도의 부속 섬이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정부의 사살 명령을 받고 온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던 중 자폭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가 개봉해 큰 관심을 얻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마다 무의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드러난다. 이 다리를 건너 실미도를 관통하는 숲길을 지나면 섬 반대편 해변이 나온다. 실미도 영화 세트장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갯바위와 고요한 해변만 남았다. 실미도와 마주 보고 있는 실미유원지에는 100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 군락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숲에서 야영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다. 하나개해수욕장보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하거나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기기에 좋다. 맛집과 카페 무의도는 바지락 칼국수와 영양굴밥, 조개찜이 유명하다.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유원지, 광명항에 횟집과 식당이 많다. 실미유원지에서는 ‘해송회식당’이 입소문 났다. 진한 바지락 국물에 감자와 각종 채소로 맛을 낸 바지락칼국수가 일품이다. 칼칼한 국물이 입맛을 당긴다. 용유역 앞 ‘은행나무집’은 영양굴밥을 잘한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 있는 ‘섬카페좋은날’은 루프톱 카페다. 옥상에 폭신한 소파를 준비해두었다. 길가에 있어 걷는 중에 잠시 들리기 좋다. 여행 tip 1. 대중교통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탑승장에서 2-1, 222번 버스 탑승, 용유역에서 하차한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로 갈아타 종착역인 용유역에 하차,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탄다. 모노레일은 무료이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15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국제공항역에서 용유역까지 약 12분 걸린다. -용유역 앞에서 1번 버스가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10여분 늦어 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넓으므로 하차할 때 버스 시간을 알아두는 게 좋다. 2. 실미도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개해상관광탐방로는 물때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으나 바다 위를 걷고 싶다면 물때를 확인해야 한다.
- 2019-08-26 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