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가에 미소 짓게 하는 어린 시절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아래 작은 도랑이 흐르는 포근한 동네…. 막내 오빠와 그 친구들이랑 논밭 사이를 선머슴처럼 마구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 그랬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래 눈부시던, 아름다운 경남 진주시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극히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는 육 남매를 두셨는데, 필자는 그중 다섯 오빠를 둔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덕분으로 필자 가족은 관사에서 생활했다. 관사에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아담한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며 필자의 정서를 포근하게 살찌워 갈 수 있었다. 그 텃밭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은 유난히도 차가워 여름날 오빠들의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됐고, 여러 과일을 담가 식힌 뒤 먹기도 좋았다. 과일 접시를 한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필자를 미소 짓게 한다.
◇ 교사의 꿈을 꾸기까지의 청소년기
당시 필자가 입학한 진주사범학교부속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는데, 입학 당시 엄마는 손수 교복을 지어 입혀 주셨다. 감색 교복은 필자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교복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습이있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학생’이란 생각에 교복 입을 때마다 행복감에 져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하게 됐다. 전입한 서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경상도 말씨를 쓰는 필자를 신기해하며 놀렸고, 이 때문에 점점 말이 없는 아이, 폭넓은 친구들의 사귐이 없는 소심한 아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담임으로 박병직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 선생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파악하셨고, 또 그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애써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성년이 돼 38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첫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의 진학은, 학업 성적이 남달리 월등하지도 못했고, 또 당시 멀미가 심해 버스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입시가 있었는데, 그 입시에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입시 과목은 국어, 산수였는데, 시험을 마친 필자는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대뜸 산수 시험 문제 하나를 거론하시며, 답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하시기에 ‘12’라고 말씀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수화기를 드신 채 직원들에게 대견한 딸이라 자랑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날 밤, 당신의 막내딸이 어려운 산수 문제 하나를 맞춘 것이 그리도 신이 나셔서 한턱내셨단다. 별로 뛰어나지도, 그리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이 막내딸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키가 제법 큰 중학생 딸을 초등학생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곧잘 여기저기 다니시기를 즐겨 하셨다. 자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대하실 때 한층 더 엄하셨다. 그것은 막내인 데다가 고명딸이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애정까지 받아 혹 남들로부터 버릇없이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실까 봐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땐 정말 철부지였었기에 한때 ‘내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홀로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중학교 2학년 6월 필자는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었고, 그 충격으로 필자는 다시 말이 적은 아이가 됐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여고 시절이 시작됐다. 13년 위인 나의 큰오빠는 다섯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셨다. 특히 큰올케의 뒷바라지는 나에게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가족은 서로 양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형제들이라는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육 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우시고 올바르게 가르치시느라 그 어느 어머니보다 피땀 흘리시며 사셨던 어머니. 지금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코끝이 시큰해 온다.
나의 신앙생활도 이때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 신앙심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다 보니, 중학교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감사가 넘쳤고 생기가 충만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교단에 서서 후진 양성에 젊음을 불태우리라는 인생의 꿈을 찾으면서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고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및 교직 생활
필자는 대학 입시 예비고사는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 후기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진학한 대학은 사범대학으로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였다.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신입생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선발돼 적극적이고 활달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선배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나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학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과 연극제에서 두 번의 주연으로서 무대에 선 일과 학과의 전 학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학생회 후보로 출마한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의 가슴 어디에 그러한 열정이 숨죽이고 있다가 폭발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4학년 때, 최선을 다해 순위고사(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꿈꾸어 오던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부터 교직 발령이 나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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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퇴직하기까지 아홉 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약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에 몸을 담았다.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중에 받은 표창(교육장, 교육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등)들은 내게 더욱 잘하라는 격려와 지지가 돼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참으로 신명 나게 교육의 현장을 즐겼다.
49세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논하고, 젊은 교사들과 교육을 고민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던 것과 나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의 열정과 낭만을 맘껏 즐겼던 2년간의 그 시간도 참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간의 많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과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많은 일이 지금도 파노라마로 스친다.
◇ 교단을 떠난 후 ‘오늘’지난 2012년 8월, 약 38년간 교단을 지키다가 깊은 번뇌를 거쳐 명예퇴직을 결심하였다. 명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인생 후반전에 훌쩍 접어드니, 그간 바쁜 생활로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이 불현듯 아쉬웠다. 먼저 남편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고,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사람과 자연을 여유롭게 만나고 싶었다.
둘째, 크리스천으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 세태의 변화로 평생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직에 깊은 회의가 찾아들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 한계를 만났는데, 그것을 뚫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퇴직 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며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등을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회 될 때마다 임산부와 어린 친구들에게 태교동화와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있으며, 동년기자단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바삐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또한 나의 든든한 언덕이 돼 주는 후원자이자 조력자인 남편, 그리고 언제나 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때론 조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딸, 사위, 아들, 며느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단지 세 손주가 있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성인이 돼 가끔 만나 식사하며 차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기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필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타적 삶을 살아갈 것을 자신에 주문해 본다.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패션을 완성하는 데 있어 옷과 함께 소품의 역할도 중요하다.
남자와 여자,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르고 다양한 아이템들이 많이 있다. 시니어가 선택해야 할 패션 마무리 4종 세트를 정리해봤다.
더운 여름 스카프는 필수
스카프만큼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소품은 없을 것 같다. 단조로운 옷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하다. 스카프가 꼭 겨울에만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여성패션브랜드 베르띠 연희동 매장 오금희 실장은 ‘스카프는 여름에 더 많이 필요한 아이템’이라고 조언했다. 에어컨 사용으로 실내외 온도 차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에어컨 앞에서 숄처럼 몸을 감쌀 것이 필요하다. 특히 기관지가 약한 시니어는 가방에 작은 스카프 하나는 가지고 다니시길. 봄·여름에는 구김이 가도 멋스러운 분위기 연출이 가능한 린넨 소재를 권한다. 재킷 안에 입는 티셔츠보다 더 그날의 패션을 좌우해주는 것이 스카프다. 시니어의 경우 멋을 부리고 싶은데 액세서리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있다. 편하지 않고 행동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스카프는 날씨가 안 좋을 때, 우아하게 하고 싶을 때, 여름에 탁한 색의 옷을 입었을 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방, 가벼울수록 좋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가벼운 가방이라도 어깨가 아파서 들기 싫어진다. 그래서 가죽 가방 대신 가벼운 천 가방에 손이 가기 마련. 연희동 골목에서 발견한 가죽 수공예 브랜드 플라네르는 무겁고 딱딱한 가죽 가방의 단점을 보안해, 주위의 시니어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무조건 가방은 가벼워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들었다. 루이비통 가방 손잡이로 사용하는 천연 가공된 소가죽에 쪽빛으로 색감을 입혔다. 가죽의 성질, 가방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게 쪽 염색의 매력. 시간이 지나면 자연 태닝이 된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청이 되기도 하고 카키색 혹은 노란색으로 변한다. 금속 장식이 없고 형태가 단순한 이유도 무게 때문이다. 제품을 구입하는 시니어는 주로 작은 사이즈를 찾는다. 100% 손바느질로 제작된다. 주문 제작이기 때문에 사이즈는 조정할 수 있고 주머니 추가도 가능하다.
어떤 신발을 신으시겠습니까?
건강에 신경 쓸 나이. 기능성 신발을 찾는 시니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요족(발의 아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있는 변형으로 평발의 반대변형)인 경우 무릎 통증이, 평발인 경우 허리 통증이 있을 수 있다. 발의 형태에서 오는 압력의 차이에 따라 골반이 틀어지기 때문에 신발 선택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굽은 될 수 있는 대로 낮은 것을 권한다. 3.5cm 밑으로 신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수제화 소상공인 협동조합’에 따르면 이곳에서 수제화를 주문 제작하는 시니어 여성의 경우 10명에서 3명꼴로 엄지발가락이 위로 들리고 틀어지는 무지외반증을 앓고 있다. 20대서부터 신어온 하이힐 등으로 발에 악영향을 준 것이다. 230g정도 되는 경량화나 발 형태에 맞춘 기능성 수제화를 신어 조금이라도 건강한 걸음걸이를 유지하자.
기능성을 강조하지만 스타일은 버릴 수 없는 법. 키 높이 굽을 찾는 시니어 남성도 많다. 7cm 키 높이 굽의 경우 밖으로 5cm굽을 보이고 발등을 높여 2cm를 안으로 숨기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오히려 시니어 여성들은 낮은 굽에 어두운 계열을 찾는다고 수제화 소상공인협동조합 측은 덧붙였다.
신중년의 청바지, 이렇게 고르자
중년 남성이 청바지를 고를 때 고민은 흔히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밑위(허리 버클부터 다리 사이까지의 길이)가 넉넉한가? 둘째, 통은 좁지 않은가?
30대의 허리 32사이즈와 5,60대의 32사이즈는 확연히 다르다. 나이가 들면서 골격과는 무관하게 배에 지방이 쌓이고 엉덩이와 허벅지의 형태에도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같은 32사이즈라도 젊은이의 청바지는 중·장년층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청바지가 신중년에게 적당할까?
중년 청바지 전문몰 ‘두 번째 청춘 주인’(www.juinn.co.kr)의 임수정 대표는 ‘밑위가 길고, 배꼽 위에서 버클을 잠글 수 있어야 중년에게 편안한 청바지’라고 조언했다. 또한 원단이 피부에 닿지 않게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통이 넉넉한 것이 좋다. 일자로 쭉 떨어지되 다리에 전혀 붙지 않는 ‘일자(스트레이트)핏’ 혹은 그보다 더 통이 넓은 ‘루즈핏’ 청바지를 고르는 것이 좋다. 신축성 좋은 원단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통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소재가 뻣뻣하고 무거우면 움직임을 방해해 청바지 입기가 꺼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매치시켜서 입어야 좀 더 멋진 중년의 청바지룩을 완성할까? 바로 콤비 재킷과 셔츠, 구두와 청바지의 조합이다. 쉽게 말해, 정장 바지를 청바지로 대체하는 방법. 깔끔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벨트와 구두는 같은 색으로 맞춰 착용한다. 여기에 캐주얼한 정장 재킷까지 더한다면 젊은 친구들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중년남성의 중후함이 완성된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
체온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체온이 1도 낮아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진다고 한다. 암세포는 35도에서 가장 증식을 활발하게 한다고 한다. 결론은 체열을 통상적인 정상온도 36도보다 높은 37도가량 유지해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체온면역설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 의사 사이토 마사시가 쓴 란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0년 출간 이래 일본에서 80만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사이토 마사시는 일본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종양내과 전문의다. 그는 이 책에서 체온이 1도 내려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지고 반대로 1도 올라가면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강조한다.
이론적 토대는 일본의 면역학자 아보 도루박사가 제시했다. 일본 니가타대 의대에서 면역학을 가르치는 그는 체온저하가 교감신경을 활성화하고 이것 때문에 백혈구 가운데 림프구가 감소하면서 면역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을 통해서다.
우리나라에선 한의학을 중심으로 체온면역이론이 중시되고 있다. 2015년 12월 14일자 한 신문에 따르면 메르스 유행 시 환자들의 체온이 신기하게도 36.5도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의사의 고백이 나온다. 처음에는 체온계 고장을 의심했지만 체온계는 정상이었고 환자들의 체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폐암을 앓다 완치된 환자의 사례도 나온다. 진단 시 체온이 35.8도였지만 수술과 생활습관으로 완치되어 11년째인 요즘 37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스나 폐암이 체온저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체온과 면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정말 체온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리고 체온을 높이면 건강에 도움을 줄까? 나는 체온면역설이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들이 말하는 체온의 정의가 모호하다.
알다시피 체온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강체온, 직장체온, 피부체온까지 측정 부위에 따라 다르다. 생리학 교과서를 보면 직장체온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나체로 건조한 공기에 노출될 때 11.7도에서 54.5도까지 0.6도 안팎으로 일정한 체온을 유지한다.
구강과 직장에선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극심한 추위에선 35.6도까지 떨어지고 극렬하게 운동할 땐 40도까지 오를 수 있다. 피부체온은 가장 변동 폭이 크다. 보통 적외선 카메라로 측정하는데 외계온도에 따라 10도 이상 춤을 춘다. 추운 겨울에 재면 내려가고 더운 여름에 재면 올라간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부체온이 대개 구강과 직장보다 낮게 나온다는 것이다. 피부체온은 실온에서 잴 때 보통 33도이며 구강체온은 36도, 직장체온은 37도를 보인다.
기사에 말하는 메르스 환자의 체온을 어떤 방식으로 쟀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동일한 환경에서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기사에선 누가 몇 명을 대상으로 어떻게 측정했는지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피부체온이라면 당연히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둘째 면역의 정의가 모호하다.
면역은 대단히 어려운 주제다. 아직까지 면역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검사는 없다. 백혈구 숫자나 아드레날린 수치 등 몇 가지 작은 지표 하나를 갖고 면역이 올라갔다 혹은 내려갔다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면역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이토 마사시의 책을 구석구석 읽어보았지만 어디에도 면역이 어떤 방법으로 측정한 것인지 설명이 없다. 대단히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다. 14페이지에 “체온이 1도만 내려가도 면역력은 30퍼센트나 떨어진다”라고 나와 있다. 앞뒤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20퍼센트도 아니고 40퍼센트도 아니고 하필 30퍼센트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15페이지엔 “반대로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은 무려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 설명이 없다. 숫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왜 그러한지 기전에 대한 설명도 없다. 나의 말이 곧 진리니까 그대로 믿으라는 것처럼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보 도루 박사의 책에선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는 백혈구 안에 림프구와 과립구 숫자의 비율로 설명했다. 체온이 내려가면 교감신경이 흥분하면서 림프구의 비율이 줄고 그래서 면역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면역=림프구 비율’로 바라보는 단순함에 놀랐지만 그래도 약간이라도 그럴 듯한 설명을 해준 게 어딘가 싶다. 마찬가지로 그의 책 어디에서도 30퍼센트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셋째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경우다.
설령 그들의 주장이 백번 옳아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이 떨어진다고 해도 체온저하가 정말 면역저하의 원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단순히 통계적 연관성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 질병이 있거나 몸이 안 좋으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체온저하는 몸이 안 좋거나 질병이 있어서 나타난 하나의 결과일 뿐인데 겉으로 보기에 몸이 좋지 않게 된 혹은 면역이 떨어진 원인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내놓는 대책이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 운동해서 근육을 키우라고 말한다. 여기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 면역을 포함한 우리 건강에 도움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틀렸다. 엉뚱하게 체온을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체온은 대뇌 깊숙이 위치한 시상하부가 관장한다.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게 정상이다.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인간은 항온동물임을 기억해야한다. 체온은 올라가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둘다 바람직하지 않다.
서적뿐 아니라 이와 관련한 국내언론의 보도도 문제가 많다. 메르스 환자가 체온이 낮았다는 기사는 어이가 없다. 어떤 연구기관에서 어떤 방법으로 몇 명을 대상으로 측정했더니 결과가 어떠했다는 기본적인 팩트도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익명의 누가 그러더라’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폐암 환자 완치사례에 대한 기사도 단지 한 사람의 케이스만으로 전체 폐암으로 일반화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암세포가 35도에서 가장 잘 자란다는 이야기도 금시초문이다. 전 세계 유력 학술잡지의 논문들을 모조리 뒤져도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해도 시험관 실험에서의 결과일 뿐이다. 암환자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몸에서 35도란 체온은 추운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저체온증이 시작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체온면역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본 건강서적의 무분별한 수용이 불러온 해프닝의 하나다. 사람들은 운동하고 금연하라는 뻔한 이야기에 식상하다. 그러다보니 이색적인 주장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이를 부추기는 전문가들이 있다. 박사나 의사, 대학교수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근거주의에 입각해야 하며 근거가 없다면 의학적 개연성에서만이라도 보편타당하게 납득되는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언론도 건강 관련 보도에서 흥미 위주에서 벗어나 신중하고 객관적일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같이 뜨거웠던 여름이 휙 지나가 버렸다. 눈 한 번 껌뻑하니 벌써 한 해를 마감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광속으로 지나간다는 ‘나이와 시간의 상대성 이론’은 정말 존재하는 것 같다.
비뇨기과는 계절적으로 약간의 흐름을 타는 질병들이 있다. 낙엽이 떨어지고 날씨가 스산해지면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 중 상당수가 소변이 자주 마렵고 급해진다고 한다. A여사처럼. 그녀는 자제들을 모두 외국 대학으로 유학 보내고 1년에 한두 번 자녀들을 만나러 오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병원을 찾았다.
“교수님, 말하기 창피한데, 얼마 전에 갑자기 소변이 참을 수 없이 마렵더니 화장실을 가는 길에 벌써 쪼금 나와 버렸어요. 검은 바지에 외투를 입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너무 당황해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제가 일 년에 몇 개월을 외국에 있거든요. 최근에 폐경하면서 몸도 여기저기 안 좋아지더니 이젠 방광도 말썽이네요. 밤에도 소변 때문에 몇 번을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제가 좀 예민한 편이긴 한데, 호르몬 치료를 해야 하는지 걱정입니다. 교수님, 저는 방광염이죠? 다음 달에 미국에 또 나가야 하는데, 약을 미리 타서 갈 수 있을까요?”
A여사의 문제를 정리해보면, ‘소변을 자주 본다. 소변이 갑자기 급해지면서 참기가 힘들기 때문에 어떤 경우엔 소변을 지리기도 한다. 밤에도 소변을 자주 본다. 폐경하면서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런데 부인의 소변 검사는 아주 정상이었고, 3일 동안 소변을 보는 시간과 양을 적어서 가져오게 했더니 1시간마다 한 번, 소량의 소변만 보는데, 매번 소변이 아주 급하게 마려워서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A여사는 아주 전형적인 ‘과민성방광’이라고 할 수 있다.
과민성방광이란 아직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광이 너무 예민해져서 방광에서 소변을 저장하는 동안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방광 근육이 수축하여 급하게 요의를 느끼게 하고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을 말한다. 과민성방광은 소변을 하루 8회 이상 자주 보는 ‘빈뇨’, 밤에 소변을 보기 위해 2회 이상 일어나는 ‘야간 빈뇨’, 소변이 마려우면 참지 못하는 ‘절박뇨’,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면서 소변이 새는 ‘절박성 요실금’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흔히 의학적 지식이 없으면 방광염과 과민성방광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제일 큰 차이는 방광염은 소변이 ‘세균에 감염된 것’이고, 항생제로 치료해야 하지만, 과민성방광은 ‘소변은 깨끗하지만 방광의 조절 기능이 문제가 생긴 것’이라 항생제를 쓰지 않는다.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이 고장 나 당뇨가 생기면 당뇨 약을 먹어 조절해야 하는 것처럼, 과민성방광은 스스로 조절되지 않는 방광을 약을 먹어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증상이 심하지 않거나 상황에 따라 기복이 있는 경우에는 방광에 직접 작용하는 약물 치료를 하기보다 우선 부담이 덜한 치료를 시작해 볼 수도 있다.
그건 다음과 같다.
우선 생활 습관을 바꾸어 본다.
하루에 2리터, 3리터씩 지나치게 물을 많이 마시는 경우에는 우선 물 섭취량을 줄인다. 들어가는 게 많으면 나오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너무 물을 적게 마시면 오히려 방광염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적당량을 섭취하는 게 좋다.
변비가 있다면 변비도 치료하여야 한다. 대변이 차 있다가 나오게 되는 통로인 대장과 방광은 서로 같은 신경 줄기에서 가지가 분포되어 조절을 받기 때문에 변으로 대장이 늘어나 있으면 방광에도 자극을 준다. 또한 변이 차 있는 대장의 부피 때문에도 방광이 자꾸 눌리니까 소변이 더 자주 마렵고 시원하지가 않다.
그리고 방광 훈련을 한다. 방광 훈련은 일정한 간격으로 소변을 보도록 스스로 배뇨 패턴을 기록하면서 조금씩 참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2 시간마다 자꾸 소변을 본다면 소변이 마려울 때 바로 가지 말고 15분을 참아 보고, 그게 성공하면 30분, 1시간 하는 식으로 수일~1주일 정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방광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보통 병원에 오게 되면 이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 일상생활에 상당히 지장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과민성방광의 가장 흔한 치료는 약을 먹는 것이다. 방광의 수축력을 조절하고 소변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고안된 다양한 종류의 약이 있고, 약효는 2~4주 이내에 나타나지만 최소 3~6개월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과민성방광은 나이가 들면 더 잘 생기기 때문에 소변을 자주 본다고 그저 나이 들면서 생기는 변화라고 넘겨 버리면 곤란하다. 소변을 정상 범위를 넘어 지나치게 자주 볼수록 방광은 오히려 세균감염이 되기 더 쉬워지고 몸은 더 피곤해지기 때문에 건강 상태에도 영향을 준다. 더욱이, 요즘 연구 결과로는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복부비만 등이 복합되어 있는 대사 증후군 환자들은 방광에 문제가 생길 위험도가 더 높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방광 건강을 유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럼 소변은 얼마나 봐야 정상인 걸까?
정상 성인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변을 보고자 느끼는 방광의 용적은 300cc 내외이다. 한 번에 이 정도의 양을 하루 4~6번 정도 본다. 즉, 3~4시간마다 한 번 보는 정도가 정상이다. 자기 전에 소변을 보면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안 보는 것이 정상이다. 이 범위를 심하게 벗어나고 있다면 비뇨기과를 찾아가 봐야 한다.
>> 윤하나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
대한성학회 상임이사, 대한여성 성의학 연구회 학술이사,
대한요실금배뇨장애학회 교육이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 와 공동저서 등이 있다.
최근 어느 책을 읽다가 체코의 속담에 마주쳐 한방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 속담은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였습니다. 이렇게 속담의 추궁을 받다 보니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속담이라기보다 하나의 잠언, 격언으로 보이는 말을 음미하면서, 한 해의 마무리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영화가 있었지만, 지난여름에 나는 무슨 일을 했던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모르는데, 남들이 오히려 더 아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여름은 활동하는 계절, 뜨거운 감정 소비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어느덧 다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가을도 배웅하고, 모든 것이 침잠하고 스스로 감추어 웅크리는 차가운 계절을 맞았습니다. 갈수록 가을은 짧아지고, 봄도 오는 듯 바로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제 여름과 겨울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서 배운 계몽편(啓蒙篇)은 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처음 생겨나고 여름에는 만물이 성장하고 자라나며 가을에는 만물이 성숙하고 겨울에는 만물이 감추어진다. 그런즉 만물이 생겨나서 자라나며 거두어지고 감추어지는 것이 사시의 공이 아닌 것이 없다.”[春則萬物始生 夏則萬物長養 秋則萬物成熟??冬則萬物閉藏? 然則萬物之所以生長收藏 無非四時之功也]
사계절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장수장(生長收藏)입니다. 이 겨울을 맞아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닫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저장할까.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장시 ‘황무지’에서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Summer surprised us)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지/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길러주었어’(Winter kept us warm,/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라고 합니다.
겨울은 그러니까 모든 게 죽는 계절이 아니라 되살리기 위해서 따뜻하게 묻어두고 그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해 감추는 시기입니다. 동양의 사유나 철학에서는 자연의 운행질서는 조물주의 신공(神功)이며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응하고 조화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이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라는 게 있습니다. 세상일에는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있는 법입니다.
겨울은 달력으로 입동부터 입춘 전까지,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부터 춘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삼동세한(三冬歲寒)을 건강하고 보람 있게 보내야만 그 이듬해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바깥세상이 폐쇄되면 내부의 세계가 넓어진다.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다.” 일찍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또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라는 글에서 “겨울은 ‘나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망 속에 희망을 잉태한 거대한 역설의 구근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엇의 시를 연상시키는 문장입니다.
청마 유치환도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글에 “온갖 생물을 시들리고, 움츠려뜨리기 마련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 서글프고 가혹한 추동(秋冬)이라는 계절이 실상은 온갖 생물의 생명들이 다시 움트고 소생함에는 없지 못할,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나는 겨울을 ‘벗과 책의 계절’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옛 선비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을 즐겼습니다. 벗들을 불러 모아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난로회 또는 철립위(鐵笠圍)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관서 땅은 시월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면/겹겹의 휘장에 푹신한 담요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삿갓 모양 솥뚜껑에 노루고기를 구워/가지 꺾어 냉면에다 파란 배추김치 먹는다네.” 흥겹고 정겨운 술자리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에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더디 시드는 걸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논어의 말이 씌어 있습니다. 추사는 중국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을 구해 유배지에 가져다준 제자 이상적에게 이런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림에 ‘오래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었습니다. 빈궁하고 어려워지면 벗과 우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도연명의 ‘의고(擬古)’라는 시에는 의복이 언제나 남루하고, 한 달에 아홉 끼니를 먹을 만큼 가난하고, 10년을 관(冠) 하나로 지내지만 언제나 얼굴빛이 좋은 동방의 선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새벽에 강나루를 건너가니 거문고를 끌어당겨 나를 위해 연주를 합니다. 도연명의 시는 “바라건대 그대 곁에 머무르면서 지금부터 한겨울을 지냈으면”[願留就君住 從今至歲寒]으로 끝납니다. 맑은 인격의 만남이 참 아름답고 부럽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독서를 하기 좋은 때인 삼여(三餘)는 농사일이 없는 겨울과 밤, 일을 못 하는 비 오는 날을 말합니다. 농사만을 짓고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지만 오늘날의 생활에 맞게 개념을 확대해 적용하면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책을 읽어야 좋은가. 독서에도 그에 맞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보다 아름다운 수필’을 쓴 사람으로 평가받는 중국 청(淸)초의 무명 문인 장조(張潮·1650~1703?)는 “경서(經書)를 읽는 데는 겨울이 알맞고, 역사서를 읽는 데는 여름이 알맞고, 제자백가서를 읽는 데는 가을이 알맞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읽는 데는 봄이 알맞다”고 했습니다.
계절별로 다 이유가 있지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와 같은 경서는 방 안에 앉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겨울에 읽어야 좋다는 뜻입니다. 여름에 역사서를 읽는 것은 낮이 길기 때문인데, 지금도 여름 휴가철에 대하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벗과 사귀고 어울리며 속으로는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음으로써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1년을 맞는 힘을 갈무리하고 비축하고자 합니다. 2015년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지만, 제야와 송년처럼 가는 것과 보내는 것의 아쉬움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체코의 속담을 바꾸어 말하면 “여름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겨울에 무엇을 했느냐고”라는 질문과 추궁 앞에 의연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모든 병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심각한 사고나 사소한 해프닝일 수도 있고, 최근의 일이거나 또는 꽤 오래전 벌어진 사건이 단초가 되기도 한다. 부산에서 만난 옥기찬(玉基燦·55)씨와 그를 치료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허중보(許仲普·40) 교수의 이야기는 조금 특별했다. 이제 중년의 삶을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다른 치료법을 선택한 의사의 이야기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치아가 아플 때에는 모든 생활이 문제였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이 있었고, 여러 어려움 때문에 아내까지 힘들어했었습니다. 그중 가장 문제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으니까요.”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교정에서 만난 옥기찬씨는 치아로 인한 문제가 한창일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의 한 제지공장에서 근무하는 옥기찬씨는 평소에 등산과 낚시를 즐기는 활동가 타입의 중년으로, 잔병치레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건강했던 그가 치아에 문제를 겪게 된 것은 과거의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불의의 사고 때문. 1988년 당시 28세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친구와 함께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오토바이로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국도 위를 달리던 그는 이면도로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승용차를 발견하게 되고, 차량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작스럽게 틀어야 했다.
“어쩔 수 없었죠. 오토바이를 탄 상태로 자동차에 덤빌 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겨우 피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친구도, 오토바이도 논바닥 위에 있었습니다. 입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요. 그래도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아직은 얼지 않았던 부드러운 논의 흙이 그를 받쳐주는 안전망 역할을 해 심각한 사고는 간신히 면했다. 그래도 옥씨는 그 사고로 윗니의 대부분을 잃어야 했고, 겨우 남아 있는 3개 치아로 윗니 8개를 모두 지지하는 적지 않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 부위의 고통은 조금씩 넓고, 깊어져 갔다. 여느 부산 사나이들처럼 그 역시 사소한 고통에는 의연하려 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옆에 남아 있던 치아들도 세월의 흐름 때문에 썩고 뽑히면서, 어금니가 해야 할 일들을 앞니가 대신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붓고 피가 나는 것은 기본이었죠.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습니다. 김치 같은 건 제대로 씹지 못해서 아내가 일일이 잘게 잘라주거나, 찌개로 푹 끓여야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밥도 많이 먹어야 반 공기가 못 되었죠. 체중도 빠져서 63~64㎏ 정도밖에 안 되었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늘 기운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기운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사라져갔습니다.”
다른 많은 환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도 참다 참다 치과를 찾았다. 동네 치과에서 어느 정도 치료를 받으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답은 의외였다.
“치과에서 치료가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뼈가 별로 없다고. 그래서 좀 더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야겠다 싶어, 두 군데를 더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서야 심각한 상황을 깨닫게 된 옥기찬씨는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이 분명하고, 많은 시간도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를 하게 된다면 치료 후까지 계속 아플 것이라는 직장 동료들의 경험담도 그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어렵게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을 찾은 것이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이다. 남들은 연말이다 크리스마스다 들떠 있는 모습들뿐이었지만,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일 리 만무했다.
처음 찾아온 옥씨의 모습을 허중보 교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는 신체와 달리 입 주위만 나이가 몇 년은 더 먹은 듯한 모습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 환자 상태를 봤을 때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앞니의 브리지로 연결된 의치는 흔들려 수명을 다한 상태였습니다. 기둥 역할을 했던 3개 치아 모두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때 가장 큰 고민은 보통의 치료를 하면 윗니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틀니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환자의 심정이었습니다. 틀니를 사용한다는 것은 노년이 됐다거나 혹은 젊음을 잃었다고 여겨 자포자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그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이 남는 치아 하나 없이 틀니를 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암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슬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 여성들은 남편에게까지 숨기고픈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허 교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부분틀니를 제거하고, 이를 받치고 있는 치아를 모두 뽑은 그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임플란트로 고정하는 임시 치아를 장착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심으려면 대체로 2개월 정도를 이가 없이 지내야 하는데, 치아가 없이 지낼 순 없기 때문에 임시로 만든 틀니를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임시 틀니라는 것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빠지기 일쑤이고, 상대와 대화하는 도중 달가닥거리기라도 하면 환자를 무척 난감하게 만드는 물건이기 때문에, 허 교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허 교수는 어렵고 복잡하지만 씹는 기능까지 할 수 있는 고정된 임시 치아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컴퓨터로 임플란트 8개가 심어질 자리와 각도, 깊이까지 모두 결정한 다음 그에 따라 장착될 임시 치아까지 모두 만들어 놓고 수술했습니다. 강도를 확보하기 위해 골이식도 해야 했고요. 수술 후 바로 임시 치아가 떨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부드러운 음식 정도는 바로 씹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3번에 나누어, 6개월 정도 걸려야 치료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의 수술로 해결하는 것이라 꽤 까다로웠습니다.”
자칫 간과할 수 있는 치아가 입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화되는 기간과 잘 씹힐 수 있도록 조정되는 정도까지 모두 계산에 넣어야 했기 때문에 허 교수에게도 신중을 기하게 되는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올해 2월 25일, 수술을 끝낸 날 이후 옥기찬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술이 끝나고 4시간이 지난 후부터 식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큼직한 김치를 마음껏 먹고 고기도, 야채도 실컷 씹을 수 있으니까 세상이 정말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치료 이후 옥씨의 달라진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주말 농장이다. 그는 올 여름부터 주말농장을 찾아 이런저런 농작물들을 심기 시작했다. 상추며 고추, 당근, 고구마, 케일 등 죄다 아삭아삭 씹을 거리뿐이다.
“이제 아내도 두 아들 것과 다르지 않게 식사를 준비하게 되고, 식사량도 늘었습니다. 실제로 체중도 5㎏ 정도 불었고요. 얼마 전에 갔던 친구의 딸 결혼식에선 얼굴이 밝아졌다며 놀라는 친구들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삶이 변하니 자연스레 치과치료 홍보대사가 됐다.
임플란트는 무조건 아픈 것이라며 겁줬던 직장 동료들에게 제대로 치과치료를 받아보라며 되레 큰소리친 적도 있고, 주변에 아픈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있으면, 겁먹지 말고 병원부터 찾으라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줄 정도가 됐다고.
과거의 옥씨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또 다른 환자를 향해 허중보 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치과치료 역시 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악몽에도 비유할 만큼 두려워하면서, 남아 있는 치아가 견디지 못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대수명도 훨씬 길어지는 만큼 관리나 조기치료가 무척이나 중요하니 너무 겁내지 말고 치과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해산물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겨울은 생물의 부패가 쉬운 여름에 비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안심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올해 초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2010~2014)간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식중독 발생은 연간 평균 36건으로 이 중 약 44%(16건)가 겨울철에 발생하고 있다. 식중독 환자수의 경우 겨울철 평균 874명으로 이 중 절반(49%)가량인 431명이 노로바이러스 식중독 환자였다.
[도움말] 목포중앙병원 소화기내과 김기태 교수
노로바이러스(Norovirus)는 사람에게 장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그룹으로, 노로바이러스라는 공식 명명이 승인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노로바이러스 또는 노워크(Norwalk) 바이러스라는 이름은 2004년 미국 오하이오주 노워크에서 집단 발병된 이후에 이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노로바이러스는 위장염 질환으로 Stomach flu(위장 독감)로도 불리나, 독감 바이러스나 호흡기질환, 세균이나 기생충과 관련은 없다.
겨울에 강한 식중독 원인 바이러스
노로바이러스에 의한 식중독은 일 년 내내 발생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앞선 통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겨울철에 유행하는 경우가 많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주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선 의심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먼저 노로바이러스는 다양한 온도 변화를 잘 견딜 수 있는 특성을 가진 바이러스여서 얼음이 얼 정도의 온도에서 섭씨 60도까지 매우 넓은 범위의 온도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로바이러스는 감염된 환자의 분변에서 바이러스가 배출되면 이 바이러스가 주위 환경을 오염시켜, 이를 만진 사람의 손을 통해 입으로 들어가 감염되거나 음식물을 오염시켜 감염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이때 바이러스는 차가운 외부 환경을 견뎌낼 수 있어서 겨울에도 전파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안심. 여름에는 식중독이 잘 발생해 음식물 관리를 잘 신경 쓰지만, 겨울에는 낮은 기온 때문에 식중독 위험이 낮지 않을까 하고 주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염력 강해 사람 사이에서 쉽게 퍼져
가장 흔한 노로바이러스에 의한 질병명은 바이러스성 장염이다. 장염이란 위와 장의 염증 유발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설사와 구토를 동반하지만 건강한 성인이라면 하루나 이틀 내에 호전된다. 하지만 중년이나 어린이 등 면역력이 약한 경우에는 탈수증상을 보이거나 특별한 의학적 주의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증상이 의심되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노로바이러스는 매우 전염력이 강하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쉽게 퍼진다. 노로바이러스는 감염자의 분변이나 구토물에서 발견되지만, 감염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셨을 때도 그렇고, 오염된 물건을 만진 손으로 입을 만졌을 때, 질병이 있는 사람을 간호할 때 또는 환자와 식품, 기구 등을 함께 사용했을 경우에도 감염될 수 있다.
최근에는 노로바이러스가 공기를 통해서 전염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캐나다 라발 대학의 교수이자 퀘벡 심장·폐 연구소 연구원인 캐롤린 뒤센 박사가 “노로바이러스가 감염 환자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의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밝혔다.
특별한 치료약 없어 관리가 중요
현재 노로바이러스에 대한 항바이러스제, 즉 치료약은 없고 감염을 예방할 백신도 없다. 또한 노로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므로 항생제로도 치료가 되진 않는다.
치료약이 없기 때문에 의료기관에서는 노로바이러스 환자가 찾아오면 증상에 따른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인은 심하지 않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열이 심하거나 아파하면 해열진통제를 먹도록 하고, 탈수가 심한 경우는 경구 전해질용액을 처방하기도 한다. 중년이나 아이들 중 구토가 심해서 먹지 못할 때, 탈수가 심해지면 입원해서 수액을 맞도록 조치하는 사례도 있다.
만약 노로바이러스에 걸렸다면, 구토와 설사를 할 때 탈수 증상을 막기 위해서는 다량의 음료를 섭취해야 한다. 특히 어린아이나 중년 환자에서 탈수 증상은 흔하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데 음료수, 주스, 물은 탈수 증상을 예방할 수 있지만, 스포츠음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의사들은 조언한다.
사랑하는 손주가 걸렸다면
손주에게 증상이 나타난다면 일단 쉬게 해야 한다. 이미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이 병은 하루 이틀 정도 속앓이를 하면 그만이지만 손주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아이들은 보통의 경우 3일 정도면 호전되지만, 심한 경우 일주일까지 지속되기도 하고, 25% 정도는 3주까지도 지속되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하다.
일단 가능하면 평소처럼 먹도록 하는 것이 좋다. 토하는 것이 심하지 않은 경우는 일단 그대로 먹이도록 하고, 구토가 심한 경우는 원래 먹던 음식을 부드럽게 해서 조금씩 자주 먹이는 것이 좋다. 굶긴다는 생각보다는 ‘먹일 수 있는 만큼이라도 소량씩 자주 먹인다’가 답이다.
노로바이러스 예방법
첫째 손을 자주 씻어야 한다. 특히 화장실 사용 후, 식사 전 또는 음식 준비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
둘째 과일과 채소는 철저히 씻어야 하며 굴은 가능하면 익혀서 먹는 것이 좋다.
셋째 질병 발생 후 오염된 표면은 소독제로 철저히 세척하고 살균해야 한다.
넷째 질병 발생 후 바이러스에 감염된 옷과 이불 등은 즉시 비누를 사용해 뜨거운 물로 세탁해야 한다.
다섯째 환자의 구토물은 적절히 폐기하고 주변은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회복 후 3일 동안은 본인과 다른 이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환자에 의해 오염된 식품은 폐기 처리해야 한다.
일곱째 손이나 식기 등을 닦을 때에는 수건이나 행주보다는 1회용 타월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