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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 참 괜찮은 소녀, 여에스더
- 여에스더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TV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라서 까다롭고 위엄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전혀 위압감이 없고 소탈하고 발랄한 소녀 같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 괜찮은 여성이다. 지금도 그런데 서울대 의대 시절에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을까? 그런 그녀를 목소리로 사로잡은 이가 바로 홍혜걸이다. 여에스더는 당시 응급실 주치의였고 두 살 연하 홍혜걸은 인턴이었다. 당시에는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불렀지만 이제는 ‘임마’라고 부른다. 당시 응급실 근무 교대하기 전에 홍혜걸이 전화로 여에스더에게 보고할 때 저음의 차분하고 감성적인 목소리는 그만 여에스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 후 홍혜걸이 여에스더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눈치 채고 하늘 같은 의대 선배에게 사귀자고 도발했다. 마침 여에스더는 7년간 사귀던 남자와 막 헤어졌던 터라 홍혜걸이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홍혜걸이 여에스더를 처음 유혹할 때의 말이 걸작이다. 세계 금연의 날 세미나에서였다. 여에스더는 “결혼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면 어떻게 하시겠나?”라고 물었고, 이에 홍혜걸은 즉흥적으로 “어린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녀보다 두 살 연하인 본인이 남편감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 머리 좋은 여에스더는 곧바로 알아듣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사귀게 된 지 3주 만에 병원 뒤뜰에서 갑자기 홍혜걸이 여에스더의 손을 와락 움켜잡더니 “우리 결혼해요”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첫 포옹을 했는데 홍혜걸의 쿵쾅쿵쾅하는 심장 소리가 하도 커서 변태인 줄 알고 살짝 고민도 했다고 고백한다. ‘편지’와 ‘살색 팬티’가 결혼기념일 선물 가정의학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의한 생리적 반응에 대해서는 무지한 소녀였다. 올해로 결혼 24년 차라서 “내년이 은혼식인데 뭔가 큰 선물이 있지 않겠냐?”라고 물었더니 “이제껏 한 번도 이벤트를 해준 적이 없다”며 입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이어서 남편에게 “뭐 없냐?”고 슬쩍 물었더니 “매일매일 잘해주는데, 뭐가 필요해?”라며 뻔뻔스럽게 반문하더라는 것. 그녀는 가끔 돈 안 들인 선물은 받아왔다고 웃는다. 다름 아닌 편지. 홍혜걸이 뭔가 잘못했을 때 편지로 쓰는 “다시는 안 그럴게~ 술도 안 먹고…” 등등의 다짐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촌스런 살색 팬티와 ‘효도 신발’ 같은 것을 받았다. 그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남편의 그런 성격이 귀엽다. 홍혜걸은 평소에 쓰다듬고 주무르고 스킨십하는 걸 좋아한다. 여에스더는 당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등을 돌리고 자는 게 편해서 줄곧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갱년기라서 아예 트윈베드로 바꾸고 사이가 좋을 때는 침대를 가까이 붙이고 뭔가 틀어졌을 때는 멀리 떨어뜨려놓는단다. 남편도 갱년기라서 서로 고집도 피우고 투정도 부린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초까지 힘들었는데 지금은 둘 다 의사이기에 생리적 현상을 서로 잘 이해하고 좋아졌다. 이제는 부부지간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후라서 그럴까? 술자리 모임에서도 에스더와 홍혜걸은 서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재미있게 논다. 잘 삐지지도 않는다. 홍혜걸의 별명은 ‘홍수르(만수르에 빗댄 말)’란다. 남편이 경제관념이 없고 허술해서 그녀는 불만이다. “홍혜걸은 허당”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허술하냐?”고 묻자 “한번은 저 몰래 강의료를 모아두려고 은행에 새 구좌를 개설했다가 저한테 딱 걸렸잖아요. 인터넷뱅킹을 안 하니까 로그인하면 계좌 목록이 쫙 뜨는 걸 몰랐던 거예요”라고 폭로하며 깔깔 웃는다. 바가지를 그렇게 긁어도 고쳐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는 것. 바둑의 단수를 올린다든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남편의 열정이 지금은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결혼 24년 차의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에스더의 사업이 번창해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여유는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홍혜걸은 허당 ‘홍수르’ 여에스더는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예전에는 홍혜걸씨가 왜 저렇게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냐는 말이 많았다”고 운을 뗀 뒤, 그런데 요즘은 “아이유랑 닮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수지랑 닮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케케묵어 익을 대로 익은 남편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도 과감하게 털어놓는다. “2년 만에 뉴욕으로 출장을 가게 됐을 때 원래는 밤 9시 비행기였는데 폭풍우로 밤 12시로 시간이 바뀌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하니, 폭풍우가 와서 위험하겠다.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뭔가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 남편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돌아와 우연히 영수증을 발견했는데 꽤 비싼 음식 값이더라. 그것도 추가 와인 두 잔에 코스요리 2인분. 이게 뭔가. 청담동에서 내가 없을 때 누구하고 먹었겠나?” 그녀는 남편을 다그치며 따졌다고 한다. 홍혜걸이 “회사 일로 알게 된 후배”라고 하자, 여에스더는 “아내가 외국출장가고 없을 때, 왜 하필이면 그 밤에 그것도 청담동에서 분위기를 내면서 와인까지 마시냐?”고 따져 물었다. 한량 이봉규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도 같지만 굳이 이 대목에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홍혜걸도 한 방송에서 부인에 대한 불만인지 자랑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잘 이용하는 여우 같은 생각이 든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결국 “박사로 만들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든다”며 부인 자랑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신혼 시절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박사 학위를 따라고 했다. 석사부터 박사까지 하려면 10년 정도가 걸리는데, 그 당시에는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를 또 하나’ 했지만 지금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MBN 에서 함익병 원장이 우스갯소리로 집사람 뜯어먹고 산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벌어온 돈으로 아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사업도 시작한 거다”라며 정색했다. 아마 2009년 설립한 회사에서 만든 이른바 ‘여에스더 유산균’이 대히트를 치고 각종 홈쇼핑에서 판매실적 1위를 달성하는 등 사업가로서 대성공한 아내에 대한 위축감으로부터 나온 자기방어의 발현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존경하기에 자랑삼아 자기비하를 고급지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의 고급 유머. 이를 반증하듯, 남편 홍혜걸이 아내 여에스더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에 당신이 베스트다”라는 평가다. 여에스더가 결혼 전 7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보다 빨리 두 배 이상 같이 살고 싶다”며 두 사람이 처음 맹세했었는데 어느새 세 배 이상 살고 있어서 행복에 겨운 부부다. 짓궂은 질문으로 반전을 노려봤다. “이혼할 생각 해봤나?” 에스더는 망설임 없이 “멋진 남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지만, 남편을 사랑해서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홍혜걸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24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에스더의 가슴은 여전히 소녀같이 뛴다. 처음 포옹할 때 홍혜걸 심장의 쿵쾅거림이 100미터 달리기 후의 느낌이라면 지금 여에스더의 심장소리는 마라톤을 완주한 후 내뿜는 안도감같이 들린다. 의사와의 인터뷰인 만큼 건강하게 사는 법에 대한 팁을 주문했다. “하버드대학의 음식 피라미드에 따르면, 건강을 위해 매일 잡곡밥, 올리브유로 만든 샐러드, 탁구공 두세 개 정도 크기의 껍질 벗긴 닭고기, 과일과 채소 다섯 접시 등을 먹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며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자신이 일생을 걸고 매진하고 있는 여에스더 종합비타민과 유산균이라는 것.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빛난다. 천생 연구하는 의사 티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 2017-10-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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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nS 색소폰 앙상블, 색소폰 재야 무림고수들이 모였다!
- 색소폰 좀 연주한다는 독자는 바짝 긴장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무림 격전지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덕소의 명물 음악 모임으로 알려진 ‘GnS 색소폰 앙상블’. 연습을 시작하기 전 단원들이 조금씩 내비치는 긴장감이 꽤 흥미롭다. 색소폰을 잡아든 손.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악기 튜닝을 하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 대의 색소폰이 하나의 완벽함을 위해 서로 눈빛을 맞추고 발을 구르는 진지한 현장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저희 단원을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200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GnS 색소폰 앙상블(이하 GnS)은 최천곤 단장에게 인생의 사명처럼 어느 날 찾아왔다. “덕소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근무할 때였어요. 기독교 학교라 이 지역 교회에서 학교에 추수감사절이 되면 오셔서 반별로 목사님들이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데 그중에 신도들에게 색소폰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언제 한번 놀러오라더군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색소폰을 연주해왔던 단장에게 구미 당기는 초대였다. 알고 보니 그 목사와 장로가 신도 7~8명을 대상으로 색소폰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색소폰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상태. 잠깐 가서 지도를 거들었던 것이 계기였다. “그런데 교회가 의정부로 이사를 간다는 겁니다. 저에게 맡아줄 수 있는지 목사님이 물었어요. 아니면 해체한다더군요.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음악에 눈뜨기 시작한 사람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최 단장 또한 남다른 아픔과 역경의 시간을 딛고 음악을 해왔다. 시대 상황과 집안 사정 등으로 대학 진학이 늦어졌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색소폰을 비롯해 각종 관악기에서 손 떼본 적 없는 최 단장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GnS의 음악 선생님으로 단장으로 살아오고 있다. 아마추어 앙상블의 도전이 시작되다 2004년 6월경 연습을 시작해 10월에 곧바로 정기연주회 일정을 잡았다. 목표가 없으면 절대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못하는 거예요(웃음). 너무 못했어요. 그만둘까도 생각했는데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3년 후에 첫 정기연주회를 했습니다.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3년 동안 단원들은 가족들에게서 ‘빨리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추궁당해야 했다. “2007년에 첫 연주회를 했는데 단원들 가족이 와서 보고는 더 나아가더랍니다.” 이후 GnS의 인기 또한 높아갔다. 이곳저곳에서 행사가 이어졌고 봉사 연주도 많이 다녔다. “GnS는 주고(give) 나눔(share)을 의미합니다. 봉사도 지금까지 많이 했죠. 교회 초청연주, 교도소, 노인복지원 많이 다녔어요. 그리고 잊지 못할 2013년도 있었습니다.” 2013년에 CBS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가스펠 색소폰 경연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앞서 상을 받은 수상자들이 독주자인 것을 감안했을 때 단체 1등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해 여세를 몰아 강원도 정선군 시설관리공단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 아마추어 색소폰 경연대회에 나가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2013년은 두고두고 평생 기억하고 싶은 해가 됐다. 또한 역사와 실력을 자랑하는 전문 색소폰 앙상블로서 차츰 나아가게 된 해였다. 이제는 처음과 달리 전문 음악가와 전공자 참여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아마추어란 꼬리표는 거추장스럽다. 4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여 화합하는 GnS은 언제든 새 단원을 맞을 준비가 돼있다고.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색소폰은 처음에 배우기 쉽습니다. 소리가 잘 나요.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어렵고 합주는 더 어렵지만 매력이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GnS의 정기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번이 10회째인데 11월 15일, 3시 덕소주민자치센터에서 공연합니다.” GnS의 대표 연주곡인 헨델의 할렐루야, 향수, 에버그린 등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색소폰 연주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연주회에 가보시길. 반주기가 아닌 악보를 보며 진짜 음악에 다가가는 멋진 연주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이상근(70) 색소폰을 연주한 지는 6년째 됐습니다. 딸아이 결혼식 때 사돈하고 색소폰을 배워 축하연주를 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서 꾸준히 배우게 됐습니다. 이렇게 계속 연주를 하게 된 건 여기 함께 계신 분들이 너무 좋아섭니다. 그리고 연주가 잘 안되고 틀리면 심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그걸 다 해내고 잘하시는 분들 따라잡고 하다 보니 쾌감이 있더라고요. 이기성(56) 여기 오게 된 동기는 이윤용 회장님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은사님입니다. 예전에 제가 지휘하던 합창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잠깐 연락이 끊겼었죠. 그런데 은사님을 찾아뵙고 난 뒤 이곳을 알게 되어 들어왔습니다. 저는 원래 트럼펫을 전공하다 성악으로 전향했습니다. 항상 보면 아마추어분들 열정이 대단하세요. GnS 단원들은 오래하셔서 굉장히 잘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술을 중심으로 모임이 조직돼 움직인다는 건 지역문화 발전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죠. 안정숙(68) GnS에서 새내기로 통합니다. 사실 색소폰은 7~8년 전에 시작했는데 앙상블은 처음 해봤습니다. 친한 동생이 한번 와보라더군요. 여럿이서 반주기 없이 함께 호흡 맞추고 같이 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색소폰 합주의 매력입니다. 지금 제대로 색소폰을 배우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너무 좋아해요. 가끔 집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할 때 연주자들을 부르곤 했는데 이제 제가 해요. 노래 반주도 해주고요. 남편이 반주기며 색소폰이며 고가의 장비를 사줬어요. 전쟁 나갈 때 좋은 무기를 써야 한다면서요. -------------------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으면 bravo@etoday.co.kr 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9-3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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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례의 눈을 통해 본 요즘 결혼식 풍경
- 우리는 지금까지 평범한 결혼식을 해왔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부한 것도 아니어서 보통 사람들이 해온 방식대로 그렇게 혼례를 준비하고 양가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부담 없는 예식장을 잡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켜본 요즘의 결혼식은 다양했다. 필자는 이러저러한 사유로 제자들이 혹은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주례를 부탁해 지금까지 100여 차례 주례를 섰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혼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째, 결혼식 장소다. 평범한 예식장이나 성당과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많이들 한다. 그러나 호텔에서 하는 것을 보면 좀 지나친 면이 있다. 물론 내가 돈 벌어 내 마음대로 돈 좀 쓴다는 데야 뭐라 할 수는 없다. 수십, 수백 개의 화환이 놓여 있고 웬만하면 조화를 사용하는 신랑신부들이 입장하는 통로가 생화를 꽂아 수천만원이 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너무하다 싶다. 그렇다고 호텔 식사비가 기본 10만원씩 하니 일반 예식장의 두 배는 더 축의금을 내지 않을 수도 없다. 좀 가진 것을 자랑하려면 진정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해 ‘우리 자녀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오셔서 고맙습니다. 약소하지만 간소한 음식을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축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멋지겠나 싶다. 둘째, 축가다. 요즘은 전문 성악가가 많이 축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신랑이 신부를 위해 부르는 축가도 제법 신선하다. 가끔 음 이탈을 하는 것은 분위기를 훨씬 더 재미있게 한다. 그러나 신랑만 부르지 말고 부부가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둘이 미래를 약속하며 손잡고 부르는 노래는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할까? 셋째, 화환이나 축의금이다. 수십 개 수백 개 화환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최소한 화한 두 개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화환은 쌀 쿠폰이나 기타 생필품 쿠폰으로 받아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기부하면 어떨까 싶다. 화환은 몇 시간 후 용도를 다한다. 정말로 아까운 생각이 든다. 축의금도 의무적으로 몇십 퍼센트 정도는 유니세프에 기금으로 쾌척하여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다. 넷째, 혼수품이다. 혼수품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고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사도록 서로가 협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 혼수품 문제로 양쪽 집안의 감정이 악화되어 날짜까지 잡아놓은 결혼을 파기하는 경우도 봤다. 다섯째, 하객 문제다. 꼭 초대할 사람만 진심으로 초대하는 것이 좋겠다. 필자도 청첩장을 받아보지만 평소 연락도 없었던 그것도 수십 년 전 만남이 있었을 뿐인데 불쑥 청첩장을 보낸다. 그냥 무시하자니 찜찜하고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럴 생각이라면 직접 전화 한 통 해서 안부도 묻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다. 여섯째, 주례 문제다. 주례는 평소 자신이 존경하는 은사나 주례를 하실 만한 자격을 갖춘 분이 하시는 게 맞다.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실 만한 어른을 모시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 원칙이다. 적어도 결혼식이 끝나면 전화를 드려 “저희 결혼을 축하해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도 살아오신 것처럼 배우고 따르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는 해야 한다. 그러나 결혼식 후 감사 사례는 고사하고 전화 한 통 하는 사람도 드물다. 적어도 필자가 결혼했을 때는 결혼식 날 주례 선생님과 몇 해 동안 부부가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그동안의 안부도 묻곤 했다. 요즘 결혼식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해서 씁쓸하다. 최근 결혼 모범 사례가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유명 탤런트 원빈과 이나영 부부가 톱스타의 편견을 깨고 조촐한 결혼식을 비밀리에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떠들썩하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톱스타 부부다. 그런데 언론도 철저히 따돌린 채 강원도 정선의 모처 계곡의 숲속 민박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양가 친지 한집에서 약 50명 정도씩만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평소의 소신대로 “평생을 약속하는 자리! 최대한 조용히 치르고 싶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비록 필자와는 관계없는 남이지만 진정으로 이들 부부가 멋진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어주고 싶다. 이 얼마나 멋진 결혼식인가? 우리도 이제 성숙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고 서로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례를 하다 보면 양가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축하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 따뜻하게 보여 반가움이 앞선다.
- 2017-09-2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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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유럽 귀족들의 휴양도시, 몬테네그로 페트로바츠
-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인 페트로바츠(Petrovac)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구석은 없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 신선한 공기, 푸르고 맑은 물빛, 모래와 조약돌이 어우러진 해변, 16세기에 만들어진 요새, 바다 앞쪽의 작은 섬 두 개가 전부인 해안 마을이지만 동유럽의 부유층들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다.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긴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매우 편하게 해준다. 낚싯대와 책 한 권이 꼭 필요한 곳이다.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 발칸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는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크로아티아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해안으로부터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풍경의 장관을 보여주는 나라다. 풍치는 빼어나고 음식은 이탈리아 버금갈 정도로 맛있고 물가도 싼 나라인데도 크로아티아 뒷전인 것은 순전히 매스컴 영향 탓이다. 무분별하게 보여주는 영상매체를 스스로 걸러낼 수 있어야 수준 있는 사람이다. 몬테네그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크기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다. 좁은 땅에 로브첸(1749m), 오르엔(1894m), 두르미토르(2522m) 등의 고산이 90%나 차지하고 있어 매우 척박하다. 현지민들은 살기가 힘들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최상의 여행지다. 고산을 지붕 삼고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몬테네그로를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표현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Podgorica)는 전쟁으로 온 도시가 폭격을 당했지만 아드리아 해안선은 완전히 다르다. 코토르 만을 따라 이어지는 293.5km 해안선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와 경계에 있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시작으로 페라스트(Perast), 티바트(Tivat), 리산(Risan), 코토르(Kotor)까지 그림 같은 해안 도시가 이어진다. 부드바와 바르 중간쯤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 그러나 아름다운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치에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때때로 지나친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 번잡한 관광지다.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때 찾았던 곳이 페트로바츠다. 페트로바츠는 수도 포드고리차의 식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곳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몬테네그로로 입성해 터미널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메인 요리를 두 개나 시켜 먹고 나서 영어를 잘하는 스태프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도시를 추천해줄래?”라고 묻자 그는 메모지에 페트로바츠라는 지명을 써주었다. 지역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토르를 도망치듯 떠나 ‘부드바(Budva)’에 점을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르(Bar)’까지 가버렸다. 버스의 남자 안내원이 인파에 밀려 동양인 여자가 목적지를 꼭 알려 달라 했던 지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르에 도착한 버스의 여자 운전자는 말 안 해준 안내원보다 더 안달이 났다. 그녀는 페트로바츠까지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 편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공짜표는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너네 잘못이니 표 값 돌려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로마 때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도시 페트로바츠는 부드바(17km)와 바르(21km) 중간 즈음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대던 인근 해안 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 도시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서인 듀클랴(Duklja) 공국의 성직자 연대기(年代記, 연대순으로 역사적인 사상을 열거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 로마시대 때 한 부부가 이곳의 크라스 메딘스키(Krsˇ Medinski)에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을 욕조로 한 모자이크 조각이 세인트 일리야(Prophet Elijah) 교회 뒤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지명은 라스트바(Lastva)였다가 20세기, 세르비아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Petar Karađorđevic´, 1844~1921) 왕조 때부터 페트로바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600m 해안선을 가진 루치차 해변이 있다. 작아서 한눈에도 해안 주변은 다 보인다. 해안선 북쪽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듯한 작은 요새가 있다. 반대편 해안에는 자그마한 소나무 산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가옥 몇 채가 있을 뿐, 해안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바다 앞쪽으로는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바위 섬 위에는 마치 ‘인형 집’ 같은 작은 교회가 있다. 영화 등 촬영지로 인기 우선 눈에 익은 듯한 북쪽 해안 끝 카스텔(Castel)로 다가선다. 작은 이 요새는 16세기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선원들의 작은 등대 역할을 했다. 요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와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하기 위한 작은 오벨리스크가 기둥처럼 솟아 있다. 요새 옆의 거대한 아트갤러리(Red Commune)는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창고 겸 검역소다. 와인 등의 제품들을 보관했고 전염병이 돌면 환자의 숙박시설, 검역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르코 그레고비치(Marko Gregovic)가 19세기 후반 개조해 오늘에 이른다. 이 건물에는 1만5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고 연중 많은 연극, 예술, 음악 이벤트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풍경이 낯익은 것은 영화 (레이첼 와이즈, 애드리언 브로디, 마크 버팔로 주연)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사기꾼 형제 중 동생(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을 이루는 엔딩 장면도 이 요새와 레드 코뮌을 뒷배경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카티치와 스베타 네제리아(Katicˇ and Sveta Neđelj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앙증맞은 이 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정보부가 유고슬로비아 게릴라와 연락 교신하기 위해 주둔했다. 난파선 선원의 귀환을 기원하는 성 일요일이라는 작은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의 종을 울리면 행운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지만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재도 외부 관광객보다는 현지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지노가 있는 멋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원 없이 휴양을 즐기면 좋을 곳. 아침 햇살을 맞으며 요새 근처의 바에 앉아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싶은 곳. 낚시를 즐긴다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힌다면 한국식으로 회를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Travel Data 항공편 직항은 없다. 동유럽, 서유럽, 터키 등지에서 항공편으로 몬테네그로로 진입한다. 포드고리차 티바트 공항은 도심과 50km 거리에 있다. 육로로는 주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현지 교통 기차보다는 버스가 편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로 이용할 경우, 헤르체그노비를 거쳐 3시간 만에 코토르에 도착한다. 코토르에서 페트로바츠까지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해상 편은 굉장히 불편하다. 인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등 형제 국가에서의 진입에도 엄격한 여권 검사 등 국경 통과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폐 공식 화폐는 ‘유로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해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언어문제 몬테네그로어와 라틴 문자,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관광지 대부분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없다. 먹거리 도시 안쪽이나 바닷가 쪽에 레스토랑, 바, 카페가 있다.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산물이 많다. 또 몬테네그로산 프로슈토 햄도 유명하다. 숙박정보 카지노가 있는 호텔 외에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있다. 카지노 호텔은 30만원선이고 게스트하우스나 아파트는 5~6만원선에 이용 가능하다. 저렴한 호스텔은 없다. 날씨정보와 옷차림 몬테네그로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이 길다. 9월은 물론 10월 낮에도 바닷가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없고 건조해서 여행하기 좋으나 낮에는 햇살이 따갑다. 10월의 평균온도는 20도 정도이니 가을 옷을 준비하면 된다. 겨울에는 9도 정도로 온도가 급강하한다. 치안정보 몬테네그로는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대부분 안전한 편이나 관광지에서는 바가지 상술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페트로바츠 관광 사이트 www.petrovac.org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한국인들은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을 선호하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의 풍경은 크로아티아 버금간다. 크로아티아 여행과 함께 몬테네그로 여행 계획도 세워보자. 그리고 페트로바츠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 배정을 잘해서 몬테네그로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해보자. 크로아티아부터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울치니(Ulcinj)를 벗어나 알바니아, 그리스까지 여행을 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렌트(www.montenegro-car-rent.com)를 하거나 유람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 2017-09-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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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다
-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생활 몇 년째인 서른 살 때였다. 안도감이 컸던 이유는 필자가 결혼적령기를 넘긴 27세까지 시집을 가지 못해 친정엄마가 엄청난 걱정을 하셨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 당시엔 여자가 27세까지 시집을 못 간 건 창피한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 27세 되던 해엔 엄마의 한숨소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왔다. 27세를 넘기기 직전인 12월에 중매를 통해 결혼이 결정되자 안심하던 엄마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난다. 아들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못 봤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 옛날 엄마가 시집 안 가는 딸(필자)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은 결혼적령기가 따로 없어서 아주 늦은 나이에도 인연을 만나 잘 사는 부부가 많으니 결혼이 늦는다고 그리 큰 걱정들은 하지 않는다. 또한 매우 귀하게 기른 딸이 아까워서 시집보내기를 망설이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결혼하고도 속 썩을 일 있으면 그냥 이혼하고 돌아오라고까지 한다니 아들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 찾는 결혼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세태에 순둥이 우리 아들이 결혼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필자는 전형적인 중매결혼을 했다. 전문 중매 아주머니의 소개로 양가가 만나 선을 보고 결혼을 결정했다. 아들이 나이 들어가자 필자도 중매를 통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좋아하는 아가씨를 소개한다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아들이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강남의 모 음식점에서 처음 본 우리 며느리는 참으로 단아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연애 한 번 못해본 것 같은 아들이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만났는지 흐뭇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직장 선배의 소개로 사귀었다고 한다. 둘을 같이 앉혀놓고 보니 얼굴도 눈도 코도 동글동글한 게 서로 닮았다. 결혼적령기를 지나도 결혼하지 못한 딸을 두었던 우리 친정엄마의 노심초사와 필자가 나서지 않고도 사랑스러운 짝을 찾아 필자를 안심시킨 아들이 비교되며 엄마께는 미안하고 아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흡족한 마음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부터 결혼시킬 일이 걱정되었다. 필자가 결혼할 땐 모든 것을 어른들이 알아서 해주셨으니 아들 결혼에 필자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구와 전자제품 등 혼수를 장만하시며 즐거워하시던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서 정말 기쁘셨던 것이다. 시댁에서 준비해주신 패물이 엄청났다. 보석으로 7세트를 받았다.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리고 반지와 귀걸이 팔찌 브로치 등이 7개씩 진열된 커다란 보석함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흐뭇해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렇게 남에게 보이는 걸 중요시했던 필자의 결혼이었다. 우리 며느리에게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성의껏 준비하겠다고 하자 아들이 요즘은 모든 걸 당사자끼리 알아서 한다며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일사천리로 웨딩업체를 정하고 반지도 저희끼리 맞추고 예단도 저희끼리 준비했다. 양가 어머니의 한복도 어느 날 몇 시에 청담동 한복집에 가서 맞추시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시어머니가 될 필자는 너무 할 일이 없었다. 필자는 철없이 어른이 해주시는 대로 받기만 했는데 아들은 며느리와 의논해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결정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많이 썼던 필자와 달리 실속 있게 알찬 결혼을 한 아들은 알콩달콩 예쁜 손녀손자를 필자에게 안겨주며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에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며 아들네가 항상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중매를 통해 어렵게 결혼했던 필자보다 연애로 멋진 결혼을 한 아들이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2017-09-2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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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특별한 VIP
- 헐렁한 바지와 감촉 좋은 티셔츠의 편한 차림, 가벼운 가방. 화장기 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지하로 내려가며 오늘 할 일에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양평으로 달릴 참이다. 요사이 혼자서 하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연습 삼아 다녀보려고 하니 좀 긴장된다. 양평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양평 성당 근처의 식당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집은 음식이 정갈하고 인심이 후해서 다른 손님들에게 소개해도 다들 좋아했다. 맛도 토속적이고 현지의 싱싱한 채소를 쓰다 보니 음식이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 자리를 잡고 둘러보니 계산대 위의 십자고상과 푸른 성지가지 꽂힌 것이 보였다. 가장 토속적인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시켰다. 9천 원. 그때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주인은 반색하며 달려가 말했다. “ 아~ 여기는 VIP용 메뉴판을 드려야죠.”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메뉴를 고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음식은 다른 손님을 제치고 먼저 나왔다. VIP니까. 다른 손님들은 익숙한 듯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도 그냥 묻혀서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흥미 있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음식을 먹은 다음 계산대에 돈을 내고 나갔다. 수행원만 없을 뿐 분명 VIP가 분명했다. 나는 그 VIP용 메뉴판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메뉴의 가격은 정상가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 식당에서는 독거노인이나 경로당 노인에게 2500원을 받고 음식을 주고 있었다. 식당 주인은 손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배부르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특별히 다른 메뉴판을 만들어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얼마나 따스한 나눔인가. 계산대 위의 십자고상이 멋지게 보였다. 한 사람의 따듯한 마음이 공동의 선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명절이 다가온다. 구호품을 앞에 쌓아놓고 불편한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놓고 사진을 찍어 자신의 홍보용으로 쓰는 사람들은 해마다 줄고 줄어 없어졌으면 좋겠다. 봉사하면서 오히려 많이 배우고 감동을 한다고 한다. 함께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이 가진 멋진 감정이다. 그래도 과연 주는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정말 유익한 나눔인지 늘 생각할 일이다. 자신의 체면은 세우고 받는 사람이 굴욕적인 나눔이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 2017-09-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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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 있는 길] 종로통 구석구석 옛 기억이 살아나다
-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2017-09-1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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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 파스텔 힐링화반 "내 나이가 바로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 이번에 만난 시니어들은 평균 나이가 85세다. 일흔도 아직은 어려서 끼어줄 자리가 없다(?)는 진짜 액티브 시니어. 이들은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의 파스텔 힐링화반 수강생들이다. 마침 이들이 지금까지 숨겨놓았던 그림 실력을 뽐내고 싶다며 의 문을 두드렸다. 뜨거운 여름 햇볕이 내리 쬐던 7월의 어느 날, 성남아트센터의 한 전시실에서 이들을 만나봤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어요.” 파스텔 힐링화반 강사인 최윤진씨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균 나이 85세, 12명의 시니어 화가들이 감격적인 첫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 이들의 멋진 출발을 위해 가족들을 비롯해 지역 방송사에서도 나와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12명의 신인(?) 화가들은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에 살고 있는 시니어들이다. 입주민 생활문화프로그램 중 하나로 작년 7월 처음 개설된 ‘파스텔 힐링화반’에서 1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뽐낸 것. 이들의 땀방울을 귀하게 생각한 최윤진 강사가 전시회를 열자고 먼저 제안했다. “저희 시니어들이 도전한 분야는 파스텔 힐링화라고 부릅니다. 이게 보기에는 잘 모르시겠지만 손가락으로 작업을 하는 그림이거든요. 기초과정 3개월만 배우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 작품 정도는 내보일 수 있는 간단하고 집중하기 좋은 그림입니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파스텔 힐링화는 시니어는 물론이고 미술은 하고 싶은데 손재주가 없다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분야. 그림을 그리는 일정한 공식은 3개월 기초과정 동안 배울 수가 있다고. 파스텔 작업을 한 뒤 픽사티브(파스텔, 목탄, 연필 따위로 그린 그림이 손상되지 않도록 그림 표면에 뿌리는 투명한 액체)로 그림을 고정해 완성하는데 밑작업 없이 그리는 그림이다. 보기에는 실력이 있어 보이지만 미술을 몰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게 파스텔 힐링화의 장점. 무엇보다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미술이라고. 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이나 뇌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최 강사는 시니어들에게 이런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강의 개설에 힘을 쏟았다. “처음에는 25명이 시작했는데 기초과정 마치고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그만두셔서 14명이 됐고 지금은 12명의 수강생이 남았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1시간 20분 동안 그대로 앉아 계시더라고요. 수강생 중 고관절 수술을 하신 분이 사실은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데 그림 그리게 되면 몸이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말보다 듣기 좋은 말입니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시니어는 감동 그 자체라고 전하는 최윤진 강사.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이 좋아진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어린 학생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없는 열정을 가진 시니어들. 이들의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진지한 것을 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다. “이분들과는 그림을 계속 그릴 생각입니다. 문의가 많아져서 인원이 넘치면 모르겠지만 아직 그럴 기미는 없어요(웃음). 저 또한 내면으로 많이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mini interview 고국이 그리워 왔는데 그림도 그리고 있습니다 (김종기·85세) 중·고등학교 때 미술반 활동을 했습니다. 추억을 더듬어 동심으로 돌아가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농촌풍경을 그렸고 자연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그렸습니다. 브라질과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다가 4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작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딸이 있는 고국으로 들어왔죠. 저는 황해도 출신입니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 출신으로 14년 동안 군대생활을 했어요. 1964년에 제대해서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이민 1세대로서 힘든 일을 많이 했어요. 브라질에서 20년, 미국에서 26년 살았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옷 만드는 일을, 미국에서는 세탁소를 했어요. 분당, 강남이 없을 때 이민을 갔어요. 지금은 아주 천지개벽을 한 거죠. 모국이 발전돼서 마음이 기뻐요. 해외생활을 오래했고 친구들도 이제 많이 없어요. 그래서 시니어타운에 들어왔어요. 내가 용산고 1회 졸업생인데 와보니까 동창생 180명 중에 10%만 남고 모두들 세상을 떴어요. 동창회 참석자가 9명이에요. 여생을 친구들과 같이 보내려고요. 최고령 시니어의 힐링화 도전기 (김현경·91세) 그림은 여기서 처음 배웠어요. 맨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무료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수업이 생겼다기에 들어왔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시니어타운에 들어온 지 2년쯤 돼가요. 다른 수업도 좀 들었는데 다리가 안 좋아서 하다 말고 그랬어요. 침도 맞고, 주사도 맞고. 그런데 그림은 너무 재밌어요. 그릴 때는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몰라요. 그림 중에 배경색이 어두워 보이는 게 제 작품입니다. 원래는 취미로 한지공예를 배웠어요. 1980대에 시작했는데 본의 아니게 그때도 전시회를 열었답니다. 나이 들어 일도 없으니까 자연적으로 그런 게 눈에 들어왔어요. 자식이 셋인데 똑같은 작품을 세 개씩 만들어서 다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한지공예품이 생겨나니까 딸들이 그걸 모아 전시회를 열어주더라고요. 제가 창의력이 좀 없어서 구상해서 그리는 건 못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림도 정해주시고 가르쳐주시면 거기에 맞춰서 그려요.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이거든요. 삶의 활력소예요. 재밌어요. 안 아플 때까지 그림 그릴 겁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9-1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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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오리지널 <캣츠>를 보고
- 유명 뮤지컬 를 볼 기회가 생겼다. 우리나라 배우 무대가 아니라 오리지널 팀이 내한해 공연하는 뮤지컬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의 연기도 좋지만, 본고장의 연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니 내한공연 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2014년 웨스트엔드를 시작으로 2015년 시드니, 파리, 2016년 브로드웨이, 2017년 유럽 투어를 끝내고 우리나라에서 하는 공연이다.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으로 가는 발걸음이 즐거웠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 데다 극 중 주제가 ‘메모리’는 늘 애잔하게 필자의 가슴을 울린다. 좌석도 무대와 가까운 VIP 자리였지만 필자는 젤리클석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젤리클은 고양이 종류의 이름인데 뮤지컬 에서 특별하게 무대 맨 앞쪽과 통로 쪽에 마련한 좌석에 같은 이름을 붙였다. 젤리클석이 관람하기에 좋다는 건 뮤지컬이 시작되면서 알게 되었다.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대에서는 수많은 고양이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떤 모습으로 첫 무대가 시작될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는데 갑자기 관객들이 웅성거리면서 뒤편을 돌아봤다. 의 출연진이 객석 뒤에서 뛰어나와 옆 통로를 지나 무대로 올랐기 때문이다. 출연진은 지나가다가 통로 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잠시 멈추어 머리도 쓰다듬고 악수도 했다. 관객과 이런 교류가 있어 젤리클석이 특별하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주로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인사를 건넸는데 아이들은 먼 훗날까지 그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 고양이) 화려하게 치장한 여러 고양이가 소개되고 춤과 무용이 시작되었다. 고양이와 너무 흡사하게 꾸민 분장에도 놀랐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그들의 몸짓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실제로 이 뮤지컬 지휘자는 배우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키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뮤지컬 는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이 세상의 고양이들 이야기다. 1년에 한 번 젤리클 고양이를 뽑는 축제가 있는데 젤리클 고양이로 선택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젤리클 고양이가 된다고 한다. 막이 오르면서 부자 고양이, 도둑 고양이, 늙은 광대 고양이 등 30여 마리의 고양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춤과 노래를 펼친다. 각각의 고양이 이름은 너무 길고 어려워 기억하지 못하지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메모리’를 부르는 고양이 이름은 ‘그리자벨라’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자벨라‘는 고양이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름답던 모습은 사라지고 초라해져서 다른 고양이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부르는 1막의 ‘그리자벨라’와 2막의 ‘메모리’는 특히 필자의 마음을 울렸다. 사람에게도 환하게 빛나는 청춘이 있다. 나이 들면 그 빛이 사라지듯 아름답던 필자의 젊은 날과 ‘그리자벨라’의 젊은 날이 오버랩되는 듯해서 슬픈 감정이 들었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리자벨라’가 과거의 영광, 아름다움, 지나간 세월에 대해 노래하자 고양이들은 ‘그리자벨라’를 올해의 젤리클로 뽑아 천상으로 올라가게 한다는 이야기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필자는 양옆의 스크린에 나오는 자막을 읽으랴 무대를 보랴 눈이 바빴지만, 손뼉도 치고 몸을 흔들기도 하며 정말 즐겁고 신나게 관람했다. 자리가 통로 쪽이 아니어서 지나가며 인사하는 고양이들과 직접 눈을 맞추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멋진 뮤지컬 한 편으로 하루를 아름답게 보낼 수 있어서 감사했다.
- 2017-09-0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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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크바움 유형종 대표 인터뷰-오페라 키드(kid)의 생애, 확률과 통계적 사고가 만들다
- 수만 가지의 수를 내다보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알파고형 인간을 만났다. 계획적이면서도 일정하다. 돌다리는 두드려볼 생각 없이 잘 닦여진 길을 선택해왔다는 사람. 수학이나 과학자를 만나러 갔더라면 대충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그의 직업은 음악 칼럼니스트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 무지크바움 대표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劉亨鐘·56)을 만났다. 인생역전 드라마만 재밌다는 편견은 접으시고, 유형종 대표의 기막힌 인생설계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시라. 클래식 놀이터 주인장 유형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는 놀이터(?)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인 유형종 대표. 그는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압구정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무지크바움에서는 요일마다 오페라, 클래식, 발레 감상 동호회 모임을 비롯해 음악과 관련한 각종 강연이 이뤄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늘 유형종 대표와 눈을 맞추고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일까? 유형종 대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발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좀 폐쇄적이죠. 그런데 여기는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좋아요. 욕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그저 저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데 그 원천이 음악? 클래식인 거죠.”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택하다 유형종 대표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 등 서양 예술의 결정체와도 같은 분야를 전문으로 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사교계와도 친밀한 예술이 오페라와 발레 아닌가. 그런데 그가 클래식 음악에 눈뜬 이유가 기가 막히게 남다르다. “제가 남들 하는 걸 안 해요(웃음). 가령 카카오톡도 안 합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영어공부한다며 팝송을 듣더라고요. 저는 그때 팝송이랑 대중가요 대신 클래식 음악만 듣겠다고 결정했죠.” 마침 집에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클래식 음반들이 여러 장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지휘한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과 베르디의 아이다(Aida)였다. “그거 말고 몇 장 더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토스카니니’라고 적혀진 음반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그게 제 인생 첫 음반인 거죠. 중학교 들어가서 오페라 음반을 사기 시작하면서 ‘내 취미는 음악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던 유형종 대표는 다행히 네 살 터울의 동생과 죽이 잘 맞았다. “동생이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입니다. 음악이나 문화 쪽으로 저보다 유명할걸요? 둘이 집에서 뭐했냐면 클래식 음악 모음집 15곡을 쭉 듣고 난 다음에 점수를 매겨요. 그러고는 둘이 합산해서 종합 1위를 뽑는 거죠. 그리고 한 달 있다가 또 해요. 순위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우리 형제의 놀이였습니다.” 클래식 음악만큼 발레의 매력에도 빠져버렸다. 1984년 빈 국립 발레단(오스트리아)과 내한한 러시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의 춤사위를 보는 순간 마치 신이 춤추는 것 같았다.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세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팝송이 싫어요. 뮤지컬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와 발레를 감상하고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사는 게 재밌습니다.” 내 인생의 원동력은 확률과 통계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감상하는 취미는 끝이 없었다. 잠시나마 꿈꿨던 음악대 진학을 접고 상경대를 선택했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는 체력도 약하고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죠. 나는 튼튼하지 않으니 애호가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는 삐져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웃음).” 음대 포기의 이유에 맏이라는 가정 안에서 위치도 작용했다. 역사학도 좋았지만 맏이면 당연히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상경대 진학을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도전 한 번 안 해보고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수를 좋아했죠. 경영학에도 회계학이 있는데 그것도 재밌었고요. 회사에서도 기획 재무 쪽 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미적분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확률과 통계는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 모든 생활 전반이 확률 통계적 사고로 돌아갑니다. 성악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유형종 대표는 음악대학에서 음악사 수업 외에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화성악 청강을 해봤다. 그런데 음대생의 영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음대생이 전공하는 영역은 음악 애호가로서 확률과 통계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영역이었어요. 저는 예술가 기질은 없어요.” 무모한 짓은 안 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유형종 대표. 굉장히 좋아 보여도 무엇을 희생해야 한다면 하지 않았다. 목적지향, 확률통계. 이런 것을 고려해서 원칙을 세우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말한다. “대신 재미가 없죠.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냉소적이라더군요.” 취미가 인생의 큰 그림이 되다 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공부보다는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는 클래식을 듣는 음악감상 동아리의 규모가 꽤 컸습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됩니다. 동아리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DJ 활동을 의무적으로 했어요. 감상실에서 트는 곡목을 칠판에다 적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물론 감상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숙면에 들기는 했지만 감상실 운영으로 동아리를 유지했다. 가을에 열리는 교내 합창대회는 음악감상에 방해돼 싫었다. “합창 시즌만 끝나면 속속 커플들이 탄생했어요. 헤어지면 커플이 동시에 탈퇴를 하니까 동아리 모습이 말이 아니었죠. 연애금지령도 있었는데 저는 철저히 그 법칙을 따랐습니다(웃음).” 대단한 모험을 즐기지 않고 확률과 통계를 바탕으로 살아왔다는 유형종 대표. 그는 대학생활 이후에도 나름 순탄했다고 말한다. 1987년 첫 직장인 대우증권에 입사해 2006년 한국신용보증보험의 임원으로 20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는 영락없는 금융인의 모습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칼럼니스트로서의 이중생활도 멋지게 즐겼다. “졸업 후에 동호회 후배들이 창립기념일 문집을 만들 때 저에게 의뢰하기에 글을 쓰게 됐고, 1995년부터 잡지에 정식으로 음악 칼럼을 쓰기 시작했어요. 음악감상 동아리 후배인 의 기자가 저를 칼럼니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부터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얻게 됐습니다.” 금융업계에서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업무와 야근으로 음악회는 꿈도 못 꿨다. 대신 음반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매달 밀려오는 잡지사 음악 칼럼을 쓰는 작업도 일상의 큰 업무(?)였다. “금융회사는 아침 8시가 되면 일을 시작해요. 저는 6시 반에 출근을 했어요. 부서장님이 저더러 부지런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오해죠. 저는 글을 쓰기 위해 회사에 빨리 간 것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씩 월간지에 기고를 하고 짬짬이 공연 프로그램 글도 썼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제가 하는 다른 일에 대해 사장님이 알게 되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임원이 그런 일 하는 것을 몰라서 언짢으셨을 겁니다.” 진짜 인생의 문을 열다 유형종 대표는 2003년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딱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확률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다른 회사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을 희생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지만 좀 더 밀도 있는 공부를 하며 강의자료를 준비했다. 연재하던 글을 모아 은퇴 시기에 맞춰 단행본 출간을 계획했다. 결국 2006년 9월 은퇴, 12월 1권과 2권(시공사) 출간. 꽤 멋진 은퇴 작전이 성공했다. 20년 남짓의 넥타이 삶을 청산하고 난 유형종 대표는 무지크바움에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칼럼을 쓰고 외부 강의를 하면서 여전히 음악에 파묻혀 살고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일곱인 유형종 대표는 스스로 2년 전까지가 음악 칼럼니스트로서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음악 칼럼니스트라고는 하지만 글 써서 먹고살겠어요(웃음)? 제 공간인 무지크바움에서 동호회나 강좌를 열고 외부 강의도 다니고요. 그런데 제 나이가 이제 기업체 특강 강사로는 좀 많아요. 왜냐하면 기업체 사장이 저랑 나이가 같거나 어리거든요. 물론 저도 이제 돈을 열심히, 많이 벌 생각은 없어요. 생업은 55세까지 충분히 했다고 봐요.” 이런 날을 생각해서 20년 직장생활을 했다. 먹고사는 데 당장 큰 문제는 없다. 벌어놓은 돈도 있으니 즐기면서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 “마음은 천국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니까. 대신 제가 일정을 짜놓고 많은 일들을 정해야 하니까 좀 바쁘죠. 마음은 천국, 몸은 지옥? 앞으로도 10년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10년은 골골거리면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최근 귀찮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슈베르트에 관한 글을 쓰게 됐다고. 예술서 100권, 문학서 100권, 사상서 100권 총 300권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한 대형 출판사에서 유형종 대표에게 제안을 해왔다.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제부터 자료조사를 새로 해야죠. 그런데 사실 쓰겠다고 한 이유가 딴 게 아닙니다. 제 동생도 쓰기로 했더군요. 괜찮은 필자를 출판사에서 저자로 섭외했던데 내가 안 쓰면 소외될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쓰는 거거든요(웃음).” 그래도 적잖은 사명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불명예는 막아야죠(웃음). 적어도 대한민국 예술 필자 100명 중에 끼지 못한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되잖아요. 불타오를 정도는 아니고 약오름?” 말은 이렇게 해도 어떤 주제로 쓸지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너무 어렵게 않게 슈베르트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책을 쓰게 될 것 같단다. 유형종 대표는 어떤 것을 평가하고 논하는 평론가의 삶을 구하지 않는다고. “칼럼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은 갖되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아요. 관객으로서 내 시선을 내려놓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공연장 사장 할래? 그러면 전 아마 안 할 거예요. 사람 임명하고 관리하는 거 하기 싫어요. 육체는 힘들지만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20년 금융 전문가에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원래부터 직장생활 20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니 지금이 제1인생이죠. 제1의 인생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고 돈을 번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처음부터 그의 시작은 음악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느낌이다. 평생 제1의 인생을 위해 살아온 집념과 고집이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기대해본다.
- 2017-09-08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