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부부는 아주 오래된 추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가수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 노래의 가사를 읽어본다.
1절=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 우리가 느낀 실증은 이젠 없을 거야
2절=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 하물며 이미 아주 오래된 부부는 의무감으로 같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필자 부부도 그냥 오늘 하루도 평안하다는 핑계로 어제가 오늘 같더라도 안 좋은 별일만 없으면 감사한 일이지 하고 무덤덤하게 하루를 지내는 오래된 부부의 일상이었다. 많은 나이 든 부부처럼 일과를 묻는 것도 안 하고 설렘은 더욱 멀어진 지 오래. 사랑으로 시작한 인연이 정으로 살다가, 법으로 살다가, 그냥 의리로 살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의미 없이 사는 듯한 인생이 돼버렸다.
미니자서전을 작성해보려고 삶의 흔적으로 꺼내는 과정에서 생각도 꺼내고, 사진과 메모지도 꺼내는 과정에서 크레파스로 혹은 사인펜으로 삐 둘 빼둘 쓴 두 아이의 효도를 약속하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쓴 편지가 보인다. 사랑하고 효도한다는 단어가 이어진다. 아이들 키울 때 힘들었을 텐데 이런 순간순간이 있어 힘든지 모르고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사진을 돌려보면서 감동한 날이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본 신혼 때 모습과 아이를 함께 키우던 우리의 젊은 모습을 만난 것이다.
큰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 막달에 앨범을 미리 사놓고 맨 앞장에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면서 작성했던 내용을 보면서 눈물이 나고, 어린 두 아이를 그토록 많이 안아주고 좋아하신 이미 돌아가신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가슴이 먹먹해진 하루였다. 아이를 목말 태우면서 환하게 웃는 남편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여보 이랬었네요. 멋진 인생이었어. 기운 냅시다. 파이팅’>을 입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는 오늘 하루였다.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에 있는 시도, 신도,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삼형제섬’으로도 불린다. 강화도 마니산 궁도연습장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해서 시도(矢島)다. 모도(茅島)는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이름이 바뀌었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고향이 영종도인 필자는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시도 해안일주 트레킹을 하기로 약속하고 지난 4일 이른 새벽에 서둘러 서울에서 출발해 영종도 삼목선착장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현충일 황금연휴로 선착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요 차산차해(車山車海)다. 주차장을 찾아 두어 바퀴 돌다가 대책이 없어 운서역 근처 아파트로 돌아와 주차하고 다시 버스로 이동했다.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불과 10여 분을 가니 신도가 나타났다. 일단 신도에서 하선해 마을버스를 타니 요금은 현금이 아니면 안 되며 큰돈을 내도 거스름돈은 없으니 알아서 요금을 내라고 시큰둥하게 말하는 버스 기사님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10여 분 남짓 달리니 신도와 시도를 잇는 연도교가 나왔다. 우리는 시도 초입에서 내려 해안트레킹을 시작하였다. 한참 썰물 때라 거북이 등처럼 불쑥 드러난 갯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갯고랑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잡고 있었다.
1.4㎞에 달하는 해당화 꽃길로 들어서니 운 좋게도 붉은 해당화 꽃이 만발해 반겨준다. 해당화가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우리는 어릴 적에 그것을 명감이라고 불렀다. 빨갛게 익어가는 명감을 따서 입에 넣고 성큼 깨물면 달콤한 물이 나오는데, 단물의 유혹에 빠져 정신없이 따먹다가 단물 뒤에 숨겨진 깔깔한 이물질이 목에 걸려 캑캑거리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 마당 가에 서서 탁 트인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올망졸망한 무인도가 그림처럼 떠 있어 운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바닷가 모래사장을 신나게 내달리다 보면 모래장술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해당화꽃잎 사이로 빨갛게 익은 명감이 유혹한다. 그 시절엔 해당화 꽃은 모두가 붉은색인 줄로만 알았다. 흰색 꽃잎도 더러 피어 있는 것을 이곳 해당화길에 와서야 알게 됐다.
해당화 꽃길을 지나고 나니 시도염전이 나타났다. 두부모처럼 물을 잡아놓은 염전을 지나 한참 돌아가니 드디어 수기해수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매력적인 작고 아담한 수기해수욕장은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고 소나무 숲과 연결된 모래밭에는 군데군데 가족 단위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분주하게 황금연휴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모처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갯고랑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놀고 있었고 청춘 연인들은 다정하게 갯벌체험을 하면서 행복을 키워가고 있었다.
언젠가? 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우리도 올여름이 가기 전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보자는 약속을 하면서 드라마 '풀하우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날리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강화도 마니산이 지척에 보이는 수기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한적한 바닷가 전망 좋은 바위 밑에 자리 잡고 점심으로 버너에 라면 3개와 만두를 무려 15개나 넣고 끓였다. 해안을 따라 울퉁불퉁 험하기 그지없는 돌 밭길을 마냥 걸었으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던 차에 행복한 성찬(盛饌)은 우리 모두의 배를 호강시켜주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다시 해안을 따라 걸어가니 절벽 위 전망대로 올라가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어찌 이곳을 그냥 지나칠쏘냐? 가파른 절벽 길을 로프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탁 트인 전망, 강화도 마니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절벽이 가파르다고 해 박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가도깨비 전설이 있다. 해안에 가가도깨비가 살고 있었는데, '가, 가' 소리를 세 번 들을 때까지 도망가지 않으면 가가도깨비에게 잡혀간다는 전설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 주변에 오기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해안트레킹을 시작할 때는 썰물이라 괜찮았는데, 섬을 반쯤 돌았을 때는 밀물이 시작돼 쏜살같이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서둘렀음에도 출발했던 선착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바닷물은 거의 해안을 점령해 버렸다. 어찌해야 하나? 더는 해안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소리 지른다. 한데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고 가는 재미도 꽤나 좋았다. 기묘한 바위를 배경으로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가이 절경이었다. 우리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바위를 건너뛰고 기어오르면서도 그 멋진 풍경을히찍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바닷물로 곧장 빠져 카메라 장비 모두를 망쳐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 멋진 풍경에 매료돼 강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전망 좋은 어느 바위 틈바귀에서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자태를 드러낸 메꽃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험로에 큰 위로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6시간의 강행군으로 트레킹을 마치고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오니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온몸은 파김치가 됐으나 고진감래 끝에 완벽하게 섬일주를 마쳤다.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동네 어귀의 상점에 앉아 시원한 캔 맥주 한 캔으로 갈증을 달랬다. 여행은 밋밋하기보다는 스릴 넘치는 고생이 동반돼야 더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도 뒷담화가 이어진다.
갈매기가 춤추는 돌아오는 뱃전에 앉아 잠시 전의 멋진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가 보니 비록 몸은 고단했어도 달콤한 행복이 솜사탕처럼 밀려온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느 시대보다 많이 쓰여지고 있다. 연인 사이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인간관계 증진을 위하여 꼭 필요한 말로 권해진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자식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친구나 이웃에게도, 고객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의 지고한 가치가 있어서다.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다같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을 희망한다. 특히 후반생에 있어서 브라보 라이프는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닐까?
사람은 가진 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물이 있어야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다. 많고 적음은 별개다. 나눌 수 있는 것은 재물만은 아니다. 마음도 그 하나다. 재능도 그렇다. 그 양은 많아도 적어도 나눌 수 있다. 콩 한 톨을 열 사람이 나누어 먹고 한강에 던지니 ‘퐁당’하더라 했다. 요즘에 이르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개뿔도 가진 것이 없다면 주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도 줄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있을 때에 그 사랑을 하나씩 꺼내어 남에게 줄 수 있다. 재물과 마찬가지로 내 속에 쌓아 놓은 사랑이 없다면 꺼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부모나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도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베풀 수 있는 사랑이 곳간에 쌓여 있어서다. 부모나 가족에게 받지 못하여도 스스로 사랑을 쌓는 경우도 있지만 쉽지 않다.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채워져 있다면 쉽게 남에게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새로 채워서 주는 경우보다 쉬울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현상을 종종 만난다. 미움을 받고 자란 아이는 미움이 가득 쌓이게 된다. 다른 내용물이 들어갈 틈이 없다. 꺼낼 수 있는 것은 미움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피해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의심을 하거나 사람을 피하려 한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다. 부부싸움으로 세월을 산 사람의 자녀는 결혼 생활이 닮아 가기에 십상이다. 어느 집의 딸아이는 나이가 40살이 지났지만 시집 가기를 꺼린다. 부부싸움에 평온할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다. 마음에 사랑이 메말라 있어서다. 사랑의 곳간이 비었다.
내 인생의 중추는 나 자신이다. 주인공이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속에 사랑을 쌓아 가는 일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해서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행복을 전달할 수 없어서다. 짜증스러우면 나의 행동과 말이 곱게 나가기 어렵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불행하면 나에게 나오는 기운은 불행이다. 상대방이 불행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수신제가 평천하라고 하는 옛말이 있다. 자신을 먼저 닦는다는 의미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나를 갈고 닦는다 함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내가 제대로 서지 않고서 가족이나 주변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인생은 늘 뒷전에 두었다. 자식을 위해서 우선이었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 일쑤였다. 부모세대는 우리보다 더욱 그랬다. 고운 옷을 보아도, 맛있는 것이 눈에 띄어도 늘 자식을 떠올렸다. 몸이 아파도 자신을 챙기기를 망설였다. 경제적으로 늘 부족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은 늘 뒤로 미뤄졌다. 끼니 때우기가 어려웠던 시절엔 어머니는 늘 밥을 먹어 배부르다며 부엌에서 물을 마시기 예사였다.
이제는 장수시대다. 자녀들의 생활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든 세월을 살얼음 위를 걷듯 한다. 우리가 직장을 다닐 때는 남자 혼자 벌어서도 집안 살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 부모로서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지만, 희생보다는 그들의 힘을 덜어줄 수 있는 방도를 미리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일이다. 자녀의 도움이 없이 노후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자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건강을 챙겨야 한다. 내가 아프면 오래 산다는 것은 재앙이다. 자식에게 짐만 된다. 노인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당장에는 마음이 아플지 모르지만 자식에게 집중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위하여 경제적인 부분도 챙겨두어야 한다. 달랑 집 한 채 가졌다면 노후 자금을 위한 주택연금에 가입하자. 걸을 수 있을 때에 가고 싶은 곳도 많이 다녀두자. 먹고 싶은 것도 자신에 많이 먹여주자. 좋은 음식도 나부터 먹자. 젊은이는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일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 나를 너무도 혹사하였다. 이제는 나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자.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곳간에 사랑을 채우는 일이다. 언제고 꺼내어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말이다. 사랑도 쌓여야 남에게 줄 수 있다
“이제 배우로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스타 배우 김하늘(38)이 3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 살 연하의 사업가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한 말이다. “평생 존중하며 사랑하고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인생을 위해 살겠습니다.” 가수 가희(36)도 3월 26일 세 살 연상의 사업가 양준무씨와 미국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올해 들어 여자 스타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탤런트 김유미(37)는 두 살 연하 배우 정우와 1월 16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결혼했다. 걸그룹 핑클 출신 연기자 이진(36)은 2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여섯 살 연상의 미국 교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탤런트 황정음(31)은 2월 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세 살 연상 프로골퍼 출신의 사업가 이영돈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스타 연기자 김정은(40)은 4월 29일 금융업에 종사하는 동갑내기 재미교포와 결혼했다. 걸그룹 쥬얼리 출신 연기자 박정아(35)는 5월 15일 두 살 연하의 프로골퍼 전상우와 부부의 연을 맺을 계획이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시선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여자 스타의 웨딩드레스, 결혼사진, 신혼여행지, 결혼식 장소와 형태 등 결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높은 관심을 끈다. 오죽했으면 ‘여자 스타 결혼식은 스타 마케팅의 종합전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대중의 관심을 넘어 사회적인 화제가 된다. 한류가 거세지면서 우리 스타의 결혼은 외국 언론의 주요한 기사 아이템이 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식은 일반인의 소비와 라이프 트렌드를 이끌고 배우자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그동안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연예인 역시 일반인처럼 결혼 배우자가 매우 다양하지만,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의 변화와 함께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자도 크게 달라졌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00~1950년대에는 유교적 인식이 엄존해 연예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고 연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았다. 1900~1950년대 대중문화 초창기에는 여자 연예인과 일반인 결혼이 많았다. 또한, 백설희-황해, 전옥-강홍식, 황금심-고복수 커플처럼 상당히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동료 남자 연예인과 결혼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고 TV 등 매스미디어가 본격 등장한 1960~197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스타들의 우상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는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이 시기 눈길을 끈 것은 여자 스타와 재벌 혹은 중견기업 오너와의 결혼이었다.
영화배우 문희는 1971년 당시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故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과 결혼했고 영화배우 안인숙은 1975년 미도파백화점 사장이었던 대농그룹 박영일 전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한, 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은 1976년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과 결혼한 스타 정윤희를 비롯해 황신혜, 고현정, 김희애, 김성령, 이요원, 최정윤, 박주미 등 여자 스타들이 재벌 혹은 중견기업 대표와 결혼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했다 이혼한 고현정은 “결혼 당시 많은 사람이 재벌과의 만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됐고 사랑해 결혼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재벌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재미교포 등 외국 교포와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엄앵란-신성일, 윤복희-남진, 김지미-나훈아 커플처럼 동료 연예인끼리의 결혼 역시 성행했다.
대중문화 시장이 급성장하고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1980년대에는 연예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 시기 관심을 끈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연예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혼 후에도 연예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송사 PD, 영화감독 등 대중문화 분야 종사자였다. 원미경은 1987년 MBC 이창순 PD와, 양미경은 1988년 KBS 허성룡 PD와 결혼했다. 임예진 역시 드라마PD 최창욱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근래 들어서도 박성미-강제규 영화감독, 문소리-장준환 영화감독, 김민-이지호 영화감독처럼 여자 연기자와 영화감독의 결혼이 이어졌다.
원미경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연예계가 일반 직장과 성격이 크게 달라 배우자는 연예분야를 알았으면 했어요. (남편이) 드라마 PD라 연애할 때도 결혼 후에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격려해줘요”라고 말했다.
대중매체가 급증하고 연예산업이 산업적 기틀을 갖추어 스타가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는 주체로 떠오른 1990년대부터는 연예인을 발굴하고 육성, 관리하는 연예 기획사가 스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연예 기획사 대표와 연예인의 결혼이 흔치 않은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가수 양수경과 예당컴퍼니 변두섭 회장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배우 신은경-김정수 커플처럼 1990년대부터는 연예기획사 대표, 연예인 매니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많아졌다.
또한, 1980년대 최미나-허정무, 최란-이충희 커플처럼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등장하기 시작해 1990년대부터는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급증했다. 톱스타 최진실이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과 결혼한 것을 비롯해 이혜원-안정환, 김성은-정조국, 슈-임효성, 한혜진-기성용, 유하나-이용규 등이 여자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커플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 중 가장 많은 것이 연예인이다. 하희라는 1993년 최수종과 결혼했고, 신애라는 1995년 연기자 차인표를 배우자로 맞았다. 이후 유호정-이재룡, 채시라-김태욱, 고소영-장동건, 유진-기태영, 이효리-이상순, 원빈-이나영 커플처럼 수많은 여자 스타들이 동료 연예인과 결혼했다.
신애라는 “같은 드라마 에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는 작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료 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시선을 모은 스타 결혼식 중 하나가 최명길의 경우이다. 1995년 정치인 김한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흔치 않지만,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결혼이 간간이 이어졌다. 심은하-지상욱, 황혜영-김경록 커플이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만남으로 관심이 쏠렸다.
연예인이 청소년들의 직업 1순위로 부상하고 대중문화 산업이 만개한 2000년대 들어서는 여자 스타들의 배우자는 전문직 종사자에서부터 사업가, 스포츠 스타, 동료 연예인,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다
염정아-정형외과 의사 허일, 한지혜-서울지검 검사 정혁준, 전도연-사업가 강시규, 이영애-사업가 정호영, 소유진-요식업 사업가 백종원, 차수연-연예기획사 판타지오 대표 나병준, 전지현-금융업 종사자 최준혁, 한혜진-프로축구선수 기성용, 김지우-셰프 레이먼 킴 커플에서 보듯 최근 들어서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배우자의 스펙트럼은 사업가에서부터 전문직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어졌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거세지면서 외국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스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등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채림은 2014년 중국 배우 가오쯔치(高梓淇)와 결혼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1억원을 받는 스타로 부상한 추자현도 최근 올해 중국 배우 위쇼우광과 결혼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추자현은 예비신랑 위쇼우광(于曉光)에 대해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되어주고 연기자로서 발전을 도와주는 동료이자 연인이다. 중국인이라는 점이 결혼을 결정할 때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자 스타들의 결혼 배우자는 시대 상황과 연예인에 대한 인식과 위상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또한, 과거에는 여자 스타들이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하거나 인기가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여자 스타들이 결혼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결혼은 여배우의 인기의 무덤이 아니라 인기 상승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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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잘 부푼 팝콘 같은 탐스러운 벚꽃, 어릴 적 병아리 떼 종종종, 하는 노래가 생각나는 샛노란 개나리, 화전에 쓰이던 고운 분홍빛 진달래, 그 자태가 너무나도 우아한 자목련 백목련, 어느 향수 못지않은 향기로운 라일락, 거기에 쌀밥처럼 풍성해 보여 붙여진 이팝, 조팝나무 등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봄을 알리는 전령 꽃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출 즈음 우리는 계절의 여왕 장미를 만난다.
‘of all flowers me thinks a rose is best’ 모든 꽃들 중 최고는 장미라고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장미는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가 전쟁에 얽힌 일도 있는데 15세기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한 랭커스터 가와 하얀 장미의 요크 가와의 전쟁이다. 그래서 이름도 장미전쟁, 이름만은 낭만적이다. 그들은 두 가문의 결혼을 통해 화해하고 튜더왕조를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화합의 상징으로 튜더 장미 문양이 만들어지고 오늘날 영국의 국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미는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들의 꽃이기도 하다. 그게 한 송이든 한 다발이든 상관없다. 무릎을 꿇은 남자가 장미 꽃다발을 여자에게 건네는 장면은 언제라도 가슴이 설레고 미소를 짓게 해 준다. 장미는 덩굴장미와 나무장미로 크게 나누어지며 수많은 품종이 있고 모양도 다르다. 화려한 모양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으니 예쁘다고 함부로 만지면 안 되듯이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감춰진 가시가 있다고 장미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전 필자가 대학생일 때 5월이 되면 각 학교에서 메이퀸 뽑는 축제가 있었다. 필자는 마음이 곱지 않았던지 공부 잘하고 얼굴 예쁜 학생을 뽑아 여왕으로 추대한다는 그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여학생인데 한 명을 가장 높은 단상에 앉게 하고 시녀로 불리는 학생들이 그 옆으로 들러리를 선다는 게 싫었다.솔직히 말한다면 아마 내가 메이퀸이 될 수 없어서 난 심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대 메이퀸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유명한 축제였는데 내가 이대생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첫 번째 이유기도 하다.
다른 여대에서도 비슷한 축제가 열려 메이퀸을 뽑았다. 그런데 청파언덕의 우리 학교는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멋진 메이퀸 축제가 있었다. 5월이 되면 다른 학교처럼 예쁜 여대생을 뽑는 게 아니라 본관 교정 앞 화단에 여러 품종의 장미를 심어 번호를 붙이고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에 학생들이 투표해서 5월의 메이퀸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장미의 품종은 잘 모르지만, 당시 나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활짝 웃고 있는 장미에 한 표를 주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교정을 거닐며 화단에 핀 장미꽃을 감상하던 추억이 나를 아스라이 먼 동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는 것만 같다. 그때가 그리워 가슴이 먹먹하다.
새빨간 예쁜 넝쿨장미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도 있다. 필자는 중학교까지 전차로 통학하던 전차 세대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동대문 넘어 창신동에 있었다. 우리 집은 돈암동이어서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동대문 광장시장 앞에서 내려 동대문으로 가는 전차로 갈아타고 학교에 갔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아치 모양으로 철제 터널이 있었고 이맘때쯤이면 그 위를 온통 새빨갛고 예쁜 넝쿨장미가 뒤덮였다. 댕댕댕~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차에 앉아 꽃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전차가 없어졌다. 신나고 즐겁던 전차통학도 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혜화동을 지날 땐 꼭 그 자리를 바라보며 새빨갛고 예쁜 넝쿨장미를 추억한다. 장미의 계절에 잊고 있던 좋은 추억을 꺼내보니 그 시절 그때가 너무나 그리워 마음이 서늘하다.
총선투표로 공휴일이었던 날(4월 13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차츰 개이면서 화창한 날씨가 봄바람을 부채질했다. 필자는 일찍 투표를 마치고 파주 헤이리마을로 봄나들이 갔다가 쇼나 조각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합정역 1번 출구로 나와 2200번 광역버스를 타고 헤이리 1번 출구 앞에서 내린 뒤 맨처음 둘러본 곳이 '레오파드락갤러리의 쇼나 조각 갤러리 & 숍'. 건물 바깥에 전시된 조각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갤러리 여사장님의 손짓에 따라 들어갔다가 아프리카대륙의 강한 생명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쇼나(Shona) 조각’을 만난 것이다.
쇼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부족의 명칭인데,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독특한 석조 문명을 이룩한 조각의 나라로 알려졌다.
쇼나 조각가들은 스케치나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로지 정과 망치, 끌, 불, 사포 등 전통적인 도구만으로 자연석에 깃들어 있는 형태를 쪼아내고 연마해 조각한다. 특히 이 조각은 작업할 때 들리는 돌의 내면의 소리 때문에 '혼의 예술'이라 부른다.
쇼나 조각은 짐바브웨에서 싹텄지만 현재는 대표적인 제3세계 미술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 조각은 신비감과 생동감을 자아내며 자연스러운 질감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머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록펠러, 로스차일드가, 찰스 왕세자 등은 쇼나 조각의 대표적인 애호가이며, 피카소도 쇼나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파리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대표적인 미술관들이 쇼나 조각을 전시를 하고 있으며, 비평가들로부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쇼나 스톤즈(SHONA STONES)’은 짐바브웨에서 나는 사문암 종류이며, 2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색상이 있다. 무늬가 표범과 닮았다는 레오파르드락, 아프리카의 녹색 금으로 알려진 버다이트, 보랏빛 운모 라피도라이트,지구 최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버터제이드, 귀한 코발트스톤과 오팔스톤 등이 있다. 돌 속에 녹색, 갈색, 보라색, 하얀색, 에메랄드색 등 저렇게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돌을 깎아서 이토록 아름답고 능숙하게 조각을 하는 솜씨도 놀라웠다. 이런 희귀한 돌을 채굴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울까?
여러 가지 빛깔의 쇼나스톤을 붙인 ‘파라오 조각’도 유명하다. 너무도 실감 나게 만들어진 호박조각, 앙증맞은 부엉이들이 대표적이다.
여사장님은 궁금해하는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한 연유로 우리 발음이 좀 특이했던 사장님이 아름다운 보라빛의 라피도라이트 하마를 선물로 줬다. 앙증맞은 게 장식하거나, 독서하며 책장을 넘기다 고정할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라피도라이트는 리튬이 함유되어 있어서 진정효과가 나며,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것을 산 사람이 구입하던 날로 바로 큰 계약도 체결했다며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길 거라 했다.
헤이리예술인마을 초입에서 쇼나 조각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그날의 나들이는 대박이었다. 헤이리에 가시는 분들은 꼭 한 번 들러서 작품감상 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지인들에게 쇼나 조각을 선물한다면 받는 분들에 매우 특별한 선물이 되리라 생각하며 갤러리를 나왔다.
헤이리예술인마을은 1998년 파주의 15만 평 부지에 꾸며진 복합문화예술 마을로, 다양한 창작 공간을 비롯해 전시, 공연, 축제, 교육, 교류 등 새로운 것을 계속 개발 중이다. 점포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서 볼거리가 많은 게 강점. 각종 매체를 통해서 알려져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찾는 참 좋은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야!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엔 젊은 연인들 넘쳐나는데 맥주 마시고 난리가 아니다! 비상은 거기만 걸린 거지, 여긴 관심도 없다! 잘 있다 와라!”
늦은 퇴근길 전철 안. 얼마 전 전역한 듯한 젊은이와 아직 복무 중인 현역병의 통화인 듯했다.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앵커의 낭랑한 음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소란을 떨고 라면이나 비상식량도 준비했을 법한데, 이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다. 둔감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일까?
젊은이들의 통화 내용처럼 전방과 후방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긴장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산기슭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6월 6일 현충원에서는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더구나 북에서는 지금도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휴전 이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은 부와 자유를 누리나 북은 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 여전히 인민들을 동원해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자유스러움을 마냥 만끽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어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국기 게양식이 있고 하강식이 있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가면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며 경례를 했다.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국민의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금은 국가의 소중함이나 애국에 대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추억 속에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부와 자유가 넘쳐나는 부자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힘겹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군복을 벗은 지 40년이 돼 필자는 군부대를 찾는 기회를 얻게 됐다. 요즘 젊은 군인 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이 있어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교육 요청을 해와 이에 응한 것이다.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데다 지휘관은 부하들을 대하는 리더십이, 부하들은 상관, 동료와 함께하는 인성이 부족해 이 부분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부대 안에 들어서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니 오래전 군 복무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 받았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그러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통화 속에 그 말이 귀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쪼록 그래야지. 그런데 그것은 오래도록 굳건한 국군이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네.’
여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화여고 정동길을 안혜초(安惠初·75세) 시인과 걸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젊음을 보여줬다. 민족지도자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7년 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작가로서의 경력도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는 원로시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꾸준한 시 활동과 더불어 소설, 콩트, 동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안 시인의 젊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줘서
- 중
안혜초 시인의 시 은 2006년 봄,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전남 화순군 남면 운산리 평화문화휴양 시비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4년 가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중국어역시집의 제목으로 선정, 타이틀 포엠이 되기도 했다. 1941년에 태어난 안 시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풋풋함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은 저 시를 쓴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시는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
안 시인이 기억하는 자신이 처음 쓴 글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에서 내는 문예지에 투고했던 산문이었는데 제목은 였다. 그 글이 입선된 것을 계기로 문예란에 계속적으로 글을 투고했다. 이화여고 재학 중 교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 시인 스스로 말하길 자신에게 시란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이다. 그녀는 어떤 길을 갔더라도 시만큼은 계속 썼을 거라고 말하는 투철한 시인이기도 하다.
“무얼 바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곤 못 배겼을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시는 내게 있어 평생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숙적 같은 연인’이라고 시로도 썼을까요?(웃음) 평범한 시민인 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앓고 또 앓았습니다.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시는 쓰는 시인이 아프면 시도 아프고 시인이 비틀어지면 시도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는데 건강 문제도 좀 생기고 결혼 생활과 병행도 힘들고 해서 집에서도 쓸 수 있는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윤동주 시인과 안혜초 시인
안 시인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 와 영화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윤동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2001년 제17회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바보야, 이 바보야
차 한 잔
사과 한쪽에도 맘에 걸리고
잎새에 이는 잔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
- 중
“자작시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고 나하고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50년 가까이 시를 써 오면서 꽤 여러 번 문학상을 받았는데 윤동주문학상은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우고 싶은 상이기도 합니다. 이 상이 내게 더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문인협회 사상 처음으로 수상자를 한국문인협회 이사진 및 문협지회장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사위원에 의해 결정했는데 당일 회의석상에서 ‘수상자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열띤 토론 끝에 투표로 하자고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난 그 당시 임원이 아니어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 시인은 자신의 시집들 중 가장 아끼는 시집은 따로 없고, 시집마다 각별히 아끼는 시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제 시선집을 내게 되면 시선집이 되겠지요. 지난 2012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국제펜한국본부 주최) 한영대역 자선 소시집을 만들어냈는데, 현재로선 그게 가장 아끼는 시집이에요. 시집 제목은 이구요.”
그녀가 시를 쓰면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일들이 있다. 와 등 두 편은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 , , 등 여러 편은 작곡되어 노래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말했다.
오랜 경륜에서 다져진 삶의 철학과 포스
관념적인 시가 아닌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주로 우리 누구나의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했다는 안 시인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몰두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들이 쌓여 있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지하철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원로시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이제부턴 내가 노인세대로 분류되는구나’ 하여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요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네요. 하하.” 활달하게 웃어젖히는 안 시인의 몸짓과 말투에서 오랜 경륜으로 다져진 삶의 철학, 아우라가 느껴진다. ‘20세의 청춘에도 노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80세 노년에도 청춘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새뮈얼 울만의 저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으로선 ‘부끄러움’,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젊음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선 ‘부끄러움’이고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약한 것’과 다릅니다. 요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고 싶어 ‘수줍음’을 벗어 던져 버린 듯한 여자들이 많아져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예쁘다’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데, 수줍음이야말로 여자를 가장 여자답다고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난 남자도 약간 수줍어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요(웃음).”
그러고보니 활달한 듯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수줍어하는 기색이 만년 소녀와도 같다.
안 시인이 요즘 들어 가장 쓰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여자는 여자로 강하라’라는 주제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구는 여자들은 한심하잖아요? 보이시한 여자가 일면 매력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 흉내하곤 다르지요. 여자로 태어나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무엇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숭고한 거예요.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도록 양육함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실로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죠.”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이라는 거대한 산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지난해 가을 첫 손자를 본 게 가장 큰 경사이고 기쁨이라고 꼽는다.
“너무 늦게 본 손주라서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손주를 본 지금이)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맘 편한거 같아.”
안 시인은 독립유공자인 민세 안재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라는 뜻이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주필, 사장 등 언론인으로 종횡무진 활약, 일제에 의해 9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사학자로서의 업적도 크게 남겼다. 해방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활약, 초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승만·김구에 이어 3위를 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불행히도 납북되었다.
“혜초(惠初)는 첫 은혜, 첫 손녀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존칭을 쓰셨고, 모진 고문에도 신음조차 크게 내지 않아 심문하던 왜경들도 경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검소해 미 군정시절 한국인 행정수반인 민정장관 시절에도 도시락을 꼭 지참하셨고, 고매한 품성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질적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라를 구하시는 데 평생을 헌신한 분의 손녀라는 자긍심과 함께 그 분께 누를 끼칠까봐 조심 조심하며 살아왔어요.”
등단 50주년,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시점
안 시인에게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년 1월이면 문단 등단 50주년이에요. 시집 7권을 정리해서 시선집을 꼭 내려구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신앙 간증집도 내야겠구요. 또한 한불대역 시집, 한일대역 시집도 준비 중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 선집에 이어 전집을 내느라고 내 것은 자꾸 보류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어요. 수필집, 칼럼집도 내야 할 것들도 있고 단편소설, 콩트, 동화 들도 써서 발표할 것들이 각각 여러 편씩 쌓여 있는데….”
안 시인에게는 평생을 살면서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다.
“40세 전후에 몇 차례 걸쳐 성령은사체험을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넋두리를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지 또한 안 시인의 나이를 믿기지 않게 만드는 젊음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따라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그녀의 자부심이 됐다. 그녀의 시가 투명한 건 삶에 대한 특유의 낙관 때문일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바라보는 안 시인의 예쁜 감정을 담아왔다. 봄이 오는 덕수궁 길목에서 안 시인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벌써부터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기다려진다.
△ 안혜초 시인
이화여고·이화여대 졸업.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현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대외 협력위원.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현 고문.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