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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3모작 원하는 중장년 위한 직업정보 한자리에
- 40대 이상 중장년이 생애경력을 설계하고 인생후반부를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소개하고, 취업기회를 제공하는 ‘2018 신중년 인생3모작 박람회’가 9월 11일 서울 SETEC 제3전시장에서 개최된다. 고용노동부가 주최하고 노사발전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120개 기업이 참가해 중장년 구직자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취업 시장에서 중장년 세대는 은퇴가 시작된 700만 베이비붐 세대의 유입으로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중이다. 이번 행사의 특징 증 하나는 구인 중인 기업이 직접 현장에 나와 면접과 상담을 진행한다는 점. 현장에서 구인절차를 진행하는 박람회 참여 기업만 70개사에 이른다. 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접수 대행하는 간접참여 기업도 50개사다. 또한, 중장년의 인생 3모작을 위한 관련 정보도 제공된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귀촌 귀농에 대한 컨설팅부터 대한노인회 어르신취업지원센터를 통한 취업상담, 미취업자를 위한 직업 교육과정 소개, 사회적 기업 참여 안내 등도 지원된다. 또 인생 3모작 홍보관이나 전직멘트관, 생애경력 설계관, 생애경력 설계관, 매칭관, 취업지원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중장년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관계자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3D프린터 분야 등 창업이나 창직, 재취업과 관련된 특강도 준비 중"이라고 말하고, "정부 제도나 정책서부터 기업 동향까지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18-08-3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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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민의 버킷리스트 백두산 그리고 천지
- 동경 몇 달 전 ‘6월 백두산 여행단’에 자리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곧바로 예약했다. 백두산은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백두산에 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여행단을 따라가기로 확정한 뒤 몇 달 동안 어서 빨리 백두산 등정 날짜가 오기를 기다렸다. 백두산은 어떤 모습일까, 천지를 보면 어떤 감흥이 있을까, 출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흥분이 됐다. 정상에 오르면 신명한 기(氣)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국과 북한을 통해야 갈 수 있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금방 왕래가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가 급변했지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지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중국을 통해서라도 갈 수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땅인데 중국이 자기네 땅이라면서 금을 그어놓아 속이 아프다. 우리가 주권을 잃었던 시기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맺은 ‘간도 협약’으로 중국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두산은 2750m의 고산이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고산병도 걱정되었다. 아직까지 그렇게 높은 산은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천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다 있다. 이번에는 중국 땅을 통해 올라가는 서파와 북파 코스에 도전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도 천지를 보기가 어려우니 날짜와 코스를 바꿔 두 번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등정 첫날 - 서파 코스 중국 땅에 도착한 지 사흘째. 드디어 백두산에 올라가는 날이다. 먼저 서파로 올라간다고 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셔틀 버스로 중턱까지 가서 거대한 건물의 산문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1440개 계단을 오르는데 비가 더 쏟아져 우비를 입고 우산까지 써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넓은 전망대가 있었다. 그런데 천지 쪽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현지 사진사가 맑은 날 천지 배경 사진과 얼굴 사진을 합성해서 팔고 있었다. 백두산에 정상에 오른 것만으로 만족하고 하산해야 했다. 한반도 최고봉이라 해서 상당한 고생을 각오했는데 중턱까지 버스로 올라가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싱거운 면도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에 로비에 걸린 대형 천지 그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내일도 천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아쉬움에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은 것이다. 가이드는 ‘천지를 보려면 5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천지를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렵다’는 말도 전해진다 했다. 그러면서 내일 북파 코스로 올라가니 천지를 보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만큼 천지는 신명한 존재라는 설명이었다. 등정 둘째 날 - 북파 코스 북파 코스로 도전하는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맑았다. 오늘은 천지를 꼭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천지가 워낙 고산이라 올라가봐야 천지를 볼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너무 오만을 떨거나 장담을 하면 부정 탈 수 있으니 겸손하게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분위기였다. 북파 코스는 전세 버스에서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10인승 봉고차로 갈아탄 뒤 거의 정상까지 지그재그로 운전하면서 가도록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숲 사이로 정상 부근이 보일 때마다 오늘은 천지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산 중턱쯤에서 전망대가 깨끗하게 보였는데 그렇게 보이면 틀림없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정작 정상에 오르니 하늘은 쾌청한데 묘하게도 천지 쪽은 짙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그런 풍경도 참으로 신묘하게 보였다. 세찬 바람을 참으며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기다려봤다. 줄지어 천지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함성을 질러대면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안개는 잠깐씩만 옅어졌고 그 순간도 수시로 변했다. 찰나에 천지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어렴풋이 본 것 같기는 한데 뚜렷이 본 것이 아니었다. 봤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너무 간절한 마음이 반영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천지를 보라고 주어진 한 시간을 다 소비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합 장소로 내려가려는데 일행들이 중간에서 필자를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쉽다고 했다. 오늘 천지가 보일 가능성이 높으니 점심은 물론 후속 스케줄을 포기하고서라도 더 기다려 꼭 천지를 보고 가자는 권유였다. 말은 안 했지만 모두들 천지를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 천지여!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앞줄에서 사람들이 “우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천지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뛰어올라가 보니 과연 천지가 앞에서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짙게 가려져 있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극장 커튼처럼 걷히면서 천지의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눈앞에 펼쳐진 고고한 자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검은 물결,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고봉들 위에 아직 남아 있는 잔설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할 말을 잃고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천지를 바라봤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첫날 정상에서 무난하게 천지를 볼 수 있었다면 이런 감동은 밀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날도 날씨가 맑아 올라가자마자 천지가 보였다면 기쁨이 덜했을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데도 천지 쪽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그토록 애를 태우던 천지였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여전히 꿈쩍 않던 천지였다. 그런데 천지 보기를 거의 포기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적이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천지는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감탄스러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내 마음속 버킷리스트 하나가 지워지는 날이었다. 내려오는 길, 거대한 장백폭포와 계란을 삶아 먹을 수 있는 온천지대를 둘러봤으나 천지에 온몸의 감각을 빼앗겨버린 뒤라 어떻게 봤는지도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 2018-08-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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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진정한 웰빙인가?
- 웰빙(wellbeing)을 그저 호의호식하는 정도로 여긴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국립국어원은 웰빙을 ‘참살이’라 정했다. 참되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높인다는 뜻이다. 갤럽(리서치 전문 업체)은 문화와 정서가 다른 150여 개국을 대상으로 상세한 설문조사를 통하여 삶의 가치에 관한 요인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사람은 건강과 재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조사 결과에 따른 5가지 웰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직업 활동(Career Wellbeing): 직업, 봉사, 교육 등 정규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도모하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삶의 가치를 높인다. 2. 사회적 관계(Social Wellbeing): 가족, 친구, 친지, 직장동료 등 여러 사람과 좋은 대인관계를 맺어 상호 협조하며, 화목하게 기쁨을 나누면서 삶을 풍요롭게 한다. 3. 재정 안전성(Financial Wellbeing): 빚에 허덕이지 않고 재정적 여유가 있어 물건을 구매하여 얻는 짧은 행복감보다 보람 있는 여행, 친구와 즐거운 식사, 가족 캠핑 등 오랫동안 남는 추억의 경험을 구매하며, 남을 위해서도 돈을 쓸 줄 안다. 4. 육체 건강(Physical Wellbeing):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책임진다. 운동의 생활화, 건강식으로 능력의 70%를 먹으며, 적정 체중의 유지, 무리하지 않고 내일을 위하여 7시간 이상 숙면한다. 5. 지역사회 환경(Community Wellbeing):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좋은 주택환경 등 생활환경이 깨끗하고 안녕과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갤럽의 분석에 따르면 5가지 모두 해당하는 사람은 7%에 불과하며, 한두 가지 해당하는 사람은 66%라고 한다. 5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반면 하나라도 개선하면 그만큼 삶의 가치는 높아진다. 따라서 이 5가지 웰빙을 모두 효율적으로 누리는 자만이 진정한 웰빙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2018-08-3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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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홍천 산골로 귀촌한 전직 변호사 정회철 씨
- 술을 즐기다 보니 술 만드는 기술이 궁금해졌더란다. 그래서 양조법을 배웠고, 조예를 키웠고, 마침내 술도가를 차렸다. 최고의 술을, 독보적인 전통주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게 그의 귀촌 내력이다. 산골 숲속에 터를 잡았다. 된통 외진 골짝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도란거려 술을 익히나? 술 아니라 맹물이라도 향긋하게 무르익을 풍광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산골 술도가 사장 정회철(56) 씨의 전직은 변호사. 변호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우고 고시학원 강사로 뛰어 이름을 들날렸다. 충남대학교 로스쿨 헌법 교수로도 재직했다. 남들 눈에는 활보였겠으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시골로 내려가기에 마땅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건강에 탈이 났기에. 일밖엔 난 몰라!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열렬히 직업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몸에 적신호가 켜진 것. “머리 아픈 증상이 극심했어요. 오랜 세월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온몸의 기(氣)가 머리로만 몰렸던 것 같아요. 단 5분도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어요.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죠.” “사법고시 준비생들에게 스타 강사로 널리 알려졌었다죠?” “근 10년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하루 너덧 시간을 내리 강의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죠. 제가 고시생들을 위한 헌법 수험서 열 권을 펴냈는데, 날이면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무리였어요. 명예도 좋고 부(富)도 좋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건강부터 되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귀촌을 했습니다.” “귀촌 이후 건강은 좋아지셨고?” “강의하고 책 쓰고, 머리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야만 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나자 몸이 빠르게 회복되더군요. 요즘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 하지만.(웃음)” “양조장 일의 과로로?” “양조사업 구상은 귀촌 이전부터 나름 충실하게 해왔어요. 양조 공부를 많이 해뒀죠.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랐어요. 그런데 전통주 사업, 이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일본 술 사케나 서양 와인은 1년에 한 번 빚으면 그만이지만, 저희 토속주는 1년 365일 계속 매달려야 하거든요. 게다가 양조장 개업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머리 아플 수밖에.” “적자 발생 원인이, 문제점이, 어디에 있죠?” “소비자들이 전통술을 잘 모릅니다. 변호사가 만든 술이라 호기심을 가질 법하지만, 별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전래의 청주 문화, 약주 문화는 이미 고사 직전이에요. 거대 기업들이 장악한 유통망을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파고들기도 어렵고.” 정회철 씨의 양조장엔 ‘전통주조 예술’이라는 상호가 걸렸다. 그 옛날의 고귀한 양조 정통을 살려 예술에 맞먹을 술을 빚겠다는 의지를 실었다. 산중 유벽한 곳에, 수려한 숲속 5000평 부지에, 살림채를 비롯해 완벽한 수준의 양조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본때 있게, 맵시 있게.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개량 한복을 소탈하게 차려입은 정 씨. 안면에 자란 텁수룩한 수염이 입성과 오붓하게 어울린다. 숨어사는 사람처럼 표정은 고요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신명에 찬 근면으로, 그는 오직 술 만들기에 전념해왔단다. 주조(酒造)만을 일삼진 않는다. 양조 기법과 술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황! 세상의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 사업판이란 적자생존의 정글이라는 거.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지만,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고전한다. 그는 그걸 몰랐을까? 몰랐단다.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상황을 알았다면 덤벼들지 않았겠지요. 몰랐기에 사업 착수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 무슨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전통주를 제대로 복원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진정한 민속주를, 장삿속만을 추구하지 않는 술다운 술을 빚는다는 거, 그건 사업 성패를 떠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어요.”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의 술이 최고라 자부해요. 장인정신을 표방하며. 당신이 만드는 술은 어떤 특장이 있나요?” “좋은 술은 일단 맛이 빼어납니다.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를 미묘하게 자극해 만족을 주죠. 또 숙취라는 게 없어요. 그럼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은 무엇인가? 누룩입니다. 어떤 누룩을 썼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이 결정돼요. 대부분의 업체들은 첨가물이 들어간 인위적 누룩을 사용하는데, 이게 술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겁니다. 저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요.” 정 씨가 술을 내놓는다. ‘무작53’이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53도. 조선의 명주 ‘적선(謫仙)소주’를 원본으로 해 빚었다는 정통 증류식 소주. 한 잔 털어넣자 감미롭게 혀를 굴러 뜨겁게 목으로 넘어간다. 그는 증류식 소주 외 약주와 막걸리도 만든다. 술마다 고가격을 매긴 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의 표출이겠지. 술꾼들은 좋은 술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이태백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풍진 세상 흥겨이 노닐었던가.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를 마시며 쓸쓸한 이승을 소풍처럼 살다 귀천(歸天)한 천상병 시인의 동류는 또 얼마나 많던가. 술로 구겨진 인생도 숱하지만, 술의 위무(慰撫)로 일어선 인생사도 즐비하다. 가장 복스러운 인생은 술 빚는 자의 것일지도. 향기로운 술로써 세상에 미만한 고독과 고통을 씻는 일에 일조하기에. “술을 만드는 일, 좋은 술을 빚는 일,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용케도 만족할 만한 술이 만들어졌을 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죠. 모두들 세상에서 최고는 돈이라고들 하지만, 제겐 술이 최고예요.” “‘최고의 술’을 만든다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군요. 불안은 없을까?” “귀촌 전, 진정 기꺼이 즐기며 남은 생 전체를 쏟을 일을 찾았어요. 그게 전통주 사업이었죠. 단순한 술도가가 아니라, 풍류를 중심에 두고, 모두 흥겹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복합 술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싶었어요. 그게 꿈이자 목표예요. 불안? 그런 건 없어요. 다만, 화증과 짜증은 많이 늘었죠. 화 폭발의 대상은 와이프이고.(웃음)” “부인이 무슨 죄? 신사는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죠.” “아내가 하는 말, 서울에서 이토록 열심히 일했다면 빌딩을 벌써 사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일벌레입니다. 부진한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그 하나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향후 전망은 밝으니까.” “활로를 찾았다는 얘긴가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겐 고무적인 정황이죠. 어, 이거 맛있네! 기존 막걸리와는 다르잖아! 이게 뭐지? 전통주네! 그런 반응들.”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바람 잔 날에 바람개비를 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 바람 일으키기. 정회철 씨는 냅다 질주 중이다. “선택과 집중. 돌아보면, 제 인생은 그걸 나름 잘 해왔어요. 뭐든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몰두해왔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꿨어요. 이런 저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으로 조마조마 바라보는 건 와이프이고.” “어릴 적 꿈은?” “제가 대학 땐 운동권에서 뛰었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할까,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좀 있었죠. 그러나 한계를 느꼈어요.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긴 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판단을 했어요. 오늘날 이곳에서의 양조 일, 그건 인생 후반에 발견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 사업과 적성이 잘 부합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란 허울 좋은 요령과 처세가 무기일 텐데.” “흠, 얼마 전 너무도 힘들어 난생처음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요, 절더러 한량 타입이라 합디다. 한량? 내가 정말 그런 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정히 그렇다면 잠든 ‘끼’를 살려 재미있게 살면 되겠지, 워낙 모범생으로 성장해 내향적인 성격이 굳었지만 술과 더불어 한평생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죠. 저희 부부에겐 슬로건이 하나 있어요. ‘재미있게 살자!’ 부제(副題)도 있어요.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것과도 같은, 그런 절박한 굽이를 곧잘 마주치는 게 인생이지만, 웬일인지 파도는 흔히 절로 가라앉는다. 그걸 문득 느끼자면, 순항도 재미요, 난항도 재미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안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해 즐기는 데에서 삶의 풍미는 돋아난다. “귀촌을 해서 목가적인 낭만을 즐기겠다는 태도는 위험해요. 일 속에서 재미와 가치를 구해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게 옳다고 봐요. 귀촌을 환상으로 모색하는 건 실패의 첩경입니다. 시골 환경은 예상보다 더 단조롭고 답답할 수 있어요.” “원주민과 흐뭇하게 지내는 일에도 공을 쏟아야만 하죠.” “귀촌인들은 마을에서 백년을 살아도 외지인이에요. 애초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보다 시골에 막대하게 많은 건 자연의 얼굴들이죠. 자연이 주는 안정감, 그건 귀촌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지 않을까?” “사계의 변화에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철 맞춰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고…. 아아, 그럴 때면 넋을 잃어요.” 생물과 무생물이 섞인 도시. 생물과 생명이 얼크러져 순환하는, 시골이라는 자연. 자연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이라면, 귀촌이란 자못 근사한 여행이겠지. 정회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을 줄여 쓸 수 있는 곳이다. 너무 열악한 경제 형편 하에서 귀촌하면 괴로워진다. ❷ 가급적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자. ❸ 시골의 문화 여건은 미비하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서 귀촌하자. ❹ 도시에서 맺은 인적 관계를 꾸준히 관리, 지속하자. ❺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터를 넓게 잡을 필요 없다. 200평 정도면 텃밭까지 즐길 수 있으니.
- 2018-08-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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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력은 나빠졌지만 세상은 더 잘 보이네요”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등산 자락에 가면 ‘생오지문예창작촌’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문순태(文淳太·80) 씨가 추구하는 문학의 열정을 증명하는 이곳 주변의 도로명은 생오지길. 원래는 만월2구라 불렸다고 한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문 작가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을 생오지라고 불렀던 기억을 되살려 문학의 집을 만들어 생오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소설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긴 그가 말하는 고향과 문학, 그리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생을 들여다봤다. 문순태 작가가 생오지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어느덧 13년째, 그동안 그는 이곳에서 문학제를 열고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완성했으며 창작집 두 권과 에세이집, 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시 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이가 드니 소설 쓰기가 힘들어요. 수술을 여러 번 하기도 했고 기억력도 쇠퇴해서. 대신 자꾸 시가 써지네. 시는 누워서 앓고 있어도 영감으로 쓰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는 지난 1년 동안 장편소설 ‘광주 가는 길’을 집필했다. 그 와중에 쓴 시들을 모아 ‘생오지 생각’이라 이름 붙이고 얼마 전 출판사로 넘겼다. 새삼 그가 193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올해 팔순의 나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창창했고 문학가로서의 그의 업 또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후배 소설가 김영현 씨는 얼마 전 전주에서 열린 혼불문학상에서 그를 만나 자신의 롤모델이, 문 작가처럼 80대까지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는 말을 듣고 문 작가는 다소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영원히 남을 작품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량이었죠. 농사는 안 짓고 첩을 둘이나 두신 분이었으니. 반면 어머니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덕분에 일찍부터 땅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문 작가는 당시 ‘아무나 못 들어가는’ 광주고등학교를 들어갔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학을 만나게 됐다. “2학년 국어선생님이 수필가였는데 글을 써내라고 해서 에세이를 썼어요. 그런데 그 에세이를 엄청 칭찬하는 거예요. 너무 잘 썼다면서 문예부에 들어오기를 권했고 들어가니 이성부, 조태일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어울렸죠. 특히 시인인 김현승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어요. 고등학생인 우리를 데리고 숲 산책을 하면서 시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죠. 사실 김현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시를 쓰게 된 거예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이 추천되어 등단한 문 작가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숭실대학교 기독철학과를 거쳐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면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삶이라고 보기 힘들었기에 내심 답답했던 그는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독일 연수를 다녀오니 유신이 나라를 뒤집어놨다. 절박해진 현실에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됐고, 마침내 1974년에 ‘백제의 미소’가 ‘한국문학’에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때가 서른네 살이었으니 늦게 된 편이었죠. 쓰고 싶은 욕망이 넘쳤고 너무 많이 썼어요.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이 많은 작품들 중 몇 편이나 살아남을까 싶어요.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쓸걸 하는 아쉬움이 있죠. 최하림, 이청준, 조태일을 보세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어요. ‘야, 이청준이도 아직 살아 있고 최하림도 살아 있네’ 했죠. 단 한 작품이라도 시공을 초월해 살아 있으면 돼요. 그걸 일찍 깨달으면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작가들은 헛된 욕심 때문에 막 쓰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괴로운 존재죠.” 문학은 역사의 칼 문 작가가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못 썼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에겐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작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이 있지 않은가.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차례였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누가 봐도 철저한 리얼리스트의 감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역사의 칼이다, 잘못된 역사는 문학이란 칼로 베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창작과비평사 외에는 내 글을 안 받아주더군요. 주변에서도 ‘너무 색깔이 강하다,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는 ‘빼앗기고 짓밟혔을 때 울부짖는 소리야말로 문학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문학은 관념이 아니라고 봤던 것이다.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까지 배운 그가 그렇게 말한다는 게 이채롭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알 만큼 알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관념적 주제를 만들기는 굉장히 쉬워요. 황석영이 한 말이 있는데, 관념은 보기 좋은 상자를 보기 좋은 종이로 싸서 계속 끌러 봐도 상자들만 나오다가 맨 마지막에 찌그러진 성냥통을 보면서 ‘휴, 소설 쓰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죠. 우리 삶의 실체를 보고 거기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징소리’가 주는 울림 문 작가의 신념과는 달리 주변에서 그의 소설을 보고 자꾸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한번 해보겠다’며 작심하고 내놓은 소설이 ‘징소리’였다. 교과서에도 수록되며 많은 독자에게 읽혀온 문순태 작가의 대표작 ‘징소리’. 이 작품에서 그는 20세기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정의하고 고향을 관념화해 인간성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징소리’에서는 ‘고향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고향을 보여주길 시도했다. 그 결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징소리’는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다. 그는 그때를 계기로 문학 예술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문학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육십이 되니 ‘문학은 역사의 칼에서 삶의 길 찾기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문학은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주는, 그래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한 길 찾기가 돼야 한다고 봐요. 이제는 ‘성찰의 거울’이 되길 바랄뿐이에요.” 얼마 전 국민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 그가 갖게 된 문학관을 설명하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도인이 됐다는 소리군요?”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소리였다고 한다. 물론 문학에서의 깨달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칫 작가로 하여금 현실과 유리된 세계 속에 빠뜨려 방관자로서의 공허한 외침만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순간 당황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역사라는 칼은 주머니칼로 변해서 아직 내 주머니에 있다’고 답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그 자신이 진정한 대표작이라 여기는 ‘타오르는 강’이다. 평범한 사람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다 36년.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 전 9권의 완결을 맺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말 그대로 문순태 작가의 반생이 담긴 작품이다. 그가 1970년 무렵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을 때 나주 양반집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1886년에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문서를 나눠줬는데, 그 집 할머니가 문서를 보여주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노비들은 울면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비들은 자의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반응이 나온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이건 뭐가 있다’ 싶어서 노비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기사화했다. 그리고 이를 소설로 써서 ‘월간중앙’에 연재한 것이 바로 ‘타오르는 강’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어요. 제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지식인을 등장시키지 않아요. 평론가들은 지식인이 등장해야 소설이 고급화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해요. 그런데 지식인들은 세상을 정직하게 보지 않습니다. 굴절시키고 자기화하죠. 그러나 무지렁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 전달합니다. 나 또한 지식인이지만 지식인처럼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식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받아들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 ‘타오르는 강’을 쓴 동기였죠.”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타오르는 강’에 심혈을 기울여 전라도의 정서와 역사를 담아냈다. 한 국어학자는 문 작가를 가리켜 우리나라 소설가 중 전라도 토박이말을 가장 폭넓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향토색이 가득한 작품이다. “‘타오르는 강’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을 때 잘 안 팔렸어요. 어떤 사람이 사투리를 전부 표준어로 바꿔라, 그러면 팔릴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책을 읽고 있던 법정 스님이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고는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토박이말은 그 지역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아예 3년에 걸쳐 ‘타오르는 강’ 토박이말 사전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그 뒤로 단어를 모르겠다는 전화가 오면 그거 읽어보라고 했죠.(웃음)” 관계를 끊어야 본래의 나를 찾는다 ‘타오르는 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라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는 계속해서 일하며 지낸 운명적 장소다.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까지 한 그는 작년까지도 유니버시아드의 오프닝과 폐막 시나리오, 광주전남연구원 이사장 등 사회적인 역할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리할 때라고 보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지갑을 자주 열고 좋은 말을 해줘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관계를 정리하느라 하나하나 끊을 때마다 외롭긴 해요.” 인간은 욕망이 무한한 존재이기에 욕구충족을 위한 경쟁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욕망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버리게 된다. 그래서 문 작가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일이다. “관계를 많이 유지하며 죽는 것은 괴로워요.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와서 죽는 것은 멋진 일이죠. 나이 들수록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욕망을 가진 채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절대로 안 돼요. 죽음도 존엄하지 않고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죠. 제가 고향에 돌아온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작은 것에서 감동받는 게 삶의 희망 문 작가는 “풀벌레와 나비와 경쟁할 거냐?”고 되물으며 웃었다. 고향의 자연 속에 있다 보니 한없이 낮아진 자신을 발견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작가는 미세한 존재를 통해 우주를 보는 사람입니다. 작은 곤충 속에서 우주를 보니 제가 낮아져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죠. 젊을 때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보여요. 빨간 것은 빨간색으로밖에 안 보이죠. 그러나 나이 들면 빨간색 안에 많은 색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기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세상은 더 잘 보여요.” 최근 핸드드립 커피에 푹 빠져 지내는 그는 과테말라산 ‘안티구아’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과테말라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커피농장 노동자 2만여 명을 학살한 역사가 떠올라서 슬픈 영혼들을 생각하며 ‘검은 눈물’을 마신다고 말했다. 수많은 작은 것들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삶과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삶은 작은 것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매사에 의미를 부여해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남 험담하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 보낼 필요 없잖아요. 사실 우리는 감동받을 게 굉장히 많은데, 지금까지 너무 냉정하게 살았어요. 작은 것에서부터 감동을 받는 것, 이것이 삶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읍내’ 작가 쏜톤 와일더 말처럼 ‘인생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커피 마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것’인가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순수하고 맑은 성정을 가진 문순태 작가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무등산 자락 산골 생오지의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문순태 소설가 193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문학부와 숭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징소리’, ‘고향으로 가는 바람’, ‘철쭉제’, ‘된장’, ‘울타리’, ‘생오지 뜸부기’ 등과 장편소설 ‘걸어서 하늘까지’, ‘그들의 새벽’, ‘41년생 소년’, ‘도리화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 9권) 외에 시집 ‘생오지에 누워’가 있다. 순천대학교와 광주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고향 담양에서 ‘생오지문예창작촌’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 2018-08-2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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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구에서 수비는 졸렬한 행동일까?
- 당구에도 수비가 있다. 당구는 자기가 칠 공을 치는 공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을 맞힐 확률이 적다면 수비도 염두에 두고 공격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비는 졸렬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정당한 공격만이 보기 좋다는 것이다. 수비까지 염두에 두고 치는 행위는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가 걸린 모든 스포츠는 공격과 수비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 맞다. 권투 선수가 권투 시합할 때 한 대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쓰러지는 턱을 내놓고 하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위인 턱은 양 주먹으로 가리고, 되도록 안 맞으려 하는 것이 수비이다. 도망가는 것만 수비가 아니다. 4구 경기에서 수비는 빨간 두 공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 상대방이 쉽게 점수를 올리기 때문이다. 공격 포인트 하나를 무리하게 시도하려다가 놓치면 상대방에게 몇 개를 한꺼번에 주게 된다. 그 게임은 이기기 어렵다. 그런 경우가 누적되면 바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공격은 아예 안 하고 눈에 보이게 상대방 공 앞에 자기 공을 갖다 놓는 행위는 졸렬한 행동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공격 끝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공이 상대방에게도 어려운 공 배치가 된다면 정상적인 수비로 봐야 한다. 3구 경기는 반대로 수구 반대편에 공이 모이면 치기 어렵다. 그나마 모여 있으면 빈 쿠션 치기로 시스템에 따라 난구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한쪽에 몰려 있으면 비교적 공략하기 어려운 난구가 되는 것이다. 상대방 공이 테이블에 붙어 있어서 공격 기회가 와도 제 실력을 구사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공은 먼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 공이 다른 공에 가려 있어 3 쿠션을 구사하기 어려울 때도 일단 공격 방식을 택할 때 그 형태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그 정도는 인위적으로 공격 방식이나 힘 조절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것이 수비이다. 고스톱도 초보자는 자기 패만 본다고 한다. 고수는 남의 패까지 짐작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야 전체 판을 보고 공격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축구 경기에서도 공격에만 치중하다 보면 수비가 허술해서 상대방의 역습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수비수까지 공격에 나서면 공격력은 강해지지만,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 상대편이 역습해 들어오면 수비수가 없어 그대로 당하는 것이다. 지난 러시아 월드컵 때 독일과의 경기에서 독일 골키퍼가 공격에 가담한 사이에 그 공을 빼앗아 손흥민 선수가 쐐기 골을 넣은 것도 독일 팀 수비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구는 오락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이기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승패가 오가야 재미있다. 그러나 고수가 이기는 확률이 높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고수는 그만큼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게임비 내기가 당연했지만, 시니어들은 별다른 수입도 없고 같이 즐겼으므로 승패와 관계없이 게임비 및 식대는 공평하게 나눠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돈이 결부되어 있으면 감정이 동원되고 의를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8-08-2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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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요리연구가 문성희, 숨심과 밥심으로 존재와 마주하다
- ‘평화가 깃든 밥상’ 시리즈, ‘문성희의 쉽게 만드는 자연식 밥상’ 등을 통해 다양한 자연요리 레시피를 선보여 왔던 문성희(文聖姬·68). 그의 첫 에세이 ‘문성희의 밥과 숨’, 얼핏 소박하면서도 거대한 물음을 줄 것만 같은 제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읽는 내내 삶의 행복과 자유를 좇아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했다. 그러다 답은 결국 제목에서 찾고 만다. 문성희(존재로서의 한 인간), 밥, 숨. 존재 그 자체로서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건 단 세 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일과 관계, 거대한 문명의 소용돌이 안에 매몰돼 허우적거리던 30대. 기쁨보다 고민이 많았고, 기도로 달래보아도 좀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소로의 ‘월든’을 읽고 책 속의 삶을 동경했으나, 자신과 딸아이의 생존이 걸쳐 있는 삶의 터전을 당장 놓아버릴 수 없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하는 불행 속, 자기주도적 삶을 위해서는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을 둥둥 뜬 마음으로 보낸 뒤에야, 이윽고 중학생 딸의 손을 붙잡고 철마산 오두막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토록 갈망하던 삶, 그는 과연 만족스러웠을까? “만족스럽다기보다는 기쁨과 희열이 대단했어요. 많은 것을 버리고 왔음에도 오히려 모든 게 가득 차 있었죠. 산에 와서 여러 실험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세탁기 없이 살아보자는 거였어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더군요. 옷이 두 벌이면 된다는 거였죠. 벗으면 당장 빨아야 하니까.(웃음) 세탁기가 있으면 빨래를 계속 쌓아두게 되잖아요. 그렇게 문명에 의존하던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면서 좀 더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었어요.” 생명을 살리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는 자신의 삶을 산에 들어오기 전과 후로 나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몰라 한없이 흔들리고 나약했던 존재에서, 삶의 기술을 터득하고 무언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 것. 그러나 산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자연에 살면서 하늘, 바람, 계곡이 있어 행복을 느꼈는데, 결국 이 또한 의존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어떠한 대상에게서 오는 행복이라면, 문명에 기대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도시든 시골이든 내 존재로서 행복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때쯤 저처럼 살고 싶다며 찾아오는 분도 많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행복을 찾아 산에서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 그럼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은 뭘까? 그걸 찾고 싶더라고요.” 산에 오르고 내리는 사이 변화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도 한때 20여 년 요리학원 원장으로 살며 방송, 강연 등을 통해 감각적이고 화려한 요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오랜 경험 끝에 가장 훌륭한 요리는 재료 본연의 생명력으로 자연 그대로의 향과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푸성귀와 생식을 먹으며 점차 몸 세포가 변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고, 비로소 생명을 살리는 음식에 몰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영혼이 몸 안에 들어 있을 때 휴먼 빙(human-being), 즉 인간이고 삶이죠. 그것이 떠났을 때가 죽음인 건데, 일단 사람의 몸을 갖고 있을 때는 물질을 취하잖아요. 흔히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하는데, 이걸 더 깊이 쪼개면 빛과 진동이죠.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결합해 어떤 생명체가 된 거예요. 내가 마신 공기, 먹은 음식, 내 안의 사유 등과 어우러져 몸이 되고, 우리 영혼은 그 몸과 교감하는 거죠.” 그는 단순히 잘 먹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섭취하는 식재료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인간이 다른 생명 종과 차이 나는 건 생각하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저 동물처럼 먹고 산다면 진화할 수 없다는 얘기죠.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내가 먹는 이 낟알조차도 땅과 연결되고 물과 연결되고 또는 다른 생명과도 연결된다는 걸 인식해야죠. 또 음식이 지닌 에너지와 칼로리는 달라요. 패스트푸드나 가공음식은 영양을 보충해줄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에너지는 전혀 담겨 있지 않죠.” 진정 깨달았다면 그대로 살 수 없다 책에서 문성희는 인생의 40년, 그러니까 절반 이상의 시간을 자신이 이번 생에 가지고 온 카르마(karma, 업)를 해결하는 데 보냈다고 술회한다. 아울러 부모가 남긴 유·무형의 빚을 갚고, 자신의 생존에 대한 의무와 자식을 키워야 하는 책무까지,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 사건이 있겠지만 모두 내가 감내해야 하는 카르마의 굴레죠. 사실 그건 카르마이기도 하지만 배움이기도 해요. 내가 사는 이 인생은 학습의 장이거든요. 삶을 통해서 성취하고, 성장하고, 배우고 결국 전인적인 존재가 되는 게 목표죠. 내 삶의 카르마, 즉 의무를 다했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요.” 이제는 카르마에서 벗어나 홀가분하다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 ‘자유’라는 두 글자가 아른거렸다. 자연스레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화제를 던졌다. 이에 그는 지천명(知天命)이 되고 나서야 진정한 자유를 알았다고 말했다. “질서를 벗어난 자유는 없더라고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잖아요.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혼자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한다고 자유로운 건 아니거든요. 세상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되, 그 속에서 얽매임을 느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걸 깨달았어요.” 문성희가 나눈 인생의 깨달음에 감명하고, 동의하며 그와 같은 삶을 동경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실천이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내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원한다면 이렇게 한번 살아보라 말해요. 그럼 직장이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이래저래 안 되는 이유를 대요. 그땐 기다리라고 얘기하죠. 정말 마음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못 살겠다고 느껴질 때 선택하면 되거든요. 그렇지 않다는 건 지금의 삶이 그 사람에겐 최적이라는 거예요.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그저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그 깨달음을 정말 이해하고, 통했을 때는 도저히 그대로 살 수가 없어요.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잊히지도 않죠. 그러면 삶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바뀌게 마련이에요.” 내가 있어야 우주도 존재한다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그는 종종 우주과학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주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광활한 우주와 비교했을 때 인간은 티끌처럼 미미한 존재라 여긴다. 그러나 이에 문성희는 “극히 단순한 것과 극히 광활한 것은 일맥상통한다”며 이야기를 뒤집는다. “아무리 큰 우주라도 봐주는 관찰자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 우주를 봐주는 게 바로 나잖아요. 내가 있어야 우주도 존재하는 거죠. 그러니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해요? 우주로서는 자기를 봐주는 인간이 너무나 고맙고 소중할 수 있죠. 내가 해와 달을 보고, 그들이 기뻐하는 걸 느낄 수 있을 때, 내 존재가 굉장히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우주 만물이 수없이 많지만, 내가 있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내가 없으면 모든 게 다 사라진다는 것, 그걸 느끼는 내가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의미 아닐까요.”
- 2018-08-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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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시대, 대면 관계가 중요해진다
- 전철을 타면 자리에 앉았거나 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승객 대부분이 스마트폰에 몰입해 있다. 길을 걸으면서도 상황은 같다. 친목이나 가족 모임에서도 다르지 않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페 등 온라인 네트워크가 확대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 배경이다. 페이스북에 수백 명, 수천 명의 ‘친구’나 팔로워를 가진 사람들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시대의 흐름과 변화 속에 함께 하려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음은 아니다. 필자의 고등학교 동창 한 사람도 수천 명에 이르는 페이스북 친구를 두고 있으나 늘 외로워 보인다. 때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위로와 격려의 댓글이 달려도 가슴 속에 쌓인 외로움을 해소하지는 못하는가 보다. SNS의 관계망이 크게 넓어지고 친구가 늘어날수록 깊이는 더 얕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정작 참된 친구를 꼽으라면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수천의 온라인 친구들과 여유롭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아서 형식적으로 흐르기 쉬운 점도 있다. 다시 말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수록 직접적인 교류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 가끔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싶으나 문자가 대신해가고 있다. 편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결혼 청첩장도 정성 들여 쓴 봉투 대신에 온라인 청첩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편리하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보며 부대끼는 관계에서 진정한 친구가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교류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두터워지고 관계를 풀어가는 역량이 자연스럽게 훈련되기 마련이다. 요즘의 상황은 그 반대이다. 기계화를 우려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기계화를 좇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상대방은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온라인’친구’가 아닐 터이다.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서 직접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다. 직장의 상사와 부하, 동료와 고객 등은 SNS로 진실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아도 직장 상사를 친구로 대하기는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는 현상과 같다. 사물 인터넷을 비롯한 SNS 기술이 발달하여 사이버 네트워크는 확대되었으나 직접 접촉의 욕구는 오히려 줄어들지 않는다. 일부 젊은 층은 다른 사람과 직접 접촉과 대화를 꺼리는 현장을 손쉽게 본다. 부부 싸움도 카톡으로 한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 상대방의 말 듣기를 거부한다. 젊은이들이 이어폰을 끼고 있음은 음악이나 방송을 듣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방편의 하나라 실토함을 들은 적이 있다. 근래에 ‘하이테크, 하이터치(High Tech, High Touch)’라는 말이 부상하고 있다. 하이테크 시대에 하이터치, 즉 직접적인 대화와 만남을 요구하는 물결이 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직장인이 장래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과소평가 되었다’의 저자, 포천지의 제프 콜빈이 그 저서에서 답을 주고 있다. “앞으로 기계가 대체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위로해주고 같이 기뻐하는 공감 능력은 인간만이 갖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이러한 공감과 관계의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인공지능의 등장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인간을 위로하는 도라에몽이 등장했어도 상대방과의 공감 능력은 인간을 넘어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인간관계망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다가온다. 행복한 삶은 직장, 가정 등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대면적 관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역량은 인공지능이 퍼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다.
- 2018-08-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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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가 중요해요”
- 5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우연히 전라도 나주에 왔다가 한국 학자로 살게 된 베르너 사세(Werner Sasse·78)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월인천강지곡, 농가월령가, 동국세시기 등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한국 고대 언어 연구를 위한 목록들이다.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에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와 황혼 재혼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 운명에 이끌리듯 일어난 일들이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데 현생에 독일로 유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전생의 육체가 기억해놓은 장면들이 있다면 현생에서 이끌림으로 다가왔으리라. 한옥과 한복을 좋아하고 남도의 홍어와 젓갈의 깊은 맛까지 알아버린 푸른 눈의 남자. 이렇게라도 주석을 달아야, 독일에 있을 때도 매일 아침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6년. 독일의 원조로 전남 나주에 비료공장이 만들어졌을 때다. 당시 독일 기술자였던 장인이 “한국에 기술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이 나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25세였던 독일 청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일 열심히 하고, 정 넘치고, 잘 놀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4년간 전라도와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나라가 여전히 궁금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보훔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지냈다. 50여 년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보낸 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은 독일이 아니라 전라도라고 말한다. 다시 찾은 사랑, 그리고 황혼 재혼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던 날, 그가 사는 전남 담양으로 출발했다. 비가 사납게 몰아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쯤 더 가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에 젖은 나리꽃이 마중하듯 반갑게 피어 있었지만 80이 가까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산속이었다.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어쩌려고 이렇게 깊은 곳에서 사시느냐 했다. 그러자 홍안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미리 걱정해요? 시니어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친구랑 산에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고 나 힘들어 죽겠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온몸이 다 아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보야, 나도 아파. 그런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연습 없이 산에 올라가서 아픈 거야. 젊은 사람도 연습 없이 산에 오르면 힘들어’ 하고 말해줬어요. 제가 보기엔 나이가 아니라 엄살이 문제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이 산속에서 어떻게 하냐고요? 일주일만 버텨보셔요.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는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불안감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내린다. 자신은 ‘지금, 여기’ 일만 생각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요약해보니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낯선 나라에 매료돼 고려방언이니 가사문학이니 한국인들도 쉽지 않은 공부에 골몰하더니, 70세에는 뒤늦은 재혼으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들은 졸혼이니, 휴혼이니 하면서 무거운 결혼생활 끝내고 혼자 한번 살아보리라 희망할 때 그는 한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배우자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을 추며 살아온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 그래서 그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지인 전시회 때 처음 보고 몇 차례 우연히 더 만나게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 했지요.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데 정년이 있나요? 그런 생각에 얽매여 주저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 선생과 같이 산 지 벌써 8년이나 됐네요. 그녀와 저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충돌하는 일이 없어요. 각자 하는 일도 있어 존중해주고 도와줄 일 있으면 힘을 보태면서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 결혼했다면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라며 상대에게 잔소릴 해댔겠죠. 나이가 드니 상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군요. 집안일도 남녀 구별 안 해요. 누구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자유롭게요.” 사람들은 더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관심과 간섭 속에 상대를 가두곤 한다. 삶의 상상력을 펼쳐야 할 때는 이런 욕구들에 맥없이 멱살 잡혀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베르너 사세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점들은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움, 즉 영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해학’이라 덧붙인다. 깊은 산속 빗소리와 함께 들은 최고의 문장이었다. 민낯이 예쁜 나라, 한국 “가끔 한국의 어떤 음식이 맛있냐, 한국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이 하나일 수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술을 예로 들면, 한국 음식과 곁들일 때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지요. 육체노동을 할 때도 물론 막걸리가 어울리고요. 그러나 목이 마를 때는 맥주가 맛있고, 특별히 분위기를 내야 하는 날은 와인이 낫지요. 한국 음식, 한국의 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랑 먹고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맛과 매력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그는 전통 문화란 힘들게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것을 시대에 맞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데서 진정한 전통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제가 개량한복 입고 독일 가면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디자인이 예쁜 옷 샀냐고 묻습니다. 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해서 즐겨 입어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정작 한복을 잘 입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건 앞뒤가 좀 안 맞는 행동으로 보여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데 설득력도 없어 보이고요. 그렇다면 늘 입고 다니는 양복은 과연 편해서 입는 걸까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도 그는 한국인의 역사관을 냉정한 시각으로 언급했다. “한국 사람들은 ‘오천년 역사’,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오천년이면 신석기시대입니다. 한국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죠. 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관 공감될까요? 저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봐요.” 가차 없는 논리의 학자다운 지적이다. 고유 문화에만 집착해 사실을 회피하는 자세는 건강한 역사의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보기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한국이 더 아름답다. 그걸 봐버린 죄(?)로 한국인 못지않은 긍지로 이 땅의 문화를 연구하며 반평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는 요즘 수묵화에 빠져 있다. 한국을 소개할 책 번역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서울에서의 전시도 준비 중이다. “수묵화는 20년 전부터 그렸어요. 한지를 알게 된 뒤부터죠. 서양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만 동양화는 달라요. 내 의지가 아닌, 붓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게 돼요.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붓과, 나와, 한지의 대화예요.” 이제 풍류의 멋까지 섭렵해보겠다는 태세다. 전력을 다해, 더러는 문득 생각난 듯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며.
- 2018-08-1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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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견지명(後見之明)
-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다가올 일을 미리 짐작하는 밝은 지혜’를 뜻한다. ‘후견지명’도 다가올 일을 미리 짐작하지만, “내 그럴 줄 알았지”라며 내버려 두다 예방을 못 한 경우를 말한다. 주로 남의 일에 관해 얘기할 때 그렇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사후과잉혁신편향’이라고 한다. 지인 중에 돈을 빌려주면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이 있다며 필자도 투자하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좋은 뜻으로 순수하게 필자에게 도움이 되라고 알려준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거래는 경험상 분명히 함정이 있으니 당연히 거절했고 지인에게도 당장 투자한 돈을 회수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집안사람을 통한 거래이니 믿을 만 하다며 차일피일 회수를 미루다가 결국 돈을 몽땅 떼였다. 필자가 워낙 강하게 회수를 권하니 회수의 뜻을 비치긴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주변 지인들 돈까지 더 들어가서 크게 사기를 당했다. 원금 일부 회수를 요청하자 사기꾼은 오히려 자기 사정을 알려주며 더 안심을 시켰다. 지금은 사정이 어려워 원금을 못 주지만, 돈을 더 투자하면 고비를 넘기니 그때 한꺼번에 더 얹어 주겠다며 소위 ‘물타기 작전’에까지 말려든 것이다. 지인은 큰돈을 잃고 나니 크게 상심하여 한동안 눈물로 지샜다. 가슴이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하고 얼굴도 팍삭 늙었다. 회수를 위해 조그마한 가능성만 있어도 긴급 출동을 하고 여러 수단을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애초부터 사기를 칠 사람은 꿈쩍도 안 했다. 이미 돈은 다 빼 돌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사람이다. 감방에 들어가 있더라도 유능한 변호사를 사서 형기를 조기에 마치고 나올 심산으로 제 살길 다 준비한 사람에게는 못 당한다. 돈을 잃은 지인에게 필자가 한 말이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였다. 그랬더니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강력하게 돈을 회수시켰어야지, 왜 놔두었느냐?”며 대드는 것이었다. 돈을 잃은 지인은 필자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데 위로는커녕 화만 더 돋게 하였다고 했다. 필자의 후견지명이 오만하게 보이고 지인 당사자의 자존심까지 폄하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었다. 필자가 투자한 것도 아니면서 지인에게 화를 내며 돈을 빨리 회수하라고 한 것도 주제넘은 짓이었다. 더 잘 못 한 것은 일이 터진 후에 “내 그럴 줄 알았지”였다. 사기꾼 일에 필자가 말려들어 지인과의 관계만 망친 꼴이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말려든다. 그러니 사기꾼은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다. 살면서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 욕심이 비극을 낳는다고 했다. 과욕이라면 일반적인 욕심을 넘어서는 것이라 그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 필자 세대는 IMF 금융위기 때 실직하거나 망한 사람들이 많다. 실직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실직을 만회하기 위해서 뛰어든 것으로 보통 일반적인 것으로는 성에 안 차니 과욕을 부린 사람이 많다. 실직에 이은 실패이니 두 번 망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가정의 파탄, 개인의 파멸이었다. 그 때문에 제 명대로 다 못 산 사람도 있다.
- 2018-08-08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