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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강남스타일은 나눔, 봉사, 참여로 살아가는 것!”
- 자타가 공인하는 노인복지전문가 이호갑(李鎬甲, 59)씨는 이렇게 자기를 소개한다. “10년 삼성의료원 짓고, 10년 삼성 노블 카운티 짓고, 10년 운영했습니다.” 간단하지만 한 문장에 30년 노하우가 들어 있다. 그런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선택한 곳은 또 다른 노인복지의 실험장이 되는 강남시니어플라자다. 30여 년 노인복지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강남시니어플라자는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이호갑 관장과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인연은 7년 전, 강남구가 노인복지시설 건립을 위해 자문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 관장은 삼성생명 공익재단 상무로 재직하고 있었다. “강남구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남은 모든 게 달라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 노인복지관이 경로잔치를 열어주는 등 혜택만 주는 서비스를 해왔다면, 강남은 노인 나름대로 재능을 펼치고 활동적인 노후를 위해 즐길 수 있는 개념으로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문역할을 해줬던 시설이 이 관장이 몸담은 강남시니어플라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삼성생명 공익재단 상무 자리에서 물러나고 6개월 뒤인 2014년 8월 14일. 강남시니어플라자 관장으로 첫 출근했다. “처음 왔을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일 큰 문제가 타성에 빠져 있는 운영방식이었습니다.”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설립 목적은 노인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활동적인 노후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인데 와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운영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출근 첫날 이 관장 눈에 보였던 것은 융통성 없는 사무실 배치였다고. “조그만 건물에 사무실이 세 개였습니다. 첫날 오자마자 벽을 부숴 사무실을 트고 세 개였던 사무실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소통이 빨라졌죠. 회원들에게도 눈에 보이는 변화를 드린 겁니다.” “왜 난 자꾸 대기 번호에서 밀리는 거요?” 이 관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부임 일주일 뒤에도 이어졌다. 바로 강남시니어플라자 회원들과 가진 간담회였다. “이곳에서는 회원이 즉 고객인데 고객의 소리를 종합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더군요. 180개 강좌의 반장과 총무 등 60여 명이 모여 그간 필요했던 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물리적으로 안 되는 것 빼고 웬만한 의견은 수용했다. 간담회 이후 이 관장의 집무실도 회원과 소통을 위해 개방했다. “회원들 얘기를 들어보니 수업 등록 대기자 관리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언젠가 다른 지역에서 온 노인이 ‘하모니카가 배우고 싶은데 세 번이나 밀려서 배우지 못했다’면서 삿대질을 하고 막 화를내시더라고요. 강남구민은 정회원, 다른 지역 구민은 준회원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비율이 각각 85퍼센트와 15퍼센트입니다. 정회원 우선으로 강좌를 들을 수 있게 하고 대기자 관리를 제대로 안 하다 보니 강좌 등록을 몇 번 해도 수강이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대기자에 대한 관리도 제대로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비좁은 공간에 이용할 수 있는 교실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였다. 생각보다 이 관장이 제시한 방법은 간단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주변 카페나 기타 공간들을 찾아 비어 있는 시간에 시니어들을 위한 교실로 이용했다. “회원들의 소리를 최대한으로 반영해 드렸어요. 그랬더니 회원들도 ‘뭔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구나’ 생각하시더라고요.” 두바이에서 찾아낸 ‘강남스타일 에이징’ 30여 년 노인복지전문가로 살아온 이호갑 관장. 삼성을 나온 이후에도 노인복지 관련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강남시니어플라자 취임 한 달 뒤인 2014년 9월, 아랍 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열린 메디컬시티 국제상업학술대회에 초대돼 ‘고령화 현상과 한국의 사례, 삼성 노블 카운티’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됐다. “관장 취임 전에 초청됐고 발표자여서 꼭 가야 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40분 동안 영어로 발표했습니다. 영어가 늘 쓰는 언어도 아니고 말입니다. 발표하고 나서 바로 질문받기 전에 무대에서 나오려는데 한 사람이 ‘I have a question.(질문 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터번을 두른 아랍사람이었다. 당황도 잠시, 그는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한 뒤 질문을 이어나갔다.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에 관해 물어봐서 답을 해줬더니, ‘감사합니다’라 말하고 앉는 겁니다.” 한국어로 질문했던 사람은 알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 국립병원장이었다. 그는 한국인 수간호사 두 명과 함께 일하는 것도 모자라, 아침마다 한국어로 회의한다고 했다. “그때 나를 소개할 때 ‘나는 강남시니어플라자라는 노인시설 CEO고, 강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강남에 살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학술대회 끝나고 나왔더니 나를 다 알아봐요. ‘강남 스타일’이라며 말입니다. ‘강남 스타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강남시니어플라자는 노인종합복지관의 선두주자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념을 ‘강남스타일 에이징’이라 부르고 이 안에는 ‘나눔, 봉사, 참여’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정의를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해 강남스타일로 늙어가려면 나누고, 봉사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강남시니어플라자에는 사회에서 득을 크게 본 사람들이 많아요.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든지 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거죠. 나눔을 실천해야 그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강남스타일 에이징’을 확립하고 강남시니어플라자 홍보를 시작하자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최근에 은퇴한 60대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복지관은 7, 80대들이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비교적 젊은 60대 은퇴자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강남시니어플라자가 그 소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이 관장은 ‘관장님과 함께하는 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매월 회원들과 가깝게 만나고 있다. “지난번에는 회원 7명과 함께 영화 을 봤습니다.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첫마디가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입니다. 은퇴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여행하고, 자원봉사 다니는 겁니다. ‘일’은 활동을 하는 거죠. 이렇게 시니어들의 노후에는 그런 사랑과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이 보여주더군요. 그게 바로 나눔, 봉사, 참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관장은 강남스타일에이징에 걸맞은 사업을 펼치기 위해 작년 3월 ‘강남스타일시니어봉사단’을 만들었다. “회원 수가 1만 명이 넘는데 봉사하는 인원은 100명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강남스타일시니어봉사단’입니다. 그리고 버스 두 대를 대여해서 음성 꽃동네 견학을 갔습니다. ‘자원봉사를 진짜 이런 마음에서 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음성 꽃동네 견학 이후 봉사단 배가운동을 펼쳐 지금은 봉사단원이 300명에 달한다. 또한 자원봉사단 규모를 1004명까지 늘리자는 의미에서 ‘1004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물론 별 관심 없는 분들도 있고 관장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루아침에 될 문제가 아니고 서서히 의식을 바꿔드리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시니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확실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봉사단을 300명으로 늘려놓기는 했는데 봉사할 곳을 개발해야 한다. 이곳 강좌에서 배운 능력으로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 또한 봉사다. 봉사의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요즘 큰 관심사라고 이 관장은 말했다. 롤모델은 언제나 아버지, 아버지 이 관장 주위에는 이렇게 노후에도 자원봉사와 꾸준한 사회 참여로 건강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버지다. 이 관장의 아버지 이형재(李衡在, 90)씨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자원봉사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교사 시절 좋아하던 술도 끊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관장은 아버지께 용돈을 드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들이 삼성 상무였는데 말이다. “언젠가 서울역 근처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방송인 송해씨와 아버지가 스쳐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BMW(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삶, B 버스, M 지하철, W 걷기)를 실천하며 사시잖아요. 매일 일하고 자원봉사하니까 90세가 되어도 정정하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노인이 돼서 일하고 자원봉사하는 게 건강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구나, 집에서 느끼는 거죠. 물론 내가 노인복지에 관한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산 모델이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이 관장은 강남시니어플라자 관장 자리에서 내려와서도 노인복지와 실버타운 전문가로 일하고 싶다고 한다. 실버타운 건설과 운영에 관한 전문 서적을 집필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분야가 노인복지 분야가 아닌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노인복지현장을 누빌 이호갑 관장의 미래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드리는 바이다.
- 2016-02-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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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 人북] 경희대 전호근 교수, 시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보물
- 청소년기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베토벤의 곡을 즐겨 들었다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田好根·54) 교수. 10년 전, 메이너드 솔로몬이 쓴 베토벤 평전 은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렸다. 처음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평전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할 만큼 저자의 분석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때는 자료를 읽어내듯 눈으로 읽고 머리로 기억했는데, 그는 최근에 들어서야 같은 책을 마음으로 읽게 됐다. 지난해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오고부터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베토벤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과거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감성적으로 느끼며 읽게 된 것. 그러자 베토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간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이 총 135곡이에요. 거의 모든 곡을 샅샅이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죠. 그렇게 익숙한 멜로디가 빈에 다녀오고 다시 이 책을 읽고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알게 돼서 다르게 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에 접근하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베토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도 좀 더 깊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주목하지만, 전 교수는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1802년에 남긴 베토벤의 유서는 철학을 전공하는 그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유서를 보면 베토벤처럼 절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간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끊임없이 강조하죠. 나 같은 철학자는 부당한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 자기 수양은 제대로 됐는가 등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기준을 굳이 베토벤 같은 예술가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유서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아, 모든 사람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할 수 있구나. 아무리 권력과 부를 쌓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면 불행한 거구나. 그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지만, 18세기 당시 평균수명이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년이나 다름없다. 30세 무렵부터 귀가 먹기 시작했기에, 음악가로서 중년의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전 교수는 위기를 지나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베토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말했다. “중·장년이 되면 기회도 오지만 어려움도 많이 찾아오잖아요.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귀가 먹어가니 심적으로도 힘들었고, 통증도 심각했죠. 그러한 시련을 오히려 자신의 창작력을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삼거든요.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도 걸작으로 나오고, 귀가 먹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그런 어려움이 뛰어난 작품으로 생산하죠. 그런 걸 보면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베토벤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됐어요.” 추운 계절의 소나무를 칭찬하는 까닭 전 교수는 공맹(孔孟)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하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인 35명의 철학을 담아낸 를 펴냈다. 그런 전 교수가 베토벤을 보면 떠오르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단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라 답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경학과 실학 등의 다양한 학문까지 아우르며 학예일치의 경지에 오른 추사, 절대적인 명성을 얻은 점 또한 베토벤과 유사했다. “베토벤이 몸에 병이 생기며 찾아온 내적 고통을 앓았다면, 추사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니 외부에서 온 고난에 시달린 셈이죠. 베토벤이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곡들을 작곡했듯, 추사 역시 세한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전 교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시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사는 시련을 겪으며 우정을 얻게 됐죠. 유배를 가서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나니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이 끊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라는 제자는 그를 이전과똑같이 대하고 더욱 살뜰히 챙기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우정과 이상적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이상적의 우정에 감동해 추사가 남긴 작품이 ‘세한도’이다. 그는 세한도에 공자의 말을 덧붙여 마음을 전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 추운 계절이 오고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나의 곤경 이전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삶이 평온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발견하기 힘들죠.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도 한데, 역경이 없으면 서로 간에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알게 해준 추운 계절처럼, 인간에게 고난의 시간은 깨달음을 주죠.”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는 나를 바라볼 시간 흔히들 요즘 중·장년들을 말할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만큼 열심히, 진취적으로 살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 교수는 이제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성취,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과 대화할 기회가 적은 거죠. 나이가 들고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자각하면 자연히 겸손해지거든요. 잃어버린 게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높아지고, 고통이 클수록 내면은 더 단단해지죠.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예요. 자신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상을 지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젊어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근본적인 철학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도 중요한 비중을 두고 기술되지 않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죠. 권력이나 출세 등의 외압에도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킨다고 하는 게 반드시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 그 이상을 포기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고 변절시키려고 외부에서 강요를 하겠지만 어떻게 지키는가가 자기 수양이죠. 결국 그런 신념이나 이상을 잘 지키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 2016-01-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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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 명지대 바둑학과는 처음부터 독립된 학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체육학과 내의 바둑지도학 전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립된 학과나 다름없었으며 곧바로 바둑학과로 독립하였다. 이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에 대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바둑계에서도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과연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현 교수는 신입생 선발요강과 학과과정을 정하고 신입생을 뽑아 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교수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을 별 무리 없이 잘 처리해나가 교수라는 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가능한 한 외국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고 이를 위해 외국유학생의 장학금 상한선이 등록금의 70%이던 것을 100%로 상향조정하도록 했다. 2001년에는 과 주도로 명지대학교에서 제1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제2회 대회는 2년 후 해외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둑학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2003년 4월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동년 6월에는 한국바둑학회가 창립되어 필자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마침 그 해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 예카테리나 궁전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으로 제47회 유럽바둑대회가 7월 19일부터 8월 1일까지 그곳에서 열렸다. 한국바둑학회는 제 2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그곳에서 7월 26~27일 양일간 개최하였다. 필자는 한국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집사람과 함께 참가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바둑대회가 진행되던 약 2주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그 근교는 물론 모스크바까지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귀국길에 우리 일행은 바둑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바둑클럽이 있는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그들과 교류전을 가지는 한편 관광도 즐기는 바둑관광여행을 했다. 먼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하이델베르크와 낭만가도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 인터라켄과 융프라우를 관광한 후 다시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의 빈과 잘츠부르크, 체코의 프라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갔다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우리 일행은 이상기온으로 인한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파리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쳐 로렐라이를 구경하고 라인크루즈를 타기도 하며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말단 공무원을 하시면서 노상 일본사람들과 다투시는 바람에 진급을 하지 못하고 만년 주사노릇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바둑에 열심이셨던 이유는 다른 다툼에서는 편파적으로 일본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라도 바둑의 승부에는 깨끗이 승복하기 때문에 바둑으로 일본사람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조남철 국수의 자서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여하튼 할아버지의 기력은 5급(현 아마 초단) 정도로 당시에는 군(郡)에서 1, 2위를 다투는 고수였다고 한다. 바둑을 두실 때에는 할머니께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무리 부르셔도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국을 몇 번씩 다시 덥히다가 하도 화가 나셔서 빗자루로 대야 밑바닥을 두드리며 불이야! 하고 소리치자 바둑판만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시는 바람에 손발을 다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도 바둑이 당시로는 무척 세셔서 3급(현 아마 3단) 정도였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두 점 치수로 종종 바둑을 두시는 바람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과는 상당히 친밀한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필자를 데리고 나가시면서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시는 분은 조남철 국수이지만 장국원이라는 분도 만만치 않다는 것, 세계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시는 분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계신 오청원(우 칭위엔)이라는 분으로 살아 있는 기성으로 존경받고 계시다는 등, 국내외 바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도착한 곳은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시던 명동의 송원기원이었다. 그곳에서 조 국수를 비롯하여 몇몇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 후 바둑을 구경하며 담소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셔서 바둑에 대한 기초를 설명해 주셨다. 마침 당시 학교에서도 공책에 바둑판을 그리고 ○, Ⅹ로 바둑을 두는 것이 유행이어서 이때부터 바둑이 늘기 시작해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7급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한일대학생 바둑대회 대표로 활약했고 최근까지도 각종 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강1급 최훈 군을 비롯하여 과 정원 40명 중 약 10명 가까이가 1, 2급의 강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때쯤은 필자도 약한 1급 정도는 되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서도 4명 정도가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실력도 비슷했다. 이들과 자주 만나 바둑을 둔 덕분에 기력이 점점 더 늘게 되어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은 보통 1급(현 아마 5단)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80년에 열린 제1회 대한토목학회 바둑대회 A조에서 준우승, 그 다음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전국 토목공학과 교수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 2015-05-07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