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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보다 여유 있게, 산책보다 자유롭게
- 한강을 낀 동네에 이사 와 산 지 이제 스무 해가 좀 넘었습니다. 그러니 한강 둔치를 걷는 일도 그 세월만큼 흘렀습니다. 이제 걷는 일은 제 일상입니다. 호흡과 다름이 없습니다. 걷기는 그 이전에도 제 일상이었습니다. 탈 거리가 드물기도 했습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읍내에서 하숙이나 자취할 여유가 없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두 달 남짓했으니 오랜 일은 아닙니다만 새벽 5시에 집을 나서면 8시쯤 학교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면 다시 그렇게 걸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루에 여섯 시간 남짓을 걸은 셈이죠. 신작로는 지루했습니다. 너무 단조로웠죠. 그래서, 지름길이라고 했지만 그리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은 아닌데, 저는 산길로 들어서서 오르내리며 그 긴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요즘 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에 나타나는 거리로 보면 대략 12.3㎞쯤 됩니다. 그러나 그때 걷던 일은, 실은,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헐레벌떡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려간 것이어서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 탓이겠습니다만 저는 걷는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역시 교통비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에 다닐 때도 종로 5가에서 가정교사하던 신설동까지 늘 걸었습니다. 걷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걸은 것은 오랜 뒤의 일입니다. 나이가 예순에 꽉 차게 이르렀을 때쯤부터 서서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강 가에 와서 살기 시작했을 즈음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제 걷기가 제법 그럴 듯한 소요(逍遙)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저를 충동했고, 그래서 걷기라기보다 뜀박질로 강 둔치를 달렸습니다. 저는 한강철교에서 시작해 동작대교까지,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출발한 곳까지, 온 힘을 다해 그야말로 질주를 했습니다. 때로는 두 왕복을 하기조차 했습니다. 겨울에도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몸은 낡아갑니다. 얼마 뒤부터 저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속보를 하게 되었고, 그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리를 터벅거리며 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은 아예 어슬렁거립니다. 바야흐로 소요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겨우 이제 걷기를 하는 셈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낡고 쇠해가는 몸이 저리게 느껴집니다. 이래저래 겪는 상실감이 뚜렷하게 진해집니다. 걸음걸이는 늙음을 드러내주는 가장 뚜렷한 표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확인하려면 걸어보는 일보다 더 효과적인 측정 도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슬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면서 잃은 것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달리기할 때는 보이는 것이 동작대교와 한강철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복을 끝내면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그만두고 속보를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제가 달리는 길이 보였습니다. 옆의 나무들도 실루엣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마저 그만두고 터벅거리게 되자 하늘도 강의 물결도 내 호흡과 더불어 내 안에 안겼습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낯선 세상을 만나면서 놀랍고 경이로웠습니다. 달리기에서 이룬 성취감으로는 짐작하지 못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슬렁거리는 요즘에는 바람 소리도 들리고 햇빛의 흔들림조차 보입니다. 물결이 일고 꽃이 피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꽃과 나무와 그늘과 길이 어우러져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조차 보이고 들립니다. 제가 그 대화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낡아간다는 것은 잃어간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도 꾸지 못한 많은 것을 새로 얻어간다는 일이기도 합니다. 걷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걸음조차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을 가진 인간이 안 아프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망발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걷지 못해 얼마간 한강 둔치에 나가 걷는 일상을 접어야 했습니다. 아쉽다 못해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한강 둔치에 뻗어 있는 긴 길이, 저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너 기억하니? 서쪽을 향해 걸을 적에 만났던 황혼을! 너 그 신비 속에 안기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니? 내 끝이 거기 닿아 있는데 네가 내 위를 걸었던 것을 기억만 해도 나는 너를 그리 데려다줄 거야! 더 내 위를 걷지 못해도!” 달리기가 아닌 어슬렁거리는 걸음만으로도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넉넉한 지복(至福)의 경지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난주부터 저는 다시 한강 둔치를 흐느적거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황혼의 신비로 이끌어줄 길과 더불어 내가 걷는 일이 이리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 2020-06-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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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의 재취업은 힘보다 민첩성이다
- ‘네 신랑 아직도 직장 다니느냐? 요즘 젊은 애들도 취직 못 해 난리인데 정말 너 남편 대단하다.’ 아내가 친구에게서 들었다는 그 말을 전해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예순을 넘어 정년퇴직하고 새로운 직장을 잡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첫째의 걸림돌이 건강이다. 공장이나 아파트를 짓는 건설현장에서 인력 부족이라 하면서도 나이 든 사람을 꺼린다. 기술력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도 병원 의사가 발행한 ‘일을 시켜도 좋다’는 건강진단서를 요구한다. 건강이라고 하면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근육질의 몸매를 떠올리지만 노동력이 있어야 하는 건설 현장마저도 힘든 일을 하려는 근육질의 몸은 필요 없다. 땅을 파는 삽질은 '포클레인(Poclain)‘이라는, 기계가 한다. 철근 같은 무거운 물건을 높은 곳에 올리려면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타워 크레인( tower crane)이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금방 해치운다. 힘든 일은 대부분 기계가 해치우니 경험 많고 노련한 나이 든 사람이 환영받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니어의 약점은 파워가 아니라 사실 민첩성이다. 건설현장에서도 힘이 부족한 게 아니라 순발력에서 젊은이에게 밀린다. 잘 넘어지고 순간적인 판단력이 둔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안전에 문제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안전이다. 공사현장에는 크고 작은 위험이 새벽 안개처럼 스멀스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좁은 철근 위를 걸어야 한다. 발에 걸리는 장애물도 많고 갑자기 옆에서 돌발흉기도 튀어나온다. 귀가 어둡지 않아야 작은 위험한 소리(예: 가스가 새는 소리, 불타는 소리 기계의 파열음 등)를 듣는다. 순간 집중시력이 좋아야 넘어질 것 같은 물체를 볼 수 있고 튀어나온 못이나 삐딱한 받침대 등 위험인자를 발견하여 몸을 틀어 피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지혜는 늘지만 오감은 떨어진다. 한마디로 몸이 둔해진다. 필자가 오래 했고 즐기는 테니스라는 운동도 구력(球歷)이라는 연륜이 있다. 상대의 약점을 빨리 간파하고 효과적인 공격에 구력이 작용하지만 상대의 빠른 공에는 발걸음이 느려 속수무책이거나 설령 공을 쫓아갔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몸을 돌려 공을 받아칠 균형 감각이 떨어져 실수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젊은 사람들보다 민첩성이나 순발력이 늦음은 고백한다. 속도감이 있는 운동경기에서 승부에 지는 가장 큰 이유는 힘이 아니라 순발력과 민첩성에 있다. 나이 들어도 현역으로 오래 근무하기 위해서는 헬스장에서 파워를 기르는 것 못지않게 청력과 시력 등 오감을 제대로 유지하기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눈감고 한쪽 발로 오래 서기. 호각소리에 빨리 반응해서 몸 틀어보기, 작은 소리를 들으려 청력 집중해보기, 눈동자 굴리고 일정 지점에 시선집중하기, 입 안에 있는 음식 맛을 느끼고 맞춰보기를 해보면 작음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 방송사 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보폭 넓혀 걷기’가 방영되었다. 나이가 들면 걷기가 어려워지면서 자연히 균형을 잡기 위해 보폭은 좁아진다. 평소의 보폭보다 10cm 넓히는 걸음을 걸으면 근육이 활성화되고 균형 감각도 좋아진다. 평소 균형감각과 민첩성을 위해 자기만의 운동법을 개발해서 그런 운동을 해보자. 보폭을 넓히고 빨리 걷는 습관이 필요하다.
- 2020-05-1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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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한양대 교수 "고요함을 익혀 나와 대면하라"
- “말하여 바로잡는 것도 앎이고, 침묵하여 바로잡는 것도 앎이다. 때문에 침묵을 안다 함은 말할 줄 아는 것과 같다.” ‘순자’(荀子)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남의 말 듣기를 거부하고, 제 말만 하는 사람들로 세상은 조용할 틈이 없다. 남 탓하며 분노를 키우는 사이, 정작 내 안의 소중한 무언가는 빛바래 간다. 정민(鄭珉·59) 한양대학교 교수는 침묵이 주는 힘, 고요함이 빚어내는 무늬를 잊어버린 세태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에 고요히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습정’을 펴냈다. 습정(習靜), 고요함[靜]을 익힌다[習]는 뜻이다. 갈수록 세상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운데, 내면은 충족되지 않은 채 껍데기만 남은 듯하다. 정 교수는 이러한 공허함을 습정을 통해 채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고요함을 익히는 과정에서 비움과 채움의 길항작용이 일어나죠. 멈춤의 시간 없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늙어가는지 모르고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허망해집니다. 그러다가 화가 나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에게 불공정한가, 왜 나만 이런가 하고요. 그건 세상에 반항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바깥 소음에 일희일비하다 보면 내 안에 나는 없고, 남만 잔뜩 들어 있게 되죠. 스스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그런 시비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 무엇을 견제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가치판단을 위해서는 주체성 회복이 시급해요.” 그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 속에서 강제로라도 멈춰 가라앉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의 고요함은 단순히 물리적인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인디언이 사냥하려고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고 해요. ‘내가 너무 빨리 와서 아직 마음이 따라오지 못해 기다린다’고요. 그 말처럼 마음은 저 멀리 두고 계속 달리기만 하면 허깨비 인생이 되는 거죠. 열심히 살았고 부지런히 노력했더라도 결국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거예요. 그러니 짧게라도 계속 습정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입 다물고 어디 산으로 들어가라는 건 아녜요. 절간에 있어도 마음이 복잡하면 저잣거리에 있는 것과 같죠. 가끔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 사람 많고 시끄러워도 깊이 몰두하면 나와 책만 놓인 듯한 경험을 하잖아요. 그런 내적인 고요함을 익히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고이는 습정의 독서 습정을 통해 나와 대면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고민이 생겨날 수 있다. 정 교수는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하다), 즉 과거의 경험에서 현재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번 책에서도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귀감이 될 만한 옛글들을 모아 엮었다. 그는 번역가, 전달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사설은 최소화하기로 했다. 글에 대한 가치판단 역시 독자의 몫이라 여긴 까닭에서다. “저는 학자로서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옛글을 찾아 해석하고 옮기죠. 이때 중립적으로 보여주려고만 하지, 어떤 의미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때론 제 의도와 다르게 글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죠. 그러나 그 역시도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뿐이에요. 요즘 자기계발서를 보면 스스로 통찰하도록 원리를 짚어주는 게 아니라 단편적인 요령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 글들은 계속 소비될 뿐, 내 안에 고이지는 않죠. 독자가 글을 곱씹어보고 자기 언어로 소화해야 비로소 책을 통한 성찰이 이뤄진다고 봐요. 또 그런 자기 언어를 갖게 됐을 때 자연히 바깥으로 향하는 말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말을 아낀 것 역시 독자의 습정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그가 무어라 말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다 보면 침묵과 성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가치를 점검하고 높여주는 계기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책에 ‘자모인모’(自侮人侮)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업신여기니, 남도 나를 업신여긴다는 뜻이죠. 이는 ‘인필자모연후인모지’(人必自侮然後人侮之, ‘맹자’)와도 같은 맥락인데, 스스로 모욕하여 수양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모멸하고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보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 결국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꾸 남 탓하고 분노하기 이전에, 그 화를 내 안으로 돌려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가치판단을 위한 생각의 중심추 물론 모든 일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기엔 너무 버거울 수 있다. 중요한 건 내 탓을 할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안목. 이 역시 습정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덕목이다. “가령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불이익까지 모두 내 탓으로 여겨 감내하라는 건 무책임한 이야기죠. 반면에, 지하철을 탔는데 알고 보니 반대 방향인 경우가 있어요. 그럼 그때라도 내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점점 목적지와 멀어져 엉뚱한 곳에 내리고 말죠. 그래놓고 나는 열심히 왔는데 왜 나를 이런 곳에 내려놓았느냐고 남 탓할 수는 없잖아요. 두 가지 경우는 다소 결이 다른 상황입니다. 무엇을 내 탓으로 돌려야 할지, 생각의 중심추를 바로잡아 현명하게 판단해야 해요. 아무리 스마트 시대이고, AI가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지만,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통찰력이 발휘돼야 해결됩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인문학의 역할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예순에 이른 정 교수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무엇부터 할지가 문제이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다고.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는 ‘할 것이 없다’고 토로하는 중장년이 혹 있다면 ‘자모인모’를 되새기길 권했다. “무엇부터 할 것이냐, 즉 우선순위를 따질 때 몇 가지 질문을 해봅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하면 더 잘되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 와서 남이 해도 똑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의 가치를 올려주고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야 의미 있죠. 자모인모, 내가 내 가치를 올려주지 않는데 누가 올려줄까요? 자기 고민 없이 남을 통해 내 일을 만들려고 하니, 소위 갑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남의 노력을 뺏고 훔치는 짓인데, 그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스스로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서 힘을 발휘해야만, 비로소 남도 나를 가벼이 대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 2020-04-1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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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삶을 위한 노년의 그루갈이
- 늙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것은 없다. 잘 늙어가기 위한 원칙과 소신이 있을 뿐이다. 멋진 에이징 철학을 인생 선배들에게 들어봤다. ✽어르시니어: 새로운 어른+시니어 나이 듦의 품격, ‘어르시니어’에게 듣는다 정진홍(83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또 새해입니다. 새해를 일컬으며 살아온 햇수가 여든을 훌쩍 넘었는데, 아직 또 새해를 겪습니다. 송구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딱히 누구에게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두루 제 주변에 있는 혈연들로부터 친구들, 이웃들, 바라보는 하늘과 바람을 실어다 주는 나무와 밟고 다니는 대지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있는 것들 모두에게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내내 미안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제가 저한테 이리도 성하지 못한데 왜 세월은 ‘또’를 떼어 내주지 않고 이어지는지요. 사람 목숨이 참 길어졌습니다. 노년을 짚어 말하는 세는 나이도 쉰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순을 넘어 일흔에 이르렀는데 바야흐로 이도 넘어서는 듯합니다. 이제 인생은 그루갈이(二毛作)를 하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저 늙어가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새 삶을 꿈꾸고 짓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0년도 길다 하고 세상살이의 틀과 결이 통째로 바뀝니다. 이제 세월의 흐름을 연속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나무의 나이테처럼 뚜렷한 마디들을 지으며 그때마다 새 삶을 의도하지 않고는 세월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마디마다 겪는 새로움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자는 다짐은 백번 옳지만 몸은 세상살이의 격한 바뀜에 맞추어 되시작하겠다는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마냥 낡아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루갈이보다 더 긴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에서나 서른에서의 시작과 예순이나 일흔에서의 시작이 시작은 시작이되 같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는 일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살이의 바뀜에 맞춰 내 삶을 고쳐 적응하되 적응의 모습을 늙어간다는 사실을 준거로 하여 다듬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창때의 시작은 쌓아 올리는 일을 위한 비롯함이었다면 스스로 늙어간다고 여길 즈음의 되시작은 덜어 내리는 일을 위한 처음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은 흘러도 삶은 쌓입니다. 정도 쌓이고 한도 서립니다. 가진 것 늘었다 싶은데 어느덧 없습니다. 그런 일도 쌓입니다. 애써 앞섰고 올랐는데 어느 틈에 뒤처지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런 일도 쌓입니다. 팔팔했는데 후줄근해진 몸도 흐르지 않고 쌓여 내 삶을 더 커다란 더미가 되게 합니다. 노년의 그루갈이는 이 더미를 추스르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을 걸러 남길 것과 버릴 것 나누어 그렇게 하고, 삶을 감쌌던 세월의 천을 씻고 빨아 때도 얼룩도 지우고, 마음도 그 속을 퍼내고 쓸어내어 가볍고 고요하게 비우고, 그렇게 하고는 이윽고 회상이 낳는 미소를 머금고, 말간 세월의 너울로 몸을 새로 두르고, 날아도 소리쳐도 마음껏 활갯짓해도 거침없는 자유를 누리는, 한살이 내내 꿈꾸었던, 그루갈이에 들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노년의 새 삶이 아닐는지요. 또 새해입니다. 아직 ‘또’를 일컬을 수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유예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어찌 보면 축복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습니다. 여전히 내가 더 멋있고 그윽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환하고 든든한 한 인간이, 한 늙은이가, 될 수 있는 여유를 확인하는 거니까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제가 저에게 덜 미안하기 위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노인은 그래야 할 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거니까요.
- 2020-01-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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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앵커 신은경의 의연하고 기품 있는 마음의 여정
- 1980년대 대표 국민 앵커로 불렸던 여자, 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책을 내놨다. 자신을 알고 나이를 알고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실린 그녀의 에세이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는 환갑이 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삶의 흐름과 인생의 주름에 대한 조언들을 들어봤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넘는 시간 동안 KBS 앵커로 사람들을 찾았던 신은경 전 앵커는 그야말로 국민 앵커로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KBS 보도본부 본부장이었던 박성범 앵커와의 결혼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에 책을 펴냈다. 제목은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문장이 주는 따스한 힘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한 톤, 기품 있는 언어로 모범생 오라를 뿜어내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반듯하고 맑은 눈빛으로 말없이 꿰뚫어보는 그녀가 더욱 반갑고 설레는 이유다. 온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를 꿈꾸던 모든 여자들의 우상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여 앵커’의 대명사였다. 이제는 우아하고 품위가 더해진 중년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이 드는 게 뭐가 나빠요! “나이가 드는 게 왜 불편할까요? 저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 설익은 예쁨보다 무르익은 아름다움이 얼마나 좋은지요…. 예쁜 것에 가치를 두면 나이 들어가는 앞으로의 모든 나날이 두려워지잖아요.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둘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초반보다는 30대가 훨씬 능숙하게 일을 잘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듦은 나쁜 게 아니다. “나쁜 게 아니라 ‘성숙하다, 능숙해졌다, 멋있어졌다’라는 의미로 나이를 받아들였으면 해요. 제가 예순 살이 넘어보니 스스로에 대해 믿음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글, 말하기, 소통, 강연 등을 할 때 잘해야겠다고 노력하면 아무리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와요.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삶은 한 번, 사람은 각양각색 그녀는 ‘나이 들수록 운동을 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라’ 등등의 조언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건강해지려다 너무 걸어 족저근막염에 걸릴 수도 있고, 재산을 아이들에게 다 물려줬다가 자식에게 병원비 좀 내달라 하면서 눈치 보는 일도 생길 수 있거든요.” 그녀 말대로 사람마다 처지와 상황에 따라 나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태도라고 강조한다. 그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57세에 루게릭병을 앓게 된 작가 닐 셀린거의 말을 가져온다. 내 근육이 약해질수록, 나의 글은 강해졌다. 나는 점차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의 목소리를 얻었다. 몸은 점점 쪼그라들지만, 나는 성장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을 찾게 됐다. 그렇다면 신은경이라는 사람은 언제부터 나이를 편안히 받아들인 걸까? “저는 마흔 넘어서 그게 가능했어요. 마흔 살 초반에 아이를 낳으면서부터죠. 결혼할까 말까, 아이를 낳을까 말까 하던 고민들이 사라지고 큰 욕심이 사그라들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녀가 평화를 찾은 것은 어쩌면 큰 갈등의 시기를 겪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그 이후의 삶도 그녀에게 오롯이 평온과 행복만을 전해주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KBS 앵커 시절 이후 그녀가 정치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쉰 살쯤 됐을 때 제 인생이 바닥을 쳤습니다. 남편의 정치활동이 끝나고, 제가 섣불리 선거에 나갔다가 실패했을 때죠. 세상이 나를 거부했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돌아보면서 이제 뭐하면서 살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인생 후반전을 위한 하프타임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의 절망감은 겪어본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 위기에 빠져 있었던 그녀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하프타임 세미나였다. “5주짜리 프로그램이었어요.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후반 삶에 들어가기 전에 하프타임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의 세미나였죠. 하프타임에는 물도 마시고 전략도 짜잖아요?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세미나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고 해답을 모색했다. 재정, 인간관계, 잘하는 일, 건강 등 현재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내용들을 갖고 후반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인생의 전반전을 돈을 위해 살았다면 후반전은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고들 하죠. 그만큼 인생 후반은 중요한 시기예요. 제 경우는 지난 삶이 후반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말하기’가 내 사명임을 깨달았죠. 딴짓하지 말고 말하기를 더 연구하고, 방송도 하고 책도 쓰자 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 후반전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변화하도록 돕고 싶었다. 한 명이든 천 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옳은 길이라는 결론이었다.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해요 그녀는 요즘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사명’대로 살고 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실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생물 과목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물리, 화학, 수학이 안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이과는 못 가고 문과를 선택했죠. 나중에 보니 제가 이과 성향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낫게 해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결혼 후 침과 뜸을 배웠는데 남편과 같이 봉사도 다니곤 해요.” 어쩌면 그녀가 동기부여와 자존감을 키워주는 강연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지금은 마음의 치유를 해주고 있으니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그녀에게 울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힘든 것이 화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 고부갈등이 있으면 귀가 어두워졌을 때 굵직한 아들 목소리는 잘 들리는데 며느리가 내는 높은 고음은 잘 안 들린대요. 그러한 서로의 변화를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또 몸이 힘들면 찡그리면서 말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또 화가 쌓이죠. 되도록 웃으면서 말하는 게 좋아요.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은 호르몬이 나오거든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합니다’라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대로 살게 된다 말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니만큼 그녀는 말의 가치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언어는 중요해요. 사람은자기가 한 말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더워 죽겠네’ 같은 부정적인 말, 자기비하의 말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감사, 칭찬, 격려 등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만 하세요.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씨앗의 말을 해보세요. ‘상대에게 무슨 칭찬을 해줄까’ 생각하다 보면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돼요. 감사할 수 없는 일에도 감사하고, 미리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가보세요.” 실제로 그녀는 100가지에 대한 감사를 한다고 한다. 잘 살펴보면 감사를 표시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녀는 감사하는 마음이 지치지 않는 삶의 비결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가 말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이유도 인생 사명과 같은 맥락에 있다. 기품 있게, 의연하게 살기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자리에 온 신은경에게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가 서 있었던 빛나는 자리와 그 이후의 삶에서 비롯된 아쉬움과 갈등은 없을까? “1992년까지 뉴스 앵커를 하다가 영국 유학을 갔고, 남편이 정치인 생활을 할 때 뒷바라지까지는 뉴스에서 얘기가 됐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잘 안 보이니까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 거예요. 말씀드린 것처럼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일했어요. 왕년의 나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 숨어 살면 돼요. 나이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레타 가르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변신을 해야죠.” 그녀는 나이 들고 변신을 하면서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 바로 기품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은 ‘기품 있게, 의연하게’예요. 어떤 상황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해요.” 마흔 초반에 낳은 딸은 어느새 대학생이다. 현재 동아시아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새삼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시시콜콜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잘 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죠. 어렸을 땐 책을 많이 봐야 할 것 같아서 독서를 권한 정도? 물론 요즘도 긴밀하게 대화하면서 조언은 하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독립적이에요.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달리 말하면 부모가 해주는 게 없으니 혼자서 알아서 하는 거죠.(웃음)” 사람들이 일찍 행복해지면 좋겠다 어느새 결혼생활도 딸 나이만큼 해온 셈이다. 사실 이번 책은 남편이 권해서 나온 책이라고 한다. 그녀가 꾸준히 쓰는 글을 보고 묶어서 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준 것이다. 특히 남편은 그녀가 너무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줘 책을 완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즐겁게 사연을 말하던 그녀에게 오랜 시간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봐요. ‘남자는 존경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존경할 수 있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저는 일정 부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둘이 동등하게 사랑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좋지만 너무 선이 없다 보면 남편을 하대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그래도 행복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남편에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잘 안 되긴 하죠.(웃음)” 요즘 세태에 비춰 보면 다소 고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가치가 삶을 평화롭게 만들기도 한다. 나이가 자신을 포용으로 포옹하게 했다는 그녀의 말은 그런 믿음을 깨닫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책은 시니어 대상으로 썼는데 20대, 30대에게도 격려가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도 자신의 나이를 일찌감치 향유할 수 있게 되면, 앞으로 40년, 50년, 60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알고 부단히 가꿔 기품이 생기면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일찍 그걸 깨달아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신은경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시작했다. 3개월 연수 후 첫 방송 날 곧바로 KBS 9시 뉴스 앵커로 발탁됐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했으며 88서울올림픽 메인 앵커를 맡았다. 영국 웨일스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대학교수, 방송진행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 중이며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현재 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 기독교 스마트 APP 방송, 라디오JOY에서 ‘성경 읽는 신은경 권사’로 방송 프로그램도 맡고 있다.
- 2019-03-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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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류’ 기인 예술가의 미치광이 같은 예술혼
-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 2019-03-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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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혜은이, 다시 열정에 불을 붙이다
- “지금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웃음), 다시 생을 산다면 발레를 하고 싶어요.” 유년기에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소녀. 그러나 너무 훈련이 고되고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도중에 그만둔 그 소녀는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가수 혜은이의 얘기다.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등 수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던 노래들의 주인공인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을 불사르는 듯한 무대를 선보이면서 여전히 가수로서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봤다.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1990년대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 의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은 있었다. 혜은이를 197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되어 1979년 10·26 사건으로 끝나는 1970년대의 엄혹함은, 오히려 그렇게 엄혹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더더욱 낭만을 꿈꾸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갈망을 채워준 가수가 혜은이였다. 동양적이고 발랄한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서구적인 길쭉한 체형. 길옥윤 사단이 만들어낸,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과 그 노래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가창력. 혜은이라는 이름은 비주얼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당시 대중가요의 가장 세련된 경향으로서 역사에 새겨졌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KBS 음악 프로그램 ‘가요무대’ 출연을 준비하는 사이에 대기실에서 만난 혜은이는 조금 살이 빠진 느낌이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공연들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일까. 수도권과 대도시 위주로 했던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달리, 이번에는 소도시까지 훑는 공연이 될 예정이다. 그녀로서는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문득 지난 호 남진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방공연을 갈 때마다 굉장히 신나 한다고 말해준 것이 생각나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줬다. “어휴, 선배님은 공연 안 하면 못 사는 분이야. 내가 무명일 때 그분 리사이틀에 찬조 출연한 적이 있어요. 열아홉, 스무 살 시절이었는데 공연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지.(웃음)” 그러나 공연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론 혜은이도 못지않다. 데뷔 이후 어느덧 수십 년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혜은이의 노래는 더 진화하면 했지 퇴화하지 않았다.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순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워풀한 그녀의 목소리와 뛰어다니며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젊은 시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관록과 에너지가 공연을 휘어잡고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래가 천직이었다 45년. 공식적으로 혜은이가 데뷔해서 지금까지 가수로서 보낸 시간이다. “사실은 더 오래됐어요. 정식으로는 45년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 따라서 노래를 불렀으니. 무명 시절이 4년 정도 있었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에도 이제는 가요계의 대선배가 된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후배들이 끊임없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후배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최고죠. 노래를 한결같이 똑같이 부르세요.” 한 후배 가수의 말에서는 음악인 혜은이를 향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 상태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 아니었다. “노래를 하면서 이게 나의 즐거움, 천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어려서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생계형 가수로 살았죠. 어찌어찌하다 유명해져서 활동을 할 때도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죠.. 첫 결혼이 잘못돼 정신없이 살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난리가 나서….” 쉽지 않은 얘기,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얘기였다. 무대 위에서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가 견뎌온 세월의 무게만큼 묵직했다. 뒤돌아보면 자식들이 보물 그동안 너무 힘들고 바쁘고 딴 곳을 쳐다볼 새도 없이 일하다 보니 ‘노래란, 가수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변화가 찾아왔다. 데뷔 30주년이 됐을 때였다. “노래가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10년 남짓? 15년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맨날 10년이라고 하네.(웃음) 그제야 ‘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네?’ 깨달았죠. 가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녀는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많은 행복을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흐뭇해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거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죠. 제 목적은 딸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다려주는 팬들이 있었고요. 그것들이 제 목적이었죠. 그래서 버텼고 앞으로도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자식 둘이 전 재산”이라고 말하는 혜은이는 그 말처럼 딸과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딸과는 ‘30년 기도해서’ 요즘 같이 살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정말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래서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라고 말해요. 결혼을 하겠다면 하고 아니면 말고. 아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 조리사 자격증 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딸은 스킨스쿠버 강사로 일하는데 투잡해야겠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요. ‘엄마, 한 가지 일로는 돈 못 모으겠어’ 하더라고요.(웃음)” 내 목소리 지키는 게 중요 후배들의 찬탄처럼, 혜은이가 가수로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가수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가수의 의미를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가수를 철저히 직업으로서 여겼기에 그토록 자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수가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한 신뢰와도 이어졌다. “옛날 가수들과 요즘 가수들을 실력으로 비교하면 요즘 가수들이 훨씬 잘하죠. 우리 때는 레슨 이런 게 있기나 했나요?(웃음) 타고난 게 있으면 가수가 됐고 작곡가들과 녹음할 때 연습하는 정도였죠. 지금은 기계적인 사운드가 발달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잘하는 후배가 많아요. 그래도 역시 반짝하는 후배들은 가창력이 없는 후배들이고 10년 넘게 오래하는 가수들은 노래를 잘하는 후배들이에요.” 그렇다면 공식 활동기간이 45년인 그녀의 현재 마음가짐은 어떨까?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어서 변하게 돼요. 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요즘 노래를 더 잘 부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옛날의 내 목소리를 지키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에프엠대로 하는 거예요.” 사실 자기 목소리를 좋아하는 가수는 드물다. 혜은이 또한 임재범의 굵고 허스키한 소리가 좋다고 한다. 그녀의 맑고 소녀 같은 목소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것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신곡을 녹음할 때 다르게 부른다고 부르면 노래가 안 되더라고요. ‘선생님, 다시 한 번 불러보실까요. 조금 더 잘하면 좋을 거 같은데’라는 말 듣게 되고. 그러다 결국 찾아내는 건 내 원래 목소리예요. 지금은 옛날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불러요. 음량도 더 넓고 풍성하고. 그러나 예전의 그 순수했던 목소리는 못 내죠, 그래서 저에게는 그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혜은이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에 대해 묻자 ‘물론 데뷔곡’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사실 애착 안 가는 노래가 있을까. 콘서트를 하면 시작, 중간, 끝 부분을 대표해야 하는 노래들이 있기 마련이죠. 내 경우에는 그 위치에 분명한 노래들이 있어서 공연 프로그램을 짤 때 편리하긴 하죠.(웃음) 요즘은 모든 공연의 피날레를 ‘열정’으로 맺고 있어요. 나온 지 한 30년 됐나? 그런데 마치 엊그제에 나온 것처럼 불러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시절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이라는 가사가 담긴 ‘열정’은 그 가사처럼 활화산 같은 박력과 리듬감으로 관객을 방방 뛰게 만드는 노래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혜은이와 비슷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말에 그녀는 다소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사는 데 시달리고 힘들다 보니까…. 45년 가수 생활을 했지만 중간 20년 정도는 개인 사정으로 빛을 못 발휘했죠. 내 골든타임을 놓친 거예요. 사실 많이 억울하죠.” 그러나 이대로 그냥 마무리할 혜은이가 아니다 싶었다. ‘다시 새로운 도약을 해보자. 난 할 수 있다’라고 되새겼다. 혼자서는 못하지만 팬들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자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결심이 이번 공연의 핵심이다. “혜은이를 사랑한 수많은 팬에게 노래로 갚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공연 투어는 중소도시를 꼭 포함시켜야 했어요.”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남편과의 의리 혜은이에게 깊은 사연이 된 남편 김동현 얘기를 여기서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이 얘기됐지 않았나. 그저 조심스럽게 물어볼 뿐이었다. 그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부부로서 잘 지낼 수 있었던 지혜가 있었는지. 어찌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냥, 측은지심. 상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 되는 거 같아요.” 그녀는 인간의 삶이란 항상 ‘맞다, 아니다’의 두 가지라고 말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사람과 안 살려면 끝을 봐야 하지만, 함께 살려면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나름대로 힘들었겠구나.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인 상대는 얼마나 힘들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만 봐도 그렇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주사를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끼지만 육체로는 느낄 수가 없다. 상대의 아픔을 알 수가 없으니, 그것에 대해 함부로 재단을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제 종교가 기독교예요. 그래서 항상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실수했을 때, 무조건 질책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그동안 인생 공부 무지 많이 했죠. 말로 다 할 수 없어요.(웃음)”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여자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공식적인 혜은이의 출생 연도를 보면 1956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1954년생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났는데 목포로 나가서 호적 신고를 하느라 신고를 늦게 했대요. 호적에 나이가 그리 되어 있으니 다행이다 싶은데 마음이 그리 안 돼.(웃음) 그래도 ‘호적 나이대로 할래’라곤 못하겠어요. 2년이 어디야?(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니 옆에 있던 매니저가 한마디 거들었다. “팬들이 물어보면 호적이 아닌 실제 나이로 말씀하시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 다들 ‘나는 나이를 줄이고 싶어 죽겠는데 왜 나이를 올리시지?’ 하더라고요.” “언젠가는 호적 나이대로 할 거야. 아마 칠십이 가까워지면 그럴 수 있을 거야.(웃음)” 인터뷰 말미로 가면서 그녀의 웃음이 더 많아졌다. 준비했던 무대가 끝나서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 웃음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 그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는 공연만 생각하고 싶어요. 뮤지컬도 해봤는데, 뮤지컬은 아쉬운 게 개인 콘서트를 했을 때의 기쁨과 속 시원함이 없어요. 다 같이 하는 거니까요. 지금 나한테 절실한 건 노래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해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게 정말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아닐까요.”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운 사람 얼마 전 방송에서 혜은이는 45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렇죠. 그런데 실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또 그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까봐.(웃음)” 그녀는 오랫동안 미로와도 같은 길을 걸었고, 거듭 출발선에 서야 했다. 묵직한 울림과 고통을 알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더욱 응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변하지 않는 가수로서의 자신으로 그들에게 보답한다.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가수로서도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했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웠죠. 피하지 않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러길 참 잘했다 싶어요.” 혜은이의 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무대가 있는 한, 그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2018-10-1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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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남자 “김목경은 김목경이다”
- “살면서 나를 케어해준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아마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업에 대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확신을 가진 자유인이 아닐까 싶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김목경(60)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롯이 홀로 서서 자신의 일가를 이뤄냈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남자, 김목경의 이야기는 고독하지만 당당한 인생찬가였다. 그를 통해 신중년 시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해봤다. 촬영 협조 청파동 블루스소사이어티 우리나라에서 블루스는 ‘부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빠른 리듬의 노래들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느린 템포로 나오는 사교댄스에 가까운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통파 블루스란 현대 록 음악의 기원이며 다양한 장르에 강렬한 영감을 준, 사실상 팝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르다. 한국에서 정통파 블루스 뮤지션을 말할 때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김목경이다. 올해 나이 예순.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대에서 말 그대로 ‘살고 있는’ 현역 음악인이다. “한국의 에릭 클랩튼이란 말은 듣기 싫네요. 그냥 김목경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젊었을 때는 에릭 클랩튼을 많이 연구했으니까 기타 플레이가 비슷했을 텐데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이니 지금은 에릭 클랩튼과 비슷하지도 않아요.” 블루스의 성지에 서다 김목경은 천생 음악인이다. 그는 음악을 하며 산 인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들이니까. 돈이 되든 안 되든 매순간을 즐기며 사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또래 친구들 중에 돈 많이 번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는데 다들 저를 제일 부러워해요.” 그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도 음악이었다. 그는 200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블루스의 성지인 미국 멤피스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그때 조 카커, 쉐릴 크로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만 초청된 자리였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대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 확고하게 굳혔다. “제 인생 최고 보람이었죠. 그 무대에 서고 난 뒤 일본, 인도네시아 등에서 초청이 계속 이어져서 공연을 다녔어요.” 블루스는 감정이자 반추상화 사실 우리나라에서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루스의 최고 대가가 생각하는 블루스론이 궁금했다. “블루스는 감정으로 해야지 테크닉이나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재즈는 테크닉과 음‘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즈는 그림으로 말하면 추상화예요. 반면 블루스는 반추상화. 약간 정형화되어 있으면서 추상의 느낌이 있는거죠.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 있어 재즈는 무한대에 가까워요. 음을 벗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재즈죠. 그러나 블루스는 그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요.” 기타가 텐션이 살아 있어 쫄깃쫄깃한 음을 낸다고나 할까. 블루스는 마치 희롱하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아마 그가 말하는 ‘넘을 듯 말 듯 한다’는 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블루스는 Blues, 블루(Blue)에다 에스(S)를 붙인 거예요. 블루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외로움, 차가움, 쓸쓸함이죠. 블루스가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처음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기에 그런 인상이 있어요. 블루스는 17~18세기 미국 식민지로 건너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음악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어떤 음악적 지식도 없었죠. 그런데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읊조리듯 노래를 했어요. 그게 블루노트고 블루스의 음계죠. 백인들이 어느 날 그걸 들어봤는데 자기들이 쓰지 않는 음계였어요. 신기했겠죠. 그래서 그 음계를 훔쳐와,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음악과 접목을 한 거죠. 록큰롤은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청계천 ‘빽판’이 알려준 진실 그렇다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삶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 사는 김목경은 어떻게 블루스라는 영역에 매혹된 걸까? “어렸을 때는 통기타를 쳤어요. 그때는 롤링스톤스와 레드 제플린 흉내 좀 내보고 싶어도 어려워서 못하던 시절이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청계천에서 ‘빽판’을 사러 다니는 게 낙이었어요. 학교 가면 애들이 빽판을 가져와서 ‘너 이거 있냐?’는 식으로 겨루곤 했죠.(웃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반 레코드를 불법 복제해 만든 ‘청계천 빽판’ 수집은 음악 검열을 하던 시대에 제대로 된 음악을 듣고 싶었던 이들의 은밀한 취미이기도 했다. 불후의 팝 명곡으로 여겨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검열로 들을 수 없었던 시절, 청계천 빽판이라는 불법 유통망은 금지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명이 기타를 치고 있는 두 장짜리 앨범이 있더라고요. 그림이 멋있어서 샀지. 집에 와서 틀었는데, 그 앨범에 기타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었어요.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스톤스나 다 그 음악을 베낀 거더라고요. 그게 바로 블루스 음악이었어요.” 3개월 가기로 한 영국, 6년을 살다 1984년, 김목경의 대학 시절 원래 전공은 일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해야 할 때였는데, 겨울에 제대하는 바람에 가을에 복학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생겼다. 딱 3개월만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께 얘기해서 3개월 지낼 비용만 받고 영국을 갔어요. 그런데 갔더니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한참을 더 머물러 있다가 1990년도에 귀국하게 됐죠. 그런 이유로 난 데뷔가 되게 늦은 편이에요.” 3개월만 있다가 오겠다는 외동아들이 장장 6년 동안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부모님 속은 오죽했을까.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게 미안하지. 죄지. 너무너무 죄송해서 이제야 이번 앨범 신보에 음악을 만들어서 넣었어요. ‘엄마 생각’이라는 연주곡이에요.” 단 3개월 머물 비용만 갖고 가서 6년이나 있었으니 영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4~5가지 일을 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아침에 여행객이 오면 버스 태워서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호텔에서 아침 먹은 후 일본 식당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죠. 점심은 그 식당에서 먹고, 네 시부터는 페인트칠을 했어요. 이게 벌이가 가장 짭짤했죠. 그리고 저녁 여덟 시부터는 클럽에서 연주를 했고요. 그러면서 돈을 좀 벌 수 있었죠. 쓸 시간이 없었으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원래 건전가요 영국에서도 당연히 블루스 밴드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88년, 1989년 즈음에 앨범을 녹음했고, 마스터 테이프를 갖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테이프는 서라벌레코드 사에서 발매된 그의 1집 앨범이 됐다. 나이를 생각하면 다소 늦은 데뷔였다. “그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앨범이 될 듯 말 듯 하는 게 있었어요. 에이, 그러면 한 장만 더 내고 가자 하고 한 장을 더 냈는데, 그다음에는 계속 한국에 있게 된 거죠.” 그렇게 낸 데뷔 앨범에 저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 김광석이 불러서 유명해진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처음 노래 부른 이가 바로 김목경이다. “1집 맨 밑에 있던 곡이었죠. 넣을까 말까 하다가 넣은 건데, 그때만 해도 건전가요를 하나씩 넣어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래는 건전가요로 쓸려고 넣은 거였죠. 그런데 그거 말고 건전가요를 따로 또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저작권 덕분에 많이 도움이 돼요.(웃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씩 연습 “기타는 나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기타로 하는 거야.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연주할 때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연주하는 거죠.” 김목경은 지금도 매일 배우며 산다고 말한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은 컴퓨터 틀어놓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 시간 동안 하는 연습이다. 매일 지키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 “연습을 안 하면 금방 티가 나요. 무대에서 바로 드러나죠. 내가 원하는 플레이가 나와야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는 말 그대로 무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일주일에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한다 가정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공연할 수 있을지를 계산해봤다. “내 남은 생애에 오백 번을 못 넘긴다고 나오더라고요. 숫자 오백 번이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지더라고요. 에릭 클랩튼이나 비비 킹이 돈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그렇게 계속 공연을 간절히 원했는지 이해가 됐어요. 그 순간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어디든지 가요. 어디든지. 그렇게 해서 좋은 점은, 공연 횟수도 채울 수 있고(웃음) 내가 항상 준비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항상 무대 사운드에, 무드에 젖어 살 수 있는 거죠.” 그 대답만 들어도 그가 왜 행복한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철저한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목경은 최근 신보 녹음을 끝마쳤다. 그의 정규 앨범으로는 일곱 번째 앨범이다. “총 아홉 곡 중 일곱 곡은 내가 만든 거고 두 곡은 남의 곡이에요. 한대수 씨 거 하나와 옛날 록 그룹 무당의 노래 리메이크 하나. 타이틀곡은 고민 중인데 ‘산을 돌아’로 할까 ‘더 블루스 밴드’로 할까 고르고 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곡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그 전에 그러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기타리스트 김목경, 무대에서 늙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거 없는데? 건강관리? 담배 피고 술 먹고.” 소위 말하는 웰빙 라이프와는 거리가 한참 먼, 뭔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음악인다운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목경은 최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한 깊이는 젊었을 때와 큰 차이 없는데, 밴드하고 연습할 때 뭐가 잘못되면 예전에는 날카롭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잘못됐을 때 내가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둥글둥글 넘어가주죠. 이게 나이 먹으면서 좋은 점이기도 해요.” 브라보 공식 질문인,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우직하게 “기타리스트 김목경”이라고 대답했다. 초지일관 그다운 대답이었다. “앞에 ‘좋은’이 붙으면 더 좋고.(웃음)” 그는 이미 삶의 상당 부분을 확신하고 확정지었으며 이제 그곳에서 즐거움을 퍼 올릴 일만 남은 사람이다. 자신만의 답도 찾아냈고 그걸 실현시킬 능력도 갖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지금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지 못할 때까지 하고 싶은 거죠.” 올해 60의 나이가 된 그가 부르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노래 맛은 어떨지 오늘 밤에 소위 그의 ‘나와바리’인 논현동으로 노닐러 가볼까나. 헤이, 브라보 블루지 라이프!!
- 2018-10-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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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까머리 시절 필담을 나누던 벗에게…
- 50년 전쯤 편지를 주고받았던 짧은 인연에 기대어 그대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내셨나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서 그대나 저나 서로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밤잠을 설치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이어가던 까까머리 시절의 기억은 아직 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답니다. 그때의 청소년들은 참 답답한 오리무중의 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10대 중·후반을 지칭하던 ‘하이틴’이란 말은 붕붕 하늘을 향해 치솟던 꿈 많은 시절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금기와 규제를 짊어진 수행자의 시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힘겨웠지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중고생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해 걸어가는 것만으로 비행 청소년 취급을 받던 때이니까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만 정말 그랬답니다. 그러니 소년 소녀가 정답게 손을 잡고 걸어간다든지 분식집에 마주 앉아 김밥이라도 나누어 먹고 있다면 교외단속반 선생님에 의해 단속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지요. 그렇다고 출구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리 보면 낭만과 품위를 갖춘 방식으로, 우리 세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펜팔이라는 서신을 통한 교제가 있었으니까요. 아, 맞아! 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맞장구를 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잠시 인연이 닿았던 것이겠지요. 1970년대 초입의 어느 시점, 그 즈음에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매체가 많았습니다. 잡지와 신문들, 저는 그 시절을 풍미하던 학생 잡지 뒷면에 실린 펜팔난에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의 여학생이 올려놓은 주소를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쓸 마음을 먹었습니다. 취미는 사색, 음악감상, 낙서 등, 들뜬 마음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미지의 소녀에게 첫 편지를 씁니다. 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해야 했지요. 사는 곳과 학교, 취미와 장기, 장래 희망 같은 것 등등. 그렇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지 절반쯤 써내려가다가 구겨버리고, 또 한 바닥 가까이 쓴 자기소개가 마뜩찮아 또 구겨버립니다. 이 주소로 편지를 쓸 또래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정도 편지로는 답장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게 뻔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하이틴들은 사방 높게 둘러쳐진 담장 안의 어린 토끼들이어서 이렇게라도 뜀뛰기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로 소통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 번으로 편지가 끝난 적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한참을 이어가며 소소한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니 과장과 허풍과 엄살도 심했을 테고 진도가 잘 나가면 가장 멋지게 나온 사진 한 장씩 교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를 나무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편지를 쓰는 저를 탓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늙어 자식들 알면 민망스럽다고 손을 내저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긴 해요. 환갑을 넘긴 제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기는 해요. 그러나 온갖 망상으로 힘들긴 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게 추억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요즘은 손전화 문자 발송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지만 편지는 여간해서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구습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건 초등학생만 되어도 갖게 되는 편리한 손전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통해야 하는 오늘의 변화된 생활 방식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아이들의 경우 예전에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이 정해진 동선이고 기껏해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잠시 뛰노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방과 후 몇 군데 과외 학원을 거치며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니 어른들 못지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교감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흔치 않았어요. 그럴 만한 사회적 환경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콩나물시루 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학교 교실은 만원이었고 이렇다 할 문화생활도 누리지 못하던 때여서 여유로운 문화적 혜택이나 친교가 이루어질 기회가 적었던 시절이었어요. 텔레비전도 동네에서 잘사는 친구 집 마루에 엉거주춤 앉아 눈동냥하듯 봐야 했는데 그때마다 안방에서 비스듬히 누워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또래와 너무나 먼 격차를 느끼기도 했지요. 그에 비하면 미지의 친구와 주고받던 필담은 참으로 낭만적인 교감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중학생 무렵부터 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어요. 이른바 펜팔이라는 것이었지요. 그 디딤돌을 마련해준 건 여러 형태로 발간되던 청소년 잡지와 신문의 펜팔난이었어요. 자신의 취미와 나이, 주소 같은 걸 밝히면 편지로 맺어지는 친구가 생기던 시절 이야기예요. 그 시절의 학생 잡지는 말미에 독자문예란을 마련해 시와 산문들을 실어주었는데 제 글도 가끔 거기에 올라갔고 그 바람에 전국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어요. 제 문장 수련은 그 시절 편지쓰기로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의 열대여섯 살은 그렇게 편지를 쓰며 성장했어요. 편지란 긴한 용무가 있어 작정하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불현듯 낙서처럼 끼적인 것에 진심을 살짝 얹어 쓰는 경우도 있는 것이겠지요. 어른들은 그걸 편지질이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아마 쓸데없는 해작질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해외 펜팔은 글로벌한 친구 사귀기와 영어 학습의 한 수단으로 장려되었지만 또래끼리의 이성 펜팔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하지만 편지로만 소통하는 그 방식이 또래끼리의 고민과 현실 저 너머의 꿈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던 것도 같아요. 편지로 우정을 나누던 그리운 벗들, 이제 우리 나이가 예순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낭만과 사랑을 담아 누군가에게 고운 꽃편지 한 통 띄워보내면 어떨까요. 최영철(崔泳喆) 시인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돌돌’,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등이 있고 육필시선집 ‘엉겅퀴’,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변방의 즐거움’이 있다. 백석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 2018-09-2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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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기본소득 개념이 부활한다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1840년에 발표한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렇게 썼다.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물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면서 하루를 마치며 비평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경제 이론이 있다. 때로는 그 이론이 바뀌고 사라진다. 또한, 그 적용이 세계적으로 일반화하며 관심 밖에 있기도 하다. 환경의 변화가 큰 요인이다. 최근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경제학 메시지의 하나인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개념이 관심을 끌고 있다. ‘TECH TREND 2018’(조선비즈)에 따르면 자본주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기본소득 적용을 위한 실험이 한창이라고 한다. 스웨덴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도 같은 정책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며, 멀지 않은 시기에 기본소득 개념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올지 모른다. 기본소득이란 정부가 국민에게 매달 조건을 달지 않고 인간으로서 기본적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을 지급하는 제도다. 수입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금액을 주고 그 돈의 사용도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생산을 비롯한 생활의 전반에서 사람의 힘과 역할이 그 주요 바탕이었다. 농경사회에는 가축의 힘을 활용했으나 그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한 톨의 벼를 수확하는 데도 그랬고 한 켤레의 운동화를 만드는 데도 그랬다. 산업화 시대에 들면서 그 일손 일부를 기계가 도왔다. 근래엔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의 로봇이나 3D프린터, 사물인터넷 등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다. 일자리나 일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 경우 소득 창출의 바탕인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생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이루는 부(富)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최소한의 소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60세에 배우기 시작하였다. 조기 퇴직 후 금융위기 등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정 소득이 없던 시기였다. 다행히 예순이 되던 해에 국민연금을 받게 되어 취미생활로 사진을 배울 수 있었다. 수령액은 80만 원 내외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본 생활은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기본소득이 된 셈이다. 만약 연금을 받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사진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특히 감성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진의 특성상 그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지 싶다. 최소한의 생계수단인 기본 소득과 같은 연금을 매달 받은 덕분에 사진을 취미로 둘 수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이 된다는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으나 전문가들이 예측한 대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 싶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인공지능 로봇에 의해 발생한 경제적 가치를 나눠주는 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겠다. 어느 순간 급속하게 다가올지 모르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해 자세히 검토해보아야 할 시점 아닐까? 유비무환이라 했다. 미리 준비하면 우환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2018-08-30 0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