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방랑 셰프 임지호님의 자연주의 요리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고 듣고 하던 터였다.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해도 잠깐 숨통 트여보자 싶었다. 지뢰를 피하듯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동대문 메가박스까지 다녀온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밥정이든 요리 이야기든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 음식들을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꺼내본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밥정이라는 말도 정겨웠고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은 집에서 밥 한 끼 준비하기가 귀찮을 지경이 됐지만' 한때는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으니까.
밥정은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셰프의 이야기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요리 철학을 담기 위해 박혜령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들어낸 82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수작이기도 하다.
방랑 셰프 임지호 선생의 자연주의 요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떠돌다가 지리산 마을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 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밥정으로 표현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임지호님은 말한다. 들판에 풀 한 포기나 바닷가에 떠다니는 해초만 보아도 맛있는 밥상 차릴 생각에 손길 닿는 대로 채취해서 담는다. 자연의 재료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만들어 낸다. 흙냄새 바다 냄새나는 음식에 담긴 정이 감동의 맛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 속에 변화하는 사계절의 풍광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시골길을 따라 걷거나 깊은 산골 마을이나 바닷가를 따라 방랑하는 셰프.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치는 들판에서 식재료를 얻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물, 이끼, 잡초, 바다풀로 마을 어른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다. 솔방울과 나뭇가지가 멋진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임지호 셰프는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날 안동댐 주변을 지나가는데 이 길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생모가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이 길을 갈 때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 그분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2009년 지리산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떠났다가 산골 마을의 텃밭에서 나물을 뜯던 김순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밥을 지어드리거나 과자와 사탕을 전해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7~8년 지내오다가 어느 날 김순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 마음을 표현하는 108가지의 자연친화적인 음식을 3일 동안 장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할 수밖에 없다.
밥과 사랑과 그리움은 닮았다. 거기엔 누군가와 이어지는 따스함과 은근한 속정이 함께 한다. 결국엔 그것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데 혹시 이것을 밥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잔뜩 겉멋 부린 요란한 영화들 속에서 냇물에서 세수만 한 듯한 순하고 담백한 영화,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허기짐을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듯 평화롭다.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 지치지 말고 서로 마음 모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봄볕 좋은 날 속정 깊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마음 놓고 밥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로제트(rosette)의 사전적인 뜻은 장미꽃 모양. 마치 장미꽃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추운 겨울에도 잎은 광합성으로 당분 함량을 높여 동상을 막는 부동액 역할을 한다. 민들레, 질경이 달맞이꽃 등이 대표적인 로제트 식물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 은근과 끈기로 월동을 마친 이 로제트식물들이 지금, 3월 초 산과 들 그리고 길가에서 피어나고 있다.
보도블록의 틈새나 아파트 외벽의 작은 틈새의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발로 밟고 잡초라고 마구 뜯어내는 악조건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새싹을 내고 새순을 내며 꽃을 피우고 있다.
"로제트식물은 동장군도 이긴다"고 한다. 질경이는 찻길에서 자라면서 사람이 밟고 차가 다녀도 산다고 하여 질경이의 다른 이름으로 차전초(車前草)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로제트 식물인 질경이, 민들레, 달맞이꽃, 꽃마리, 지칭개, 황새냉이, 제비꽃, 씀바귀, 고들빼기, 망초, 방가지똥 등의 은근과 끈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제주도 옛날 농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주전통농가전시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현장이다. 제주감귤박물관 본관 2층에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 전통농가의 옛 모습과 삶의 지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요즘 제주도 젊은이들도 잘 모르는 특이한 명칭들이 많다.
제주전통농가의 옛 모습
제주민속자료 제3호인 제주전통 초가 세 채와 정낭, 통시(전통화장실), 우영밭(텃밭) 등 제주농가 전체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옛 농가 전체를 실내에 조성했다. 제주 농업과 제주전통농가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용어 자체가 제주도의 전통과 특성에 맞게 붙여진 것이 많다.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집을 "안거리"라고 한다. 안채의 방언이다. 안거리 옆에 별도로 지은 작은 집을 “밖거리”라고 한다. 바깥채의 방언이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모두 진흙을 발라 지은 초가집으로 안거리는 살림을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집으로 사용하였다. 밖거리는 주로 부엌으로 이용하여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안거리에서 먹었으며 남은 공간은 마늘과 고추 등 농산물을 걸어놓고 말리고 그 외에 농산물과 농기계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쇠막'은 외양간의 방언으로 소와 말을 기르는 곳이다. 옛날에는 말이나 소가 농사를 지을 때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집 가까이 두고 정성껏 보살폈다. 말은 수레를 끌거나 직접 타는 교통수단이었고 소는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역할을 했다. '통시'는 대소변을 보는 곳과 돼지를 가두어 기르는 곳을 하나로 합쳐서 돌담을 쌓아 만든 주거공간이다.
옛날 제주의 민가들이 사는 입구의 올레에는 '정주석'을 세우고 '정낭'을 걸쳐서 대문 역할을 했다. 정낭은 인적 정보를 이웃에게 알리는 제주가 갖고 있는 특유의 생활 풍습이었다. 정주석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쳐서 소나 말의 출입을 막고 집주인의 외출을 이웃에게 알렸다.
'장항'은 장을 담는 항아리이고 '장독대'에는 늘 여러 개의 장항이 놓여 있었다. 제주에서는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낟가리로 씌워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하고 눌을 쌓기 위한 공간을 “눌굽” 또는 “눌왓”이라고 했다. '우엉'은 텃밭을 말하고 '물허벅'은 물을 길러 나르는 물항아리다. '물구덕'은 물을 길어 다닐 때 등에 지고 다녔던 정방형 모양의 대바구니다. '물팡'은 물허벅을 지고 다니다 내려놓는 곳을 말한다.
제주전통농가의 삶의 지혜
농사를 지을 때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한 모습을 전통 농기구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애기구덕'은 아기를 좌우로 흔들면서 재우는 데 사용하였던 구덕이다. 말과 되는 곡식을 측정하던 기구이며 '도고리'는 가축의 먹이를 주는 그릇으로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대패랭이'는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이다. 갓과 비슷한 형태로 '이대'라는 대나무의 한종류로 만들어지는 데 '이대'는 제주지역 어디에서나 군락을 지어 자생하며 바닷가에서 소금바람을 견뎌내며 자라서 좀이 슬지 않고 잘 썩지도 않는 장점이 있다. 농부들이 무더운 여름날 밭에서 더위를 피하려고 사용하였다. 덩드렁마께'는 나무 방망이이다. 나무 토막으로 만든 투박한 방망이로 짚이나 칡을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다. 빨래를 할 때 두들겨 물을 뺄 때도 쓰인다.
'남방애'는 남방아라고도 하며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큰 나무를 파고 그 안에서 곡식을 찍는 부분인 돌로 만든 절구다. 나무로 만든 방아라는 뜻이다. '맷방석'은 고래방석이라고도 하며 고래할 때 밑에 깔아서 이용했다. '고래'는 맷돌을 돌리는 기구로 맷돌을 돌리는 것을 고래곤다라고 한다. 메밀 등 마른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이다. '푸는 체'는 곡식에 섞인 겨 따위를 걸러내는 도구이다. 바람을 일으켜 죽정이나 겨를 내쫓는 데 사용했다.
'도깨'는 도리깨의 방언으로 콩, 보리 등 곡식을 두둘겨서 알갱이를 털어 내는 데 쓰이는 연장이다. '홀태'는 촘촘한 날 사이에 벼, 보리, 밀 따위의 이삭을 넣고 훓어내어 낱알을 터는 농기구다. “골갱이”는 제주의 농기구 중 가장 작으면서도 대표적인 도구이다. 손에 쉽게 휴대하여 잡초 등을 제거하고 종자를 심을 때 사용한다. '호미'는 풀, 나무, 곡식의 대 등을 베어내는 데 쓰는 낫이다.
'남태'는 흙덩이를 고르거나 씨가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데 쓰는 나무로 만든 기구다. '씨부게'와 씨부게기는 짚으로 만들어 씨앗을 보관하는 주머니로 주둥이를 좁게 만들어 쥐나 벌레로부터 피해를 막는 씨앗주머니다. '곰배'는 곰방애라고도 하며 흙덩이를 깨뜨리거나 골을 다듬으며 씨를 뿌린 뒤에 흙을 고르는 데 쓰는 기구다. '쇠멍에'는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막대를 말한다.
지금 사용하는 현대식 농기구는 대부분 과거 전통농가에서 사용했던 기구들을 발전시킨 것들이다. 전통 농기구들이 잘 보관되어 더욱 잘 활용되길 기원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논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빈둥빈둥하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바쁘게 노는 건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는 놀이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일 외에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놀이에서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면 논다는 게 단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혼자서 놀아도 그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직장이 없어 노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테고 그런 일을 빼고 나면 취미생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노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집에서 혼자 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힘들지만 즐거운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전원생활의 빛과 어둠을 비교해 글을 썼다. 즐거운 것 중 하나로 매실주 담그는 얘기를 했는데 늦가을인 요즘, 애주가로서 그때 담근 매실주를 조금씩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심히 골프를 치러 다녔다면 이런 맛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친구가 은퇴 후 10년이 된 나이인데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러 다닌다 해서 좀 부러웠다. 나는 젊은 시절 치다 이마를 다친 후 손에서 놨다. 하지만 코트 위의 검투사처럼 사각 틀 속에서 온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친구는 체력은 문제없는데 같이 칠 파트너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골프나 테니스에 대한 나의 희미한 갈망은 텔레비전 중계로 풀곤 한다.
재미 들린 작은 농사
스포츠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지만 꽃과 나무들을 돌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쓴다. 꽃나무들은 사올 때처럼 예쁘게 가만 있지 않는다. 보기 흉하게 자라지 않도록 가꿔줘야 한다. 그냥 놔두면 야생의 숲처럼 돼버린다. 하루 작정하고 나가 일하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일을 끝내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 즐거움이 스포츠 활동과 진배없다.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보람까지 느끼면 쾌감이 더 오래간다.
꽃나무뿐만 아니라 40~50그루 규모의 블루베리 농사도 짓고 있다. 열매를 1년 내내 생으로 또는 가공해서 먹을 수 있어 좋다. 블루베리는 면역력 향상은 물론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눈을 좋게 해주는 효능도 크다. 실제로 연전에 돋보기를 맞춰 뭘 읽을 때마다 써보니 영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빼닫이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부터는 지금까지 돋보기 찾을 일이 없다. 한번은 쓰고 다니는 근시 안경이 맞지 않아 안경점엘 갔는데 시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현상 아닌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7년 전 블루베리 2년생, 그 어린것을 심어놓고 밤낮으로 물 주며 돌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키가 2m를 넘는다. 커갈수록 일은 더 많다. 잡초 뽑고 오래된 가지 베어내고 더 이상 크지 않도록 긴 가지는 잘라주고, 누운 가지는 지지목을 대주기도 한다. 품종별로 익는 시기가 달라 열매 따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서 따야 한다. 수확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의 블루베리 열매 따기 걱정이 시작된다. 내가 “좀 덜 따고 놔두면 어때? 떨어져서 개미가 먹으면 안 될 일이 있나?”하며 늑장을 부리면, 아내는 “1년 내내 먹을 블루베리잼은 어떻게 만들죠?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애한테는 뭘 보내주죠?” 한다. 블루베리 농사는 벌써 9년째에 접어들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도 한 번씩 맛보게 하려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작은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배우는 게 많다.
스포츠와 농사를 비교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하는 스포츠에 비해 농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집중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도 는다.
명품 매실주 담그기
매실주 담그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 애주가로서 담금 매실주를 조금씩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주로 우메보시를 만들어 먹는데, 우리처럼 청매를 쓰는 게 아니라 다 익은 황매를 이용한다. 익은 열매는 나무 밑에 보자기를 낮게 매달아놓고 가지를 털면 잘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그런 준비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낸 뒤 주워서 모으는 방식으로 수확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몰입해 작업을 하고 나면 만족감이 든다. 큰 플라스틱 용기에 쌓이는 굵고 누런 매실이 얼마나 듬직해보이던지. 수확 후에는 세척하고 말리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한다. 다음 날에는 큰 유리 용기에 담금용 소주를 붓고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저울에 재서 일정량을 쏟아 넣고 거기에 맞춰 소주를 부으면 된다. 자그마치 큰 용기 두개, 작은 용기 한 개. 세 용기에 채워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런 상태로 5년은 숙성해야 마실 만한 명품 매실주가 된다. 좋다. 5년을 기다려보자 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흐뭇한 마음으로.
독서와 음악 감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항간의 말은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또한 맞다. 학교 다닐 때 취미를 기록해 써낼 때가 있었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피아노, 바이올린, 축구, 노래하기 등을 써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걸 취미라고 기록했다. 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으면 그때마다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서를 취미로 할 만큼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로 엄청나다. 전국노래자랑, 복면가왕, 히든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케이팝스타, 위대한 탄생, 미스트롯, 미트터트롯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만 꼽아봐서 그 정도이지 노래와 함께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듣기를 좋아해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오디오나 텔레비전 음악 채널을 틀어놓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음악을 듣고 있다. 고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됐고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대단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좋은 오디오와 LP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종종 그 집에 가서 감상을 하거나 빌려와 들어보기도 하면서 음악 감상 취미를 길러왔다.
매혹적인 나만의 ‘소리’에 취하다
20여 년 전 비엔나에서 근무할 때 덴마크 산 뱅앤올룹슨(Bang&Olufsen, B&O)을 제법 비싸게 사서 듣고 다녔다. 그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도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지금도 제주 집에 놓고 수시로 음악을 듣는다. 나는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교보문고에 들러 음악 시디를 아낌없이 사온다. 아내는 이 기기에 ‘남편 장난감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노트북, 소니 카메라는 2호쯤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음향기기는 딱 한 번 고장이 나서 회로를 교체하는 등 수리를 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성능을 잃지 않고 있다. 무얼 더 바랄까.
내가 듣는 음악, 우리가 듣는 음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의 대중음악을 다 좋아한다. 샹송, 팝송, 칸초네, 칸시온, 컨트리, 탱고, 파두 등등. 라디오 방송 중 클래식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클래식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삶이 녹아들어 있다. 감상하다 보면 그 사람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런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기고 이해한다. 스페인 음악을 듣다 보면 ‘코라존(Corazon)’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하면 Heart, 즉 마음, 사랑, 애인이다. 노래를 듣다가 이 가사가 나오면 시공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상상된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전음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기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대중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고양된 형태로 표현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천재 작곡가들이 온 정열을 바쳐 만든 음악을, 최고의 기예를 뽐내는 천재 연주가들이 빚어내니, 그 소리는 바꿔 말하면 천상의 소리에 지상의 양식이요 품격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빠졌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열다
아마추어일 뿐인 음악 애호가로서 크게 한 번 객기(客氣)를 부린 일이 있다.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재영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황이 한국에 요양차 한두 달 머무르는 기회에 남산 언저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 것이다.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그는 7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9세 때 신동으로 등장한 젊은 음악가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너무 잘해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전자를 선택했다. 1688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우스의 악기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그는 나흐트무지크(Nachtmusik)란 이름으로 그날 여섯 곡을 선사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여남은 명이 참가해 나름 성황을 이뤘다. 처음 해본 하우스 콘서트치고 성공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제주와 서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다. 음악 애호가가 많을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가는 이태원에 루체(LUCE)라는 시니어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이 있어 이따금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음악의 힘이다.
글 쓰면서 혼자 놀기
집에서 혼자 놀기 중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글쓰기다. 이젠 취미가 됐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을 써서 어디 기고를 하면 원고료도 나오니 돈 써가며 하는 취미가 아니라 시간도 잘 보내면서 돈도 생기는 취미다. 글 써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이라서 어떨 때는 지겹다고 한다. 나는 다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 필진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글을 쓴다. 주제와 형식이 자유롭다. 단, 원고료는 없어 일종의 재능 봉사라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건 아무 때나 써지지 않는다. 글 한 편 쓰기 위해 평소에 늘 글감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이게 또한 재미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 공연은 어떤 글감이 될까, 저 활동을 하면 어떤 글로 이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니 심심치 않다. 글을 발표하면 주변 친구들과 지인, 동창, 각종 단체에도 보내는데 갖가지 독후감을 보고 듣는 재미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나름의 원칙을 갖고 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 첫째, 읽는 사람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 둘째,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일로서든 취미로서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한 생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쌀가마니를 공깃돌처럼 다루고, 바윗덩이로 공차기를 했다는 기인. 축지법과 경공법으로 허공을 날다시피 한 무림 고수. 탄허 스님이 삼배(三拜)를 올렸다는 도인. 원혜상인이라고, 전설적 고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가? 162세 장생을 누렸다는 그의 기적이 믿어지는가? 뻥이라고? 증인이 있었다. 원혜상인의 수제자 박대양(2017년 작고). 그는 타오르는 존경심으로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술회했다. 박대양의 무공 역시 초절정 판타지 수준이었다지. 구름을 끌어당겨 마음먹은 대로 부렸다는 게 아닌가. 박대양은 전통무예 집단 기천문(氣天門)의 초대 문주(門主)였다.
현재의 기천문은 2대 문주 박사규(70)가 이끈다. 문주란 문파의 주인이니, 최고 지도자이자 최강 실력자다. 외양을 볼까? 단단한 몸피에 걸친 개량한복은 희어 눈부시다. 머리칼과 수염 역시 세월의 채색으로 허옇다. 전체적으로 허연 작풍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도인 티를 느낄 수 없는 형용이다. 그렇다고 티 나는 게 없는 게 아니다. 눈매와 눈길에 공력이 서려 있다. 유난히 순하고 환하고 따뜻한 눈빛이지 않은가. 풍경을 바라보듯 가만히 바라보자니 심지어 동안이다. 도가 익으면 어린애 얼굴이 된다. 나는 그게 도인 티라 믿는다.
예로부터 신선이나 도인은 늙어 어린애가 된다 했다. ‘무(無)’를 공부하는 게 도 수련이기에 내공이 붙으면 내부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세상에 올 때 붙이고 나왔던 천진이나 순진을 다시 내 것으로 삼게 되는 거다.
해서, 도인 영감님들이 모이면 소꿉놀이하는 어린애처럼 놀았다. 낄낄거리며 장난을 즐겼다. 티베트의 어떤 도인은 숨넘어가기 직전, 옷 안에 폭죽을 잔뜩 둘둘 말아 숨겨두었다. 화장 장작불이 붙자마자 폭죽이 사방으로 신나게 터졌고, 제자들은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뜨렸다지. 박 문주의 동안과 눈빛에도 장난기가 설핏 비친다.
그나저나, 기천문은 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불철주야 무예를 닦고, 기필코 도를 얻어 어디에 용하게 쓰자는 건가. 박 문주의 얘길 들어봐야겠다.
“기천이란 한마디로 몸을 단련해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몸으로, 몸짓으로 행하는 ‘반야심경’이자 ‘천부경’이라 할까. 유불선(儒佛禪)을 초월하는 공부라 해도 좋고. 우리 사부 박대양 진인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보는 눈을 얻는 공부’인 게고.”
“불가의 참선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천은 몸이라는 그릇 속에 고도의 정신을 담아내는 수행이라는 얘긴가요?”
“육신은 별것 아니라고,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을 닦으라고 선가(禪家)에선 가르치지만, 기천은 몸을 중시합니다. 몸이 어긋나면 마음도 덩달아 망가지는 게 아니던가. 활명(活命)이라, 존재의 기본인 몸의 생명력을 북돋워 도로 나아가는 게 기천의 지향이지요.”
“쉽게 말해, 몸으로 닦는 도(道)?”
“바로 그거! 그렇다면 기천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우리는 저 위대한 단군 할아버지를 기천의 시조로 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권법, 고구려의 선맥(仙脈)으로 간주되는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의 화랑도, 풍류도, 또는 현묘지도, 이 모든 고대의 수련법이 기천과 통하는 거라. 이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고요.”
단돈 10만 원 쥐고 입산하다
박 문주에 따르면, 이 나라의 하늘엔 영기와 서기가 구름처럼 흐른다. 단군의 정신을 상속한 과거의 도인들, 역대 조사들, 혹은 영명한 조상들이 죽었으되 영영 시들지 않는 정기로 살아 움직인다는 거다. 기천은 그 상서로운 에너지를 몸 단련으로 내 안에 확 끌어당기는 수련이다.
박 문주는 진도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왔다. 한때 부를 누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해 동종 업자들의 선망을 살 만큼 표나게 이루고 모았다. 돈을 쓸 시간조차 없이 들어오는 돈을 세는 데에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 IMF 때 와르르 무너졌다. 기천을 만난 건 사업을 하기 이전인 20대 때부터였다. 소싯적부터 태권도, 합기도, 복싱을 야무지게 배워 ‘맞짱’을 뜨면 누구나 고꾸라졌다. 나로다! 나랑 붙을 자, 게 없느냐! 그리 악악 외치며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시절이었다. 마침내 임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박대양. 박대양이 서울 약수동에서 선무 도장을 운영할 때였다. 박사규는 이 박대양을 찾아가 한판 붙자 청했다. 박대양은 딱 한 수만 쓰겠다며 대결에 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판이 났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볼 겨를 없이 박사규가 허무하게 나가떨어진 것. ‘아이고, 사부로 모시겠소이다!’ 박사규는 냉큼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원했다. 그 기이한 인연은 발화해 박사규를 기천의 심해로 데려갔다.
박사규는 남대문에서 사업하던 시절에도 기천을 정신의 지주로 삼고 살았다. 사랑으로 섬기고 자랑으로 닦았다. 그러다가 절호의 찬스가 왔으니 사업 부도가 바로 그것. 그는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수중엔 단돈 10만 원뿐이었다지.
“알몸 하나로 이 산에 들어왔어요. 굴러 떨어지고서야 치고 오르는 법. 고행이 있고서야 길을 보는 법. 사업을 망해먹은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요. 하하핫!”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죠?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라는 게송!”
“치열하지 않고서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있던가? 묵언 3년, 육합(六合, 내공을 연마하는 수련) 고행
3년, 총 6년의 담금질 과정을 거치자 사부께서 비로소 기천의 정수를 귀띔하더라고. 원효의 ‘대승신기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유마경’을 읽으라 하시며. 과연 그 안에 진리가 있었어요. 기천이 우주의 생성 원리까지를 깨닫게 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는 걸, 미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행법이라는 걸 관념으로가 아니고 온몸으로 느꼈어요.”
“입산하지 않고서는 도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홀연히 입산하셨나? 나 하나 좋아라고 닦는 게 도가 아닐 텐데.”
“예컨대 바다의 녹조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무엇이던가? 태풍이 아니던가? 태풍이 바다를 한바탕 뒤집어야 본색을 되찾는 게 아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탁류처럼 뒤엉긴 삶을, 욕망을, 일체를 버리는 강단으로 한바탕 뒤집어엎어야 정화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계룡산은 예로부터 민족의 성산이자 수련의 장이었으니 마음이 흘러갈 수밖에. 태조 이성계도 이 산 국사봉에서 수련을 했어요.”
세상으로 향했던 눈을 감고, 입을 닥치고, 오직 계룡산을 스승 삼아 정진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게 도.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 소식 환하게 한 도인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몸 낮추기에 능하다. 겸양은 기천이 중시하는 덕목이다.
“남들은 도사라고들 하지만 정진에 끝이 있을까. 그저 수행자일 따름이지요. 명산엔 자고로 항상 지킴이가 있었어요. 그 면면한 전통을 잇는 지킴이, 옛 도인들이 갔던 길을 등불 하나 들고 현대인들에게 안내하는 심부름꾼, 그걸 본분으로 삼고 삽니다. 세상과 남에게 누가 되지는 말자, 죄짓지 말고, 매 맞을 짓 말자, 그걸 항상 숙제로 여기며.”
“선하고 깨끗한 삶은 평범한 모든 이들도 미덕으로 압니다. 수행자라면 뭔가 더 진전된 정신으로 거침없이 사는 분들 아닐까? 심중에 바위가 들어앉아 뭐에 휘둘리는 바 없이 자유자재한 존재이지 않을까? 죄짓지 않는 생활 관습은 기본일 테고요.”
“앎을 내려놓아라! 이놈아, 앎이 곧 장애이니라! 제자들에게 자주 일갈하는 소리가 그겁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네요. 알량한 앎에 갇히지 않고, 무릇 모든 평범하고 단순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게 도라서.”
“눈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단순한 진리를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생활이란 삼엄한 것이라 먹고살기 위해 전전긍긍을 일삼다 파장을 보는 게 인생이기도 하죠.”
“그게 뭐지?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유, 그게 뭐지? 수행자는 그걸 생각하는 자라. 세 가지 사명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첫째, 전생에서 닦지 못한 걸 이생에서 한번 시원하게 닦으라는 사명, 둘째는 광구천하(匡救天下)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빛을 보태라는 사명, 셋째는 포덕천하(布德天下)라, 널리 덕을 베풀라는 사명! 기천문은 이 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행 집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고요히 반성부터 합니다. 사명을 다할 만치 정진하는가, 그런 자성(自省)을.”
투철하게 깨달아 세상과 사람들의 빚이 되겠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현란할 것 없는 언설이다. 토 달 것 없이 공감되는 선의다. 그러나 말이다, 도라는 메뉴를 파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선의를 떠든다. 흔히들 시늉으로 설레어 세상에 협찬하는 척한다. 도와 속(俗)의 경계가 자명한 현세를 넌지시 묵시함인가. 45년을 닦은 수행자 입에서 ‘자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건 예사롭지 않다.
먹고 사는 정경엔 섭섭할 게 없다
배운 게 있으면 돌려줘야 계산이 맞다. 얻은 게 많으면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박 문주는 무엇을 나누나? 이루어지는 것 없는 이 탁한 세상에 무엇을 실천으로 보태나? ‘어이, 사람들이여, 기천문에 오소! 여기에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이 있으니!’ 그는 그리 외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천 행법을 알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제자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게 그가 세상에 가담하는 방식이다. 그걸 비즈니스로 여긴다면 아마도 협량이겠지. 박 문주의 먹고사는 정경엔 이미 섭섭할 게 없다. 하찮은 물욕을 하찮게 여기는 근기가 없다면 무늬만의 수행자이겠지.
“기천 수련만 유일한 길인가? 그건 아니라. 기천문이 오직 구도자들의 전당인가? 그것도 아니라. 흔히들 달라이 라마에게서 정신을 구하고, 라즈니시를 애호하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 행법 안에 우리에게 맞는 수련 방법과 정신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 그게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이롭게 쓰여야 한다는 것. 제겐 그 사실들을 널리 알려야 할 소명이 있는 겁니다. 과욕을 부릴 일은 아니고요.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벌여놓은 것 같기도 하고.”
2003년 개천절, 남북한 인사들과 해외동포들이 평양 단군릉 앞에 모여 행사를 가졌다. 박사규는 당시 기천무(舞)를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기천 행법은 무예이자 춤이다. 기천의 예술적 성격을 직감한 많은 무용가가 박 문주에게 배우기도 했다. 김매자, 육완순, 이숙재 같은 무용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기천의 정신과 춤사위를 수용했다.
인간의 능력이란 개발하면 상상 불허의 초경지에 이른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아니한가? 박 문주가 보유한 그 뭔가 기똥찬 초능력이. 별 시답지 않는 걸 묻는다는 투로 정수리를 득득 긁으며 그가 예화를 들려준다. 내용은 이렇다. 그는 굳이 몸을 이동하지 않고서도 갈 곳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산에서 수련하던 제자들 앞에 박 문주가 턱 나타나 독려를 하더란다. 그러나 박 문주는 그 시간, 산 아래 거처에 머물렀을 뿐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게 스승의 심영(心影)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아아, 스승께서 ‘심영’을 자유롭게 구사하시는구나!
“호흡을 멈추고 외공을 써 뜻한 장소에 심영을 보내는 일은 우스울 지경으로, 옛 도인들은 갖가지 초능력을 행했을 거라 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하지만 수행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해요. 평범 속에 도가 있다는 자각, 세상에 가급적 많은 수행자가 출현하길 바라는 기원, 그런 게 더 본분에 가깝습니다.”
“산에 앉아 모호한 관념이나 낡은 정신주의에 안주한 채 도통했다 자부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 같아요. 진정한 선지식은 차라리 진흙탕 속세에 있는 게 아닐까?”
“과거와 달리 요즘은 산에 도인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는 저자거리에, 질퍽질퍽한 세속에 차라리 도인이 많아요. 일테면, 피땀 흘려 번 재산을 사회에 쾌척하는 사람들, 또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도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밭두렁 잡초를 뽑으며 어느 할머니가 하는 말씀, 야야, 미안하다 풀들아, 여기는 너희들이 살 자리가 아니구나! 그 할머니의 내공 역시 도에 가깝다 봅니다.”
“자연을 내 안에 들여놓아 매사 자연스럽게 사는 이라면 그 또한 고수죠. 스승 중에 큰 스승은 자연이고.”
어려운 문자를 쓴 게 없다. 나를 내세우는 폼도 없다. 시종일관 시원한 솔바람으로 방 안을 채운 사람. 도 타령도 이쯤이면 절창이다.
그에게 정원은 놀이터다.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들고 문을 나서면 그만의 소우주가 펼쳐진다. 오감이 천천히 깨어나면서 확장된 시간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마음속 풍경은 매일매일 꽃사태다. 이 놀이를 제대로 한번 즐겨보고 싶어 도시 탈출을 감행한 건 40대 중반 무렵. 김형극(金炯克·66) 씨는 마치 특별 초대장을 받아든 사람처럼 성큼성큼 자연 속으로 입장했다. 정원에 빠져 산 지 어느새 23년째. 그 사이 서른두 평 아파트와 맞바꾼 폐가는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로 다시 태어났다.
소확행(小確幸)이 메가트렌드가 된 세상. 그러나 실행은 쉽지 않다. 시계추 같은 일상을 탓하며 시간을 어이없이 흘려버리거나 또 다른 욕망으로 허둥대다 기회를 놓쳐버리곤 한다. 저지르듯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김형극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은퇴가 아직 먼 나이였지만 그의 결단은 신속했다. 다 쓰러져가기는 해도 감나무 다섯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안성의 한옥도 다행히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서 살 때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떠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지낼 바엔 아예 시골로 내려가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아이는 학원을 네 군데나 다니느라 밤 12시가 다 돼서 집에 들어오더라고요. 공부는 해야 하지만 어린 딸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안쓰러웠어요. 자식들 출세를 위해 모두 서울로 가던 시절 저는 과감히 시골로 내려왔죠.”
40대 중반에 감행한 도시 탈출
가족과의 의견 충돌은 없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을 제안이었지만 아내와 딸은 잘 따라줬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텃밭은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고 기와집은 비가 샐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당은 여기저기서 갖다 버린 쓰레기들로 넘쳐났다. 더구나 서초구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매일 왕복 200km나 되는 거리를 오가야 했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일산, 양평, 용인 등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사람하고 집은 연분이 닿아야 한다잖아요. 여러 집을 봤는데 포도 산지인 안성이 고즈넉하고 마을 사람들 인심도 좋아 보였어요. 특히 이곳에서 본 한옥이 자꾸 눈에 밟히더군요. 100년도 더 된 집이었는데 폐가와 다름없었어요. 그 집을 산 뒤 뜯어 고치고 어른 키만 하게 자란 풀 뽑아내고 정리하느라 몇 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출퇴근도 난제였죠. 지금이야 도로가 뻥뻥 잘 뚫려 있지만 그 시절은 안성에서 서울 가려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렸어요. 눈 내리는 겨울에는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회사를 다녔어요. 빙판길 운전이 엄두가 안 났거든요. 혹여나 시골 좋다고 내려가더니 출근시간도 제대로 못 지킨다는 소리 들을까봐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어요. 그렇게 몸은 고됐어도 꽃 심고 나무 심을 때는 마냥 좋더라고요.(웃음)”
어떤 이에게는 돈으로 꾸며댄 정원을 감상하는 것처럼 따분하고 심드렁한 일이 없다. 뜬금없이 웅장함을 자랑한다거나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화려한 색을 들이미는 곳에서는 감흥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원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한 정원을 지향한다는 김형극 씨는 2015년 경기농림진흥재단(현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정원문화대상’ 동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그의 정원에 대해 “소박하고 순수하다.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안 간 데가 없다. 이 사람은 정말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평가했다. 화이불치는 아니어도 검이불루의 뜻은 펼친 셈이다.
“지인이 ‘경기정원문화대상’ 공모를 알려주면서 ‘당신 정원은 틀림없이 상 받을 거다’ 하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를 해봤죠. 그때 정원 이름을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이라고 지었어요. 실제로 들꽃을 많이 심었거든요. 그런데 심사가 꽤 까다롭더라고요. 1차 심사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했고, 2차는 전문가, 3차는 전문가와 일반인이 같이 와서 꼼꼼히 둘러봤어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꽃들을 심고 소박하게 가꿨는데 운 좋게 상까지 받았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좋다
이 공모전을 계기로 재단에서 지원하는 일본 정원 견학 기회도 얻어 수상자들과 함께 다녀왔다. 3박 4일 머무는 동안 공통 주제 하나로 친구가 된 일행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원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와 함께 멍석을 깔았다. 민간정원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기로 뜻을 모아 ‘정원문화대상수상자모임(정수모)’을 결성한 것.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다.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역할을 찾아보고 전국적으로 정원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제안을 하자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각자의 정원을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공유 정원’으로 확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최근 우리 모임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모양입니다. 수상자들의 정원을 보고 싶다는 단체 견학 문의가 종종 옵니다.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또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정수모’ 회원은 14명. 두 달에 한 번씩 부부동반으로 만나 친목도 다지고 정원 관련 정보도 나눈다. 가을이 되면 각자의 정원에서 돌아가며 음악회도 여는데, 이 근사한 계획은 김 회장 머리에서 나왔다. 사실 그는 서초구청이 개장한 충남 태안 서초휴양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위해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 이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사람들을 모아 정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게 시너지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수모’ 음악회도 회원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고 지금은 정기적인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58세에 퇴직을 했으니 올해로 벌써 8년이 됐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사진 찍기, 도자기 빚기, 수석 수집, 통기타 연주 등 취미와 재주가 많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간다. 그래도 매일 그를 설레게 하는 건 역시 정원이다.
“저는 모과가 달려도 첫눈 올 때까지 절대로 따지 않아요. 노랗게 익은 모과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을 꼭 봐야 하거든요. 정원은 영원한 풍경이 없어 더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매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요. 정원에서는 눈도 꽃으로 보여요. 봄에는 꽃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새싹들을 자주 들여다봅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꽃잎에 반할 수밖에 없고요.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들이에요.”
그의 정원에는 200여 종의 꽃과 나무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그들에게 물 주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요즘 겨울 정원을 구상하느라 잔뜩 들떠 있다. 텃밭에 가식(假植)해놓은 몇몇 주인공들이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꽃과 나무들에게 배우는 것들
은퇴한 사람들에게 일과를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 김밥과 물 싸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라는 사람이 많다. 딱히 갈 데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의 지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퇴직을 같이한 한 친구는 평생 취미활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어쩌다 동창들 만나 약주 한잔씩 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은퇴 후의 단조로운 일상에 대해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일찍 시골로 내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제가 지금도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면 여전히 정원에 관한 로망에 젖어 있을 겁니다. 주말마다 자연을 찾아 떠났을 테고요. 안성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하루 종일 풀이나 뽑으면서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물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은근히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요. 다른 삶을 펼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기 때문이죠. 돈이 무서운 이도 있어요. 물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경제활동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모을 줄만 알지 한번 손에 넣으면 도무지 꺼낼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결국에는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좀 쓰고 살아도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후 준비는 50대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건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일을 먼저 찾는 것. 은퇴 후에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살더라, 저런 삶이 멋져 보이더라 하면서 흉내를 내면 얼마 못 가 한계가 오고 그 삶을 즐길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어느 날 친구 따라 밤낚시를 갔어요. 밤새 깜깜한 곳에서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웠죠. 새벽에 보니 손톱 사이로 지렁이 살이 잔뜩 끼어 있고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손을 대충 닦고 밥을 먹더라고요. 낚시하는 동안은 수염도 못 깎고 행색이 엉망이 됩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게 다 극복이 되고 본인은 행복한 거 아닐까요?”
올해도 그의 정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러면 또 감 따는 핑계를 대고 지인들이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축제 같은 열기 속에 흠뻑 빠졌다 갈 것이다.
그는 날마다 정원에서 배운다. 아름다움을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이 제대로 보이고 행복을 두드려 깨운다는 사실을.
엽기적인 사건들이 줄을 잇따르고 있다. 일명 ‘어금니 아빠’의 딸 친구 살해 사건. 젊은 부부가 갓 태어난 자식을 굶겨 죽이고 이어 태연히 시체를 유기한 사건. 젊은 여인의 전남편 살인사건.
그 중에서도 전남편을 살해한 젊은 여인이 특히 눈을 끈다.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그 여인의 표정을 보면 살기라곤 전혀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이어서 더욱 섬뜩하다. 주변에서도 그녀는 평소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전형적인 악의 얼굴은 실제가 아닐 수 있다. 영화에 무시무시하게 등장하는 마동석을 보며 그에게 편견을 가질지 모르지만, 실제 생활에선 마블리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스러운 모습이라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는 악의 이미지는 미디어 등에서 주입한 편견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다정다감한 악의 모습은 의외라서 더욱 소름 끼치게 한다.
‘악의 평범성’을 실감나게 묘사한 글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들 수 있다. 아렌트는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로 히틀러 정권 출현 후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1960년 나치 친위대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체포되자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고 이 글을 썼다. 이때 제시한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이 체포될 당시 사람들은 그가 포악한 성정을 보여주는 모습의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를 검진한 정신과 의사들도 아이히만이 매우 ‘정상’이어서 오히려 자신들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월급만큼 일을 못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평범한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는 악의 본성을 드러내어 충격을 준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도소 실험’도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도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심리학 실험이다. 1971년에 시행된 이 실험은 아직도 고전적인 성과로 남아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피실험자를 둘로 나눠 교도관과 죄수라는 역할을 준 뒤 그들의 심리와 행동의 변화를 추적한 것이다.
실험의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끔찍한 것이었다. 무작위로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 역할극에 몰입하면서 내면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이다. 2주로 예정된 실험이 5일 만에 끝날 정도로 인간의 폭력성은 심각했다. 그렇다면 악은 특정한 사람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익명성 속에 숨어 갖은 악플을 일삼는 범인들을 잡고 보니 초, 중등 학생들이라지 않는가.
그러나 악이 인간의 보편성이라면 선도 또한 보편성일 것이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사회가 가능하고 인류 문명이 지속되는 것일 터이니. 본디 자연 상태의 본질이 악이라면 야만 상태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문명이 선의 영역을 유지하는 힘이 아닐까 한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부단한 수양으로 마음속의 악을 누르고 선을 지향하는 노력 없이는 어느새 마음 밭은 악의 잡초로 우거질 것이다.
요즘 딸의 권고로 BTS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관찰하니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힘의 본질이 선한 기운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지구 반대편의 평범한 소녀의 삶을 바꾸는 모습이 신선하고 기특하다. 어쩌면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모두 이런 선한 기운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격려가 세상을 바꾼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치솟는 6월. 여름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며 뒷산을 오릅니다. 연두색이던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바뀌었고, 길섶은 허리까지 차오른 풀들로 한 걸음 내딛기가 주저될 만큼 무성합니다. 몇 걸음 더 오르자 그만그만한 잡초들을 제치고, 어깨높이 이상으로 껑충 솟아난 꽃이 보입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매혹적인 꽃, 바로 털중나리입니다. 겨우 한 송이 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서너 송이가 달려 있습니다. 많게는 열 송이 가까이 달리기도 하는데, 1m 넘게 솟아오른 원줄기 끝에 한 송이, 그 아래 사이사이 좌우로 뻗은 작은 가지마다에도 한 송이씩 다닥다닥 핍니다.
털중나리가 꽃을 피웠다는 것은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털중나리를 비롯해 하늘나리, 중나리, 참나리, 땅나리, 솔나리, 말나리, 하늘말나리, 날개하늘나리, 섬말나리, 누른하늘말나리 등 백합과의 나리꽃들이 곧 우리 땅에서 여름 내내 피고 지는 ‘여름꽃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여 종 나리꽃들의 피고 짐이 털중나리로부터 비롯되기에, 털중나리의 개화는 곧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색은 여름꽃답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은 듯 한결같이 붉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면 붉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홍색(紅色) 일색은 아닙니다. 분홍색의 솔나리와 진한 홍색의 큰솔나리 사이에, 주홍색과 주황색 등 다른 색의 꽃을 피웁니다. 물론 솔나리의 경우 아예 꽃잎이 온통 하얀 흰솔나리, 검은빛이 도는 홍자색 검은솔나리가 따로 있기도 합니다. 털중나리의 꽃은 노란빛이 감도는, 이른바 황적색(黃赤色)입니다. 간색(間色) 특유의 진한 색감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6개로 갈라져 완전히 뒤로 젖혀진 꽃잎, 그 안쪽으로 황적색 바탕에 새겨진 진한 자주색 반점과 6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모두 드러낸 모습은 집시 여인보다도, 삼바 여인보다도 뇌쇄적입니다.
10종이 넘는 나리꽃들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6개로 갈라진 꽃잎이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 땅을 보면 땅나리, 그 중간을 보면 중나리, 줄기 등 전초에 솜털 같은 털이 있으면 털중나리, 꽃잎이 하늘을 보되 잎이 빙 돌려나면 하늘말나리로 불리는 식입니다.
Where is it?
털중나리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나 조금만 품을 팔면 만날 수 있는 야생화란 점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를 비롯한 전국의 해발 1000m 미만 지역에서 자란다”는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설명처럼 전국 어디서나 잘 자란다. 그렇다고 도심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동네 뒷동산이라도 찾아가야 한다. 서울의 경우 광화문 한복판에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종로구 수성동 계곡에서도 만났다. 다만 각종 공해(公害)에서 벗어날수록 꽃이 더 싱싱하고 탐스러우며 꽃색도 맑고 깨끗하기에, 멋진 털중나리를 만나려면 조금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해발 1000m 미만에서 자란다”는 건 해발 1000m 즈음까지 자란다는 뜻이기도 한데, 높은 곳의 털중나리는 탁 트인 전망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 경남 합천군 오도산 정상에서 일출과 함께 만나는 털중나리는 가히 환상적이다. 경기도 팔당 예봉산 자락과 김포 문수산도 털중나리와 주변 풍광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