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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 여행] 와인의 ‘주민증’ 레이블
- 와인의 레이블은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이다. 와인의 출생을 비롯한 정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마음대로 위조하거나 변경할 수 없듯이, 레이블에 기입하는 사항들은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민등록증의 경우 한 번 기입된 내용에 대해서는 임의로 고치거나 가감을 할 수 없지만, 와인 레이블의 경우는 시음 조건이나 음식 매칭에 관한 내용과 같은 법적 규제를 받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생산자나 네고시앙들이 임의로 첨가할 수 있다. 레이블은 1760년경 보르도에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는 병목에다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이전 시대에는 레이블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병도 없어, 오크통째로 판매를 하든지, 아니면 소비자가 2~3ℓ짜리 작은 나무통을 들고 와 양조장이나 매장에서 와인을 받아갔다. 우리 어린 시절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던 것과 흡사하다. 레이블은 1818년 보르도에서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며, 지금처럼 병에다 직접 붙이는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레이블에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법적 의무규정이 실시된 것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이 기입해야 하는 의무규정에 포함되는가? 여기서는 와인 레이블의 원조국이자 그 밖의 모든 와인 생산 국가에서 기본 모델로 받아들인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을 살펴본다. 레이블에 의무적으로 기입해야 하는 항목은 총 8가지다, 그중 하나(납세필증)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등급에서 사라질 우등 한정 와인(AOVDQS)에만 적용되니, 7개 조항이라 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 하겠다. ▶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 ① 병입한 사람이나 양조장 이름과 주소 ② 알코올 도수(%) ③ 양(ml) ④ 와인의 법적등급(AOC, 뱅 드 페이, 테이블 와인) ⑤ 생산국가 ⑥ 생산 일련번호(No du Lot) ⑦ 보건과 위생관련 사항(아황산함유 여부나 임신부에 대한 경고 등) 모두가 와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들이다. 특히 ①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법적 책임의 소재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밖에도 레이블에는 법적 의무규정이 아닌 다른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흔한 것으로 생산년도(빈티지: 포도수확 년도 기준), 샤토, 도멘느, 크뤼, 세빠주 등의 명칭과 메달 수상 내용 등이다. 모두가 와인의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사용한 세빠주의 경우는 향, 맛, 산도, 타닌 등 그 와인의 특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빈티지는 그 해 생산한 와인의 일부 특성과 보관기간 등에 대한 암묵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샤토, 도멘느, 크뤼 등도 와인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보르도보다는 메독이, 메독보다는 뽀이약이, 그리고 뽀이약보다는 샤토 라투르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와인의 특성과 등급을 일러준다. 그러나 레이블에는 소비자를 현혹하는 내용도 많으니 읽을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메달의 경우가 그러하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수상하는 메달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와인 경연대회에 출품한 30% 이상의 와인에 메달을 수여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파리 와인 경연대회, 마콩 와인 경연대회, 세계 리슬링 경연대회 정도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참고로 와인 경연대회는 그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또한 ‘상급의’(supérieur), ‘예약된’(réservé) 등에다 ‘특별한’(spécial)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도 하는데, 대부분 상업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으니 무시해도 된다.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다 좋지 않은 문구를 붙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지 병입에 대한 정보는 주조에서 숙성은 물론 병입까지 동일한 와이너리에서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의 질, 특히 원생산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 밖에도 와인의 특성, 즉 향과 맛 등에 대한 내용을 하나같이 미사여구로 설명해 놓은 두 번째 레이블을 병 뒷면에 붙이는 것도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데, 마시기에 적정한 온도나 매칭이 잘되는 음식 그리고 마시기에 적절한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소설이나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와인에서 레이블은 얼굴이다. 화장을 잔뜩 하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도 있고, 수수한 맨얼굴을 지닌 것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와인의 레이블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와인이 등장하면서 레이블의 내용은 물론 디자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원산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주로 수수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는 떼루아 와인에 비해, 브랜드 와인은 와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으로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So Fruity’, ‘부드러우며 꽃 향이 나는’ 등의 문구를 레이블에 눈에 띄게 크게 넣어 소비자로 하여금 와인의 맛이나 향에 대한 선택을 쉽게 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는 팩이나 알루미늄 캔에 담아 판매하는 와인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와인은 팩이나 캔 위에 우유나 맥주처럼 화려한 레이블을 직접 인쇄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르고뉴의 다이내믹한 네고시앙인 장-클로드 부와세(Jean-Claude Boisset)는 ‘French Rabbit’이란 상표 와인을 다분히 희화적인 디자인을 한 팩에다 담아 판매해서 성공한 경우다. 여성들의 와인 구매가 급증하면서, 당연히 여성들 취향에 맞춘 병이나 레이블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무통-로칠드의 레이블은 그것 자체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생길 만큼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해마다 세계적인 유명 화가의 그림을 레이블에 붙이는 호사를 누리기 때문이다. 레이블은 와인의 얼굴이고 ID다. 그래서 와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소비자의 변화하는 취향에 맞춰 새로운 와인이 탄생하는 것처럼, 새로운 레이블도 탄생한다. 조금 깊이 음미하면서 레이블을 쳐다보면, ‘와인이 가득찬 병 위에서는 비자처럼 희망적이고, 텅 빈 병 위에서는 유공자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처럼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와인의 레이블은 마시기 전에, 즉 ‘구두시험을 통과하기 전에 치러야 하는 필기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 장홍와인누리 대표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 2016-06-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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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8년生,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온 67년
- 197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노신사가 신문에 난 부음을 보고 빈소가 마련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였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신세를 많이 지었다며 이를 잊지 못하여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우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일제 말기에 선친은 종로 2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수리하겠다고 아버지 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모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사연을 들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철원이며 배재학당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하며 이승만 박사를 돕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49년 이철원 박사가 아버지에게 급한 연락을 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는데 입고 갈 양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바로 양복과 모자를 해주었다. 그는 얼마 후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지금은 자신도 은퇴를 하였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 형 결혼식의 주례를 이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유신체제하라 긴 주례사를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 형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세대가 있기에 우리 세대가 있다 요즘 나는 이철원 박사의 아들 이준일 교수(전 중앙대 정경대학장)와 우리 둘 다 회원으로 있는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매달 만나 선친들의 우정을 회고하며 2대에 걸친 세교(世交)를 이어가고 있다. 선친 이야기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194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태어나지 않아 이등 황국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군대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고 나중에는 고위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만 한살이라 어머니 등에 업혀 고생을 모르고 피난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시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내가 태어난 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러니 나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4·19와 5·16을 목격했고 그 후 오랜 권위주의 정부 후에 온 1987년 민주화,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등을 국내외에서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변화된 국제적 위상을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그사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되었다. 4·19 총성과 시민들의 울부짖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육성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데 6학년 때 수업 도중 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현재의 종로 구청자리)에서 멀지 않은 세종로에서 총성이 울려 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는데, 그의 차량이 떠나는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종로 2가에 나가보니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라디오는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육성 성명을 보도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 집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고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개한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들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 대문에 걸었다. 지금은 병원에서 출산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해산하고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래서 어느 집에 애경사가 있는 지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또 집집마다 한자로 된 문패를 걸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바로 앞집 사람의 성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문 안인 종로 2가 YMCA 뒷동네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생가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 245번지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주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건물만 남아 있으나 지금은 개조하여 음식점이 되었다. 내 유년 시절의 종로 2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YMCA 자리는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YMCA 건너편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었다. 종로 1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을유문화사 서점이 있었고 안국동방향으로 돌아서는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1936년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구비한 이 건물은 규모는 다르지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장안의 명물(landmark)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화신백화점은 1987년 종로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다른 유서 깊은 외국 도시와는 달리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려한 자연 경관은 무분별하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지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이런 철거 위주의 도시 계획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없어진 옛날 집 주소와 화신백화점을 생각하며 나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고교 시절인 1966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주최 세계 청소년토론대회(World Youth Forum)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된다. 지금은 조기 유학들을 많이 가지만 그 당시는 고등학생이 미국에 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3개월 여간 뉴욕 지역의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그 집 아들들과 함께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 대한 연설도 하고 또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학생들과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지금은 서울이 글로벌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도 없는 후진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 또 그 당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전화는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항공우편 중에서도 저렴한 봉함엽서(aerogramme)에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 세대에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을 꼽으라면 나는 통신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SNS, 무료 국제전화까지 가능하지 않은가. 만 28세였던 1977년 나는 코리아헤럴드 파리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뜻밖의 인사 발령이었다. 대개 지사장이나 특파원하면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의외와 예외가 있다. 나는 이때 프랑스에 2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체험하며 프랑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 후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두 차례 8년을 더 근무하면서 도합 1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며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도 받고 프랑스에 대한 책도 출간하게 된다. 프랑스 지사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를 겸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다. 자고 있는데 중앙청에서 전화가 왔다. 긴급 중대 발표가 있으니 빨리 기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부리나케 중앙청으로 향했다.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소문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평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울먹이면서 대통령 시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우두망찰할 사이도 없이 전화로 송고를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했다. 고인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평소 박 대통령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께서 이제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해 나는 외신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정국관련 보도는 마치 암호를 읽는 것과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 언론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1984년 초 연합통신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공보관으로 나가 달라는 공직 제의를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기회다. 그 당시 나는 미국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장학금도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주저하는 나에게 내가 자문한 선배들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라고들 권유했다. 사농공상 문화의 잔재 때문일까. 그 당시 해외공보관 중에는 많은 전직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 이후 공무원이 된 나는 자카르타, 파리, 제네바, 오타와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행하며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특혜 받은 인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적을 해외에서 지켜봤다. 19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정부 방어에 종사하던 나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그 이후 나의 공보관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때는 파리에서 서울에 파견되어 외신 홍보 지원을 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프랑스 TV와의 회견에서 나는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축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파리에 대사관 공사 겸 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고 한국문화원을 찾았고 월드컵이 생중계되는 파리 시청 광장에는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러 몰려들었다. 우리 가족도 여기에 합류했다. 지난 9월 나는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 상호 교류의 해’ 개막행사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색채로 조명된 에펠 탑 앞에서 열광하는 파리 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 개막행사를 한 사요극장은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를 통과시킨 곳이다. 2007년 이후 나는 한림대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를 공직 시절에 하던 ‘한국 알리기’의 연장으로 생각하며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특히 흐뭇한 것은 이제 한국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올 만큼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간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안으로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나 밖에서는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태어난 나는 이 여정에 국내외에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 손우현 (孫又鉉)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1948년 서울 출생. 서울고, 한국외대 불어과, 파리 외교전략대학원(CEDS) 졸. 코리아헤럴드 기자, 파리지사장, 연합통신 기자, 주 인도네시아, 프랑스, 제네바, 캐나다 공보관.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정부간행물제작소장,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역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장’ 수훈.
- 2015-12-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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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70년을 빛낸 스포츠 스타들 -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 광복 70년을 맞는 2015년 현재, 스포츠는 경제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한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이후 한국인들의 스포츠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를 창립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했다. 글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국제무대 활약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하계대회(마라톤 김은배·권태하, 복싱 황을수), 1936년 베를린 하계대회(마라톤 손기정·남승룡, 축구 김용식, 농구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그리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대회(스피드스케이팅 김정연·이성덕·장우식) 등 총 3차례의 올림픽에 모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을 뿐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올림픽에 나섰고, 필리핀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일본은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처음 참가한 뒤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 종합 8위(금 6, 은 4, 동 8)에 오르는 등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는 세계 수준은커녕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안에 한국은 세계 스포츠 10강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를 먹고살 만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줬던 한국 스포츠의 광복 후 70년을 살펴본다. 혼란기 이끈 두 효자 종목 복싱과 역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도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45년 11월 26일 이 땅의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경기 단체도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축구협회 등이 속속 탄생했다. 1945년 10월 27일 열린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이어졌다. 올해 제96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은 1920년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며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한국은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두 대회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열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과 1952년에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전쟁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의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고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1940~50년대에 참가한 3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는 복싱과 역도였다. 한국 스포츠의 메카 태릉선수촌 개장… 치열한 남북 경쟁 해방 이후 70년,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진천선수촌에 자기 자리를 거의 물려줬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지 않은 한국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리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선전하는 한편 196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해방 이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스포츠 코리아’를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이 스위스와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난 회담이었으나 남북 스포츠 관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공동 입장 등 일정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1960년대에는 개인 종목의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띤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고, 김일이 이끈 프로 레슬링은 당시 국내에서 해마다 개최한 유일한 국제 대회인 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함께 국민적 볼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북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1972년 뮌헨 대회 사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먼저 따자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양정모(레슬링)의 금메달로 응수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1974년 테헤란·1978년 방콕)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제 경쟁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스포츠의 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표어가 ‘선 체력 후 기술’이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에 오른 김진호, 1978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인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등이 이 무렵 한국 스포츠의 슈퍼스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 올림픽, 한국 스포츠 도약의 발판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만든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꽃을 피운다.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 온 국력의 집결 과정이었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아픈 기억은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서 화합의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1980년대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축구와 민속 경기인 씨름이 프로화돼 스포츠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축구의 경우 프로화에 따른 경기력의 발전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등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했고 북한은 금메달 17개와 은메달 19개, 동메달 20개를 차지해 스포츠의 남북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등은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1980년대의 스타플레이어다.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을 굳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홈의 이점을 살려 종합 순위 4위(금 12, 은 10, 동 11)에 오른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7위(금 12, 은 5, 동 12)를 차지하면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그해 알베르빌(프랑스)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계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후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은 쇼트트랙을 주력 종목으로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와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의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는 등으로 인해 종합 순위 13위(금 3, 은 3, 동 2)로 주춤했지만 2018년 평창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하계 올림픽에서도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은 8, 동 7)이 쏟아지면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원정 대회 최고의 순위였다. 축구가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동메달을 따 국민들에게 금메달 이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에 앞서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이승엽, 류현진, 이대호 등이 힘을 모은 야구가 9전 전승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스포츠는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아마추어의 경우 국제 대회 성적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있으며, 프로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뛰고 있다. 특히 여자 골프는 199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현재 통산 25승에 빛나는 박세리의 뒤를 잇는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의 그린을 휘어잡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사실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대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딴 듯 기뻐한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프로 야구가 800만 관중을 겨냥하고 있고 다양한 종목의 생활 체육이 활성화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스포츠와 즐기는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후 70년, 속도를 우선시하며 나타난 압축 성장의 폐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명철(申明徹) 스포츠 평론가 편집국장과 편집위원,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3년 버팔로(뉴욕주) 유니버시아드대회, 1995년 프로 야구 한일슈퍼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취재했다.
- 2015-07-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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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데이옥션 온라인 미술품 경매 …청전 이상범부터 앤디워홀까지
- 온라인 미술품 경매 전문 아트데이옥션(대표 소돈영)은 5일부터 11일까지 7일간 온라인 미술품 경매를 진행한다. 출품작은 종로 삼청동 갤러리 도스에서 10일까지 전시된다. 이번 경매는 아트데이옥션의 2014년 첫 정기 경매로, 모든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김창열, 장욱진, 전혁림, 박영선, 문신, 유영교 등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출품된다.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등 한국화 거장들의 작품과 해외 팝 아트 작가 앤디워홀,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 등 총 120여 점을 선보인다. 봄기운이 물씬 나는 아름다운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로 다수 구성된 이번 경매는 감상자들의 마음에 활기를 전해줄 것으로 보인다. 아트데이옥션 온라인 미술품 경매는 국내 미술시장 가격보다 약 30~50%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감상자들은 온라인 경매에 앞서 아트데이 프리뷰 전시기간을 통해 오프라인상에서 출품작들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경매마감은 11일 오후 5시부터 작품 번호 순으로 진행되며, 1분 간격으로 1점씩 이뤄진다. 아트데이옥션 홈페이지(www.artday.co.kr) 또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아트데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경매 응찰 현황을 볼 수 있고, 직접 응찰도 가능하다. 온라인으로 작품 감상부터 응찰, 구매까지 손쉽게 해결할 수 있어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주요 작품 소개 박영선 화백은 평양 출신으로 파리 유학을 통해 폴 세잔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젖을 먹이고 있거나 한복을 입은 여인상을 주로 그려왔다. 이번 출품작은 장미를 담은 꽃병을 그린 정물로 부드러운 색감과 붓 터치로 로맨틱한 작가의 감성이 반영됐다. 색채의 마술사, 통영의 피카소라 불리는 전혁림 화백의 무제가 출품된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그림을 배운 적 없는 전혁림 화백은 60이 돼서야 미술 화단에서 주목받았다. 진한 테두리에 선과 면의 강렬한 색채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평면과 입체를 막론하고 추상화ㆍ풍경화ㆍ정물화ㆍ도자기ㆍ목조 등 다양한 조형작업을 펼쳤다. 전혁림은 그동안 장르, 재료에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독창성이 묻어나는 작품을 탄생시켜 왔다.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추상조각가 문신의 브론즈 작품이 출품된다. 프랑스 남부에서 열린 국제 야외 조각전에서 태양의 사자로 국제무대에 데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스테인리스 조각으로 또 한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출품작은 하늘로 치솟듯 삐죽삐죽 튀어나온 대칭을 이루는 기이한 형체가 생명력을 내뿜는 듯하다.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선이 대칭과 비대칭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돌의 성질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돌박사’ 유영교의 여인상이 출품된다. 하얀 대리석을 이용한 따뜻하고 푸근한 여인상이 그의 주 대표작이며, 화강암으로 제작해 한국적인 투박함을 나타내기도 하며 돌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번 출품작은 붉은 대리석으로 돌이 가진 표면 흔적이 남아있어 자연친화적이며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곡선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듯 고요한 산골에 두 채의 소박한 집. 그리고 그 주변으로 밟으면 바스락 바스락 소리 낼 것 같은 노란 나뭇잎들이 지극히 향토적이다. 쓸쓸한 가을 풍경은 작가의 마음을 담아낸 듯해 시골 가을 전경을 실감하게 한다. 짧은 붓질과 반복하는 발묵과 파묵의 조화로 거침과 온화함이 공존한다. 앤디워홀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인 Space Fruits이 출품됐다. 앤디워홀은 실크스크린이라는 기법을 이용해 전통적 회화를 벗어나 산업사회에 새로운 예술 양식을 제공하며 그만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폴 세잔의 단골 주제인 과일을 실크스크린 인쇄기법으로 여러 번 겹치고 올려 그린 과일들은 앤디 워홀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준다. 회화적인 느낌을 더하기 위해 완벽하게 칠하지 않고 그 위에 스케치를 더했다. 데이비드 걸스타인은 파리 에꼴 드 보자르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를 거쳐 런던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이스라엘 출신 작가다. 화려한 색채와 아기자기한 표현으로 친근감이 넘치는 작품이 보는이를 기분좋게 한다. 그만의 독특한 컷아웃 기법은 새로운 회화방식을 구축하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을 선사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이번 출품작인 Paradise Flowers는 생동감 넘치는 터치와 친근한 소재로 어린아이부터 어른들이 모두 좋아할만한 작품이다. 장욱진은 순박하고 향토성이 짙은 유화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간소화된 표현 방법으로 삶과 밀접한 소재들을 이용하여 수묵화를 그려냈다. 함축된 묵선으로 대담하게 표현된 나무와 산, 새와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장욱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로, 늘 그렇듯 나무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 2014-03-07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