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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끔찔끔 요실금 증상, 수술 무서워하면 치료 더 힘들어진다
- 의지와 상관없이 소변이 새어 나오는 요실금. 대한배뇨장애요실금학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30세 이상 성인 여성을 조사한 결과, 요실금 중 복압성 요실금 여성 환자가 90%에 육박할 정도로 가장 높은 발생 빈도를 보였다. 복압성 요실금이란 복압이 증가하면서 방광의 수축 없이 소변이 새는 증상으로 출산 시 요도 괄약근이 약화되는 것이 주 원인이다. 요실금의 근본적인 문제는 두덩뼈에서 엉치뼈까지 연결되어 내부 방광과 자궁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골반저근’ 약화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치료에 힘을 쏟기도 한다. 요실금이 발생하는 이유와 제대로 된 치료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요실금은 왜 생기는 건가요? 의지와 상관없이 소변이 요도로 나오는 증상을 요실금이라고 해요. 요실금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기전이나 상황에 따라 복압성 요실금, 진성 요실금, 급박성 요실금 등으로 나뉩니다. 이 중 복압 상승 시 나타나는 복압성 요실금 환자가 가장 많아요. 복압성 요실금의 가장 큰 원인은 출산과 분만입니다. 기침할 때, 웃을 때, 뛰거나 할 때 소변이 흘러나옵니다. 진성 요실금은 요도 괄약근의 기능이 떨어지는 증상인데, 복압성 요실금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요. 급박성 요실금은 소변이 마려울 때 조절이 안 되는 증상입니다. 요실금 발생 연령은 어떻게 되나요? 최근에는 30~40대 여성들도 요실금 증상을 호소하곤 해요. 갑자기 살이 찌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에도 요실금 증상이 나타나 중고등학생도 치료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병원을 찾는 분은 대부분 50~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이 많긴 하죠. 나이가 들어 요실금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방광, 자궁, 난소 등을 얹고 있는 골반장기들을 지탱하는 근육(골반저근)의 약화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것을 받쳐주는 힘이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근육의 힘이 없어지고 점막이 약해지면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방광염이나 과민성 방광이 요실금과 관계가 있나요? 방광염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고 과민성 방광은 저장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거라 조금 다르죠. 감각신경들이 과민해져서 자주 소변을 보는 것은 과민성 방광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소변이 마렵고 화장실을 가기도 전에 소변을 흘리기도 해요. 반면 요실금은 힘을 줄 때 소변이 새는 것입니다. 질염도 요실금과 관계가 있나요? 질염은 감염성 질환입니다. 질염이 생기면 가렵고 쓰리고 따가워 아랫배나 골반에 불편함을 줍니다. 이런 증상은 염증의 종류나 심한 정도에 따라, 또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염증은 대개 몸이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몸의 저항력이 떨어지게 되면 생깁니다. 또한 생리 전후나 성관계 후에 올 수 있습니다. 요실금이 있으면 소변이 새어 나오면서 질 쪽에 묻어 따끔거릴 수 있습니다. 노화로 인한 골반 구조 변화로도 요실금이 생긴다고 하던데요? 골반 구조보다 골반 근육과 엉덩이 근육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요. 엉덩이 근육은 굉장히 두껍지만 골반 근육은 얇은 근육이 얽혀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골반 근육들이 골반 쪽 장기들을 다 받치고 있어요. 출산이나 나이가 들면 골반이 틀어지고 골반 근육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질 점막, 요도 주변의 염부 조직들의 호르몬이 떨어지고 방광이 빠져나오면서 구조적인 변화가 생기는 거죠. 그러면서 요실금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요실금에 좋은 운동이 있나요? 케겔운동이라고 질 주위 근육을 조였다 펴기를 반복하는 골반근육강화 운동입니다. 그런데 헬스트레이너에게 골반 근육을 수축해보라고 했더니 수축을 잘 못하더라구요. 골반 근육이 내 맘대로 수축이 안 되는 근육이라 이를 보조해주기 위한 자기장 치료도 있어요. 케겔운동이든 자기장 치료이든 운동한 사람이 안 한 사람보다 치료 효과가 더 좋습니다. 어쨌든 제대로 된 기구로 꾸준히 치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실금 치료기가 많던데 효과가 있나요? 시중에 30만원대 치료기가 나온 것을 봤는데, 효과는 미미하게 있겠지만 수천만원대의 병원 의료기와는 좀 다르겠죠. 시중 의료기는 임상실험을 거친 의료기가 드뭅니다. 이를 확인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요실금 수술을 꺼려하는 사람도 꽤 많죠? 네, 귀가 얇은 분들은 음식이나 기구 등 이것저것 다 해보고 효과가 없을 때 병원을 찾습니다. 약물치료를 해도 좋아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수술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요. 수술 후 10명 중 9명은 10년이 지나도 부작용 없이 잘 지냅니다. 요실금은 수술이 최선이고 효과도 가장 좋습니다. 수술비용도 50만원대로 적은 편입니다. 요실금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뭔가요? 뭘 먹어야 되고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은 뭔지, 그리고 성관계를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묻는 분이 많습니다. 골반의 구조적인 문제로 생기는 문제라 음식보다는 수술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성관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요실금을 그냥 두면 저절로 좋아지는지 묻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요실금 검사 방법과 대표적인 수술 방법이 있다면? 요실금은 초음파 검사, 내시경 검사 등 정말 진단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클리닉에서 검사하면 오래 걸리지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10분이면 간단히 끝납니다. 수술 방법은 개인의 몸 상태와 원인, 진행 정도에 따라 달라져요. 최근 도입된 TVT, TOT, TVT-O, mini-sling 등의 개선된 수술법은 간단해서 입원도 필요 없습니다. 수술을 망설이던 많은 환자가 이 수술법으로 치료를 했습니다. 환자들 중 요실금 수술을 하면서 이쁜이(질성형) 수술도 같이 해달라고 하는데, 마취 부위가 비슷해서 병행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 2017-10-16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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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그래도 백성이 있었다
-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동ㆍ서ㆍ남ㆍ북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 북문은 전승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이라고 불렸다. 등산객들은 보통 마천역에서 서문으로 들어가거나 산성역에서 남문을 거쳤다. 어느 문으로 들어갈지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산행은 달랐다. 남쪽 지화문을 이용하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죄인 조선왕은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 서문으로 나와서 항복하라.’는 청태종의 항복조건을 보고나서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을 다뤘다. 당시 청나라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는 결국 45일 만에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함께, 외세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몰아냈던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은 가장 처절하고 치욕적인 패배였다. 영화 '남한산성'이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크게 다루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의 주장을 폈다. 최명길은 단순히 주화론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인조 일행이 피신할 때, 홀로 청군의 지휘관 마부대 진영을 찾아가 항의담판을 함으로서 피신할 시간을 벌어준 사람이었다. 최명길은 난세에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균형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의 생존을 찾는 것이었다. 척화ㆍ주화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백성이 있었다. 얼어 죽는 백성을 살리려고 가마니를 모으고 굶주린 말을 위하여 초가지붕을 걷어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준비 없는 허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가정이지만 45일 만에 항복하건 결사항전하건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헌데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진흙탕 싸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국민은 안중에 없다. ‘나 살고 너 죽자’식이다. 아니다. 국민커녕 자기 한 몸 사는 방법도 모른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 같다. 자기 생각 하나 말 못하고 눈치를 보고 줄을 섰다. 감옥 가기 싫어서인지 모르쇠를 자랑한다. 자기 자신은 허깨비였다고 실토하는 추태도 부린다. 나중에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 백성을 생각하였던 선각자를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 2017-10-1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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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려동물 이야기] 좋은 습관 만들어주기
- 반려동물이 예쁘고 귀여워서 무조건 받아주다 보면 잘못된 습관이 생겨 버릇 고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 가족으로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려동물의 기본 습성을 이해하고 좋은 습관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훈련 방법들에 대해 알아봤다. 자료 제공 반려동물이야기 반려견 훈련 방법 혼자 있지 않으려 할 때 개는 무리 동물의 본능을 지니고 있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외로움을 잘 느낀다. 하루에 30분만이라도 집중적으로 놀아줘야 한다. 자주 겁을 낼 때 천둥·번개나 비행기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듣고 겁내는 반려견들이 있다. 그런 행동을 하면 못 본 척하며 평소와 같이 대해야 한다. 매번 달래주면 고치기 힘든 습관이 된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 강아지에게는 평등개념이 없고 상하관계만 있다. 필요에 의해서 강아지를 잡고 있어야 한다면 그 상황이 끝난 다음에는 자유롭게 풀어준다. 놀랄 일이 생길 때 놀랄 때마다 리드 줄을 당기면 강아지가 더 긴장하게 되므로 편하게 풀어준다. 또한 가족이 당황하게 되면 강아지는 더 당황하기 때문에 침착하게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 사회성이 없을 때 생후 2~4개월까지는 사회화 시기다. 가능한 한 자주 외부 환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해줘야 사회성 좋은 강아지로 성장한다. 아이와 놀면서 스트레스 받을 때 특히 아이가 개구쟁이일 경우 인내심이 많은 강아지라 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단호하게 타이르고 동물도 아파한다는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서열 과시하며 으르렁거릴 때 자기 서열이 높다고 과시하는 행동이다. 초기에 반드시 억제시켜야 한다. 으르렁거리는 즉시 “안돼!”라고 단호히 말하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 반려묘 훈련 방법 식습관 고양이에게 식사를 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밥그릇에 사료를 한 번에 많이 담아놓고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하는 방법과 하루에 두 번 정도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의 사료를 주는 방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루에 한 번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줘야 한다는 것. 첫 번째 방법을 이용할 경우에는 밥그릇을 닦아줄 때 사료도 새로 바꿔줘야 한다. 한 번 꺼낸 사료는 쉽게 상하고, 고양이의 침 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 사료가 남았더라도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야행성 고양이 반려묘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늦은 밤 반려묘가 조용히 잠자는 것을 원할 것이다. 고양이의 야간 행동은 어릴 때 고치지 않으면 습관이 된다. 밤에 안 자면 실컷 놀아주면서 천천히 습관을 바꿔준다. 저녁에 밥을 먹이고 난 뒤 집중적으로 놀아주면 고단해서 아침까지 푹 잔다. 발톱 가는 버릇 발톱을 가는 것은 고양이의 본능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고양이도 작은 발로 발톱을 가는 흉내를 낼 정도다. 고양이의 발톱은 겹겹으로 되어 있다. 발톱을 갈면 오래된 낡은 발톱이 벗겨지고 날카로운 새 발톱이 나온다. 고양이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오래된 발톱을 벗겨내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톱을 갈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혹은 발바닥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묻혀 ‘마킹’을 한다. 마킹이란 고양이의 기본 습성 중 하나로 자기 구역 안에 자신의 냄새로 소위 도장을 찍는 행위다. 발톱을 갈 때는 발톱 전용 갈기(스크래처)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발을 가볍게 앞뒤로 움직이게 한 뒤 그곳이 발톱을 갈아도 되는 장소임을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카펫이나 가구 등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고양이가 발톱을 갈려고 하면, 가볍게 앞발을 누르며 “안돼!”라고 말해준다. 가르쳐준 대로 잘 배워서 행동하면 충분히 칭찬해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양이는 발톱을 갈아도 되는 곳과 안 되는 곳을 알게 된다. 반려견의 무는 습관 어린아이가 무엇이든 입에 넣는 것처럼, 강아지도 무엇이든 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특히 강아지의 경우 서열을 정하기 위해 무는 경우가 많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들이 자기들끼리 물고 뒹구는 것은 마치 만화 속 장면처럼 귀엽게만 보이지만 사실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과정. 또한 스트레스 해소나 발육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므로 어릴 때 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겨 계속해서 문다. 기본 훈련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방해하면 강아지는 무는 행동을 한다. “앉아”, “기다려” 등의 기본적인 교육을 통해 물면 안 되는 대상임을 알려준다. 무관심을 통해 가르치기 자거나 먹을 때 건드리면 짜증이 나는 것은 개들도 마찬가지. 매번 무는 습관을 보이면 천사처럼 자는 모습이 예뻐 보여도 침대 밑이나 발치에서 자도록 버릇을 들인다. 놀이를 통해 가르치기 강아지가 어릴 때부터 사람 손과 익숙해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만약 강아지가 손을 물 경우, 즉시 큰 소리로 “안돼!”라고 말해 무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도록 한다. 손이 아닌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는 것도 이런 습관화에 도움이 된다. 대형견은 사냥 욕구나 물고 싶은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기 어렵다. 단단한 재질의 개껌이나 장난감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부드러운 손길로 가르치기 강아지가 물고 있는 손을 억지로 빼려고 하면 흥분해서 더 세게 물 수 있다. 이럴 때는 반대쪽 손으로 목 안쪽을 눌러 입을 벌리게 해 손을 뺀다. 평소 한쪽 손으로 먹이를 주면서 다른 손으로 강아지를 어루만져주면 사람의 손길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 2017-10-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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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 술을 좋아하다 못해 직접 술을 빚다
-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 2017-10-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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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선(酒仙)들께 드리는 소수자의 변(辯)
-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못 먹습니다. 대체로 제 이러한 태도에 대한 반응은 그 까닭이 종교적인 데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채색됩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뜻밖에도 힘들게 순수를 유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짐작이 저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 제가 속한 종교와 그 교조와 그 종교의 신에 대한 격한 비난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저 때문에 특정한 종교의 2000년 역사와 문화가 한꺼번에 처참하게 모욕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느 편이든 그것이 제 ‘사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순전히 생리적인 탓이기 때문입니다. 맥주 한 잔이면 아슬아슬하게 괜찮습니다. 그런데 두 잔을 마셨다가 무척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 일입니다. 손발 끝이 자리자리하고 머리가 이상하게 흔들린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깨지듯 아픈 두통 때문에 잠이 깼습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는지요. 어쩌면 카프카의 에 나오는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의 아침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조금은 경멸의 분위기를 담고 꽤 살기 힘들었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몰골로 이제까지 살아남았느냐고 연민의 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하면서 어찌 감히 인생을 알겠다는 학문의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다니느냐고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린다면 불편한 것도 없지 않았고, 힘든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괴로운 것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희구를 넘어 마셔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해본 적이 있는데 몸이 견디지 못해 이를 감행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느낀 좌절감입니다. 까닭인즉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아득한 역사, 그것도 종교사를 살펴보면 술이 없는 의례는 없습니다. 그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술은 ‘종교적’입니다. 무릇 종교라는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삶 속에서 절감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 바로 그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문제를 무한성 속에서 풀려고 하는 꿈을 구체화한 것인데, 그 넘어섬의 가장 직접적인 것이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엑스터시(ecstasy, 脫自)라고 하죠. 일상에서는 겪지 못하는 황홀경의 경험이라고 서술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종교의 가르침은 대체로 초월적인 개념, 신성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어떤 ‘비일상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교에 따라 신(神)으로, 기(氣)로, 옴(Om)으로, 우주적인 원리 등으로 제각기 다르게 묘사됩니다. 하지만 결국 ‘신비스러운 힘’에 의한 것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힘의 간여를 기다리기 이전에 인간은 탈자적인 경험을 초래하는 일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술이 그것입니다. 그 술을 소마(soma)라고 일반화하여 일컫는데, 이는 고대 인도의 베다시대 의례에서 마시던 즙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급했는지, 아니면 신의 간여가 너무 더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탈자의 황홀경을 인간은 술을 통해 스스로 마련하면서 그것이 낳는 ‘더 이상 문제없음의 희열’을 미리 몸으로 경험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근거한다면 술 취함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의식을 하든 않든 가히 ‘종교적’ 경험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은 최근에는 이른바 ‘화학적 엑스터시(chemical ecstasy, 음주)’와 ‘종교적 엑스터시’가 과연 같을까 다를까 하는 격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이 주제가 뇌과학을 중심으로 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새로운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주제에 술을 먹어야, 술에 취해봐야겠다는 욕심을 감히 부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술을 먹지 못해 경험한 좌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못 마시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음주문화를 바라보는 ‘재미’도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술은 종교적이다’라는 맥락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술 취함’이 아니라 ‘술에서 깸’입니다. 깸은 황홀경의 파괴이고 문제없음에서 문제있음에로의 회귀임에 틀림없는데 ‘왜 취함에 머물지 않고 깸에로 되돌아오는가?’ 하는 멍청한 질문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른바 주선(酒仙)을 기리는 그 숱한 향기롭고 그윽한 운문(韻文)들이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내용인즉 거의 깸에 대한 아쉬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거기 머물면 어떻습니까? 아주 못된 작위적인 질문인 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취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아쉬움을 지닌 채 깸의 자리에 돌아와 여전히 취함에서의 경험, 곧 ‘자기를 벗어난 자기’의 정서를 지니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논리와 판단과 결정으로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감히 ‘보인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취함과 깸으로 점철하는 주체들 간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유기적인 관계가 구조화되어 그렇다고 하는 자의식조차 없을지 몰라도 저 같은 소수자의 눈에는 어쩐지 ‘취함의 풍토’에서 온갖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삶이 누구나 속한 삶의 틀 전체의 아귀를 뒤틀리게 하지는 않는지 염려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의 문화사를 훑어보면 소마를 마시는 일은 일반적으로 의례에서만 허용됩니다. 그런데 의례는 일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일상을 단절하고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어해야 할 것은 ‘사건을 일상화’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 자리에서는 자칫 ‘병든 인식’만이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황홀한 즐거움에 흠을 낼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은 술 마시는 일이 은근히 부럽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인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술 못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가지시면서 이런 발언도 한 번쯤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한 제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할 때 다음과 같은 후배의 ‘헌사(獻辭)’를 받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가 10여 년 전에 단란주점과 룸살롱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참으로 당황한 가운데 ‘거기에는 수업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말이 오고갔지만 우리 사이에 아직 수업료가 오간 적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정 선배에게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수업료도 필요 없다’고. 정 교수는 수업료를 내본 적이 없는 인문학자의 표본으로 남아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막걸리 몇 잔에 거나해지면 ‘사랑의 미로’를 그럴 수 없이 달콤하게 부르던 이 헌사를 읽어준 후배 교수는 벌써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작 수업료를 내고 단란주점이든 룸살롱이든 함께 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새삼 저를 아프게 합니다. 아무래도 소수자는 소수자일 수밖에 없어 소수자인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주선(酒仙)을 기리는 그 숱한 향기롭고 그윽한 운문(韻文)들이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내용인즉 거의 깸에 대한 아쉬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거기 머물면 어떻습니까?
- 2017-09-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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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된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
- ‘삼포세대’, ‘비혼’, ‘1인 가구’ 등의 유행어는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가 급속하게 진행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조차 시대와 트렌드에 뒤처진 박제된 구호로 전락한 지 오래다. 취업난과 치솟는 집값 등으로 초래된 경제적 어려움이 고조되고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꺼리는 ‘관태기(인간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의 사람들이 늘면서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요즘 TV 화면은 이 같은 현실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남녀 만남을 전면에 내세운 다양한 포맷의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젊은 남녀의 만남을 내세운 채널A의 , Mnet의 , E채널의 부터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된 중년의 짝 찾기를 다루는 KBS Drama의 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전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보다 진화된 채널A의 은 폭넓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9월 1일 막을 내린 . 남녀 각각 4명의 출연자가 한 달 동안 정해진 숙소에서 동거하며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선택한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퇴근 후나 휴일에 숙소에 머물며 관심이 가거나 호감을 느끼는 상대를 찾는다. 매일 상황과 감정 변화에 따라 전개되는 밀당과 탐색전으로 달라지는 남녀 만남의 판도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윤종신, 이상민 등 판정단은 연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출연자의 감정 변화의 원인을 분석하며 성격, 취향, 심리, 직업, 외모 등 출연자의 상황에 따른 만남을 전망한다. Mnet의 역시 과 기본 포맷이 비슷하다. 서로 ‘남사친(남자사람 친구)’, ‘여사친(여자사람 친구)’이라고 생각하는 네 쌍의 남녀들이 일상을 공유하며 만남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 카메라로 보여준다. 또한 은 최양락, 김태원 등 4명의 연예인 딸들이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만나는 과정을 보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코멘트하는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다. 은 황혼 로맨스 심폐소생 프로젝트를 표방한 프로그램으로 사별, 이혼 등으로 혼자된 연예인 어머니에게 데이트 상대를 찾아주는 과정을 담았다. , 를 비롯한 요즘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취업난과 경제적 고통, 인간관계 맺기의 어려움, 가족 해체 등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따른 남녀 만남 풍속도의 변화를 반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결혼은 아득하고 연애조차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서로 좋아하고 자주 연락하며 데이트는 하지만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는 ‘썸’과 사랑이 아닌 우정 관계인 이성 친구를 의미하는 ‘남사친’, ‘여사친’처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남녀관계를 흥미롭게 드러내 인기가 높다. 같은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는 오래됐다. 남녀의 만남만큼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기에 방송사들은 오래전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남녀 만남의 트렌드와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 외모, 성격, 성적 매력, 직업, 재산, 학력, 지위 등의 영향과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만남 과정과 행태를 공적 공간인 방송으로 드러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엿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그 시대의 남녀 만남 풍속도나 트렌드를 반영하거나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을까.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크게 일회성 이벤트로 보여주는 연예인 만남 프로그램과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일반인 만남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시청자와 대중의 관심을 이끈 것은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다. 산업 성장기 초입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서민이 많았고 가부장적 분위기가 엄존했고, 남녀의 공개적인 만남이 자유스럽지 않았던 1970년대에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등장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바로 1977년에 방송된 MBC의 다.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이 진행한 는 각각 3명의 남녀가 나와 대화를 나누며 데이트 상대를 찾는 TV 맞선 프로그램이었다. 공개적인 만남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는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관심은 22 대 1이라는 출연자 경쟁률에서도 잘 드러났다. 고도성장과 가부장적 분위기가 감소하면서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게 이뤄졌던 1980년대의 대표적인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1989년 MBC의 다. 1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이 출연해 만남 상대를 찾는 포맷이었다. 는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떠오른 농촌 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가족 해체가 본격화하며 남녀의 만남이 매우 자유스러웠던 1990년대에는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졌다. KBS, MBC, SBS 등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들은 한두 개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MBC의 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되며 높은 인기를 얻은 는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선택하는 일명 ‘사랑의 작대기’가 일치하는 남녀 커플이 데이트를 하는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미팅 문화를 보여준 는 7년 동안 1432쌍이 출연했고 이 중 47쌍의 커플이 탄생해 화제가 됐다. 학벌, 재산, 직업, 외모에 의한 서열화가 본격화하면서 결혼이 재산, 외모, 학벌 등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 성격을 띠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녀 만남 프로그램도 물화된 조건이 중시되는 풍속도를 보여줬다. KBS2의 , Mnet의 , JTBC의 등 진화된 형태의 다양한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와 만났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송된 SBS의 은 이전과 전혀 다른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논란도 컸다. 남녀 9~16명이 ‘애정촌’이라는 공간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짝을 찾는 과정을 리얼리티 쇼 방식으로 보여준 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개방적 자세, 외모, 재산, 직업 등 외형적 조건 중시 등 2000년대 남녀 만남의 현실을 반영했다. 여기에 관찰 기법, 사회자의 이야기 등 사실성과 일상성을 높이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 만남의 극단적 상품화라는 논란 속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은 한 여성 출연자가 촬영 도중 자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해 막을 내렸다. 이처럼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시대와 현실, 그리고 남녀 만남의 풍속도를 반영하고 선도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에게 남녀 만남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트렌드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은 남녀 만남을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으로 전락시키거나 극단적으로 상품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 2017-09-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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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 없이 ‘매혹당한 사람들’
- 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짝퉁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며 그 감독이 유명한 코폴라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정보만 믿고 기대에 차서 본 영화인데 보고 난 후 조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글쎄 칸이 보는 관점과 필자의 시각이 달라서일까? 소피아 코폴라가 칸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필자를 설득하는데 미흡했던 것은 분명하다. 영화 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있던 가톨릭 여자 기숙학교 판즈워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 한복판에 있는 학교는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버리고 교장과 여교사 그리고 다섯 명의 학생만 남아 있다. 나무들이 잘 관리된 너른 정원과 중세풍의 우아한 흰색 건물은 이곳이 전쟁 중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 적막한 공간에 한 남성이 침입한다. 학생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늘 하던 대로 버섯을 따러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군대를 이탈한 북군 병사 존(콜린 파렐)을 발견한다. 그는 교장 마사(니콜 키드먼)의 지휘로 안으로 옮겨지고, 적군이지만 기독교적 박애 정신으로 치료받는다. 물론 그 적군은 미남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여자로만 구성된 집단에서 당연히 주목받고 여자들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관계는 많은 사연을 지닌듯한 여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와 선천적인 팜므파탈의 끼를 지닌 조숙한 학생 알리시아(엘르 패닝) 사이에서 벌어진다. 알리시아는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에드위나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존의 고백에 흔들린다. 마사는 마사대로 존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존은 그들과 모두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상황을 즐긴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정원을 돌보며 이곳의 일원이 되어가던 존은 어느 날 애정행각이 발단되어 운명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에드위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던 존이 알리시아와 침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변명하려던 존을 밀치자 계단에서 구르며 정신을 잃는다. 상처가 터진 모습을 본 마사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썩어들어 간다며 그가 기절한 사이 존의 다리를 잘라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영화가 이 지점부터 스릴러로 변신한다. 깨어나 다리가 잘린 것을 알게 된 존은 괴물로 변하고 격분한 남자와 일곱 여자의 대결로 치닫는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에드위나는 미친 듯이 날뛰는 존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누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를 처음 발견했던 에이미가 독버섯을 따오고 마지막 만찬이 차려진다. 자, 여기까지 스토리는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의 초점이 불분명하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자들 중 여교사 에드위나만이 어느 정도 심리와 욕망이 드러나 있을 뿐 마사와 알리시아의 심리는 불확실하고 행동의 개연성도 부족한 채 그저 예쁨만 있다. 더구나 존은 내면이 없이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자아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 전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는 맥 빠진 스릴러가 되고 말았다. 원작이 그러한가 하여 관람 후 검색해 보니 원작과 많이 달라져 있고, 197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와도 관점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에 있던 흑인 하녀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도 1인칭 시점으로 처럼 등장인물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물의 깊이를 창조했던 원작과 달리 밋밋한 3인칭 시점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기에 바쁘다 보니 생긴 허점들이었다. 굳이 소피아 감독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아름다운 화면과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의 취향 때문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왔던 1971년 영화와 달리 소피아가 여성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이 영화가 정적인 흐름을 형성한 이유일 것이다. 다만 칸이 이런 여성적 정물화를 선호한다고 본다면 수상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끝까지 남는 의문은 마사가 존의 다리를 자른 것이 정말 의학적 필요에서일까? 질투심에서일까?
- 2017-09-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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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라이벌은 나훈아… 미안해요, 인생 3막도 이제 쫙 폈어요”
- “이제 제 라이벌은 나훈아씨예요. 한동안은 라이벌이 없었어요. 없는 동안에 저 혼자서 누나들을 많이 행복하게 해줬는데, 이번에 새 노래가 나온답니다(웃음).” 자신의 팬층이 가수 나훈아와 완벽하게 겹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수’ 이동준은 원래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1979년부터 태권도 국가대표였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톱클래스였다. 그러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연기자였다. 30년의 2막을 내리고 이제 그가 선택한 인생 3막의 삶은 가수다. 지금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이동준(60)을 만나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이제는 배우 이동준보다는 가수 이동준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늦깎이 가수지만(웃음). 큰 꿈을 꿔야 중간 정도라도 가지 않겠어요?” 나훈아를 라이벌로 삼은 ‘가수’ 이동준은 사실 2000년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수와 배우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동준씨는 배우인데…’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 이동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생 3막의 무대에 올랐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수하길 잘했어요.” 노래 ‘누나야’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일까? ‘늦깎이 가수’의 얼굴은 밝았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심정마저 느껴진다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인한 남성상의 대표적 이미지로 활약하던 그가 갑자기 가수를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수를 해야 하는 속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노래는 나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다 “우선 제 아들이 연기자니까 연기자 아버지로선 한발 물러나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젊었을 때는 주인공을 했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주인공을 못하는 것도 있고. 드라마 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됐구나’ 싶었죠.” 그는 또한 워낙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난 연기자였다. 그 자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부산, 미사리, 남양주 등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노래를 한 지 벌써 24년이 넘었다. ‘누나야’를 설운도가 곡을 써서 준 것도 그의 그러한 실력과 인맥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는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가수는 내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어요. 콘서트를 열어도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도 많고. 연기는 단체활동이라 개인활동을 하기에는 제한적인 데다 제작기간이 6개월이면 6개월 동안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있었죠. 그런데 노래를 하면 피드백이 빨리 와요. 관객과의 스킨십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가수 이동준으로 자리매김할 터 연기는 연기의 역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 이동준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수 이동준은 이동준의 원래 모습 그대로다. “가수들이 저를 보고는 저러다가 말겠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만둘 생각 안 했어요. 이제 연기는 접고 가수의 길만 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 내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잖아요? 노래를 하니 즐거워서 내 갈 길은 이거다 싶고, 연기할 때보다 가수로 전향해서 더 바빠요.” 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의 노래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성인 발라드 곡인 ‘미안해요’가 제 첫 번째 노래예요. ‘남행열차’를 만든 김진용씨가 작곡한 노래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미안해요’가 롱런을 위한 노래라면 설운도가 준 ‘누나야’는 ‘팍 뜰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줄게’ 해서 받은 것이죠. 또 김동찬 선생이 저에게 맞춰주신다고 해서 주신 곡이 ‘그날그날’이에요. 이 세 곡이 요즘 제가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들이죠. 부지런히 공연을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들이 들어오네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그는 요즘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한강 조망권을 갖춘 고급 빌리지 ‘카스텔로 씨마’가 그것이다. 단지는 A, B, C 3개동으로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의 12가구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관과 차별화된 공간·구조로 설계해 입주민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15분 걸리는 거리예요. 남한강 근교에 이런 풍광이 있는 곳은 없어요. 앞에 도로가 없어서 공기도 맑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작 중입니다.” 가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주택까지 짓는 중이라니,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시행착오 없게 하려고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와 관계된 후배, 친구, 선배들이 많아요. 다들 고맙잖아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이걸 지어서 자금이 모이면 베풀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내 장사를 하면서 베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이동준의 아들 이일민은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그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도 스물여덟 살이 돼서야 데뷔를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들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니까요.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죠.”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직이기에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되면 좋지만, 잘되기까지는 남모를 아픔과 시련이 많다. “나는 그나마 순탄하게 연예인 삶을 살아온 케이스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생계형이 있어요. 종합예술인으로서 이 세계가 좋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아들에게 바라는 건 정말 정통 연기자로서 살아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해병대 갔다 오고 해서 스펙이 훌륭하죠, 기다려줘야죠. 그런데 아들에게 미안한 게, 제가 더 바쁘잖아요. 아들은 나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해요.” 대나무 매듭짓듯이 살다 어쩌면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열어가고 있기에 갖게 된 여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이 있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에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일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치 대나무 매듭을 짓듯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영화에서 망했고, 인터넷에는 똥꼬쇼를 했네 뭐네 하지만 저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한 게 없어요. 망하기 전에는 돈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힘들어졌을 때도 돈에 쫓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한 달 준비해서 부산에서 일하며 바로 수익 창출해서 나머지 빚을 갚았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제는 돈이야 뭐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해요. 노래 부르면 되는데(웃음).” 남자답게, 정의롭게 산다 “스케줄이 비면 주로 골프를 해요. 지방에 지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만나서 공 치고 노래하고. 운동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선수로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그는 젊은 시절 11대 1로 상대했다는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년 전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보다 29세나 어린 선수와 상대해 이긴 적도 있다. “감량은 음식과 운동으로 해야지 먹을 거 다 먹으면 안 빠져요. 건강은 자신하기보다 지켜야 해요. 소금은 줄이고 야채나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탄수화물은 차단하고 단백질을 먹어주며 물을 많이 먹어야죠. 그러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초기당뇨’ 징후를 발견했어요. 당화혈색소 수치가 6.0% 이상 나온 뒤부터 집사람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부산, 대구, 수원, 순천 등 전국 공연을 마치고 10월 청주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전 이제 시작이에요. 3막이 시작됐으니까. 일단 내가 행복하고 상대가 행복해야죠.” 여백의 에너지가 넘치는 상남자 그에게 가수 이동준으로서의 미래를 물어봤다. “토털 엔터테이너 이동준. 사실 제가 악기를 조금씩이지만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알아요. 그리고 ‘이동준’ 하면 라이브라고 각인이 됐어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거짓말 좀 보태자면 50만 명 정도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어딘가에 들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던 털털한 이미지처럼, 천생 남자인 그는 남자답게, 정의롭게 살자는 마음가짐만큼은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에서 욕 안 하고 선배들이 인정해주니까 고맙죠. 그렇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죠.” 이동준의 인간미는 호쾌하다. 그의 인생 3막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호쾌한 인간미가 전해주는 여백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믿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 2017-09-1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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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덕(人德)
- ‘인덕’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는 복을 말한다. 필자는 다행히 인덕이 많은 편이다. 특히 혼자 사는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묘하게도 어떤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활동적이면서 몇 살 아래인 사람이 필자를 따른다. 일은 자기가 총무로 알아서 다 할 테니 리더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다. 그런 자리가 몇 개 되고 그런 사람이 몇 명 된다. 필자의 능력으로는 총무 역할은 못한다. 사람들과의 연락 관계며 궂은 일, 잔일을 다 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자원해서 총무 역할을 할 테니 리더를 맡아달라고 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되는 것이다. 사주에 보면, 주변에 사람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 하다. 동네 당구장에서 만난 금융계 출신의 지인은 한번은 주변 인물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골프도 치러 다니고 자주 어울리는데 갈수록 이 사람들을 계속 만나야 하는지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잘 난 사람들이므로 고집이 세고 남의 얘기를 듣지 않으며 말도 많다는 것이다. 요즘은 모이면 다들 손주 자랑 분위기에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늦장가를 가는 바람에 손주는커녕 자녀들 뒷바라지에도 바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손주 자랑은 관계없는 얘기이다. 오히려 듣기 싫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 사람은 필자처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만남이 더 부럽다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 잡혀 과거 얘기를 듣는 것도 신물 나고 재미도 없다는 것이다. 인덕을 유지하려면, 갖춰야 할 덕목이 많다. 우선 사람이 편안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몇 살 아래이므로 나이나 권위주의로 누르려고 하면 안 된다. 친구처럼 대하고 윗사람으로서 처신을 잘 해야 한다. 궂은일을 당하면 앞장서서 동참해야 한다. 한 사람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그 많던 주변 사람들이 정작 찾아오지 않는다며 원망하는 것이었다. 부모상을 당했는데 장지가 지방이라 서울에서 간 사람이 없었는데 혼자 갔더니 매우 고마워했다. 현재 지위에 만족하고 독식하려 하면 안 된다. 따르는 사람에게도 곧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다른 커뮤니티에 리더로 있는데 좋은 모임이라면 초대해서 같이 동참하는 것도 좋다. 또 중요한 것은 지갑을 여는 일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그리 큰돈이 들지 않는다. 당구 게임에서는 진 사람이 게임 비를 내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겼더라도 게임 비를 내주면 고마워한다. 잔정이 쌓여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 2017-09-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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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성 높고 감각적인 백팩 패션
- 필자는 평소 백팩을 메고 다닌다. 캐주얼 의상이든 정장이든 항상 백팩을 멘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패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팩이 아직 낯선 모양이다. 백팩을 애용하는 이유는 양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양손이 자유로우면 위기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원래는 댄스 하는 날 댄스용 신발과 의상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백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백팩은 큰 편이라 쇼핑 물건을 담을 때도 편리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재질이나 크기도 중요하다. 한때는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주로 메고 다녔으나 숄더백은 한쪽에 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007 백’이라 불리는 서류가방도 마찬가지다. 신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게다가 내용물을 넣을 공간이 부족하다. 서류가방에 수박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팩은 다르다. 내용물의 형태에 관계없이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필자의 백팩은 명품 가방들의 역사를 볼 때 원조 백팩에서 진화된 형태의 디자인이다.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고 윗부분을 끈으로 조인 뒤 뚜껑으로 덮게 되어 있다.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백팩의 디자인을 보면 99%가 지퍼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야 가방 안의 내용물이 빠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상단이 뚜껑으로 되어 있어도 백팩을 뒤집지 않는 한 중력의 작용으로 내용물이 빠져 나올 일은 없다. 지퍼로 되어 있는 가방은 열고 닫을 때 양손을 써야 한다. 한 손으로는 가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지퍼 고리를 잡고 당겨야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뚜껑으로 디자인된 백팩은 집어넣기도 빼기도 쉽다. 또한 옆쪽으로 지퍼가 달려 있어 아래쪽에 있는 내용물도 쉽게 꺼낼 수 있다. 필자가 메고 다니는 백팩의 단점은 인조 가죽이라 수명이 짧다는 데 있다. 인조 가죽은 늘어나기도 하고 습도 때문에 오래 쓰면 껍질이 벗겨진다. 발트 연안에 있는 라트비아로 여행을 갔을 때 같은 모양의 가죽 백팩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100달러를 불렀다. 그러나 가죽 소재가 너무 무거워 결국 사지 않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실용적이어야 한다. 몸통 바깥쪽으로 사이드포켓이 있어야 좋다. 한쪽에는 물병을 넣어 다니고 한쪽에는 삼단 우산을 넣고 다니면 편리하다. 생수병과 삼단 우산이 들어갈 만큼 깊이도 있어야 한다. 그 외의 잡동사니는 정면의 사이드포켓에 넣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면 곤란하다. 몸통에 온갖 내용물을 다 넣으면 찾기가 어렵다. 수납공간이 따로 없어 마구 뒤섞여버리는 것이다. 물건이 섞이지 않을까 우려되면 부직포로 된 별도의 작은 가방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필자의 백팩은 디자인 면에서는 명품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게 많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도 같은 백팩을 멘다. 어지간한 필수품은 백팩 안에 다 들어간다. 해외여행 때는 세면도구와 양말, 여벌의 옷가지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한번은 초봄에 서울 근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날씨가 추웠다. 눈도 왔다. 일행 중 추위를 유난히 타는 사람이 있어 우산도 꺼내주고 장갑도 꺼내줬다. 가볍고 부피도 크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바람막이도 꺼내줬다. 필자는 모자를 꺼내 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도 잡아주고 눈발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사람들은 백팩 안에 없는 게 없다며 놀라워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3kg 정도인데 더 무거울 경우 어깨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는 들었다.
- 2017-09-08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