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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듣는 얘기야!”
-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가 있다.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경우와 같다. 인간관계는 대화가 주요 수단이다. 상대방이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어떤 유머를 하면 개중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거 알고 있는 이야기야!” 말을 한 사람은 맥이 풀리고 만다. 필자는 스마트폰 카메라 사진 강의를 한다. 어느 분이 쉽게 사진 편집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래서 상대방이 알아주면 좋은 유용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듣지도 않은 채로 유사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자기도 할 줄 안다며 시큰둥해하는 눈치였다.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앞의 예와 같은 사례다. 요즘은 유머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총각이 인기 있는 신랑감이듯 일상 대화에서도 웃음을 주는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 유머 두서너 개는 외우고 있으면서 순발력 있게 쓸 수 있으면 좋다.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어 다니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유머를 잘 구사한다. 때로는 오래된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이용할 때도 있다. 어지간한 우스개는 거의 알고 있기 마련이어서 상대방은 재미없어한다. 지나간 유머를 사용하면 당연히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유머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큰둥하며 팔짱을 끼기 마련이다. 그것을 때때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노력이듯 삶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이 요구된다. 인생 2막을 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며 2차 성장을 하듯 대화의 소재도 새로움으로 충전시켜야 한다. 자신의 내부 저장소에 쌓인 경험과 지혜의 활용도 있어야 하지만, 새로움으로 채워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즐겨보는 코미디 프로그램 방송을 시청해두면 도움이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 자세도 필요하다. 자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기를 바라듯 다른 사람의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하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자기의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기 십상이다. 가끔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 듣는 얘기야, 재미있네!””라며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좋은 반응인 맞장구를 치는 일이고 영어 표현으로 “리액션”이다. 이야기한 상대방을 배려해서다. 대화를 잘하는 기법의 하나가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듣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더하면 금상첨화다. 어느 유명한 분을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만 하였다. 가끔 맞장구를 쳐 드린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참 대화를 잘하십니다.”라고 칭찬을 남겨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잘 듣는 것이 첫 번째의 대화기술이고 내용을 설사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시늉할 필요도 있다. 시니어에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 2017-08-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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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간의 지옥
- 문자가 왔다. “ 내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저녁 먹어. 다음에 좋은 데 데리고 갈게.” 뭐지? 그냥 무시했다. ‘잘못 왔다고 얘기를 해 줘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곤 한 사건이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남편과 안 좋게 집을 나선 날이었다. 그 날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도 그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며 생각이 자꾸만 겉돌았다. 다시는 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는 났지만 부부가 싸움이 오래가면 좋지 않다는 친정엄마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혼란스러웠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생각은 문득문득 자꾸 돌아가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상황도 모르면서 우선 화부터 냈으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오해에 대한 진실을 얘기하면 멋쩍어 하리라 싶었다. 메시지를 작성했다. 조금은 떨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문장을 만들어 날렸다. 화해의 의미로 문장을 날렸는데 답이 없었다. 좀 섭섭했지만 메시지를 날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인가를 시원하게 해결한 듯한 기분이 되어 나머지 시간에 몰두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분위기를 보니 얘기를 듣고 싶은 표정이 아니라 좀 황당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저녁을 말없이 먹은 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출근해서 회의 중인데 모르는 번호로 자꾸 전화가 울렸다. 계속 울리길래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누구세요? 어디에요?” “전화하신 분은 누구신지요?” “윤 아무개 부인되는 사람인데요.” “누군 신지 모르겠는데요.” 흥분한 여자는 따발총으로 나에게 가격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받을 줄 알았다. 언제부터 사귀었느냐, 무슨 관계냐, 잘 걸렸다.’ 영문을 모르는 필자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자신의 남편에게 요상한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걸 자기가 용하게 딱 잡았다는 것이다. 언제 그런 문자를 받았냐고 물으니 어제라는 것이었다. 답답한 필자는 길게 통화하기 어려우니 잠시 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어제 보낸 문자의 번호는 마지막 한 자가 틀려 있었다. 급하게 누르느라 오타가 난 것을 모르고 보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해요. 오늘 저녁에 왜 화났는지 다 얘기해 줄게요.” 이런 문자를 받은 그 여자의 남편은 당황하고 부인은 추궁하고 이틀 동안 지옥같은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당황해서 ‘미안하다. 잘 못 갔다’고 설명해도 여자는 믿으려하지 않았다. 남편의 전과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무가내였다. 내용을 들은 필자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오해 마시라 실수였다.’고 하니 비로소 잠잠해졌다. 그런 상황이 되자 남편은 신나서 해결했고 그걸로 우린 한 편이라며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이틀간의 지옥으로 쉽게 얻은 평화가 민망했다.
- 2017-08-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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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안화 감독의 영화
-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화와 공간: 홍콩’이라는 주제로 홍콩 영화 수작들을 상영했다. 상영작 중 두 편이 허안화 작품이었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허안화(쉬안화, 許鞍華)의 작품들은, 일상을 통해 인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여백과 깊이를 안겨준다.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서민의 삶을 그려내는 감독 중 허안화만큼 진실한 감독도 드물다. 허안화 작품 세 편을 차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여인 사십(女人, 四十) 주연: 소방방, 교굉 1999년에 국내에서 개봉된 허안화 감독의 (1997) 리뷰에서, 국내의 한 영화 평론가는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여성 감독 중의 일인”이라고 언급했다. 허안화의 작품은 수준 차가 심하고, 은 비슷한 주제의 걸작 멜로 (1996)을 이미 봐버린 우리의 눈높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범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주부 중심으로 그린 , 매염방의 연기로 길이 기억될 (2002)을 보면, 과대평가된 감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허안화 감독의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관객들의 가슴을 찡하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이런 면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구나.” “대사 한마디 않고 저런 감정을 표현해 내다니.” 여성 감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장면들이 많이 발견된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은 허안화의 이 같은 매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치매 노인을 둔 가정의 어려움, 부모와 자식, 자식을 거두며 직장생활까지 해야 하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애환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 그 허무까지 보여준 깊이 있는 작품이 이라면, 은 고령화 사회, 중년을 맞은 직장 여성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디테일하게 다룬 영화다.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거머쥔 의 수상 내역이 백 마디 칭찬보다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작품․감독․연기․ 촬영 등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필자는 특히 각본을 칭찬하고 싶다. 자상한 시어머니와 생활력 강한 큰며느리, 엄격한 시아버지와 그에게 쩔쩔매는 가족들,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 나 몰라라 하는 동서와 시누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소시민 남편, 여자 친구에게 채였다고 찔찔대는 아들. 마흔 살 생일을 맞은 며느리, 아내,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짐을 묘사하기 위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과 대사, 세세한 삶의 장면들에 감독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이처럼 디테일한 묘사는 직접 체험 또는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사실 소재는 너무 진부하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이렇게 평범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게 옳은 것일까 생각하게 할 정도다. 차라리 TV 드라마가 소화해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느 가정에서나 겪을 수 있는 진부한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어떤 색과 모양을 빚어내고 통찰력을 이끌어내는가는 대본을 쓰는 사람이나 감독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맏며느리를 도덕군자 같은 여인으로 묘사하길 즐기는 전근대적이며, 비현실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이 에는 없다. 자상한 시어머니에게는 마음을 열고, 못살게 구는 시아버지에게는 마지못해 공경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착하긴 하지만 가사 분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이나 아들에게는 투정도 부린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40대 가정주부가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잘 돌보는 것은 단지 맏며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 인간애, 연민 등에서 우러나는 보다 근본적인 행동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허안화 영화의 힘이다. 허안화의 다른 영화들을 평가절하한다 해도 과 두 편은 홍콩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40회 생일을 맞은 손 여사(소방방 蕭芳芳)에게 철없는 아들은 마른 거위를 사다 주고, 남편(나가영 羅家英)은 부모님도 오시니 재료를 아끼지 말고 요리하라고 주문한다. 큰며느리인 손 여사를 마땅찮게 여겨온 시아버지(교굉 喬宏)는 식구들이 식탁에 앉기도 전에 혼자 맛난 음식을 다 골라먹은 후 아내를 재촉해 휭 가버린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마누라가 일어나 밥할 생각도 안한다”며 큰며느리를 찾아온다. 큰며느리는 자상했던 시어머니의 죽음으로 망연자실해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시아버지는 아들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그토록 미워했던 큰며느리만은 알아보고 의지한다. 화장지를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의 업무부 주임인 손 여사는 가사노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남편, 철없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어린아이처럼 변한 덩치 큰 시아버지를 모시느라 고군분투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며 실랑이를 하는 첫 장면에서 손 여사의 생활력과 성격을 알아챌 수 있다. “아직도 고르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는 생선 장수. 살아 있는 생선이라 더 비싸게 받는 거라는 말에 몰래 생선을 때려죽인 후 죽은 생선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깍쟁이 주부. 다음에 먹을 요량으로 생선 가운데 토막을 냉장고에 보관해두려는 아내를 보고 남편은 전부 다 요리하라며 잔소리를 한다. 시어머니는 새우 요리를 해와 주방에서 큰며느리에게 먹이고, 선물도 잊지 않고 건네준다. 유별난 성격의 아들과 살며 직장생활에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는 큰며느리가 기특해서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시아버지는 식탁에 떡 버티고 앉아 배가 고프다며 젓가락을 두드리고,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줘야 한다며 위엄을 부린다. 초반의 몇 장면만으로도 가족의 성격, 큰며느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이후로도 계속 나온다. 손 여사 남편이 동생 부부를 만나 시아버지 모시는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동생 부부와 조카들은 스테이크를 시켜먹고 손 여사 남편은 볶음밥을 시킨다. 먹성 좋은 조카들이 볶음밥도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자 두 조카에게 기꺼이 밥을 나누어주는 손 여사 남편. 잘사는 동생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밥값을 형님에게 떠넘기고 일어난다. 가정부를 두고 사는 동서는 두 말썽꾸러기 아들 뒷바라지와 강아지 돌보기, 영화 관람, 파티 때문에 시아버지를 모실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운전면허시험장 감독관인 손 여사 남편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직장 동료들과 술집에 둘러앉아 자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인 이야기, 부모와 장모 모시는 어려움을 토로하며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면 젊은 손님들은 "도대체 몇 년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냐"고 야유를 퍼붓는다. 손 여사 남편은 자기 세대의 처지와 시대 변화를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받아들인다. 반대머리에다 안경을 쓴, 마르고 작은 체구의 손 여사 남편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당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일흔 살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손 여사는 “아버님은 저렇게 체격이 좋은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고 나무라며 파스를 발라준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중년 부부의 아름다운 한때를 정감 있게 표현한 장면이다. 손 여사 남편은 가끔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한다. 아내가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하자 “내게 시집 온 게 최대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맞받아친다. 그러나 “그건 다 옛날이야기”라는 아내에게 더 이상 한마디도 못하는 남편. 그는 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소동이 그치질 않자 “차라리 내가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심하고 착한 이 시대의 중년 가장, 남편, 아버지를 대표한다. 손 여사는 남편에 비해 사회적 욕구와 책임감이 강하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돌보라고 하자 “회사 다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라며 거절한다. 수십 년간 회사의 모든 업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신속하게 처리해온 손 여사는, 젊고 예쁜 여직원이 들어와 전산화를 구축하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나 컴퓨터 고장으로 회사 업무가 마비되었을 때 수많은 거래처와 주문량을 완벽하게 처리해온 솜씨를 발휘해 다시 사장의 신임을 얻는다. 바이어의 식성까지 기억해두었다가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예약해 회사 경비를 줄일 만큼 애정과 완벽성을 갖춘 프로 직업인이다. 손 여사는 택시 기사가 요구대로 운전하지 않자, 교통불편처리센터에 전화를 걸어 고발하려 한다. 작은 불의도 참아 넘기지 않는 손 여사의 시민 의식. 물건 값을 깎는 깍쟁이이긴 하지만 그 선은 어디까지나 자잘한 생활의 눈속임을 넘지 않는 정도다. 손 여사는 재치 있고 영민한 여성이다. 공군 장교였던 시아버지가 전쟁 시절을 떠올리며 낙하산 타기, 포로 족치기와 같은 전쟁놀이를 할 때 그녀는 시아버지와 똑같은 전쟁놀이로 시아버지를 안전하게 돌본다. 남편이나 아들은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지혜다. 할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부모님의 고생을 바라보는 대학생 아들의 심정, 즉 젊은이들의 시선도 감독은 지나치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요? 오래 살지 마세요. 모두 힘들잖아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들의 통찰은 여자 친구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며 징징대는 사랑 투정에 묻힌다. 대학생 아들에게 늙음은 아직 눈앞의 일이 아닌 것이다. 반면 손 여사 부부에게 노년은 머잖아 닥칠 일이다. “당신이 추하게 오래 살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거야”라고 남편이 말하자, 손 여사는 “당신이 추해지면 내가 죽여줄게요”라고 말한다. 노년의 두려움은 손 여사의 이모 부부를 통해서도 반복된다. 양로원에서 이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이모부는 이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질만 부린다. 이모는 위암에 걸려 먼저 죽게 되자 남편과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타이른다. “당신이 날 데려가야 하는데. 이제는 성질부리시면 안돼요.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나는 당신 부인 노릇 안 해요. 다시 부부가 되어야 한다면 그때는 당신이 부인 노릇 해요.” 이 짧은 장면은 우리 어머니 세대의 긴 인고의 세월을 대신 보여준다. 가혹하게 따지고 들면,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려진 손 여사와 이모는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우선으로 내세우는 손 여사의 동서와 시누이가 현대 여성에겐 더 와 닿는다. 그러나 신뢰와 연민이 결여된 이기주의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옳지 않다. 손 여사와 시어머니의 관계처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살펴줌으로써 그리운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고 바람직한 모습 아닐까. 시시콜콜 장면을 설명하듯 이야기해봤다. 볼 마음이 없어진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설명만으로는 감독의 영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옮기지 못한 장면이 더 많다. 특히 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그래도 살 만한 세상’임은 직접 영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Summer Snow’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내리는 눈꽃을 맞아보는 기쁨을 만끽하길 바란다.
- 2017-08-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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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구세대가 함께하는 노년 <심플 라이프(桃姐)>
-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1995), 매염방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 남긴 선물과 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허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는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허안화의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등을 받았고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만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 체하는 작품도 아니다. , , 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 역할을 맡아도 빠져들 만큼 늙은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수리기사로 오인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으로 나오는 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할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는 시리즈와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 (류더화 분)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예더셴 분)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와의 이심전심.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춰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 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제자리에 있는 가스레인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에서 기인했던 것일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는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로저에게 보여준다.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 등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조건 베풀기만 했던 타오지에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위였다. 즉 로저에게 타오지에라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줘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줬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서 살 집은 물론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해 그녀에게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 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분).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뒤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요양병원 스케치는 에서 여주인공 손 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는 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와 묘사의 연관이 많아 보이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생인 예더센은 (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웠고 각종 연기상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1992년 공리가 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예더한은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이야깃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 시리즈의 서극 감독, , 등의 제작자 시남생, ,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인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 2017-08-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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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미술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꿈입니다”
-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가인 엄정순(57)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화두였다. 보이는 것 이면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함. 엄 디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 그 밖의 세상에 있는 진실과 본질 등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이 ‘눈을 쓰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험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의 눈’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의 미술 작업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이 만나서 다르게 보는 눈 ‘Another Way of Seeing’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했어요.” 엄정순 디렉터가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시각장애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미술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눈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맹학교 미술 수업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맹학교로 찾아가 시각장애 학생들과 창의적인 융·복합 수업을 하는 것이다. 드로잉, 조소 등 미술 수업 외에도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사진 수업, 요리연구가와 함께하는 미각 수업, 조향사와 함께하는 후각 수업 등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미술대학에도 보내고,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 예술가 성장도 지원하고 있다. 미술 수업에서 작가 데뷔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미술 교육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와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공간인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는 복지 차원만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통해 서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시, 교육, 출판,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학습을 위한 점자촉각아트북도 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 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런 세계에서 너무 멀리 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소통을 위해 공동으로 쓰는 이미지를 배우고 즐기는 다양한 통로가 필요해요.” ‘우리들의 눈’ 내의 보르헤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샘플북을 제작해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미술 표현 중 시각은 작은 일부 ‘우리들의 눈’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시각장애학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는 엉뚱한 발상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미술’이란 단어에서 나왔어요. 미술과 그림, 이미지는 보는 것과 연결되는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시각장애인은 못 보니까 시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죠. 저는 미술, 즉 이미지의 시작은 상상력과 오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각은 작은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엄 디렉터에게 미술은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던 것. 여전히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술은 잠과 사랑처럼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 교육을 시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취감,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너를 표현해봐라’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줘라’ 하고 주문했을 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려워했고 제대로 못했어요. 미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동떨어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미술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또 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과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도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된다’고 하고 자신도 ‘못할 거야’라고 했던 무엇을 뛰어넘는 경험이 되었다. “저는 그들이 느낀 것을 일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말했던 ‘미술 수업은 인간으로 사는 품위를 알게 해주었다’는 고백으로 알 수 있었어요. 미술은 논리와 감성의 조화를 배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갖게 해줘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술의 의미를 시각장애인들의 경험을 통해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미술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작업을 하며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생겼어요. 예술가로 또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며 놀랄 때가 많아요. 일반 예술가들과 달리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적고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접하다 보니 보이는 대로 이해하는 비장애인들보다 형태와 표현 면에서 창의적인 작품이 많다. “저희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요. 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중 하나인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코끼리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변화를 몰고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의적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2009년 6월, 33명의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15명의 티칭 아티스트들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311.5km 첫 번째 코끼리 로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번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12년 7월에는 청주맹학교 학생 8명과 관계자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기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비유잖아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인간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한다’고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뜬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메타포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엄 디렉터는 이 메타포로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안 되는 거대한 무엇에 다가가는 상상력과 시각장애 학생들의 부족한 스케일 감각에 도전해보는 한편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창의적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했던 맹학교 학생들이 훌쩍 성숙해졌고 ‘우리들의 눈’ 활동도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2009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2010년 7월 TEDxSeoul에서 발표됐고 이 발표를 계기로 2013년 EBS 다큐멘터리 가 방송됐다(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TV부문 다큐상과 한국피디협회 PD상 수상). 이어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작문과 화법’에 실리기도 했다. 동물원, 동물보호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생겼고, 2015년 ‘코끼리 주름 펼치다 展’으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파주 헤이리) 순회 전시도 했다. 미술 교육과 함께 진행되는 코끼리투어 프로젝트는 12개 맹학교 순회 투어를 계획중이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 비영리 단체인 ‘우리들의 눈’은 소중한 가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덕에 운영되고 있다. 기업 후원을 중심으로 매월 소정의 금액을 후원하는 사람들, 매년 바자회를 열어 행사 수익금을 기부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20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어려움이 생겼다. 운영비 지원이 줄어들어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 중에 있다. ‘우리들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북촌에 갤러리를 열었는데 임대료 때문에 고민이다. “맹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술 교육 강사비, 재료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이 개안수술을 하거나 하면 봉사나 후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미술 교육은 제대로 짐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후원이 잘 안 되는 편이죠. 갤러리 장소 또는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선례가 드문, 시각장애인과 미술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활 정보를 주는 복지적 관점이 아닌 예술적 협업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어 오해도 많이 샀고 이해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장애인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척박한 물리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적 해법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런 시도에 즐겁게 사심 없이 동참하는 이들을 만날 때 엄청 신이 나죠.” ‘우리들의 눈’이 창설된 지 20년째인 2016년, 그간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이 자료집을 기점으로 20년간 펼쳐졌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대중들과 만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문화 예술이 소비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들의 눈’은 올해 두 권의 책 출판과 아트상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 2017-08-0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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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고도 이기는 법
- “남편을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딱 맞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남편에게 맞추는 게 더 쉬워요.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초청 신부님 강론이 있었다. 평일의 성당은 대부분 여자들로 채워졌고 열기가 가득했다. “신부님 말씀 듣고 용서하며 너그러워지려고 노력하는데 미사 끝나고 집에 가서 남편을 보면 열이 다시 뻗쳐 분심이 드는데 어찌해야 하나요?” “화내고 폭력적인 생각을 한 것이 걸려 고해성사까지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려놓으면 남편이 또 뒤집어놓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얼마 동안 우문현답이 심심치 않게 오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싸움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섭섭해서 짜증을 부려보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 때문에 소비한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이제는 필자가 어떨 때 가장 열 받는지를 알 것도 같다. 이를테면 진정성이 무시되거나 이해받지 못할 때, 필자 마음에 대한 곡해, 또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아닌 대접을 받게 될 때 화가 난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 앞에서도 분노가 일어난다.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는 마음을 쉽게 정리할 수 있다. 가족은 싫어도 죽을 때까지 만나야 하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는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격을 무시당하거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신의가 없는 사람을 만날 때 분노한다. 화가 일어나는 지점은 거의 비슷하다. 젊은 시절, 모멸감과 함께 인간이 너무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그때는 아무도 없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상처를 준 사람도 있었다. 요즘은 사람을 볼 때 한쪽 면만 보지 않는다. 선의와 악의를 함께 지니고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선의와 악의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쓰인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늘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늘 나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와 코드가 안 맞으면 불편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자주 생긴다. 또 상대의 마음을 자기 식대로 단정해버리며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주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성향이 나타난다. 갈등이 생기면 상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흥분하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되고 실수를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나면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좋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대결 구도로 가면 서로 상처만 입을 뿐이다. 아무리 나쁜 사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배려가 많은 사람이다. 고개를 끄떡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가슴에 와 닿을 때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고도 이기는 법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데 문제 삼으니 문제가 된다.” 조정래의 소설 에 나오는 구절이다. 깊이 공감한다.
- 2017-08-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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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노래 아닌, 대중을 위한 노래로 기억되길”
- ‘내 청춘아 어디로 갔니, 소리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건만, 그것이 인생이더라.’ 오승근(吳承根·66)의 새 앨범 수록곡 ‘청춘아 어디갔니’의 가사다. 노래 속 그는 청춘을 찾고 있지만, 현실 속 그는 “내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 말한다. 노래하는 지금이 청춘이고, 노래를 불러야 건강해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래와 함께 남고 싶다는 천생 가수 오승근. 사진을 찍을 때 “주름은 지우지 마라”며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그의 미소에는 특유의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아내(故 김자옥)가 떠난 뒤, 이제는 살림도 제법 하면서 싱글라이프를 톡톡히 즐기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껏 나온 앨범 표지 중에 표정과 의상이 가장 밝아요. 밝기도 하고 젊기도 하죠. 한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불렀잖아요. 이후에 다른 곡들도 발표했는데 사람들에게 어필이 안 됐어요. 그 노래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번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를 뛰어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표지 촬영한 것 중에 중후한 멋의 사진들도 있었는데 사진작가나 기획사에서는 젊게 나가는 게 좋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포토샵도 하고(웃음). 나야 그런 거 안 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긴 하죠. 타이틀곡으로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전체적인 흐름이 좋았어요. 리드미컬하고, 따라 부르기 쉽고. 나이 들고부터 곡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남이 어떻든 간에 나를 나타내려고 가수를 위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했거든요. 요즘은 반대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노래”라고 하고 불러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려고요. 예전에 ‘투에이스’, ‘금과은’ 시절에 불렀던 노래는 듣기는 좋아도 따라 부르긴 어려웠어요. 그래도 여전히 찾는 팬들이 있어 자주 불러드리곤 하죠. ‘떠나는 님아’, ‘빗속을 둘이서’ 등 청춘 시절 노래를 부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이전과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노래는 말이죠,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감정이 똑같아요. 오히려 노래를 부르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죠. 다만, 나이가 들어서 까랑까랑하던 높은음이 안 나오는데, 그럼 키를 낮추면 되니까. 동년배는 지금 목소리를 더 좋아하기도 해요. 청춘이라는 것도 꼭 20대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40대가 된 사람이 30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청춘이고, 60대가 50대 떠올리는 것도 다 청춘 아니겠어요? 노래는 그런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거죠. 타이틀곡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에서 ‘사랑해서 미안합니다’라는 가사는 어쩐지 애잔하더라고요. 아내를 향한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닐까 궁금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부르긴 해요.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사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데 왜 미안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안할 수도 있거든요. 연인이나 부부, 자식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운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고 하니까요. 아내를 위한 추모곡 계획은 없나요? 안 하려고 해요. 추모는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한다는 건데, 그러면 괴로움도 계속되는 거예요. 그 마음 아픈 게 얼마간은 있을 수 있지만 10년 20년 그렇게까지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노래로 만들어놓으면 계속 남잖아요. 그건 남들에게 자꾸 ‘가지고 있어라’ 강요하는 거밖에 안 돼요. 그 사람도 좋은 곳에 갔을 거고, 우리 애들하고 나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다들 그런 그리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아내의 부재가 마음이 쓰여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말을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똑같아요. 조금 달라진 거는 일하고 집에 갔을 때 같이 있었는데 이젠 혼자 있다는 것. 그 차이일 뿐이죠. 한동안은 같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잠시 여행 갔다고 말이죠. 전에 같이 있을 때도 몇 개월씩 여행을 다녀오곤 했으니까. 어디 갔구나, 곧 오겠지, 근데 어떻게 하지? 혼자 밥해야 하네? 그렇게 조금씩 실감했어요. 애절하게 ‘나 외로워’ 이건 아니고.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매일 그러지 않죠. 그러면 남은 사람이 힘들어져요. 살림 솜씨가 늘었겠어요. 요리도 잘하세요? 잘하죠. 나 설거지도 잘하고 반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요. 처음에는 (장가간) 아들하고 같이 살려고 했어요. 근데 아이들도 나도 편하게 살려면 분가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아내랑 함께 살던 집에서는 내가 못 지낼 것 같은 거예요. 거실이며 부엌이며 그 동네 어귀에도 아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데…. 거기 사는 건 내가 너무 괴롭다. 아빠가 나갈게. 그러고는 아내랑(봉안당) 가까운 판교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야말로 싱글라이프네요. 일상에서의 즐거움은 뭔가요? 내가 참 감사한 게 주변 친구들을 보면 다 실업자들이에요. 직장인들은 정년퇴직하고, 사업가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근데 나는 정년 없지, 새 노래도 만들 수 있지. 자기 관리만 잘하면 100세까지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또 애들 엄마 하늘에 가면서 일찌감치 상속 정리를 했어요. 그러니 내가 벌어서 나만 쓰면 되고, 쓰고 남으면 좋은 데 봉사하고, 눈치 보지 않고 쓰고 싶은 데 쓰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러지. 그 자체가 즐거움이죠. 자기 관리 비법이 따로 있나요? 노래를 하면 젊어져요. 엊그제도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러다 무대에서 섰는데 원래 부르기로 한 세 곡을 다하고 앙코르를 해서 총 다섯 곡을 불렀어요. 노래하면서 에너지를 채운 것 같아요. 노래가 약인 거죠. 지방 갈 때 아침엔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다녀오면 좋아져요. 매니저한테 나 오래 살길 바라면 일 많이 잡아줘야 한다고 해요(웃음). 약이 되는 피곤함이랄까? 일 외에 취미생활은요? 여행은 안 다니세요? 운동 삼아 골프도 치고, 여행도 가끔 가요. 사람을 골라서 만나지는 않지만, 여행 파트너는 마음이 맞아야 하거든요. 함께 다니던 가장 친한 친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50년 지기인 데다가 마음도 참 잘 맞았는데… 그러는 바람에 이제 누구랑 여행을 가야 하나 싶어요. 요즘은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도 많잖아요. 혼자가 좋다고들 하는데, 그건 정말 혼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자다가 어떻게 될까 싶어 무섭고 외로워요. 여행은 좋은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최고죠. 어떻게 보면 지금이 얽매일 것 없어 여행 가기 좋은 때이기도 해요. 얽매이는 건 가정인데, 아이들도 다 커서 자유로워요. 근데 오히려 편하니까 나태해지더라고요. 이게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채찍질도 하죠. 온전한 자유 안에서의 불안이 있잖아요. 고삐가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지금,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처럼 도전하고 싶은 일은 없나요? 나는 내 나이를 몰라요. 생각 안 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친구들에게 그래요. 너희들 돈 쓸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좋은 것도 한때이지 쓸 수 있을 때 쓰고, 재미있게 즐겨야죠. 지금처럼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게 바람이에요. 오히려 도전, 목표 이런 걸 정해놓으면 거기에 구애받으니….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네요. 원래 성격이 그랬나요? 아뇨. 예전에는 그렇게 했어도 구애를 받게 되죠. 옆에 사람(아내)이 있으니까. 신혼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왔는데, 살다 보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맞추는 게 좋더라고요. 아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었죠. 근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요즘 나를 말하자면 자유분방 그 자체? 여전히 아내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솔직히 불편하지는 않나요? 할 수밖에 없죠 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근데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는 말자 그래요. 그럼 또 생각나니까… 내가 힘들어져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물 흐르듯 지나가면서 하는 정도가 괜찮아요. 아내 김자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는 만나고 6개월 만에 결혼해서 서로를 다 알지는 못했어요. 살면서 느끼고, 알아갔죠. 다음 생에서도 그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시 결혼하고 싶은 그런 여자예요. 근데 나뿐만 아니라 참 많은 사람이 사랑했잖아요. 아내가 떠날 때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이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생각했죠. 내가 죽을 때도 그럴까 싶어요. 대중에게 오승근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아 이 사람! 그렇게 노래와 가수가 함께 떠오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노래와 함께 회자되고 남아 있다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노래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정체성이 노래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게 대중에게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 2017-07-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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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수님의 횡재
- 형수님은 형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롭게 혼자 사신다. 형님이 없으니 시댁과는 관계가 끝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해 필자의 동생까지 한 동네에 살다 보니 종종 같이 만나 어울린다. 그럴 때면 무릎이 불편해 어디 다니지도 못하는데 불러줘 고맙다고 한다. 그날은 공식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같이 음주 가무를 할 수 있는 날이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삼촌들이 불러내는 날은 아들도 어쩔 수 없다. 이날도 필자가 저녁식사나 대접하려고 형수님 스케줄을 문의했다. 근처에서 가구를 보고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자기가 횡재한 날이니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내막을 들어 보니 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외에 새로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아들이 새 아파트로 이사 가서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내용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란다. 새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전세나 월세로 세를 내어줄 수 있는데 자신이 거기 들어가 살면 전세금도 월세도 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살던 집 도배나 새로 하고 살겠다고 하자 아들이 도배는 물론 가구와 침대까지 완전 리모델링해주겠다고 했단다. 그러니 횡재한 것이란다. 리모델링은 방 하나씩 공사하며 살림살이를 옆에 잠깐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 창고를 빌려 살림을 모조리 빼내야 한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아들 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며느리가 요즘 트렌드는 집 안을 되도록 심플하게 해놓고 사는 것이라며 지금 쓰는 가구 등을 다 버리고 새로 장만하라고 했단다. 그동안 정든 멀쩡한 가구며 가전제품까지 몽땅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효심 깊은 조카가 부럽기도 했다. 형수님은 연금 수입도 있는데 아들이 다달이 용돈까지 넉넉히 줘서 부족함이 없지만 다리 때문에 외출하기가 어려워 마땅히 쓸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제 리모델링까지 하니 그 집에서 여생을 보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필자의 아들딸과 비교해서 생각해봤다. 둘 다 사회에 정착하느라 아직 힘겨워하는데 형수님 횡재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괜히 부담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조카처럼 필자에게 살림살이 새로 장만하라고 하면 오히려 마음의 짐이 될 것 같다. 현재 사는 집에서 여생을 마칠지는 모르겠으나 조건이 좋아지면 이사할 생각도 있다. 짐 정리는 그때 하면 된다.
- 2017-07-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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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의 ‘도원결의’, 사실일까?
-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는 사실상 라는 소설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는 황건적 난에 만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로 결의를 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은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이 결의를 지켜낸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오(吳)-촉(蜀) 동맹을 어기고 오나라가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장비는 연일 폭음을 하고 부하들을 두들겨 팼다. 급기야 장비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에 대노(大怒)한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대패한 후 백마성(白馬城)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의형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출발점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면 먼저 삼국시대 역사서인 정사(正史) 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에는 도원결의가 나올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을 보면, “선주(先主, 유비)는 관우, 장비와 잠을 잘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등 서로 아끼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관우, 장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선주 뒤에 시립해 하루 종일 있었으며, 선주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나온 ‘은약형제(恩若兄弟)’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나관중이 ‘도원결의’를 상상해낸 듯한데 실제 관계는 위에서 보듯 형제라기보다는 군신관계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또한 촉서 관우전의 다른 부분에는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통해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냐고 관우의 의중을 떠보자 관우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이 베푼 극진한 은혜를 잘 아오. 하지만 나는 유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고,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소.” 즉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고 말할 뿐, 의형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위서(魏書) 유엽전(劉曄傳)에도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관우가 오(吳)에 의해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曹丕)가 여러 신하들에게 과연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해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중(侍中)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으로는 군신, 은혜상으로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을 뿐 의형제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촉서(蜀書) 장비전(張飛傳)에도 “어릴 적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모셨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살 많아서 장비가 형 대접을 하였다”라는 표현만 나올 뿐, 형제관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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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기석 세일ENS 사장, "재미, 의미를 함께 나누면 인생도, 비즈니스도 즐거워집니다"
- 심기석 세일ENS 사장은 별명 ‘ 다이소 누님’과 ‘건달’로 유명하다. 2007년 최고경영자로 승진, 현재 장수경영자로 10년째 성가와 성과를 함께 올리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녀는 살구색 재킷에 인어 스타일의 샤방샤방한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63)의 별명은 ‘다이소 누님’이다. 등산을 갈 때면 자신의 155cm의 가냘픈 체구보다도 더 큰 집채만 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법이 없다. 1착으로 올라가 산마루에서 자리 펴놓고 일행들에게 바리바리 싸온 것을 풀어 먹인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도 그는 거의 이민 갈 태세의 큰 가방을 밀며 나타나기 일쑤다. 그 커다란 산타자루 아니 트렁크에선 구호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일, 홍삼액, 심지어는 플라스틱 소주 컵, 야외 주방도구 일습에서 이쑤시개까지…. 사랑을 퍼주고 나눠주는 선샤인, 아니 문샤인 리더십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녀노소가 늘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 사장이 전통적 의미의 퍼주고 헌신하는 100% 모성형 리더만은 아니다.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은 ‘건달’이다. 바로 건배사의 달인이란 뜻이다. 술자리에선 능숙하게 소맥을 제조하고, 멋진 모습으로 술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씩씩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선도하는 그녀는 일자리에선 쓴소리를 피해가지 않으며 군기를 세게 잡는다. 심 사장에 대한 조직 내외의 공통된 평가의 핵심은 양수겸장 리더십이다. 호탕한 형님과 따뜻한 누님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 같지는 않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성성을 내세우진 않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평이다. 심 사장의 양극단 별명 조합처럼 건달 누님 리더십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평균 타협이 아니다. 상황별로 각각의 장점을 살려 평형을 맞추는 게 심 사장 리더십의 특성이다. 아낌없이 베풀며 모범을 보이되, 돌직구 직언도 아끼지 않는 ‘어른의 품격’을 보여준다. 지인들은 심 사장을 가리켜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어른의 롤모델’이라고 입을 모은다. ‘건달 누님 리더십’은 그녀가 전문건설 설비업계 세일ENS에서 뼈가 굵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건설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 공조업이란 ‘여름엔 얼마나 시원한가, 겨울엔 얼마나 따뜻한가와 관련한 냉난방 배관설비를 건축물 내에 시공하는 사업’을 뜻한다. 거대한 건물 속의 모세혈관을 유지하는 일로서 세심한 손길과 관리가 필요하다. 초창기(1970년대 초반)에 책상 두 개와 직원 세 명밖에 없었던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이제 직원 100여 명, 일용근로자 2300명 내외의 튼실한 전문건설 설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수하던 중 전화나 받는 자리로 잠깐 취직한 회사에서 ‘불독 신세’로 사무실만 지킨다며 찔찔 울던 10대 소녀는 그 사이 60대 초반의 통 크고 손 큰 ‘건달 누님’이 됐다. 원래부터 성격이 담대하고 씩씩했나요? “아니에요. 환경 탓이 큽니다(하하).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겁니다. 건설업계가 남성 주도 업종이다 보니 여자 관리자는 고사하고 직원조차 드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이고 참석하면, 홍일점이란 이유만으로 눈에 띄는 겁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급과 상관없이 ‘한 말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다못해 자기소개 인사말이라도 하라고요. 이때 ‘준비 안 해 못 한다’고 하거나 ‘시킬 줄 몰랐다’고 수줍은 척 뒤로 빼면 ‘능력 부족’으로 못나 보이잖아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생각에 늘 공들여 준비했어요. 저는 여자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건배사 제대로 하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차례가 돌아오기보다 자원하라고 말해줍니다. 또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건배사와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필살기 건배사 두 가지를 준비해두라고 강조하지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실력은 노력하면 되지만 네트워킹, 사회적응 훈련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입에 척척, 귀에 쏙쏙 감기는 건배사가 허투루 즉흥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심 사장은 책, 신문을 읽다가도 응용할 것이 있으면 메모하고, 변형하고, 외우고 연습한다. 사자성어로 신조어 건배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히트 건배사는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하신다) 등이다. 술을 따르더라도 진기명기의 방법을 개발해 한편의 그럴듯한 퍼포먼스로 승화시킨다. 지방출장을 가든, 해외여행을 가든 사람들의 사는 모습, 먹는 모습, 마시는 모습은 관찰의 대상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아이디어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관찰과 사고, 연습의 조합에서 의미와 재미와 흥미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고교 졸업하고 1973년에 취직해 44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성공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 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비결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비용을 덜 들이고, 더 효과적으로,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원, 정확하게는 전화 받는 사환으로 온갖 궂은일을 할 땐데요. 세금계산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까운 거예요. 글자가 쓰인 부분만 자르고 봉투 뒷면을 사무실 내에서 메모지로 썼지요. 내 것이란 생각으로…. 구매 일을 할 땐 견적을 뽑아보고 어떻게 협상해야 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예전보다, 항상, 남보다 최고 2% 싸게 사는 작전과 목표를 세워 실천했습니다.” 구매 일을 하면서 사람 보는 법도 부가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곧 그만두게 될 사람, 독립할 사람, 독립해서 공장까지 지을 사람’ 등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 10명 중 7명은 심 사장의 예상대로 운이 풀렸다. 족집게 적중률의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란다. ‘내 일처럼’ 진실, 성실, 창조적으로 하는 사람이 독립해서 사업도 잘하더라는 게 나름의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회사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성장하셨는데요. 회사가 급성장하면 창업공신의 성장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중간관리자 시절, 선행학습을 충분히 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중간관리자는 말하자면 조직의 관절이에요.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학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각 입장을 고루 관찰하고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행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흔 넘어 영업을 하며 고객의 외부적 시각, 내부의 시각을 다 고려해보게 되더군요. 결국은 단계별로 자기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상을 차려줘도 밥을 못 챙겨먹습니다. 그릇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베풀고, 내 일처럼 하는 회사일,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헌신하다 소진하고 탈진돼 헌신짝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의 보상이나 인정을 갈구할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집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존적이 되고요. 내가 열심히 하고, 배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놓으면 활용당하거나 보상이 적다고 실망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결국은 자기 실력으로 쌓이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시간에, 삶에 충실하지 않고 대충 일하는 것이야말로 책임, 인생 유기이니까요. 성실히 일하면 단기적으로 손해 같지만, 장기적으론 투자입니다. 비유하면 농사와도 같습니다. 씨앗을 많이 뿌린다고 해서 모두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날 확률이 줄어듭니다. 일단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를 만나면 ‘잘나가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부서에 가서 몇 년만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나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다른 회사, 다른 부서, 어디에서든 잘할 수 있거든요.” 쓴소리 잘해서 ‘비즈니스계의 윤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들 ‘밥은 사고 말은 참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고들 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올바른 소리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지요. 그저 뒤에서 혀만 쯧쯧 차기보다는 뭇매를 맞더라도 옳은 말을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입니다.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행동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열 명에게 얘기해서 한 명이라도 받아들여 변화되고, 사회를 밝게 한다면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성공신화 뒤에 숨은 콤플렉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지금이야 예순을 넘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한창때엔 고루고루 콤플렉스투성이였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인물이 좋습니까, 키가 큽니까, 가방끈이 깁니까. 지금 이 나이니까 어느 정도 풍화됐지만 그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영업을 할 때는 ‘내가 팔등신 미모에 좋은 학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많이 아쉬웠지요. 또 내가 처음에는 술을 잘 못했거든요. ‘소주 두 병만 마실 수 있으면 업계 판도를 바꿨을 텐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콤플렉스, 결핍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수수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실력과 학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더 노력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건배사 개발도 술을 많이 못 먹어 술자리나 재미있게 만들자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그가 국내든, 국외든 자주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곳에서 컵 홀더 등 특이하고 스토리가 있는 소품들을 사와 지인, 고객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다. 골프를 치고 오면 같이 간 일행들의 골프 폼과 대화 등 후일담을 메일로 전하기도 한다. 심 사장에겐 마음을 나누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기쁨의 선순환이 사업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요, 재미다. 이야기가 인맥 쪽으로 좀 흐른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개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유지관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습니다. 위기 때의 태도가 신뢰의 증표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못나갈 때도 한결같이 잘해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늘 말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세일은 이익이 날 때뿐 아니라 밑지더라도 잘하자!’ 도장을 찍었으면 이유 불문 책임을 지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돈을 잃을망정 사람까지는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품질이든, 원가든 당초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지요. 평판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충실하고 튼실해져야 합니다. 내가 급급해하면 남을 챙기고 지켜줄 여유를 갖기 힘듭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다 똑같습니다.” 심 사장은 밑질 때의 마음 다스리기 법을 들려주었다. 가령 5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5억이 밑지면 일반적인 셈법으로 ‘10억을 손해봤다’며 억울해한다. 그는 신용을 지켰으니 3억만 밑진 것으로 나름의 가감승제법을 적용한단다. 당장의 손해가 앞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투자’라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는 내공 어린 고백이다. 경영자 등산모임 ‘시애라’의 회장도 맡고 계시지요. 최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열흘간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육체적 자신감은 물론이고 심리적 에너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웅장한 자연도 좋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든 옹색한 싱글 방에서 휑뎅그렁하게 있으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해서 세속의 먼지를 떨어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의외로 가정 경영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여성 경영자로서 애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십니까?’가 내조 점수 체크 질문이지요. 저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준답니다. 행복하고도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계란 프라이가 있어야 아침을 먹는데요. 한번은 출장을 갔는데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어요. 밖에서도 계란프라이를 먹도록 챙겨줄 정도예요(하하). 어차피 집안일, 회사일을 다 잘하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 사장 되고선 주방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선택해,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집에선 당신 부인이지만, 밖에선 남의 부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산 게 우리 시대, 여성 리더의 생존전략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가 더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고요. 우선 3년 후에 있을 회사 50주년 행사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제 장점을 살려 나만의 재미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요. 가깝고 편한 사람들끼리의 작은 공간, 행복살롱을 만들고 싶습니다.” 3시간여 격정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심기석 사장이 필자의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건달 누님 리더십의 직설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긴장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언이 쏟아졌다. “명함의 글자가 너무 작아요. 글자 배치도 조금 앞으로 와야겠군요.” 어른이 내리치는 죽비소리는 아프기보다는 시원한 법이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탓하는 것은 ‘발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발언 자격’의 문제가 아닐까. 어른의 품격은 바른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우러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7-25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