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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행복 찾기
- 사람이 사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이라고 단정지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필요가 있다. 행복을 느끼는 형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얻는 행복감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이루어낸 성취감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주로 전자의 행복을 찾았고 현대의 젊은 세대들은 후자의 행복을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행복을 찾아 인생 여행을 떠난다. 유치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도 그런 셈이다. 피아노를 배우고 발레를 배우는 것도 먼 훗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부모들 또한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모아 가르친다. 때로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게 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얻으려고도 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설득한다. “내가 좋다고 그러니? 너희들 잘되라고 하는 짓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녀의 성공으로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찾기 위한 속내가 숨어 있기도 하다. 실버 세대나 베이비붐 세대들은 자녀 교육에 온갖 힘을 쏟으며 희생을 감수했다. 자녀를 통해 간접적인 행복을 느끼는 데 만족했다. 그게 부모 세대 삶의 전부였고 행복해지는 우선순위였다. 자기에게서 찾는 행복이 아닌 자녀나 가족들의 즐거움에서 얻는 행복이었다. 철학자 플라톤도 행복을 이렇게 정의했다. “행복이란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생겨나는 즐거운 느낌이다.” 품안의 아이가 방긋거리며 웃는 모습을 바라볼 때 어머니는 더없이 행복을 느낀다. 정성껏 지은 밥을 맛있게 먹는 가족의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행복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키워온 아들딸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직장에 입사하면 그간의 고생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타인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행복에 자아실현으로 찾는 행복을 더하면 좋을 듯하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고 항변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수명뿐 아니라 건강수명도 늘어가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수명이 5시간씩 늘어난다고 한다. 이 많은 시간을 보람되고 즐겁게 보낼 필요가 있다. 50세 전후에 은퇴를 하고 늘어난 수명으로 노후의 시간이 많아졌다. 무엇을 더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95세 된 한 할아버지는 영어공부를 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버합창단 모집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도 자아실현으로 스스로 찾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다. 탑골공원 주변을 배회하며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현실의 어려움이 삶을 짓누를 때도 많다. 그러나 그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이 어떻게 볼까 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욕심을 부리고 스스로 입은 무거운 갑옷을 벗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현실을 인정하자. 적게 가졌으면 적은 대로 살아가자.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가족들 뒷바라지에 시간이 없어 속으로만 감춰뒀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시작해보자. 사진도 좋고 그림 그리기도 좋고 노래 부르기도 좋다. 친구들을 만나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는 것도 하나의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미뤄왔던 여행도 무작정 떠나보자. 국내이든 해외이든 장소에 관계없이 말이다. 자기로부터 찾는 행복,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 2017-06-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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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돌아온다> 주인공, 배우 김유석 ‘이 남자, 당신 인생에 스며들다’
-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 2017-06-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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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에도 퀄리티가 있다, 장수학자 박상철 교수 “하자, 주자, 배우자”
-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 2017-06-0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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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옥분, 사심 버리고 가치있는 것에 던지다
- 얘기하다 보니 3분 만에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부른 노래들의 영롱함을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주인공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꿈을 먹는 젊은이’ 등의 명곡들로 80년대 초중반을 장식한 포크 가수 남궁옥분이다. KBS가요대상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방송 MC, 광고 모델,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다고’ 하는 60을 맞이하며 여전히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와 인생관을 들어봤다. 글 김영순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인기 DJ 이종환이 1973년 종로2가에서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무교동에 자리한 세시봉의 뒤를 잇는 1970년대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수많은 포크 가수와 진행자 들을 배출했다. 그 쉘부르 출신의 남궁옥분은 포크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였다. 그 시절의 청년다운 건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60을 맞이하고 있는 남궁옥분이 기자 앞에 있었다. 첫 인상은 섬세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호탕하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 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 “윤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보겠지 하죠.” 남궁옥분은 108배를 17년 동안 했다. 정신적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회 사상과 108배를 봐도 알겠지만 그녀의 세계관에는 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적 영향력은 삶에 대한 달관적인 시선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새장 안에서 사는 새는 새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죠. 나도 내 영역을 가진 것이니까 행복한 거예요. 누가 나를 보면 답답해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는 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말과 함께 남궁옥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마련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외고집이 있다.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직책도 안 맡았었죠. 그러다가 최백호 오빠가 운영하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이사를 맡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런 일을 안 했지만, 이제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진 거죠.” 한국음악발전소는 최백호가 독립음악인들의 창작 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이다. 그녀가 한국음악발전소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최백호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최백호가 하는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공적인 선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람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인터뷰 중 그녀는 물질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계 일을 하게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겪어야 했고, 심지어 허술한 인간관계로 인해 아예 2년 동안 방송을 완전히 안 한 시기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키운 게 사람이라고 말할까. 오랜시간 다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는 산과 사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승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크는 것이죠. 제가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다져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지난 시간 동안 저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시켜주죠. 그래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줘요.”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확실히 있다고 믿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밟고 올라가서는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뀐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봤을 때 그들이 걷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싶으니까요.” 디딤돌의 마음가짐으로 고통을 깨닫고,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맥없이 절망에 빠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인간적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평등과 박애로 무장되어 있는 어떤 의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러한 그녀의 박애 정신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어요. 1922년에 태어나셔서 지주 집안도 아니고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의 가장 힘든 시기를 살다 가셨죠.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완전 보살이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하셨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엄청나게 해서는 어려운 동네에 갖다 주시곤 했죠.”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자임을 포기하고 엄마로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녀는 소위 엄마로서의 삶만을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남궁옥분을 설명하는 단어가 또 떠올랐다. 바로 ‘자유’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그녀가 말한 새장이란 표현은 그녀가 추구하는 법도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60이 되기를 기다렸다 남궁옥분은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긍정론은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행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신 그녀는 “안 행복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행복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느냐 적느냐의 문제라는 것.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가 아닌 행복의 높낮이를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삶을 관조하면서 보다 침착해진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선배를 만나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에 싫은 일에 굳이 시간을 갖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 시작된 일은 뭔가 트러블이 생겨요.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게 있죠.” 남궁옥분은 60 이전이 인연법에 의한 삶이었다면 60 이후부터는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모습이 보이는 출발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멋지게 살아온 것에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윈드서핑과 볼링 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김해 공연과 라디오 출연, 봉사활동 등등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전에 관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살려 책을 집필하려는 계획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보다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책과 전시, 공연을 합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60을 새로운 출발선이라고 정의한 사람답게 그녀의 머릿속은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년 전, 그러니까 40대부터는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사실 60에 의미를 두고 살아서 그런지 작년부터 뭔가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60만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니고(웃음). 너무 행복하게 맞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의 상황과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생기는 법인데 요즘이 그런 것 같아요.” 사유와 자기 성찰에 전념하다 여전히 무명인 가수 선후배들을 챙기는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의 이유를 “힘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0대부터 60까지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보람에 대해 “돈보다 멋진 기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족하는 삶, 그리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삶이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고 떠날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녀를 ‘명예롭게 퇴진하는구나’는 정도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하는 누군가가 ‘아무 소리 없이 떠났는데 이걸 해놨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삶. 딱 그 정도가 남궁옥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게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심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욕심보다는 크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원칙과 소신과 기준이 있는, 그리고 여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남궁옥분이 머지않아 60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단하게 다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의 밴드 에는 행복한 것과 안 행복한 것에 기준을 아는 팬들은 그늘을 내어주는 그녀의 수다로 미소가 번졌다.
- 2017-06-0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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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날 때 활용해보자
- 신접살림을 따로 차려 살던 맞벌이 아들 내외가 아기가 태어나자 혼자 사는 시어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손자 보는 일은 시어머니 몫이 되었다. 손주가 자라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눈판 사이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쳐 작은 멍울이 생겼다. 시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며느리가 퇴근하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쳤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순간 며느리의 손바닥이 시어머니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일에 시어머니는 어이없어하며 꾹 참았다. 화를 속으로 삭이고 있던 시어머니는 밤늦게 아들이 집에 오자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가 잘못 했네요!” 했다. 아들의 태도에 어머니는 울화통이 치밀고 말았다. 그 후 어머니는 자기 명의의 집을 아들 내외에게 알리지 않고 팔아버린 뒤 가출했다. 쉽게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실화다. 조직에서든 가족 간이든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이처럼 화가 나는 상황이 자주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늘어나는 시니어들은 화가 더 자주 날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위의 사례에 나오는 시어머니처럼 속으로 참고 견뎌야 할까? 며느리랑 똑같이 공격적으로 대해야 할까? 물론 며느리의 손찌검은 누가 봐도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 사람만의 화를 푸는 방식일 수도 있다. 대화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가에 따르면, 화가 났을 때 일반인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크게 3가지란다. 즉 소극적, 공격적, 중립적인 모습이다. 위의 사례에 나오는 시어머니의 태도는 화를 삭이는 소극적인 모습이고 며느리처럼 화를 참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태도는 공격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모습은 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화를 삭이는 동안의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고 화가 점점 더 치밀어 참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된다. 시어머니가 아들 내외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팔아버렸듯 말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달려든다.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소극적이지도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중립적인 태도가 바람직하다. 위의 사례에 나오는 며느리처럼 주먹이 먼저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로 표현을 하여 화를 풀고 상대를 이해시켜 좋은 관계를 이어감이 좋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권유한다. 중립적 대화 방법에는 “자기표현법(I-Message)”이 있다. 우리는 화가 났을 때 “참는 것이 좋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자기표현법은 감정을 꾹꾹 억누르지 말고 표현하라고 가르친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에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구멍을 뚫어 압력을 외부로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표현법이다. 그렇게 압력을 내보내듯이 표현을 하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가라앉는다. 우리는 대체로 화가 났을 때 상대를 주어로 표현한다. “당신은 왜 그 모양이요? 그래서 아이들이 따르겠어요?” 또는 "당신은 안 그래요?" 대화의 주어가 주로 상대방에 맞춰져 있다. ‘자기표현법’은 대화의 주어를 자신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현하게 되므로 중립적인 태도가 된다.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사용하는 말들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상대방을 주어로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보, 당신은 그 문제를 왜 나와 상의 없이 처리했어요?”를 “여보, 당신이 그 문제를 나와 상의 없이 처리하니 내가 섭섭합니다”로 주어를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특히 시니어들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될 수 있으면 건드리려고 하지 않고 참으려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나 갈등이 있을 때, 그 내용을 표출하면 불만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아도 불만의 90%는 해소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화가 났을 때 참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중립적인 태도로 불만을 표현하고 스트레스를 줄이자. 다만 이때 자기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브라보 라이프의 길이기도 하다.
- 2017-05-3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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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신이 편안해야 장수하지요” 삶의 고수 김세환, 변치 않는 삶에 대해 말하다
-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 2017-05-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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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관승 전 iMBC 대표 “‘내 일’이 없으면 내일(來日)이 없습니다”
-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손관승(58) 전 iMBC 대표를 만났다. 전 MBC 베를린 특파원, 전 iMBC 대표이사,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온 그는 여러 개의 호칭을 갖고 있다. 스스로 부여한 현업(業)은 스토리 노마드, 즉 이야기 유목민이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저술을 하는 삶이다. 전반전은 수치와 가치를 추구한 2치의 삶이었다면 후반전은 브런치, 맘대로 시간을 쓰고 배울 수 있는 사치, 그리고 세상의 흐름을 한발 먼저 호흡해야 하는 눈치, 3치의 삶이란다. 그의 3치의 삶에 1치를 덧붙이고 싶다. 재치! 고전의 인용과 고급 유머의 재치를 적재적소 활용하는 활용하는 그에게선 자유인의 향취가 물씬 풍겼다. 그는 거듭되는 사진 촬영 포즈 요청에도 ‘Sure’, ‘OK’를 연발하며 경쾌하게 응했다. 또 ‘흑모백모(黑毛白毛) 가리지 않고 아쉬운 중년의 머리숱이니 정수리 부분의 사진 촬영은 피해 달라’는 유머로 분위기를 경쾌하게 띄웠다. 퇴직 후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른바 전직의 ‘잉크’가 쏙 빠진 티가 역력했다. 메고 오신 백팩의 끈이 ‘나달나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닳았습니다. 바꾸지 않고 사용하시는 사연이 있으신지요. “독일 속담에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퇴직할 때 직원들이 선물해준 것입니다. ‘그간 고생했으니 새로운 설레는 이야기를 담아 가져와달라’는 당부를 담아서요.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제가 일생 뜨겁게 일하던 열정, 후배와 동료들이 준 사랑 등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긴 가보예요. 그 직원들의 바람과 기대를 생각하면 열심히 뛰게 되지요. 중요한 자리에도 가능한 한 이 가방을 메고 간답니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빈티’ 가방을 ‘빈티지’ 가방으로 보면서 감동받더군요. 이 백팩과 운동화는 스토리 노마드로서의 프로 의식과 현장 의식을 잊지 않겠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는 제 다짐이 담긴 인생 2막 필수 장비(?)입니다.” 퇴직 후 많은 사람이 조직의 후광, 즉 타이틀이 없어지는 상황에 멘붕이 되시더군요. 선생께선 어떠셨습니까. “타이틀 앞에 전(前), ex라는 말이 붙는 것보다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죽어라 하고 치달린 인생이 A4 용지 발령장 하나로 흔들리지요. 자기 인생을 찾으려면 명함의 타이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과거는 선용 하면 자산이지만, 매달려 있으면 부채입니다. ‘내가 누군데’ 하며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실패합니다. 허세를 빼야 실세가 됩니다(허허). ex를 잊어야, 인생 전반전에서 exit해야 인생 후반전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저는 예전 CEO를 할 때도 늘 엑시트 플랜이 없는 프로젝트는 결재 보류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직업에서 20년 이상 일했으면 나중에 어떻게 엑시트할지 상정해놓는 게 필요합니다.” 그는 “경영자는 수치(數値)가 나쁘면 수치(羞恥)를 당한다. 최고의 수치는 강판당하는 것, 그만두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경영자 시절 “매일 주가, 실적, 매출, 수익 등의 수치와 싸워야 했다”며 “나쁜 수치는 강판을 시키지만, 좋은 수치가 자리를 보호해주지는 않는 게 현실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그늘조차 위트를 담아 말하는 모습이 스토리 노마드다웠다. 조직에 있으면서 출구 전략을 미리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뭘 원하는지, 잘하는지 자신과 진정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세월과 나이가 저절로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퇴직을 속절없이 당하느냐, 의지를 갖고 맞이하느냐는 차이가 큽니다. 코앞의 일이 급하다고 미루다 보면 늦습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왔어도 자신과의 대화를 갖지 못한 사람은 퇴직 때 자괴감과 혼란을 느끼기 쉽습니다. 방향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다가 낭떠러지에서 갑자기 멈추면 더 위험하고 부상도 크게 당하지 않습니까. 준비 없이 갑자기 조직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그와 같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책 없는 ‘퇴직’과 대책을 생각해둔 퇴직은 많이 다릅니다.” 그는 “지금의 50플러스 세대는 물심양면에서 퇴직 이후가 가장 준비되지 않은, 낀 세대”라며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대충 해도 잘살았어 하며 퇴직 이후를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선생께선 2013년 퇴직 후 괴테의 궤적을 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셨지요. “과거에는 일에 미쳤지만, 이젠 한량이 되어 내가 미칠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심리스(seamless), 말 그대로 30년을 재봉틀 박음질하듯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에 완전 지쳤다고나 할까요. 번아웃(burn out)된 내 인생에 갭 이어(gap year), 안식년을 줘야겠다는 절박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혹자는 ‘먹고살 만한 게 있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어요. 대학 다니는 애들도 둘이나 있고요. 독일 여행 버킷리스트에 도전하느라 새 자리와 기회, 제안 등을 놓쳤지요. 하지만 리스크 없는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일, 내일’ 하며 미루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다 보면 ‘매일 책임질 일’은 계속 이어지고 평생 헤어나오질 못해요. 여행을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요.” 그의 여행 궤적은 이라는 책으로 나왔고, 마법처럼 제2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퇴직 후 일반적 설계는 크게 버킷리스트의 로망형, 생활형 구직으로 크게 나뉘는데요. 각각의 유형에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것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자기탐색입니다. 버킷리스트를 남, 책, 영화에서 나온 대로 따라 하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맞춤 프로그램을 세워야 합니다. 속절없이 시간보내기를 하면 후회합니다. 계획을 세웠으면 도전해야 합니다. 못할 이유를 찾으면 백 가지도 더 나오게 마련입니다. 또 조급한 구직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나는 이치입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오랫동안 일할 커리어 로드맵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프리랜서로 2막을 시작하신 지 이제 3년 차에 접어드셨지요. 전반전과 후반전의 룰은 무엇이 다릅니까. “인생 전반전은 남이 정해진 룰을 익히는 타율의 적응학습이라면, 후반전은 자기주도 학습이에요. 전반전이 패키지여행이라면 후반전은 자유여행이에요. 당연히 전술과 전략이 달라야 해요. 남이 보기 좋은 옷이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옷, 내게 맞는 신발을 고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남의 답안지 훔쳐보면서 인생을 허비할 시간이 이젠 없어요. 또 주인공에서 벗어나 조연, 심지어는 카메오 역할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관점을 전환하고 마인드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다 가끔 주인공 역할 맡게 되면 또 감사한 것이고요.” 인생 전반전은 앞서가기 위해 최고에 역점을 뒀더라도, 2막은 최적을 택해, 오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빛 좋은 개살구’보다 ‘뚝배기보다 장맛’의 내용, 즉 자기 적합성 여부를 따져야 멀리, 오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요즘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말하며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꼰대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꼰대는 과거에 갇혀 있고, 어른은 미래를 향해 있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봅니다. 꼰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며 장광설만 늘어놓고 실천은 따르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른은 매일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영광, 기억에 머물러 있으면 ‘옛날 타령’만 하게 됩니다.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을 해야 하는데 꼰대일수록 doing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입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배우려는 것, 그것이 조직 밖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이자 어른으로 존경받는 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직(職)과 업(業)은 어떻게 구분이 되나요. “직(職)은 조직에 있어야만 유지되는 직책, 직장이지요. 업은 남이 뺏을 수 없는 본인의 경쟁력, 경륜입니다. 퇴직 후의 대책 하면 흔히 경제적인 것과 이직을 위한 타이틀 등 유형자산만 생각합니다. 저는 업, 경험과 지혜의 노하우 등 무형자산을 준비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에도 종잣돈이 필요하듯, 인생 2막에 키워나갈 수 있는 종자 경험이 업입니다. 전문성, 네트워크, 경험 등의 총합인 내 일[業]이 없으면 내일(來日)은 없습니다.” 그는 “직은 동료들에 비해 뒤처졌지만 업의 힘을 베를린 특파원 시절에 길렀다”며 “혼자 지낸 고독력이 그 비결”이라고 털어놓았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술, 혼자 하는 여행. 웅덩이가 있어야 물이 고이는 것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이겨내야 창조적인 것들이 따라온다는 설명이다. 파워 스토리텔링을 강조하시는데요. 선생처럼 베를린 특파원, CEO, 교수 등 화려한 경력과 해외탐방의 이색 경험이 없는 분들도 가능합니까. “내 이야기야말로 삶의 무궁무진한 무형자산이에요. 각각 자기의 파워스토리는 다 갖게 마련이지요. 스토리텔링이란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극복 스토리예요. 백퍼센트 성공담과 실패담은 재미와 의미가 없어요. 시련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그것을 담아내는 반전에서 스토리의 파워가 나옵니다. 나를 스토리텔링할 줄 아는 게 경쟁력 있는 셀링포인트예요. 덕장, 지장보다 앞서는 게 운장이라고 하는데요. 그보다 상수가 담장(談將), 즉 스토리장이라고 농담하곤 합니다.” 그의 인생 2막을 열어준 비밀의 열쇠는 현직 시절 틈틈이 적어놓은 수첩이다. 이순신에게 남아 있던 ‘12척의 배’처럼 12권의 수첩이 그를 소생시켰다. 책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인생 2막의 시침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한다. 심지어는 영감을 얻은 식당의 영수증까지 노트에 꼼꼼히 붙여놓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보물창고가 된다. 이른바 ‘손빠’를 가지실 만큼 강연 및 저술로 프리랜서계에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는 자신의 저서 에서 “100세 시대에 코끼리에 붙어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1인 기업가’처럼 강인한 벼룩으로 성장할 준비를 하라”고 말한 바 있지요. 프리랜서가 명심해야 할 생존법은 무엇입니까. “자유직업, 프리랜서의 다리는 조직인의 다리와 달라야 합니다. 뭍사람의 다리와 뱃사람의 다리가 다른 것처럼요. 뭍사람은 배를 타면 작은 파도의 출렁거림에도 일을 못합니다. 반면 뱃사람은 균형감각을 잡아 폭풍우 속에서도 일을 하지요. 프리랜서는 뱃사람처럼 심리적으로 굳건한 다리를 가져야 합니다. 고체가 돼선 안 되고 액체가 돼 늘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하고요.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프리랜서력(力)을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상대를 설레게 할 정도의 섹시한 제안 능력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기 위해 생자료를 가공자료로 바꿔 기획안을 만들고, 제안하고, 그러다 역제안을 만들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전직을 내세워 고위관계자와 직통하려 드는 것. 필패하게 돼 있다는 조언이다. 둘째는 상시 준비력이다. 언제 어떤 요청이 들어오더라도 알파에 베타까지 덧붙여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준비력이다. 평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쉬는 날에도 일해야 하는 상시 근무체제와 같은 의미다. 셋째는 탄력 회복성이다. 숱하게 거절당하거나 좌절당할 일이 있어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회복하고 돌아봐 스스로를 성장시킬 계기로 삼는 능력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죠. 손 선생에게 현재 ‘성공’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마음 설레는 일을 갖는 것입니다. 쓰고 싶은 글거리가 줄줄이 머릿속을 채우고 맴돌 때의 희열, 그것 이상의 행복과 성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인터뷰 후 연거푸 제안서 미팅이 있다며 낡은 백팩, 아니 이야기 보따리를 메고 서둘러 일어섰다. 파란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5-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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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인생, 특별하게 찍는 김경수 사진작가
- 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 2017-05-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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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것과 정리하는 것
- 6개월 전에 결심한대로 이번 5월 말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 그동안 임기 연장에 대한 여러 유혹이 있었다. 일을 멈추는데 대해 불안 해 하는 아내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무엇보다도 35년이 넘도록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던 패턴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을 많이 했다. 떠나기로 결심하고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고심했다. 결론은 60 이후의 삶을 좀 더 느리게 살자는 것.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삶처럼 앞만 보고 뛰면서 살지 말고 옆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면서 느리게 걷듯 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느리게 걷듯 사는 것...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떠나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그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직원들과 정리해야한다. 업무는 워낙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정리가 필요 없다. 업무와 관련하여 당부하는 것조차도 사족이 될 듯싶다. 다만 감정 정리가 필요하다. 회사 전체에서 필자의 나이가 제일 많다. 신입사원들의 이력서에서 부모 나이를 보면 필자보다 어린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어린 직원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이 든 직장 상사로서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 주었다. 우리가 살면서 ‘미리 준비 했더라면’이나 ‘미리 알았더라면’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이 필자와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을 한 가지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관계를 맺었던 회사관계자들과의 정리도 필요하다. 필자가 떠나더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직원들과 외부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인계해 주어야한다. 그 회사들과 협업하여 진행할 향후 업무도 많고 콜라보 행사도 있어서 지속가능한 관계가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가 자산이 되듯이 좋은 협력회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회사의 자산이 된다. 오랜 세월 겪은 후에 진정한 친구가 생기듯 좋은 협력회사도 하루아침에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책 욕심이 많다. 필기구 욕심도 많다. 특히 손에 잘 잡히고 써지는 느낌이 좋은 필기구는 참지 못하고 구입한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보니 건축 책보다 시집이나 인문학, 자기 계발서 등이 더 많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시니어’ 관련 책들이다. 그동안 저자 강연을 찾아다니면서 모아둔 책도 많다. 각종 건축 프로젝트의 서류를 모아 둔 파일도 엄청 많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서류 중에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어서 그림파일로 저장하고 나머지는 파쇄 해 버린다. 책은 일부 주변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나머지는 그냥 서가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필기구는 전부 가져간다. 그동안 전시회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종 소품과 도자기, 액세서리 등이 제법 많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내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더 감사한 것은 여러 직원들이 자기들의 애장품을 바자회에 기증해 주어서 바자회가 한층 풍성해 졌다는 것이다. 수입금은 필자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필자는 짐을 정리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기부에 동참하니 일석이조의 좋은 행사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중에는 아쉽게 떠난 사람도 많았고 떠나는 날 얼굴을 못 본 사람도 많다. 가장 적당한 때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어쩌면 떠날 때 뒷 모습이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책상 옆에 붙여놓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읽어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 2017-05-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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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배우는 노년의 지혜 2
- 할머니가 주재하신 식사 모임 감독; 조지 틸만 주니어 주연; 바네사 윌리엄스, 이르마 피 홀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15분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영화로 가 빠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심점이 된 삼대에 걸친 대가족 이야기.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가정의 평안을 유지시킨다는 할머니의 교훈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딸들은 직업과 사랑, 자아실현을 위해 고분군투하고 손자에 의해 가정의 전통이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여성이 맡아왔던 화해, 안정의 역할을 손녀가 아닌 손자에게 맡겼음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성장해가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 죽 나열된 후 소년 아마드(브랜드 하몬드)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할머니 조(이르마 P. 홀)는 미시시피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온 후 도박사였던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리자 홀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온 가족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할머니가 40년째 주재해온 일요일 저녁식사 모임은 세 딸과 그들의 남편, 아이들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가문의 전통이다. 할머니는 여자가 참고 개척해나가면 집안은 잘 유지되며 인스턴트 대신 손수 만든 음식이 인간의 영혼을 살찌운다고 설교한다. 장녀 테리(바네사 윌리암스)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이며 남편 마일즈(마이클 비치) 역시 변호사여서 이들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다. 테리는 성취욕과 자기주장이 강하며 변호사 일에 만족하고 있는 데 반해, 마일즈는 변호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미로 즐겨온 음악가로 전업하고 싶어 한다. 아기가 없는 이들 가정은 이래저래 충돌이 잦다. 차녀 맥신(비비카 A. 폭스)은 전업주부로 이해심 많고 자상하며 노동자 계층인 남편 케니(제프리 D. 샘스)도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가장이다. 맥신 부부는 아마드 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고, 맥신이 또 임신한 상태. 이들 부부의 문제라면 케니가 테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테리는 맥신에게 시비를 걸어 가끔 다툰다. 미용사인 막내 딸 버드(니아 롱)는 램(메키 파이퍼)과 사랑에 빠져 임신부터 했는데, 램이 전과자여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다. 버드는 옛 애인에게 도움을 청해 램을 취직시키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램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며 행패를 부린다. 램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장녀 테리는 깡패 삼촌에게 램을 두들겨 패달라고 부탁하고, 램은 총으로 맞서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 때문에 테리와 버드는 으르렁거리게 된다. 할머니의 가치관은 시대 상황 등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것이고, 음식을 통한 영혼 고양에 대한 설교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세 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감독은 차녀 맥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아마드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가치관 잇기를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어서, 일견 시대착오적이며 안일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맥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여성만의 인내 운운하는 선이라기보다 보편적 선, 중용 정신, 전통 존중 등이므로 편협하게 볼 것이 아니다. 각박한 현대사회, 가족 이기주의, 흑인 사회의 모순을 염두에 둔 인물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끌리는 여성상은 장녀 테리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묘사는 성취욕 강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그려지는 습성이 있어, 여성의 성취욕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를 드러냈다.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격과 일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여성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여성들에 대해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나 구현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 등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돈 문제에 댛새서는 테리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이 테리의 이 같은 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테리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이들이 “돈이면 다냐”라는 식으로 대드는 것은 경제력 없는 사람들의 비틀린 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늘 머리를 써야 하고 시간에 쫓기는 테리는 맥신처럼 집안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 대신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내놓는 것이다. 돈에 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는 테리의 남편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테리의 남편은 성공과 돈을 위해 뛰는 테리를 인간미 없는 아내로 본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망을 잘 이해해주는 테리의 사촌 훼이스(지나 라베라)와 관계를 맺는다. 이모할머니의 딸인 훼이스는 성인 비디오 배우로 집안의 골칫덩어리인데, 갑자기 나타나 온 가족을 불안하게 한다.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반대를 하는 테리의 현실적인 태도와 즉흥적으로 아무 일이나 저지르는 훼이스의 유혹.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와 인간관계, 그리고 흑인 문제까지 얹어 아기자기하게 묘사하는 는 마지막까지 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째 방구석에 들어앉아 TV만 보던 할머니의 남동생 피트로 인해 찾게 된 돈이 이 가정의 분열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혼을 살찌울 음식도 돈이 있어 가능한 것 아닌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영화 제목 는 ‘영혼의 음식’이라는 직역보다는 미국 남부지방의 아프로 아메리칸의 전통 음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1960년대 중반부터 ‘soul’은 아프로 아메리칸 문화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soul music’이 대표적이다. 에는 보이즈 투 맨의 ‘A Song for Mama’를 비롯해 ‘소울’ 가득 담긴 노래들, 재료의 풍미를 살린 푸짐한 흑인 가정 음식 등 들을 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 2017-05-11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