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더는 책을 모아 애지중지 보관하지 않는다. 책의 편리한 이용을 위하여 디지털화하였다. 책은 기증하여 후세대에 공헌하기도 한다.
◇이사 때마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책
젊은 시절 지금처럼 이삿짐센터가 있지도 않았고, 실어 나를 짐도 많지 않았다. 휴일을 잡아 친구끼리 품앗이 이사가 당시의 풍속이었다. 가까운 곳은 손수레로, 먼 곳은 삼륜차에 짐과 사람
테레사 수녀의 통신에 따르면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덧없고 허무한 게 삶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렇지 않던가? 부평초처럼 떠돌다 허둥지둥 저승에 입문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저 따개비처럼 견고하게 들러붙은 타성의 노예로 간신히 살다가 파장을 보기 쉽다. 어이하나? 저마다 나름의 대책과 궁리가 있을 터인데, 백발의 사진가 이종원씨(72
도종환(都鍾煥·62)의 는 그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깊은 산 속 황토 집에 머물며 쓴 산문집이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으로 불렸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그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고, 그를 향한 몇몇 대중의 눈길도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들국화를 좋아하
필자 집 작은방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의 아지트이다.
필자는 결혼 후 시댁에서 살다가 아이가 4세 되던 해 분가했다. 서울 장충동 시댁이 저택 같은 큰 집이었지만 독립해서 남편과 아들과 셋이서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서울 변두리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에 망설임 없이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이사했었다.
시어른 참견 없이 필자가 주체가 되어 가정
칡은 시골 아이들의 주전부리였습니다. 동네 친구들 하고 삽과 괭이를 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칡넝쿨 중 크고 실한 놈을 골라 괭이로 그 주위를 파들어 갑니다. 옆에서 친구들이 칡넝쿨을 잡아 당겨주면 파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낮은 산이어서 큰 칡은 없고 아이들 팔뚝 굵기 정도입니다. 톱으로 5~10cm정도씩 잘라서 입으로 겉껍질을 찢어서 뱉어 버리고 속에
책을 3~4백 권을 지하실 네 벽 가득하게 정리해서 간직했었다. 네 식구가 서로 필요해서 읽거나 사들였던 책들일 것이었다. 어느 해 여름에 비가 엄청나게 오면서 압구정 우리 집 지하실에 물이 차면서 1층도... 수해를 입은 것이다. 물이 빠지면서 이리저리 엉망으로 물 먹은 책 표지들이 부풀어 올라온 것, 다 찢겨져 나간 것들에 넋을 잃고 물에 젖은 책들과
이 방과 처음 만나 건 7년 전이 2010년.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머니가 혼자 있는 집에 다녀가는 기분보다는 적적함을 나누며 살아가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에, 여러 번 이 얘기 저 얘기 나눈 뒤에 쉽지는 않겠지만 이해해가며 살아보자는 의견일치를 보게 봤다. 어느 누구도 주위에서 잘 하는 일이라고 칭찬이나 격려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옛날 어렸을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 ‘안정 나씨’ 종중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미라 4기가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안정 나씨’ 묘에서 출토된 미라 4기는 나신걸(1461~1524)과 부인 신창 맹씨(15세기 말~16세기 초), 그리고 나부와 부인, 용인 이씨가 각각 합장된 부부의 미라다. 이때, 무덤 안에 있던 조선시대 복식 150여점과 다
꼭 필요하지만 혐오시설이나 인식이 좋지 않은 단체가 우리 이웃에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지역 이기주의로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시설이나 쓰레기 소각장, 하수 처리장, 핵 폐기물처리장, 화장장 등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있어야 하지만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 (not in my backyard)' 를 뜻하는 님비현상을 다들 아실 것이다.
언젠가 필자는
참으로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힘들었는데 정말 딱 하루 사이에 날씨가 변했다.
잠자리에서 여느 때와 같이 얇은 잠옷에 얇은 홑이불을 덮으려던 필자는 선뜻한 기온에 그만 장롱을 열고 두툼한 이불을 꺼냈고 목까지 끌어 올렸다.
정말 기온 변화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오늘은 일요일 압구정동 광림 아트홀에서 마술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