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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마지막 말 유언, 작성 전 알아야 할 것들
- 1998년 개봉한 영화 ‘편지’는 죽음을 앞둔 주인공 환유(박신양 분)가 연인 정인(최진실 분)에게 남길 유언을 녹화하는 장면으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영상으로 유언을 남기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죽음준비교육이나 죽음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유언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보급까지 더해지면서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유언을 남기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필요 이상으로 엄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형식은 갖춰야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유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유언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유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고인이 뜻한 바대로 사후에 여러 가지 조치들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적 효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법 제1060조에서는 유언의 방식을 5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자필증서와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이 그것이다. 유언의 방식이 엄격하게 정해진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해 법적 분쟁이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법으로 정해진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되더라도 무효가 된다. 스마트폰 녹화 유언 효과 있을까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고인이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뜻을 남겨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민법 제1067조를 보면 “녹음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그 성명과 연월일을 구술하고 이에 참여한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그 성명을 구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규정 요건을 따라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즉, 녹화 현장에 그 장면을 지켜보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 또 유언자의 이름과 날짜를 명확하게 언급해야 한다. 이 조건들 중 하나라도 갖추지 않으면 법적 효력은 사라진다.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2005년 A 씨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본인의 모든 재산을 아들 B에게 물려준다. 사후 자녀 간에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이것을 남긴다”는 내용으로 자필 유언장을 작성했다가 주소를 적어야 하는 부분에 ‘암사동에서’라고 기재했다. 결국 다른 자식이 이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재판이 이뤄졌고, 대법원은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므로 무효’라 판단했다. 또 내용상으로도 법적 유언으로 인정하는 사항은 별개로 정의된다. 김재철 법률사무소의 김재철 변호사는 “아버지가 떠난 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며 가업에 힘쓰라와 같은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마지막 당부는 유훈으로서의 성격에 지나지 않고 민법상의 유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재단설립, 친생부인, 인지, 후견인 지정, 친족회원지정, 상속재산 분활 방법의 지정 및 위탁, 유증, 신탁에 대한 내용만 법률이 인정하는 유언사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법조인들은 절차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애써 남긴 유언이나 유서가 되레 법정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을 할 것을 권한다.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은 공증인이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인데, 전문가인 공증인이 하므로 유언의 효력에 관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낮다. 공증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변호사나 법무가는 해당되지 않는다. 법조인으로 10년간 근무경력을 갖춰 임명된 임명공증인이나 법무법인의 인가공증인을 뜻한다. 이들을 통해 유언장을 작성하게 되면 비용은 약 300만 원 선. 상속분쟁으로 인한 소송으로 발생하는 비용과 무형의 대가를 생각하면 비싼 비용은 아니라는 것이 법조인들의 설명이다. 우리 사회에서 유언을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는 엄숙주의적 시각이다. 법적 효력을 떠나 죽음을 앞둔 고인의 마지막 말을 남기는 과정인 만큼 신중히 작성되어야 하고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있었다. 유언에 대한 엄숙주의 옅어져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가 바뀌어 유언을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창동 노인복지관 박미연 관장은 죽음준비교육과정 중 하나인 유언 교육이 시니어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박 관장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이미 이뤄진 시니어를 대해보면 유언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많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나 당부를 남기도록 권하고 있다”며 “유언이 재산상속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하고 매년 쓰겠다는 이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유사하게 유언을 새로운 삶의 계기로 삼는 사회 인사들도 있다. 이투데이 길정우 총괄대표는 최근 모교 동창회보 기고를 통해 “연말에 쓰는 일기처럼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를 담아 매년 유서를 작성한다”며 “이렇게 누적된 유서는 훗날 나의 생각과 회한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나만의 기록물이 된다”고 말했다.
- 2018-03-1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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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원의 뇌와 인간의 뇌
- 전에 어떤 여성 개그맨이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다. 그땐 그저 우스갯소리로 여겨지던 이 말이 요즘 와서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전혀 흔들리지 않을 듯이 공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이윤택, 고은으로 시작한 미투 태풍이 김기덕, 오달수, 조민기, 조재현 등 영화계를 거쳐 어느덧 정치 거물 안희정까지 다다랐다. 지금 알려진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이 받는 충격이 이미 엄청나게 큰 상태지만, 중요한 건 이 바람이 아직 시작인지 끝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불길한 예언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바람에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변명은커녕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바람이 한때 지나가는 계절풍은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다. 역사가 전개되는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답보 상태인 듯이 보이는 역사의 흐름이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변화의 동력을 얻는다. 처음에는 우연인 듯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필연의 태풍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미투 운동도 미국 등지에서 그저 몇몇 바람둥이들의 스캔들로 끝나며 살랑살랑 불던 미풍처럼 잦아들겠지 했었는데 어느새 대한민국에 상륙하면서 태풍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문명사적 변화의 힌트는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이 현상은 과거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동안 낯선 이에게 당한 성폭행을 제외한 가까운 사이에 벌어진 성 관련 범죄는 대부분 쉬쉬하거나, 혹은 불거져 나오더라도 피해자인 여성이 꽃뱀으로 몰리는 등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덮이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이런 변화를 오랜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물로 본다. 하긴 남녀 사이의 위상이 과거보다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젊은이들 간에는 남자와 여자가 거의 동등한 듯 보인다. 또 다른 시각은 한국인의 유별난 기질에서 찾기도 한다. 일본 모 신문의 한국특파원 여기자는 이런 미투 현상이 일본에선 거의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며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을 유심히 살펴보면 남녀 간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벌어진 현상의 공통점은 대부분 어떤 형태로든 상하관계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미투 현상은 몇몇 용감한 여성들에 의해 공고하던 권력의 허상이 깨져나갔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어떤 학자가 언급했듯이 이른바 ‘포스트 가부장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머나먼 과거 파충류의 뇌로부터 시작해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 뇌들이 모두 함께 잔류해 있단다. 다시 말하면 우리 뇌에는 본능을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 시대의 뇌, 그리고 유인원의 뇌 위에 현생인류의 특징인 전두엽이 발달한 상태가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유류나 유인원은 대개 권력을 쟁취한 우두머리가 모든 암컷을 소유한다. 어쩌면 무수한 폭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그마한 권력에 취하여 주변의 여성들을 암컷들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들은 현생인류로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 기껏해야 유인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컷이었다는 이야기다.
- 2018-03-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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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라, 친구를 만들려면
-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유행어다. 못생긴 얼굴과 모자란 듯한 행동과 어눌한 듯한 말투 코미디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어찌 보면 관객들은 대리 만족을 느끼면서 좋아했지 싶다. 인간의 심리는 묘한 측면이 있음이다. 어떠한 모임의 경우라도 대화 중에 자기나 남편, 아내 또는 자식, 재산 자랑을 하면 상대는 은연중에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한다. 어른들 사이에 손주 자랑을 하면 만 원 지폐 한 장을 내어놓고 나가라는 말이 생긴 이유다. 자랑하게 되면 심리적 거리를 멀게 만드나 자기의 허점이나 약점을 말하면 상대는 편안해지고 경계심이 줄어들어 친밀감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고향 친구는 스스럼이 없이 가깝다. 비밀이나 약점이 노출되어 숨길 것이 없어서 그렇다. 필자의 안사람 여고 동창생 한 명은 동창생 모임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비롯한 남편 흉보기가 대표적인 화젯거리다. 다들 관심을 보이고 좋아한다. 물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선천적 입담이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있다. 반대로 안사람과 가끔 만나는 동네 부인들의 모임 중에 나오는 한 분은 입만 열었다 하면 남편 자랑, 애들 자랑, 집과 돈 자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좋아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그분은 왕따를 느낀다. 대체로 인간의 심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측면도 존재한다. 조직리더십 코칭원의 김영기 교수는 자기의 허점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대화 기법은 인간관계 고수들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의 약점을 말하기는 쉽지 않음이다. 그렇다고 모든 약점을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 중에는 약점을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거나 약점을 이용하여 훗날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약점 노출 자체가 더 가까운 친구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무렇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지 말고 나름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지나치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김 교수가 제안하는 약점 노출의 유의 사항 세 가지는 도움이 되지 싶다. 첫째, 약점 노출은 약한 것부터 시작해 상대의 호응을 보고 조금씩 확대함이 좋다. 예를 들면 “우리 애들이 요즘 말을 안 들어 고민이다” 등 가벼운 화제가 무난하며 상대방이 “우리 애들은 더 문제야!”라 호응을 보이면 다음 단계로 진행해도 좋다고 한다. 상대방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더 이상의 약점 노출은 자제함이 바람직하다. 둘째, 상대방이 호응하여 중요한 약점 노출을 하는 경우에도 한순간에 많은 것을 털어놓는 것은 좋지 않다. 서로를 깊이 모르는 단계에서 짧은 시간에 많은 약점을 말하고 나면 ‘이 사람은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사람은 아닐까’ 염려하게 되어서 그렇다 한다. 셋째,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약점 노출의 범위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결혼 전의 애인 이야기를 지금의 배우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모든 약점을 무한정 털어놓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해진다. 만나는 사람과 소일거리가 줄어들기 마련이어서 외로워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대화다. 인간관계를 멀리하는 대화법은 개선해야 한다. 과거의 직함, 손주, 재산, 돈 자랑 등에서 멀어져야 한다. 자기 약점을 수월하게 이야기하는 대화법도 연습해 볼 필요가 있다. 자랑을 주로 하던 말버릇을 금방 고치기는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적정한 선을 지키면서 자기 자랑 화제보다 약점을 화제로 이야기해보자. 친구들이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된다. 캔 블랜차드 씨의 이야기를 명심하자. “상대방의 환심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의 무지나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일이다”
- 2018-03-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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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 쫌 타는 사람과 주책바가지
- # 장면 1. 지난주, 파리에 있는 딸네 집에 다녀왔다. 사위가 출근한 후 다섯 살짜리 손녀는 장난감 전자피아노를 연주하며 필자에게 춤을 추라고 졸랐다. 그래서 음악에 맞춰 그동안 몰래 문화센터에서 배운 룸바를 신나게 추고 있는데, 주방에서 돌아온 딸이 그 장면을 봤다. “어? 아빠가 이제 춤을 추실 줄 아네!” 하면서 대학 시절 스윙을 추었던 딸이 필자에게 달려들었다. 둘이서 춤을 추다가 흥이 난 부녀는, 유튜브에 연결해 쇼스타코비치 2번에 맞춰 왈츠까지 췄다. 평소 ‘백설공주’라는 만화영화에서 왕자와 공주의 춤을 즐겨보는 손녀는, 우리의 왈츠가 신기한지 계속 추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흘러간 후, 사위와 손자들이 직장과 학교에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손녀가 “하비, 엄마랑 또 춤춰봐!” 했다. 사위 앞에서 춤을 추다니 그건 아니었다. “아냐! 하비는 너랑 있을 때만 춤추는 거야.” 그러자 손녀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당황한 필자는 “엇, 울지 마. 하비가 춤추면 되잖아!” 그렇게 시집보낸 지 10년 동안 그 흔한 노래방 한 번 같이 안 갔던 사위 앞에서, 방정맞은 자이브와 왈츠까지 추게 되었다. 이왕 망가진 거 더 망가지기로 했다. 딸과 잔디밭으로 나가 차차차까지 췄다. 사위는 필자가 춤추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동안 외국생활에 지쳐 했던 딸이 활짝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이 모습을 또 보고 싶으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우리들끼리의 비밀로 하자는 약속을 받았지만, 귀국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약간 불안하다. # 장면 2. 신입생 환영회 때의 일이다. 그해 면접 과정과 뒷조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 ROTC 오락부장 출신으로 유명했던 신임교수가 같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나이트클럽을 빌려 행사를 진행했는데 3학년 홍보부장이 사회를 봤다. 그런데 그 녀석이 다른 학번들에 비해 말주변이 없어서 분위기가 점점 식어갔다. 참다못한 필자가, 학과장의 사명감을 핑계로 무대에 뛰어올라 마이크를 빼앗았다. 고교 시절 응원단장 경력이 있었던 필자는, 술김에 신나게 사회를 보며 학년별 게임을 유도했다. 그런데 그때 돌발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함께 참석한 신임교수가 무대로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필자 마이크를 빼앗았다. “분위기가 지루하니까 지금부터 개인 장기대회를 연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인다!” 그는 각종 성대모사와 개다리 춤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거기에 자극받은 필자는 그동안 학생들에게 절대 안 보였던, 그야말로 망가지는 각종 개인기를 선보였다. 그해의 신입생 환영회는 교수들의 장기 경연대회장이 되어버렸다! 그 후 홈커밍데이가 되면 졸업생들이 한마디씩 했다. 엄숙한 주례사를 하시는 교수님을 보다가도 그 장면이 생각나면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온다고…. # 장면 3. 사돈 부부와 테니스를 쳤다. 사돈끼리의 경기는 항상 긴장감이 감돈다. 이겨도 적당히 이겨야 한다. 접대 고스톱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훈련 과정에서 형성된 운동신경과 동물적 본능에 의한 반사신경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필자의 강한 스매시를 안사돈이 발리로, 그것도 너무나 멋지게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트에 떨어진 공을 주워 서비스권을 가진 안사돈에게 건네주며 “사람이 아니무니다~”라고 외쳤다. 그 시절, 개그콘서트의 박성호가 갸루상 역할을 하며 유행시킨 말이었다. 사람이 받아칠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너무 멋진 발리라고 칭찬한 뜻이었다. 그런데 개콘을 안 보는 안사돈은 가슴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필자의 딸에게 심각하게 그 뜻을 물어봐, 해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단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나 통하는 유행어를 아무한테나 쓴다고, 딸한테 한마디 들었다. 그러나 오늘도 필자는, 젊은이들의 유행어를 ‘고르곤 졸라’ 쓰며 낄낄거리고 ‘개 웃기며’ 산다! 젊은 시절에는 ‘분위기 좀 탈 줄 안다’고 표현되던 것들이 나이 들어서는 어느새 ‘주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정작 우리 인생의 진한 추억들은, 이제 거기에 더 깊이 새겨진다.
- 2018-03-0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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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암 채제공 눈에 비친 가발
- 2011년의 일이다.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기나긴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고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풍속인물화대전’에서 공개하는 조선시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미인도’를 보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혜원의 풍속 화첩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국보 제135호)’은 일본에 유출된 것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여러 해에 걸쳐 공을 들여 1934년 되찾았다. 당시 선생은 이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직접 오사카까지 건너갔다. ‘문화독립운동가’ 간송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김동길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2017). 돌아온 ‘미인도’를 보며 필자는 문득 ‘이 작품이 과연 조선시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만큼 상징적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균형을 잃은 가발(假髮), 즉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해서 여자들이 머리에 얹었던 체발(髢髮, 트레머리)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사진]. 동시대에 활동한 단원의 작품에서도 체발한 여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머리 스타일이 조선시대의 풍속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미인도’를 보며 왠지 거북함을 느꼈는데, 이는 체발이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해 나라에서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여인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유행병’으로 번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헌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트레머리는 원나라에서 들어온 풍속으로 왕비만이 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그 풍속이 사대부와 평민, 기생들에게까지 퍼졌는데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10월 3일에 임금은 대신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우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은 체발의 폐단이 심각함을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가난한 유생의 집이라도 60~70냥의 돈이 아니면 살 수 없고, 집을 팔아야 할 형편입니다. 체발을 마련하지 못해 시집온 지 6~7년이 넘도록 시부모 뵙는 예를 행하지 못해 인륜을 폐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채제공의 말을 들은 임금(정조)은 ‘우상의 말이 정확할 뿐 아니라, 그 뜻이 선대왕(영조)의 뜻을 밝히고 계승하는 데 있다’며 ‘사족의 처(妻)와 첩(妾), 여염의 부녀자들이 체발을 머리에 얹는 것과 밑머리를 땋아 머리에 얹는 것을 일체 금지’하기에 이르렀다”(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 2017). 이것이 바로 정조 12년(1788)의 여성체발금지령이다. 조선시대 초상 미술사에서 사시(斜視)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피사체의 주인공이기도 한 번암 채제공이 자신의 눈에 비친 가발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접근했다는 사실이 필자의 기억을 새롭게 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전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 2018-03-0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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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조어 얼마나 알고 있나요?
-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던 신조어를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글 파괴, 문법 파괴라는 지적도 받지만, 시대상을 반영하고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도 제법 있다. 이제 신조어 이해는 젊은 세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필요해 보인다. 01 코덕 일본어 ‘오타쿠’는 ‘집에 틀어박혀서 어떠한 한 가지에 광적으로 애착을 갖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다. 현재는 단순 마니아 수준을 넘어선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화장품(cosmetic)과 오타쿠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꾼 ‘오덕후’의 합성어인 코덕은 화장품, 화장법 등에 대해 많이 알고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02 웜톤/쿨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신체 색을 의미하는 퍼스널컬러로서 크게 웜(warm)톤과 쿨(cool)톤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웜톤은 노란색을 기준으로 따뜻한 느낌, 쿨톤은 파란색을 중심으로 차가운 느낌을 준다. 쉽게 말해 노란 기가 도는 피부는 웜톤, 창백한 느낌의 피부는 쿨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03 톤팡질팡 개인의 피부 톤에 어울리는 화장품을 찾지 못해 이것저것 써보며 갈팡질팡 헤매는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어느 색을 써야 할지 몰라 톤팡질팡하고 있다면 퍼스널컬러를 찾아주는 서비스를 받아보자. 퍼스널컬러 진단을 통해 메이크업뿐만 아니라 어울리는 머리카락색, 옷색까지 상담받을 수 있다. 04 하같색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10가지의 붉은색 립스틱을 두고 “다 같은 색이다”, “다 다른 색이다”라는 의견이 오갔다. 결론적으로 립스틱은 조금씩 다른 색이었는데 이를 보고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뜻의 신조어 ‘하같색’이 탄생했다. 즉 똑같아 보이는 색이지만 발색했을 때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색조 제품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05 드릉드릉 어떠한 제품을 사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을 묘사한 신조어다. 예를 들면 발색이 예쁜 립스틱을 보며 “나를 드릉드릉하게 만드는 제품”, “퇴근 후 사러 갈 생각에 드릉드릉”처럼 표현할 수 있다.
- 2018-02-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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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그려진 시대의 풍속도
-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 풋풋하면서도 어딘가 촌스러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옷이나 머리 모양도 영향이 있지만, 과거 유행했던 화장법에 따라 분위기나 이미지가 크게 달라 보이곤 한다. 얇고 뾰족한 잿빛 눈썹에 붉은 립스틱, 푸른 아이섀도가 인기를 끌었던 때도 있고 자연스럽고 은은한 파스텔톤이 트렌드였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화장품은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유행을 드러내는 풍속도 역할을 한다. 국내 최초 월간 미용 정보지 ‘화장계’ 1958년 아모레퍼시픽(구 태평양화학)에서 창간한 ‘화장계’는 이후 ‘향장’으로 개명해 60년 넘게 매월 미용 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교양 정보로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향장’ 이후 LG생활건강 ‘이자녹스’, ‘드봉’, 한국화장품 ‘쥬단학’, 나드리화장품 ‘나드리’ 등 국내 주요 화장품 회사들이 미용지 사외보를 줄지어 내놓았다. 1994년 150만 부 발행을 기록하기도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던 ‘향장’은 현재 아모레퍼시픽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 웹진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오 마이 러브’ 메이크업 캠페인 1971년 국내 최초로 아모레퍼시픽에서 주최한 ‘오 마이 러브’ 메이크업 쇼는 한국 여성의 기호와 개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컬러 메이크업을 소개하는 장으로 마련됐다. 당시 발표한 최신 메이크업 포인트는 둥글고 깊은 눈 화장에 보라색, 청색, 갈색의 아이섀도로 눈매에 화사한 느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1976년 추천 봄철 메이크업 피어리스(현 아이피어리스·스킨푸드)가 1976년 제안했던 유행 화장법 순서다. ①파운데이션은 핑크계로 1차 바른 후 다시 덧바른다. ②볼연지는 피부와 립스틱 색상과 같은 핑크계로 발라준다. ③눈썹은 회색과 갈색의 비율을 2대 1로 하여 굵은 선으로 그린다. ④눈썹은 4분의 3 지점까지 약간 올려 그려준 후 4분의 1가량은 내려 그려준다. ⑤올봄에는 그린색이 유행될 것 같다. 그린색의 아이섀도를 사용하면 화사한 분위기를 줄 수 있다. ⑥입술은 겨우내 짙었던 색조에서 벗어나 핑크계열이 유행할 추세다. ⑦매니큐어는 의상과 동색 계열로 하면 개성이 뚜렷해진다. 유행 색조는 실버 그린이다. 집에서 화장품을 사던 시절 1960년대 일명 ‘화장품 아줌마’ 등으로 불리며 가정집에 찾아가 직접 화장품을 시연하고 판매했던 방문판매 직원들이 생겨났다. 이후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할인매장과 백화점을 통한 판매가 늘며 방문판매가 줄어들었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1987년까지만 해도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방문판매 비중이 1989년에는 40%로 하락, 1992년에는 25%까지 떨어졌다. 현재는 ‘카운셀러’라는 이름으로 지역별로 방문판매원을 운영하고 있다.
- 2018-02-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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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는 사람 위에 노는 사람, 노는 사람 당해낼 사람은 없지요”
- 삶에서 행복을 충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다하며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중견 여행사 ‘베스트래블’을 경영하는 음식·여행 칼럼니스트 주영욱 대표(57)가 그이다. 이외에도 사진가, 팟캐스트 DJ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노는 게 일이다. 그의 별명은 문화 유목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한마디로 노는 사람이다.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을 일해온 그는 2013년 52세의 나이에 여행사를 창업, 인생 2막을 ‘문화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뛰는 사람에서 ‘튀는 사람, 노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영욱 대표는 여행,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사진 모두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갖고 있다. 57세, 보통 사람은 이제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할 때다. 그는 하나씩 실행해나가며 지워나가느라 오히려 홀쭉하다. 고교 시절부터 꿈꿨던 DJ의 꿈은 팟캐스트 활동으로, 음식 칼럼을 쓰고 싶다는 꿈은 중앙일간지 연재를 통해 실현했다. 이외에도 가상역사소설, 공상과학소설로 저술을 준비하는 등, 그의 꿈은 산지사방 전 분야에 걸쳐 뻗쳐 있고 진행 중이다. 얼마 전 그는 왼쪽 팔목에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문신을 새겼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 젊은이들처럼 멋부리기 유행을 타서도, 폭력배처럼 위협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매버릭,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편견과 습관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자유선언이다. 그는 “세상의 터부 내지 스스로의 금기를 깬 느낌 때문인지 시원했다”며 “세상에 길들여져 탈색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단식과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는 것도 본질과 개성을 찾기 위한 일환이다. 그는 비우고 내려놓고 편견의 곁가지를 쳐내야 핵심에 집중해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삶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심지어 음식의 맛도….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미국, 일본, 프랑스 글로벌리서치 사의 한국법인 CEO를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52세의 나이에 이종 분야 창업을 하신 게 특이합니다. “경영상 이견으로 외국 회사 한국법인 CEO를 그만두고 됐어요. 20대 때부터 몸담아온 마케팅 리서치 일을 다시 할까도 생각했어요. 마케팅 리서치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 본질에 집중하는 일이거든요. 제 성격의 완벽주의랑 맞아 신나게 일했어요. 25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스스로 타성이 느껴지더군요.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안주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습니다. 아직 젊은데 작은 성공에 취해서 한 달에 보름씩 골프를 쳐가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요. 재미가 제 삶의 중요 요소예요. 좋게 말하면 글로벌 마인드, 나쁘게 말하면 역마살이라고나 할까요. 익숙한 길보다 가지 않은 길, 새롭게 흥분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 대표께서 생각하는 여행의 재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줘요. 이분법적 사고에서 절로 벗어나게 한다고나 할까. 여행 가면 늘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따르고 새롭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제 성격에 맞아요.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봐요. 추하다vs아름답다, 옳다vs그르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줘요. 편견을 깨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그는 인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초라한 행색의 인도인이 자기 배를 타달라고 호객 행위를 심하게 하더란 것.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넘어져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기에 또 호객 행위를 하러 온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고. 알고 보니 약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매번 시시각각 깨닫는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 사업을 하는 것은 별개인데요. 창업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고품격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잖아요. 저는 그게 여행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400회 이상 해외 여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기획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여행 계획을 짜면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런 프로그램은 여행사도 못 짠다. 너, 나중에 여행사 차려라’ 하고 농담할 정도였거든요. 두 번째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여행업은 미래 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 판단했지요. 세 번째는 인맥에 대한 자신감이었지요. 제가 온갖 모임의 총무, 회장을 맡아 마당발이었거든요. 아는 VIP들만 모객해도 걱정 없겠다 생각했지요. 금방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만….” 즐기던 여행을 막상 사업으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일과 취미는 전혀 달라요. 지금까지 여행사를 하며 실제 고객은 모르는 분들을 개척한 거예요. 아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은 전혀 별개예요.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인지상정이에요. 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친분보다 전문성을 갖고 냉정하게 판단하거든요. 인생 2막, 새로 도전하면서 과거 인맥을 바탕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을 보면 적극 말려요. 사업은 아는 사람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기본인데도 잊기 쉬워요.” 그는 “내가 여행상품 기획은 잘하니 호텔, 항공료 절감 등 원가 관련 문제 같은 부족한 실무 요소는 남을 통해 보완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실수였다”며 “사장이 큰 그림 보며 해야 할 일을 직원이 대신 해줄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만일 창업 초기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이드를 하든, 자격증을 따든, 직원을 하든 현장에서 밑바닥 경험을 1~2년 반드시 해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자신은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해놓고 시작해서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히트를 친 것은 고품격 테마여행 중국 장강삼협 크루즈 관광상품 출시다. 동종 상품의 3~4배 가격으로 고품격의 명품패키지를 기획한 게 먹힌 것이다. 2016년 그는 여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자와 서비스 제공자(여행사/랜드사/가이드/해외교민/유학생 등)를 직접 연결시키는 맞춤형 여행 도움 플랫폼 ‘티비스켓’을 창업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주 대표는 “얼핏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여행업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의 본질은 옥석을 가려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이는 여행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끌리기보다 호기심의 본질과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 대표와 대화를 하며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재미를 이야기하고, 본인도 재미있게 살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나 유머가 넘치는 편은 아니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단어의 정의를 내린 후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으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멘사 회장을 지냈다. 음식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시지요. 일간지에 연재도 하셨고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라는 책까지 내셨습니다. 일반 음식 칼럼과는 달리 식당 셰프, 사장의 인생 사연을 곁들이는 게 특색이더군요. 잘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이던가요. 간단히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식당입니다. 말은 쉬운데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요. 이런저런 핑곗거리와 유혹 때문에 넘어가기 쉽거든요. 유명한 집과 맛 좋은 집은 달라요. 진정한 맛집의 음식에선 주인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져요. 손님을 지갑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결국 음식은 재료맛, 손맛, 칼맛의 조합이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음식은 첫맛, 중간맛, 끝맛이 일관되게 같아요. 단맛이나 자극적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첫입엔 당기지만 끝맛이 좋지 않아요.” 주 대표는 ‘맛집을 고르는 비결’로 2가지를 귀띔해줬다. 사장이 직접 요리하는 곳, 오랜 전통을 가진 곳, 이 두 기준으로 고르면 틀림없다는 것. 요즘 상(上)남자는 상(床)남자, 상 차리는 남자란 농담도 있더군요. 집에서 요리를 잘 하십니까. “한동안 열심히 배웠지요. 내 손으로 메뉴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의욕이 넘쳐 비싼 칼이랑 파스타 냄비만 잔뜩 사놓고선 그만뒀어요. 손이 입을 못 따라가 중년 남자의 작심삼일 셰프놀이에 그쳤지요.(웃음) 애들이 먹지 않으니 요리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그냥저냥 요리는 재미있는데 뒷정리 설거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요리를 배우겠다는 동년 친구들에게 충고해주는 게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고가의 장비랑 상관없으니 비싼 그릇과 도구는 사지 말라고요. 고급 골프채를 새로 샀다고 골프 스코어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지요.” 음식 칼럼니스트가 꼽는 최고의 음식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하는 음식은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끓인 김치찌개만 먹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요. 나의 소울 푸드라고나 할까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와중에서 집밥 해주는 정성을 알기에 일절 불평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반찬투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음식은 입보다 마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소박한 집밥 한 끼가 어느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최근 아프리카 여행 때는 가수 휘성 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셨다면서요. 산악자전거 타기, 사진가,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여행 전문 케이블 TV를 만들고 싶어요. 경영자로서 저는 수치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닙니다. 선한 영향,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이 자리가 잡히면 직원들을 소사장으로 만들어 파트너 관계로 경영하고 싶어요. 좋은 음식이 그렇듯 뒷맛이 좋고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같이 질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DJ로 활동하는 맛집탐방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촉촉한 7080의 감성 어린 목소리로 사연을 곁들여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음에 만날 때 그가 얼마나 더 ‘홀쭉해진’ 버킷리스트를 갖고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그때 같이 먹을 추천 식당도….
- 2018-02-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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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망한 새해 인사말
- 설 연휴 동안 전화 혹은 문자로 가장 많이 받은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궁색하게 같은 말로 화답하거나 답장을 보내지만, 왠지 낯간지럽고 어색하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 정초에 이미 서로 주고받은 인사말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된 지 한 달 반이나 지났는데 다시 같은 표현의 인사말을 동일한 사람과 주고받는다는 것이 어찌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물론 인사말은 그저 형식으로 주고받는 것일 뿐이니 내용에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긴 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데 “아니 지난번에 하셨잖아요”라고 답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 까짓것 복이야 많이 받으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선심을 쓰고야 만다. 그러나 아무래도 찜찜한 건 마찬가지다. 이참에 설날에 쓸 수 있는 인사말을 하나 개발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글을 쓸 때마다 판에 박힌 상투적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을 때면 무척 난감하다. 예컨대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나 ‘어떤 기능을 장착하고’ 따위의 표현들이다. 조금 달리 표현하고 싶어도 적당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 말을 개발해 혼자 쓴다고 그 표현이 통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언론 등에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애썼지만,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진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권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다만 이런 인사가 정착된 이유와 그 속뜻 정도는 알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이 인사가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복’을 받기를 덕담하는 것을 보면 ‘복’이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도대체 ‘복’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복을 축원하는 것일까. 복(福)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는 타고나는 팔자소관이라고 정의하면 매년 복 많이 받으라고 빌어봐야 소용없다. 그러나 타고난 금수저는 아니지만, 가끔 지지리 궁상으로 살다가 로또 같은 대박을 치기도 하니 아마 이 인사말은 그런 번개를 두 번 맞을 확률이나마 기원해 보는 것일 게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그런 복에나마 의지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복이라면 무슨 의미를 담았다기보다 립서비스 정도의 인사로 볼 수 있겠다. 그런 인사가 그리 나쁠 것은 없지만, 그런 입에 발린 공허한 의미가 아닌 주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행복’으로 해석한다면 좀 더 긍정적인 인사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 인사를 나누며 행복을 생각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니까. 올 한해 행복해지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대책을 세우셨는가. 최근 이라는 책을 낸 롤프 도벨리의 행복론은 조금 특이하다. 책 제목처럼 행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불행을 피하라고 한다. 성공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니 부러워하지 말고 겸허하고 절제할 때 삶이 풍성해진다고 말한다. 인생은 어차피 불공평하니 투덜대지 말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라고 권한다. 행복은 한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행복감을 자주 느끼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저자 서은국은 말하지 않았는가. 설날 인사를 이제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불행 없는 한 해 되세요” 나 “새해 행복 자주 느끼세요” 제법 근사하지 않겠는가?
- 2018-02-1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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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둔벌 ‘푸른지대’의 추억
- 서둔야학교 학생 중 몇 명은 주로 인근에 있는 ‘푸른지대’로 일당을 받고 일을 다녔다. 푸른지대는 그 당시 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는 서둔벌이 온통 선남선녀의 물결이었다. 농대 후문에서 도보로 3분 이내 거리의 유원지로 개발이 잘된 푸른지대는 갖가지 수목이 우거졌는데 커다란 백합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빨갛게 핀 해당화, 아침 이슬을 머금고 보랏빛 또는 흰색으로 청초하게 빛나던 아이리스,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 목련이 있었고, 주목, 눈향나무 등의 관목들도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푸른지대 주인집은 많은 화초가 우거진 곳에 들어앉아 있어서 언제 봐도 녹색 지붕의 빨간 벽돌 집은 ‘꿈의 집’이었다. 왼쪽의 커다란 2층 건물은 식당으로 썼고 오른쪽에는 딸기 판매점이 있었다. 그중 철골조로 둥근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등나무를 얹었는데 보랏빛 등나무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련했다.또 정원 중앙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로도 수국, 해당화, 장미 등이 피어 있었고 집 앞에는 함박꽃의 자줏빛 웃음이 흐드러지곤 했다. 아침 8시쯤에 일을 나가면 우선 딸기를 담는 채반부터 물에다 불려서 솔로 닦아 헹군 후 건조시켜야 했다. 5월의 태양은 눈부셨고 초록빛 타원형의 잎사귀 밑에는 빨갛게 익은 딸기가 수줍게 숨어 있었다. 이제 막 하얀 꽃이 핀 것도 있었고 대개는 중심이 되는 가지에 아직 익지 않은 올망졸망 크고 작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익은 것은 딸기 한 그루에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였고 어느 것은 아예 익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이슬이 딸기 잎에 맺혀 있다가 딸기를 따려고 잎사귀를 젖히면 딸기 밑에 깔아둔 볏짚 위로 이슬 진주가 '또르르’ 굴러내리곤 했다. 또 어느 때는 조그맣고 귀여운 청개구리가 잎에 앉아 가슴을 ‘팔딱팔딱’거리다가는 ‘펄쩍’뛰어서 달아나기도 했다. 딸기를 딸 때는 다른 것을 건드려 고개를 부러뜨리면 안 되었다. 아주 조심해서 익은 것만 따되 줄기를 너무 길게도 그렇다고 짧게도 자르면 안 되어, 엄지와 검지로 꼭지를 잡고 먹기 좋게 꼭지 줄기가 1㎝ 정도만 달리게 손톱으로 잘라냈다. 그래서 딸기를 따다 보면 어느새 손톱에는 초록빛 풀물이 잔뜩 들어 있곤 했다. 미국 남부의 목화 따는 아가씨들을 감독하던 감독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전체적으로 깡마르고 얼굴이 까만 최 씨 아저씨가 우리를 감독했는데 그분은 늘 장화를 신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필자는 그분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조금 큰 소리만 내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딸기를 딸 때는 앉아서 따면 안 되고 꼭 엎드려서 따야 했다.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늘 반대로 말했다. “좋은 것은 먹고 나쁜 것만 골라 담아라.” 한참 일하다 보면 아침 이슬에 신발이랑 양말이 다 젖어버리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따끔따끔한 5월의 태양에 팔이 까맣게 타다 못해 허물이 벗겨졌다. 딸기는 한 채반에 2㎏ 정도씩 담았다. 채반이 다 차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받쳐 들고 딸기 파는 매장으로 일렬로 행진해갔다. 딸기를 씻을 때는 큰 그릇에 물을 충분히 부은 후 딸기를 가만히 쏟아 붓고 두 손바닥으로 몸체를 살짝 눌러 물에 잠겼다 올라오게 한 다음 건져서 다시 한 번 맑은 물에 헹궈 깨끗하게 건조된 채반에 담았다. 밭에서 금방 따온 것이기에 그 따글따글한 감촉을 씻으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에 따라 좋은 음악을 선별해 들려주는 DJ 일은 농대생들이 교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생상스의 ‘백조’ 타이스의 ‘명상곡’등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소품이 흐르는가 하면 ‘홍하의 골짜기’, ‘여름날의 세레나데’, ‘체인징 파트너’등 부드럽고 달콤한 팝송들이 한낮의 태양 아래 조용히 울려퍼졌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는 그 꿈을 꾸듯이 아름다운 선율이 일시에 나른한 환상의 나라로 인도하곤 했는데 어찌나 필자를 사로잡았던지 지금도 그 흐느적거리는 음의 선율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또한 지금 나오는 곡이 누구의 무슨 곡인지 생각하며 반복해서 들으니 자연스럽게 음악 공부도 되었다. ‘딜라일라’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팝송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주인집 아줌마가 노래 중에 ‘딜라일라’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DJ 보는 농대생들이 "아마 그것밖에는 아는 게 없겠지" 하면서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아줌마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록 집이 가난해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망정 '지적으론 우리가 우월해' 하며 과시하는 것 같았다. 매점에서는 두 명의 이대생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살집이 넉넉한 여학생이 하는 얘기가 “자고로 미운 여자란 없는 법이란다. 마른 여자는 골격미인이고 살찐 여자는 육체미인, 아는 것이 많은 여자는 지성미요, 좀 모자란 듯한 여자는 백치미인이란다” 했다. 필자는 딸기 따는 일은 초기에 잠깐 했고 이내 매점에서 일을 보았다. 매점에서 일을 보던 우리들은 점심을 특별히 푸른지대 주인집에서 먹었는데 우리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식탁이 풍성했고 간혹 처음 보는 음식들도 눈이 띄었다. 이때 처음으로 야채샐러드를 맛보았는데 그 싱그러운 맛이 기가 막혔기에 기억을 되살려 나중에 집에서 해먹었는데 이상하게도 물만 많고 도무지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마요네즈’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필자가 야채를 준비해놓고는 우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그 당시 필자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흰 색깔이 나는 액체는 우유뿐이었으므로. 필자는 어쩌다 며칠에 한 번씩 점심을 먹고는 거의 걸렀다. 밥을 얻어먹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기에 주인집 아줌마가 먹으라고 몇 번씩 채근을 해도 먹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얼굴, 작은 눈의 아줌마는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니?" 대개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골라낸 찌꺼기 딸기로 배를 채웠다. 다른 사람들은 딸기에 연유를 부어서 먹기도 했다. 대부분은 설탕을 찍어서 먹었지만 필자는 설탕을 찍지 않고, 딸기도 잘 익은 것은 맛이 싱거운 듯해서 덜 익어서 파란 부분이 많은 딸기를 즐겨 먹었다. 그때 딸기 맛의 감별법을 익혀두어서 지금도 어떤 딸기가 맛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당시의 딸기 품종은 주로 ‘대학 1호’와 ‘아모아’였다. 딸기를 사러 매점에 찾아온 손님들은 필자의 피부에 감탄하곤 했다. "딸기를 많이 먹어서 피부가 고운가보네." "어쩌면! 이런 시골에 피부가 백옥 같은 아가씨가 있네!" 딸기는 씻어서 채반에 담고 지름이 10㎝쯤 되는 하얀 플라스틱 접시에는 흰 설탕을 적당히 담아서 손님들이 원하는 자리에 배달했다. 갖가지 수목과 화초 사이에 벤치가 놓여 있어 손님들은 거기서 먹었고 때로는 잔디밭에 앉아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젊은 남녀 아베크족들이었고,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예쁜 옷들을 입고 와서는 고운 자태를 뽐내었다. 필자는 그들과 처지를 비교해보며 과연 어른이 되면 딸기를 따는 신분에서 딸기를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신분이 될 수 있을까 하면서 회의에 빠지곤 했다. 여자 손님들의 밝고 화사한 모습이 부러워서 한참 동안 쳐다보기도 했지만 곧 일에 빠져 잊어버렸다. 하루는 한 남자 손님이 손을 씻겠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부어주었다. 그러자 “당케이”라고 말해 우리가 까르르 웃었더니 “아, 독일 말로 고맙다는 뜻이야” 하고 당황해하며 설명했다. 아마도 그 손님은 우리가 땡큐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웃는 줄로 오해했던 것 같다. 푸른지대는 딸기 외에도 수익사업으로 밍크와 앙고라토끼를 키웠는데 앙고라는 눈만 빼꼼 내놓고 온몸이 털북숭이었다. 밍크는 사람도 마음대로 못 먹는 양미리라는 생선을 먹고 살았다. 푸른지대는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이모저모로 도움을 많이 준 곳이다. 일자리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어 필자는 열네 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어린 소나무의 묘목을 캐서 나르기도 했고, 햇볕이 따가운 딸기밭에서 일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는 하루 품삯이 20원이었는데 푸른지대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계약을 맺어 푸른지대의 일당표를 가져가면 가게에서 현금처럼 취급해주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니 가게에서는 면발이 가느다란 국수의 양을 20원짜리로 만들어놓았고 주민들은 대개 이 국수와 일당표를 맞바꿈했다. 우리는 그것을 끓여먹으며 일을 다녔다.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많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 형제를 귀여워하여 햇볕이 없고 시원한 매점에서 일을 보게 해주었고, 점심도 제공해줬다. 또 서둔야학교 선생님들이 도움을 청하니 전선을 제공해줘 학교에 전기가 들어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번창일로에 있던 푸른지대가 딸기술인 ‘파라다이스’를 개발했다가 판로가 신통찮은 바람에 일시에 부도가 나버렸다. 당시 아저씨와 아줌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필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두 분이었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에게 욕심이 없다면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욕심이라는 풍선은 적당 양의 바람만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으면 터져버린다. 문제는 그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미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 2018-02-16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