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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연결시대, 프라이버시의 미래
- 아주 어렵게 던지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소금과 빛이 된다면 더 없는 기쁨이다. 생각의 차이로 표현하는 가벼운 노크도 상대를 배려한 어쩌면 깊은 예의이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SNS의 시대, 잠시 머물러 여유로운 삶의 한 면목을 공유하고 싶다. 바야흐로 남녀노소 누구나 몸에 품고 있는 핸드폰 시대다. 모든 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초스피드로 돌아가고 손과 손에서 황금알을 쏟아내는 거위의 꿈은 불과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 IT 강국으로 급속하게 발전한 한국은 이제 엄연한 선진국의 대열에 우뚝 서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조그마한 사각형 전화기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잠을 잘 때도 사각형의 위력은 건강을 위협하며 머리맡에 자리하고, 옆에 없으면 마치 전쟁이라도 날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사람들은 정서적 마음보다 괴상한 문자를 남발하며, 손가락의 움직임은 밤낮으로 의미 없이 활개를 친다. 바빠서 죽겠다는 사람들이 피아노를 치듯 더 신나게 때려댄다. 눈과 손가락도 과로가 넘칠 텐데, 너무 힘들어 고립된 정서가 마치 한풀이를 하는 것만 같다. 손가락 하나로 다 연결되는 세상, 이제는 모두가 미디어 시대이고, 문명이 가져다준 또 하나의 병폐이다. 필자가 속해있는 한 모임의 이름, 브라보 동년 기자단이 있다. 이 모임만 해도 전화기 하나 안에 밴드와 카 톡 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카 톡만 해도 동년 기자단 운영위원회 방, 동년 기자단 제1기 방, 각 분야 별 방, 개개인의 따로 방, 최근에 가입된 연극모임 방, 등등이다. 도대체 불과 한 단체의 카 톡 방안에 또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되어 정신이 없다. 그렇다면 있는 것도 털어버려야 하는 이 시대에, 과연 무엇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의 의견은 개인 카 톡 방을 조용히 이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가끔씩은 공동의 공지사항 방이 쓸데없는 개인의 감정 공간으로 도배되어 활용이 된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한 피로와 소음이다. 더구나 쓸데없는 동참으로 의미 없는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카톡 카톡 소리는 시끄러워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럽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면 역시나 개인의 자랑이나 쓸데없는 잡담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값없는 수다가 오히려 기자라는 가치를 떨어트린다. 본인이 눌러대는 가벼운 손놀림이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마구 누르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보며 자신을 감추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를 조심스러운 한마디로 살며시 기대해본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도 다른 사람들 기분을 생각하기에 미안하고 겁이 나기도 한다. 물론 귀찮고 보기 싫으면 떠나면 되고, 진동으로 바꿔놓으면 아무 상관은 없다. 지금은 개인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주장하는 개인 프라이버시의 시대다. 젊은이들은 특히 더한 것 같다. 기자단 시니어 님들만이라도 자신의 과시나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본인의 할 말을 다하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공과 사를 구분하는 변별력도 성숙한 아름다운 행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래의 시대는 어쩌면 개인만큼이나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도 더욱 중요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년 기자단이란 과거시험을 통과한 인격체 사람들처럼 일컬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자단의 명함에 어울리는 멋진 자세, 성숙하는 노년의 아름다움이 함께 하기를 정성 들여 기원해본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관계를 맺기 위한 초 연결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전달을 위한 전문 별 중요 공지사항도 초 스피드로 이루어져야 하며, 미래에는 더욱 간결하고 간편해질 것이다. 공유하는 자숙이 바쁜 이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지 않을까 싶어 아주 겸손하게 노크해 본다.
- 2016-07-1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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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는 일상의 행복
- ‘휴가’라는 단어는 언제나 마을을 설레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탈출. 며칠간의 탈출이지만 일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칠말팔초’가 휴가철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꼭 그렇게 방 구하기도 힘들고 바가지도 절정에 달하는 이때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이 시기는 장마도 끝나고 더위도 절정이긴 하다. 그러나 요즘은 기후변화로 장마기간도 예측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칠말팔초가 되면 나라전체가 온통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맛있는 음식은 맨 마지막에 먹으면서 식사의 행복한 마침표를 찍듯이 필자는 남들이 다 다녀온 늦가을에 휴가를 간다. 아내는 여름 휴가철에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휴가를 다녀오기 때문에 늦가을 휴가는 필자 혼자서 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나름대로 주제를 정한다. 최근의 예를 들면 ‘추억여행’이 휴가의 주제인 경우 코스는 다음과 같다. 우선 종로 뒷골목에 남아있는 ‘피맛골’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그 길은 친구들과의 오랜 흑백사진이 남아있는 길이다. 다음날부터는 청평 안전유원지, 남이섬, 강촌, 춘천 김유정 문학관 등을 돌면서 학창시절 엠티 다녔던 추억을 떠올린다. ‘성지순례’ 가 주제인 경우는 전국에 있는 순교지나 멋진 종교건축을 찾아다닌다. 아주 가벼운 차림으로 카메라와 작은 배낭하나만 준비하면 된다. 이렇게 목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가을 곡식이 익어가는 논길을 걷기도 하고 시냇가에 앉아 물소리도 듣고 잠자리와 함께 가을 햇살도 즐긴다. 가는 곳마다 음식은 인터넷에서 미리 다 찾아보고 그 지역에서 가장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간다. 혼자 다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여행이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이렇게 며칠 다니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어느 장애인 복지관장님과 여름휴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장애인복지관에서 작년에 시행한 휴가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복지관은 주간 보호시설이라서 아침에 부모들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데려와서 맡기고 저녁에 집으로 데려가는 시설이다. 매일 그렇게 반복되기 때문에 장애아들의 부모들은 휴가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에 복지관에서 아이들을 야간에 맡아서 보살펴 주는 날을 정하고 그 아이들 부모들을 제주도 여행을 시켜 드렸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모든 분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겐가 아이를 맡기고 부부가 함께 어디 놀러가 본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징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자랑처럼 떠들었던 혼자서 떠나는 나만의 휴가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일상의 당연한 것에 별로 감사하지 않는다. 뭔가 특별하다고 느낄 때에만 그야말로 특별한 감사를 표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공기처럼 지극히 당연해서 일상에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소중한 경우가 많다. 이제 또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다. 물론 올해도 필자는 늦가을 휴가를 떠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홀가분하게 일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해진다. 주변을 돌아보니 올해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 2016-07-1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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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커 페이스(표정 없는 얼굴)
- 얼굴은 마음의 창이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의 얼굴 표정에서 흐르는 느낌은 어쩌면 그 사람 인격을 말해준다. ‘불혹의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옛말도 그런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굳어버린 얼굴 표정은 상대방을 당혹하게도 한다. 거의 20년 세월이 지나 한국에 와보니 변한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중에 하나라면 집 앞 동네마다 되어있는 둘레 길은 참으로 감탄할만하다. 천변을 따라 깨끗하게 잘 정리가 되어있고 군데군데 놓여 있는 미술작품들과 시들의 향연,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며 울려 퍼지는 멋진 음악들은 어느덧 선진국 문화를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더구나 국민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걷기 운동의 진가는 요즈음 같은 기계시대에 사는 남녀노소에게 필수적이다. 이른 아침 필자도 둘레 길에 의미를 느끼기 위해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미 와 있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양쪽의 길가에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교차를 했다. 필자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반갑고 신기하기도 해서 우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굿 모닝!’ 하면서 고개를 숙여 반갑게 아침 인사를 했다. 상대방은 무반응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멋쩍기도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얼굴이 부딪히는 사람을 향해 다시 한번 ‘안녕하세요?’라고 이번에는 한국말로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상대방은 또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무런 대꾸가 없다. 어찌나 기분이 나빴는지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인사를 하면 받아야지. 왜 그래?’라며 혼자 말로 남편에게 있는 대로 불평을 쏟았다. 상기된 얼굴로 땅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식혀갈 때쯤 자신도 모르게 앞에 가는 사람을 향해 또 인사가 튀어 나왔다. 앞서가던 사람이 그때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이상한 눈초리로 필자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아마도 조금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듯했다. 앞사람은 다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열심히 달렸다. 필자는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그 태도에 화가 나서, 그 사람 들으라고 더 크게 말했다. ‘왜 쳐다 만 보는 거야? 여보, 내가 이상해? 참, 한국 사람들 요상하네. 이해가 안 되는 구만!’ 남편은 필자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기만 했다. 미국에서 필자 부부가 손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미국인 여자 손님이 와서 대뜸 질문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왜 웃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필자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한국 사람에게 많이 미안했다며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지난 시절에 그녀가 회사를 경영했는데, 어느 날 한국 남자 하나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단다. 한국 사람은 머리도 참 좋고 똑똑해서 일은 잘하는데, 문제는 얼굴에 전혀 표정이 없이 굳어있다는 것이다. 그 한국 남자는 웃는 것도 아니지만 화를 내는 것도 아니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도대체 파악할 수가 없어 참 힘이 들었다며, 과거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늘 말수가 적었고 표정이 없었으며 늘 찡그리고 만 있었다고 표현했다. 더구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과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 한국 사람은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다른 사원들은 온통 그 사람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고 했다. 결국에는 그녀가 어쩔 수 없어 한국 사람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지금도 한국 사람만 보면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 궁금하기도 하다며 이유를 간곡하게 질문 해왔다. 필자 부부는 어떻게 설명해줄 방법이 막연해서 그냥 대강 얼버무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머리가 좋기로는 중국 사람 다음으로 한국 사람을 알아준다. 요즈음은 인도 사람이 중국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앞서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얼굴에 표정이 없지는 않다. 워낙 생김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못하기는 해도 웃음은 가득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만 왜 그런지 무표정에 익숙해 있다. 모두가 제 잘난 맛에 개성 강한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진국 미국에서 가장 밑바닥 일을 하는 멕시칸들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들의 인생에는 언제나 행복이 넘친다. 후진국이라는 아픔에서 유일한 수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만나는 어느 곳마다 인사가 끊이지 않는다. 눈을 마주 보며 가볍게, 또는 몇 마디 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서로의 대화를 나눈다. 물론 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미국보다 태양이 강하지도 않다. 한국에 와서 1년 정도 살다 보니 어느새 필자의 얼굴도 찡그려져 간다. 가만히 거울 속을 들여다보니 삶의 표정은 사악해지고 웃음이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포커페이스란 포커게임에서 상대방 패를 애써서 인식하고 자기 패를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표정을 감춰야 하는 얼굴이다. 무표정만이 자신의 무기로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인식이 되어 있다. 게임이 아닌 삶의 표정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이제 단일 민족인 사람들끼리라도 어색하지만 아침인사 정도는 할 줄 아는 여유, 삶의 지혜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웃음이 넘치는 한국 사람 얼굴이 그리워진다.
- 2016-07-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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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거 땜에 친구와 의 상한다] 친구의 남자친구
- 우리 말에 부모 팔아 친구 산다고도 한다. 친구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학력은 친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자라는 아이들이 사람보다 기계를 더 가까이 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이 사람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올까봐 신생아 때부터 빠르면 임신 중에도 태아의 친구를 만들어 주는 태교를 하거나 플랜을 만드는 것을 불 수 있다. 주말에 또래의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모여 아이를 위한 노래를 함께 듣는다. 아이가 이해 할런지 아닌지 모르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는다. 확실히 시대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육아다. 부모의 영향을 떠나 스스로가 만드는 세상인 첫 친구는 언제 만들어질까? 인격이 부모로부터 분열되어 하나의 개체로 성장하려는 사춘기가 아닌가 한다. 중2 정도에서부터 고 1동안에 친구와 순애보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현상이 나타나고 친구만들기에 부모라도 파는 성의가 있다.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학교생활에서도 기회만 되면 소곤소곤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님에도 누가 들을 까봐 조심하는 모양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과 후 귀가 할 때면 서로 먼저 바래다 준다며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을 오가다가 해가 지고 거뭇거뭇 땅거미가 피어날 때라야 두 집 의 가운데 지점에서 헤여지곤했다. 필자가 고 3이었을 때다 반의 다른 아이, 친구와 이웃에 사는 아이로부터 친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필자에게는 우리 둘만의 세계 외에 그 친구가 다른 세상을 가졌다는 것으로도 정신 못 차릴 만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필자에게 비밀로 했다? 이건 필자를 지옥구덩이에 빠트리는 배신이다. 하루 밤을 그 사건을 씹고 또 씹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밤새워 생각하여도 생각은 그냥 체바퀴를 돌 뿐 어떤 결말이 나거나 필자 행동이 결정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씩 더 그 친구에 대한 분노의 이름들만 쌓여갔다. 그 새벽에는 그 애가 내가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정서부족으로 판단한 것도 분했다. 이성친구를 갖는 행동에 대하여 몰이해 할 만큼 용기없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도 용서할 수 없다 기나 긴 대화로 서로의 속사람을 뒤집어 보이면서 나의 풍부한 이해심, 독서로 얻은 더 넓은 인간의 이해와 이성간의 낭만, 멋진 인생을 추구하려는 용기도 있다. 누구보다 특별한 관계를 응원할 사람이니 필자에게만 남자친구관계를 이야기 하고 의논도 하고 낭만의 순간들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만 같았다. 마침 겨울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함께 포항행 열차를 탔다. 포항의 해변에는 겨울의 썰렁함과 사람이 없어 파도가 외롬을 호소하는 듯 우렁찼다. 모래밭에는 아직도 여름 피서객들이 버려둔 쓰레기가 뒹굴었다. 쓰레기는 파도와 바람이 실어다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푸르름, 바다냄새 넓은 가슴, 파도소리들이 이미 두 사람의 영혼에 들어왔다 친구의 남자친구는 너무도 쉽게 필자의 열열한 환영과 응원을 받았
- 2016-07-0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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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기업 ‘금자동이‘
- 은평구 서울혁신센터에 자리한 ‘금자동이’라는 장난감 재활용 기업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금자동이라는 단어가 참 정겨운데 금자동이는 어린아이가 금처럼 귀하고 보배롭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필자에게도 금자동이 손녀, 손자가 있어 이곳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관심이 갔다. 버려지는 장난감과 폐목재를 활용해 창의 예술교육과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기업 금자동이입구에서부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폐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설치물이 많았다. 장난감은 재활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고무와 플라스틱, 전자기기판 등이 복합되어 있어 분해하는 비용이 원료비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는데 장난감이 버려지면 재활용하기도 어렵고, 없앨 수밖에 없는 골칫덩이 폐기물이 된다. 2013년 자원순환사회연대 통계에 따르면 선별장에 반입되는 플라스틱의 3.8%가 완구오락용품으로 약 3만 톤 정도였다고 한다. 안내해 주신 대표는 올해 장난감 학교의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장난감 재활용 문화를 확산시킬 계획이며 더불어 금자동이의 장난감과 '쓸모'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해주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장난감 및 유아용품을 처리할 장난감 재활용 센터를 기반으로 한 장난감단지(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지자체의 남는 건물이나 부지를 활용해 장난감 재활용 단지를 만들고 체계적인 수거시스템을 확립해, 단지로 수거한 후 판매와 교육, 전시 등의 카테고리로 나눠 테마파크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장난감단지가 조성된다면 전 세계에서 장난감 재활용 시스템을 보러 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고, 장난감 재활용 문화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그냥 버리면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가 큰 문제이다. 이곳에선 안 쓰는 장난감을 가져오면 사기도 하고 기부를 받기도 한다. 기부받은 장난감을 수리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도 하고 시리아 난민학교나 다람살라 티베트 마을, 인도 등 어려운 나라에 기증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손 본 많은 장난감이 주인을 기다리듯 진열되어 있었다. 장난감 앞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설레고 순수해진다. 많은 사람이 대부분 장난감과의 놀이과정을 통해 자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에선 버려진 장난감을 분해해 놓고 아이들이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체험도 할 수 있었는데, 장난감 학교 ‘쓸모’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버려진 장난감 부속으로 자신들만의 새 장난감을 만들어 보는 체험 공간이 있었다. 버려진 장난감이 새로운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질 때 성취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으니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 체험단도 장난감 부속으로 작은 소품을 만들어보았다. 필자는 접착제를 이용해 이것저것 붙여 핸드폰 세워놓는 소품을 만들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쓸모없어진 장난감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말고 이곳에 기부하거나 판매하면 자원절약과 환경오염도 막는 일에 조금의 보탬이 될 것이다. 시간을 내어 손자 손녀 손을 잡고 이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버려진 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조형물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장난감도 골라볼 수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다. ‘금자동이’는 장난감이 작품이 되어서 멋지게 전시관을 채우고 중고 장난감도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니 환경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멋진 사회적 기업이라는 생각이다.
- 2016-07-0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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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남과 금성 녀가 천륜이 되기까지
- 수술실에서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몽롱하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의식을 느끼며 무거운 눈을 겨우 추켜 올렸다. 뿌옇게 보여오는 세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몇 번을 깜빡거리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누군가 볼 따귀를 마구 때렸다. 어렴풋이 정신 차리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깊게 눈을 감았다가 힘을 내서 희미한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15시간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운명적 만남 첫 번째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군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까맣게 타올라 알 수 없는 모습이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을 가다듬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공군 훈련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워졌다. 옛말에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죄받는다는 말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족쇄가 되었다. 다른 어떤 생각도 그 사람과 헤어지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을 것만 같았다. 필자는 입학하게 된 대학교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에 늦게나마 막 떠나려는 전철에 올라탔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 남자는 같은 학교 3학년 선배였다. 그렇게 만난 사람과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필자가 3학년이 될 즘에야 그 사람은 공군 장교를 선택했다. 군 입대를 하면서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살아온 환경과 성격이 너무나 달라 결혼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긴 세월에 걸쳐 제대할 때까지 그 사람만을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아, 필자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사람은 결국 군 입대 원서를 찢어버렸다. 방황의 순간 입대하는 날 새벽 아침에 그 사람 친구들은 스카치테이프를 구해서 너덜너덜 해진 입대 원서를 붙여 주었고, 필자가 비굴한 용서를 빌면서 그는 군 입대를 할 수가 있었다. 6개월 장교 훈련 기간이 있었다. 대학 입학 후 미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던 필자에게 그 사이로 다른 남자와 만남의 기회가 주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그룹 미팅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남학생들의 소지품으로 뽑기를 하고 일대일로 멋진 한 남자를 만났다. 신비로움과 함께 흥미진진한 대화를 하던 중에 살금살금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만남을 방해하는 배를 움켜쥐고 참으려면 더 아파졌다.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 억지로라도 웃어가며 꾹 참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끝내는 파트너와 함께 응급실로 실려갔다. 급성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대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을 하고 그 해 5월 다소곳이 필자는 그 사람 공군 중위와 결혼을 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의무감 만으로 한 것 같기도 했다. 아옹다옹 4년이라는 세월의 교제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적 엇갈림은 이미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따로 없었다. 그 갈등이나 다툼은 잠시도 멈추지를 않았고 그 사람이나 필자나 똑같이 개성이 강해 늘 요란한 평행선이었다. 한 사람은 무조건 고기를 좋아했고 한 사람은 채식을 즐겨 했다. 필자는 칼국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설렁탕을 먹자며 칼국수는 입에도 대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필자는 정리 정돈을 잘하고 아기자기한 편이었으나 그 사람은 정리된 것들을 홀 가닥 뒤집어 놓는다. 한번 외출하고 돌아와 보면 도둑이 들어왔다 간 것처럼 온 집안이 난리가 나있다. 놀란 가슴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얄팍한 거짓말을 해서 꼭 필자에게 들키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했지만 늘 사소한 것들로 싸움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체념도 하고 포기도 하고 가끔씩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만 의지하며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다시 배움의 만학 도가 되어 학교생활에 몰두하면서 그 고통의 힘겨운 시간들을 버틸 수가 있었다. 남편보다는 천륜 서로가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하고 새로운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갈등의 아픔을 치유해 나갔지만, 남편은 점점 더 함정의 수렁으로 빠져들며 필자를 힘들게만 했다. 저질러진 뒤처리는 모두 필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 돌아왔다. 남이 아닌 남편을 외면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위하여 품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고 필자의 품에서 떠나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없으면 맨날 싸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을 했다. 물론 염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나이 먹고 몸은 점점 고장이 나고 자식들은 곁에 없었지만, 결국 남는 것은 두 부부뿐이었다. 세월 속에 힘들고 병들어 의지할 곳 없을 때, 끝내는 두 사람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슬픈 어느 날에 드디어 뼈 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부부 싸움도 젊고 힘이 남아 돌아가니 싸우는 것이었다. 무조건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니 개성 강한 두 사람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삶에 지혜가 생겨나고 뭔가 터득해가는 나이가 되어보니 곁에 있어서 참고 살아와준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필자가 숙연해지면서 철이 들고 있었다. 상대를 인정하며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크라고 마음먹으며 내려놓으니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왜 진작에 풋풋한 젊은 날에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 했을 까. 인생 반 고개를 훌쩍 넘어가려 하니 이제야 자신을 성찰하며 깨우치고 알 것만 같다. 그래서 옛말에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는 것인가 보다. 결국 인생이란 참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섭리와 순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조물주는 극과 극의 사람이 만나 부딪치며 터득하고 참아가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되라고 인연을 맺어 준 것만 같다. 미운 정 고운 정 아쉬움 정까지 다 들어버린, 이제 남편보다는 아이들의 아빠이자 소중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부모가 미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듯,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동반자인 그 사람과도 영원히 함께하는 삶의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야만 할 것 같다. 가족이라는 위대한 천륜이 되어버린 그 사람을 어찌 남편이라는 말로만 외면한단 말 인가. 이 날까지 함께 함을 깊이 감사하며 곁에 있을 때 더욱 잘해야 하겠다.
- 2016-07-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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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그리움을 넘어
-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2016-06-3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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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오여행] (2)아름다운 도서관서 스타벅스 커피를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기행’을 꿈 꾼 적이 있다. 중세 수도원에 만들어진 유럽의 고풍스럽고 화려한 도서관이나, 오랜 역사와 어마어마한 장서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끌고 있는 미국 도서관에 직접 가서 책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도서관에 관한 기사나 책을 유심히 읽곤 했다. 다케오시립도서관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보았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에 세워진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란 말이 흥미를 끌었지만 그 때까지 다케오가 일본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렴한 여행사 상품을 발견했다. 다케오에 가서 도서관 구경하고 온천이나 하면 좋겠다라는 말에 딸이 자기도 가고싶다고 했다. 언제 품 안에서 훌쩍 떠나가 버릴지 모를 자식의 손을 잡고 여행하는 재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말티켓을 검색하고 여행사에 문의 해 결제까지 단 숨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우리는 노오란 불빛이 아름다운 다케오 온천지구에 도착했다. 다케오는 일본 열도 최남단 규슈의 사가현에 위치해 있다. 규슈는 아직도 화산활동을 하고 있는 아소산의 열기로 만들어진 섬이다. 벳부나 유후인 등의 온천은 바빴던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 좋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가현은 큰 도시나 내노라 하는 관광지가 없는 탓에 우리에게 이름없는 현으로 머물러 있다. 이런 사가현의 시골 마을, 다케오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케오시립도서관과 올레길이다. 노후된 온천지구 작은 도시의 아름답고 특별한 도서관은 연간 40만 명의 외부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인기 스팟이 됐다. 또한 규슈 올레 1호인 다케오 코스가 이곳 다케오온천역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금요일 저녁, 도서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산한 거리 풍경과는 대조적이었다. “거리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모두 도서관에 왜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도서관에 들어서니 높은 천장에 벽을 가득 메운 책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20만 장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서고를 개방형으로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 눈 앞에 모두 보이도록 디자인 돼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한 편에선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스타벅스 음료를 주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타벅스의 로고가 그려진 컵을 하나씩 놓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도서관의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도서관이라기 보다는 책읽기 좋은 카페 같아 보였다. 민간에게 운영을 맡기고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스타벅스를 도서관 안으로 끌어들여, 밤 9시까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도서관의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도서관과 더불어 다케오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규슈올레 1호 다케오 코스다. 여유로움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소도시 정취를 느끼며 걷기 좋은 길로 평이 나있는 다케오 코스 출발지는 다케오온천역이다. 역 안엔 제주올레의 상징인 파란색 조랑말 간세가 있었다. 제주올레를 그대로 도입해 규슈올레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규슈의 올레길에선 한국인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올레코스 표식은 필자를 작은 동네 구석구석으로 안내했다. 집집마다 빨래를 정갈하게 널어놓았다. 탐스런 수국이 활짝 핀 마당엔 분홍테를 두른 실내화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검게 탄 아이들은 체육복을 입고 마을을 돌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어울리는 올레정신은 다케오 코스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마을길을 구불구불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골목길 깊숙이 숨어있던 어여쁜 담벼락에 기대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다케오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사가규로 만든 도시락을 까먹는 재미도 누렸다. 올레길을 걷다가 힘들면 벤치에 앉아 쉬었다. 그러다가 다시 걷고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다케오 시는 크지 않아 대부분의 볼거리들이 다케오온천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한 때 번성했던 다케오는 다시 변화를 꿈꾼다. 멋진 도서관을 세우고, 걷기 좋은 올레길도 만들었다.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일본 시골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규슈 올레길 다케오 코스를 천천히 걸어보고 여행지에서 만난 멋진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잠시 쉴 수 있는 다케오여행 어떠냐고 권해보고 싶다.
- 2016-06-2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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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공예 체험장을 찿아서
- 경북 울진군 하면 한손을 허리 등쪽으로 올리고 또 한손은 머리 아래쪽으로 내렸을 때 등 뒤에서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지리적 위치가 도시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문화 혜택을 거의 받지 못 하는 곳이 기도 하다. 그러나 넓고 깨끗한 바다와 해수욕장, 깊은 계곡과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 전국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온천, 바다에서 싱싱하게 잡히는 울진대게, 가을이면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자연산 송이버섯, 지방색을 갖춘 지역축제 등 아직도 때묻지 않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고 노후에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점점 셀프가구나 DIY 제품이 나오면서 집안가구나 인테리어 등을 내손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하지만 혼자 배우기엔 매일 만들 것도 아닌데 공구도 사야하고, 재료도 구해야 되고 번거로운 건 사실이고 만들면 뿌듯하지만 필자가 그런 분들을 위해 목공예 배우는 곳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도시에서도 배우기 힘든 목공예 체험장을 남중학 소장 부부가 운영하는 유아 단체반, 초등 저학년반, 초등 고학년반, 자연생태공예 지도교사반, 이번에 새로 생긴 시니어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시니어반의 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적극적이라고 한다. 엑스포 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쿠아룸, 솔밭 산책로, 도자기 체험장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스트레스 해소와 휴식 공간 할용에도 안성 맞춤이다. 처음 입교하면 목재의 성질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데 목재는 나무에서 얻는 천연재료 이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고 각기 다르다고 한다. 바람, 양지, 음지, 토양, 입지, 강우, 나무 사이의 경쟁 등으로 인해서 각 나무는 색상, 밀도, 나뭇결의 형상, 생산 목재의 기능적 특징 등이 다르다고 한다. 목재를 이용해서 가구를 만들면 각 판재는 사용 공구를 통해서 각기 독특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의 생물학적 측면과 자라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이해 하려는 노력이 목공의 출발점이라 한다. 그리고 울진에서 목공자재로 유명한 것은 금강소나무라고 한다. 금강소나무의 특성은 생육조건이 좋지 않은 척박지나 암반지역에서 더디게 자라고 껍질은 박피로 병충해에 강하며 나이테가 일반소나무에 비해 3배 가량 촘촘하고 뒤틀림이 적고 송진의 함유량이 많아 강도가 높고 쉽게 썩지 않는다고 한다. 400년이 지난 조선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황장목관의 나이테가 그대로 보였고 600년이 넘은 봉정사 극락전이나 경복궁에 사용된 금강소나무를 다시 재활용 자재로 쓸 정도로 그 보존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러한 금강소나무가 금강송이다. 금강송의 가치는 탁월한 목재, 우수한 산림유전자원, 풍부한 산림문화자원으로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필자도 목공에 관심이 있어서 배워보기로 했는데 우선 안전수칙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후 수공구 및 전동공구 사용법을 설명들은 후 공구박스를 제작해보기로 했다. 목재를 자르는 방법, 다듬는 방법, 목재 핀으로 고정 하는 방법을 교육받은 것과 같이 시행 해본 결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조금 미흡하지만 멋진 작품이 탄생되어 신기하기만 하였고 나무에서 내뿜는 피톤치드 향은 향수보다 좋은 냄새를 풍겼다. 목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이용해 보시기를 적극 추천한다.
- 2016-06-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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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이민이야기] 캘리포니아의 불꽃
-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끌고 남편을 마중 나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남편은 반갑게 가족을 향해 달려왔다. 남편은 그날 저녁을 쏘겠다며 ‘엘폴로코’라는 멕시칸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다. 온갖 인종 사람들이 주문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처음으로 먹어보는 훈제 치킨요리는 소오스가 약간은 이상했지만 그런대로 동양인 입에는 맞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일 주일에 한번씩은 멕시칸 음식을 즐겨먹었고, 다이어트 식으로도 아주 좋았다.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일하는 세탁소는 다우젼옥스라는 동네에 있었고 필자의 집은 시미벨리라는 곳에 있었다. 23번 후리웨이를 타다가 다시 101번 후리웨이를 타고 또다시 118번 후리웨이를 타야만 비로소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들어 설수가 있다. 말이 시골동네이지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무성한 완전한 전원도시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라이브러리(기념 도서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집들은 거의 궁전처럼 커다랗고 전형적인 서부 미국의 베드타운 도시였다. 동네 뒤편으로는 뺑뺑 돌아 겹겹이 울창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아늑하게 집들이 분포되어있는 분지 형 도시였다. 백인들은 주로 은퇴를 하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도시는 한적했다. 한인들도 약 300명 가량 살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특히 여름이면 뜨겁고 건조해서 더운 동네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낮에는 그 열기로 집밖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나가 돌아 다닐 수가 없었고, 밤에는 너무 건조한 탓에 코가 헐기도 했다. 모든 실내에서는 가습기와 에어컨이 왕왕 돌고 있었다. 퇴근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석양의 노을이 길고 멋지게 깔려 있었다.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필자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가족들에게 손짓을 하며 가리켰다. 남편과 두 딸도 두리 번 거리며 멋진 노을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멋진 사진 같은 장면은 무언가 지나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필자의 집 쪽으로 다가 갈수록 매쾌한 냄새가 풍겨오며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앞을 주시하며 산등성이 고개 길을 돌아 씨미벨리 초입으로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산불이다. 산불! 저거 불 난 거야!” 자세히 보니 정말 뺑뺑 둘러진 산등성이를 따라 불꽃이 길다랗게 잔잔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가 본 것은 석양이 아니라 산불이 나면서 시작된 불꽃의 여명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보는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당황과 흥분이 시작되었고, 필자가 사는 동네 쪽이라 우선 빨리 집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네 입구로 들어서자 회오리 바람이 탄내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차 창문을 꼭 닫고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가족은 궁금해서 그냥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불구경 이나 싸움구경은 누구도 못 말린다고 다같이 구경을 나가기로 합의 끝에 온 가족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조금 멀리 산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이리저리 더 잘 보이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맥없이 돌아다니는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혼란스러웠으나 모두들 긴장한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북쪽 산등성이로 갔을 때는 이미 도착한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 차있어서 차를 세울 공간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 백인 흑인 멕시칸들은 각양각색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신비로운 자연의 놀라운 한 장면을 담아두기 위해 하나같이 애를 쓰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불꽃들을 찍어대느라 산등성이에 서있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필자가족도 얼떨결에 빈손으로 나온 것을 후회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으로 구경하기도 바쁜데 그것들을 촬영까지 한다는 여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불은 조용히 점점 더 길게 뻗쳐 나갔고 그 불 줄기는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밤하늘에 꽃처럼 피어올라 석양의 노을처럼 환하게 비추어나갔다. 목이 칼칼하게 매연으로 가득한 공기였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한인주민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 집 저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쩡한 평일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터주대감인 집주인 집사님도 조금은 당황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그 동네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전 지역은 해마다 여름이면 산불이 연중행사가 되었고, 다만 그때마다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씨미벨리에도 10여 년 만에 찾아온 큰불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대로 무척 고온 건조했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풀이나 나무들이 바싹 말라 바람만 심하게 스쳐도 그 부딪힘으로 불이 날수도 있다고 했다. 간혹 누군가 담뱃불을 아무 곳에나 버려서 그 불씨들이 끝내는 몇 날 몇 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 불꽃의 행진이 이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방화범은 언젠가는 꼭 잡혀왔고, 하늘에 뜬 헬기와 함께 소방관들은 맞불작전으로 뜨거운 열기를 진압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방관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에 하나라고도 했다. 한 달 내내 타오른 거대한 산불이 초보 이민가족에게는 경이롭고 대단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천사의 도시라는 대자연의 축복아래로 인간이 겪어야 할 한편의 재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늘아래 축복과 재앙의 아이러니, 지구의 균형된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캘리포니아는 전 세계 최고의 기후를 자랑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산불이라는 골치 아픈 연중행사가 자리매김을 한다. 천사의 도시 산등성이에는 올 여름에도 타오르는 불꽃들이 수를 놓으며 이글거리는 붉은 빛으로 하늘을 향해 치닫고 있다.
- 2016-06-29 1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