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소개하기 위한 문서들이 많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포트폴리오 등이 있고 프로필 사진도 그중에 하나다. 동년 기자라면 응당 프로필 사진이 필요하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위 증명사진보다 자기의 특징이 잘 표현된 프로필 사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자기 홍보 시대를 살고 있어서 더 그렇다.
프로필 사진은 단정한 정면 얼굴
오카리나를 배우기로 했다. 나이 들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실행이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기타는 포크송 정도는 연주할 정도로 배웠으나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다. 오카리나는 부피가 작아 일단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동네에 있는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래서인지 오카리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
댄스 스텝에서 남자 스텝은 거의 대부분 전진하는 스텝이다. 그러나 가끔 뒤로 가는 스텝이 있다. Back Check, Back Lock, Back Whisk, Back Corte 등이다. 가장 어렵다. 앞만 보고 가다가 뒤로 간다는 것은 루틴이 아주 훤해서 여유가 있지 않으면 자칫 까먹고 실수하기 좋다. 뒤로 가는 스텝이 모양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
시니어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받지 못하고 시쳇말로 “꼰대”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해서다. 어떻게 보면 관심이지만, 잔소리로 들리기에 십상이다. “가능한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한 말이 생긴 배경이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 배경은 나이가 들어 잔소리가 늘어나는 이유도 있지만, 평소에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연습을 하지 않아서
국립발레단장을 맡고 변방의 한국 발레를 르네상스 시대로 이끈 최태지의 업적과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이 중첩되어 한량 이봉규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 최태지와 올해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1959년생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가녀린 몸매와 청초하면서 귀족같이 우아한 최태지와 마주하니까 오드리 헵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연상된다.
바둑 천재 이창호의 좌우명이다. ‘부득빈승(不得貧勝)’이란 바둑용어로 ‘욕심이 과하면 승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이 들면 승부가 걸린 것은 피하라’는 말이 있다.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상대방과 다툴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건강 상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약간의 긴장은, 약간의 스트레스로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한다. 댄스 경기에
배우 남경읍(59)의 경력을 보니 그가 처음 뮤지컬을 한 것은 이라는 작품으로,
어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 1세대라고 불리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후로도 그는 꾸준히 뮤지컬 활동을 하며 척박했던 뮤지컬 장르를 지금의 보편적 문화계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또한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에서의 활약으로 정통 연기자
IMF로 나라 경제가 바닥일 때 잘 나가던 회사가 적자로 돌아섰다.
2년 먹고 살 것 남겨 놓았지만 매출은 “0”
시간도 생겼으니 공부나 하자는 생각으로 대학원 유통, 마케팅 과정을 신청해 등록허가를 받았다.
인생은 한 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을 열어준다더니 내 생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수업이 야간 늦게 끝나기에 서로 바삐 차로 귀가들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