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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기획]부부가 함께해서 좋은 것들 -여행-
- 은퇴 후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평균 40년. 진짜 부부생활은 은퇴 이후에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혼이혼이 처음으로 신혼이혼을 앞질렀다고 한다. 진정한 노후 대비는 재테크가 아니라 부부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갈등 관리’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병이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있어도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닫는다. 많은 경우 남자는 여자가 하는 말을 잔소리로 듣는다. 공통의 대화 주제를 갖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부가 함께 영화나 공연을 본다든지, 여행, 악기를 배우는 등 같은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것도 좋다. 어느 봄날 부부가 폼나게 차려입고 호텔에서 우아한 디너를 하는 것은 어떨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배낭여행 부부 2.패셔니스타 부부 3.만돌린 부부 4.공연에 빠진 부부 5.손잡고 학교 가는 부부 CHAPTER 1 배낭여행 부부 “우리 부부 제2의 인생은‘여행연출가’랍니다” 165개국을 누빈 국내 부부배낭 여행가 1호 김현·조동현 부부 함께 산 지 47년이 넘은 70대 부부가 여행지 멋진 곳에서도 알콩달콩 ‘뽀뽀’를 일삼는다. 남편 김현(77)씨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운동 40분, 매일 일간지 5개를 정독하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부인 조동현(74)씨는 여행 가방을 챙기고 같이 가는 여행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준비물을 체크하는 일을 맡는다. 4박 5일 삿포로 눈 축제 여행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부부를 서울 가양동 그레이스힐(실버타운)에서 만났다. “일주일 여행을 위해 70일을 준비하는 우리 부부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함께 대화하고, 여행을 하면서 함께 얘기하고, 돌아와 여행을 정리하면서 다시 대화한다. 비록 배낭여행이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돈은 조금씩 부족해지겠지만, 풍성한 추억과 대화가 그 자리를 메우니 가난해지기는커녕 더욱 부자가 되는 느낌이죠. 서로를 존중해주니 존경심이 느는 것 같아요. 부부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좋은 시간들, 기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죠.” 70대를 신나고 재미있게 보내는 비결 문화산책 ‘청류회(淸流會)’는 김현·조동현 부부의 주도 아래 월 1회 연극, 영화, 음악, 오페라, 그리고 각종 전시회와 박물관 참관은 물론이고, ‘포도주 시음회’, ‘테이블 매너 실습을 겸한 만찬’ 등의 행사를 갖는 일종의 문화단체이다. ‘2Hyun’s Travel Club’은‘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제1호’라는 별칭에 걸맞게 부부가 1999년부터 공동 대표가 돼 이끌어오고 있고 부부와 함께 여행 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신청을 받아 해마다 3~4차례 해외여행에도 나선다. 이들 부부는 일흔을 넘긴 현재까지도 이 두 가지 일에 역점을 두고 즐긴다. 또한 “70대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자신이 좋아하면서도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에 매진하면 얼마든지 노후를 신나고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방송국 PD 출신의 남편 김현 씨와 영어교사 출신의 아내 조동현 씨는 국내 최초의 부부배낭여행가로 알려져 있다. 1989년 1월 1일 처음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부부는 한 해에 2~5회씩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경험한 여행지가 지금까지 165개국에 이른다. 개중에는 여러 번 방문한 곳도 부지기수. 일본은 무려 70번이나 여행했다고 한다. 현지인도 가기 힘든 곳을 샅샅이 찾아 여행하는 데 고수다. 26년 배낭여행의 노하우일 것이다. “여행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싶었습니다. 직장 다닐 땐 시간이 없어서 벼르기만 했던 세계여행, 은퇴하고 나자마자 배낭을 둘러멨어요.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겪는 일들이 인생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해줘요. 혼자 하면 외로울지 모르는데, 부부가 함께 하면 몇 배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쌓이지요. 대신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관심사에 따라서 주제를 정해 여행하는 것을 권합니다.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보거나, 반고흐의 흔적과 작품들을 보러 가는 것이지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먼 곳으로의 여행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여행이란 게 습관이 돼서 괜찮다고 김씨는 말했다.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은 부부의 대화 만약 부부에게 여행이 없었다면? “지루했겠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혼자보다는 동반자와 협력해서 하는 게 신나고 효과적이지 않겠소. 서로 역할을 나눠 돕기도 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요즘은 기억이 나질 않아 아내한테 늘 확인해야 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 부부는 여행이 부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대화’라고 말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가서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공통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뜻 깊은 일이죠.” 부부 사이에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 부부는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끝으로 덧붙인 아내 조동현 씨의 말. “간혹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남편과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 중 달콤한 추억들을 꺼내 스스로를 위로하곤 해요.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은 말로 다 못할 만큼 큰 힘이 되죠.” 이제는 김씨의 풍부한 여행 경험과 식견을 인정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지의 역사와 다양한 정보도 함께 전해주는 ‘여행연출가’로 제인생을 산다. 최근 열 번째 책을 펴냈다. ‘요셉과 피나부부 70대 인생을 재미있고 신나게 사는 이야기’다. ‘요셉’은 남편 김씨 세례명이고, ‘피나’는 아내 조씨 세례명의 애칭이다. 에는 책 제목처럼 재미있고 신나게 사는 부부 이야기가 담겼다. 이 부부는 이미 여행 관련 책을 다수 펴냈고, 1995년부터는 12년 동안 KBS TV 여행 프로그램 ‘세상은 넓다’에 출연한 바 있다. 신부님(장남 김환수)의 부모라서기보다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은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요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오늘도 부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항상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늘 겸손과 배려로 상대를 존중하며, 자녀에게도 자존감을 바탕으로 사회에서의 제 역할을 강조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뤘으니 이 부부는 부러움과 공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어쩌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의 로망’일지도 모른다. #부부 배낭여행 10계명 1. 배우자를 최대한 편안하고 기쁘게 해주도록 노력하라. 2. 여행 기간의 10배에 해당하는 준비 기간을 가져라. 3. 여행 준비는 부부가 나눠서 해라. 4.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치밀한 일정을 짜라. 5. 경제적 여행을 계획하라. 6. 숙식은 가능하면 친구나 친지의 집에서 해결하라. (단, 잠자리만 부탁하고 다른 부담은 주지 마라. 그리고 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꼭 보답하라.) 7. 가장 싼 비행기 표를 구하라. (최소 3개 회사 이상을 비교하라.) 8.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하라. 9. 맛있고 멋있는 음식점에서 꼭 한 번은 식사하라. 10. 여행의 멋을 연출하라.
- 2015-03-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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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2월이면 변산바람꽃 이미 피어 새 봄이 지척에 와 있음을 알립니다
- 첫눈이 온다며,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며 겨울 찬가를 부른지 얼마나 됐다고 너나없이 봄 타령을 합니다. 2015년 새해 첫 해돋이를 보겠다며 새해맞이 축제에 환호작약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꽃피는 봄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사람들의 이런 간사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꽃이 바로 변산바람꽃입니다. 해서 아직 엄동설한인 2월에 누구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며 꽁꽁 언 얼음장 밑에서 봄이 이미 저만큼 오고 있음을 전합니다. “급하기도 하셔라/누가 그리 재촉했나요,/ 반겨줄 임도 없고/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행여/그 고운 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살가운 봄바람은, 아직/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언 땅 녹여오느라/손 시리지 않으셨나요./잔설 밟고 오시느라/발 시리지 않으셨나요…”(이승철의 ‘변산바람꽃’ 중에서) 복수초와 함께 봄의 전령사로 꼽히는 변산바람꽃의 발 빠른 개화에 대해 이승철 시인은 “남들은 아직 봄 꿈 꾸고 있는 시절 첫 계절을 열어 고운 모습으로” 서둘러 온다며 “누가 이름이나 기억하고 불러줄까”하고 반색하면서도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변산바람꽃이 학술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3년. 전북대 선병윤 교수가 변산반도 내변산에서 채집된 표본을 근거로 한국특산종으로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따라 학명에 첫 발견지인 변산(byunsanensis)이 속명으로 들어갔고, 선 교수(B.Y.Sun)도 발견자로 그 이름이 표기됐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생지가 변산반도 등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누구나 조금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면 손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멀리 바다 건너 제주는 물론 전남 여수에서부터 북으로 강원도까지 거의 전국에서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 것이지요. 제주 한라산과 여수 금오산 등 남부 자생지의 경우 이르면 2월 중순부터 변산바람꽃을 볼 수 있는데,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가 거의 그렇듯 허리를 숙이고 낙엽 더미나 돌 틈 사이를 세심하게 살펴야 방긋 웃는 ‘변산아씨’의 환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키는 물론 굵기 또한 콩나물 줄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가냘픈 줄기에 달덩이처럼 희고 둥그런 꽃을 한 송이씩 달고 있는 변산바람꽃은 지역에 따라 2월부터 4월 사이 북풍한설이 주춤하는 사이 잠깐 피었다가 이름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5~7장의 둥근 흰색 이파리는 사실은 꽃받침 잎으로, 깔때기모양의 자잘한 녹황색 꽃잎(4~11개)을 대신해 벌, 나비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변산바람꽃 외에도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꿩의바람꽃 남바람꽃 만주바람꽃 태백바람꽃 들바람꽃 등 여러 종의 바람꽃이 자생하면서 봄철 산지 계곡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일 주일여 간격으로 흰색의 꽃을 연달아 피웁니다. 다만 ‘원조 바람꽃’이랄 수 있는 바람꽃만은 한여름인 7~8월 홀로 피어나 설악산 정상을 하얗게 물들입니다. where is it? 신종 발표 표본을 채집했다는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가 가장 널리 알려진 자생지. 특히 부안군 상서면 청림마을은 십수 년 전부터 변산바람꽃의 자생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 전부터는 제주도 절물자연휴양림과 여수 금오산 등이 변산바람꽃의 조기 개화지로 알려져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국내 최고의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여수 향일암 1km 전에 차를 세우고 금오산으로 들어서면 무성한 칡넝쿨 아래 돌 틈 사이 곳곳에서 수십, 수백 송이의 변산바람꽃이 ‘여수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의 병목안 계곡은 수도권 인근의 변산바람꽃 자생지로 야생화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자생지이다. 경남 거제도, 전남 고흥의 봉래산, 울산 무룡산 등 남부 지역은 물론 전북 마이산과 내장산, 경북 주왕산, 그리고 멀리 설악산 신흥사 주변 등 강원도에서도 변산바람꽃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연천 지장산 원심원사 계곡에서도 자생지가 발견됐다. 접경지역에 가까운 지장산의 경우 3월 중순 이후에나 꽃이 핀다. 경기도 안산의 작은 섬 풍도에서 피는 꽃은 꽃잎이 조금 더 크고 모양이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풍도바람꽃이란 신종으로 등록되었다.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푸른 행복) 저자.
- 2015-02-1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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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인생] 아름다운 차인(茶人) 오양가, 한국 다도 전파를 위한 숭고한 발걸음
- 올해로 차납 서른을 맞이한 경희대학교 오양가(吳洋嘉· 60) 겸임 교수. 불가에서의 나이를 ‘법랍’이라 하듯, 그녀는 차를 만난 이후 나이를 ‘차납’이라 한다. 짙게 우러난 그녀의 다도 30년은 그윽한 향으로 우리 문화 곳곳에 번지고 있다. ‘차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시련도 ‘차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오양가 교수의 다도 인생을 돌아봤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감성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차를 우려 그 향과 온기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런 어머니를 도와가며 자연스레 차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그것이 그저 평범한 우리나라의 예절인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되고, 행다(行茶)를 처음 봤을 때 ‘아, 내가 고향에 돌아왔구나!’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 어머니랑 늘 하던 건데, 내가 그동안 서양문물에 젖어 다 잊고 살았구나. 내가 왜 플루트를 사랑하고 클래식을 더 고상하다 생각했을까? 그런 깨달음이 있은 후 우리 전통문화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플루트보다 대금을 더 사랑하게 된 거죠.”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무용가로도 활약했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오 교수는 무용을 비롯해 발레, 체조, 양궁, 펜싱, 미술 등 다재다능한 끼를 발휘했다. “차는 ‘찻상에 표현되는 종합예술’과도 같기 때문에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은 물론, 그와 어울리는 음악, 꽃꽂이, 손놀림, 복식, 도기 등 갖춰야 할 영역이 많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키워온 재능들은 제가 다도를 하며 다양한 영역을 복합적으로 아우르는 데 큰 힘이 됐어요. 어머니는 조개껍데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하시는가 하면, 돌담 밑에 달맞이꽃을 한 아름 키워 서치라이트처럼 꾸며놓곤 하셨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신 분이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감성이 제가 하는 모든 것들에 접목됐고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됐죠.” 격을 지킨 사람만이 그 격을 파할 수 있다 한국의 차 문화 보급을 위해 달려온 30년. 행다를 익히고 기본을 갖추기까지 10년, 다도를 연구하고 자신의 다법을 정립하는 데 10년, 그리고 창작 다법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익히는데 10년. 오 교수의 30년은 그렇게 정직하게 흘러갔다. “처음 10년은 좋든 나쁘든 배운 것을 거스르지 않고 똑같이 연습했어요. 혼자 차를 마실 때나, 아들에게 차를 줄 때나 누구를 만나도 순서를 지켜 차를 올렸죠. 절대 차를 쉽게 보지 않고, 그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했어요. 기본이 배어 있어야 잘못된 것을 파악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계(契)도 지킨 사람이 파할 수 있듯, 무언가를 엄격히 지켜보고 행한 사람만이 필요에 의해 그 격을 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지를 경험해볼 필요가 있고, 그 후에 격을 파하고 자신의 것을 정립할 수 있어요.”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가장 한국적인 다도를 정립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다도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 또 그 순서와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된 문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다도를 우리 전통의 다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 하지만 일본에서 왔다 해서 ‘이건 안 해’가 아니라, ‘우리만의 것으로 가장 한국답게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차 다(茶)’ 자만 보이면 다 챙겨 봤고, 공부가 될 때마다 방향과 순서를 바꿔가며 그 행위에 대해 연구했죠. 다도를 하는 데 물 넣고, 차 넣고, 우리는 것은 전 세계가 같지만, 그 퍼포먼스 속에 한국의 생각, 한국의 몸집, 한국의 철학, 한국의 예술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누구와 견주더라도 자신 있으니까요.”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국의 숨결 오 교수는 행다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한국의 사상과 멋을 담아내기 위해 깊은 고뇌와 마주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그릇을 엎으면 그 집의 살림을 엎었다.’ 해서 그릇을 엎어두지 않았죠. 그런 풍습이나, 어른들의 이야기도 한국의 문화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제 다법에 적용했어요. 그래서 일본 다도는 엎어놓은 잔을 바로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데, 제 다법은 잔을 바로 세워둔 상태에서 시작하죠.” 오 교수의 행다를 본 이들은 그녀의 평온한 움직임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한다. 특별할 것 없이 스쳐 지나가는 동작 하나에도 뜻이 있고, 오 교수의 생각과 노력이 담겨 있다. “손놀림 하나에도 한국의 온화함과 곡선의 미를 살리려 했어요. 이 세상에 아무런 기물이 없을 때 인간이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했겠어요? 양손을 모았겠죠. 거기서 영감을 받아 잔을 잡을 때도 옹달샘 담아내 듯 양손으로 잔을 감싸요. 다기를 잡을 때도 내가 아이를 안았을 때처럼 편안한 모습을 하려 하고, 손동작 할 때도 초가집의 곡선을 형상화하곤 했죠. 그렇게 무언가가 정립될 때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연습을 끊임없이 했어요. 당시엔 집에 전신거울이 없었는데, 밤이면 베란다 유리창이 제 거울이 됐죠. 밤이면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어디가 비뚤어졌는지,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게 곡선을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또 연습했어요.” 사람의 본질을 사랑하게 하는 매개체, 차 전통문화를 전수받는 이들은 스승의 손사위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과 기풍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야 한다. 오 교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본질을 바라보는 눈과, 진심 어린 마음’을 강조한다. “손동작과 기교는 연습시키면 누구나 흉내는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영혼 없는 몸짓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죠. 사람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그를 향한 진심을 겸비해야 해요.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죠.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스펙이나 환경, 액세서리를 다 거둬낸 본질 있잖아요.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해요. 그 안목을 키우려면 ‘수신(修身)’ 즉, 자신을 다스리고 반성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하죠.” 사람을 위해 차가 존재하는 것이지, 차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터.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마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을 차를 매개로 전하는 것이 다도의 본질이며, 그 속에서 차 문화의 아름다움이 꽃필 수 있는 것이다. “차는 그저 마셔서 입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그 마음을 달래는 데 의미가 있어요. 다도를 통한 수신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매개로 상대를 만났을 때 함께 이루어져요. 내 인격체가 반듯하고 교양을 갖추었을 때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원활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처럼 다도를 통해 수신을 이루고, 그 문화가 번지면 곧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존재의 이유, 차 그리고 가족 “그냥 전부 같아요. 내 인생의 전부. 가족 외에는 다 차였으니까요. 차가 머릿속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어요.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더라도 다 차로 귀결됐어요. 지금 보면 차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취미도 즐기고, 모임도 가고 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활이 전혀 없었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차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쩜 그렇게 차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내 청춘을 오로지 차에 미쳐 보내고 나니, 어느새 나는 늙어서 환갑이 돼버렸지 뭐예요. 돌이켜보면 ‘나도 참 힘겨웠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그때는 힘들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차에 몰입해 있었지만요.” ‘차인’으로서 안아야 했던 힘겨운 세월에 가장 버팀목이 되어 준 것 역시 ‘차인’이라는 사명감이었다. 그리고 차인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오 교수에게 ‘가족’은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는 오로지 ‘차’와 ‘가족’이라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차에 몰입했던 세월만큼 가족과 함께 나누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늘 미안한 마음이다. 차가 있는 곳엔 늘 향이 함께 했기에 과거 우리 선비들은 향을 사르고 차를 마시며 꽃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네 가지 아취(雅趣, 고아한 취미) 있는 일로 꼽았다. 그동안 차인들의 노력으로 차 문화는 뿌리를 내려 뻗어가고 있는데, 향은 아직 그 쓰임과 문화에 대해 생소해 하는 이들이 많다. “차가 있는 곳에 향이 있고, 향이 있는 곳에 차가 있어요. 늘 함께 하죠. 하지만 항상 차를 해 오면서도 ‘향’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동안은 차를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것에 바빠 향을 더불어 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이제는 향에 대한 갈증을 채워보려 해요. 앞으로는 다도를 해왔듯 향도를 해나갈 계획이에요.” 한국의 향도는 활발한 태동을 일으키고 있다. 오 교수 또한 지난 자신의 다도 발자취를 거슬러 그 시작과 나란히 향도 문화 전파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처음 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은 없어요. 어떤 일이든 처음은 있는 것이고, 두 번 세 번 하다 보면 프로가 되는 거잖아요. 향도 시연을 창작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다도가 그랬듯 향도 역시 기본을 익힌 후 연구를 통해 창작해야 해요. 대만이나 중국, 일본의 향도를 살피고 공부를 해서 가장 한국적인 향도를 탄생시켜야죠.” 차인(茶人) 30년 세월이 내게 남긴 것 “전통문화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고독하죠. 남이 알아주지 않고, 돈도 안 되고.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오로지 차 문화 보급을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초등학교 운동회부터 OECD 장관 접빈 다례, 조정사신연 행사 등 수많은 행사를 치러냈지만 정말 힘든지 모르고 했어요. 거의 자비로 봉사하다시피 해왔지만, 그날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차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면 흐뭇하고 그 자긍심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행사장 테이블에 마련된 차를 즐기는 것이 이제는 생소한 문화가 아니다. 이처럼 ‘티 테이블 셋팅’ 에 대한 익숙함이 싹트기까지 오 교수는 끊임없이 곳곳에 다도의 씨앗을 심고, 애정의 물줄기를 적셔주었다. 모든 것을 바쳐 한국의 다도를 각인시켜 왔지만, 정작 오 교수 자신은 소박하게 남길 바랐다. “나중에 우리 후배들이 나를 떠올렸을 때 ‘아, 오양가 선생님은 참 아름다운 차인이었어’라고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차인’으로 남았으면 해요.” 천의보다법은 차문화와 우리나라 보자기문화를 접목한 오양가 교수의 창작 다법이다. 천의보라는 명칭은 하늘의 보배로운 옷자락이라는 뜻으로, 복의 기원과 함께 소중한 기물을 싸는 보자기에 차를 우릴 다완(茶碗, 차를 마실 때 쓰는 그릇)을 싸 더욱 귀중함을 나타냈다. 보자기를 싸면 상보를 대신하고, 펼치면 찻상이 된다. 행다 시에 중복되는 행위와 기물을 최대한 줄여 절제미와 단순미가 돋보인다.
- 2015-01-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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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1] 오래 사는 길 VS 제대로 사는 길
- 인생이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 오전’을 거쳐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 존 쿠퍼 포우어스는 노년에 어느 정도의 품위와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철학이 절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생 오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냐를 찾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한 모습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반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이었다면 후반의 삶은 거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전을 사는 어른들은 후배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조언을 한다. 그들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 후반전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그분들의 삶은 그분들 자신뿐 아니라 젊은이들과 우리 사회에 영향과 축복이 되고 있다. 후배들에게 하는 보배로운(?) 행동이 힘이 되고 후배들은 근사하고 당당하게 여생(餘生)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중물을 찾게 된다. 은퇴한 고등학교 교장이 정년퇴직한 다음 날부터 학교 청소원으로 나타난 경우가 있었다. 하루에 2시간씩 복도 청소, 쓰레기 줍기 등 청소를 해주는 봉사로 아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며 행복을 전해주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일을 할 때, 열심히 할 때 그 일을 사회의 나눔과 봉사에 접목을 하면 더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알기에 남은 삶을 학생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 교장선생은 오래 사는 것보다 멋있게 늙어가는 것이 간절했기에 그리고 나눔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이기에 청소원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 있다 후반전, 이제는 그냥 오래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래 살면서 무언가 배우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나누고 베풀면 배우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인생은 무위자연, 스스럼없이 살아가며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지혜를 배우며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의 오후’를 맞이하고 싶어 한다. “나눔에는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 웃음, 지식, 말, 손길 등 다양합니다. 나를 위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내가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즉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가진다면 나누는 길이 열릴 것이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와 나눔이 습관이 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손욱 회장은 노후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자신이 알고 쌓아 온 것들을 나누고 기부하면 기쁨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강조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많습니다. 우선 나이가 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걸 확인하고 무리한 욕심을 안 부리고 만족할 줄을 알게 되죠.” 만족할 줄 알게 된다는 것, 백만기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은 나이 듦에 대해 그렇게 명쾌한 정의를 내렸다. ‘놀 줄 아는’ 멋진 어른이다? , “나이 든 분들이 기껏 한다는 게 모여서 골프 가거나 등산하거나, 고스톱 친다든가 하는 정도면…. 사실 우리나라의 현재 은퇴자 문화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하는 놀이가 별로 없어요. 경제적인 발전에 비추어 문화적인 면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백 교장은 은퇴 후 분당FM방송에서 동호인 클럽과 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4년 동안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백 교장은 음악애호가로 시작하여 드럼, 피아노,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 등 직접 악기를 배우고 밴드를 만드는 것까지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놀지 못한다는 말은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성싶다. 악기는 ‘놀 줄 아는 멋있는 어른’,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예다. 은퇴자들이 제대로 노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백 교장은 설명했다. 그리고 제대로 노는 법은 ‘어른다움’을 배우는 일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일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은퇴를 하고 나면 어른의 길을 가느냐 노인의 길을 가느냐의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하잖아요?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이후 사회적 어른이 부재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줄 아는 어른의 부재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의미 있는 일로 ‘인생의 오후’를 만끽하고 싶다 백 교장은 19세기 폴란드 시인 노르비트가 밝힌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세 가지 필요한 것들’의 균형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는 먹고 살기 위한 수입, 두 번째는 재미있는 일, 세 번째는 의미 있는 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가 부족하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되는 것이고 두 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과 재미있는 일은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다고 백 교장은 지적했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가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손 회장은 “노인은 자기만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반면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게 되죠”라고 최고의 노년을 보내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이 좋아하는 건 뭔지를 물어 보세요. CNN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2%가 여가 시간에 TV만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를 모르기에 TV를 보게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죠.” 악기를 배우는 것도, 저작물을 하나 남기는 것도 모두 일정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노인이 되지 않고 어른이 되는 길, 거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부단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라고 백 교장은 덧붙였다. 노인은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만 지나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가꾸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눈부신 삶의 변곡점에 서ek 태어나 관계 맺고 살다 죽는 인간의 삶의 경로는 변치 않고 우리는 대체로 엇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살다 간다. 그래서 인지 생의 새로운 국면, 삶의 이정표 앞에서도 우리는 흔한 일상으로 당연시하며 무심히 넘기기 일쑤다. 성공적인 제2인생은 보다 평화롭고 안전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를 추구한다. 그러다가 눈부신 삶의 변곡점에 가다보면 보람, 나눔, 행복, 소통, 활동, 일, 공부, 참여, 관계, 건강, 취미, 문화, 배려, 승계, 후배교육, 인생 마무리 준비 등 지극히 평범했던 생의 순간들이 어느 새 ‘의미’있는 삶으로 변환되며 인생이 새로운 가치로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제2인생을 맞이하려거든 보람, 열정, 관리, 여유, 준비라는 5대 키워드로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신중년의 행복은 건강과 취미에 달려 있다 해도 무방하다. 거기다 성찰과 관리를 잘하는 친구와 어울려야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즉, 철저한 자기관리와 열정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세상만사를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가 비움의 미학을 문화로 채우는 가치 있는 삶으로 발효되기 때문이다. 제2인생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소신이나 긍지를 갖는 것이다. 학생 때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좋은 학생이고,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의 결정이 옳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 베스트 사원이었다. 그러나 정년 후에는 주위의 시선이나 평판보다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소신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오후’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후반전이 낙원이라면 가치 있는 삶을 좇을 필요도, 성찰을 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미래는 너무나도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일수록 자기를 낮추고 공감하고 배려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공적인 제2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믿음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행복하고 멋진 제2인생이 찾아올 것이다.
- 2015-01-2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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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않은 길]“40년 배인 공무원 냄새 찰칵 찰칵, 털어냅니다”
-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진도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요. 제가 셔터를 누르던 찰나의 느낌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싶어요.” 그렇다. 그는 한평생 공무원이었다. 1972년 3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초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2007년 4월 행정도시건설청기반시설본부장(국장급)으로 퇴직하기까지 35년간 국토정책 전문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국가에 봉사했다. 퇴직 이후 2012년 4월까지 몸담은 건설공제조합(전무이사)까지 감안하면 40년 이상 사실상 공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퇴직 후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의 사진 얘기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엔 신문 스크랩으로 아쉬움 달래 공무원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특히 국토부 공무원은 주택이라는 국민과 가장 근접한 이슈를 다루면서 일을 한다. 기본적은 정책 업무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 대응까지 24시간이 모자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말을 편안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선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가 사진찍기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멋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일단 모으기 시작한 것이 일간지 신문에서 주말판으로 제공하는 투어나 여행 관련 섹션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다니며 그림 같은 풍경을 찍겠노라고 모은 여행 섹션지가 큰 사과박스로 2개가 넘는다. 어느 순간엔 퇴직하고 나면 반드시 가겠노라며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다. 공직 퇴직 후 7년이 넘은 지금.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진짜 (현역때보다) 더 바쁘더라구요. 동창회를 비롯해 업무상 지인들, 가족 모임까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아직 스크랩한 지역들을 다니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투어 섹션은 여전히 매주 발행되고, 또 새로운 여행지가 쏟아져 나와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예요.” “예술사진반서 공부… 달력사진 안 찍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계원예술대학교 예술사진반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 번 전국에서 사진 찍기 좋기로 유명한 곳들을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한낮 풍경만 담은 달력사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같은 사진반 회원들이 찍은 작품을 살펴보다 풍경만 있고 감성은 없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를 스트레스라고까지 말했다.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틀에 박힌 사진이란 얘기지요. 여백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는 다른 분들의 사진과 비교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되더라고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멋진 풍경을 담기보다 풍경을 차분히 보고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을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있어요. 점점 고민하고 진지하게 사진을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몽골·미얀마 사진전 열어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최근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전문사진반이라야 갈 수 있는 몽골과 미얀마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올해 2월과 8월 각각 몽골 사진전과 미얀마 사진전에 준 프로급 전문가들과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실력으로 보면 몽골과 미얀마 동행은 물론 사진전도 동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는 몽골과 미얀마가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먼저몽골의 키워드는 ‘광활함’이었다. 그리고 메마르고, 거칠었다.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었지만 춥고 척박했다. 그런 땅에서도 가족단위로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변방국가가 돼버린 그들에게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상이 남기도 했다고. 반면 미얀마의 매력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맑고 순박한 표정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국가라는 점에서 그연유를 찾고 있었다. 특히 사원이 많다보니 거의 맨발로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전 작품들은 지인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선물했어요. 그 전에 몸담았던 건설공제조합에도 기부했고요. 이제 사진은 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지요.” 문화해설가로 재능기부 하고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사진을 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국토부 공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 과장 시절 국토부 내 처음으로 사진 동호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청사의 사계 등 사진전도 열고 사진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후 행복도시 건설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사진반을 만들어 직원들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건설공제조합 시절에는 찍었던 사진들을 조합에 건네 조합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도 국토부 퇴직 공무원 모임인 건설진흥회에서 사진반 총무를 맡는 등 사진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관광 가이드가 찍어 주는 사진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많으셨지요? 제가 문화해설가 역할도 하면서 사진도 찍어드리는 가이드를 하게 되면 ‘더 의미 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평생 찍은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정말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되면 아내와 둘이서 지난 세월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서요.”(웃음)
- 2014-11-2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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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④] 불운이 앗아간 10년, 뜨거운 가슴으로 찾다
- 금융권 생활 20년,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사람이 있다. 퇴직 후 10년, 불운의 연속으로 실패에 쓴 맛을 본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NGO단체 (사)러브 월드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는 박근배 사무국장이다. 그는 자신을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했했다. 그러나 전혀 거만하거나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경험도, 바닥에서 헤메던 경험도 있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연합회에서의 20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라고 표현 할 뿐이다. ◇ 잃어버린 10년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박씨의 퇴직 후 10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지난 10년 간 3차례의 사업에서 실패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이다. 2003년 은행연합회에서 나온 후 그가 도전한 첫 사업은 골프연습장. 골프마니아다운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골프 프로 티칭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골프 연습장은 얼마 되지 않아 폐업을 하게 된다. 씁쓸한 결과였다. 가장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사업이다. 2007년 그가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수고기 수입 사업이었다. 소고기 수입 회사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확산됐다. 박씨에게는 악재였다. 대한민국 사람 그 누구도 수입 소고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박씨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기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국 골프투어회사 경영은 불운의 마침표였다. 그가 태국에서 골프투어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위는 과열양상을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발 태국행 비행기는 파리만 날리게 됐다. 태국을 찾던 관광객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찾은 태국도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은행연합회에 재직하면서 모은 돈도 모두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오직 신앙에 의존해 극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때는 절망의 기운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값진 경험이 됐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뜨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이것을 쫓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 주는 것? 얻는 것이 더 많은 NGO 활동 박씨에게 3번의 쓰디쓴 실패 경험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문도 있었다.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해 필리핀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그곳의 여름은 태풍 하이옌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킨 집단 이재민 수용소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다짐했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미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박씨는 다짐을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활동 범위 또한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어 교육과 건강 검진까지 받을 수 있는 토털 케어 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봉사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활기를 찾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때 덩달아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NGO 활동의 매력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박씨가 NGO 활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푸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꼈다면 결코 이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사와 온정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박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유다.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날아간 필리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탠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말한다. “동남아 봉사활동을 가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감사할 줄 알았던 저였는데 그것이 행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이것을 보면서 진짜 행복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됐습니다.” ◇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행복하죠 “제가 러브 월드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영혼이 즐거워집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인생인가 봅니다.” 박씨는 행복은 영혼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돈은 이제 전혀 보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금융권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쌓여가는 통장의 잔액이 보람의 척도이자 행복의 척도였지만 말이다. 그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NGO 활동. 삶의 보람을 찾은 덕분인지 몇 년 전까지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인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패기가 넘친다. 그가 보람 있는 인생 후반전을 살고자 하는 신중년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정을 위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에게는 NGO 활동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예전의 지위나 기억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퇴직 이 후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갔던’ 때를 기억하며 상대방이 그때의 지위로 생각해주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면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란 것이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박씨. 그가 러브월드 활동을 하면서 생긴 철학이 있다.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오로지 육신뿐. 보람 있는 삶을 살아 멋진 이름 남겨놓고 가자.’
- 2014-11-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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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shion is Passion 런웨이에 선 시니어
-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4-11-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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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R STORY] 도대체 제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 제주는 2009년까지 취업, 대학진학 등의 이유로 인구유출 현상이 심각했었다고. 그런데 2010년부터 인구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10년에는 순유입자 수가 437명, 2011년 2342명, 2012년 4873명, 2013년 7824명 등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2014년에도 역시 제주 유입 인구는 고공행진 중이다. 일례로 서귀포시에서 주최하는 귀농 귀촌 교육의 경우 단 2시간 만에 마감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서귀포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말반까지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반 편성이었다. 도대체 제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제주의 매력과 신비가 갑자기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제주에 끌렸을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주도 안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 두 가지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모작’을 꿈꾸는 이들이 제주로 몰려들면서 제주도에 귀농 귀촌 바람이 부는 것은 제주도의 1차 산업 부흥을 의미한다. 농어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고 도시 이주자들이 몰고 오는 문화 이민의 바람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못 내리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있고 은퇴자금을 앞세워서 부동산을 사는 바람에 제주도 땅 값이 들썩이는 역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올레길 벤치에서 터져 나온 아내의 소원, “여보, 부탁이 있어.” ‘달파란’(게스트하우스 & 카페)은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에 있다. '파란달’보다 ‘달파란’이 느낌이 있지 않은가?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김태환(52)씨는 전직 국어 교사다. 지금은 교사직을 명예퇴직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12월에 오픈한 곳으로,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 과 별채 카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에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특이한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위미리에 위치한 세천포구 바다를 봤을 때 그 느낌이 파란 달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고 설명한다.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시적이고 제주 정착기 역시 운명처럼 시적으로 시작된다. “올레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참 좋다는 느낌을 갖고 한참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우리,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제주에 살고 싶어 “그 순간 제 입에서 너무 쉽게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제가 살면서 몇 가지 잘한 일들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잘한 일이에요.” 정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지 궁금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궁금했고. “처음엔 그저 먹고 사는 정도만 수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먹고 살면서 대학교 다니는 애들 등록금 댈 정도는 버는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앞으로의 꿈이요? 시간이 지나면 규모를 줄여서 제 개성에 맞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만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선량하게 웃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면 ‘제주의 마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제주에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심지어는 대학생 자녀들을 서울에 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제주홀릭’이라 부른다. “지금도 저처럼 중년 분들이 많이 여행하러 내려와요. 우리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분들 중에 진지하게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분들도 많구요. 그분들에게 농담처럼 말해요. 올레길 자꾸 걷다 보면 저처럼 제주에 주저앉게 됩니다. 하구요.” #가수 장필순이 추천한 그 곳의 그 남자,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요리하는 남자’는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작은 요리 주점이다. 멋진 미소의 이영태(52) 씨는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생전 요리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의외로 요리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평촌에 살다가 제주에 온 것은 2011년 2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부장 직까지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숨막히는 일상생활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농을 꿈 꿨고 그렇게 귀농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단다. “꼭 그렇게 깡촌으로 가야 해? 촌도 있고 도시 같은 분위기도 있는 제주는 어때?” 친구가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제주에 집을 구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늦둥이 딸이 중학교 입학할 때, 서둘러 떠나왔고 시내권 중학교보다는 시골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보냈다. 딸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했고 순박한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행복한 중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올해 제주외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온 가족이 제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는 농사일을 해보려고 땅을 알아봤지만 희한하게도 지금의 가게 자리가 나왔을 때, 끌리듯이 그 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 속에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가게잖아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죠. 만약에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딱 지금이 좋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요.” 그러면서 그는 어떤 요리를 파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초임 직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가서 5년 정도 있었는데, 그때 먹었었던 일본요리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곤 해요. 제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흉내 내려고 노력하면 비슷한 맛이 나오더라구요.” 메뉴판에 있는 ‘간장새우’도 얼마 전 강남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메뉴인데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바 로 만들어 봤단다. 반응이 썩 괜찮다며 씩 웃는 모습이 참 해맑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가수 장필순씨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명소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소개했는데 그곳에 요리하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물었더니 장필순씨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장필순씨인지 몰랐다고 한다. 여러 명이 와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얼마 뒤에 한사람이 찾아와서 -장필순씨,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단다. -장필순씨가 여길 왜 와요?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난번에 같이 왔잖아요. 했다는 거다. 그때부터 장필순씨는 후배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고 4,5개월 전부터는 이효리씨 부부도 데리고 왔단다. 아마도 행복한 주인장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술이 잘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달파란’의 주인장 김태환씨,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장 이영태씨 모두 공통점은 예전 직장보다 지금 제주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충고 또한 같다. 여행지에서 봤던 제주는 잊으라고. 바다를 감상하고 잔디를 다듬고 하는 로망은 일상생활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삶이 된다고. 조선시대 윤선도의 는 실제 어부들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황당한가? 실제 어부의 삶은 관념 속 어부의 삶과는 다르다. 한없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제주의 삶도 그렇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 2014-11-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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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문화 생생정보]온고지신을 알게 해주는 헌책방의 발효된 지식들
- 청계천으로 떠내려간 지식들… 1938년 출간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 칠성네 아주머니가 방망이를 두들기며 빨래하던 청계천은 나에게는 헌책방과 고물상이 즐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고등학교 때 조금이라도 싸게 참고서를 구입하기 위해 기웃거리던 거리를 국문과 진학 후 전공 관련 자료를 찾느라 다시 뒤졌을 때 캐캐한 책 냄새는 은은한 향기로 다가왔고, 수많은 책들이 자꾸 속삭이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책벌레보다는 수집광에 가깝다고 할까. 도쿄살이 18년에 책이 그립고 자료가 땡기면 곧잘 도쿄 진보초(神保町) 일대의 ‘간다(神田) 고서점가’를 찾는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서 도쿄대학 근처의 헌책방을 기웃거리도 한다. 지금은 매주 화요일이 되면 대학 강의를 마치고 일부러 고서점 거리를 지나 다른 대학으로 걸어간다. 약 180개의 서점들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처럼 늘 듬직한 미소로 반겨준다. ‘책의 거리’ 간다 진보초의 공식 사이트(http://jimbou.info)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 거리임을 자랑하면서 176개의 고서점을 소개하고 있으며, 52군데 고서점과 6군데 신간서점의 재고를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도 공개해 이용자의 편의를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됐고 규모도 가장 큰 전국고서적상업협회(JADOB)가 운영하는 ‘일본의 고서점’ 공식 사이트(http://www.kosho.or.jp)를 통해서는 전국 2200여 개의 고서점이 등록한 약 600만 권의 고서를 검색하고 구입할 수 있으며, 고서점의 소개 및 이벤트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진보초와 도쿄대 일대의 고서점에서 구할 수 없던 백화점, 박람회, 운동회 등 한국 근대사의 자료를 먼지방의 고서점으로부터 직접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이트 덕분이었다. 반면에 우리 사회가 청계천을 통해 배운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옛것을 없애고 부수는 것은 쉽지만 이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사실. 어쩌면 헌책방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그 속에 담긴 지식도 함께 떠내려간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료, 활용하면 가치 ‘헌책방’보다는 ‘고서점’이 연구자들의 귀중한 자료라는 인상 덕분에 좀 세련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훈훈한 정겨움은 역시 전자가 더 진할지 싶다. 하긴 이 거리의 출발도 가난한 학도들의 얄팍한 주머니와 뗄래야 뗄 수 없었다. 100여년 전 메이지유신 이후 이 지역에는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카이세(開成)학교를 비롯해 메이지(明治)대학, 주오(中央)대학, 니혼(日本)대학의 전신인 각종 학교들이 연이어 설립돼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가 모이는 거리로 자리 잡았다. 1913년 이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해 잿더미로 변한 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고서점을 열었고 이듬해인 1914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마음’을 간행하면서 출판업에도 진출해 문학 작품과 철학서 등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의 시작이자 간다 고서점 거리의 출발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화폐 1000엔권에 초상이 실릴 정도로 존경을 받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이와나미의 간판도 그가 쓴 것이라고 하며, 이런 인연으로 1916년 향년 49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난뒤 '나쓰메 소세키 전집'도 이와나미서점에서 발행돼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20년 도쿄고서적상업협회(TADOB)가 설립됐으며, 1921년 문화학원이 개교되면서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 관계서를 다루는 서점까지 등장해 고서점 거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해졌다. 지난 2001년 일본 환경성은 독특한 향기가 풍기는 이 거리를 ‘향기로운 풍경 100선’으로 뽑기도 했는데, 현재는 서점 이외에도 각종 사업시설과 수많은 식당, 멋진 분위기의 레스토랑까지 등장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서점 탐방을 즐기고 있다. 매년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3월말 진보초 벚꽃거리 페스티벌로 ‘봄 헌책 축제’가 열리며,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약100군데 서점이 참가하는 ‘도쿄 명물 간다 헌책 축제’가 성대하게 개최된다. 올해로 55회째를 맞이하는 간다의 헌책 축제는 특별 전시 및 판매, 자선 경매, 각종 강연회와 좌담, 관련 영화 상영 및 토크쇼, 그리고 다양한 체험교실 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애호가는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 이 시기에 맞춰 ‘진보초 북페스티벌’도 사흘간 거리와 광장에서 총 매장 면적 5000 평의 규모로 함께 열려 300만 점의 각종 서적(총 재고수는 무려 1000만 권)이 넘쳐난다. 올해로 24회째이며 헌책 판매뿐만 아니라 낭독회, 문학상 수상, 공개 방송, 다양한 검정시험 도전, 그리고 연주회 등 각종 공연도 마련돼 찾는 이들의 눈과 귀도 즐겁게 만든다. 이처럼 이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틈만 나면 먼지를 털고 표지를 닦으면서 누구보다도 ‘헌책’의 새로운 가치를 신뢰한다. 버리면 그냥 1kg 당 60 원 선에서 거래되는 폐지에 지나지 않는 헌책. 이런 헌책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내용에 따라 분류돼 새 주인과 만나 값진 가치를 발한다. 따라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실천하는 거리가 바로 이곳이며, 시니어 세대의 향수 어린 추억을 떠올리는 무대가 아니라 지금도 젊은이들이 옛것의 소중함을 느끼고 새로운 가치를 캐어내는 산 교육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헌책 시장의 규모는 가치 창조의 시금석 일본의 출판과학연구소가 지난해 출판물의 판매액을 1조7000억 엔으로 추정했으며, 인프레스 종합연구소가 간행한 ‘전자서적 비즈니스 조사보고서 2014’에 따르면 지난해 전자 출판물도 1013억 엔을 기록해 처음으로 1000억 엔대를 넘어서 2018년에는 3000억 엔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헌책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시장 점유율 60% 이상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헌책 체인망인 '북오프(Book-off)'가 2011년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중고서적의 시장은 873억 3300만 엔 규모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또 다른 업체가 조사한 헌책 구입 방법에서는 점포를 찾아가 직접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이 81%, 반면에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은 49%(중복응답)였다. 그 이유로 “책 상태를 알 수 없는 게 불안”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는 국회도서관을 비롯해 국공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 대규모 도서관을 제외한 작은 규모의 공공도서관의 경우 책을 구매한 지 5년 정도 지나면 정리해 폐기하게 되는데,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하지만 보통 많은 책들이 헌책방으로 유입된다. 또한 개인들도 나이가 들어 신변을 정리하면서 재산과 함께 골동품, 미술품, 서적 등을 상속하거나 팔며, 혹은 기부한다. 여기에 각 출판사들의 재고서적까지 가세하면 헌책방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는 책들이 끊임없이 넘쳐난다고 하겠다. ‘간다 고서점가’의 산책은 서점마다 인문, 자연, 과학, 기술, 미술, 공연, 사진, 대중문화, 아동도서, 외국잡지 등 특화된 전문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잘 분류된 서가를 걷는 기분이 든다. 책의 향기 속에 흠뻑 빠져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환상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는 시니어 세대의 인기를 모았던 절판 서적들이 다시 복각돼 출판되는 예도 크게 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가 아니더라도 ‘잘 익은 된장맛’ 같은 헌책의 가치를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거리에서 수많은 ‘온고지신’의 향기는 계속 퍼져나갈 게 분명하다. 근현대사의 풍파 속에 복개와 복원 끝에 떠내려간 청계천의 헌책방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가슴 아프며 부럽기 그지없다.
- 2014-11-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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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300km 스피드… 생애 최고의 느낌표
- “(서킷 코너링을 위해) 바이크와 함께 몸을 옆으로 점점 뉘이다가 급기야 뺨이 지면에 닿으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바로 그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란 말로 형언하기 어렵죠.”(웃음) 전국 바이크 족들이 모여 실력을 뽐낸다는 경기도 가평 유명산 정상. “크앙~”하는 거친 굉음과 함께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슈퍼 바이크(배기량 1000cc이상) 한 대가 멈춰섰다. 이 바이크에 앉은 라이더가 헬멧을 벗자 마초(남성) 라이더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머리를 단아하게 뒤로 빗어 넘긴 준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내년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50세)의 나이를 바라보는 아마추어 슈퍼 바이크 레이서 겸 주부, 전규정(49)씨였다. ◆우울증 = 그녀의 바이크 인생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 등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이란 진단이 떨어진 것이 바로 그 즈음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직장과 집만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삶이 낳은 결과였던 것.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사격을 비롯해 승마, 스킨스쿠버, 보드, 심지어 킥복싱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바이크도 그때 시작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 근처에서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400대가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오토바이 하면 택배 배달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타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죠. 그길로 서울의 한 바이크 교습소를 찾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교관이 스쿠터 레이스도 나가보라고 해서 레이싱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거예요.” ◆와인딩 = 슈퍼 바이크는 최고속도가 300㎞를 넘나든다. 전씨 역시 경주용 서킷에서 시속 200㎞를 훌쩍 넘겨 내달릴 정도 스피드에도 자신있다. 남성에 비해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여성인 데다 아마추어 라이더라는 점을 감안하면 준 선수급이라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즐기는 플레이는 따로 있다. 바로 와인딩(굽이길)이 그것. 서킷에서 바이크와 몸을 뉘어 업-다운을반복하며 코너링할 때 느껴지는 스릴감이 그녀가 바이크에 앉는 가장 큰 이유라고. 특히 코너를 돌 때 바이크가 기울어져 얼굴이 땅에 부딪칠듯한 느낌이 들 때가 가장 희열감이 느껴진단다. 이때 속도가 무려 시속 140㎞에 이른다. 그런 스피드가 무섭긴 하다고. 하지만 바이크를 서서히 세우며 코너를 탈출할 때 느껴지는 ‘해냈다’는 해방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바이크 투어링에 나설때 굽잇길을 골라서 다닌다. 도로가 뱀처럼 꼬불꼬불 꼬이면 금상첨화다. 강원도 느랏재, 태기산, 구룡령, 대관령, 한계령 등이 그녀가 주말이면 즐겨 찾는 투어링 코스라고. 특히 굽잇길이 심한 지리산 뱀사골이 라이딩 재미에는 그만인데 너무 멀어 자주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평화의 댐도 그녀의 단골 투어링 코스다. “업-다운으로 이어지는 와인딩은 바이크 타기의 백미예요. 내년에는 BMW원메이커 레이스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에요. 더 늙기 전에 나가서 남성들과 당당히 실력으로 겨뤄보고 싶어요.” ◆남편보다 좋은 것 = 전씨의 바이크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름 절약을 아는 주부 9단 그녀도 바이크 앞에선 한없이 무너진다. 이런 이력은 미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크를 만난 이후 로 돈을 버는 족족 바이크에 투자했던 것. 그래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바이크만 3대다. 가장 아끼는 애마는 BMW S1000RR. 가격이 무려 4000만원에 이른다. 나머지도 예사롭지 않다. MV아구스타 브루탈레675는 대당 2000만 원을 호가한다. 베스파 이태리 스쿠터도 전씨가 즐겨타는 바이크다. 레이싱용 장비까지 합하면 금액은 더 올라간다. 레이싱용 슈트를 비롯해 헬멧, 부츠, 라이딩 자켓, 라이딩 바지, 글로브 등을 합치면 2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여기에 2년 전부터 바이크 세계에 입문한 남편 바이크(할리데이비슨)와 장비를 합치면 추가로 수천만 원이 더해진다. 바이크 라이딩 취미생활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주부다. 바이크에 투자하는 돈 이외에는 지독할 만큼 아낀다. 일단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는 데 돈을 들이지 않는다. 성형은 물론이고, 그 흔한 피부 마사지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양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남편 양말을 신기도 한다고. 그녀의 털털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렇다 보니 여자들이 다들 좋다고 한다는 명품 가방하고도 거리가 멀다. “피부관리요? 일단 저를 누가 만지는 것 자체가 싫어요. 그래서 팩도 안 하고 미용 같은 것에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 유일한 취미는 바이크죠. 바이크에 들인 돈이 엄청나긴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편보다 바이크가 더 좋으니까요.”(웃음) ◆스턴트 우먼 = 바이크는 그녀의 직업도 바꿔버린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스턴트우먼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교습소에서 바이크 레이싱 교육을 받는 동안 알게 된 영화제작자에게서 “운동신경이 남다르다. 스턴트 전문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그 길로액션 스쿨에 등록한 것. 각종 무술과 액션 기술을 두루 섭렵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지난 2005년 반올림 드라마에서 배우 고아라 대역(여자 경찰)으로 나왔고, 드라마 막상막하에선 배우 성유리 대역(군인)으로 바이크를 탔다. 특히 MBC 베스트 극장에선 건물 3층에서 트럭으로 뛰어내려는 스턴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즘도 대역배우 요청이 들어오면 선별해서 방송출연하기도 한다고. 내년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다. 이외에도 오토 바이크 로드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남자 형제들하고 자라다 보니 여기저기 치이면서 자랐거든요. 특히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너무 싫었죠. 내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스턴트가) 저도 무섭긴 한데 그런 두려움과 긴장감이 저를 더 즐겁게 해요. 바이크를 타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셈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사는 게 즐거워요.”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 그녀의 바이크 사랑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지난 201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행사에 한국 대표(4명)로 참가하게 된 것. 총 300명 정도 참여하는 국제 행사에 당당히 그녀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행사에 태극기가 찍힌 레이싱복을 입고 한국여성 라이더의 위상을 알리는 기회를 얻게 돼 영광스런 자리였다고 했다. 게다가 투어형 바이크를 현지에서 렌트해 약 12일 동안 오스트리아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금상첨화였다고. 그렇지만 전씨는 바이크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바이크 타는 사람들 전체를 폭주족이나 불량배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세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오토 바이크 타는 사람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이크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도 불만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는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데다 일반도로에서도 사륜차들의 텃세에 치여 배척당하기 일쑤라는 것. 외국에서는 바이크를 출퇴근용으로 더 권장하기도 하고 사륜차들이 오토바이에 길을 비켜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데 한국은 선진국과 대조적인 모습만 연출되고 있다고. 그녀는 여성 라이더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금녀의 구역이다 보니 처음에는 미친 여자 취급까지 받았다고. 특히 자신을 여성이 아닌 똑같은 라이더라 봐달라는 것이 그녀의 부탁이다. “체계적인 라이더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은 후 자기 실력껏 바이크를 타면 그리 위험하지 않아요. 조금 빠른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오토바이를 타면 안 좋게 보는 이유가 유교적인 사상에 기인한 것 같아요. 오토바이 타면 주렁주렁 치장하고 문신하고 하다 보니 더 곱지 않은 시선을 주는 것도 있고요. 자기 취향일 수 있는데 말이지요.” ◆바이크 미술 전시회 = 그녀는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학에서 전공했던 미술(서양화)이다. 전씨는 본인의 천직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미술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직장생활에 파묻혔고 바이크를 타면서 더 등한시하게 됐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얘기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놓았던 붓을 다시 쥐고 짬짬이 작품활동을 해서 미술 전시회도 연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여기서도바이크는 빠지지 않는다. 바이크를 조형화하거나 형상화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도 ‘바이크 미술 전시회’로 벌써 지어놨다. “바이크는 나의 심장이고, 삶의 원동력이에요. 바이크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체력이 닿는 때까지 바이크를 탈 생각이에요.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바이크를 생각하고 즐기고 있어요. 젊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있어 좋기도 하구요.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거나 스피드만 즐기기 위해 타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이제 (그런 것은) 초월했어요. 바이크는 제 인생을 바꿔준 대상이고, 삶의 가치를 높여 풍성하게 해준 최고의 친구예요. 이젠 누구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바이크를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 2014-11-18 0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