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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취향대로 즐기는 4색 캠핑 라이프
- 코로나19 시대의 여가 활동으로 ‘캠핑’(Camping)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이은 5인 이상 집결 금지 같은 사회적 조항으로 사람들은 친구, 연인, 가족 등 소수정예로 팀을 꾸리거나, 홀로 자연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면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캠핑 자체를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등산, 트레킹, 사이클, 카약, 낚시, 서핑 등의 아웃도어 활동을 결합하는 식으로 다채롭게 진행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같은 캠핑도 전혀 다른 캠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코너에서는 때와 상황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캠핑 ‘4대 주자’ 자전거캠핑, 오토캠핑, 차박캠핑, 백패킹의 특징에 대해 알아봤다. 자전거캠핑 | 걸어서 가기에는 먼 곳을 무동력으로 가고 싶을 때 자전거의 몸체에 짐받이 가방과 패니어백, 혹은 자전거 몸체에 연결한 트레일러에 아영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싣고 산악 임도, 해안, 자전거길 등을 이동하다가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즐기는 캠핑을 말한다. 바이크캠핑, 투어링캠핑이라고도 부른다. 오지와 같이 한적하면서도 차량 진입이 어려운 곳, 자동차로 가기에는 가깝고 도보로 가기에는 애매한 주변 여행지를 찾아가는 데 자전거는 효과적인 이동 수단이다. 자전거캠핑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자전거’다. 즐겁고 쾌적한 자전거캠핑을 위해서는 자전거캠핑에 적합한 자전거를 준비해야 한다. 생활형 자전거, 산악자전거(MTB), 로드자전거, 하이브리드, 미니벨로, 전기자전거 중에서 캠핑 장소와 주로 형태, 이동 거리에 따라 크게 산악자전거, 로드자전거, 투어링 전용 자전거, 산악과 로드 중간 형태인 하이브리드를 선택할 수 있다. 자전거 다음으로 중요한 장비가 ‘복장’이다. 1박 이상 장거리 자전거캠핑을 할 때는 장시간 자전거 주행을 해야 하므로 기능과 안전을 고려한 라이딩용 복장을 추천한다. ‘쫄쫄이바지’로 통하는 ‘자전거 패드바지’는 폴리에스테르 재질이라 구김이 없고 건조가 잘되며, 자전거 안장과 밀착되는 부위에 두꺼운 패드가 붙어 있어 엉덩이 통증을 상당히 줄여준다. ‘저지’로 불리는 자전거 상의는 등 뒤에 주머니가 있어 휴대폰 등의 수납이 가능하다. 자전거캠핑은 온전히 사람의 힘을 동력으로 이동하는 만큼 수납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지만, 반드시 챙겨야 하는 장비라면 자전거용 멀티툴, 휴대용 펌프, 예비용 튜브, 체인 커넥터 같은 갑작스러운 고장에 대비한 미캐닉 장비다. 이외에 헬멧, 선글라스, 바람막이, 장갑, 버프, 모자, 두건, 팔토시, 랜턴, 비상식량, 스마트폰 충전기, 구급약품, 비상식량, 텐트, 침낭, 매트리스, 캠핑용 조리도구, 휴대용 식기와 수저, 다용도 나이프 등이 있다. 오토캠핑 | 자연 속에서 집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고 싶을 때 차량에 각종 야영 장비를 싣고 떠나 캠핑장과 유원지 등 지정된 사이트에서 취사와 숙박을 하는 캠핑이다. 차량을 이용해 움직이므로 장비 수용에 제한이 없고, 차량 바로 옆에 사이트를 구축할 수 있으므로 캠핑 장비를 힘들게 옮기는 수고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캠핑 초보자라면 오토캠핑을 통해 캠핑에 재미를 붙이는 편이 좋다. 만약 캠핑에 필요한 장비가 없다면 캠핑 업체에서 텐트, 침낭, 취사도구 일체를 제공하는 ‘글램핑’을 즐기는 방법도 있다. 오토캠핑에 필요한 주요 장비는 가볍고 견고한 텐트, 계절에 맞는 침낭,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습기를 차단해줄 매트리스, 햇빛을 가리고 비와 바람을 막아줄 타프, 캠핑용 조리도구 스토브와 연료, 휴대용 식기와 수저, 다용도 나이프, 랜턴과 이동식 랜턴(보조배터리),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체온을 지켜줄 기능성 의류, 만약의 비상사태에 대비한 구급약품이 있으며,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 그릴, 키친테이블, 아이스박스도 있으면 유용하다. 최근 들어 캠핑카, 캠핑 트레일러를 이용한 오토캠핑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매번 따로 수고롭게 텐트를 치고 접지 않아도 차량 안에서 편리하게 취사와 숙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4000만~1억 원을 호가하는 만만치 않은 캠핑카 가격이 단점이겠다. 11인승 이상 승합차를 캠핑카로 개조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또한 비용은 1000만~2000만 원 정도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카라반 전문 커뮤니티 ‘더 카라반’(thecaravan.co.kr)에서 확인하자. 캠핑카를 대여할 경우 보름 전 사전 예약을 통해 대여 업체 차고지를 방문하거나 홈 렌털 서비스를 이용한다. 렌털료는 1박 2일 기준 국산차 35만~50만 원, 수입차 45만~80만 원이다. 대여 조건은 만 26세 이상, 운전 경력이 최소 1년 이상 운전자. 대인, 대물, 자손 종합보험은 기본으로 가입돼 있으나 자차보험은 빠져 있다. 안전운행수칙 교육 업체에서 1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캠핑장 정보는 한국관광공사의 ‘고캠핑’(gocamping.or.kr)을 추천한다. 차박캠핑 | 드라이브하다가 원하는 곳에서 멈추고 싶을 때 오로지 자가용 한 대에서 즐기는 캠핑을 말한다. 부담스러운 가격의 캠핑카,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 확보가 어려운 캠핑장 등이 차박캠핑에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번거롭게 텐트를 치고 접을 일도 없다. 또 캠핑카처럼 부피가 크지 않아 기동성도 좋다. 산, 들, 바닷가 등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머물면서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으며, 오토캠핑처럼 취사도구를 이용해 제대로 조리해 먹기보다는 가볍게 때우거나 현지 맛집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차박캠핑이 반드시 SUV 차량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차량 뒷자리인 2열 시트 등받이를 접었을 때 트렁크와 이어지는 면이 수평으로 평평한 상태라면 경차, 소형승용차로도 차박캠핑을 즐길 수 있다. 평평한 바닥에 누웠을 때 본인 키보다 살짝 넉넉한 공간이면 된다. 필요에 따라 자동차 후미에 카트리퍼 혹은 도킹 텐트를 연결해 공간을 확장하기도 하는데 비용은 20만~50만 원 전후다. 차량 지붕 위에 설치하는 루프톱 텐트는 수백만 원 상당이다. 차박캠핑에 필요한 주요 장비는 쿠션감 있는 자충매트리스, 침낭 혹은 집에 있는 가벼운 이불, 외부에서 들어오는 한기를 막아줄 은박매트, USB로 연결 가능한 차량용 전기매트, 랜턴과 이동식 랜턴(보조배터리), 구급약품, 계절에 따라 모기장과 핫팩, 그리고 취사할 경우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 캠핑용 조리도구 스토브와 연료, 휴대용 식기와 수저, 다용도 나이프, 아이스박스 등이 있다. 필요하다면 카트리퍼 혹은 도킹 텐트, 루프톱 텐트, 타프도 구비한다. 차박캠핑의 장점으로 기동성을 꼽을 수 있지만 아무 데서나 차를 세우고 야영할 수는 없다. 법에 따라 전국의 도립, 시립, 군립, 국립공원, 국유림 임도, 사유지, 해안 방파제에서는 야영할 수 없다. 휴게소나 주차장에서 차박캠핑을 하더라도 불을 사용해 취사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차박캠핑 성지로는 당진 왜목마을, 충주 목계솔밭, 강릉 순긋해변과 안반데기, 홍천 모곡밤벌유원지, 여주 달맞이광장, 부산 오랑대공원, 태안 몽산포해수욕장, 부안 모항해수욕장이 있다. 백패킹 | 두 발로 정처 없이 걷다가 하룻밤 쉬고 싶을 때 야영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넣은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산, 숲, 트레일, 해안 등을 이동하다가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즐기는 캠핑을 말한다. 백패킹의 가장 큰 매력은 인적 드문 고요하고 신비로운 자연에서 잠들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이동해야 하기에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만드는 이른바 BPL(BackPacking Light)이 관건. 이동에 제약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장비와 식량을 꾸려야 한다. 장거리 트레킹의 경우 배낭 무게는 여행의 질을 좌우한다. 배낭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추리니 자연스럽게 백패킹 이후 나오는 쓰레기 또한 줄어든다. 내가 머문 자연의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바로 LNT(Leave No Trace)다. 백패킹 문화가 발달한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의 백패킹 인프라는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자연을 소중히 여기며 그 속에서 잠시 쉬어간다는 생각은 백패커라면 가져야 할 공동의 마음일 것이다. 백패킹에 필요한 주요 장비는 트레킹 위주의 백패킹을 할지, 야영 위주의 백패킹을 할지에 따라 다소 달라지지만 크게 운행 장비, 주거 장비, 취사 장비로 나눌 수 있다. 트레킹 중심의 백패킹이라면 무게가 중요하다. 오래 걸으며 산행하기 위해서는 편한 트레킹화와 배낭을 기본으로 스틱, 헤드램프, 랜턴, 텐트, 침낭, 매트리스, 모자, 취사도구, 식량 등이 필요하다. 야영 위주 백패킹의 경우 이동 거리가 짧기에 소화 가능한 캠핑 장비를 추가할 수 있다. 백패킹에서 가장 중요한 트레킹화와 배낭에 대해 좀 더 설명하면, 우선 트레킹화는 평소 신는 신발보다 한두 치수 크게 신을 것을 권한다. 등산용 양말이 두껍기도 하고 피로로 인해 발이 붓기 때문에 너무 딱 맞으면 산행을 지속할 수 없다. 배낭은 여름철이라면 50~60L급, 겨울철에는 80~90L급 배낭에 수납한다. 역시 법에 따라 전국의 도립, 시립, 군립, 국립공원, 국유림 임도에서는 야영할 수 없으며, 자연휴양림 혹은 야영장에서 야영할 수 있다. 현대차 ‘포레스트’, 자동차를 넘어 움직이는 집으로서의 가치 현대자동차 소형 트럭 포터Ⅱ를 기반으로 한 캠핑카 ‘포레스트’가 최근 핫한 캠핑카로 떠오르고 있다. ‘포레스트’는 어디에서도 캠핑할 수 있는 편안하고 넓은 실내 공간을 갖춰 ‘움직이는 집’이라는 콘셉트로 4인 가족이 사용할 수 있는 캠핑카다. 국내 캠핑카 등록 대수는 2014년부터 5년간 약 5배 증가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여가 활동 수요와 캠핑카 개조 규제 완화로 캠핑카가 늘고 있다. 정부는 연간 6000대 차량이 캠핑카로 개조되면서 1300억 원 규모 시장이 생겨날 것으로 전망했다. 포레스트는 스마트룸, 스마트베드를 적용해 실내 공간을 전동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했다. 스마트룸을 사용하면 차량 뒷부분이 800㎜ 연장되고, 확장된 부분은 침실로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베드 기능으로 침실을 두 층으로 나눌 수도 있다. 포레스트는 2열 승객석에 상황별로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가변 캠핑 시트를 탑재해 내부 공간 활용도를 끌어올렸다. 가변 시트는 주행 중에는 시트, 캠핑 시에는 소파, 잘 때는 침대 용도로 쓸 수 있다. 또한 캠핑지에서 샤워실, 화장실 등의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겪는 사생활 침해 등 불편을 고려해 독립형 샤워부스, 실내 좌변기를 선택사양으로 적용할 수 있다. 차량 내 각 창문에 커튼이 설치됐다. 또한 태양광을 전기로 바꿔주는 태양전지 패널도 사양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대용량 배터리 및 효율적인 충전 시스템을 적용해 캠핑 중 배터리 방전에 대한 걱정을 줄였다. 이밖에 현대차는 포레스트 내에 냉난방기, 냉장고, 싱크대, 전자레인지 같은 각종 편의사양을 제공해 고객들이 집과 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다양한 캠핑카 기능은 포레스트의 직관적인 터치식 통합 컨트롤러로 제어 가능하며, 블루투스 연결을 통해 스마트폰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
- 2021-04-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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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트하우스의 세계
-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이 드라마는 가상의 공간인 주상복합아파트 ‘헤라팰리스’의 펜트하우스를 둘러싼 갈등과 욕망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펜트하우스는 어떨까? 어떤 사람이 거주하고, 부동산으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최근 영국의 억만장자이자 가전 브랜드 ‘다이슨’의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 회장은 싱가포르의 펜트하우스를 6200만 싱가포르달러(약 520억 원)에 매각했다. 이 펜트하우스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64층 건물의 꼭대기 3개 층으로 약 1950㎡ 넓이에 4개의 침실과 개인 야외 수영장을 비롯한 카바나, 와인 저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고급 펜트하우스는 한국 자산가들 사이에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고가의 펜트하우스를 구매할 수 있는 ‘부자’가 증가한 덕분이다.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0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 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한국 부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약 25만 명이던 한국의 부자는 5년 사이 약 35만 명으로 10만 명이나 증가했다. 이와 더불어 부동산 자산은 비중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2016년 51.4%였던 부동산 자산의 비중은 2020년 56.6%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금융 자산은 43.6%에서 38.6%로 하락했다. 다른 요인은 바로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늘어난 홈루덴스가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홈루덴스는 밖에서 활동하지 않고 실내에서 여가활동을 보내는 이들을 일컫는다. 집을 비우던 낮에도 전염병의 여파로 가족끼리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경우가 생겼고, 이는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실제로 지난해 전용면적 85㎡ 초과 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약 270대1에 육박했다. 다른 면적의 경쟁률이 두 자릿수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큰 수치다. 부동산 관계자는 “중대형 아파트 수요가 늘면서 기본적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는 펜트하우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청약 치열…1순위는 사생활 보호 실제로 펜트하우스는 청약에서 소수의 세대만 모집하지만 경쟁률은 치열하다. 흥미로운 건 강남이나 한남동처럼 전통적인 부촌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난해 청약 접수를 진행한 세종시 한림풀에버는 가장 높은 청약 경쟁률이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 136㎡형으로 두 가구를 뽑는데 686명이 청약에 접수해 경쟁률은 무려 343대1이었다. 속초디오션자이의 전용면적 131㎡ A타입 펜트하우스도 114대1까지 경쟁률이 치솟았다. 당시 355가구 모집(특별공급 제외) 전체 평균 청약 경쟁률은 17대1이었다. 이에 대해 부동산114 관계자는 “펜트하우스가 지방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서울보다 좋은 조망권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사람의 면면은 화려하다. 기업인, 국회의원, 연예인 등 유명한 자산가들이 거주한다. 실제로 개그맨 주병진은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등장해 거주하는 상암동 카이저팰리스 펜트하우스를 공개하기도 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로덴하우스 웨스트빌리지 펜트하우스를 판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들이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울시 고급아파트 주거선택요인 중요도 분석’에 따르면 나인원 한남 입주 대상자를 중심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 1순위는 ‘사생활 보호’였다. 입지 환경에 해당하는 자연환경과 부동산으로서 미래 가치는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부동산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자산가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고액 자산가일수록 사생활 보호를 위해 타인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주택을 선호하는 편이다”라고 밝혔다. 인기 있는 럭셔리 펜트하우스 ▲ 나인원 한남 전통적인 부촌인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다. 입지 조건을 보면 남산을 뒤에 두고 한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길지다. 사생활 보호도 철저하다. 층마다 단독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아파트 주 출입구부터 주차장, 동 출입구, 현관에 이르는 4단계 보안 체계가 작동 중이다. 세계적인 조경 디자이너 사사키 요우지가 조성한 산책로가 있고, 국내 최대 규모의 클럽하우스도 단지 내에 위치한다. 복층과 펜트하우스 가구는 별도의 지정 차고와 전용 창고도 있다. ▲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성수동에 위치해 한강은 물론 서울숲, 남산을 볼 수 있다. 대림산업은 조망 프리미엄을 더하기 위해 특화설계를 적용했다. 모든 가구에서 서울숲이나 한강 조망이 가능하도록 층별 가구 수를 3가구, 9층 이하는 4가구로 조정하고 T자로 건물을 배치했다. 각 세대 내부에는 창문 중간 프레임을 없앤 아트 프레임과 넓게 펼쳐지는 270도 파노라마 뷰가 적용돼 거실, 주방, 욕실 등 집 안 곳곳에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 에테르노 청담 스페인 건축 거장 라파엘 모네오가 설계에 참여했으며, 청담동에 위치한다. 모네오는 1996년에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다. 지하 4층부터 지상 20층까지로 29세대만 거주할 수 있다. 대지 면적에 비해 세대 수가 적기 때문에 희소성이 높고, 올림픽대로와 오솔길공원이 가까워 막힘없는 한강 뷰를 제공한다. 내부 층고가 높아서 공간감과 개방감이 뛰어나다.
- 2021-03-0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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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에 도달한 건축의 품격을 보려거든
- 자유로를 벗어나 파주출판단지로 들어서자 드문 정경이 펼쳐진다. 저마다 개성과 미감으로 돋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늘어선 건물들로 풍경이 생동한다. 너절한 난개발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계획도시다. 내로라하는 건축가 여럿이 숙의하고 궁구해 만들었다. 홀로 있어도 매력으로 튈 건물이 군락을 이루어 볼거리로 족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출판단지 북쪽 끝자락에 있다. 주차장에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동선엔 작은 갈대밭이 있다. 하릴없이 누렇게 시든 채 살랑거리는 갈대들. 애잔한 서정을 자아낸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 바라보이는 헐벗은 식물엔 한 번 더 눈이 간다. 괜스레 들머리에 갈대밭 소로를 조성했으랴. 몇 걸음 안 되는 길이지만 갈대들의 고요한 율동에 마음을 조율해보라는 뜻이겠다. 갈대밭을 돌아 너른 잔디 정원으로 들어선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전면부가 와락 시선을 압도한다. 유별한 건물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형상이다. 수직으로 곧추선 건물의 삼면과 달리 곡면과 곡선의 연쇄로 이루어진 전면부 벽면의 이색이라니. 다각도로 휜 벽면이 두루마리 풀려나가듯 흐른다. 매끄러운 유영을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이지만 둔탁하지 않고 유려하니 모순적인 웅자(雄姿)다. 곡면들의 부드러운 파동에선 선율이 느껴지고 언어가 흘러나올 것만 같으니 건축으로 구현한 음악이자 시라 할까보다. 무감각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하여금 이토록 고매한 내면을 열어보이게 하다니. 경이로운 건축미라 할 수밖에 없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매년 서너 차례씩 미술 기획전을 펼친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그림을 즐길 수 있다. 그림만이 다는 아니다. “건축물 자체가 예술품이다!” 이렇게, 뮤지엄 측이 표방한다. 관람객의 상당수는 건축 자체의 디자인을 구경할 목적으로 찾아든다지. 국내외 건축가들, 건축학도들의 발길도 이어진다는 거고. 디자인과 미학은 물론 공법을 들여다보기 위해. 문외한의 눈에도 인상적인 건 건축 공법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건물의 서편 동체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건물을 떠받친 하부 기둥이 전혀 없는 구조여서다. 이른바 캔틸레버(cantilever, 일명 외팔보) 공법을 적용했다. 이는 건축 일반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경우에선 상황이 다르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내리누르는 어마어마한 하중을 캔틸레버로 감당하기가 실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로 사고가 날 뻔한 일도 있었다. 캔틸레버에 타설한 콘크리트가 한쪽으로 밀리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던 거다. 그러나 극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이 건축물에 동원된 기술력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1400평 부지에 지은 연면적 1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이루어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알바루 시자(′Alvaro Siza)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로 흔히 ‘모더니즘의 마지막 거장’이라 부른다. 대표작으로 포르투 세할베스 현대 미술관, 아베이루대학교 도서관,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비롯해, 안양 알바루 시자 홀, 아모레퍼시픽 연구원을 설계한 바 있다.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1988년 미스 반 데어로에 유럽 현대 건축상, 2001년 울프 예술상, 2002년, 2012년 두 번에 걸쳐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알바루 시자를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라 치지만 그는 사실 초기 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에 대해선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복잡다단한 생활환경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 과거 양식과의 과도한 단절로 마땅히 존중하고 반영해야 할 전통성을 무시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합리성만큼은 적극 수용했으며, 건축 패턴의 전통성과 지역성을 외면하지 않는 건축적 고려와 추구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다졌다. 곡면과 평면, 곡선과 직선의 드라마틱한 조합과 변주가 야기하는 감흥은 이 뮤지엄 건물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핵이다. 단순하되 정밀하며, 웅장하되 고요하다. 이 점에서 이 뮤지엄은 시자의 시그니처 스타일에 값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건축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료성과 단순함이다.” 그는 건축에 덕지덕지 군살을 붙이지 않았다. 군살빼기에 차라리 능하다. 이는 창의 수효를 최소화해 지은 뮤지엄의 외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자가 말한 ‘명료성’과 ‘단순함’은 모든 진리의 요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도 참뜻을 알고 나면 뜻밖에도 간명하지 않던가. 시자의 건축이 그저 하나의 시설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치열한 지적 탐색의 결과물일 수 있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알바루 시자 설계, ‘명료성’과 ‘단순함’ 추구 건물 곡면의 흐름에 편승해 천천히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뮤지엄 출입구 앞이다. 문을 열고 로비로 접어드는데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 후루룩 빨려 들어온 기분이 든다. 홀리듯 외관에 한참 취했던 바람에 벌어진 심리적 오작동? 뮤지엄을 찾은 재미가 이렇게 쏠쏠하다. 1층 공간은 로비와 카페테리아, 아트숍 등이 있는 휴게 공간과 미술 전시실로 양분돼 있다. 물론 둘을 나누는 벽은 없다. 개방적인 성향의 공간이다. 입구서부터 안통까지 층고가 점차 높아지는 구성으로 홀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북서향으로 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으로 공간의 반쯤은 밝으나 반쯤은 침침하다. 이곳에 인공조명은 거의 없다. 이게 외부의 자연을 끌어다 내부에 배포하는 것으로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알바루 시자의 방식이다. 한쪽 벽엔 높고 기다란 책장이 있다. 책들이 빼곡하다. 관람자들은 자유롭게 뽑아 읽을 수도 있고 할인가 구매도 가능하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만든 책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등 외국문학 번역서로 다수의 밀리언셀러를 배출한 출판사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가 지은 미술관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일찍부터 알바루 시자에게 꽂혔다고 한다. 언젠가는 시자의 설계를 받은 건축물을 짓고 싶다는 숙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날아가 시자의 건축물 답사에도 열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자와 손잡고 뮤지엄을 건립했다. “디자인이 정말 맘에 들어. 미메시스는 내 작품 가운데 최고야!” 가슴 깊이 품었던 숙원을 푼 홍지웅에게 시자가 건넨 말이 그랬다. 뮤지엄 건립엔 건축가 김준성(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도 한몫 단단히 했다. 건축평론가들은 김준성을 ‘감성 건축의 대가’라 부른다지. 그는 건축 견습생 시절에 시자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배운 적이 있다. 대가를 사사했으니 무엇으로, 왜,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는지 옹골차게 얻은 게 많았을 것이다. 시자와의 이런 인연으로 김준성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건축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시자를 말하는 글을 볼까. “사실 시자의 건축적 행보는 논리적으로 혹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리하기 어렵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투명하리만치 선명한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그의 작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켜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게는 재료에서 크게는 관계적인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단단하게.” (2020년 5월 20일자, 서울신문 기사 중) 전시실을 볼까. 1층의 절반과 2~3층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세 개의 전시실은 물론 계단 벽면들도 건물 외부 벽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칠갑을 했다. 내·외부에 통째 순백색 입히기. 이건 시자의 관습이다. 그가 추구하는 ‘명료성’과 ‘단순함’을 구현하는 데엔 백색이 적격이라 봐서일까? 그러나 순전한 화이트 큐브에 현기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관람자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전시실들에서는 면과 선이 극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곡면과 곡선이, 평면과 직선이, 예각과 둔각이 상호 교접하거나 교차하며, 또는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생기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화이트 큐브의 지루한 단조로움을 타파한다. 이 뮤지엄을 예술적 건축물로 보는 눈이 많은 이유는 선과 면의 다채로운 조합에서 야기되는 심미감 때문일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조명의 구사 방식이다. 전시실마다 인공조명을 자제하고 태양이 무상으로 보내주는 빛을 끌어다 쓴다. 3층 전시실은 숫제 인공조명을 전혀 도입하지 않았다. 슬래브 지붕을 뻥 뚫어 설치한 천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천장에 매달아놓은 이중 천장의 가장자리를 통해 공간에 흩어질 뿐이다. 이렇게 살포된 빛은 그 농담(濃淡)의 묘를 붓으로 삼아 화이트 큐브에 수묵을 그린다. 시시각각 광량과 광도가 변하는 게 빛이다. 따라서 전시실의 조도(照度)도 시시각각 변하며 덩달아 분위기도 미묘하게 변전한다. “비 내려 빛이 너무 약하거나 어두운 저녁에는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죠?” 뮤지엄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건축가 김준성이 스승에게 물었다. 알바루 시자의 답은 이랬다. “안 보여주면 돼!” 시자의 건축은 건축 자재들만의 집적이 아닌 거다. 자연의 빛이 가세하고서야 건축이 완결되고, 그 쓰임새와 미감이 완성된다고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자는 빛을 다루는 달인? 빛의 탐식가? 그건 그렇고, 아무튼 자연광이 어슴푸레 아롱지는 3층 공간은 미술 전시실이지만 뭔가 원초적인 동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상상력을 북돋아 아득한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3개의 전시실에서는 기획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30~40대 작가들이 참여했다. 기량도 개성도 저마다 발군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엔 세상에서 그림처럼 재미있는 게 없지 싶다. 오늘도 그런 감흥을 느끼며 깜냥껏 즐겼다. 그러나 뇌리에 남은 건 미술작품이 아니라 건축 자체다.
- 2021-01-1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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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이 캄캄하다면 저 강물에게 물어라
- 강과 산과 하회마을이 맞물려 자아내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애와 겸암의 행장을 더듬어보는 재미도 짭짤하다. 부용대 주차장에 당도한 뒤 부용대-겸암정사-옥연정사 순으로 탐승한다.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도선을 타고 강을 건너 부용대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그저 봉긋할 뿐, 야트막한 야산이다. 산길은 밋밋한 데다 펑퍼짐해 풍경이 맺힐 리 없다. 꼭대기에 오른들 뭐 볼 게 있으랴 싶었으나, 웬걸, 부용대(芙蓉臺) 산마루에 닿자 급격한 반전이다. 별안간 확 트이는 시야 가득히, 수직벼랑 저 아래로 사행(蛇行)하는 낙동강이 엄습해오는 게 아닌가. 강의 젖을 물고 들어앉은 물동이동(洞) 하회마을도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 모래밭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몽당연필처럼 작달막하게 짜부라져 코믹하다. 부용대는 강물과 하회마을을 한꺼번에 부감할 수 있는 전망대다. ‘부용’은 연꽃을 상징한다. 이곳 아찔한 벼랑 위에서 옛사람들은 하회마을을 통째 연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의 길지라고 일렀다. 긴 말이 필요 없겠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를 통해 물가의 마을 중 살기 좋은 곳으로 하회를 제일로 쳤다. 살기에 좋아 출세한 이들이 속출했나. 풍산 유 씨 씨족촌인 하회마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형제 대(代)부터 번창해 위력을 떨쳤다. 현대에 이르러선 인파가 몰리는 관광명소로 거듭난 마을이다. 고택과 초가로 연출한 관광 재료들에 힘입어 상업이 기차게 발달했다. 그러나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땅에 납작 엎드려 포복하는 마을일 따름이다. 거뭇한 기와지붕과 누런 초가지붕이 어우러진 자못 이상적인 색감 조합으로 평화롭다. 하회마을을 에두른 솔숲과 강물은 또 얼마나 평온한가. 마을 안에선 지금 열띤 호객 경쟁이 벌어지고, 여행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고, 연인들은 혹간 초가집 뒤란에 숨어 숨 막힐 키스를 할지도 모르지만 높은 곳에서 보면 일체가 은자처럼 마냥 고즈넉하다. 티 없이 조화롭다. 삶이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모든 게 상통이자 상생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아 애잔하다. 가장 드높은 곳에 상주하는 신이나 하늘에게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해 슬픈 나를 자각할 때다. 부용대 서편 오솔길을 따르자니 숲이 제법 깊어진다. 솔향기 감돌아 청신하다. 아무리 작은 야산이라도 향이 있고 깊이가 있고 기품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서 멈춰 산에 산다. 청산을 건너던 나비가 들꽃에 꽂혀 갈 길을 잊듯이. 강물에 밀리는 모래알처럼 덧없는 인생, 굳이 꿍꿍이와 아귀다툼이 난무하는 비정성시(悲情城市)에 살 일이 뭐람. 그쯤의 생각이었을까. 겸암은 문득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이 야산 자락에 공부방을 두고 지냈다. 겸암정사(謙菴精舍)가 바로 그곳이다. 부용대 동쪽 산자락 아래편엔 서애 유성룡이 벼슬을 마치고 머문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다. 야산 양편에 형제가 나란히 정사를 짓고 자연 속에 은거했던 셈이다. 벼슬살이로 보낸 세월이 길었으나 둘 다 퇴계를 사사한 도학자로서도 쌓은 게 많았다. 못 말릴 산야 기질도 스승을 닮아 자연을 경전으로 읽었고, 흐르는 강물과 솔의 푸름을 바라보기를 유락(遊樂)으로 삼았다. 그래 격물치지의 혜안이 환하게 열렸을 테다. 특히나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 서애를 따를 이가 누구랴. 서애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과 권율을 임금에게 천거했다. 실로 신의 한 수였다. 지척에 살아 형제간 만남도 잦았던가보다. 심심파적으로 산꽃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일도 흔했으리라. ‘층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야산의 3부 능선쯤에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는 옛길 하나. 형제는 이 ‘층길’에서 상면하길 즐겼다고 전해진다. 옹색해서 위험한 층층 벼랑길이라 요즘은 아예 출입을 금지했다. 옥연정사는 강변의 높직한 둔덕에 있다. 고가의 관용과 운치로 아름답다. 서애는 여기에서 임진왜란의 전말을 담은 ‘징비록’을 집필했다. 전쟁의 사령탑 역할을 한 서애였으니 리얼리티로 생동하는 책이다. 그의 성품은 맑고 온유했다지. 그러나 실록엔 곱지 않은 평도 간간이 나타난다. 줏대가 약해 폐단을 당차게 간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기록했다. 만년의 서애는 “평생 부끄러운 일이 많아 한스럽다”고 탄식했다. 세상의 갈채에도 불구하고 묵은 빚을 느꼈다? 그렇더라도 그 겸허한 풍모가 오히려 출중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설령 비바람의 광란에 수면을 찢기더라도 유유히 흐를 뿐이다. 먼지구덩이 세상이라도 아랑곳없이 나아간다. 눈앞이 캄캄한 삶이라면 저 강물에게 물을 일이다.
- 2020-12-1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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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로 가는 섬 여행
- 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 시대를 맞아 외출이나 여행 방법도 확연히 달라졌다. 자신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여행으로 가장 쉬운 것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집콕에서 벗어나 자동차 차창 밖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드라이브 스루 여행지가 멀리 있지 않다. 자동차로 가는 섬으로 떠나보자.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섬 여행으로는 이야기를 품은 서해의 대부도 권역이 있다. 시화방조제와 연륙교가 건설된 덕분에 배를 타지 않고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세 개의 섬을 마치 육지인 양 이어서 오갈 수 있는 편리함이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더구나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을 돌려 귀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서울을 벗어나 시화방조제 위에 세워진 시화나래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바라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로 근처엔 붐비던 대부 여객터미널과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방아머리 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산하다. 그 옆의 텅 빈 방아머리 해수욕장도 역시 조용하고 푸르기만 하다. 달라진 세상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섬마을의 평온, 선재도 목섬 대부도와 영흥도를 잇는 징검다리 섬 선재도는 주변 섬과는 달리 작고 한적한 섬이었다. 선재대교를 건너자마자 내려다보면 홀로 떠 있는 동그란 섬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개 중 하나인 목섬.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곡선의 모래 갯벌이 나타난다. 그 길을 향해 걷는 이들에겐 멋진 추억의 길이 되고 목섬은 여전히 푸른 하늘과 갯벌과 해송이 함께한다.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선재도. 담벼락마다 동화처럼 아이들이 뛰놀고 봄날 꽃그늘 아래서 설레던 마음들이 피어나듯 고즈넉한 섬마을의 벽화가 정답다. 고양이가 조을고 있는 골목 옆으로 선재리 커피집의 잠자리 날개 같은 커튼이 저 혼자 바람에 날리고 있다. 모든 게 멈춘 듯 적막하다. 한때 인기 있던 마을의 갯벌체험이 잠잠하다. 입장료만 내면 호미와 장화를 빌려주고 1인당 1.5kg까지 바지락·동죽을 캘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적만 가득하다. 이국적인 감성 카페 그나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던 곳, 사진작가 김연용 씨가 운영하는 카페 선재도의 명물이었던 뻘 다방, 한때 줄을 서서 차를 주문했던 감성 카페의 앞마당은 해변과 갯벌이다. 갖가지 문화행사를 했던 이곳에 몇 명의 여행자만 오간다. 바다를 향한 풍경이 이국의 정취를 연상케 하고 곳곳이 사진 스폿이었는데 이젠 야외의 빈 의자에 뙤약볕만 내리고 있다. 나오며 돌아본 간판의 큰 글씨가 마음에 들어온다. "Hakuna Matata(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숨어들 듯 고요한 측도 뻘 다방 옆으로는 측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이 보인다. 밀물 때는 선재도와 분리되고 썰물 때는 잠수 도로를 이용해 도보나 차량 통행이 가능한 아주 작은 섬이다. 물속에 세워졌던 기둥이 바닥까지 드러나고 그 바닷길을 건너 측도에 드니 세상과 아주 뚝 떨어진 느낌이다. 인적 없는 조용한 섬마을 뒤편 산 아래에 서서 바다 건너편 마을을 딴 세상을 보듯 본다. 세상모르게 숨어들어 한적하게 쉬고 싶을 때 딱 좋을 듯하다. 물속 길 따라 박혀 있는 전신주 / 그 기둥에 새겨 넣었던 돌의 말 / 하루에 두 번 물이 길을 낳을 때마다 / 상처를 열어 말리며 / 달을 향해 푸르게 웃었을까 / 밖으로 드러난 불안을 어루만지며 / 흔적을 수장할 물때를 기록 중일까 / -박선희 시인의 '측도 가는 길' 중에서 배 타지 않고 다시 섬, 영흥도 그곳에 가면 100년이 넘은 꼬불꼬불한 소사나무 숲이 울창하고, 밀물과 썰물의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기다린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거점이므로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있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서해교전의 퇴역함인 참수리호를 보며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의 거대한 분재전시장 같은 소사나무 군락지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뒤틀린 기이한 형상이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담기 위해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는 자연스러운 방풍림으로 그 자리를 지켰는데 이번에 가보니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주변에 울타리가 생겼다. 지금은 소사나무 숲 주변 벤치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멋진 배경으로 든든하다. 염분이 많고 모래와 자갈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 100년이 훌쩍 넘는 소사나무가 아름다운 숲이 되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 되어주고 있다. 소사나무 저편으로 펼쳐진 십리포 해변에 더러 사람들이 보인다.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해서 십리포다. 마치 철 지난 바다처럼 한적하다. 덱의 파라솔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아무 말 없이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그 바다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의 흔적 켜켜이 쌓인 대부광산 퇴적암층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만 보이는 게 아니다. 세월을 품은 이색적인 숨은 명소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호수와 퇴적암층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대부광산 퇴적암층을 찾아갈 생각에 핸들을 돌렸다. 입구의 풀숲을 조금 지나면서 범상치 않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왠지 가슴이 뛴다. 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암층은, 짙은 녹색의 수면을 뚫고 공룡이라도 튀어오를 듯 원시적인 풍경이 압도한다. 옛날엔 광산이 있던 자리였는데 1997년 초식 공룡의 발자국과 중생대 식물화석이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 근교에서 중생대의 환경과 공룡의 생생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뒤편의 전망대에 오르니 호수와 퇴적층을 조망하기 좋다. 넓게 탁 트인 잔디밭으로 시원하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옆길을 돌아 호수 뒤편의 전망대에서는 탄도항과 제부도가 보이고 요트가 떠 있는 전곡항도 볼 수 있다. 세월의 한 지점에 서서 바라보는 기억 속의 하루가 또 한 겹 쌓인다. 공룡은 사라졌지만 켜켜이 쌓인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도 여기에 또 한 켜 쌓일 테고 우리네 삶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퇴적암층 주차장 옆으로는 제법 큰 규모의 대부도 365 시티 캠핑장이 있다). 바닷길 달려 섬 너머 제부도 예전 같으면 배를 타고 건넜을 섬 대부도와 선재도를 거쳐 영흥도까지 자동차로 휘익 달리니 시간이 여유롭다. 몇 번쯤 차에서 내려서 잠깐씩 둘러보았던 것 말고는 대부분 자동차로 달렸다. 길가에 바지락 칼국수 가게가 즐비했지만 떠나기 전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준비했다. 자동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소풍처럼 점심을 즐기고 커피 한 잔의 맛을 누렸다. 시간이 제법 남는다.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시간에 제부도로 가볼까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꿔 그 바닷길을 달렸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은 제부도의 매력이다. 2.3㎞의 열린 바닷길 양옆으로 펼쳐진 갯벌 위로 하늘이 끝없이 푸르다. 늦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두고 제부도의 바닷바람 속에 있다. 홀로 텐트 그늘에 앉아 바다를 향해 앉아 사색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섬 남단의 매바위 부근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모래 해변에 멀찍이 거리 두고 텐트가 몇 개 자리 잡고 있다. 물 빠진 너른 갯벌 위에선 진흙투성이의 아이들이 즐겁다. 북적이지 않아도 제법 계절이 느껴진다. 해안 따라 즐비한 그늘 의자가 비어있고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섬은 이럴 때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수도권에서 가까워 이따금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젠 발길이 닿는 곳들마다 예사롭지 않다. 낯선 듯 감사한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풀숲, 모래밭, 산, 나무, 하늘, 바다, 갯벌, 햇살, 구름, 바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신의 축복 탄도항 노을 느지막이 돌아가는 길이라면 탄도항의 일몰을 경험해볼 만하다. 일몰시간은 대략 저녁 7시 전후 즈음이다. 하루 두 번 물 빠짐 현상으로 바닷길이 열리면 건너편 누에섬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탄도항 제방둑에 미리 자리 잡고 앉으니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다의 하루가 저물고 노을 속 사람들의 실루엣도 풍경이다. 신의 축복처럼 번져가는 노을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다. 추천 코스 시화방조제→대부도 방아머리 해수욕장, 방아머리항 선착장→선재도 벽화마을→목섬, 뻘 다방→측도→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 소사나무 군락→대부도 대부광산 퇴적암층→제부도 해안→탄도항 노을→서울
- 2020-09-0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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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는 S자로 흐른다.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나란히 있다.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신장이 족히 19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 된 도로를 걷고 있는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잠깐,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eo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1년 전에 한국에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이 심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병산서원 주차장이었다. 돌아갈 때도 태워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 중장년층 세대의 병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시작됐을 듯싶다. 유 교수는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아울러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200여 명은 함께 모여 강학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망루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모래사장의 풍경과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만대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해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너무 황홀하다. 가끔 수련에 지장이 되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병산서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다 반겨준다. 우리가 떠나버린 건 아닌지 걱정한 모습이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버스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우리는 안동버스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내려주며, 저 친구가 오늘을 평생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 2020-07-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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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두라
- 남산은 크지 않으나 용장골 냇물은 순수하고 곱살하다. 남산 특유의 허연 화강암 암반과 암벽도 곳곳에서 풍치를 돋운다.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용장주차장에 파킹하고 이정표를 따라 용장골을 탐승한다. 용장사지까지는 약 2㎞. 용트림하는 아름드리 노송들과 수많은 불상을 볼 수 있는 삼릉골 코스를 통해 용장사지에 오를 수도 있다. 경주 남산을 ‘노천박물관’이라 부르는 건 신라의 유적이 많아서다. 능선과 골짜기에 산재한 절터만 100여 곳이다. 불상, 석탑, 석등, 연화대 등 불교 유산이 200기 이상에 달한다. 이 산을 통째 ‘불국’(佛國)으로 봐도 지나칠 게 없다. 남산을 오르는 탐방로는 20여 개. 그 가운데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용장골 코스가 썩 빼어나다. 산길이 평평해 활개 치며 걷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오르막에도 헐떡거린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노루처럼 날래게 산을 오르던 때의 몸이 아니다. 이럴 때면 몸을 흘러간 과거 시간의 형적을 느낀다. 아울러, 지금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시간의 기척을 깨닫는다. 기억해야겠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이 삶의 절정임을. 여름 나무들은 크거나 작거나 다들 풍요롭다. 초록 잎사귀들이 허공에 뒤엉켜 길 위로는 푸른 그늘이 내린다. 계류는 참 맑고 풍성하다. 좁은 목에서 돌돌거리던 물소리가 여울에선 솰솰 소용돌이친다. 바위 턱을 만나면 쿵쿵쿵 소쿠라진다. 각색의 물소리가 흥겹다. 물은 제 갈 길 가는 게 즐거운가? 낮은 곳으로, 한사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하심(下心)으로 흐뭇한가? 사람이 물처럼 살기는 어렵다. 용렬한 자에게 물은 준령처럼 너무 높다. 분수를 알아 조신하게 살기에도 숨이 차 마냥 푼수로 산다. 임제 선사가 이렇게 일렀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만 극락이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임제는, 사람들아, 평상심 안에 길이 있다! 그리 귀띔한다. 너무 폼 잡지 말라 한다. 너무 멀리 보지 말라 한다. 산과 물에 기죽어 현기증 느끼지 말라 한다. 극락이 무슨 서천(西天) 허공에 있겠느냐. 지금 네가 발 디딘 자리가 환한 길이다. 저기가 아니라 여기가 청산이다. 그리 가르친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설잠교(雪岑橋)를 건너자 길이 가팔라진다. 설잠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법명으로, 그가 무시로 오간 길목이라 봐 설잠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시습이 생의 한때를 이곳 남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용장골 탐승은, 이 산의 바람소리이거나 물소리이거나, 나무이거나 바위이거나, 하다못해 환(幻)이거나 혼이거나, 그 무엇이로건 가슴으로 느껴질 법한 김시습의 잔영을 탐사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처연했으나, 행장은 올곧았고 정신은 자유로웠다. 나는 좀스러워 쓸쓸하나 일쑤 김시습을 생각하며 위안을 느낀다. 다산, 추사, 그리고 김시습을 조선의 3대 ‘매력남’이라 여기며. 비탈길에 접어들면서 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몸은 어리굴젓처럼 물크러지는 기분이니 가관이다. 그러나 짤막한 비탈이라 잠깐 사이에 목적지로 삼은 용장사지(茸長寺址)에 닿는다. 절터라지만 여겨볼 게 없을 지경으로 산등성이의 비좁은 둔덕이다. 그래서겠지, 절터 저편 위 평지나 암벽에 성물을 조성했다.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그것들이다. 삼층석탑은 균형미로 아름답고, 마애여래좌상은 사실적 표현으로 생생하다. 가련한 건 석불좌상이다. 머리를 잃은 부처이니 딱하다. 그러나 부처에게 무슨 머리가 필요하겠나. 머리를 버리는 게 부처다. 번뇌가 고이고, 망상이 들솟는 머리를 타파한 게 부처다. 그걸 모르고 우리는 간장종지처럼 비좁은 머리에 의존한다. 잔머리를 최대치로 쓰며 골머리 아파한다. 부처는 이런 중생이 가여워 울고 싶은 심정일 게다. 김시습은 이곳 용장사에서 조선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글을 쓰면서 그가 사용한 게 주로 머리였을까?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쓰지 않았을까? 절개로 살았던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였던 김시습은 타락한 권력의 바깥에서 시대를 절규한 방외자(方外子)였다. 곡학아세의 선수들을 조롱한 아웃사이더였다. 세상이 울지 않을 때 울었고, 세상이 웃지 않을 때 웃었던 독존(獨存)으로 일세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유랑한 길섶엔 기화(琪花)처럼 요요한 게 피었으니 바로 시라는 꽃이었다. 김시습이 생시에 남긴 죽음의 메시지는 매우 조촐한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주구려!’라 했으니.
- 2020-07-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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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과 14대 후손 이육사
-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 2020-07-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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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철 '척추피로증후군' 이렇게 대처하자
- 바캉스의 계절 여름이 찾아왔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올여름 휴가 풍경을 크게 변화시킬 전망이다. 해외여행은 사실상 어려워졌고 생활 방역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국내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실제 한 글로벌 여행사가 국내 성인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가 ‘올해는 국내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고 복지시설들이 휴관하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시니어들은 여름휴가만큼은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휴가를 계획할 때 건강과 안전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올여름 휴가 시즌에 가장 주목받을 여행 테마는 인파가 몰리지 않는 ‘산과 들로 떠나는 여행’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들과 거리두기도 용이하고 환기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실내보다는 코로나19 감염 위협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파가 몰리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자차를 이용해야 할 경우가 많다. 또 휴가철이라 교통대란을 피하기 쉽지 않다. 올여름 휴가는 국내로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 더더욱 그럴 것이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로 위에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구나 앉은 자세는 서 있을 때보다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이 1.5배가량 늘어난다. 차량에서 앉은 자세로 오래 있을 경우 척추에 부담이 돼 목과 허리가 뻐근해지기도 하고 통증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척추피로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척추피로증후군은 장시간 불편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때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이다. 방치하면 추간판탈출증(디스크)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척추·관절 노화가 진행 중인 시니어는 대수롭게 여기면 안 된다. 척추피로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목과 허리 근육의 긴장을 줄여야 한다. 장거리 운전 시에는 엉덩이를 운전석 뒤로 밀착해 허리와 목을 곧게 펴야 척추가 받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적어도 2시간 간격으로 휴게소나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스트레칭을 해줘야 한다. 귀가 후 온욕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40℃ 전후의 따뜻한 물에서 즐기는 온욕은 수축된 몸을 이완, 완화해준다. 이때 목욕물에 한약재나 허브를 넣어주면 더 효과적이다. 만약 피로가 쉽게 해소되지 않거나 목과 허리 통증이 3일 이상 지속된다면 전문가를 찾아 진단을 받아봐야 한다. 한방에서는 추나요법을 비롯해 약침, 침 등 한방통합치료로 척추피로증후군을 포함한 허리 통증을 다스린다. 추나요법은 경직된 관절과 뭉쳐서 굳은 근육을 교정해 신체 균형을 바로 잡고 통증을 해소해준다. 한약재를 정제한 약침과 침 치료는 기혈과 체액의 순환을 촉진해 빠른 회복을 돕는다. 올여름은 여느 해보다 더 더울 것이라고 한다. 더운 날씨는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고 땀을 많이 흘리게 해 기운을 소모시킨다. 지친 상태의 몸은 자연스레 면역력도 떨어져 각종 질환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여름에는 섭생이 중요하다.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어 양기를 몸 안에 저축해야 한다. 삼계탕, 장어, 추어탕 등과 같은 보양식을 이따금씩 섭취해주면 좋다. 등산이나 산책 등 적당한 신체 활동과 함께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도 체력 저하를 막고 체내 기운이 원활히 순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름은 ‘내실을 기하는 계절’이다. 휴가를 즐기는 데 집중하느라 건강관리에 소홀하면 양기를 소진한 상태에서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게 돼 잔병치레를 할 수도 있다. 휴가지에서도 평상시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면 좋다.
- 2020-07-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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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망증은 ‘새는 술잔’이라네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세차를 하는 날, 세차장이 바로 집 옆이어서 차 몰고 가는 건 좀 뭐하다고 생각해 걸어갔다. -강아지 털 밀기로 예약한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아 막 뛰어갔는데, 강아지를 안 데리고 왔더라. 최근 인터넷에서 읽은 건망증 사례다. 쯧쯧. 젊은 사람들인 걸로 보이는데, 벌써부터 그러니 참 안됐다. 다음은 교수의 건망증에 관한 유머. 기차를 기다리던 교수 세 명이 각자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기차가 저만큼 떠나자 쫓아가 올라탔다. 동작이 굼뜬 교수는 타지 못했다. 지켜보던 사람이 “그래도 셋 중 둘이나 탔네”라고 놀리자 낙오된 교수가 “저 사람들은 날 배웅하러 왔던 거 같은데…”라고 했다. 교수들은 왜 잘 잊어버릴까. 교수유머는 수도 없이 많다. 독일 대학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한 분은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은 이제부터 시간을 못 지키더라도 용서와 이해를 받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라고 해 다들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근데 나는 교수도 아니면서 왜 자꾸 뭘 잊어버리는 거지? 차로 출퇴근하던 시절, 지하철 타고 몇 정거장 갔다가 회사 주차장으로 되돌아옴. 흐린 날, 검은 우산과 검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집을 나와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지하철까지 감. 사람들이 자꾸 이상하게 쳐다봐 유턴, 쓰레기통 뒤져서 우산을 찾음. 최근에 자주 잊어버리는 건 마스크다. 난 마스크 버리기가 아까워 몇 개를 빨랫줄에 걸어놓고 나름대로 햇볕에 ‘소독’한 다음 번갈아 쓰고 있다. “마스크는 내 친구”(남양주시의 포스터)라는데, 외출할 때 집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들어갔다 나와 보니 이번엔 휴대폰이 없어 또 들어가고…. 며칠 전 밥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더라. 그날 화제는 건망증(健忘症)이었다. 우선, 건망증에 왜 健(건강할 건) 자가 들어갈까. 잊어야 건강해진다는 뜻일까. 너무 많은 걸 기억하고 하나도 안 잊어버리면 정신건강상 오히려 해로우니 적당히 잊어야 한다는 뜻에서 만든 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파우스트도 1부에서 저지른 악행과 잘못을 완전 망각한 뒤에야 2부에서 사람이 된다. 그럴듯했다. 어감상 일본인들이 만든 말 같다는 의심도 제기됐다. 궁금해 찾아보니 당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가 나왔다. 그의 ‘偶作寄郞之’(우작기낭지, 우연히 지어 낭지에게 주다)라는 작품의 맨 끝에 “老來多健忘(노래다건망, 나이 먹으니 더 잊기를 잘하나) 唯不忘相思(유불망상사, 오직 그리움만은 잊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이 경우의 健은 ‘매우, 몹시, 잘, ~에 뛰어남’이라는 뜻이다. 건송(健訟, 하찮은 일에 송사 걸기를 좋아함), 건설(健舌, 뛰어난 말재주), 건필(健筆, 글씨를 잘 씀), 이런 말이 같은 용법이다. 한자가 재미있고도 어려운 것은 한 글자가 다양하고도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남긴 ‘離騷經’(이소경)의 경우, 離는 떼어놓다, 가르다, 벗어나다, 피하다라는 뜻 외에 걸리다, 당하다, 만나다라는 뜻이 있다. 심지어 결혼하다라는 뜻도 있으니 오늘날의 이혼(離婚)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그러니까 離騷는 근심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걱정거리를 만났다, 우환(憂患)에 걸렸다는 뜻이다. 이 경우의 離는 나중에 罹(병, 근심, 재앙 따위에 걸릴 이)로 바꿔 쓰게 됐다. 이환(罹患) 이재민(罹災民)이 그런 경우인데, 국회 부의장까지 했던 어떤 국회의원이 정부의 수재대책을 따지면서 이재민을 나재민으로 읽어 망신을 한 일이 있다. ‘罹’(걸릴 이)를 ‘羅’(벌릴 나)로 본 탓이다. 息(식)도 참 묘한 글자다. 생존하다, 번식하다, 살다라는 뜻과 상반되게 그치다, 그만두다, 망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거 참, 어디 가서 남들 앞에 아는 체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건망증을 알기 쉽게 ‘새는 술잔’에 비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에 “온갖 근심 한데 모여 속이 오글오글 타고[百憂幷集似焦釜] 만사는 잘도 잊어버려 새는 술잔 같네[萬事健忘如漏巵]”라는 표현이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시에도 “가난하여 배부름 꾀한 것 때때로 우스워라[貧謀一飽時還笑] 세상 인정 잘 잊는 건 새는 술잔 같다오[世態健忘如漏巵]”라고 한 대목이 있다. 누가 누구 표현을 베낀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시대의 일반적인 표현이었나? 동시대의 인물인 두 분은 그리 살갑지 않아 서로의 문장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김종직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서거정이 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는 말도 있더라. 새는 술잔, 즉 누치(漏巵)는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지금 낙숫물 방울도 충분히 항아리를 채워 넘치게 할 수 있지만, 강하의 큰물도 새는 술잔은 채울 수 없나니,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今夫霤水足以溢壺榼 而江河不能實漏巵 故人心猶是也].” 원래 뜻은 이렇게 주량이 많은 것, 절약하지 않고 헤피 쓰는 걸 경계하는 말이었는데, 후대에 내려와 건망증으로 연결된 것 같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새는 술잔’은 정말 치명적인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전고를 찾고 문자 공부를 한다고 해서 건망증이 치유되거나 해소될까. 오히려 잊어버려야 할 것만 더 쌓아두는 게 아닐까. 전에 읽었던 책을 간혹 뒤지다 보면 내가 같은 걸 여기저기에 써둔 메모가 발견된다. 잊어버리고 또 적어두고, 잊어버리고 또 적어놓은 탓이다. 건망(健忘)은 결국 다망(多忘)이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그만.
- 2020-07-01 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