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연기자의 길을 함께 걷는 나와 집사람은 상반되는 점이 많아요. 감성적인 나는 화가 나면 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끓어오르지만 이성적인 집사람은 그럴수록 감정을 아래로 가라앉혀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상반된 부분을 닮아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아내의 연기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했지요. 46년 동안 부부로, 동료 연기자로 한길을 함께 걸어왔는데 참 행복합니다.” 중견 연기자 최불암(76)은 1970년 김민자(74)와 결혼해 46년 동안 부부로, 배우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 살아온 생활이 많이 행복하다고 했다.
“한참 활동을 할 때는 서로의 연기와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저는 남편의 연기에 대해 엄격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스타일이에요. 요즘에는 남편이 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건강에 많이 신경을 쓰게 되네요. 연기자라는 한길을 걸었기에 연기자로 일하면서도, 부부생활에서도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았어요.” 김민자 역시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 최불암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근래 들어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연예인끼리 결혼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 교사, 의사, 변호사 등 같은 직업을 갖거나 식당, 농사 등 같은 일을 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같은 일을 할 때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소통도 잘돼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부부생활에서도 활력이 생긴다는 부부가 있다. 반면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배우자에 대한 긴장감과 설렘이 사라지는 데다 일하는 능력과 수입의 편차 등으로 부부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은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대중매체의 조명이 잇따르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 작품마다 반응과 평가가 다르고 수입과 직결되는 인기는 매우 가변적이다. 일하는 활동량도 인기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곳’이 연예계이기에 소문과 스캔들이 상존한다. 배우나 가수라는 직업은 일반 직장과 전혀 달라 근무 형태가 매우 불규칙적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졌기에 배우, 가수, 예능인 등 연예인끼리 결혼한 부부들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최불암·김민자 부부는 연기자라는 길을 함께 걸어 서로를 더 잘 이해해 생활면에서 많이 행복하고 배우로서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가수, 배우, 예능인 등 연예인의 길을 함께 걷는 부부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예인 부부의 삶은 천양지차다. 연예인 부부마다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에 큰 차이를 보인다.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이라 명명되며 수많은 대중매체와 대중의 관심 속에 결혼한 영화 스타 신성일(79)·엄앵란(80)부부는 결혼 이후 활동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신성일은 계속해서 영화 활동을 왕성하게 했지만, 엄앵란은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가사와 사업에 전념했다. 부부생활 역시 남편 신성일의 외도로 인해 1977년 별거 상태에 들어가 현재에도 신성일은 경북 영천에, 엄앵란은 서울에서 서로의 삶을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엄앵란은 방송 등을 통해 “시댁에서 연예 활동을 반대했고 또한 가정을 책임져야 해서 결혼 이후 배우 활동을 접고 육아와 사업에 전념했다. 남편의 외도 등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 견디며 살았다. 남들은 신성일 씨가 워낙 매너가 좋고 잘해줘 ‘당신 좋겠다’고 하면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신성일씨는 남편으로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연기자로서는 최고다. 같은 배우 입에서 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저서 등에서 “아내 엄앵란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이고 아내로서도 최고다. 여러 가지 일로 내가 많이 힘들게 했다. 배우 신성일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다. 팬들을 실망하게 하는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고 밝혔다.
1994년 방송된 드라마 남·녀 주연으로 나선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해 1995년 결혼한 차인표(49)·신애라(47) 부부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차인표·신애라, 두 사람은 연예 활동은 물론 두 아이의 입양, 자선 활동,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함께하며 진정한 동반자의 삶을 살고 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작품 선택에서부터 아이들의 육아 방향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를 하며 결정한다. 신애라는 아이를 출산하고 두 아이를 입양하면서 육아, 가사, 그리고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작품 출연과 방송 활동을 줄였다. 반면 차인표는 결혼 이후에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신애라는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어 연예 활동을 제가 스스로 줄인 겁니다. 물론 좋은 작품이 섭외가 오면 출연했지요. 전 저보다 남편이 연기자로서 더 잘되는 것이 좋아요”라며 결혼 후 차인표 인기는 치솟고 자신의 인기가 낮아진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좋다고 했다.
신애라는 “결혼 여부를 떠나 차인표씨만큼 저와 잘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가 받아 줄 수 있는 단점과 서로가 기뻐할 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남편 차인표에 대해 말했다. 차인표는 “당신은 옷장이었다. 문만 열면 필요한 옷이 있었다. 추울 땐 두꺼운 외투, 털장갑을 건네줬다. 무더운 날엔 시원하게 다니라고 모시옷을 내줬다. 나의 진실한 옷장이었다. 울면 울어주고, 기쁜 날 더 크게 웃어 주고 좋은 날 산책해 준 당신, 당신은 내가 있는 이유다”라고 신애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수종(54)·하희라(47) 부부 역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행보와 비슷하다. 최수종이 드라마 작품에 들어가면 하희라가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남편의 대본 리딩도 옆에서 도와준다. 최수종 역시 하희라가 드라마에 출연하면 촬영장을 찾아 식사나 커피 등을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특히 최수종 하희라, 두 사람 모두 연기대상을 거머쥘 정도로 연기파 배우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연기 스타일이나 캐릭터 분석법이 다르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해 무한 지지와 격려를 해 발전을 꾀한다. 최수종은 “작품 선택이나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내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격려를 해주는 편이다”고 했다.
예능인 부부 이봉원(53)·박미선(49)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연예인 부부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박미선과 이봉원은 1989년 ‘철없는 아내’라는 개그코너에 함께 출연한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했고 1993년 결혼했다. 결혼 이전 박미선은 스탠딩 개그의 일인자로 활약하며 인기 높은 개그우먼으로, 이봉원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성대모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개그스타로 군림했다. 결혼 후 아내 박미선은 개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트콤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MC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최고의 예능 스타로 부상했지만, 이봉원은 연예 활동보다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프로덕션, 요식업 등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봉원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박미선은 연예 활동을 하면서도 육아뿐만 아니라 이봉원 사업 뒷바라지, 망한 뒤 수습까지 다 했다.
이봉원은 결혼 후 자신보다 아내 박미선의 활동이 늘어나고 더 인기가 많아진 것에 대해 “전 아내의 인기가 높은 것에 박수를 보내요. 나 자신이 위축되거나 그러한 것은 없어요. 원래 개그맨을 키우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 제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결혼 후 아내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지요. 사업이 잘 안 돼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물론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연예인 부부도 많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쇼윈도 연예인 부부에게는 연예 활동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활동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가정생활에도 어려움을 초래한다. 쇼윈도 연예인 부부는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감정이 사라져 파경을 맞게 된다.
“나는 당신을 작년보다 올해 더 사랑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구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은 어느새 존경하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네요. 당신 옆에 오래 있을게요. 당신은 오래만 살아주세요.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도록…” 차인표가 2001년 5월 24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아내 신애라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이런 사랑과 배우자의 연예 활동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연예인 부부들의 행복한 동행은 지속될 것이다.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 몸에게 묻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
마에다 비바리(前田美波里·영화배우, 1948년 가나가와 현 출생)
더위를 모르고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마에다 비바리는 이전 주목받았던 화장품 광고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탄력 있는 몸매와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작도 소화할 수 있도록 늘 몸을 다듬어 놓는데, 피아노의 조율과 마찬가지이다. 여배우로서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걸 항상 의식해 몸 만들기에 신경을 써 왔다. 무대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어디서 보더라도 좋게끔 해 두고 싶다. 나아가 반듯한 몸에는 제대로 된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하고 있지 않다. 해야 할 것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노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겠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전신 ‘임파(淋巴) 체조’를 10분, 그 뒤로 온천물을 데워 한 잔 마시는 게 일과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는다. 주로 채소 샐러드에 빵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머그컵에 커피를 붓고 코코넛 오일을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로 마신다. 달달한 과자를 군것질로 곁들여. 몸을 깨우는 데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
비 바리는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어깨를 골절했다. 그때 뼈가 붙자마자 재개한 ‘에고스큐(egoscue) 체조’가 빠른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시작한 지 4년 반쯤 되는데, 아침 식사 후 30~40분 에고스큐 체조를 반드시 한다. 근육을 자극하고 단련해 똑바로 움직이고,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1주일에 한 번 수중에어로빅도 하는데 물의 저항이 몸에 좋다. 내부근육도 단련되고, 달랑거리는 팔의 살도 금방 없어지고…”
울퉁불퉁 근육질의 여성스럽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 트레이닝은 하지 않는다. 어떤 운동이 몸의 어느 부분에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연구해 왔는데, 이게 나의 재산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연기자나 스태프가 있으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나 자신도 한 달에 한번 에고스큐 선생님과 상의해 새로운 메뉴를 지도 받는다.”
운동 이외에 아름다움과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건강보조 식품과 효소, 온천물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와 친구들이 추천한 게 많은데, 괜찮다고 생각 들면 먹어 보고 자신에게 맞으면 받아들여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없다. 수십 년 계속 먹어온 건강보조 식품도 무대 공연으로 피곤할 때는 좀 많이 먹는다든지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렇다고 건강보조 식품에 의지하는 삶은 싫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손발이 찬 체질이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데, 에어컨은 되도록 쓰지 않고 여름에도 샤워만 하는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 여유 있게 기분전환을 한다.”
욕탕에는 수소 거품이 발생하는 걸 넣어서 수소를 흡입하고, 수소수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탕에서 나와서는 바디오일을 바르고 침실은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바닐라, 망고 등을 좋아하는데, 맘이 차분히 가라앉고 잠도 잘 온다.
“자기 몸에 물어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에는 진다
유카와 레이코 (湯川れい子·음악평론가·작사가, 1936년 도쿄 출생)
지난 1월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카와 레이코는 지금도 아티스트 취재로 국내외를 돌고 있으며, 집필활동 외에도 합창단의 멤버로서 노래하는 등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바쁠지도 모르겠다”며 팔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음악가를 양성하는 ‘스쿨 오브 뮤직 전문학교’의 명예 교장이기도 한 그녀는 삿포로, 센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에 있는 학교를 돌며 졸업식과 입학식에 6번 참석해 인사를 했다.
“연설은 내가 1년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음악정보를 말하는 거야말로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지, 과거의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혀 울림이 없다. 그래서 내년에도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올 한 해도 더욱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올해 아티스트 취재로 호주와 영국에도 갔다 왔으며, 개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4인조 코러스 그룹 ‘스완시스터즈’의 연습에 본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가스펠 그룹 ‘도쿄여자합창단’의 단원으로서 동일본 대지진 부흥 자선콘서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와 작사가 이외에도 라디오 DJ를 하거나 젊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노래하면서 환경과 평화와 관련된 문화활동도 소화하는 등 한마디로 사방팔방 종횡무진 대활약중이다.
“샐러드도 상추만으로는 질리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 있으면 맛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다채롭고 풍부한 삶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 늘 앉아서 하는 일의 피로가 노래함으로써 풀리고 위안을 받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21살 때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을 때 수혈로 인해 C형 간염에 감염. 병명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53세 때이다. 하지만, 감염이 판명되었지만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의사는 C형 감염 환자의 87%가 간경화에서 간암이 된다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의사는 술 마시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히 잠을 자라며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면역력도 저항력도 떨어진다. 그 뒤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잠을 자도록 하고 있다. 사실 60대 중반에 건강진단을 받고서 췌장암과 간암이 발견됐었다. 의사는 더 크면 위험하니 수술하자고 했지만 안 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나이 들수록 어딘가 나쁜 곳이 나오게 되는 법인데, 나는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병과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더욱 수면과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국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이 몸을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공연 취재와 지방 강연회 등으로 바쁘더라도 전날 1박 하는 식으로 7~8시간의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유카와는 “잠이 안 오거나 도중에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어쨌든 자는 상태를 유지한다. 안 자더라도 누운 상태만으로도 수면 중의 3분의 1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된다고 하니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가 쉬지 못하니까 잠이 안 올 때는 침대 위에서 호흡법을 한다. 단전 아래 3㎝ 정도 떨어진 곳을 의식해 코로 숨을 쉬고 천천히 길게 입으로 내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뇌가 빈 상태로 되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잠이 든다”며 “해외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고 밝혔다.
“식사를 하면 위장이 움직이고 몸이 활동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안 먹는다. 탑승하기 전에 와인 한 잔 마신 후 호흡법을 하면서 마냥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긴 장거리 비행에도 피로가 안 쌓이고, 시차도 없다.”
60세쯤부터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면역력을 높이는 호흡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전철 안 혹은 책상 앞, 자기 전에도 꼭 한다.
“수면과 호흡법 덕분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고 있다. 호흡법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등골과 관절 등을 움직여 뼈에 적당한 부하를 거는 ‘뼈 호흡 체조’를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장에 다니며 지도를 받고 있다. 뼈를 강화해 주고 비틀림을 고쳐주고 대사를 촉진해 준다.”
연예계가 남성 중심의 경쟁 사회라 싫은 일도 많고 낙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로, 싫은 것들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침대 위에서 호흡에 집중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기분 좋게 눈 뜨면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는 힘도 생기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떠오른다.
“끙끙거리고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낙담하는 감정은 좌뇌로 거기에 음악의 템포를 부여하면 자동적으로 우뇌가 우선이 되면서 좌뇌의 고민을 잊을 수 있다. 걷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맞춰 걸으면 그 효과는 몇 배 커질 것이다.”
몸과 마음의 젊음은 음식이 정한다
◇ 우에키 모모코
(植木もも子·관리영양사·국제중국의사·국제중국의약요리관리사, 1953년생)
젊고 똑똑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이것이 삶의 주제라고 말하는 우에키 모모코는 서양의 영양학과 동양의 한방학 모두를 섭렵한 전문가로. “늙지 않기 위해서는 식생활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을 알고 평소의 식사습관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어서, 생활습관에 개인 차이가 생긴다. 나이 들수록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의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기(氣), 혈(血), 수(水)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먹으면 그 균형이 깨지기 쉽고, 몸의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이 상태로 두면 몸의 노화가 빨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기는 영양과 피, 수분을 몸 구석구석에 옮겨준다. 생명 활동을 행하는 에너지, 기가 부족하면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보충하는 게 중요하다.”
건강의 근본이 되는 기를 보완하는 식재료는 닭고기, 고등어, 양배추, 산마, 꿀 등. 체력은 물론 기력이 저하됐을 때 추천할 만하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피의 흐름이 좋아지고,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체내에 쌓인 여분의 수분과 노폐물이 배출될 수 있다. 덥다고 냉방기를 틀어놓은 실내에서만 지내면 물의 순환이 나빠지며 발이 붓고 관절통 등의 증상도 나타난다. 여름에도 샤워만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적절히 땀을 흘리고, 음료수와 음식도 따뜻한 걸 권하고 싶다. 기, 혈 수가 잘 돌도록 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
땅을 가진 사람들이 옆에 있는 땅의 소유자와 분쟁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옆에 있는 땅을 사서 같이 건물을 지으면 좋을 듯하여 땅 주인과 흥정을 하다가 서로 기분이 상하게 된다. 특히 다음 그림과 같은 경우 두 땅의 소유자는 사이가 좋지 않다.
땅은 인위적으로 경계를 그어 놓았는데 그 경계로 구분되어 만들어진 것을 필지라고 한다. 필지는 그 모양에 따라 부동산의 가치가 완연히 달라진다. 이 경우 필지를 합하거나 나누면 전체 땅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땅 소유자는 미래가치를 보고 서로 옆에 있는 땅을 사고 싶어 한다. 자기 땅의 가치와 가격은 높게 보고 옆에 있는 땅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게 가치판단을 한다.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주장하다가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땅을 나누거나 합할 때 변수가 되는 것은 땅의 모양, 접해 있는 도로와의 관계, 땅의 용도 등이다.
그림을 보자. 땅 A 소유자와 옆에 있는 땅 B 소유자는 서로 땅을 팔라고 하다가 다투게 된다. 흔히 땅 B 소유자는 땅 소유자 A에게 시세보다 두 배 이상 줄 테니 팔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은 땅 A 소유자는 대꾸도 안 한다. 두 배라고 해도 그 가격은 땅 A 소유자가 볼 때는 말도 안 되게 낮아 어이가 없다며 앞으로 얼굴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객관적인 땅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하여야 할까?
먼저 땅 A와 땅 B를 합해서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최적의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해본다. 그러면 전체 매매 추산가격이 나온다. 여기에서 비용을 뺀다. 비용은 건설 관련 비용, 금융 비용, 마케팅 비용, 그리고 제세공과금 등이다. 전체 매매 추산가격에서 비용을 빼면 그것이 바로 땅 A와 땅 B를 합한 땅의 가격 최대치가 된다. 이번에는 땅 B만 가지고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해 본다. 물론 땅 B의 경우도 관련 건축 법규나 행정 사항을 그대로 반영하여야 한다. 이 경우 제대로 된 건물을 짓지 못할 수도 있어 손실이 나타날 수 있다.
땅 A와 땅 B를 합해서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최적의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한 결과와, 땅 B만 가지고 건물을 지어 파는 것과 이익을 비교한다. 그 차이가 바로 땅 A의 가격 최대치이다. 전문가에게 이와 비슷한 땅 거래와 관련된 가격 분쟁을 조정하라고 하면 이런 방식으로 가격을 설명할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은 당사자의 자유 판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서로 이해하고 거래하는 경우는 그리 쉽지 않다. 그 결과 서울 도심에서 새롭게 들어선 고층 건물과 그 옆에 있는 작은 규모의 저층 건물들을 종종 보게 된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러 형태의 사연이 숨어 있다. 시세보다 두 배, 세 배로 쳐주겠다는 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또 땅 모양이 이상한 땅을 사면 나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땅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무조건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땅의 가치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좋은 땅 모양은 어떤 모양일까?
2. 땅을 사고 팔 때 거래 단위는 무엇일까?
3. 자투리 땅이란 무엇일까?
4. 토지를 수용한다고 하면 보상가격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보상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1. 직사각형의 땅이다.
2. 토지를 거래할 때는 필지 단위로 거래를 하게 된다. 필지는 하나의 지번을 가진 토지로서 토지의 등기 단위가 된다. 지적도를 보면 여러 토지의 경계가 그려져 있고 하나의 토지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데 이를 지번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하나의 지번이 붙어 있는 토지를 필지라고 한다.
3. 자투리땅이란 도로를 내거나 건축을 하다 남은, 기준 평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땅을 말한다.
4. 토지보상 평가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령에 의해 실시한다. 사업 인정 당시의 표준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대상 토지의 위치, 형상, 환경, 이용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산정하게 된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 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유경 프리랜서 사회복지사
저는 노인복지를 전공한 사회복지사로, 20년 넘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노인복지관과 노인대학 등에서 어르신들과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인생의 선배인 어르신들께 배운 ‘나이 듦의 기술(Art of Aging)’을 함께 나누기 위해 ‘시니어’라고도 부르는 중년 세대, 즉 베이비부머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시니어들과 수업을 하면서 각자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먹고살 걱정 없고, 소일거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 그동안 맛보지 못한 여유와 한가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관계’가 들어 있고, 관계의 중심에는 ‘친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 있고, 건강하고, 심심하지 않을 만큼 일거리가 있고, 그래서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해도,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행복과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다면 과연 우리가 꿈꾸는 노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 번 친구 관계를 살펴봐야 하는 까닭은 친구야말로 남은 인생길을 같이 걸어갈 동행이고 동지이고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업 중에 나온 앞의 네 분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니어의 친구 관계를 몇 가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무엇보다 먼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의 중요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서로 돌봐 주었지만,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 시대인 요즘은 더 이상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마저 독립해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소한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과 즐거움을 나눌 친구가 더더욱 소중합니다. 길고긴 노년의 시간, 갈수록 힘에 부칠 인생의 마지막 고갯길을 앞서거니 뒤서가니 함께 걸어가는 친구는 범상치 않은 인연이며 그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입니다.
둘째,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친구 관계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직하되, 맞지 않는데 억지로 붙잡고 있을 일은 아닙니다. 친구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아름답게 포장될 수는 없습니다. 일방적이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시간과 함께 관계의 질에도 변화가 와서 허울만 남아 있는 관계는 정리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나이 들면, 너무 늦지 않게 내 손으로 생활을 간소화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하는데 우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포용력 못지않게 옥석을 가려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친구와 함께 걸어갈 길이 아직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친구들의 끈끈한 정에 새로운 친구들의 신선함까지 더해진다면 생활이 풍성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흔히 가까운 친구 열 명 중 세 명 이상이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 그 사람은 세대 차이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도, 사는 지역도 친구를 사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친구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정성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물이 깊어야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품이 넓고 속 깊은 사람이 되도록 나부터 먼저 노력해야겠습니다.
넷째, “정에서 노염난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소홀히 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의 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것도 미처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후회막급이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친구 관계의 재건을 위한 절호의 기회입니다. 시니어는 바로 그런 나이입니다. 친구는 원래 가깝기 때문에 서운하고 기대가 있기 때문에 실망도 합니다. 남이라면 다시 안 보면 그만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속상하고 또 칼같이 끊어낼 수도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내 잘못부터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먼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과의 타이밍입니다. 우정을 포함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내일이면 늦으리. 그래서 모든 관계를 아우르는 이 말은 우정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자고요.
>> 유경(劉暻)
CBS 아나운서로 노인 대상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하다 노인 복지에 뜻을 세우고 프리랜서 사회복지사가 됐다. 저서로는 , 등이 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 늦가을부터 종로구 관철동의 고서점 ‘통문관’을 드나들었다. 한문 시간에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권(한학자1917~1987)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감명 깊어 교무실로 자주 찾아뵈었더니 “학교 도서관에는 관련 책들이 별로 없으니 가까운 ‘통문관’에 가서 나 등을 찾아 읽어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통문관 구석에 서서 역사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서점 주인이며 서지학자인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1909~2006) 선생과 가까워졌는데, 동그란 의자를 내어 주며 “맘 놓고 앉아서 책 보게”하여 여러 귀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그곳은 고명한 교수며 석학들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담배 심부름도 간혹 해드린 일이 있었는데, “이군, 이분이 검여(劍如) 선생이시네. 인사 여쭙게”하여 유명한 서예가 유희강(柳熙綱·1911~1976) 선생을 친견하였다.
두터운 뿔테 안경에 수염이 많은 온후한 인상이었다. 검여 선생은 통문관 3층에 서예실을 하고 계신고로 출타할 때는 작품을 통문관에 맡기고, 찾으러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하셨다. 산기 선생은 가끔 당신이 부탁한 작품이라며 먹 냄새 싱싱한 화선지를 펴서 한문을 풀어 읽어 주셨다. 여러 작품을 보았으나 ‘文字香 書卷氣(문자향 서권기)’만 제대로 떠오른다.
검여 선생은 인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백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3년 과정 기초 학문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서화의 견문을 넓혔다. 서양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중국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시대(220~589)의 비학(碑學; 비석에 새긴 글씨 연구)을 비롯 서첩(書帖)을 두루두루 공부하였다.
광복과 함께 8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림(서양화)과 서예에 정진, 1953년 제2회 국전에는 서예와 서양화에 모두 입선하므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른다. 검여(劍如)라는 아호는 “검(劍)처럼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고 싶어 검여(劍如), 석여(石如), 표여(瓢如)의 삼여(三如)라 하려 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검여(劍如)라 했다”고 자호(自號)의 변을 하였다. 그의 글씨는 깊은 학문과 서법의 조예 있는 연구로 중국 위(魏)나라의 웅혼(雄渾)한 서체(書體)를 검여체로 혼융(混融) 발전시켰다. 추사 이후 제일의 서예가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서예가로서 치명상이었다. 이후 가족과 제자들의 희생적인 보살핌과 정신적인 재활의지를 불태워, 왼손에 붓을 잡고 소위 좌수서(左手書)의 시대를 열었다. 왼손 글씨만으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어 그 강인한 의지와 독특한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평소 그분의 작품을 소장하고자 열망하다가 1965년 작 ‘강락무극(康樂無極)’을 20여 년 전 어느 서예가로부터 입수하였다. 글의 뜻도 좋지만 그 힘차고 당당한 검여의 서체가 마음에 끌렸다. 더불어 하세(下世)하기 1년 전인 1975년에 쓴, 좌수서 현판과 행서(行書)의 대련(對聯)도 수집할 수 있었다.
옛 속담에 ‘왕대밭에서 왕대 난다’고 하였듯 검여 선생의 문하에는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1941~2013)이라는 우뚝한 수제자가 있다. 그가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인 1958년부터 검여 선생과 인연을 맺어 서울대 농대를 진학한 1960년부터 검여 선생이 서거한 1976년까지 16년간 인격도야의 서예 교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검여 선생의 관철동 서예실에 상주, 그 서맥을 잇고자 정진하였다. 검여 선생의 뇌출혈 이후는 수족처럼 곁에서 스승을 모셔 좌수서의 그 빛나는 서예 업적을 이루는 데 수훈을 세웠다.
서울의 여러 구청 녹지과장과 서울대공원 식물과장 등의 공직에 종사하면서도 한학, 금석학, 서예의 깊은 연구로 개성 있는 글씨의 세계를 표출하였다. 검여풍의 강건한 북위(北魏)의 해서(楷書), 행서(行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을 두루 섭렵, 1990년에는 서예에 전념코자 공직을 내놓고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으로 이주하고 1999년에 ‘원중식 서법전’으로 남전체의 서예를 발표, 서예계를 긴장시켰다. 2003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서원을 짓고 후학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남전 선생이 서울에 주거할 때 수차례 찾아가 그 겸손하고 공손한 인품에 머리 숙인 적이 있었다, 이 작품 ‘피갈회옥(被褐懷玉’은 1979년 38세의 작품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0장에 나오는 글귀로 ‘겉으로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있으나 마음속에는 귀한 옥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선비는 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은유의 의미도 있는 글이다. 힘차고
그러나 거친 갈필(渴筆)의 여백이 남전 선생의 젊은 날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검여 선생의 작품들과 ‘대상무형(大象無形)’, ‘만리무촌초(萬里無寸草)’, ‘일이관지(一以貫之)’, ‘수신독행(修身篤行)’, ‘도광양덕(韜光養德), ‘송암서실(松菴書室)’ 등 남전의 2000년대까지의 작품들을 펴놓고 향을 사르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검여 선생이 평생 경모(敬慕)하던 소식(蘇軾, 東坡1036~1101)과 김정희(金正喜, 阮堂 1786~1856)에서 따온 소완재(蘇阮齋)라는 당호(堂號)를 말년까지 썼듯, 남전 선생도 완당(阮堂)과 검여(劍如)에서 한 글자씩 취해 완검재(阮劍齋)로 당호를 삼아 그 맥을 이었다. 이렇듯 사제(師弟)가 같은 길을 가면서도 각기 우뚝한 예술의 봉우리를 쌓고 새 길을 열어 놓으니 후학들의 홍복일 터이다.
한자 문화권의 한·중· 일 삼국에서만 모필(毛筆)로 된 붓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서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우리나라는 서예(書藝)라 부르되 교육의 필수 요건으로 삼아 수천 년을 이어왔다. 붓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운필하기가 어려워 오랜 시간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글씨도 흉내[臨書] 낼 수 있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체도 이룰 수가 있다. 하물며 깊은 공부가 없으면 글에 마음을 실어 낼 수 없으니, 붓의 기교만 익혀 먹물로 칠한다고 다 서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은 곧, 글씨로 쓴 사람의 인품과 심상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다.
오랜 과정 꾸준히 붓을 잡고 연마해야 성과를 나타내므로, 빠른 결실만을 원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 맞지 않아서 서예 인구가 급감하는 추세라니 통탄스럽다. 미술품 시장에서도 육칠십 한평생을 서예에 바쳐온 노대가의 작품이 고작 100만 원 미만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벼루 하나 가득 먹을 갈아 놓고 그 향에 취해도 보고, 붓을 잡고 붓장난이라도 하다 보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힐링은 먼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높이 2,750m이며, 북위 42도에 위치한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보고’ 백두산. 지난 6월 중순 일주일간 그곳으로 꽃 탐사를 다녀왔습니다. 5월말이 되어야 봄이 시작되고 한여름에도 여기저기에 만년설이 남아 있다는 백두산은 말 그대로였습니다. 6월 중순에도 산정은 물론 드넓은 고원 곳곳에 얼음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수시로 내리는 비는 얼음물처럼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문제 하나 냅니다.
문) 막 눈이 녹는 6월 백두산 깊은 숲에서도 야생난초가 꽃을 피운다?
답) ➀ 맞다 ➁ 틀리다
우문(愚問)에 잠시라도 헷갈렸다면 그 또한 이유 있는 혼동일 수 있습니다. 난초가 대개는 따듯한 온대나 아열대 지역에 서식한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내에서도 한란과 금자란, 탐라난 등 희귀종을 비롯해 전국 112종의 야생난초 가운데 72%인 81종이 따듯한 남쪽나라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위 문제에 대한 답은 < ➁ 틀리다 >입니다. 야생난초에 차걸이란, 금새우난초, 섬사철란 등과 같이 제주도 등 남부 지역에 자생하는 남방계 난초가 있지만, 털복주머니란과 구름병아리난초, 손바닥난초처럼 설악산은 물론 백두산 등 고위도 · 고산 지역에 사는 북방계 난초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야생난초를, 야생난초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애기풍선난초를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백두산 지하삼림(地下森林)에서 딱 마주했을 때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 백두산에 자생한다고 익히 알았고, 개화 시기를 맞춰 가면 만날 수도 있다지만 과연 대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백두산을 가본 이는 알지만, 폭우나 안개 등 악천후가 찾아오면 수시로 입산이 통제되고, 또 정해진 통로를 벗어나기 어려워 설사 눈에 보이더라도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에 담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순판(脣瓣)이라고 부르는 입술꽃잎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고 해서 애기풍선난초라고 불리는 이 야생난초는 6~15cm의 꽃줄기를 포함해 전초가 20cm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작습니다. 이번에 지하삼림 안의 50m 이내 숲에서 각각 한 송이씩 모두 세 송이를 보았는데, 두 송이는 꽃색이 뚜렷한 연분홍색이었지만 한 송이는 흰색에 가까웠습니다. 각각의 애기풍선난초에는 제각각 짙은 녹색의 타원형 잎이 한 장씩 달려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순판 위에 3개의 등꽃받침과 2개의 곁꽃잎이 비슷한 형태의 분홍색 긴 가닥(사진)을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속명 Calypso는 그리스어로 ‘은둔’을 뜻하는데, 어두컴컴한 침엽수림에 자생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풍선난초속에는 4개 변종이 있는데, 그중 일본에 자생하는 것은 풍선난초(Calypso bulbosa var. speciosa)로 러시아와 몽골, 중국, 우리나라 백두산과 자강도 갑산에 자생하는 애기풍선난초와 구분됩니다. 일본 알프스산 해발 700m 이상 산지의 그늘지고 이끼 많은 곳에 자생하는 일본명 ‘호테이란(ホテイラン 布袋蘭)’이라는 풍선난초는 순판 아래까지 길게 튀어나온 2개의 꿀샘(거)으로 애기풍선난초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해발 2,670m 천문봉으로 오르는 백두산 북파 코스의 시작점에 있는 지하삼림. 땅 밑으로 깊게 파인 원시림이란 뜻의 이곳엔 길이 2.5km에 이르는 원시림이 펼쳐져 대낮에도 동굴에 들어간 듯 어두컴컴하다. 숲 곳곳에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가 쭉쭉 뻗었고, 그 아래 무성하게 자란 이끼 방석 위에 애기풍선난초가 일면 곱디고운, 일면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변종경(卞鍾敬·68) 국일제지(주) 사장에겐 ‘촉’이 있다. 신규 사업을 하면 길이 열린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도 그가 손을 대면 황금알을 낳는다.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기획전략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의 촉이 이번엔 제조업에 뻗쳤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지 제지업체 국일제지(주)를 드라이빙하는 중책을 맡았다. ‘아직 제지업계 초보’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그는 삼성맨으로서, 그리고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국일제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과 재미있는 일,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변종경 사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물산 경영기획부장, 삼성그룹 비서실 임원,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삼성맨 시절을 거쳐 삼부토건그룹 계열 (주)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올해 초 국일제지(주) 사장으로 선임됐다.
‘고희록’ 써 경험과 지혜 전수하고파
사장으로 취임할 때 마침 그의 나이는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해도 여러 번 은퇴했을 나이, 그는 김형석 교수의 말을 빌려 이제야 자신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6세의 나이에도 강의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65~75세의 나이가 쓴맛 단맛 다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음미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 김형석 교수가 말씀한 인생 황금기에 3모작을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종전에는 매주 수요일 등산, 주 1회 골프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요즘에는 매일 아침 20~30분 시트업 등 스트레칭을 하고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건강관리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행 마니아는 못 되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은 자주 했지요. 여행은 새로운 풍광과 문물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좋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의 경우 목표에 도전하고 정상에 이르렀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리고 등정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이지요. 지난번 킬리만자로 등정 시에는 그동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70세가 되면 그동안의 삶을 담아 을 써보기로 한 것이 수확이지요.”
살면서 지켜야 하는 3가지
은 제목 그대로 70세에 이른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자 하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자신이 평생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70 가까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신뢰를 지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 ‘인생의 평판을 쌓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잃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경제적으로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푸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베풀어야 효과가 높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주변과 사회성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는 대체로 앞만 보고 달려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 후회됩니다.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랬고요. 요즈음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해 많이 좋아졌지요. 평소부터 가족, 친구들에게 잘해야 노년에도 관계가 좋지 않을까요.”
기업은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
그는 최근 새롭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종 회의를 주재할 때 오프닝 멘트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노하우 등을 간단한 사례 등과 연결시켜 전수해 주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전 준비 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임직원이 경청하고 활용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에 나오는 ‘가르치면서 절반은 본인이 배운다’는 글귀대로 저도 준비하며 또한 배웁니다. 최근의 예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강조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한국과 프랑스가 1:1 무승부일 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가 후반 46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뒤 홧김에 라커룸 사물함을 발로 차 찌그러졌는데 라이프씨티 축구경기장 측에서 배상 청구을 검토하다 오히려 찌그러진 사물함에 금테를 두르고 11유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해 성황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나네요.”
그가 현역 경영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기업 자체적으로 보면 수익 가치가 중요하겠지만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고용 및 인적 자본 형성, 기술 축적, 양질의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사회공헌 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경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기업이야말로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는 생각이 이유였다.
“경영자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요? 글쎄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의 길을 갔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는데 대학은 문과를 택했지요. 당시 주변에서 저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언변이 좋다고 부추겨 대입 때는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사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사주에도 정치를 했으면 ‘한 인물’ 했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치 지망 안 하기를 잘한 것 같고요.”
회사의 미래를 위한 길 닦는다
그는 자신을 ‘제지업계 초딩’이라고 겸손하게 낮춰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의 임원이었다. 기업과 경영의 엔진 구조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경험과 지식이 그의 커리어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1994년 삼성물산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로 옮겨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삼성이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1차 반려받은 후 비서실에 차출되어 전략지원팀을 만들었고 6개월 뒤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 10여년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열정과 집념을 갖고 그룹과 회장을 보좌하던 때를 회상하며 새로운 도전에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간 업무 파악을 통해 회사의 비전을 ‘첨단 정밀 종이로 100년 가는 강한 기업’으로 정하고 선순환적 구조조정, 즉 사업구조를 수익력 있는 기존 품목 이외 부가가치 높은 지종 확충, 영업 인력 확대 등 미래지향적 인력 운용,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과감히 투자하고, 절약할 수 있는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본사는 물론 2개 공장 200여 명 전 직원에게 7~8회 경영방침을 설명하고 회식을 통해 공감대를 갖는 기회를 가져 직원들이 ‘한번 해보자’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회사의 미래 토대 마련을 위한 청사진인 중기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가장 중요한 건 품위를 잃지 않는 것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 중인 그는 은퇴를 잊고 경영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먹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를 유지하려면 조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자세도 중요하고 독서 등을 통해 인격 도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고 베푸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 들어 품위가 있어야 멋도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준비 중인 것들도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트레킹 등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리스, 이집트, 터키, 러시아 등을 비롯해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지 못해 시간이 나면 몇 년 내에 꼭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입니다.”
요즘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동네친구를 만나거나 온라인 커뮤니티 모임 분들과 몇 달에 한번이라도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는 일이 더 많다. 경제적으로 뭔가 도움이 되어서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회비내면서 참석하게 된다. 나이 들어가면서 온라인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을 연결하여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온라인단체에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먼저 알게 된 내용이 있으면 사진과 동영상으로 올리고 글을 쓰면 반응이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댓글도 오고가면서 소통한 사이여서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게 되어도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하다.
글을 써서 비용까지 되는 일도 있지만 그냥 소통이 좋아 더 아름답게 사진 찍고, 동영상도 올리면서 돈되는일도 아닌데 더 나은 글을 쓰려고 노력해서 글을 완성한다. 필자가 쓴 글에 환호하고 좋아요를 누른 사람, 댓글까지 달아준 사람,심지어 공유까지 해서 퍼가지고 간 사람을 보면서 좀 더 좋은 컨텐츠를 생산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이글이 잡지에도 기재될지 모르지만 인터넷검색으로 브라보마이라이프페이지에서 이 글을 읽는 분이라면 이미 다양한 커뮤니티활동을 이미 다양하게 하고 계실 것이다.
필자가 속한 온갖 온라인 카페나 아지트, 클럽이라고 이름지어진 커뮤니티가 있지만 그중에 10년간 활동한 영화동호회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여 온라인에서 만나다 오프모임에서 한두 달에 한번 꾸준히 국내외고전영화를 본적이 있다. 상품이 없어도 영화퀴즈를 하는 시간이 정해지면 5분에서 10분 사이에 댓글이 회원들 각자 있는 곳에서 댓글을 달아서 금방 100개도 넘는다. 매니저를 비롯한 회원들이 희귀영화를 고르고 선택하여 회원 중에 번역할 능력이 되는 분은 번역도 하여 자막도 넣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함께 볼 장소를 골라 예약을 하여 공지하고 함께 희귀필름을 보고 함께 공감한 내용과 뜻을 달리하는 내용을 뒤풀이에서 식사하며 이야기 나눈지 벌써 10년이다.
가끔은 발이 넓은 매니저가 국내영화감독중에 유명영화감독님이나 영화배우를 초대한다. 아지트 같은 카페라 아무에게도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하고 힐링하고 오는 모임이다. 카페 매니저가 영화전문가이면서 직접 회원들을 이끌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윤정희라는 대배우의 40주년행사도 우리 모임에서 해드릴 정도로 국내외 올드시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나이대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하다. 영화라는 주제로 함께 모이고 이야기가 통하는 모임 갔다온 날은 힐링센터를 돈 내고 다녀온 것 보다 더 개운하고 맘이 기분 좋은 기운으로 풍성하다.
올해 배우 윤정희님 50주년행사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들어가는길에 건전한 에너지를 주는 어떤 내용하나로 함께 뭉치는 모임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올드시네여 영원하라!
내가 사진 촬영을 위해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오지라 불리는 곳, 그러니까 세계의 변두리나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들이 대부분이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이라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어진 순수한 삶의 모습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쐴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돌아보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나 세상에 하고픈 이야기들도 대개는 그런 오지로부터 바람처럼 불어왔다.
그런 여행 중 피엔지(PNG)라고 불리는 파푸아뉴기니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였다. 더니든(Dunedin). 남섬과 북섬으로 길게 이어진 뉴질랜드. 그 남섬에서도 남동쪽 남극해와 닿아 있는 더니든에서 나는 보고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가 안내한 바닷가는 한적했다. 아니 우리밖에 없었다. 친구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함께 맞는 바람은 순하고 조용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살았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다음 날 친구가 안내한 곳은 넓은 바다가 한눈에 가득 보이는 높은 절벽 위였다. 절벽 끝에는 등대가 있었고 커다란 새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 본 새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별로 피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이상한 새였다.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새는 방향도 바꾸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졸고 있는 새는 뭔가 좀 모자라는 녀석처럼 보였다. 부리를 아예 몸 깊이 묻고 자고 있는 새는 무슨 배짱인지 내가 곁에 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야생의 큰 새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몸의 크기에 비례해 부리도 아주 컸지만 뾰족한 구석이 없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 녀석이 잠자기도 지겨웠는지 기지개를 켰는데, 난 정말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큰 몸에 날개가 펴진 것이다. 이렇게 클 수 있다니! 바로 그 유명한 알바트로스가 땅에 발을 딛고 활짝 펼친 날개를 본 것이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것이 알바트로스-신천옹(信天翁)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 했다. 난 그렇게 보고픈 그 친구와 한동안 하늘을 유영하는 창공의 왕자들의 눈으로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당시 연재하고 있던 내 고정 칼럼 ‘프리즘 파인더’에 올렸다. 이랜드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한세가 발행하는 주간지 프리즘이다. 최종훈 편집장이 글을 붙여 주었다. 내 사진과 설명이 단번에 녹아나는 글이었다. 사진가인 나는 글의 힘을 보았다. 그동안 좋은 글은 많이 만났어도 내 사진과 얘기에 맞춰 내 앞에서 그것이 글다운 글로 만들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흥분된 내 설명과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 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네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걸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그리고 한참 후에 보들레르가 같은 새 알바트로스를 노래한 시를 보았는데, 난 최종훈의 글이 감히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보다 한층 더 좋다고 생각했다. 보들레르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글로 눈을 열어준 내겐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람이다.
◇ 함철훈 사진가 개인전 '풍류(風流)' 안내
장소 포스코미술관(포스코센터 지하1층)
일정 7월 13일~8월 9일 *평일 10~19시, 토요일 정오~17시, 일요일ㆍ공휴일 휴관
'우리가 만난 바람과 물'이라는 부제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선보인 몇몇 사진과 더불어 함철훈 사진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그동안 연재한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