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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어 오피스 시대
- 개인 사업을 할 때는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인생 역정을 겪다 보니 재취업된 적도 있고 필자가 주문을 주던 회사에 상근하면서 개인 사무실을 폐쇄한 적도 있다. 한동안은 비즈니스와 관계가 있는 회사에 책상 하나 놓고 신세진 적도 있고 단순히 인적 관계를 빌미로 책상 하나를 빌려 쓰기도 했다. 집에도 컴퓨터가 있으므로 어지간한 일은 집에서 처리가 가능하지만, 집에만 있으면 엉덩이가 근질거려 나갈 일을 궁리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쉐어 오피스였다. 그전에도 소호 사무실이라는 형태의 사무실은 알고 있었다. 주로 창업을 목적으로 사무실을 필요로 하는데 혼자 쓰기는 비용이 부담되니 비서를 공동으로 활용하고 장소도 공동으로 쓰는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비서도 필요 없고 다만 아침에 집에서 나가 글 쓰는 일만 하면 되므로 그야말로 책상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집 근처에 쉐어 오피스가 있었다. 한 달에 15만원만 내면 된다. 하루 사용에 5천원 꼴인 셈이다. 세입자 대표가 있고 필자 같은 쉐어 오피스 사용자가 3명인 단출한 분위기였다. 이런 쉐어 오피스의 단점은 건물주가 나가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서 석 달 만에 다시 오피스를 옮기게 되었다. 다행히 세입자 대표가 인근에 적당한 사무실을 찾아 같이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4층 건물인데 4층에 기원과 반씩 나눠서 쓰게 되어 있다. 20평 정도라서 아늑한데 서향이므로 오후 햇볕이 좀 문제이다. 에어컨 성능이 좋은 편이라 실내 온도는 문제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옆 기원 사장이 내가 사는 오피스텔 청소담당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쓰레기를 분리하는 일을 했다. 종이류는 따로 고물상에 팔기도 해서 내가 종이류를 버릴 때는 다른 수집상이 가져갈까봐 직접 주기도 했다. 남의 건물 청소를 하기에는 인상이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인사를 하긴 했었다. 나이도 비슷하다. 한가한 시간이 나면 같이 막걸리 친구를 해도 될 것 같다. 쉐어 오피스 사용자가 3명인데 필자가 가장 연장자이므로 가장 좋은 자리를 가지라고 했다. 사실 자리다툼이 선착순으로 정해지는데 이번에는 동시에 움직이게 되므로 좋은 자리를 고집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내가 가장 연장자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덕분에 벽 쪽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같이 쉐어 오피스를 사용하는 사람 하나는 컴퓨터 게임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하루 종일 주식 시세를 보며 배팅하는 사람이다. 세입자 대표는 원래 발명품 연구 중인 것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니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 쉐어 오피스는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더운 날씨에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따로 들고 나르고 약간의 사무집기와 책들도 몇 번에 걸쳐 옮겼다. 컴퓨터를 이전하면서 내가 전선을 다 뺐다가 다시 끼워보기는 처음이다. 해보니 별 것도 아니다. 쉐어 오피스의 좋은 점은 주말 포함 하루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에 있으면 TV 영화보고 잠자고 자주 먹기 때문에 건강상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일단 나오면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절제도 된다. 멀지는 않지만 걷는 거리도 운동에 조금 도움은 된다.
- 2016-06-2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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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노동공무원으로 9명의 대통령 겪어
-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 2016-06-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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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성 인간(toxic people)
- 대인관계는 전 연령대에서 모두 중요하지만 시니어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요소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 여성화되어 간다고 한다. 잘 삐치고 잘 따진다며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라, 삐지더라도 삐치더라도 용서하자는 뜻의 ‘빠삐따 빠삐용’이라는 구호가 인기이다. 시니어들은 마음이 여려져서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잘 입는다. 누가 싫은 소리를 하면 흘려듣지 못하고 다툼이 잃어나거나 마음을 크게 상한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거나 싫은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군대나 직장에서 떠난 지 오래 된 사람들이다. 특히 남자들은 직장에서의 버릇이 남아서 아내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해서 종종 오해를 사는 경우도 많다. 어느 신문에 ‘유독성 인간(toxic people)’이라는 글이 실렸다. 어느 조직에나 한두 명은 꼭 있다고 한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끝없이 불평한다거나 본인은 영원한 피해자라고 언제나 비난할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다. 늘 자기 견해가 옳고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는 것이다. 어쭙잖게 교만해서 남들에게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욕심과 질투심에 차서 남 잘되는 꼴을 못보고 남의 흉을 보며 뒤에서 험담하고 대단한 정보인양 떠든다고도 했다. 특히 부정적인 사람은 시비를 걸지 않고는 그냥 못 넘어간다.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로 보이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기보다는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하고 ‘모난 사람’이거나 모자라서 ‘못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이런 사람과 대처하는 방법은 되도록 마주치지 말라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맞다. 공연히 시시비비를 가리려 해봤자 상처만 입는다. 일반적으로 조직 생활을 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은 상하 관계, 수평 관계를 늘 눈치를 살피며 살아 왔기 때문에 무난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삐걱대는 것이다. 학생들이라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교만해져도 본인은 잘 모른다. 남들이 은근히 피하는 경우라면 혹시 본인이 유독성 인간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결국 죽을 때까지 못 고친다는 것이다. 인성을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이 스승인 것이다. 인문학 책들이 그렇다. 물론 인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서적만 골라 읽는다면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도 좋은 스승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해준다. 물론 영화도 여러 가지이므로 흥미 위주보다는 인성에 도움이 되는 영화만 말하는 것이다.
- 2016-06-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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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싫은 사람 대처 이렇게 하라
-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는 일본의 정신과의사 오카다 다카시의 책이다. 그가 쓴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아버지 콤플렉스 벗어나기’, ‘엄마라는 병’, ‘나는 왜 적응하기 힘들까’, ‘나는 상처를 가진 채 어른이 되었다’ 등 이미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됐다. 이 책의 원제는 ‘인간 알레르기(Human Allergies)이다. 저자는 다른 알레르기처럼 사람은 사람을 싫어하는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구조가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그 메커니즘을 알면 인간관계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테마의 책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서 살아가기 힘들고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냥 싫은 것도 문제이지만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을 만큼 싫은 사람도 있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힘이 강하고 법이 허용한다면 그 사람을 내 속이 풀리도록 응징할 수 있지만, 내가 힘이 더 약해서 자칫 응징하려 했다가는 내가 다칠 수도 있고 상대방을 힘으로 응징한다 해도 법적인 책임이 뒤따른다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집단생활에서는 싫어도 같이 해야 하니 집단생활 자체가 싫은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싫어 회사나 동호회를 내가 떠난 경우, 처음은 안 그랬으나 끝이 안 좋았던 경험, 한번 싫은 사람은 끝까지 싫은 경우, 어떤 점이 싫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경우, 좋은 점보다 나쁜 점들이 많이 보일 경우 등 싫은 사람이 있으면 괴롭다. 싫은 사람 중에는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 도무지 이해라 수 없는 사람, 매사에 반발심이 들게 하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좋아지지 않는 사람, 별 이유 없이 싫은 사람 등 싫은 사람도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 문제는 생판 모르는 남일 경우도 있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싫어도 자주 마주쳐야 하니 괴로운 것이다. 내 안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는 생각,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처럼 성공한 사람은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보는 생각, 사람들 앞에서 내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생각, 나는 내 능력만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과 그런 생각 등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인간 알레르기’라고 봤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하고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자기 회복 장치’가 있는데 단계별로 심리 전략을 세워보라는 것이다. 1단계는 우선 몸과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잠도 충분히 자고 허기지지 않도록 밥도 제때 먹어야 한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짜증이 쉽게 난다. 그리고 가볍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방법,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줄 사람에게 얘기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대처한다. 싫은 사람이 내게 한 말이나 행동을 자기비하나 죄책감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권력 남용’, ‘인신공격’ 등 객관적인 단어로 정의 내리는 방법도 써보라고 한다. 2단계는 사실과 추측을 정확히 구별하고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도 알아 둬야 한다. 3단계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머릿속으로 해부해 보라는 것이다. 좋은 점이나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점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더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중이 절을 떠나듯이 내가 떠나라는 것이다. 4단계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내게 상처 준 사람, 과거에 싫어했던 사람등과 연상하여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내가 바뀔 수 없다면 물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 낫다. 5단계로는 심리적 ‘안전기지’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들거나 ‘공감 능력’과 ‘자기 성찰력’을 키우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습관과 기회를 만드는 것이 요령이라고 주장한다. 대인관계에서 자꾸 남들과 부딪치게 되거나 싫은 사람이 많다면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원래 꼴불견인 사람도 많다. 싫은 마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도 문제는 없는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 2016-06-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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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5 이성]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이성의 유혹에 빠져라!
-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 2016-06-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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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세대 모임] 2060클럽 회원들의 특별한 노후 준비
-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휘슬이다. 그래서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가재산 2060클럽 회장은 노후를 위한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그가 이끄는 2060클럽은 트레킹 모임이다. 1년여 만에 350명이라는 회원을 모으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2060클럽의 의미와 트레킹의 끝없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성공적인 노후를 누리는 많은 시니어들은 흔히 나이가 들어서 건강을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사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HR전문가 기업 피플스그룹의 대표이며 2060클럽의 회장이기도 한 가재산 회장은 ‘2060’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는 2060은 ‘경제수명(經濟壽命) 2060시대’라며 20세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해야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 고령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노테크(老TECH)’는 오랫동안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2060은 경제수명을 60년 가져가기 위해서 ‘20대부터 60년 일할 준비를 시작하고, 60대도 20년 더 늘려 80까지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가 회장은 노후 준비는 퇴직 직전에 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다. 노후 준비의 골든타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나이와 관계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가 참고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나라는 장수국가로 유명한 일본이다.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들이 이미 국민의 23%를 넘었고, 100세 이상의 고령자가 6만 명을 넘는 세계 최고령국가다. 그래서 일본에는 100세 이상 일하는 현역들도 많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100세에 낸 라는 시집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의 저자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박사는 올해 105세(1911생)지만 현역 병원장입니다. 그는 100세가 되던 해에 강의를 하러 우리나라 대학교를 다녀갔는데, ‘어떤 일이든생각하기 나름이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늙음과 젊음은 마음에 있다’는 의미인 겁니다.” 트레킹 모임 2060클럽이 추구하는 3무(無) 그가 회장으로서 운영하고 있는 이색 모임 ‘2060클럽’에도 그대로 붙여져 있다. 2060클럽은 80까지 건강하게 일하며 100세 시대를 살아가자는 트레킹 모임이다. “3년 전 우연히 네 명이서 여행사 광고를 보고 전남 여수에 있는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을 가게 되었지요. 동백꽃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섬이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절벽과 비경이 펼쳐지는 바닷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트레킹이라는 걸 하면서 시쳇말로 ‘뿅’가버렸습니다. 이후 트레킹에 매료되어 서울 둘레길 157km를 완주하고 태안 국립공원 등을 다니면서 무척 좋아 그 멤버들이 나이가 들더라도 승합차 한 대 정도의 인원으로 계속 다녀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2060클럽은 올해 5월을 기점으로 회원 수 350명을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다. 2060클럽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60클럽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기 건강을 위해서 걷는 매력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분들과 걸으며 대화하는 사이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배우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다 주말에 트레킹을 통해 충전도 하니 주말을 기다리게 되지요.” 모임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듯, 2060클럽은 회비도 나이도 직업도 따지지 않는 3무(無)를 추구한다. 부담을 갖지 않고 즐기길 바라는 의도에서다.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단지 조건이라면 2060에서는 세 가지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니다. 첫째는 일, 건강, 그리고 사랑 즉 3유(有)입니다. 여기서 당장은 일이 없더라도 좋지만 80까지 일하겠다는 생각을 갖는의지와 열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하기 위해 건강해야합니다. 문제는 자신과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새로운 에너지 얻어 가 회장은 자신이 젊었을 때는 20여 년간 계단 오르기, 테니스, 등산 등 무릎에 안 좋은 운동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보니 40대 후반부터는 운전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관절이 망가져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트레킹을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멀쩡해졌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 집안에는 당뇨가 유전적으로 있어서 저한테도 경고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고 지난 연말에 체크해보니 당뇨 수치가 90대로 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을 얻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는 게 제일 즐거운 일이지요.” 2060클럽이 주로 걷는 길은 전국에 대략 1600여 개가 형성되어 있는 트레킹 코스다. 또한 트레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지자체에서도 훌륭한 코스들을 개발해 놓고 있다. “2060클럽에서는 매주 트레킹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서울 둘레길이나 북한산 같은 근교에서 걷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사들이 전국에 개척한 코스를 버스를 타고 다녀옵니다. 특히 분기에 한 번은 1박 2일 코스로 멀리까지 다녀오는데 그 활동이 회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기쁨 최근 은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만들어지는 모종의 공백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껏 일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막상 은퇴를 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면서 우울해 하거나 부질없는 곳에 돈을 쓰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대안의 솔루션으로서 최근 다양한 시니어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대로 운영을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가 회장에게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무엇이 중요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열심히 일하며 트레킹으로 건강을 지키자’며 차별화를 추구했다고 밝혔다. 2060클럽이 일하는 시니어에게 필요한 건강 조건으로서의 트레킹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성격도 정의해주고 있다. 일하는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모임이라면, 구성원들 또한 의욕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 회장은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외의 멋진 트레킹코스를 가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커뮤니티들이 많아진다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령화로 인해 국가 전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세수도 줄고 노인 환자들은 늘어나 건강보험까지도 부족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광철 시인 “2060클럽은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 걷는다는 것은 인생의 은유 같기도 하고, 직유 같기도 하다. 사람 안에는 길이 하나 들어 있어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사람은 걷는 일로 인생길을 만들어 낸다. 마음에서 뽑아낸 길이 인생길이 된다. 2060클럽 가입을 권유받고 망설였다. 할 일은 없지만 늘 머릿속에는 글이 왔다 갔다 해서 하루 일상이 생각으로 일출이 오고, 생각으로 일몰이 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함께 걷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평생을 여행, 취재, 일로 돌아다니며 살아 걷기 모임이란 말에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깔끔하고 안정된 사고의 소유자인 가재산 회장의 권유이기도 하고, 직접 만든 모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걷는 것은 평생의 내 일이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을 길에다 깔고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산길을 택해 걸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명산에는 사람이 넘쳐도 이름 없는 야산을 걸으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나는 산과 들을 걷고, 쉬고, 숲이나 간이역이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자기를 많이 했다. 풀 위에 누워 자면 세상은 내 것 같았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에 숲이나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은 울림을 주었다. 비는 결이 있었다. 눈도 결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결이 있었다. 자연은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비나 눈이 올 때 물이 흐르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비와 눈의 흐름이 보였다. 가슴 벅차게 하는 광경이었다. 새들의 군무 같고, 보리밭의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의 군무 같은 걸 느꼈다. 감동이 온다. 더구나 태풍이 오는 날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며 부러지고 폭우와 바람이 거칠게 지나가는 현장에서 흠뻑 젖어서 하늘을 보고 누워보라. 젖고 나서는 더 젖지 않는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2060클럽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세상을 선물했다. 아름다움과 상쾌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곳을 찾아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구릉을 오르내리고, 산허리와 강을 휘어 돌며 대화를 나누는 기쁨은 또 다른 세계였다. 혼자 걸을 때의 쓸쓸함과는 다른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것은 사람이 좋아서 걷는 날이 기다려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리움이란 별이 떠야 하는 거라고. 그리움이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존재할까 싶다. 걷기를 하면서 등산이나 혼자 걷는 것과는 다른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선하면 선한 사람이 찾아오고, 거칠면 거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2060클럽의 매력은 가재산 회장의 성격처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의 설정에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걷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족한 모임이어서 부담 없는 모임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끌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서 꽃을 피우지만 소리치지 않고 지나가듯이 2060클럽이 그렇다. 무엇보다 같이 걷는 분들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한결같은 말에 덩달아 즐겁고 나 또한 걷는 것의 즐거움과 더불어 얻은 건강이 고맙다.
- 2016-06-0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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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업창업] 전직성공, 앙코르 커리어에서 찾다
- 시니어 전직지원 전문 ‘앙코르 브라보노 협동조합(이사장 신창용)을 찾았다. 충정로 소재 이동교육장을 살피고 궁금한 점은 정운관 이사에게 질문하였다. 창업을 준비하는 이재동(73) 교육생에게 궁금점 몇개를 물어왔다. △참가동기와 희망은 무엇인가. “100세 장수시대라지만 50대 초반이면 은퇴가 시작되는 것이 현실이다. 7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인생 재설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후세대와 공유하며 보람차게 살고 싶다. 청장년 일자리창출에 기여하는 창업을 하고자 한다.” 앙코르 브라보노협동조합은 2015년 10월 13일 설립하였다. 조합원 11명은 20~30년 금융, IT, 제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40~60대 중장년으로 구성되었다. 사회적 경제, 전직지원, 상담 및 코칭 등 협업도 전문화 되었다. △조합의 사업목적은 무엇인가? “장년 퇴직(예정)자 및 경력단절 여성에게 인생후반 수입 뿐 아니라 개인적 의미, 사회적 가치를 만족하는 앙코르 커리어를 제공하고, 사회적 경제 기업에 진정성과 지식을 갖춘 앙코르 인재를 육성, 연결하는 것이다.” △사업모델 및 상품, 서비스는 어떻게 특화되었는가? “앙코르 커리어로의 전직지원, 전직지원 코치, 상담, 전문가 양성 및 커리어 전환을 위한 컨텐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현장중심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조합은 2015년 사회연대은행 KDB 시니어브리지를 시작으로 신나는조합, 사회적기업진흥원, 동부여성발전센터 등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사회적기업가 육성, 취업과 전직지원전문가 과정을 운영한다. 전직지원 성공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조합원은 열정과 시간을 가진 퇴직자가 중심이다. 신나는 조합, 사회연대은행 등 사회적 기업 중간관리기관과의 협약을 통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 전직을 연계하는 사업이 주효하다.” △교육생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영리 기업에서의 오랜 경륜은 살리되 새로운 일터, 사회적 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을 지시하던 과거와 달리 많은 것을 직접 해야 하므로 자기 역량 강화에 노력하여야 한다.” 정운관 이사는 장래 계획을 “한국의 선도적 사회적 기업으로서 특히 베이비부머의 안정적인 앙코르 일거리 찾기에 주력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80년 만의 초여름 더위가 대지를 달구고 있다. 건강에 유의하면서 시니어의 전직지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바라며, 정운관 이사의 보충설명에 감사한다. 홈페이지: www.encorebravono.com
- 2016-06-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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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라이프] ‘행복한 실버’ 진짜로 필요한 건 ‘취미생활’
- 10년 전쯤 동문회 송년회에서 대선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제학 교수님으로 장관급 고위직까지 지내고, 70대 중반에 본인 말로 ‘백수’ 생활을 하는 분이었지요. “65세에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고, 석좌교수 예우를 받으며 70세까지 일하다 몇 년 전 은퇴를 했다. 평생 교단에서 ‘노동은 고통(PAIN)’ 이라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사실이라 믿고 가르쳐왔는데, 최근에서야 노동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없고 외롭다. 현재 일하고 있는 후배들! 가능한 한 오래 버텨라! 직장에서 나오는 순간 행복과도 이별이다.” 평생 일의 노예처럼 살아온 분들의 노후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몇 분의 말씀 후에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선배님 말씀에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지만, 돈과 일만으로 인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일은 중요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이해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와 취미를 가꾸는 노력도 긴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야생화를 촬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겨도 ‘뷰 파인더’ 속에서 야생화를 들여다보는 순간 행복감에 도취하게 됩니다. 저는 은퇴를 해도 야생화와 카메라와 그 친구들이 있기에 삶이 무료하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 것 같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취미란 ‘인간이 금전적 목적이 아닌 기쁨을 얻는 활동’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대우증권이 2014년 말에 50세 이상의 주요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시니어 노후 대비 실태보고서’ 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에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평생 동안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지 못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의 금융전문가인 웨스 모스는 46개 주에서, 1400명의 은퇴자를 대상으로 ‘행복한 은퇴생활의 조건’을 조사하여 “행복한 은퇴자는 3~4개 정도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가 없는 인생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향기가 없는 꽃에는 꽃과 나비가 꼬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인생은 무료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나이 들어 새롭게 시작한 취미활동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삶의 향기를 전해 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진을 통해 만나게 된 류신우 토목기술사(1943년 생)는 은퇴한 이후, 2003년부터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잡았는데, 이제는 토목 전공이 아니라 사진 전공이라고 할 정도로 사진촬영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틈틈이 지난 10여 년간 찍어온 사진파일들을 정리하여 국제사진예술연맹(FIAP)이 인증하는 국제사진공모전에 출품하고 있습니다. FIAP는 유네스코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NGO기관으로 승인한 예술단체인데, 그는 지난해 8월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진 공모전에서 293점의 작품이 수상 혹은 입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국제사진예술연맹의 사진작가 칭호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앞으로 소정의 기간이 경과하면 류신우씨는 우리나라에서 FIAP가 인정하는 사진작가 제1호가 될 전망입니다. 그는 “일을 할 때는 늘 사람과의 경쟁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지내 왔는데, 사진은 경쟁 상대가 없어서 좋았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나 렌즈로 들여다보면서 피사체와 나 사이에 서로 감정이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커다란 희열을 맛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몸이 아파도 카메라만 들면 힘이 저절로 솟구친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취미는 인생의 오아시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척박한 사막에 도전하는 것은 그 속 어디엔가 오아시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취미는 사막보다 더 외롭고 혹독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취미는 사람을 살리는 취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을 통해 알게 된 H 회장(1946년 생)은 비교적 규모 있는 중견 건설기업을 운영하던 중, 국제금융위기 여파로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자기가 사는 집까지 포함, 100억원에 가까운 사재를 몽땅 털어서 회사를 정리하고, 전 가족이 수년간 월셋집을 전전한 양심적인 기업인이었는데, 부도 이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송파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만난 초췌한 모습의 그와 소주 몇 병을 비우면서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 “사진을 배워라. 사진에 심취하게 되면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경, 그로부터 SNS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허리를 다쳐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다면서, 자신은 수년 전 사진을 배웠고, 이제는 사진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만난 그는 사진을 시작한 이후로,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장터가 생각나 전국의 오일장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테마로 사진을 찍고 다닌다며, 최근에는 6개월 코스의 사진스쿨에도 등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사진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엄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사진이 나를 살렸다.”고 얘기하더군요. 가끔 SNS를 통해 대하게 되는 그의 작품들 속에는 고달픈 삶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절절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 역시 사진이라는 취미활동을 통해 은퇴 이후의 삶을 재미있고, 윤택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야생화 사진촬영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재미있는 골프마저도 끊어 버리고, 역시 사진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주말이면 짐을 싸 들고, 카메라 메고, 차를 몰고 꽃을 찾아 전국의 강산을 헤매고 다니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아내가 야생화 대신 새를 찍기 시작해 요즈음은 함께 다니는 빈도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60 중반을 넘어서 주변으로부터 “사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는 얘기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부공동의 취미생활을 통해 얻게 된 소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야생화 촬영을 통해서 얻게 된 또 한 가지는 꽃과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떠난 만남이었습니다. 2005년 봄, ‘들꽃마을’ 이라는 야생화 사진 동호회를 통해 맺어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족 이상으로 끈끈한 정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제게는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란 책(부제 :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펴낸 고민숙 작가는 “취미는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듯 즐길 수 있었던 일상의 재미난 놀이” 라고 정의하고, “취미의 발견이란, 나를 발견하고, 주위를 발견하고, 일상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시니어 세대의 많은 분들이 스스로 취미를 발견하고, 그 취미 생활을 통해 누군가에게 새로운 ‘취미 발견’의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면 그 시니어라이프야말로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저는 손자들이 야생화를 바라보며 그 강인한 생명력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사진이라는 취미를 통해 어려서부터 스스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현우와 승우에게도 사진찍기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 글 조용경(趙庸耿)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6-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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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경제] 브라보라이프 첫 걸음, 자기사랑
- ‘사랑한다.’는 말이 어느 시대보다 많이 쓰여지고 있다. 연인 사이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인간관계 증진을 위하여 꼭 필요한 말로 권해진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자식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친구나 이웃에게도, 고객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의 지고한 가치가 있어서다.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다같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을 희망한다. 특히 후반생에 있어서 브라보 라이프는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닐까? 사람은 가진 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물이 있어야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다. 많고 적음은 별개다. 나눌 수 있는 것은 재물만은 아니다. 마음도 그 하나다. 재능도 그렇다. 그 양은 많아도 적어도 나눌 수 있다. 콩 한 톨을 열 사람이 나누어 먹고 한강에 던지니 ‘퐁당’하더라 했다. 요즘에 이르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개뿔도 가진 것이 없다면 주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도 줄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있을 때에 그 사랑을 하나씩 꺼내어 남에게 줄 수 있다. 재물과 마찬가지로 내 속에 쌓아 놓은 사랑이 없다면 꺼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부모나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도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베풀 수 있는 사랑이 곳간에 쌓여 있어서다. 부모나 가족에게 받지 못하여도 스스로 사랑을 쌓는 경우도 있지만 쉽지 않다.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채워져 있다면 쉽게 남에게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새로 채워서 주는 경우보다 쉬울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현상을 종종 만난다. 미움을 받고 자란 아이는 미움이 가득 쌓이게 된다. 다른 내용물이 들어갈 틈이 없다. 꺼낼 수 있는 것은 미움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피해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의심을 하거나 사람을 피하려 한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다. 부부싸움으로 세월을 산 사람의 자녀는 결혼 생활이 닮아 가기에 십상이다. 어느 집의 딸아이는 나이가 40살이 지났지만 시집 가기를 꺼린다. 부부싸움에 평온할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다. 마음에 사랑이 메말라 있어서다. 사랑의 곳간이 비었다. 내 인생의 중추는 나 자신이다. 주인공이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속에 사랑을 쌓아 가는 일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해서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행복을 전달할 수 없어서다. 짜증스러우면 나의 행동과 말이 곱게 나가기 어렵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불행하면 나에게 나오는 기운은 불행이다. 상대방이 불행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수신제가 평천하라고 하는 옛말이 있다. 자신을 먼저 닦는다는 의미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나를 갈고 닦는다 함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내가 제대로 서지 않고서 가족이나 주변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인생은 늘 뒷전에 두었다. 자식을 위해서 우선이었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 일쑤였다. 부모세대는 우리보다 더욱 그랬다. 고운 옷을 보아도, 맛있는 것이 눈에 띄어도 늘 자식을 떠올렸다. 몸이 아파도 자신을 챙기기를 망설였다. 경제적으로 늘 부족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은 늘 뒤로 미뤄졌다. 끼니 때우기가 어려웠던 시절엔 어머니는 늘 밥을 먹어 배부르다며 부엌에서 물을 마시기 예사였다. 이제는 장수시대다. 자녀들의 생활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든 세월을 살얼음 위를 걷듯 한다. 우리가 직장을 다닐 때는 남자 혼자 벌어서도 집안 살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 부모로서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지만, 희생보다는 그들의 힘을 덜어줄 수 있는 방도를 미리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일이다. 자녀의 도움이 없이 노후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자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건강을 챙겨야 한다. 내가 아프면 오래 산다는 것은 재앙이다. 자식에게 짐만 된다. 노인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당장에는 마음이 아플지 모르지만 자식에게 집중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위하여 경제적인 부분도 챙겨두어야 한다. 달랑 집 한 채 가졌다면 노후 자금을 위한 주택연금에 가입하자. 걸을 수 있을 때에 가고 싶은 곳도 많이 다녀두자. 먹고 싶은 것도 자신에 많이 먹여주자. 좋은 음식도 나부터 먹자. 젊은이는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일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 나를 너무도 혹사하였다. 이제는 나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자.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곳간에 사랑을 채우는 일이다. 언제고 꺼내어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말이다. 사랑도 쌓여야 남에게 줄 수 있다
- 2016-05-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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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6]'지금까지처럼 함께, 최고의 동지가 되어' - 도미패션 정옥순 대표와 딸 장소영 교수의 아름다운 동행
- 광주에서 양장점을 경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새벽에 동대문 원단시장에 도착하여 온종일 원단과 패션 트렌드를 익히던 여고생은 어느 순간 학생들에게 의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교수가 될 때까지 걸린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어머니는 단 하루도 옷을 만드는 자신의 일을 허투루 대하지 않았고, 50년 동안 직접 옷본을 뜨며 옷을 만드는 현역이다. 도미패션하우스 정옥순(鄭玉順·74) 대표와 호남대 의상학과 장소영(張昭詠·46) 교수는 모녀이자 일생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긴 세월 광주 패션의 역사를 지탱해온 산증인들이다. 때로는 힘이 되고 때로는 함께 길을 만드는 모녀의 이야기. 정옥순 대표는 74세라는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40여 년간 국선도로 단련된 자세와 여전히 매끄러운 피부와 풍성한 머리숱이 나이를 잊게 만들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외모 이전에 여전히 현역에서 있으면서 핸드프린팅으로 옷본을 뜰 정도로 작업에 깊게 개입하는 그녀의 일상은 과거와 현재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정 대표의 젊음은 무엇보다도 현업 장인이라는 기반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딸이 따라갈 수 없는 어머니의 저력 “50대까지 장사하는 분들을 보면서 ‘난 절대 일하는 걸 50살을 안 넘겨야 해’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50살이 지나니 벌써 오십 됐네 싶고 앞으로 더 할 수 있는데 왜 계속 일하는 사람 마음을 몰랐을까 싶었죠. 그때 10년이 지나 회갑이 되면 그만두자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회갑이 지나니 눈 감고도 일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더군요. 그래서 계속 일을 하다 보니 벌써 74세가 됐어요.” 옆에 있던 딸, 장소영 호남대 의상학과 교수가 ‘앞으로 10년은 더 하실 것 같다’고 한마디 거든다. 정 대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일하는 거 외엔 취미가 없어요.” 장 교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아~무 취미가 없으세요. 오로지 일하고 주무시고.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세요. 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제가 어머니와 같이 일하면서 어머니를 굉장히 닮아가게 됐어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삶을 따르다 패션이라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어머니와 딸은 비록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지이지만 서로에게 100% 딱 맞는 관계는 아니었다. 어쩌면 원래는 달랐던 두 사람이 세월의 힘에 의해 계속적으로 닮아진 건지도 모른다. 장 교수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정 대표는 그녀를 데리고 동대문 원단시장을 다녔다고 한다, 원단과 자재를 익히는 법을 일찌감치부터 체험을 통해 교육시켰던 것이다. 장 교수가 의상학과를 들어가게 된 것도 어머니의 뜻이었다. “제가 미술을 되게 좋아했어요.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디자인으로 옮겨가게 됐죠. 어머니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웠고, 의상학과를 가게 된 것도 자연스러웠어요. 단 원단이나 재료를 보기 시작하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걸어야 했죠. 그건 너무 힘들었어요.” 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그때는 고생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만큼 할 사람이 없어.” 어머니의 업(業)을 통해 길을 찾은 장 교수가 어머니가 부지런히 일궈놓은 것을 아무 노력없이 받은 것 같아 죄송스럽다는 말을 하지만 모녀간의 이해와 배려가 그 어떤 관계보다 더 남다르게 느껴졌다. 서로를 마주하며 동행해온 대물림 정 대표의 어머니, 그러니까 장 교수의 외할머니는 함경북도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어머니가 옷을 굉장히 잘 입었고 염색, 짜깁기 등등을 잘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장 교수가 정 대표의 업을 이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정 대표 또한 어머니의 삶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렇게 의상을 업으로 삼은 3대에 걸친 흐름이 연결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어머니에게 교육받은 장 교수는 최근의 의상학과 학생들을 보며 근심이 많다. “요즘 고교생들을 상담을 해보면 의상학과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거 돈 잘 벌 수 있어요?’라고 물어봐요,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경우죠. 자기가 정말 좋아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고 이 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중간에 그만 두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볼 것, 뭐든지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을 강조해요.” 다른 듯 닮은 두 모녀는 삶이 하나가 되다 정 대표는 ‘직업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해요’라고 덧붙였다.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정하여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걸어온 그녀의 담담한 한마디에는 남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함께 같은 길을 계속 걷게 될 딸 장 교수야말로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고 체득하여 지켜왔던 가장 훌륭한 제자이지 않을까. “소영이가 교수 정년퇴임하고 나면 함께 일하며 현역 디자이너로로 살았으면 해요.” “그럼 엄마는 아흔 살 넘게 사셔야겠네(웃음).”
- 2016-05-26 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