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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도사 되는 법] 순둥이 순례가 유투브 배운 덕에 남친 생겼다
- “얘들아 빅 뉴스! 빅 뉴스야. 글쎄 순례가 남자친구가 생겼대.” 만나자마자 온통 들썩이게 큰소리로 멀리 떨어진 친구 소식을 전한 사람은 ‘기러기회’ 회장 화자였다. 60세가 넘어서도 고등학교 동창들이라고 언제나 ‘얘들아’ 하고 불러대니 주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그쪽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자기네들끼리 눈을 맞추며 킥킥댄다. 기러기회는 이혼하거나 사별하고 혼자 사는 친구들이 우연히 모여 만든 친목회다. 원래는 ‘외기러기회’인데 그 이름이 하도 처절해서 그냥 기러기회로 한 것이다. 올 초봄에 이들에게 날아온 빅 뉴스는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오듯 기상천외하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코쟁이래?” “그냥 친절하게 대해 준 걸 갸가 오해하는 거 아녀?” 허공으로 뿜어내는 무책임한 추측성 발언으로 없는 친구를 찧고 까부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 빅뉴스가 믿기지 않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백 가지는 된다. 순례는 원래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다. 누가 말을 시키기 전에는 입을 꾹 다물고 묻는 말에도 늘 단답형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처녀 때 당시 최고 여인상인 ‘요조숙녀’에 ‘현모양처형’이라며 그의 남편이 하고많은 여자 중에서 순례를 골라잡았다. 순례는 윤기 나는 남편의 외모에 혼이 나가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갔다 오자마자 순례는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누이에 시동생 도합 여덟 식구를 아우르는 현모양처에 묵묵히 일만 하는 며느리이자 새언니, 형수가 됐다. 그런데 이 번지르르한 남편은 자정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여자관계도 총각 때나 매한가지로 복잡다단해 순례에게 할애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순례의 암울한 시절은 시간이 흘러 두 어른이 돌아가시고 시누이, 시동생이 일가를 이루며 끝나는 듯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던 차에 남편이 방랑 살이 끝에 몹쓸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겨우 하나 있던 딸도 사위 따라 미국으로 떠나 버리자 순례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순례는 딸의 출산으로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공항에서 친구들은 헤어지는 것이 슬프기보다 순례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지나가 더 울었다. 고작 손녀 보러 말도 안 통하는 그곳에 가면서도 만면에 희색이 도는 그를 보는 것은 어떤 슬픈 영화보다도 더 애달팠다. 아니 그런 순례가 어떻게 남자친구를 사귄단 말인가? “풍기에 사는 남자래. 걔하고 취미도 딱 맞는다나. 시도 쓰고 동물을 엄청 아끼는 남자래.” “뭐야? 아니 여기 사는 우리도 풍기는커녕 동네 사람도 사귀기 힘든데 어디라구 뭐? 풍기?” “인삼도 보내주고 카톡이나 유튜브로 실시간 수다 떠느라 바쁘대.”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워매 워매 컴퓨터라곤 고장 낼까 봐 가까이도 안 가던 갸가 뭘 혀?” 사실인즉슨 외로운 장모를 위해 사위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르쳐줬단다. 아기 보는 일 말고는 할 일도 없던 차에 열심히 배워 유튜브에 들어가 이 글 저 글 읽다 보니 자기 구미에 맞는 풍기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날로 기러기회 회원들은 말없이 동네 구청이나 주민센터 컴퓨터 교실에 무료로 등록하고 미래의 남자친구를 꿈꾸며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다. 이제 외기러기회가 쌍기러기회로 변신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2016-05-2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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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부부의 날을 기념하며
- 우리 한자어에 부부(夫婦)라 함은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를 뜻한다. 부부의 날은 2007년 부부 관계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흔들리는 가정의 이탈 속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자는 취지로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만들어진 법정기념일이다. 건전한 가족 문화의 정착과 가족 해체 예방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의미를 담고 만들어진 특별한 날이다. 매년 5월 21일로, 5월은 가정의 달로 숫자 2는 두 사람이 1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뜻 깊은 부부의 날을 맞이하여, 가정마다 이혼율은 높아지고 그것도 황혼이혼율이 늘고 있는 요즈음에,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반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특별한 날이기를 소망하면서 설정스님의 인생법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부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5가지를 소개해 본다. 부부처럼 지중한 인연도 없으련만 서로 잘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나이 들어 가는 방법은 왜 없을 까. 그 소중한 인연을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함부로 대하고 있다. 부부 관계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순리인데 우리는 그것을 역행하며 때로는 이용의 도구로 삼고 있기도 한다. 부부의 인연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어차피 맺어져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과 함께 지어미와 지아비로 천륜으로 맺어졌다면 더욱이 그 엉킴의 타래는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로 살기 위해서는 첫째 관심을 갖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늘 사랑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내 소유가 아니라 취향과 사생활을 존중하며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셋째 책임져야 한다. 배우자를 이용가치로 생각하지 말고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조건 없이 헌신해야 한다. 넷째 이해해야 한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배려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주기 이다. 희망을 주고 사랑과 위로를 주고 때로는 악연일수록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 좋은 말을해 주고 따뜻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언어로 좋은 마음을 보내주는 것은 중요하다. 좋은 에너지는 주면 줄수록 악연은 빨리 풀어진다고 한다. 부부의 날 첫 주창자인 권재도 목사는 “우리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라는 한 어린이의 TV인터뷰를 보면서 그 충격으로 부부의 날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는 가슴이 울컥해졌다. 우리가 살면서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면서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산 넘으면 고갯길이 또 한고비를 넘기면 다음 산마루가 그렇게 어느덧 인생 반 고비를 넘기며 이제, 저 산 꼭대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다. 어느 날인가 큰딸아이가 9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남편과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크게 싸우고 나오는데, 큰아이가 방문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다가 소스라 치게 놀라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필자는 다짜고짜로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쳤다. 아이는 울면서 말을 했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열심히 문 앞에서 절을 했다고 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필자는 그날 이후로는 힘이 들 때면 가정에 위기가 올 때면 그날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견뎌오곤 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멀지 않았다. 돌아서 앉아있는 남편의 머리 칼은 희끗희끗 처량하게 변색되어 있고 어깨는 축 처진 채로 지나온 날을 대변해준다. 미워하며 살아온 날도 더러는 사랑의 앙금이리라. 이제와 더 무엇을 찾을 것 인가. 이제 책 속에 무수히 써있는 보이는 글 보다는, 세상에 널려져 보이지 않는 우리 부부의 삶의 글을 되돌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특별한날, 필자 부부가 좋아하는 간짜장 해물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 2016-05-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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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건강] 치매 예방주사는 대화로 푸는 소통이다
- 고령화 사회에서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老老Care)는 시대적 소명이다. 선진국일수록 보건환경 개선으로 고령화는 필연이며 반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든다. 당연히 전체 인구는 고령화와 저 출산이 서로 상쇄되어 별로 줄지 않지만 사회인구는 점점 고령화가 되어간다. 고령화 사회의 노노케어는 젊은이들에게 생산과 후세 교육에 전념토록 할 수 있는 여력을 주고 활동적인 시니어에게 새로운 일자리 창출된다. 필자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노노케어의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로 이론적인 재무장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인운동지도사. 수지침사, 맛사지사 등 다수의 민간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지금 치매지원센터에서 치매전문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에서 환자도 그렇지만 가족도 제일 겁먹는 질환이다. 중풍은 의식이 있는 본인이 괴로운 병이라고 하면 치매는 가족이 고달픈 병이다. 가죽 끈 같은 끈끈한 가족의 유대감이 없으면 한식구라는 관계가 어느 날부터 해체되고 심지어 치매 환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치매는 병인데도 일반인이 치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제발 정신 차리라고 환자를 때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80대의 치매할아버지가 철로를 걷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치매할아버지의 법률상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열차 지연에 대한 벌금을 부과 하였다. 할머니도 고령인 데다 할아버지의 매 순간을 감시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였지만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 의외인 것은 아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며 그 이유로 같이 살지 않는 다는 점을 들었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의 한사람으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고 감히 말한다. 치매는 영어로 Dementia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인지증(認知症)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치매(癡呆)라고 쓴다. 치매 글자는 癡(어리석을 치) 呆 (어리석을 매 )자로 무릎을 탁 칠만큼 치매환자의 상태를 글자의 의미에 잘 담고 있다. 癡 는 병질부 즉 암(癌),병(病)과 같은 병질부를 쓰고 있으며 안에는 의심할 의(疑 )자가 들어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소통이 없으면 남을 의심 하게 된다. 소통이 없는 치매환자는 의심이 많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숨겨놓고 숨긴 사실을 잊어버린 채 누가 훔쳐갔다고 남을 의심한다. 심지어는 요양보호로 방문한 요양보호사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 서로 소통이 원활한 사람은 의심이 있을 이유가 없고 이런 사람은 치매가 없다. 매(呆) 자를 자세히 보면 나무(木)위에 입(口)을 내미는 형상이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말할 상대를 찾으러 나무위에 올라가서 입을 내밀어 보겠나? 결국 대화 상대를 못 찾고 어리석을 매(呆)자가 되어 치매환자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꾸어 말하면 혼자 외롭게 살면서 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치매에 잘 걸린다. 사람의 의사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말할 상대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치매 한자를 풀어 의미를 새겨보면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치매는 외롭게 혼자 있는 사람들에게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최근 치매는 노인성 질환이라는 통념과 달리 20∼30대 청년층 치매 환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서구화된 식생활과 운동부족, 음주 및 우울증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런 이유 말고도 사람사이의 대화소통에 주목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사회며 농경사회여서 가족, 이웃 간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 졌다. 나이 들어 노동에 종사 못하고 집에 혼자 남게 된 노인들이 치매에 많이 걸린다. 치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보면 대개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현대의 치매 환자의 증가는 점차 대화가 없어지는 가정과 이웃, 현대 사회가 주범이라 생각한다. 1인 세대가 늘어가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간다. 사람끼리 모여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카톡으로만 대화한다. 카톡으로 반갑게 대화하던 사람도 실제 만나면 시들해진다. 카페인 중독이라 하여 카톡이나 페이스북 인터넷은 중독에 가깝도록 이용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직접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키스하는 감질내는 형국이다. 보건 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치매로 인한 비용도 2008년 8,625억 원에서 2012년 1조9,234억 원으로 123%나 늘었다. 세부적으로는 의료비(4,826억원→1조1,891억원), 교통비(10억원→23억원), 간병비(3,146억원→6,217억원)와 같은 직접비용이 모두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1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돼 2020년에는 18조9000억 원, 2030년에는 38조9000억 원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의료과학의 발전으로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겠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이웃과 고립화되어 혼자 살아가는 외톨이들 에게는 치매는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은퇴하기 전에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남들과 어울리는 소통력을 시니어들은 키워야 한다.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친구랑 함께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부부가 함께 행동을 하면 좋겠지만 3,4십년을 서로 다른 생활을 바쁘게 해오다가 어느 날 퇴직했다고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서 함께 지내려고 하면 평소 못 보던 단점을 자주 보게 된다. 퇴직 후 부부싸움이 잦아지는 부부를 방송에서도 주제로 다룬다. 평소 이웃사촌이라는 동네친구를 사겨야 한다. 좋은 이웃친구란 나와 경제력이 비슷하고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다. 시니어들은 살아온 세월이 있어 나와 잘 맞을지 않을지는 금방 알아낸다. 성격상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하거나 한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계속 친구로 지내려는 생각은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이 들면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빨리 헤어져야 한다. 지금 가입해 있는 스포츠나 취미 동호회가 있다면 목숨 줄처럼 꼭 붙들어야 한다. 나이 들어 새로운 모임에 가입하려고 하면 잘 받아주지도 안을뿐더러 혹 받아준다고 해도 개밥에 도토리처럼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탁구나,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등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좀 젊었을 때 배워두면 좋습니다. 필자는 테니스를 30년이나 함께한 동호회가 있는데 주말이면 함께 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나이 들수록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소통하는 도구요 자산. 필자는 해마다 실시하는 동네 도서관의 독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5만 페이지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면서 상도 받는다. 막연히 하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세워서 하면 동기부여가 확실하여 달성하기가 쉽다. 읽은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녹아 나온다. 남들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울리며 소통하는 여유로움이 치매예방주사다.
- 2016-05-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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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의 그 순간] 조선인 서양 나들이 (上) ‘어떻게’ 시작됐나
- 한국인들의 첫 서양 나들이는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늦었다. 개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년 이상 늦어진 까닭이다.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 후인 1842년(남경조약),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의 개항조약을 1876년(강화도조약), 미국·영국과는 1882년에 맺었다. 또 일본이나 중국은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국을 ‘견학’하지만 우리에겐 이 같은 의욕이 부족했다. 조선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부 차원에서 허용된 몇 개 항구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교류와 통상을 금지하여 문을 잠갔다. 바로 ‘쇄국정책’이다. 조선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약하다고 스스로 평가하여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한 것이다. 교류가 빈번하면 강대국의 영향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이 결과 정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 정권의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금지한 근본적인 배경이다. 단지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1년에 네 번 조공 사절을 보냈다. 중국의 명(明)왕조 역시 외래족인 몽골제국 원(元)을 몰아내고 건국되었기 때문에 외부와의 거래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부터 대외접촉을 억제했다. 주변국들의 조공도 3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평화가 정착된 후 교류 확대를 허용했다. 조선 정부는 일면 중국과의 접촉을 정부 차원으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게는 국경을 철저히 감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조선인의 압록강·두만강 월경은 극형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던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조선이 혼자 꿈속같이 편안히 살려고 하나 주변국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제정치가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학자들은 1860년대 이후 조선이 중국과 일본 외에는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 개항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핑계이며 ‘조선의 쇄국은 그 뿌리가 서울에 있다’고 평한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되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에 대한 풍문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에서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중국은 조선이 미국·영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도록 주선한다. 서양 국가들을 이용하여 러·일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 전략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서양 국가들은 조선이 자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교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국이며 중국의 속방(屬邦)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조선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했다. 미국이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공사와 동등한 직급이다. 영국은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되어야 러시아가 열강의 동의 없이 조선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 문제는 텐진(天津)에서 자기와 먼저 논의하자는 요청을 무시하고 조선 정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택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그동안 정치권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자 중국은 경악한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복귀하면 조선을 개방시켜 러·일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밑바닥부터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 대원군을 지지한 세력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중·조 종속관계는 ‘정교금령(政敎禁令)’, 즉 ‘내정과 외교’의 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조공, 책봉 등 형식적, 의례적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조선이 내정이나 대외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독립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모호한 ‘종속관계’를 내세워 마치 원(元)나라 시대 고려에 주재한 다루가치와 같이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나선 것이다. 이제 조선은 기막힌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중심인물이 원세개(袁世凱)이다. 이홍장(李鴻章)이 파견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1859년 생으로 대원군을 데리고 인천에 들어온 것이 1885년 10월 3일(양력)이니 이때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이전까지 오늘날 을지로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서 ‘유안 다이런(袁大人)’으로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우리나라가 1946년 10월 서울의 지명에서 일본식 이름을 정리할 때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원세개 등 중국인들의 본거지를 수(隋)양제를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정신으로 제압하려 한 것이었다. 원세개는 서울 주재 외교단의 수장(doyen) 직을 맡으라는 서양 외교관들의 권고를 거부한다. 자기는 중국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라 조선 문제를 전담한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라고 파견한 ‘주찰조선 총리교섭 통상사의(駐紮朝鮮 總理交涉 通商事宜)’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과 중국은 한가족이라면서 외교사절들을 초청할 때도 자신이 주빈 자리에 앉고 조선의 늙은 외무대신을 말석에 앉혀 손님들을 접대하고 시중들게 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가거나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고 인사문제에도 개입했다. 서양 열강은 이에 중국의 조선 통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정책을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1884년 말 “조선에서 미국의 이해는 경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서울 주재 미국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minister resident)로 한 단계 격하시킨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영국도 중국과의 협조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판단하면서 조선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 버린다. 조선은 중국의 압력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과거와는 판이해졌다. 열강들과의 수교와 만국공법의 도입으로 평등성에 기초한 유럽적 국제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과거에는 중국만이 강대국이었으나 이제는 중국을 굴복시킨 강대국들이 포진하고 있다. 1885~1887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중국을 통한 교섭이 실패한 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해결됐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독립당-개화파가 대두했다. 이에 정부는 1884년(고종 21) 조선·러시아 수교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두 차례 추진하며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조치를 취한다. 해외 나들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6-05-1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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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 2016-05-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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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9년生,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 -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 김애양(金愛洋)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이화여대 의대 졸. 은혜산부인과(서울 강남구 역삼동) 운영. 1998년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5권 발간.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결성해 모임을 주도하고, 해마다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을 통해 의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 2016-05-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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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슬픈 가족사
- 나에게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아버지는 뭇매를 맞았다. 아버지는 오봉산 꼭대기에 숨어 있었으며, 거기는 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어서 의지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고, 북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에게 발각돼 아버지는 혼쭐이 났다. 우리 집은 인민군의 숙소가 됐고 주인인 아버지는 눈치를 보느라 산 속에서 지냈다. 그 와중에 우리 큰 고모는 겁탈하려는 미군을 피해 달아나다, 그 충격으로 정신병자가 됐다. 논까지 부쳐 시집을 보냈지만 고모의 시아버지 장례를 마치고는 하얀 소복을 입은 채로 친정 마루 끝을 올랐다. 집안은 날마다 한약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고모는 아주 슬프게 객사를 했다. 이런 쓰라림을 간직한 채 나는 지난 6월 1일, 복지관에 강의를 하러 갔다. 어르신의 글쓰기 제목으로 '6월이 오면'을 지정했다. 6.25전쟁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을 적도록 했고, 사변 후 태어난 사람은 6월이면 생각나거나 들은 이야기를 쓰도록 했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어르신들은 또박또박 적어 발표했다. 그 중에서 한 어르신은 백병원 앞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유지인 관계로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어머니를 거꾸로 매달아 막대기로 때렸다. 치마가 엄마의 얼굴을 덮었다. 엄청 울었던 꼬맹이, 그 때가 여섯 살 이었다. 한강을 건너려고 하니 얼음이 얼었었다. 강을 건너던 미군이 머리를 쏙 내밀고 그대로 얼어가고 있던 광경보다 어머니의 고문이 더 슬프게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어르신은 연속극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했다. 아버지는 군의무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쫓기고 있었다. 그 당시 처녀들을 마구 잡아갔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군인들 속에 숨겨주었다. 간호사라고 말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 때 어머니는 따로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그 남자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87세다. 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어르신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에는 커다란 상처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는 우울증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그 아릿한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단다. 6월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전자가 되어 흐르는 이런 아픔이 희미해지는 날이 올까.
- 2016-05-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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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
- 지난 5월, 집집마다 활짝 피어 올랐던 카네이션 꽃들이 아쉬운 눈빛으로 저만큼 자취를 감추고 그 남은 향내마저 시들어 뒹굴 때쯤이면 부서진 꽃잎들은 흐린 미소로 전해온다. 또다시 6월의 꽃들은 정녕 눈부심이라고 나지막하게 내 귓가에 희망을 담고 속삭여온다. 장하다. 내 딸들아! 그리고 앞으로도 화이팅! 내게는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그 딸들은 6월이 되면 한아름의 장미꽃으로 내게 남은 열정을 태워주는 불씨가 된다. 그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선물에 나는 고여 드는 눈물로 하늘 우러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자식이 잘 되기를 소원하지만 이 서서히 타오르는 계절, 그것들은 분명 그 아름다운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귀한 인생의 값진 선물이리라. 우리 가족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격은 시련의 시간들이 많았다. 나라의 경제위기와 함께 닥쳐온 가정의 몰락, 그 여파의 빈털터리로 도피해야만 했던 이민생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산가족의 아픔, 낯설기 만한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겪어야 만 했던 수많은 고통들, 그 상처들은 피나는 눈물로 파고들어와 뼈 속으로 스미는 칼날이었다. 험난한 절벽아래 낭떠러지 위기의 고통을, 우리는 어쩌다 상봉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리움의 빛깔로 채워진 가족이라는 힘으로 빛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던가. 다행히도 아이들은 긍정의 힘으로 열심히 잘 버티어 주었고 그 초라하고 가난했던 상처들은 이제 얼룩진 추억으로 남아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힘겨웠던 돌덩이 들은 멋진 유학생활로 탈바꿈하여 어엿하고 당당한 여의사들이 되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어찌 더한 빛나는 기쁨이 있으리오. 우리의 삶이 때론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 해도 지독한 고통과 함께 견디어 냈기에 지나고 보면 그래도 견뎌 낼 만했었다고 그리고 참아낸 만큼 또 하나의 찬란한 눈부신 행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살면서 찾아오는 순간의 기쁨을 또 누릴 수 있기에 그 어떠한 고통도 더 견뎌 나갈 수 있을 것이리라. 또한 그 기쁨 눈물은 기도로써 간절히 갈구했던 부모의 마음이었기에 더 값지게 솟아 날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물 안주고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고 말이다. 어느 어떤 나무가 물 안 먹고 자랄 수 있단 말 인가. 나는 그저 회심의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시간과 침묵이 말해줄 것을 기대할 뿐이다. 부모와 자식 그 관계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제나 부모는 자식 잘 되기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자식은 이 다음 언젠가 또 부모가 되었을 때 아마도 그 때쯤이면 부모마음 어미마음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내 생일이 담긴 6월이 찾아오면 두 딸들은 호텔 부폐로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가난해진 어미를 끌고 다니며 명품으로 포장시키고 그 화려한 선물 아름다운 유혹으로 나를 초대 한다.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진 어미에게 카네이션 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잔잔한 가슴에 불씨를 댕겨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행복은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언제고 주인님이 꺼내어 줄 때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또 나의 그날이 오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행복들을 끄집어 내어 아주 찬란하게 환한 빛으로 말하고 싶다. 다시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이라고. 그리고 그 강하게 퍼부어대던 낯 설은 소나기의 위기 속에서 훌륭한 꽃으로 피어나준 내 아이들에게 고마움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 2016-05-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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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트렌드] ① 시니어들이여! 젊음 대신 품격을 입자
- 시니어 패션에 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에 가슴 가득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실 시니어의 스타일은 비단 입는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멋있게 늙어가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시니어 인생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 과거의 영광은 버리고 품격을 입어야 한다. 거기에는 물론 옷을 입는 패션 스타일도 있을 것이고, 봉사활동도 하며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시간만 보낼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개척하고 젊게 살아야 그것이 외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패션을 말해보자. 한국 시니어를 대표하는 시니어룩이 과연 있을까? 딱 잘라 말해 없다. 시니어들 또한 어떻게 하면 나이에 맞게 품격 있는 옷을 입을 수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시니어 의식을 깨고 바꿀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시니어 세대에게 묻고 싶다. 젊은 사람들의 옷을 입으면 젊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착각이다. 젊게 산다고 그들의 브랜드를 좇고 입고 다니는데 그런 게 잘 입는 것이 아니다.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나이에 걸맞은 품격을 입어야 한다. ‘패션’은 본래 변화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인 문화 전역에 걸쳐 적용되는 용어로 의복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나 자신에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결정된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바로 본인 자신인 셈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은 각자 개성에 기반을 둔 본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시니어, 이미지 메이킹은 필요하다 시니어 세대에도 첫인상은 특히 중요하다. 표정이나 복장, 말투와 같은 외향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진실함과 겸손함, 상대방을 배려하는 내면적인 모습들이 동반되어야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의상을 통한 이미지 연출은 무언의 언어로서 기능을 가진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개인의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나타낼 수 있으며 자아 형성에도 도움된다. 좋은 이미지는 개인의 가치를 높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특정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됐던 ‘이미지 메이킹’은 현시대를 사는 시니어에도 필요하다. 자신의 개성과 신분에 맞는 이미지를 구축해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고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한층 더 살려야 한다. ‘좋은 이미지’란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미의식을 반영하되 무엇보다 나만의 개성을 찾아 만들어야 한다. 시니어의 색 ‘Grey(회색)’ 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쉽게 남에게 보여줄 수가 없을 때 옷이 제일 먼저 그 역할을 한다. 옷을 보면 상대의 위치, 성격 등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옷은 예민하고 민감한 자기표현의 일부분이다. 젊은 사람처럼 입는 것이 아닌 제 본분과 나이에 맞게 입는 것이 시니어가 옷을 잘 입는 방법의 하나다. 유행에 대해 시니어의 패션을 말하지는 않겠다. 단, 기본적으로 시니어에 어울리는 색은 따로 있다. 시니어에게는 품위가 생명이다. 그 품위를 살려주는 색이 바로 회색이다. 회색도 색이 다양하다. 소재에 따라서도 느낌과 색이 다르다. 같은 색상도 원단에 따라 다르다. 스웨터나 양복 등을 살 때 진짜 멋쟁이는 회색으로 고른다. 회색은 얼굴이 검은 사람이나 흰 사람이나 누구한테나 잘 어울려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회색과 짙은 빨간색인 버건디와의 매칭도 아주 멋지다. 거기다 요즘 유행하는 브라운색 구두를 신으면 아주 멋진 시니어룩이 된다. 패션 업그레이드와 함께 자존감도 높이자 우선 남들에게 보이는 외모는 자기 자신의 태도나 감정,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더욱 나은 자신의 모습을 위해서는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면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과 더불어 자신감과 긍정의 힘을 기르자.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자아상의 확립은 자존감을 높여주기 마련이다.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이란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앞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좋은 이미지는 개개인 간의 관계 증진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이와 함께 패션을 통해 자기만의 개성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면 이것은 자기만족은 물론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을 주고 개인의 잠재적인 능력과 장점을 최대화하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 2016-05-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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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6월] 내 이름이 바뀐 이유는
- 즐거웠던 ‘가정의 달’이 지나고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오면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직접 체험하지 못했지만 듣고 배운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극심한 전란으로 출생 신고가 늦어지면서 이름이 뒤바뀌고 출생 연도가 늦어지는 사건 아닌 사건을 겪었다. 어느 해인가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한국전쟁 기념일이 다가오자 ‘6·25글짓기 대회’가 있으니 소재가 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국군장병 위문편지 쓰기와 위문품 전달, 한국전쟁 글짓기 대회, 반공 웅변대회가 연례행사처럼 열렸던 30여 년 전 이야기다. 그런 부탁에 필자는 불편했다. 왜냐하면 첫돌이 되기 전 한국전쟁이 터져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잘 아는 일인 양 떠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다. 그렇더라도 그놈의 아들 부탁인데 어쩌겠는가. 용기 100%, 아니 1000%를 총동원해 기억에도 없는 ‘내 이름의 변경사’를 술회할 수밖에. 아버님과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와 문중 족보, 호적등본(현 가족관계증명원) 등까지 모두 활용해서 말이다. 필자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집성촌 친가에서 아버님, 어머님 등에 업혀 30여 리 떨어져 있던 외가로 피란을 갔다. 외가가 있는 동네는 주민들이 차를 본 일도, 타 본 일도 없었고 해방 소식도 다음 해에야 알았다는 첩첩산중에 있어 난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정전 후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학교와 가까운 마을로 이사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원 정리나 부동산공부 정리가 매우 미진했던 시절 ‘호적’이 필요하게 됐다. 면사무소가 상당히 멀고 농사에도 바쁜 주민들은 가끔 면으로 출장 가는 이장에게 ‘민원 심부름’을 부탁하곤 했다. 아버님께서도 출생 신고를 부탁했으나 막걸리 좋아하였던 그분은 제때 심부름을 이행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재촉하지 않으면 해 넘기기 일쑤였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이장이 내미는 호적등본에는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 ‘백형섭’이 아닌 ‘백외섭’이 올라 있었고 나이는 두 살 어리게 기록돼 있었다. 피란 중 외가에서 태어난 동생 이름에도 ‘외’ 자가 잘못 들어가 있었다. 틀리지 않으냐는 추궁에 항렬 이름을 무시하고서도 “외가에서 자라면 외가 항렬대로 ‘외’ 자를 붙여야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외’자 들어간 이름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가끔 놀림거리가 됐고,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황당하고 어려운 이름이 고맙다. 당시 외할아버님, 외할머님과 깊은 정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과일나무 가득했던 오솔길을 손잡고 걸어주셨던 외할아버님과 굽은 등에 필자를 업고 재롱을 받아주셨던 외할머님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이름에 있는 ‘외’ 자와 함께 두 분이 더욱 그리워진다. 다른 사람이 잘 기억해주는 것도 고맙다. 자원봉사를 자주 나가는 필자는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저는 ‘백-외-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인 이름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소개를 받고 나면 100의 90은 바로 내 이름을 머리에 기억하게 마련이다.
- 2016-05-04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