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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강마을 배나들이 옛 이야기
-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2016-07-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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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 ‘소나무’로
- 2016년 3월 12일~5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근대미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한국근대미술의 거장전인 화가 변월룡, 이중섭, 유영국의 작품전시회가 열렸다. 그 중 첫 번째로는, 한국 최초로 전시하는 작품이며, 앞으로는 또, 언제 다시 전시를 하게 될지 기약이 없는, 아주 특별한 화가, 변월룡의 첫 회고전인 ‘삶과 예술’ 전이 개최됐다. 그런데, ‘변월룡 화가’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6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으며, 레닌그라드의 레핀 예술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가 된 고려인이다. 그는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국경 밖에서 태어나, 이주의 땅에서, 소수자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실향민의 운명을,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승화시킨 화가다. 세상과 자기 내면을 향한 시선을, 화폭에 담은 흔적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레핀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있을 때, 독·소 전쟁이 일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정치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그런데 1953년, 그가 레핀 예술아카데미 부교수로 있을 때,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평양미술대학 학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15개월 정도 평양을 다녀온 것이다. 후에 다시 가려 했으나, 북한과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겨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후로는, 변월룡은 소나무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소나무는 러시아에서는 별로 볼 수 없는 나무지만, 한국에서는 가장 흔한 나무다. 그의 소나무 그림을 보면, 반듯하고 곧게 뻗은 나무가 없고, 대부분 뒤틀리고, 심하게 구부러져있다. 화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조국을 그리워하면서 언제나 조국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으로 소나무를 그렸다. 소나무를 그린 작품 중에서 ‘금강산 소나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금강산을 배경으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의 특징은 다른 소나무들과는 달리, 모습이 뒤틀린 것이 아니라 나무가 곧게 뻗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내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나무는 작가가 그의 삶을 마감하는 이생의 끝에서, 영혼이나마 조국으로 돌아가, 비로소 그의 고뇌를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은, 화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한 것은 아닐까? 변월룡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을 끝내 가보지 못한채, 1990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 2016-07-0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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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속으로]강원 영월읍 에어비앤비 ‘앞뜰농장’ 장미자씨 집
-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에어비앤비가 내세우는 여행 방법이다. 친구, 가족이 아닌 현지 주민과 하루 정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외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강원도 영월의 한 에어비앤비를 찾아가 숙박했다. 혼자 떠난 여행. 역시 그곳에는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 웃음 가득했던 시간이 벌써 그리울 따름이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달려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 오후 2시쯤 도착했다. 때마침 빨간색 ‘붕붕이’를 타고 마중 나온 이번 달 에어비앤비 호스트 장미자(張美子·51)씨.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다짜고짜 “약속이 있으니 같이 좀 가자”하기에 무작정 따라갔다. 친절한 미자씨와 술 빚기 장미자씨를 따라간 곳은 영월청정소재산업진흥원(이하 청정원). 작년부터 이곳에서 술 빚는 동호회 ‘자주동샘’을 조직해 영월을 대표하는 술을 빚고 있다고. 현재는 시음 행사를 열어 선을 보이거나 영월의 벼룩시장에서 소소하게 판매하는 정도지만 정식 법인을 세워 술을 판매할 계획이다. 청정원에 도착해서 할 일은 아침에 빚어놓은 맵쌀죽과 누룩을 버무려 밑술을 만드는 것. 다른 회원들이 시간보다 조금 늦은 탓에 일손을 도울 겸 두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에는 죽 반죽이 뻑뻑하지만 계속 손바닥으로 누르고 치대다 보면 걸쭉한 막걸리처럼 변한다. 치댈수록 달고 맛있는 술이 나온다고 해 열심히 거들었다. 영월 귀농 라이프, 1박2일로는 부족해요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숙소인 2층에 휙 던져놓고 장미자씨 일을 도왔다. 물론 쉬어도 상관은 없다. 에어비앤비의 정신대로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허락만 된다면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 호주와 제주에서 농장생활 했던 경험을 살려 장미자씨와 함께 마당에 난 잡초들을 뽑기로 했다. 힘들면 뽕나무 밭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사실 올해 오디 농사는 접었다는 정미자씨. 지난 3월 뜻밖의 한파로 전라도에서 가지고 온 뽕나무가 냉해를 참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래도 따 먹을 정도는 되기에 이웃 친한 분들이 와서 따가기도 한다. 머루랑 다래랑 따 먹고 살아요 장미자·안종호(安鍾浩·53) 부부는 인천에 살다 강원 영월읍 흥월리로 8년 전 귀농 했다. 작년 4월부터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됐다. 손님 숙소로 이용하는 곳은 2층 공간 전체. 집을 지을 때 2층에 작은 부엌이 있으면 편할 거 같아 장만해 넣었고, 훗날 장성한 아이들이 살게 되면 편할까 싶어 밖으로 나가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이 모든 것을 손재주 좋은 남편 안종호씨가 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한 아들, 대학에 입학한 딸이 외지에 나가는 바람에 공간이 텅 비어 버렸다. “에어비앤비를 열어 놓고 난 뒤 설마 이렇게 먼 곳까지 사람이 들어오겠어? 했는데 문을 연 지 한 달 됐을 때 첫손님을 맞았어요.” 주말이면 매번 꽉 차는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손님들이 찾아온다. “바로 어제 왔던 손님은 어디 온천을 예약해 놓고도 저희 집이 좋다고 퇴실 시간이 훨씬 지나 오후 1시가 돼서야 떠나셨어요.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꿀맛 나는 식사시간 저녁에는 낮에 열심히 일한 농사꾼을 위해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넣고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 주셨다. 다음 날 아침에는 직접 잡은 다슬기로 된장국을 끓여 주신 장미자씨. 안 먹어 봤으면 후회했을 맛에 눈이 트일 정도였다. 아침을 먹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각종 과일과 채소, 산나물이 지천이었다. 손님들도 적당히 먹을 정도만 담아가고 과일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아들 한다고. 삼시세끼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다더니 절대 굶을 일 없는 곳이 바로 장미자·안종호 부부의 집이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안녕 친절한 미자씨!
- 2016-07-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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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인생] 새 인생에 딱 맞는, 제2 직업에 도전하세요
-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 2016-07-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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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신재 김 원휘
- 김원휘 목사는 독립유공자다. 필자가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그리워 더욱 존경스러운 아버지다. 아버지 김 목사는 갑신정변의 해 1884년 7월 20일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의성군은 안동군과 함께 우리나라 유교의 본고장이고 한학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신학문의 흐름을 빨리 받아들여 대구에서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고 한국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1919년 방학을 마치고 면학을 위하여 평양에 갔을 때는 이미 독립운동의 격랑으로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귀향하는 길에 서울에 잠시 머물렀고 서울서는 독립을 위하여 전 국민의 궐기가 동시에 거행되어야 하며 독립투쟁을 위한 전 국민의 궐기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서울서 의성으로 귀향하는 길에 김천시에 들렸다. 같은 신학생인 김충한에게 김천에서의 독립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당부했다. 김천군에서는 그해 3월 11일에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10일에 김충한이 검거됐다.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함구하므로 3월 11일에 예정대로 김천시의 독립만세시위는 거행되었다. 김충한은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김 목사는 안동시의 녹전교회를 거쳐 의성군에 들어온다. 의성군에서는 녹전교회의 박영화 목사와 먼저 대구 시위에 참가하였던 계성학교 학생 박영신과 힘을 합쳐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총칼 앞의 무모한 맨손의 시위였다. 일본 고등경찰에 붙잡힌 김 목사는 고문과 재판 과정을 거쳐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악명 높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경북의 여러 지역교회에서 목회했다. 목회지마다 유치원을 설립하고 야학당을 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는 그 시절의 우리 민족의 시대적인 슬로건이었다. 민족의 힘을 기르는 온건하고 강인한 독립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 목사는 1949년 5월 23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지금은 대구 동구 신암동의 선열묘역에서 1994년에 소천한 어머니와 함께 평화스러운 안식하고 있다.
- 2016-06-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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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실개천의 삶
-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 2016-06-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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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
- 2016-06-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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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남자스타 ‘흥행 독식’ 왜?
- 38.8%라는 근래 보기 힘든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KBS 드라마 흥행 일등공신은 수많은 여성 시청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주연 송중기다. 올해 들어 한국영화 중 97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6년 상반기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된 주연은 강동원 황정민, 두 남자 배우였다. 10년 넘게 방송되면서 예능 최강자로 군림하는 MBC 은 유재석 박명수 등 6명의 남자 멤버들이 이끌고 있다. 의 조승우와 의 김준수는 출연 작품마다 매회 티켓매진 기록을 수립하는 뮤지컬계의 최고 흥행 파워 스타다. 최근 들어 드라마, 영화, 예능, 뮤지컬에서 남자 스타 주도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강력한 트렌드로 떠올랐다. 최근 원톱 남자 주연 혹은 남-남 투톱 주연의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여성 스타들이 주연으로 전면에 나선 작품들은 시청자와 관객의 외면을 받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남자 스타 전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돼 여성 멤버들이 주축이 된 여성 예능 프로그램은 보기조차 힘들어졌다. 남자 스타의 티켓파워가 강력해 조승우나 김준수의 뮤지컬의 회당 출연료는 2000만~3000만원 선으로 여자 스타의 출연료를 압도한다. 영화계에선 근래 들어 남자 원톱 혹은 투톱 주연의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1~3년 사이에 송강호가 주연으로 나선 을 비롯해 황정민의 , 최민식의 , 류승룡의 , 황정민 유아인의 등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남자 원톱 혹은 투톱 주연의 영화였다. 그리고 600만~9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다. 황정민의 , 이병헌의 , 황정민 강동원의 , 송강호 이정재의 , 유아인 송강호의 , 하정우 한석규의 , 김수현의 등 모두 남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다. 반면 여자 스타들이 전면에 나선 영화들은 흥행 참패를 면치 못했다. 2014년 상영돼 866만 명이 관람한 손예진 주연의 , 86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심은경 주연의 등 극소수의 작품을 빼놓고는 최근 여자 주연을 내세운 영화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올해 들어서도 여자 주연으로 눈길을 끈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 마지막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100억원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 는 한효주와 천우희, 두 명의 여자 스타가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 개봉 전 기대를 모았지만 5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맛봤다. CGV가 지난 1월 열린 ‘2016 CGV 영화산업 미디어포럼’에서 발표한 관객 101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남자 스타 영화 흥행 파워 판도를 잘 보여준다. 흥행 파워를 의미하는 ‘믿고 보는 배우’를 묻는 조사에서 40.1%의 지지를 얻은 황정민이 1위를, 28.2%의 강동원이 2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송강호, 하정우, 최민식 유아인 이병헌 순이었고 10위 안에 포함된 여자 스타는 10위를 차지한 전지현이 유일했다. 전통적으로 여자 스타들의 흥행 파워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드라마에서도 최근 들어 남자 스타들의 시청률 상승 주도력이 크게 상승했다. 시청률은 높지만 화제성에서 떨어지는 홈드라마를 주로 방송하는 일일드라마나 주말극의 경우, 여자 스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화제성과 신드롬 진원지 역할을 하는 주중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사극에선 남자 스타들의 흥행 파워가 여자 스타들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20%대의 시청률을 돌파하며 화제가 됐던 SBS 는 남자 주연으로 나서 연기대상까지 거머쥔 주원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올해 들어 주중 드라마로 첫 20%를 기록한 SBS 미니시리즈 역시 남자 주연을 맡은 유승호가 흥행 일등공신이었다. 시청률 40%에 육박한 는 남자 주연 송중기가 인기 견인차였다. 시청자의 좋은 평가 속에 12~17%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로 지난 3월 22일 막을 내린 도 유아인 김명민 등 남자 주연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대하사극 역시 정통 드라마로 11~14%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데에는 타이틀롤을 맡은 송일국의 힘이 컸다. 3월 28일 시작된 KBS , MBC , SBS 등 세 방송사의 새 월화 드라마들도 각각 박신양, 강지환, 장근석 등 남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워 시청자 눈길 잡기 경쟁을 펼치고 있다. 또한, 4월 20일부터 방송된 SBS 는 지성의 원맨쇼라고 할 만큼 원톱 주연 지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4월 27일부터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KBS 드라마 역시 천정명 조재현 두 남자 주연의 활약이 눈에 띈다. 물론 주말극이나 일일극에선 여자 주연들의 활약이 여전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여성 주연의 전유물이라는 주말극과 일일극에서도 남자 주연의 흥행 파워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 역시 남자 스타 천하다. MBC , KBS , tvN , jTBC 등 근래 들어 남자 멤버들이 활약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육아를 비롯한 관찰 예능, 쿡방과 먹방 프로그램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여자 예능 프로그램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남자 예능 프로그램의 득세 속에 4월 8일부터 여성 예능을 표방하며 시청자와 만나는 KBS 는 시청률이 3~5%로 기대 이하 성적을 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MC도 남자 스타들이 독식하고 있다. KBS SBS jTBC 의 유재석, MBC SBS jTBC 의 김구라, KBS SBS jTBC 의 강호동을 비롯해 이경규 이휘재 전현무 김성주 등 남자 예능 스타들이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의 MC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반면 메인 MC로 나선 여자 예능 스타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MBC 의 김성주, 의 성시경 유세윤 백지영, KBS 의 신동엽, SBS 의 이휘재 성시경, 의 전현무 등 백지영을 제외한 방송 3사 음악 예능의 MC들이 모두 남자 스타들이다. KBS 등 방송 3사 연예대상 수상자 판도는 남녀 예능 스타의 흥행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2년 1회 신동엽 부터 2015년 14회 이휘재까지 KBS 연예대상에서 여자 대상 수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MBC는 2000년 1회 박경림 이후 2015년 15회까지 여자 대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SBS는 2009년 3회 연예대상에서 유재석 이효리가 공동 수상한 이후 남자 스타들이 대상을 독차지했다. 최근 들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2000억원대(2015년 기준) 시장규모를 보이는 뮤지컬 분야에서도 남자 스타의 흥행 견인 트렌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6월 5일까지 공연한 은 조승우 조정석 윤도현 변요한 등이 인기를 견인했고 이중 조승우는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며 한국 최고 뮤지컬 흥행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등 출연작마다 흥행 대박을 터트린 김준수를 비롯해 홍광호, 한지상, 유준상, 정성화 등 남자 스타들이 강력한 팬덤을 구축하며 뮤지컬 흥행을 이끌고 있다. 이처럼 영화와 예능, 드라마, 뮤지컬 등 대중문화에서 남자 스타들이 대중문화 흥행을 이끄는 트렌드를 구축한 것은 대중문화의 주도적 소비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뮤지컬의 강력한 수용자인 젊은 여성 관객과 시청자가 주로 남자 스타의 작품들을 왕성하게 소비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영화나 예능프로그램, 드라마, 뮤지컬에 출연한 남자 스타들을 왕성하게 소비하고 강력한 팬덤을 보이는 젊은 여성들은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화제와 관심을 촉발하는 ‘홍보전령사’ 역할까지 해 남자 스타의 흥행 파워를 상승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투자자나 제작자, 방송사들이 여자 스타의 작품이나 프로그램은 외면하는 대신 경쟁적으로 남자 스타 위주의 작품을 쏟아내는 것도 대중문화의 남자 스타 흥행 독식을 부채질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남자 스타들의 흥행 주도력이 높아지면서 남자 주연을 내세운 작품들은 장르, 내용, 소재면에서 새로운 것들이 많이 나오고 진화를 거듭해 시청자나 관객들이 선택의 폭이 많다. 이에 비해 여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은 매우 적어 대중의 선택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을 뿐더러 작품의 스펙트럼도 좁아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 2016-06-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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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5 이성]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이성의 유혹에 빠져라!
-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 2016-06-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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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다문화사회, 음악으로 나눔과 소통을
- 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 2016-06-12 2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