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타이틀을 넣어 만든 명함이 많다. 이런 분들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남들에게 작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로 대부분 뾰족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행복 전도사’, ‘행복 바이러스’, ‘행복 코치’, ‘행복 아카데미’, ‘당신의 행복을 지켜드립니다’ 대략 이런 종류다. 방문 요양보호원을 운영하는 분인데 이분의 상호는 ‘00 행복 나눔 요양원’이다. 필자가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통 크게 행복 몽땅 드림 이라고 하지 쩨쩨하게 행복 나눔이라고 합니까?’ 하며 웃은 적이 있다.
누구든지 행복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명함에 행복을 드린다는 분들은 행복이 남아도는 진짜로 행복한 분일까? 자신 있게 ‘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생을 행복이란 단어에 매달리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왜 행복해지지 못할까?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라고 한다. 즉 주관적이다. 아무리 비단옷에 고기반찬을 먹고 남들이 우러러 보면서 저분은 참 행복할 것이다. 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가 ‘너희들은 모른다, 지금 내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하면서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많이 가지면 행복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로 생각한다. 남들보다 돈이 많고 잘생겼으면 행복할 것이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자식들도 다 잘되어 걱정근심이 없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돈이 많아도 더 벌고 싶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더 잘하는 아이와 비교를 하면서 만족을 못한다. 몇 백억의 돈이 있으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 검은 돈을 받아먹다 들켜 쇠고랑차고 재벌들도 형제간 더 가지려고 소송싸움 하는 걸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아침인사로 ‘잘 잤어?’하고 먼저 물어본다. 쉽고 간단한 질문이다.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다. ‘응 잘 잤어.’ 설령 몸이 찌뿌듯해도 ‘아니 잠 잘 못 잤어.’ 하지 않는다. 인사치례이고 잘 잤다고 말하는 것이 서로가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안녕하세요?’하면 ‘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아니요. 안녕하지 못해요.’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긍정적인 답을 돌려받는다.
‘자발적 가난’ 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성철스님 같은 분들의 삶이다.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의 길로 들어서며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본인은 행복한 삶을 마쳤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것이고 우리아이들도 이만하면 부모한테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아내와도 가끔씩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건강하고 직업도 있고 게다가 딸, 아들이 모두 결혼해서 손자, 손녀도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서로 물으면 서로 행복하다고 대답을 해준다. 일용할 양식은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으면 만족해야 한다. 매사에 이만하면 풍족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고 자주 말하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을 믿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니 행복하다. 나이 들면서 노욕을 버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식사 한 끼에 오천 원짜리도 있지만 오십만 원짜리도 있다. 내 마음을 낮추니 오천 원짜리 밥도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하다. 소박한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몫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고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고나면 하루의 시작이 상쾌해 진다.
밖으로 나와 작은 공원에서 아침 운동을 시작하면 나의 소소한 행복도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맑은 하늘, 시원한 아침공기, 주변의 장미꽃 단지, 푸른 녹음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맞아준다. 순간 나는 천국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소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나에게 내린 큰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에 종류가 있을 수 없겠지만 나는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 결혼해서 아내를 맞는 것은 큰 행복을 맞는 것이고, 아이들을 맞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고,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시키는 즐거움 또한 어마어마한 행복이니 어찌 행복의 종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어제 둘째 아들이 태어나 결혼해서 처음으로 임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행복함을 느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약 3억에 가까운 보증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계약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대뜸 저질으라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과감하게 잡아야 하니 포기하지 말고 추진하라고 했다. 비록 많이 가진 것은 없지만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고 싶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들을 돕지 않는다면 누구를 돕겠는가?
아내가 아침에 따뜻한 밥을 지어 식탁을 즐겁게 해준다. 이 또한 즐겁고 행복하지 않는가?
중국 전국시대 철인 맹자는 진심 편에서 군자삼락이라 했지만 나는 이런 소소한 행복의 즐거움을 보태 군자사락이라 말하고 싶다.
군자유삼락은 아래와 같다.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양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
나에게는 신이 내린 직업이 있다. 그래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일거리가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출근하여 내가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일찍 퇴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 내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니 전문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직업 같다. 오랫동안 해외 계약업무를 하다 보니 국제계약분야에서 상당한 노우하우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계약, 협상, 클레임처리 분야 등에서 기업가들을 위해 힘이 되어 주고 난관에 처해 있을 때 해결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런 도움이 필요한 많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생활이니 나 또한 즐거운 것 같다. 이웃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를 통한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가끔 실감한다.
비록 변호사처럼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봉사하는 계약관리사의 일이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소소한 행복인 것 같다.
행복은 어떻게 얻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전 나의 장남 결혼식에서 혼주로서 신혼부부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 해준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WHERES’에 있다. 열심히 일(Works) 하면서 건강(Health)하고, 경제( Economy)적 문제없이 살면서 좋은 관계 (Relation)을 유지하며 항상 학습 (Study) 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행복의 세계에서 산다고 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해 늦은 여름, 갑자기 달라진 주변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서둘러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것만 같았는데 영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실컷 들어간 풍선 같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돌려 근사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 혼자가 된 것을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발걸음을 그냥 집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가방 속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짐이 한 가득이었다. 남편을 겨우 달래 미국으로 보내고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도망치듯 달려온 탓에 두 다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남편 대신 운전을 한 탓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은 어쩌다 짧게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 외출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부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 속에서 아주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 휴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밤마다 끙끙대며 해결책을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들뿐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날 듯싶었다. 남편에게 미국 여행을 권했다. 그렇게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선 멋지게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창가 쪽 아주 푹신한 곳에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자유분방한 여인처럼 우아하게 앉아 가장 비싸고 맛있게 보이는 메뉴를 주문을 했다. 홀가분함이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풍파 속에 마구 쏟아지던 폭풍우가 그 혈기를 다 풀어놓은 듯 아주 조용하고 쾌청한 마음이었다.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당당했다. 그 황홀함과 넘치는 행복이 사라질까봐 마구 주워 담고도 싶었다. 그 후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자유로움을 지켜내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필자에게도 계절은 바람처럼 거침없이 불어왔다. 가뜩이나 무서움을 잘 타는 탓에 자다가 깨어나면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옷걸이가 사람처럼 보였다. 집안 쓰레기를 버리는 등 궂은일까지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남편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혼자가 되었다는 홀가분함은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면역체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혼자만의 행복과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도 외로워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끝내는 가족이 있는 울타리 속에서 남편과 함께 고난이든 기쁨이든 함께 나눌 때, 그만한 행복이 따로 없음을 진지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라도 남편과 떨어져 있으며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몸서리치게 체험해봤다. 그리고 가족,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 A는 10여 년 전 남편 사업이 기울어져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는데 최근 재기에 성공해 친구들이 모두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A의 오랜 친구이며 유독 A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던 친구 B가 마지못해 함께 축하했지만, 표정에는 혼란함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흔쾌히 축하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다가 한 가지 단서가 감지되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상실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B에게는 A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누려왔던 심리적 우월감이 사라지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사실 B가 평소 심성이 나쁜 친구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동요했다고 해서 그 친구를 매도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심리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팍팍한 삶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 상대적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빼앗겼으니 내심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은 높고 행복 순위는 낮은 나라로 유명하다. 자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행복량이 제로일 때 오는 충동일 텐데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행복에 쪼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로 가난했던 나라가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물질만능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한 사회적 경쟁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테면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 남이 행복하면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을 물질로 측정하게 만들어 행복의 속성을 왜곡해버린 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치를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
사실 쪼들린 생활을 하면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션, 정혜영 부부 같은 이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물질을 나누며 살기 어렵다면 까짓것 돈 안 드는 무형의 행복이라도 나누는 것이 현명한 삶 아니겠는가.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다지만, 권력을 얻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행복을 나누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든 나누는 데 인색한 것은 가혹한 가난 속에서 나온 생존본능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누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나누지 말고 합하면 어떨까.
‘우분투’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어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인데 보통은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 모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성 선교사 한 분이 선교지 부족 어린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큰 과일 바구니를 1등 상으로 내걸었더니 모든 아이가 손잡고 들어왔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분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마도 부탄이 행복한 나라 1위인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우분투’를 실천하는 까닭일 터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그러나 합할 때 더 커진다.
이번 주는 별 약속이 없어 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약속이 많을 때는 일 주일 내내 외출할 때도 있어 그럴 때는 몸이 피곤하니 불만이었는데 이렇게 너무나 여유시간이 많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편하기도 하다.
소파에 앉았다가 팔걸이를 베개 삼아 길게 눕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보고 싶은 드라마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한가로워도 되는 걸까? 하는 조바심이 난다.
필자 자신이 너무 나태한 것 같아 걱정되기까지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나 여행갈 일이 있어 이른 시간 집을 나서본 적이 있다.
새벽 버스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 놀랐다.
다른 때 같으면 필자는 아직 꿈속에 빠져있을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부지런한 많은 사람이 일터로 나가는 모습은 필자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너무 한가하게 있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명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빠삐용’은 불어로 나비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픽션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살아남은 저자가 쓴 책을 기초로 만들어졌으며 행복이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던 정말로 재미있는 영화였다.
가슴에 나비문신을 한 주인공이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
‘앙리’(스티브 맥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다.
악명 높은 감옥에서 가혹한 강제노역을 하다가 누명을 벗기 위해 탈옥을 감행한다.
그러나 탈옥에 실패하여 더 무서운 죠셉 섬의 독방에 2년간 갇히게 된다.
너무나 무서운 지옥의 감옥 독방에서 그는 지네와 바퀴벌레로 연명하며 겨우 살아남아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채권 위조범으로 잡혀 온 ‘더스틴 호프만‘ 이 있다.
그는 엄청난 재력가이지만 아내가 그를 배반하고 변호사와 공모해 영원히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무서운 감옥에서 주인공 ‘스티브 맥퀸’은 ‘더스틴 호프만’을 도와주며 우정을 쌓는다.
그 후에도 계속 탈옥을 시도한 대가로 5년간 독방에 갇히는 등 고난을 겪는데 결국에는 상어와 험한 파도로 둘러싸여 절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악마도’에 이송된다.
이곳은 죄수들이 그 섬 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드가’(더스틴 호프만)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염소도 기르고 밭을 가꾸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러나 ‘앙리’(스티브 맥퀸)는 여전히 자유를 꿈꾸며 탈출 방법을 찾고 있다.
당국에서도 탈출이 불가능한 이 외딴 섬에 대해서는 감시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 섬을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미 머리는 백발이 되고 이도 다 빠져버렸지만 ‘앙리’는 절벽에 서서 야자 열매 포대를 떨어뜨리며 해류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해류가 되는 때를 알아낸 그는 ‘드가’에게 같이 탈출하자고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은 그는 그냥 여생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탈출을 포기한다.
굳은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앙리’는 해류가 나가는 때를 맞춰 야자 열매 포대와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드디어 그렇게 열망하던 탈옥에 성공하여 자유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대충 내용은 이렇지만 그림같이 아름다운 배경과 인간들의 음모와 배신이 얽힌 너무나도 멋진 대작이다.
주인공의 꿈속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명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주인공이 서 있는 위쪽 언덕에 배심원 여러 명이 앉아 그를 심판하고 있다.
‘앙리’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그를 가리키며 “너의 죄는 살인이 아니라 인생을 낭비한 죄, 시간을 낭비한 죄다”라고 판결을 내린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필자 마음속에 아프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을 낭비한 죄, 라는 말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해진다.
오늘 이 시간 필자가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것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좀 더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좋은 일을 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해 본다.
연극무대에 선 배우 정동환(鄭東煥·69)을 만나면 단연 그 에너지에 압도될 것이다. 곧 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쏟아내는 힘과 광기에 가까운 열연은 그가 어째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인터뷰는 정동환을 최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놨던 연극 이야기로 시작됐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방대한 원작을 국내 연극 사상 가장 긴 일곱 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든 에서 그는 무려 4개의 배역을맡았다. 너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고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기존
연극은 두 시간짜리 압축판이었어요. 그런데 연출자인 나진환 교수가 이걸 일곱 시간짜리로 하자니까, 진짜 마음만 있는 건지 능력도 있는 건지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 요즘 그런 사람 많아요. 생각을 갖고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자기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만약 그러면 참 복잡해지는 거지. 말이 일곱 시간이지 공연을 일곱 시간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때도 정동환의 고민은 여전했다. 막상 잘하지 못해서 ‘굳이 할 이유가 있었나?’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고생은 몇십 배 하고 듣는 게 비난이면 무슨 가치가 있나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장 나에게 떨어진 배역들을 보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싶었어요(웃음). 시간이 쏜살같이 막 지나가는데, 한 시간 지나가면 자지러질 것 같은. 재미있는 걸 느꼈어요.”
‘재미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서, 그가 가진 연극의 혼이 훅 들어왔다.
아직도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연습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열한 시쯤 되는데 ‘아니, 내일 아침까지 열 시간도 안 남았단 말야? 뭐부터 분석하고 뭐부터 외워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정신적 압박에 하루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서 큰일 났네 했죠(웃음).”
자신의 모든 걸 던져야 하는 극한 상황. 바닥을 치고 거울을 보며 정동환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치열하게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고. 충분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두 시간짜리 연극의 세 배 분량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오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배역이 네 개로 쪼개져 있으니 머리가 한쪽으로 안 가는 거예요. 지난번 공연에서는 클로디어스를 했는데, 그건 고통을 많이 겪어도 한 인물로서만 고통스러우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한쪽에만 정을 줄 수도 없고, 시간을 줄 수조차 없어서 하나도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새삼 칠순을 앞둔 연극인이 겪은 그 지독한 모험에 대한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 속에서, 연극 시작하기 전날 밤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다 포기했지. 이젠 죽었다 하고 포기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
정동환은 을 하면서 겪은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도 없고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아무도 알 수 없었죠. 다만 ‘내가 조금 잘못하면 내 인생은 끝난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3m 탑 위에 올라가서 대사 한마디만 빠져도 전체가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럼 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네 시간을 했든 일곱 시간을 했든, 네 개의 역을 했든 일곱 개의 역을 했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느 순간이 나를 추락시킬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했어요. 그런 절대고독 속에서 ‘그 무모한 짓을 왜 했어?’라고 누가 물어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였으니까’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라는 말은 연극인으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힘에 자신을 싣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배우다.
“저는 이 작품이 굉장히 좋았어요. 처음에는 많이 우려했죠. 그러다가 우려가 오히려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고 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관객들도 제 가족들도 만족했고, 그 점에 대해선 안도합니다. 그래서 일곱 시간이 아니라 더 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정동환에게서는 연극인을 넘어서 연극 그 자체가 삶으로 체화된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건강은 쉽지 않은 숙제였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오가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에요. 한때는 운전을 못할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했어요. 몇 년 지나니 이제는 괜찮아요. 그런데 항상 걱정되죠. 나는 그 상태를 일종의 과부하 상태로 봐요. 자꾸 새롭게 뭔가를 벌이다 보니 내 능력이 한계를 보이는 거고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는 거겠다 싶었어요.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니….”
“그럼 더 이상 도전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가 긍정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데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라고 한다.
보리는 올라올 때 밟아줘야 잘 크기 마련이다. 배우 정동환은 그런 보리밟기 같은 과정을 자신의 자아 본연에 심어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가적 기질, 그 꿈틀거림을 현실과 주고받는 훈련에 철저한 배우다.
“인생을 사는 것도 연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극은 등·퇴장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연극은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로 온통 채워져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이 이러니까 이런 거지’가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건가,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것. 그게 연극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연극과 인생이 같이 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예요. 새로운 세상이니까 더욱 숙고하면서 뭔가를 해야지, 그저 세상이 백세인생 시대이니까 그에 맞춰가는 건 아니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길, 가족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즐겨 보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지금처럼 연극 공연이 많지는 않았다. 1년에 한두 편 정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5년에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햇수로 따지면 무려 52년이라는 시간이다. 그는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성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젊어서부터 종교에 심취해서, 어머니의 바람은 내가 성직자가 되는 거였죠. 나는 성직자에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신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지금 하는 일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직자와 연극인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연극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배우 정동환은 매번 작품 속에서 타인이 이해 못할 고독을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결국은 가족에 맞춰서 사는 게 아닌가,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가족을 위한 어떤 것을 갖춰나가기 위한 거죠. 누구한테 ‘난 이래서 이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히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죠.”
그에게 가족은 다시 돌아오는 길과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가족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꼽았다.
“어머니는 어렵게 사셨어요. 저희가 3남 1녀
였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 교육을 다 시키셨죠….”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침묵했다. 마치 절대고독 속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는 기다려야 했다.
딸의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행복
화제를 돌려 그의 둘째 딸 정하늬도 그와 같은 연극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쉽지 않은 연극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그는 ‘좋다’고 말했다.
“딸이 어떤 연기자가 되길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나는 치열한 쪽을 택했지만 딸은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 세상하고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싶어요.”
딸의 삶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그저 방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난 이거밖에 안 돼’ 하며 포기하는 순간만 없으면 언제든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고통스럽고 고뇌가 있는 길을 가야 그 뒤에 보이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피해 간다면 그 뒤에 오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딸도 알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연극인 선배로서의 질책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틀림없이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만족은 자기마술이거든요.”
행복은 질이 아니라 양일 수도 있다. 순간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모아지면 그게 더 큰 의미와 행복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정동환은 요즘 세상 사람들이 그 생각을 잃었다는 게 엄청난 안타까움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행복이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잘못된 것인데 갈수록 심해지고 있죠.”
지금을 위해 견뎌온 삶
삶의 우여곡절을 지나, 정동환은 지금이 가장 평온한 시기로 보인다. 그에게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묻자 ‘지금 같은 때를 위해 견뎌온 것 같다’고 답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어려운 길을 일부러 자초하고 가는 게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그가 맞이할 미래를 물어봤다.
“별다른 것은 없어요. 연극하자는 제안이 아주 많아요. 그중에서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인가 분명히 알고 그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해졌죠. 결과보다는 작업을 하려는 목표 자체에 대한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 필요가 있지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자신 있게 나가지 못하고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뭘 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느낌? 서커스를 하는 듯한 정신적인 위축이 들 때도 있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마는 거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견디는 실체의 기쁨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그래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라고 얘기되는 사람이 되면 고맙고 좋은 거지. 어렵더라도 조금 더 견뎌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로 정동환다운 대답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정동환이다. 한 번 경험하면 누구도 잊기 힘들 ‘그런 사람’.
우리는 행복해지려 산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행복해진다.
행복했던 기억, 경험, 방법을 모르면 행복도 배워야 한다.
행복은 순간의 만족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닐지.
봄이 되어 경쟁적으로 이곳저곳에서 피는 꽃을 본다.
허리를 굽혀 가까이 들여다봐야 눈에 들어오는 야생화에서부터
뒤로 자빠질 듯 몸을 젖혀야 보이는 꽃나무까지 만상이 합창하는 봄이다.
함부로 찾아온 봄
필자는 단지 내에서 자주 산책을 한다. 야간에도 조명을 잘해놓아 꽃들은 낮과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매일매일 피어난다. 자목련, 백목련, 벚꽃, 개나리, 산수유 등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이름을 모르는 꽃들도 있다. 이름표 팻말을 만들어달라고 관리실에 부탁해야겠다.
요즘 새롭게 재미를 붙인 놀이는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꽃 감상이다. 드론이 유행처럼 인기를 끌면서 위에서 시원하게 보여주는 풍경들이 많아졌고 TV 화면도 그만큼 화려해졌다.
산책길에서 우러러보듯 감상하는 꽃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꽃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이제까지의 꽃구경은 새소리와 어우러져 듀엣으로 눈을 현혹시키는 꽃을 목 젖히고 올려보며 하는 감상이 전부였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꽃은 마치 묵언의 고요함 같은 시간 속에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던 숨겨진 속살을 수줍게 펼쳐내 보이는 꽃나무의 사랑 언어를 듣는 듯하다. 유리알처럼 맑은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꽃구경인 것이다.
꽃나무들도 올려다 보이는 부위는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기에 인간으로 치면 파마도 하고 드라이도 하고 젤도 발라 멋을 부렸겠다. 하지만 정수리를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기에 준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소란 없는 민낯 그대로 부스스한 얼굴 그대로를 들키는 셈인데 드론 앞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위에서 찍은 정글 사진을 보면 마치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폭신하고 두툼한 솜이불 같다.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릉도원을 찾는다면 단연 꽃나무 위의 포근함이 아닐는지.
물론 꽃나무 정수리를 보기 위해 드론이 필요한 건 아니고, 반드시 봐야 하는 것 역시 아니지만 위에서 바라본 낯설고 특별한 아름다운 풍경들이 더 많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삶의 아픔은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들을 잘 참아 낼 때 드디어 환한 한줄기의 행복이 살며시 찾아온다.
어느 날엔가 초췌해진 친구가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기막힘을 털어놓는다. 어제 바로 교도소에서 나왔다고 했다. 필자는 눈을 크게 뜨고 어이가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교도소를 운운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언젠가 친구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기 시작했을 때, 어째야 하느냐고 눈물로 하소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그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참고 기다리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 잘 돼가는 줄만 알았다.
결국 친구는 남편의 내연녀를 만나며 일은 벌어졌다고 했다. 손아래 시누이를 대동하고 혈압이 올라 참지 못하고 내연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싸움이 벌어졌다. 나이 어리고 철이 없던 시누이는 그녀와 함께 폭력을 휘둘렀고, 그녀가 끼고 있던 다이어 반지까지도 강제로 빼앗았다고 했다. 자기 오빠가 해준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단다.
끝내 남편의 내연녀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그 자리에서 폭력 및 물건 갈취 이유로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길로 한 달 남짓 교도소 생활을 했고, 돈으로 겨우겨우 빠져나와 이제야 나왔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재판에까지 휘말린 친구는 더욱 난감하게 되어 시집에서도 코너로 몰리게 되었다.
시누이가 앞장을 섰건만 끝내는 남편은 물론이고 시부모들까지 알게 되어 졸지에 가해자로 몰리며 죄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시부모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반성하도록 시켰단다. 여자가 참지 못하고 집안 망신을 시켰다며 온종일을 괴롭혔다고 했다. 시부모는 친구가 타고 다니던 차도 팔아 치었다. 차가있어 쓸데없는 짖을 하고 다녔다는 이유였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친구는 이혼을 강행했다. 필자도 더 이상은 어떻게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며칠간 필자의 집에서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후, 필자가 한국에 돌아와 25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다행히도 다른 남편을 만나서 서로 의지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전 남편은 결국 지난해 어이없이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을 했다. 그것도 자신의 넓은 땅에서 자기가 직접 운전하던 포클레인 차가 뒤집어져 그 밑에 깔려서 운명을 다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사하고 부모님도 모르게 그 즉시 사망을 했다고 했다.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필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남에서 손가락 안에 들던 어마어마한 땅 부자였는데 결국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것도 전 부인인 친구의 딸 이 둘, 새 여자와 살면서 입양한 자식인 딸도 하나, 그리고 새로운 부인에게서 뒤늦게 낳은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순식간에 떠났다고 했다.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자식들과 새엄마 그리고 친구까지 합세해 재산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필자는 친구의 덤덤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 왔다.
도대체 현실이 아닌 소설 속에 이야기처럼 황당한 이야기들 모두가 마치 꿈속에서 웅성거리며 들려오는 것 만 같았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무지 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눈감은 채 그렇게 마구 살아가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다. 갑작스레 지난날 친구가 화려하게 결혼하던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 성남의 부잣집 장남에게 시집을 간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몰랐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불과 60년도 못 살고 갈 것을, 사람은 돈과 욕정과 독선 속에서 한 가정이 갈기갈기 찢어져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물론 남은 가족들은 돈이 있으니 다 살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큰 불행이 가져다줄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술술 토해냈으나, 지난날 친구 남편의 부유에 넘친 웃음 띤 얼굴을 떠올려 보며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그렇게 매몰차게 친구를 내쫓고 새 여자 만나 한평생 잘 살 것 같더니만 결국은 그렇게 먼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순서 없이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숱한 페이지를 진하게 장식한 친구의 삶이 못내 씁쓸하게 다가왔다. 필자도 가끔은 뒤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이 다가오는 내일에 후회가 없으려면 더욱 열심히 순간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다가오는 인생의 뒤안길이 부끄러워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무거워진 몸으로 집을 나섰다. 퇴계원으로 이사온지 어느새 1년이 후딱 지나버렸다. 시골같은 마을이라 선택했고 어딘가 모르는 훈훈한 고향같아 터를 잡았다.
바로 집동네에 이렇게 좋은곳이 있었다. 자유롭게 달려있는 앙상한 가지들과 결코 쓸쓸하지 않다고 웃음짓는 계절의 적막함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따스하게 녹아드는 겨울의 햇살은 온몸속으로 흠뻑 흘러들어왔다. 나즈막한 야산으로 등산길을 따라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거의 1년 만의 일이다. 뭐가 그리 또 바빴는지 아웅다웅 또 정신없이 달려왔다.
제멋대로 널려져있는 자연그대로의 길을 따라 명상을 즐기며 콧노래 장단 맞춰 산길로 향했다. 앙상해진 산등성이로 듬성듬성 누군가의 선조들 묘지가 보인다. 선친들을 모시려는 자손들의 정성이 마음에 와 닿는다. 유난히 깔끔하게 단장된 한곳이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모았다. 아주 최근에 모신 곳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남편도 따라서 두손을 모으고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는 우리 부부도 가야할 곳이다. 어디론가 남은 자손 들의 손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향할것이다.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갑자기 텅비고 가라앉은 마음에 인생을 느끼며 또 길을 향한다. 계절의 섭리에 숙연해진 자연은 그저 있는 그대로 아름답기만하다. 무거운 짐 다 벗어던져 앙상한 자태로 가난하기 그지없는 나무가지도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자연의 고요한 삶에도 휴식기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다시 길을 떠나 정상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땅에서 올라오는 흙 향기를 맡으며 마치 인생 길만 같은 고갯길로 향했다. 그래, 여기 또 산이 있는것을, 저멀리 유명한 곳이 진정 산 인줄만 알았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가는곳이 좋은 줄만 알았다. 그러나 오르고 내리고 아주 벅차지 않는 이곳이 우리부부에게는 딱맞는 아주 알맞은 휴식처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몸마름을 채워줄 약수터도 있었다. 그곳에는 허기진 빈통들이 사람들처럼 양식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줄지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살아남기 위해 버티었던 지나간 시간들이 머리속을 휘감는다. 사람들은 늘 안정을 바라지만 또 혼란의 연속이었다. 저 아래 세상에서는 왜그리 복잡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헛웃음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애매한 등산화 위로 애꿎은 화풀이를 해대며 어느새 정상으로 올랐다. 작은 두눈에 커다란 세상이 성큼 들어왔다. 두팔벌려 심호흡으로 가득해진 삶의 찌꺼기를 실컷 내뱉았다. 속이다 시원해진다. 어느새 신선한 공기가 가슴속깊이 채워와 머리 속까지 상큼해진다.
행복이 또 찾아 들어온다. 아주 가까운 곳, 바로 이곳에서도 느낄수 있는 소소한 행복은 여기저기 가득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우리 삶에도 쉬어갈수있는 휴식처가 바로 곁에 널려져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을 향해 어제도 아닌 오늘에 충실함은 대 만족이다. 다시 일상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곳곳에 삶의 향기가 한아름 만발했다.
그래, 사람이 느낄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감사함으로 그 자체가 휴식이리라.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이승연은 꽃 선물도 싫어하고 이벤트도 싫어해서 남편과 그 흔한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했다. 결혼한 지 9년째인데 매일매일 연애하는 것같이 짜릿하고 즐겁단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억만금을 줘도 과거로 돌아가기 싫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이승연은 행복하다. 나이 50에 해탈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그녀와의 털털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이승연이 벌써 50세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보통 스타들이 나이를 먹어서 미모가 예전 같지 않을 때 자기합리화나 자기최면을 걸듯이 “지금이 좋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많이 봐왔지만 오늘 만난 이승연의 표정은 정말임을 딱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술 더 떠 60이 기다려지고 늙어진 자신을 보는 날을 꿈꾼다니 의외였다. 잘 나이 들고 싶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본인의 얼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용감한 발언을 한다. 남들이 들으면 돌팔매를 맞고도 남을 망언이라고 오해받기 쉽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스코리아 출신의 미녀 스타인데 그런 망언을 하다니? “피겨 스타 김연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얼굴”이라는 이승연의 평가를 듣고 난 후에 비로소 이해가 갔다. 분명 김연아와 이승연은 다른 스타일의 미모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한 서구적인 얼굴의 이승연은 자신과 반대의 이미지인 한국적 눈매를 지닌 김연아의 얼굴이 부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나와 다른 스타일의 미모에 대한 부러움일까? 여느 보통 여자들이 하는 그런 시샘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승연의 성격에는 아마 김연아 같은 얼굴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털털하고 쿨한 여자
실제 김연아는 성격을 묻는 질문에 “단순무식하고 쿨하다. 혈액형이 O형인데 전형적인 O형 성격에 딱 맞는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승연도 O형이고 털털하기로는 김연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니큐어도 안 칠하고 평소에는 귀찮아서 화장도 안 하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털털하다. 남편이 선물을 사서 줄 때도 예쁜 포장지에 싸서 주는 것보다 흰 종이나 광목천으로 둘둘 말아서 주는 걸 더 좋아한다. 꽃 선물도 싫어하고 이벤트도 싫어해서 남편과 그 흔한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했다. 한량 이봉규의 난데없는 해석이지만 그녀가 김연아의 얼굴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성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승연의 가족사랑은 유별나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은 아이를 낳은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남편과 결혼한 것이란다. 그녀는 한 방송(TV조선 )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길러준 엄마가 사시사철 학교를 데려다줬다. 혼자 학교를 못 갔다”라며 “내가 세 살 때 언니가 선천성 탈구라는 질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부모님이 날씨가 안 좋으면 날 학교에 안 보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혼자 있어서 그런지 친구들이 놀러 오면 가지 말라고 선물을 많이 줬다. 그런데 친구들은 장난감만 받고 금방 가버렸다. 너무 외로웠다. 그 상태로 쭉 자라오다가 애늙은이처럼 컸다”라며 “그 보상심리가 있는 거 같다. 내 딸은 나처럼 자라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나한테 부족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 채워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만큼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이승연은 자녀교육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한다. “사랑만 해주면 애는 저절로 알아서 크는 것”이라는 그녀의 철학이 멋지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이 저절로 큰다는 생각을 안 하고 억지로 아이들을 훈련시키면서 키워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녀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경험 때문일까? 나이 50에 해탈한 느낌이란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술자리 때문에 늦어도 잔소리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룸살롱에 간다면 제일 예쁜 아가씨를 옆에 앉히라고 주문한다니 놀랍다. 남편에 대한 미안함도 있어서 더욱 쿨하게 이해해준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뉴스에도 불구하고 이승연을 믿어준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존 킴이라는 이름보다 ‘이승연의 남편’으로 불리며 사는 남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연애시절 자동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6~7시간 대화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을 정도로 코드가 잘 맞는다. 사귄 지 두 달이 넘어서야 첫 키스를 했을 정도로 그녀의 감정을 아껴준 남편에게 감사해한다. “B형 남자는 O형 여자에게 절대 못 이긴다”고 자랑하는 그녀의 속뜻은 아마 남편이 자기를 더 사랑한다는 진단일 것 같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이승연과의 결혼일 것이다. 이승연은 두 번째로 잘한 일이지만. “행복을 찾아준 남편은 항상 고마운 존재”라며 “결혼할 때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뿌듯해한다. 그러면서 “입에 찬 소리 해서 행복이 날아갈까 겁이 난다”고 엄살까지 부린다. 그녀의 부모님이 이혼해서 그런지 어떤 시련이 올지라도 남편과 절대 이혼은 안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족의 사랑이 절대적 힘
두 살 연하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편은 보기만 해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남편 존 킴(한국명 김문철)은 의류 수입 업체를 운영하는 미국 시민권자다. 두 사람은 2005년에 다른 사람 결혼식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는데, 이승연이 남편에 대해서도 잘 아는 지인에게 툭 던진 말이 두 사람의 인연을 맺게 해줬다. “저 사람, 여자 친구 많겠다. 혼자 놔두면 못 믿을 것 같은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근데 저런 사람이 진국일 거야.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는 사람일 거야!”라고 평가한 것을 나중에 남편에게 얘기했다는 것. 얼마 후 다른 자리에서 만난 남편은 이승연에게 “어떻게 나를 그렇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냐?”면서 감탄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사귀게 됐다.
결혼한 지 9년째인 두 사람은 매일매일 연애하는 것같이 짜릿하고 즐겁단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억만금을 줘도 과거로 돌아가기 싫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이승연은 결혼 잘했다.
수줍어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기 싫어하고 방콕을 즐기는 이승연에게 남편과의 행복은 절대적 가치일 것이다. “그렇게 수줍음이 많은데 어떻게 수영복 심사를 하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갔냐?”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친구 따라 미용실에 갔는데 원장이 대회에 나가면 미스코리아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적극 권유했다. 그때 마침 승무원 생활을 3년쯤 하던 권태기여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출전했다”고 술회한다.
인생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때부터 톱스타 이승연의 삶이 시작됐고 50세가 되기까지 숱한 화제도 예기치 않게 일어났다. 각종 뉴스에 오르내리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견뎌냈다.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긍정의 DNA를 물려준 부모님께 감사해한다. “말 한마디의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몇 년 전에 비로소 깨달았다”면서 “이제 빚을 갚고 싶다. 긍정의 말 한마디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전하면서 보답하고 싶다”고 말한다.
가족에게든 각종 인연을 맺었던 주변 사람들에게든 누구에게라도 보답하겠다는 의지에 날이 서 있다. 분에 넘치는 팬들의 사랑도 받았고 그 관심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그만큼 패대기 처지면서 수렁으로 밀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나이 50이 돼서야 해탈한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해졌다. 남편의 사랑이 절대적인 힘이 돼주었고 가족들과 주변의 격려 덕분이지만 “타고난 긍정적인 성격으로 잘 이겨낸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나 자신을 믿어준 스스로에게도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이 달아오른다.
자기 삶의 가치가 중요해
보답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방송도 중요한 방법일 수 있겠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사람이기에 처럼 프로그램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로 영향을 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승연은 타고난 방송인 자질이 있기에 안성맞춤. 또한 패셔니스타의 자질을 잘 활용해서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승연은 패셔니스타의 원조다. 드라마마다 걸치고 나오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크게 유행시키기는 완판녀의 원조 격이다. 뛰어난 패션 감각 덕에 본인이 직접 스타일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재능을 살려 재능기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어떻든 이승연의 삶이 남달랐던 만큼 앞으로는 더 의미 있는 인생이 펼쳐질 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간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내 방식의 가치대로 사는 게 중요하지 남의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연에 대한 남들의 평가도 이제부터일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본인의 삶도 행복하리라 믿는다. 주당 이봉규이기에 술 한 잔도 못하는 이승연과의 인터뷰는 약간 아쉬웠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 이상의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 이승연과의 데이트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