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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백발이 아름답다
- 아들 결혼식날. 사람들의 덕담이 결혼식장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 - 신부 예쁘다. 신랑 잘 생겼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아들 결혼식장에서만이 아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고, 신랑 아버지라는 이유로 건배사를 하게 되었다. 많은 손님들 앞에 잔을 들고 나서니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멈추고 잔을 든 채 모든 눈들이 내 입을 주시한다. 그런데 내 귀에 맴도는 말은 신랑 신부 아름답다는 인사말들이고, 정말 내 곁에는 아름답게 성장(盛裝)한 신랑 신부가 서 있다. 내 입이 열렸다. “오늘 여러분의 축하를 받으며, 여기 이렇게 멋진 신랑과 신부가 새 세상으로 첫발을 디딥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도 아름답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저희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되어 즉 우리의 손자를 출가시킬 때까지, 앞으로 한 세대를 잘 살아내야 우리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터진 이 말 때문에, 물론 아내에게 몇 마디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뭐! 틀린 말도 아니구먼, 우리 부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믿는 편이다. 좋아한다는 것과 부러워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내가 청년을 좋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곧 지금의 내 삶을 후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살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 해도, 난 지금보다 더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남은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나의 늙음을 부러워하도록 살려고 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근사하게 늙은 분들이 분야마다 여기저기 눈에 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청년들이 비틀거린다 하더라도 그래도 앞날이 밝은 것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멋진 백발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늙은이 없이 멋진 젊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요즘 단풍이 한창이다. 여기 몽골도 그렇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수종은 덜 다양하지만, 그래서 더 정갈한 맛도 있다. 바람이 불면, 산 전체가 환하다. 잎의 앞뒤로 구별되는 한껏 채도가 높은 노랑 일색이다. 바람이 세지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다 이내 우수수 떨어질 때면, 보는 눈이 황홀하고 마음까지 몽롱해진다. 겨울을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피는 봄의 꽃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면, 단풍은 의젓하고, 숭고하다. 추위에 억눌려 참았던 분을 한껏 터트리는 힘의 방향이 봄의 기운이라면, 단풍은 여름 내 넉넉히 받은 자연에 감사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모양이다. 나무마다 겨우 내 생명을 부지하느라 목마르고 배고파 땅이 녹자마자 뿌리로부터 공급받은 양분을 가지를 통해 서로 다투듯 빨아들였다. 그러고도 잎이 통통해지도록 양분을 저장까지 해 두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영양 공급이 예전 같지 않다. 벌도 나비도 뜸해졌다. 욕심도 심심해져, 하나 둘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 곁의 나같은 다른 잎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하루 이틀 한 주일 열흘을 지켜보니 그들이 아름답다. 내게 쌓아 두었던 양분을 주고 싶을 만큼 그들이 예쁘다. 그들에게 양보하고 절제한 만큼 몸도 맘도 가벼워졌다. 그렇게 자꾸 얇아졌을 어느 때. 만산홍엽(滿山紅葉)! 모두 아름답다. 나도 다른 잎처럼 아름다운지 몰랐다. 온 세상이 아름답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란 성경 잠언이다. 젊은 날의 푸르름을 다하고 곱게 물든 단풍은 아름답다. 푸르름을 다한 단풍이 아름답듯 나의 백발도 그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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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용문산 용문사, 만추 여정 느끼기 제격
-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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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명의신탁과 상속
- B씨는 이혼한 전남편 사이에 아들 C씨를 두고 있었다. A씨를 만나 교제하다가 청혼을 받아들여 혼인하였다. A씨는 B씨와의 혼인 중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일부와 새로 매입한 부동산을 B씨 명의로 명의신탁을 했다. 그럴 정도로 겉으론 사이가 좋아 보였으나 사실 이들의 혼인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A씨는 B씨에 대한 불만이 많아 자주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다툼 끝에 B씨를 살해하였다. B씨 명의의 재산은 모두 B씨의 아들 C씨에게 상속됐다. A씨는 B씨에게 명의신탁한 재산을 찾으려고 C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A씨의 청구는 인용될까. A씨는 B씨의 배우자이지만 B씨를 살해한 사람이어서 민법 1004조 1호에 따라 상속인이 될 수 없다. 위 사례의 쟁점은 혼인 중에 이루어진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약정이 일방의 배우자가 사망하여 부부관계가 해소된 경우에도 유효한지 여부다. 즉 일반적으로 명의신탁을 받은 사람이 사망하면 그 명의신탁관계는 재산상속인과의 사이에 그대로 존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에서도 동일하게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이하 ‘부동산실명법’이라 한다.)에 의하면 부동산 명의신탁 약정은 기본적으로 무효이나 위 법률 제8조에서 예외 사유를 두고 있고, 위 법률 제8조 제2호는 ‘배우자 명의로 부동산에 관한 물권을 등기한 경우’로서 조세포탈, 강제집행의 면탈 또는 법령상 제한의 회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약정 및 그 약정에 기하여 행해진 물권변동을 유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은 ①문언(文言)상 명의신탁약정에 따른 명의신탁 등기의 성립 시점에 부부관계가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 부부관계의 존속을 그 효력요건으로 삼지 아니하고, ②일단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 부부간 명의신탁에 대하여 그 후 배우자 일방의 사망으로 부부관계가 해소되었음을 이유로 이를 다시 무효화하는 별도의 규정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점, ③유효한 부부간 명의신탁의 경우 부부관계가 해소된 이후에 이를 그대로 유효한다고 인정하더라도 부동산실명법의 입법취지가 훼손될 위험성이 크지 아니한 점을 근거로 부부간의 명의신탁이 일단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면 그 후 배우자 일방의 사망으로 부부관계가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명의신탁 약정은 사망한 배우자의 다른 상속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13. 1. 24. 선고 2011다99489 판결)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B씨의 사망으로 인하여 C씨가 B씨 명의의 부동산을 모두 상속한 경우 C씨는 A씨와의 관계에서는 B씨의 지위를 이어받아 명의수탁자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A씨는 B씨의 상속인인 C씨에게 B씨와의 명의신탁 약정을 근거로 A씨 자신의 부동산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단 이번 사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 약정이 유효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부부간 명의신탁이 무효라고 한다면 다른 법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 2015-11-1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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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의 그 순간] 한국사 최대의 위기는? - 신라의 대당전쟁
- 이번 호부터 우리의 역사로 돌아가자. 한국사에서 ‘최대의 위기’를 꼽는다면 어떤 사건일까? 한 국가의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란 일반적으로 국가멸망을 말하겠지만 보다 높은 차원인 민족말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고대로부터 고구려의 수-당 전쟁, 몽고의 고려침공과 지배, 임진왜란, 한일 강제합방, 6·25전쟁 등등...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을 꼽는다. 195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70대 중반 이상은 이 시대의 이야기로 국어교과서에서 유치진(柳致眞) 극본 ‘원술랑’을 읽었을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국가가 멸망하거나 외세에 종속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민족 자체는 말살되지 않았다. 국가를 멸망케 한 일본의 강제합방이 100~200년 지속되었다면 민족말살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23년 간(1795~1918) 국가가 없었던 폴란드도 “국가는 사라졌지만 민족은 영원하다”고 말했다. 일단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면 완전 동화나 민족말살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산재했던 국가들을 ‘지리적’ 인접성을 기준으로 중국 정사(正史)에서 ‘조선’이라는 항목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 간에는 언어, 풍습에서 유사성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 남조 양(梁, 502~557)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신라인과 중국인 간의 대화에 대해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고 하니 백제와 신라 간에는 말이 통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 민족이라는 관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이후 같은 민족,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라의 대당항쟁 시기는 일반적으로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76년까지 8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당의 병탄 야욕과 신라의 저항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시작되니 16년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며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당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으로 강력하게 맞서며, 때로는 외교술로 굽히면서 갈등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여 오늘날 남북한 휴전선과 유사한 선에서 ‘한민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당(盛唐)시기 중국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나 군사전략 면에서 성숙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히 신라의 대당항쟁은 손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곧 바로 백제인들과 신라를 반목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으로 신라를 견제했다. 백제 멸망 2개월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곧 이어 당에 포로로 끌려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귀국시켜 웅진도독으로 임명, 신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맹약을 맺게 하는 등 갈등을 부추긴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넘겨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삼국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드디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당이 서쪽에서 토번(吐蕃)과의 전쟁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670년 3월 압록강을 넘어 당군에 선제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당군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 부대가 당에 소속된 말갈군을 공격한 것이다. 말갈은 과거 고구려에 부속된 민족이니 고구려의 응징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군이 직접 나서자 곧 물러나서 ‘지켰다.’ 당군과의 직접 대결은 회피한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군사적 갈등을 이용할 때는 낮은 단계부터 갈등을 고조시킨다(escalate). 갈등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볼 때 중간단계가 많을수록 대화와 타협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당을 상대로 한 교전도 대규모 전투보다는 분쟁을 ‘국지화’시켜 실리를 취하면서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동시에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으며 백제라는 ‘악당’이 당과 신라를 이간질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당에 전달한다. 반면 고구려 왕족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고구려 유민을 포섭한다. 주적을 단일화시키면서 부차적인 적[副敵]과 연합하는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략인 것이다. 이같이 다양한 신라의 전략에 대해 당은 분노한다. 그러나 고구려 옛 영역인 요동이나 돌궐과의 서북 변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 문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신을 통해 신라의 ‘배반’을 책망하고 문무왕을 ‘파면’한 뒤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봉한다. 조공관계에서 왕의 파면은 최고의 징벌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672년 중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혹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신라군을 격파하여 신라 전체를 공황상태에 빠트린다. 이후 전투에서 양측은 일진일퇴하며 항쟁 후반기에는 신라가 소규모 전투에서 ‘18차례’ 승리하지만 약자의 승리는 인적·물적 자원을 고갈시킬 뿐이었다. 당 역시 서북 지역과 만주에서 군사령부 격인 ‘안동도호부’를 매년 이동할 정도로 정세가 불안하자 신라의 ‘사죄사절’을 맞아 문무왕을 ‘용서’하는 선에서 분쟁을 매듭짓는다. 신라는 최대 목표는 아닐지라도 ‘고구려 남쪽 국경’인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당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당으로서도 이 선에서 신라의 북진이 저지된다면, 당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어느 일방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60년이 지나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 35년(736)에 이르러 당이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준다. 신라의 북진은 또 다른 변수인 발해의 등장에 기인한 것이다. 신라의 대당항쟁은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의 정체성을 구체화되려는 여정의 출발점에서 부딪친 시련이었던 것이다. >> 구대열 (具?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11-1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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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여행]와인과 야누스...단순한 알코올인가 문화적 산물인가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다. 선한 면과 악한 면, 즉 양면성을 지닌 신이다. 그런 면에서 와인도 어딘가 야누스를 닮았다. 와인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역할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한 접근과 분석이 진행되었다. 반면에 와인과 건강에 대한 본격적이고 과학적인 논의는 최근의 일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이후 와인은 소량을 규칙적으로 마시면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정설이었다. 이는 의학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생활을 통해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공유된 진실이었다. 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이 저서에서 “만약 밀이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산문이라면, 포도나무, 특히 와인은 시이며 우리 국토의 경치를 밝히고 고귀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와인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을 그야말로 시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고 보인다. 얼마 전 스페인 의회가 와인을 다른 알코올과 분명한 차별이 있는 ‘문화적 산물’로 제정한 것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인다. 그러나 의사들의 주장은 경치를 밝히고, 고귀하게 하는 양지쪽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쪽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와인이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단순히 알코올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으며 와인이 알코올 중독과 암의 유발을 높인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와인에 대한 의학적 관심은 매우 최근에 들어와서야 불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1990년대 초반으로 르노(Renaud) 박사가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를 주장하면서부터다. 이와 더불어 와인과 건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와인이 심장혈관계통 질병, 알츠하이머 등에 예방효과가 있다는 주장과 더불어 와인은 여느 다른 알코올과는 성격과 특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와인도 다른 알코올과 다를 바 없이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쟁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2009년 2월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L’Institut national du Cancer: Inca)가 배포한 브로슈어에는 시한폭탄이 하나 장치되어 있다. 내용인즉 한 방울의 알코올(와인 포함)이라도 마시는 순간부터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수백 년 이상 하루에 한두 잔의 와인은 건강에 좋다는 믿음과 신화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국립 암 연구소의 발표는 곧바로 거센 반발과 논쟁을 촉발했으며, 뜨거운 감자는 지금까지 식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때로 거칠기까지 한 논쟁은 일반 소비자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소량의 와인도 암을 유발하는가?’라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 확실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1인당 연 평균 와인 소비량이 54리터나 되고, 450여 AOC를 자랑하며, 6000만 헥토리터(1헥토리터=100리터)를 생산하며, 100억 유로(한화 약 13조원)의 매출(단일 상품으로는 곡물류 다음)을 기록하는 주요한 경제적 산물이다. 게다가 사회문화적으로 와인 소비가 권장되는 분위기이며, 와인 관련 업자들의 막강한 로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내용은 가히 충격이었고 마른하늘에 천둥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의 발표는 국내의 일부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자, 이제 거칠고 뜨거운 논쟁에서 조금 비켜나 여러 전문가들의 상반된 주장을 차분히 한번 검토해 보자. 이것만이 와인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안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선, 와인은 화학적으로 보면 다른 여느 알코올과 같다. 모든 알코올음료처럼 와인도 에탄올 몰레큘라(CH3, CH2, OH)를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연구는 에탄올이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통계상으로 보면 알코올은 프랑스에서 담배 다음으로 피할 수 있는 사망 원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 외에도 알코올로 인한 교통사고, 폭력 등에 의한 사망을 합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공공 건강의 열렬한 수호자인 클로드 고트(Claude Got)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고 있다. “알코올은 두 얼굴을 가진 제품이다. 그것을 마시는 즐거움과 생산하는 자들 혹은 판매하는 자들의 경제적 부라는 측면과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재앙이란 측면이다. 그리고 후자는 중독, 사고, 폭력, 간경화, 정신질환, 암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 잔의 와인이라도 건강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없다는 말인가?’라는 절박하면서도 핵심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와인은 알코올음료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알코올음료와 확연히 구별되는 아주 특별한 알코올음료다. 그 이유는 와인을 구성하는 화학적 생물학적 성분이 다른 알코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잔의 와인 속에는 수백 가지의 몰레큘라가 들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포도 껍질과 씨 속에 다량 함유된 강력한 항산화성 물질인 폴리페놀이 주목을 끌고 있다. 폴리페놀의 특성 중 일부는 나쁜 콜레스테롤의 형성을 막아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 예방에 효력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체중 감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졌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와인은 알츠하이머 등에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런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와인과 암 유발에 대한 연관성은 확실하지 않은 만큼 복잡하여 뒤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제 ‘와인의 효과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적절한 양은 얼마인가?’ 하는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운 질문이 남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은 상충하고 있다. 소량을 규칙적으로 소비할 때 일부 병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다 해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상황적 분위기나 개인적 성향과 알코올 분해 능력, 성별, 유전자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적당한 양만 소비하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게는 권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에서 알코올 분해 효소를 관장하는 유전자가 다르다. 아시아인의 50%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활동하지 않으므로 구토, 붉은 반점의 출현, 어지럼증 등의 현상이 나타나 알코올화 진행이 중단되는 반면, 유럽인들에게는 이런 예방적 현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예방에 관한 한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유전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타고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와인의 적절한 소비량에 대한 기준은 존재하는가? 대답은 ‘없다’이다. 프랑스의 건강을 위한 국립 예방 및 교육 연구소(Institut national de prevention et d’education pour la sante)나 세계 암 연구 기금(World Cancer Research Fund : WCRF)이나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의 결론은 와인 소비의 적절한 양을 결정할 수 없다(no threshold is identified/pas de seuil indentifie 혹은 보다 확실하게 There is no threshold/il n’y a pas de seuil)라는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건강을 생각하며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권장할 수 있는 충고는 규칙적(매일 혹은 거의 매일)으로 소량(2~3잔)을 식사 중에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로부터도 공격당하지 않고 확실하고 안전하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았지만 와인 이상으로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는 다른 음식이나 음료를 즐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커피, 녹차, 초콜릿 등에는 와인보다 월등히 많은 폴리페놀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와인이 주는 독특한 즐거움과 분위기는 결코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다. 와인은 여전히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와인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 장 홍 (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 2015-11-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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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1] 서드 에이지(third age), 어떻게 지나갈것인가
- 지금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고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노인들이 동시에 생존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여 아들 며느리로부터 정성스레 효도 받던 옛날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시대착오적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장수(長壽)가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던 소수의 양반층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노인이란 부양의 대상이자 사회적 부담의 온상이란 부정적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부모님을 모신 마지막 세대요, 자식으로부터 버림받는 첫 세대”란 자조적 표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색빛 실버(silver) 세대 대신 ‘황금빛 골드(gold) 세대’란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그윽한 풍미를 자랑하는 ‘와인 세대’란 별칭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와인(wine)이란 현명하게(wisely) 인생을 하나로 엮어내는(integrated) 신(new) 노년(elderly)의 첫 글자를 딴 조어(造語)라 한다. 오늘날 생애주기 이론가들은 성인 이후의 나이 듦을 향해 세심한 관찰과 흥미진진한 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삶의 단계를 유년기, 사춘기, 오디세이기(성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 성인기, 은퇴 후기(後期), 노년기, 이렇게 6단계로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또, 성인발달과정에 애정을 쏟아온 윌리엄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을 ‘서드 에이지’라 명명하면서 이제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할 준비를 해야 하나 보다” 하고 인생을 관조하려던 중년을 향해, “다시금 새 타이어(re-tire)로 갈아 끼우고 이륙할 준비를 하라”는 충고와 더불어, 20세기 부모님 세대의 경험 속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선한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노후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부동산, 펀드, 주식 투자 등 경제적 준비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상실감을 딛고 정서적 성숙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일본에서의 정년 65세란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연령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독일에서 은퇴를 65세로 못 박았을 때는 연금 수령 자격이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날 것으로 가정했다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게 아닌지. 우리가 특별히 서드 에이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가 인생의 쇠락기가 아니라 2차 성장 및 성숙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들러가 만났던 주인공들은 ‘중년의 위기’란 허상에 사로잡혀 상실과 허무감에 허우적대기보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을 즐기면서 성공적으로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실천하고 있었다 한다. 일례로 갱년기를 지난 여성들이 삶의 재충전을 위해 스포츠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되었는데, 이들 여성이 선택하는 스포츠는 번지 점프, 산악자전거, 록클라이밍 등 예상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친 종목들이었다고 한다. 50대 후반 여성들은 거친 스포츠에 도전하면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음은 물론 삶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충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도전하거나, 숙련된 기술을 습득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우리 뇌 내부에 이전엔 없던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적적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물론 서드 에이지를 지나가는 과정은 때론 복잡하기 그지없는 미로를 통과해야만 하는 상황도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때도 무수히 많은 데다, 한 번에 풀기 어려운 역설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뎌보는 것이란 조언은 우리에게도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서드 에이지의 ‘위기의식’과 ‘도전’ 사이에서 긍정적 정체성 확립하기, 둘째 ‘일’과 ‘쉼[休]’의 조화를 이루기, 셋째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균형을 유지하기, 넷째 ‘현실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 다리를 놓기, 다섯째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성숙한 선택지를 찾아가기, 여섯째,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시에 실현하기. 이들 6가지 과제 속엔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두 요소들 간의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이 설득력 있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직장과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법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세대를 향해, 서드 에이지를 지나며 필히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법’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어 오면서 자신의 존재는 잠시 묻어둔 채 쫓기듯이 살아온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새삼 눈시울을 젖게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상자에 갇힌 듯한 직장 생활을 답답해하면서도 정작 이로부터 탈출했을 때 오는 해방감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일과 쉼의 조화를 꾀하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삶 속에서 늘 불안감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들을 향해 유연한 생각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생(生)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온 경험이 빈곤한 우리네로선,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30년 이후의 삶을 그려보며 상상의 기쁨과 도전의 의욕을 다질 수 있길 소망해본다. >>글 함인희 (咸仁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 , 등이 있다.
- 2015-11-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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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준의 스토리 텔링] 운동선수들의 은퇴 시기는?
- 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접하여 망령이라 / 어이 아니 한심하랴 청천백일(靑天白日) 빨리 가니 / 일거월석 지날수록 늙을 밖에 할 일 없다 … ◇운동선수, 은퇴시기가 빠른 직업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희대의 명창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소설가 김유정이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라는 명문을 바쳤으며 정부까지 나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가창을 멈춰야 했다. 1979년 6월,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도 여지없이 식장에서는 같은 노래가 은은히 흘렀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가진 것을 놓아야 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 스포츠 선수에게 은퇴는 특히 더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언제 필드를 떠나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남은 세월 동안의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언제가 그때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멈추는 것일 터.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를 은퇴 시기로 꼽는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해야 할 종목에서 동체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생각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야말로 은퇴 시기라고 말하는 선수도 많다. 눈은 필드를 향해 있지만 종종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젊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면 은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은퇴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을 법한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프로스포츠인 야구. 이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은 여간해서 은퇴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스타 선수들도 나이가 들고 성적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구단으로부터 방출 선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범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양새가 가장 안쓰러웠던 경우. 그는 불세출의 스타였다. 부채꼴 그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정의 활약을 펼쳤다. 아쉽다면 일본 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뒤의 성적이 부상 탓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하는 이유 다행히 국내로 유턴해서는 다시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3년에는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을 옮긴 타이거즈에서 ‘20-20클럽’ 가입 선수가 되었다. 홈런 스무 개 이상, 도루 스무 개 이상의 다양한 활약을 서른셋의 나이로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고령 기록이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 WBC 클래식 국제야구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WBC 클래식 이후. 2006년 시즌 2할4푼2리, 2007년 1할7푼2리를 기록하며 “이종범도 끝났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두 시즌 모두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100게임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움은 더 컸다. 놀랍게도 이종범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2008년과 2009년 시즌에 100경기 이상 출장해 3할에 근접한 성적을 남긴 것이다. 소속팀은 2009년 시즌 대망의 포스트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에 이종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모르는 야구팬은 많지 않았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구단의 행보.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뛰며 미증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공공연히 은퇴 압력을 행사했다. 2011년 시즌 이종범의 성적은 97경기 출장, 타율 2할7푼7리, 출루율 3할3푼7리였다. 그 정도면 어떤 팀에서든 2번이나 6, 7번 정도 타순의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지표. 따라서 구단의 은퇴 압박을 단지 성적 문제로만 보기는 쉽지 않았다. 2012년, 끝내 이종범은 유니폼을 벗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결정”임을 강조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국을 떠나며 말한 것처럼 ‘자의 반 타의 반’의 등 떠밀린 듯한 은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종범의 은퇴를 바라보는 뒷맛은 더할 수 없이 씁쓸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베테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그아웃에 이종범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이 ‘예전에도 이런 위기 많이 이겨내봤다’는 눈치로 떡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젊은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칼자루 쥔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연봉 축내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할 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좀 다르다. 프로야구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리그인 만큼 이종범과 비교될 만한 에피소드가 종종 벌어진다. 올해에도 여지없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선수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은 올해 마흔 한 살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와 내년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치로는 2016년 시즌을 보장받았고, 2017년 시즌에 계약하지 않으면 50만 달러(약 5억8000만 원)를 추가로 지급받게 된다. 다음 시즌 이치로의 연봉은 200만 달러(23억2300만 원). 여기에 각종 조건이 달려 있다. 250타석과 300타석에 도달하면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씩 추가 지불, 이후 50타석 추가 시마다 40만 달러(4억6000만 원)가 더 지급된다. 최대 600타석인 옵션을 모두 채우면 연봉은 300만 달러(약 34억8000만 원)까지 치솟는다. 이치로가 올해 거둔 성적을 놓고 보면 말린스 구단의 이런 계약은, 우리나라 구단들의 시각에서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타율 2할2푼9리에 출루율 또한 3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자동 아웃’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적으로 이종범의 은퇴 무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린스 구단의 데이비드 샘슨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치로는 팀의 소중한 전력”이라고. 그러므로 “팀이 제대로 구성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그와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음악으로 치면 “비틀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는 베테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떠한 팀 구성이 바람직한지 잘 알고 있다. 영화 에는 일흔 살의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 자도 모르면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저 “삶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싶다”던 한 노인이 첨단 업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나아가 회사 전체를 바꾼다는 설정.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베테랑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발휘되는 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구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지난 8월 6일.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41)이 19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업 포수로서 1,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법했지만 진갑용은 단호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결정에 구단의 압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결정이다. 오히려 구단에서는 아쉬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강팀인 만큼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게 분명하고, 그처럼 큰 경기에서 진갑용 같은 베테랑은 요긴한 힘이 될 테니까. 이후 진갑용은 전력 분석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야구 지도자로 성장하겠다고 꿈을 밝혔다.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준비한 만큼 선수 경력 못지않게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반면 역시 삼성 소속인 이승엽은 “은퇴 시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뜻이다. 성적도 놀라울 만큼 빼어나다. 마흔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400홈런 기록은 그 부산물. 구단에서도 “은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의 판단에 맡겨두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승엽 선수가 올해 성적이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삼성 구단이 그동안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볼 때 ‘그럼에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지금의 삼성 라이온즈는 이종범 시절의 기아 타이거즈보다 한 수 위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13일. 33세인 이탈리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플라비아 페네타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같은 나라의 로베르타 빈치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프로 전향 16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마흔아홉 번째 메이저대회 출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정상이었다. 페네타는 우승 확정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꿈꿔왔다. 매우 행복하다.” 모든 선수가 페네타처럼 은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최선의 상황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베테랑들은 해가 갈수록 성적 지표가 떨어지며 알게 모르게 은퇴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네타나 이승엽 같은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 이치로처럼 부진에 시달리는 베테랑 선수일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가 품고 있는 전력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무관심해왔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제 사회의 눈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진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지금보다 더 멀리 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갖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길이 좀 더 정확해지기를, 좀 더 두루두루 살피기를, 나이를 먹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1-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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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박치기왕’ 레슬링 선수, 김 일
- 2010년 발간된 에는 김일(金一)과 김기수가 별도의 항목으로 실려 있다.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총본산인 대한체육회의 역사서에 프로 선수가 포함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80년대 들어 프로화가 된 야구와 축구 등의 국제 대회에 출전한 프로 선수들 이름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두 스포츠 스타가 활동한 시기는 1960년대이고 이때는 아마추어리즘이 철저하게 지켜지던 때이기도 하다. 더구나 같은 프로 종목이면서도 복싱과 달리 정통 스포츠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은 프로 레슬링 선수인 김일이 포함된 것은 1960년대 한국 스포츠를 말할 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종목이 아직은 아시아 무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프로 레슬링의 김일과 프로 복싱의 김기수는 스포츠팬들에게 한국 선수도 얼마든지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겼다. 또 김일이 터뜨리는 박치기와 김기수가 뻗는 주먹에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던 국민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얻기도 했다. 중년 이상의 스포츠팬들에게 1960년대 인기 스포츠를 꼽으라고 하면 프로 레슬링은 아마도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이어서 프로 복싱과 여자 농구, 축구 정도가 순위에 들 것이다. 그 무렵 프로 레슬링의 인기는 요즘의 야구 메이저리그나 축구 프리미어리그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TV 인기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에도 빠지지 않고 한 토막 소식으로 등장했다. 1960~1970년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프로 레슬링의 최고 스타는 ‘박치기왕’ 김일이었다. 김일이 장충체육관에서 자이언트 바바(馬場), 안토니오 이노키(猪木) 등 일본 선수들과 치른 경기는 말 그대로 ‘한일전’이었다. 총과 칼만 들지 않았지 처절한 싸움이 링 위에서 펼쳐졌다. 일본 선수가 게다(일본 나막신)로 김일의 이마를 때리면 김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바로 박치기로 일본 선수를 링에 뉘어 버렸다. 그리고 링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게다를 관중석으로 던져 버렸다.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임택근·이광재 등 당대 최고 인기 아나운서들은 목청을 높여 “박치기, 박치기, 박치기~”를 외쳐 댔다. 루 테즈 등 산만 한 덩치의 외국 선수들도 박치기 소리가 3번 이상 울려 퍼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정도 소리를 치면 어지간한 선수는 링 바닥에 벌렁 나가자빠졌다. 경기 중반까지 김일이 일방적으로 몰리거나 악랄한 반칙으로 피를 흘리는 등 체육관 안의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는 예외적으로 대여섯 차례의 박치기가 상대 선수의 이마를 강타했다. 그 무렵 장충체육관에서 프로 레슬링 한일전이 벌어지면 경기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나운서도 긴장하고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개 아나운서의 중계 시작을 알리는 방송 코멘트는 아나운서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 지금부터 김일 선수의…” 아무개 아나운서는 태국 등 외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 중계가 많았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입니다. 지금부터 제 5회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농구 한국 대 태국의 경기를 중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이래야 제대로인데 서울 한복판에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은 1929년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서 태어났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는 씨름 선수로 활동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0㎝의 당당한 체격으로 씨름판을 휘어잡다가 역도산(力道山)을 찾아서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불법 체류자로 잡혀 1년 동안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도쿄에 있는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했다. 역도산으로부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의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이름을 받았다. 긴타로는 전설 속의 주인공으로, 소문난 장사를 뜻하는 말이다. 1963년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 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 아시아 태그 챔피언, 1967년 제 23대 WWA 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 헤비급 태그 챔피언에 오르며 20여 차례 챔피언 방어전을 치렀다.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김일은 말년을 힘들게 지냈다. 1987년 아내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냈고, 자신은 박치기 등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군대에 보낸 막내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큰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왕표 등 후배들의 경기나 프로 레슬링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지난날 링에서 포효하던 ‘박치기왕’은 더 이상 보기 어려웠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 머무르면서 후배 양성과 프로 레슬링 재건 사업에 힘을 쏟았던 김일은 1995년 4월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은퇴식을 가졌다. 국내 은퇴식은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레슬링 쇼’ 파문으로 41년 동안 서로 등을 돌리고 지내 왔던 장영철과 뒤늦게 화해해 팬들을 흐뭇하게 하기도 했다. 또 생전에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스승 역도산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11월 그는 대장을 잘라 내는 큰 수술을 받아 한때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회복돼 사회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기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배들을 격려하며 프로 레슬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김일은 오랜 투병 끝에 2006년 10월 26일 낮 12시 17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영전에 놓인 국민훈장 석류장(1994년)과 체육훈장 맹호장(2000년)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온 국민에게 선사한 기쁨의 가치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 대한뉴스 1960년대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를 서울에 있는 장충체육관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김일의 호쾌한 박치기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까. 텔레비전 수상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와 김기수의 프로 복싱, 박신자의 여자 농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였다. 전국의 모든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반드시 영사하던 대한뉴스는 오늘날의 TV 종합 뉴스 편성과 같아서 정치 경제 사회 뉴스에 스포츠 소식이 붙어 있었다. 월남전 소식과 새마을운동 소식은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 시책 홍보 수단이기도 했지만 정보 소통을 신문과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대한뉴스는 매우 중요한 매스미디어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매주 제작됐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시보로 시작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전진보, 1953년 대한늬우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법 개정에 따라 대한뉴우스를 거쳐 대한뉴스로 바뀌었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5-11-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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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산책] 가을의 소리[秋聲]
- 독자 여러분은 ‘가을의 소리[秋聲]’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이번 호에는 중국문학사상 가을을 노래한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추성부(秋聲賦)’를 살펴보자. 구양수가 53세 되던 송 인종(仁宗) 가우(嘉佑) 4년(AD 1059)에 지은 작품이다. 먼저 그가 표현하는 약 1000년 전 ‘가을의 소리’는 다음과 같다. “내가 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섬 놀라 ‘이상하구나’ 하면서 귀 기울여 들어본즉 처음에는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듯[淅瀝] 쓸쓸한 바람 부는 소리[蕭颯]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튀어오르고[奔騰] 거세게 일어나는 듯[?湃]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마치 적진을 습격하는 군대가 (소리를 죽이려) 입에 재갈을 물고[啣枚]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단지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이에 구양수는 동자에게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너 좀 나가서 보고 오너라.’ 동자가 (나갔다 와서 대답하길)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고,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아마도) 나무 사이에서 이는 소리[聲在樹間]인 듯합니다.’ 했다.” 이상이 추성부의 첫 번째 단락이다. ‘가을의 소리’ 로 작가는 바람소리, 파도소리, 쇳소리, 행군하는 소리 등 네 가지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이어지는 동자와의 문답은 험한 세파를 겪어 예민해진 작가 자신에 비해 아무런 걱정 근심 없는 천진한 동자와의 인식 차이를 대비시켜, 이 글의 주제인 ‘가을의 소리’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나무 사이에서 이는 소리’라는 성어는 동자의 이러한 순박한 대답을 함축한 말로서, 후세에 널리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단락이다. “나는 말했다. ‘아아, 슬프도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가을의 소리로구나! 이 가을의 소리는 어찌하여 온 것인가?...가을의 기운[氣]은 오싹하여[慄冽]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그 뜻[意]은 쓸쓸[蕭條]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이렇게 초목이 꺾어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이 가을 기운이 남기는 매서움[餘烈] 때문이리라...” 이 글의 주제는 중국문학의 오래된 주제인 ‘비추[悲秋: 가을을 슬퍼함]’다. 이 단락 중 가을의 기운[氣]를 묘사하는 부분인 ‘기기율렬(其氣慄冽),폄인기골(?人肌骨)’, 즉 ‘그 기운이 오싹하여 사람 피부와 뼛속까지 콕콕 찌르는 듯하다’라는 표현은 중국 교과서 명구사전(名句詞典)에 실려 있는 명구다. 이어지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재미있다. “(말을 마치고 돌아보니) 동자는 아무 대답이 없이 벌써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구나...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도다.” 즉, 가을의 소리가 슬픈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이 슬픈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간접화법으로 말하고 있다.
- 2015-11-12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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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3년生, 무나죽가이둥장
- 돌아가신 제 어머니는 밑으로 두 여동생을 뒀습니다. 부안에 사시던 어머니가 금산(錦山)으로 시집오자 두 이모도 언니 따라 금산으로 혼처를 정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첫째 이모는 금산 읍내에서 삼십 리 떨어진 ‘장둥이’에 사는 시골마을의 갑부한테 시집갔습니다. 글 김승웅 언론인 그 이모네 집 마당 대문 곁엔 높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가죽나무‘로 불리던 기분 나쁠 정도의 큰 거목으로, 집 전체가 노상 그 그늘에 덮여, 6·25 나던 해 여름 한 철을 그 집 머슴방을 빌려 피난살이를 하던 우리 식구들 눈에도 왠지 흉가 같다는 인상을 짙게 드리우던 나무였습니다. 이 인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석 달 후 집주인 이모부가 9·28 직후 북으로 도망치던 동네 빨갱이들의 기습을 받아 피살된 곳이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이모부가 변을 당하기 직전 우리 식구는 그 집에서 피난살이를 끝내고 금산 읍내의 우리 집으로 돌아와 살던 때였지만. 반대로 동네 소작인들에게 쫓기던 이모부한테는 그때부터 피난살이가 시작돼, 장둥이 소작인들의 눈을 피해 열흘 남짓 읍내 우리 집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모부는 장둥이의 소문난 지주의 아들로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였습니다. 귀국 후 그는 선친의 뒤를 이어 장둥이 대지주가 됐고, 아침 산보 길에 동네 소작인 김 아무개를 논길에서 만나 간밤에 논물을 대라 지시했거늘 왜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지를 추궁하다 평소 불복해온 김 아무개의 말대꾸에 격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발길질을 퍼부어 그를 논두렁 구석에 처박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져 하루아침에 소작인들 세상으로 바뀌면서 김 아무개로부터 당할 보복이 두려워 석 달 동안 장둥이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다 9·28이 되자 일단 안심하고 읍내 우리 집으로 거처를 정해 열흘 남짓 숨어 살던 중이었습니다. 쫓겨 새우잠을 자는 이모부를 볼 때마다 어린 제게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같은 변고가 생기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바로 이모부처럼 남한테 원한을 지고 사는 사람이구나 여겼습니다. 인간이 인간한테 겪는 변고란 그러고 보면 으레 화산 같은 것이어서, 원한이라는 제일 여린 지층을 뚫고 분출되기 마련 아닙니까. 장둥이 가죽나무의 저주 이모부는 참변당하기 하루 전 날 “오늘 밤만은 오랜만에 다리 좀 뻗고 자겠다”며 장둥이로 귀가하더니 말이 씨가 된 듯 그대로 다리 뻗고 영면한 것입니다. 이모부의 귀가 소문은 당일로 장둥이 모두에게 퍼졌고 퇴각 중이던 김 아무개의 귀에까지 닿았던 것 같습니다. 퇴각을 멈춘 김 아무개가 그날 밤 장둥이로 돌아와 다른 소작인들과 작당하여 이모부 집을 덮친 것입니다. 이모가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깬 이모부가 문을 박차고 담을 넘었습니다만, 김 아무개가 쏜 총이 더 빨랐습니다. 담을 채 넘지도 못한 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담벼락 밑에 휴지처럼 구겨져 숨을 거둔 것입니다. 장례식 날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 갔다가, 이모부가 담을 넘으려 움켜잡다 놓친 지푸라기 더미가 담 밑에 수북이 흩어져 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모는 장례식 날까지도 실신상태에 놓여 “날 샜네, 날 샜네!”만을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의 참변에 놀란 나머지 부엌 아궁이에 머릴 박고 날이 어서 새기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지요. 더위가 한풀 가신 지금 같은 초가을 날씨였는데도 상갓집 구석구석에 흥건히 밴 피 냄새가 왜 그리 독하고 역겨웠는지 지금껏 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던 그 냄새는 아무래도 마당 한구석 대문 옆에 선 가죽나무가 뿜어대는 냄새려니 여겼습니다. 그 가죽나무가 제 뇌리에 아직껏 저주의 나무로 남아 있는 건, 죽음이 뭔지를 그 나무가 풍기던 피 냄새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설까, 지금 이 나이에도 거목 곁에 서기가 싫습니다. 이번 글 제목을 ‘무나죽가이둥장’이라 단 이유도 그 가죽나무의 저주를 말하기 위해섭니다. ‘장둥이 가죽나무’를 거꾸로 뒤집은 글자 조립으로, 이모부의 참변 후 그 집 가죽나무 이야기만 나오면 파랗게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이 겁보 아들을 놀려먹으려, 제 선친이 툭하면 꺼내던 악의의 말장난이었습니다. 겁보 아들을 다독이기는커녕 평생을 이처럼 철 안 든 아이로 살다 가신 아버지였습니다. 이모의 비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과부로 바뀐 이모는 두 아들을 금산 장둥이 시가 댁에 맡기고 언니 되는 우리 어머니가 살고 있던 전주로 이사 왔습니다. 과부 이모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 동란 직후 잘나가던 군복차림의 노 대위였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과 동기 되는 육사8기 장교로, 수송 병과였습니다. 그 노 대위가 술이 취해 전주 이모네 집 담 옆에 차를 주차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자 집주인과 인사를 트다보니 여주인이 30대 초반의 과부라는 것, 더구나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과부라는 걸 알자 노 대위 쪽에서 노골적으로 달라붙어 첩으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저는 전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는데,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대낮임에도 잠옷차림에 흐트러진 머리로 이모 방에서 나오는 노 대위를 여러 번 목격했고, 그때마다 심한 배신감에 떨었습니다. 국졸에 불과했던 우리 어머니와는 달리 일제 때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이모가 아니던가. 서예에 뛰어나고 평소 다감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인텔리 이모가 어찌 저리 쉬 무너진단 말인가… 전쟁을 치르면, 또 과부가 되면 다 저리 되는 건가, 도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 그 이모가 어느 날 밤 군복차림의 노 대위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둘의 동거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언니 되는 제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내려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놀란 건 호되게 나무랄 줄 알았던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둘의 동거를 너무도 순순히 승낙하고 말더라는 것, 더욱 놀란 건 당시 노 대위가 허리에 차고 왔던 권총이었습니다. 제 어린 소견으로도 결코 권총 차고 나타날 자리가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차치하더라도 경우 밝고 매사 똑 소리 나게 다부지던 어머니마저 그 권총의 위력 앞에 저토록 꼼짝달싹 못 하다니… 어린 제 생각에도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때의 억울함은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정확히 10년 후 5·16이 터지면서 이 나라에 덮친 ‘권총문화’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였습니다. 5·16이 나던 해 대학에 입학한 저와 동급생들은 두어 달 후 강의실을 박차고 진입한 무장계엄군들한테 밀려 교문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던 교문 밖에 우두망철 선 채 캠퍼스 안쪽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 푸드득 머릿속을 스쳐가던 한 컷의 환영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뜬금없게도, 10년 전 그날 밤 저희 집을 찾아와 어머니를 침묵시켰던 노 대위의 성난 표정, 그리고 그의 허리에 달린 예의 권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5·16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저는 지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권총이라고. 모든 걸 침묵케 만들던 권총문화의 도래였노라고, 또 그 결말이 18년 후 궁정동 시해(弑害)로 입증되지 않더냐고. 계엄이 풀린 후 노 대위를 수소문한즉 5·16주역들의 동기답게 그 사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얼마 뒤 예편되더니 전주 병무청장으로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풍편에 접했습니다. 이모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노 대령과 계속 동거 중인지 아니면 헤어졌는지, 이도저도 아니면 떳떳하게 그의 후처 자리를 차지해 안방에 들어앉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로부터 서대문 로터리 근처의 ‘별’다방이라는 곳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풍편에 들었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저의 집 식구 누구도 이를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식구 모두에게 그녀는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친정언니 손을 잡고 저세상 동행한 이모 그러던 이모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내민 것은 5·16이 나고 근 30여 년이 지나섭니다. 그것도 하필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발인을 하루 앞둔 몹시 흐린 날 하오였습니다. 언니의 죽음을 누구로부터 듣고 왔는지, 하얀 상복 차림으로 들어선 이모는 몰라볼 정도의 노인으로 바뀌어 있더이다. 조카들의 인사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언니의 주검 앞에 다가서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는데, “언니는 좋겠네!”만을 되풀이하던 그 곡소리가 지금껏 생생합니다. 무엇이 그리 좋다는 말인지 문상객 모두가 궁금히 여겼습니다만 이따금 “이제 내 죽으면 누가 초상을 치러줄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걸로 미뤄 이모부 사후 장둥이 시가 댁에 버리고 떠난 두 아들을 목 타게 그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입술이 점차 검푸르게 타들어 가던 이모가 언니의 주검 앞에서 혼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상주였던 가형과 제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 응급실로 옮기려 했으나 구급차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숨을 거두는 것 아닙니까? 아니, 도대체 이럴 수가… 말로만 듣던 줄초상이 난 것입니다. 절로 개탄이 터져 나오더이다. ‘아, 끝마무리까지 이토록 변고를 동반하시는 분이로구나!’ 억지로 짜 맞춰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이모의 기막힌 팔자였습니다. 미뤄 짐작컨대 이모는 자신의 명이 다 한 걸 이미 감지하고 언니의 상가를 찾아왔던 성싶습니다. 마지막 여행길에나마 어려서 그토록 따르고 그리워했다던 친정언니의 손을 잡고 동행하고 싶어서였겠지요. 이모의 눈을 감겨드리며,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제 생각이 미치지 않던 어머니의 소녀시절이, 곁들여 두 자매가 나누던 동기간의 우애가 엄존했음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수년 전 우연히 고향 금산에 갈 일이 생겨 내친 김에 30~40리를 걸어 ‘장둥이’에까지 갔습니다만 가죽나무는 고사하고 그 집 그 동네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린 데 놀랐습니다. 60여 년의 세월은 그토록 무섭습니다. 집터만이라도 찾을까 싶어 동네 몇몇 노인한테 이모부 존함과, 혹시나 싶어 소작인 김 아무개와의 사연까지 설명하자 노인 모두가 아예 손사래까지 쳐가며 “왜 그런 걸 알려고 하느냐?”며 나무라는 데 더 놀랐습니다. 노인 두세 분은 저를 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지 대놓고 의심하는 눈치까지 보이기에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동네를 빠져나왔습니다.
- 2015-11-12 0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