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한해를 반으로 접는 유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부르고 싶다. 과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월은 신록이 절정을 향해가는 시기다. 신록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준다. 무엇보다도 신록은 희망을 준다.
한해를 시작한 1월은 시무식을 비롯한 이런저런 행사로 쏜살같이 지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2월이 지나면 3월은 입학식으로 설렘과 기대가
나는 경상도 산골에서 읍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대도시인 인천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나를 대도시로 보내고자 한 데는 그분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경상도 사람이 소백산 준령을 넘어 서울로 가면 잘 산다는 옛말이 있다고 너는 서울로 가라고 몇 번 말했다. 어린 마음에도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시골에 살면서 나보고는
예부터 서민들이 원하던 5복 중의 하나는 치아가 좋은 것을 들었다 합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 치아는 생활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본 기자는 잇몸에 통증을 느껴서 치과에 갔습니다. 통증 해당 부위의 X-Ray를 찍으면서 진료한 결과 스캘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간호사가 진료카드 기록을 보더니, 지난 해 12월에 보험 적
봄이 되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꽃밭을 일구곤 했다. 꽃밭 가꾸기가 우리 집 연례 행사였기 때문이다. 받아 놓았던 꽃씨를 전부 꺼내서 뿌리고 물뿌리개로 물을 줘가며 내 동생들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던 일들이 그립다. 또 꽃모종들을 동네를 다니며 얻어 와서 심기도 했다. 그 해에는 금낭화를 처음으로 담임선생님 집에서
6월의 중순, 아직 태양열이 그렇게 극성을 부리기에는 이른 초여름이다. 잎들이 겨우 연록에서 초록으로 바뀌려는 시간인데 그 하루 내가 김포공항을 통하여 한국을 떠나는 날에는 이미 그 전날의 극성스런 열기로 대지도 덥혀져있었고 당일의 새 기운으로 기습작전이라도 하는 양 쏟아 내리는 햇빛으로 모든 고형의 물질들은 졸아들고 녹여날 것 같은 무더위였다. 굳이 그래
6월이면 으레 옷장을 정리한다. 겨울옷과 여름옷을 바꿔 넣고 내친김에 잡동사니들도 버리느라 대청소로 접어들곤 한다.
올해도 손쉬운 서랍장부터 열어 본다. 재킷 속에 받쳐 입었던 목 긴 스웨터와 짧은 소매 스웨터가 엉켜 있다. 원래 계절이 바뀔 즈음엔 서랍 속 내용물이 엉키기 마련이다. 가끔은 계절을 거스르는 날씨 탓이다.
중년을 넘어서면 점점 어울리는
11년전 여름, 그러니까 미국 시애틀에 살던 2005년 7월 중순경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부산소재 모 수산회사의 1인 지사장으로 시애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말이 지사장이지 고정수입이 없는 프리랜서형 지사여서 힘겹고 배고프던 때였다.
23세부터 23년간 당연시 여긴, 중독중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월급'이 없어 마음이 황량한 때였다.
당시 알래
순국순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보훈의식 및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하고 현충일, 6.25, 제2연평해전의 정부기념식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개최하고 있다.
인류와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 되었고, 전쟁은 시대와 장소 교리와 전투방법에 따라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따라서 승패의 요인을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