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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라 불현듯, 달맞이꽃!”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에 ‘소리 좀 내지 말고 살아라’라는 글을 썼더니 여러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단톡방에 “내가 목소리가 커서 그렇지 실은 말수가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님”이라고 주장했다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모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쭝얼쭝얼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디”라고 버티다 “목소리가 큰 건 인정하셔야지”라는 핀잔을 받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하는 여성이 내 블로그에 올린 댓글이다. 첫 번째 댓글은 이랬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귀(내 귀는 소라껍질)’라는 시를 읽고 실제로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았을 때, ‘솨아--(쏴아가 아님)’ 소리를 듣고 ‘아! 정말!’ 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바닷소리에 섞여 아련히 바다의 향기까지 나는 듯했습니다.” 장 콕토(1889~1963)의 그 시 ‘Mon oreille’(내 귀)는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라고 돼 있다. ‘껍질’은 물체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하지 않은 물질, ‘껍데기’는 달걀이나 조개 따위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물질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라껍데기라고 써야 맞는데, 국립국어원은 조개의 경우 예외적으로 ‘조개껍질’과 ‘조개껍데기’를 모두 쓸 수 있다고 하니 진짜 헷갈린다. 소라껍질이라고 쓴 건 운율상 그런 거 같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따지지 말자. 원래 이런 거 쓰려고 한 글이 아니니까. 그 여성의 두 번째 댓글이 감동적이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기압의 차이로 생기는 바람이나 조수 간만의 차이로 생기는 파도 소리, 이런 거 말고요.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내는 자연의 소리를. 꽃이 피는 순간을 본 적이 있나요?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고 시절, 친한 친구 집 대문간에 한 무더기의 달맞이꽃이 있었습니다. 요즘 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달맞이꽃이 아니고, 키도 크고 꽃대도 꽃송이도 큰 튼실한 달맞이꽃 한 무더기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숨을 한번 고르고 계속 읽는다. “초저녁 7시에서 8시쯤 달이 올라올 무렵 달맞이꽃 옆에 서 있으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달맞이꽃 꽃송이가 한순간에 벌어졌습니다. 오므려져 있던 달맞이꽃 봉오리가 퍽! 소리를 내면서 순간 꽃송이가 활짝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 송이가 소리를 내며 피어나면 시샘하듯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꽃송이가 벌어지는데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그때, ‘아! 그래서 달맞이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이 떠오를 때 달맞이꽃이 피어나니까요. 다른 꽃들은 소리 없이 서서히 벌어지는데, 제가 아는 한 오직 달맞이꽃만이 순간에 벌어지면서 피어납니다. 그 순간을 위해서 달맞이꽃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했을까요? 온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모아 한꺼번에 확! 뿜어냈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동영상을 찍어놓았을 텐데….” 댓글은 끝나지 않았다. “소리를 주제로 쓴 글을 읽으니 아름다웠던 옛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젠 다시 볼 수도 듣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피는 소리.’ 전에도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번씩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라서. 며칠 전 그 친구와도 전화로 달맞이꽃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는 그 소리를 수없이 많이 들었답니다. 혹시 그런 귀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마지막 문장이 나를 찔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신문사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는 들었다. 대학교 몇 학년 때인가 캠핑을 가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고 한다. 웬일인가 하고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노란 달맞이꽃이 환하게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황홀한 장면에 친구들은 다들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불현듯’이라는 말은 그런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불현듯’은 원래 ‘불을 켠 듯’인데, 불을 켜면 갑자기 환해지듯이 어떤 일이나 생각이 느닷없이 일어날 때 쓰는 말 아닌가. 불현듯 주위가 불 현 듯해진 것이다.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부른 ‘달맞이꽃’(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 1972)의 가사가 이 꽃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 아 아 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달맞이꽃은 첫해에는 원줄기 없이 자라다가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에 줄기를 만들어 곧추 자라 꽃피는 두해살이풀이다. 꽃은 여름에 잎겨드랑이에 한 개씩 밤에 피어 다음 날 아침에 진다. 월견초(月見草)라고도 부르는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밤의 요정, 소원이다. 그런데 정원에 화초로 심는 분홍달맞이꽃과 황금달맞이꽃은 낮에 꽃이 피어 낮달맞이꽃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렇게 달맞이꽃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남에게 내놓을 만한 나만의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고 머릿속의 주머니를 뒤져도 달맞이꽃처럼 멋진 건 없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기거했던 사랑방에 어느 날 밤 혼자 앉아서 들었던 뒷산의 솔바람소리, 그것은 깊고 아득하면서도 무서웠다. 부엉이소리까지 얹히면 더 그랬다. 그리고 계룡산 기슭의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들었던 밤 늑대 울음소리, 그 아기 울음 같던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사람은 중학교 국어시간에 ‘나를 슬프게 하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할 때, 한밤중 성주산 고개를 허위허위 올라가는 트럭의 숨 가쁜 비명을 글로 써 선생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달콤하면서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소리보다 듣기 싫은 소리를 더 잘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슬펐던 소리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지난주 쓴 글에 듣기 싫은 소리로 개소리도 언급했지만, 사실은 ‘개띠 법무부 장관의 개소리’라고 쓰려다가 그냥 개소리라고만 썼다. 앞으로 나도 달맞이꽃이 피는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 아이의 이가 새로 나는 소리, 서산에 걸린 해가 모든 이들에게 인사하는 소리, 술이나 벼가 익는 소리, 가을 깊은 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이런 걸 들으면 좋겠다고 소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 2020-11-2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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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백 살까지 살기로 했다
-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 책 제목이 도전적이다. 제목만 보니 내용이 궁금해진다. 책을 집어 들면서 기대를 했다. 이 책 속에는 이제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를 열어갈 의학적 비법이나 하다못해 생활비법 같은 것이라도 존재할 줄 알았다. 그런 책이 아니다. 사람이 글자 그대로 천수를 누린다면 과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150세를 말한다. 성경에는 몇백 세를 산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동양의 삼천갑자 동박삭이는 무려 18만 년을 도망 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은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건 더더욱 아니다. 저자가 스스로 120세까지 살기로 했다고 고백한 책이다. 저자 이승헌은 세계적인 명상가이자 뇌 교육자, 평화운동가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120세까지 산다고 남들에게 말하니 그 반응이 세 가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백이십 살? 그게 정말로 가능해요? 아직은 꿈에 불과하죠.” “백이십 살? 아이고! 그건 나에게 지옥이에요!!” “백이십 살? 맘먹는다고 그게 되나요? 천수를 누리다 가는 거죠.” 현재까지 최고로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이는 122세 프랑스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122세의 남궁 할머니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120세가 마냥 꿈의 나이는 아니다. 세계적인 IT기업 구글은 생명연장프로젝트에 투자하면서 인간수명 500세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저자는 첫 번째로 나이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80세 인생이라고 보면 저자 나이(집필 당시 기준) 67세는 마무리 단계이지만 120세 인생에서 보면 남은 시간이 50년이 넘는다. 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었을 하고 살 것인가? 질문을 던지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 두 번째로는 120세까지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지 운이 좋아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으로 인생을 스스로 경영하면서 오래 사는 것이니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틈만 나면 운동을 하고 체중을 관리한다. 자연스럽게 활기찬 생활을 하게 된다. 세 번째로는 계획을 세워 움직이니 뇌가 자극을 받아서 젊었을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 120세를 선택하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 노년을 긴 안목으로 설계할 여유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생 다 살았다고 축 처져 있는 무기력한 삶보다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능동적으로 사는 삶이 훨씬 건강하다. 저자는 호서대학교 설립자인 강석규 박사의 ‘어느 95세 노인의 고백’을 예로 든다. 강 박사는 열심히 살아 실력을 인정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65세 은퇴 후 30여 년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덧없고 희망 없이 산 3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후회가 됐다는 얘기다. 우리도 120세까지 산다고 가정한다면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면서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섭생과 운동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운동은 습관인데 젊어서부터 운동 습관을 제대로 들이지 않으면 늙어서 더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94세에 돌아가셨는데 80세를 넘기면서 기력이 부쩍 쇠해지고 운동도 싫어하셔서 고작 좋은 음식 드리고, 팔다리 주물러드리는 것밖에 못해드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건강할 때 운동법을 알았다면 더 오래 건강하게 사셨을 거라고 후회한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집착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고 한다. 부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노년은 고독하다. 고독을 즐기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60대 이후에는 포용과 관용을 베풀고 명상을 생활화하면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120세까지 살지 않으면 안 될 위대한 꿈을 품으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100세까지 살기로 결정했다. 누구나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살게 될까!’ 궁금해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장수유전인자 뭐 이런 것은 필요 없다. 수명을 100세로 정하고 역동적으로 살다가 하늘의 뜻에 따라 순응하고 저세상으로 가면 된다. 건강관리 의사 유태우 박사는 자신의 수명을 98세로 예상했다. 앞으로 살 수 있는 나이를 스스로 정하고 목표를 정해 실천하면서 살면 이 또한 멋진 일 아닌가.
- 2020-11-2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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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담숲 단풍놀이
- 나이 들면 단풍놀이 꼭 간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시간이 없어 먼 곳으로는 가지 못하고 낙엽이 떨어지기 전, 부랴부랴 서울 근처 유명 단풍숲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에도 주말에 예약을 하지 못해 실패했던 ‘화담숲’. 역시나 올해도 주말엔 예약이 꽉 차 있어 주중에 시간을 내기로 하고 예약을 마쳤다. 화담숲에는 평일에도 단풍놀이하러 온 사람이 넘쳤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다. 코로나19로 마스크 쓰고 다니면서도 단풍놀이하러 가는 국민들, '참 대단하다.' 하여간 지난해 예약 실패 후, 올해 벼르고 별러서 가본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운영한다. 이 재단이 지구의 기후환경 개선을 위해 벌이는 여러 가지 일들 중 ‘화담숲’ 조성 운영도 들어가 있다. 기업 오너의 취미였던 분재와 수석들이 숲 곳곳에 조성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런 품격 있는 취미를 즐기다가 대중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오픈한 대기업 오너는 참 괜찮은 인생을 살았던 듯싶어 부러워진다. 단풍은 하늘에서 봐야 제맛이란 생각에 모노레일을 타기로 했다. 높은 곳에서 단풍을 내려다보니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아름다운 자연의 색에 마음이 푹 안기며 평화로워진다. 다음번 방문에는 모노레일을 타지 말고 천천히 트레일 코스를 따라 산책해보리라 다짐해본다. 낙엽이 떨어지고 곧 겨울이 몰아닥칠 기세다. 올해도 마지막까지 별 탈 없이 즐겁게 지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다. 언제나 모든 문제는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데, 화담숲에서 책을 읽다 한 구절, 마음에 훅 들어오는 구절이 있어 갈무리한다. “인간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된다.” 단풍 들 때가 더 유난히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화담숲을 마음껏 감상했다. 가을이 후딱 지나가기 전에 함께 눈요기라도 하기 위해 사진을 올려본다.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공익사업의 일환으로 설립 운영하는 수목원이다. 2006년 4월 조성 승인을 받아 정식 개원은 2013년에 했다. 17개의 테마원과 국내 자생식물 및 도입 식물 4000여 종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LG상록재단 측은 관람시설이기 이전에 멸종위기 동식물을 복원해 자연 속에 자리 잡게 하는 생태계 복원을 목표로 한 현장 연구시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단순히 멋진 풍경을 위해서 다양한 나무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생물자원 보호 차원에서 국내 최다 종을 수집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화담숲이 다른 수목원과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점은 국내 최대 규모의 소나무 정원이라는 데 있다. 다양한 형태로 줄기가 굽이굽이 뻗어나간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조화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담숲만의 가을 풍경이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단풍나무를 보유한 숲으로도 유명하다. 화담숲의 가을이 더욱 풍성하고 화려한 것은 이 때문이다.
- 2020-11-1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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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와 박해의 역사가 서린 ‘버그내 순례길’
-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약 800km의 길을 한 달가량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물론 출발지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섬이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순례길처럼 걷는 길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 섬의 12사도 순례길은‘섬티아고’라 부른다.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신안 섬의 순례길은 갯벌이 살아 있는,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바로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다.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달에 다녀와서 지금껏 그 들판이 차분하게 나를 다스린다. 여건상 순례길 일부만 돌아봤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찾아가 제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마음속에 기분 좋은 여정을 감춰두고 기다리는 은밀한 기분이다. 순례길의 주요 지점은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제와 합덕성당, 원시장과 원시보 우물터를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를 경유해 신리성지까지 약 13.3㎞ 코스로 비순환형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다. 시간은 발걸음에 따라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름길이나 거친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해서 이곳이 더 알려지지 않고 지금만큼만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솔뫼라는 순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으로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지난 201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곧 다가올 2021년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의 해이다.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도 선정되어 당진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 행사를 예고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솔뫼성당 입구로 들어서 조금 걸으면 원형 공연장 겸 야외 성당인 솔뫼 아레나가 쉼터처럼 펼쳐진다. 둘레에 12사도가 세워져 있어 야외 행사의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성당 주변을 둘러싼 솔밭 사이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모습이 노송들 사이에서 성스럽게 서 있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만나는 물길로,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범근내포’에서 유래됐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이 길에 서린 순교와 박해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발길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합덕제를 거쳐 합덕성당을 만난다. 1929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페랭 신부가 봉헌한 합덕성당은 조용한 합덕 마을을 앞에 두고 고요히 서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룬 두 개의 종탑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경건함이 붉은 벽돌의 고딕과 어울려 아름답다. 가던 길 멈추고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합덕성당에 들러 그 풍경 속에서 한참 머물다 가길 권한다. 100년쯤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합덕의 너른 들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받으며 처절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을 기억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걸어간다. 바람 부는 평야를 지나 조붓한 둑길을 걸으면 평온한 자연 속에서 버그내 길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순례길이 품은 순교자들의 신념, 아픔, 그리고 뜨거웠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시간이다.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 말이 당진 곳곳을 지나면서 자주 보였다. 여기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내심 생소했지만 하루쯤 걷고 둘러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서 그들의 뿌리와 죽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것을. 걷기 열풍이 계속 이어지는 추세이지만 순례길만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시간은 남다르다. 지난해엔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었을 만큼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다만 주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 묵상하면서 걷는 예의도 명심할 일이다. 비대면 여행이 강조되는 이즈음에 순례길 걷기는 더없이 좋다. 특히 이곳은 '혼행'으로 최적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아도, 애써 여러 날을 비울 필요도 없다. 어느 날 하루 훌쩍 떠나면 된다. 신념의 전파를 위해 피 흘리기를 택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언가 가슴에 실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면 가능한 버그내 순례길의 여운은 아주 길다. ▲주변 명소& 맛집 당진 면천읍성(沔川邑城 ) 마을 당진시 면천읍성 일대를 성안마을로 부른다. 아주 오래된 이곳은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이다. 우체국을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 자전거포를 동네 책방으로 변신시킨 ‘오래된 미래’, 원래는 대폿집이었던 소품 가득 감성 가득 ‘진달래 상회’, 건너편에 면천향교를 둔 연꽃 가득한 연못 ‘골정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등 마을 전체가 개발이 제한된 유적지여서 푸근한 시간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 느리게 그러면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면천읍성 마을이다. 아미미술관 당진보다는 아미미술관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들길을 지나고 산 아래로 다가가면 나타나는 맑은 공기 속 예술 공간 아미미술관. 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의 폐교를 개조한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 낡은 학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만에 갔더니 복도의 설치 작품들이 교체되어 다시 새롭다. 실내의 전시작품, 마당의 너른 잔디밭과 핑크 뮬리가 혼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소설 '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의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 당진에 내려와 직접 설계해 지은 집 ‘필경사’(筆耕舍). 필경사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 농촌 소설인 ‘상록수’가 집필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지식인은 붓으로 시대의 어둠을 가는 존재다"라는 심훈의 말처럼 당시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심훈기념관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 한참을 쉬어도 좋을 농촌 마을이다. 교황님도 다녀간 당진 식당 '길목'의 '꺼먹지 정식' ‘꺼먹지’는 당진의 향토음식이다. 가을 무청을 염장했다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무청 짠지로 처음에는 파랗게 절여졌던 것이 검게 변했다 하여 꺼먹지라고 한다. 걸쭉한 들깨 찌개에 구수한 꺼먹지가 함께 어울려 맛을 내는 음식이다. 그릇도 흰 분청사기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손맛이 좋은 반찬들이다. 교황이 솔뫼성지 방문 후 사제단 만찬을 이곳에서 했을 때 꺼먹지 정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명장이 만든 떡, 민속떡집 민속떡집의 쑥 왕송편이 유명해서 당진을 떠나면서 늦은 저녁에 들렀더니 왕송편은 이미 다 팔린 후였다. 떡 명장이 만들어내는 민속떡집은 당진시 최초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 2020-10-2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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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10월의 어느 날에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아,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금지곡’을 먼저 발표합니다. 이 자리를 즐겁고 흥겹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니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선구자’ 부르지 마십시오. 일송정 푸른 솔이 혼자 늙어가거나 말거나 내비두세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향수’도 금지곡입니다. 이걸 눈치코치 없이 끝까지 다 불러 사람들 지겹게 하고 ‘꿈엔들 잊힐리야’ 하게 만드는 건 바보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딴 디 가서 부르세요. 여기는 칠순, 팔순잔치 하는 곳 아닙니다. 또 엄정행처럼 부르든 다른 사람처럼 부르든 ‘오 내 사랑 목련화야’를 외치는 사람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제발 참아주십시오. 10월만 되면 오나가나 이 노래 땜에 아주 지겹습니다. 이런 거 말고 차라리 ‘땡벌’, ‘아파트’ 이런 걸 부르세요. 요즘 유행하는 ‘테스형’도 좋습니다. 아니면 확 그냥 ‘인천에 성냥공장…’을 부르시거나. 내가 모임 사회를 볼 때 맨 먼저 한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한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하려 한 것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다 말한 건 아니다. 어느 모임 무슨 행사든 여흥 순서가 되면 정말 눈치코치 없이 장황하고 지루하게 지 명곡을 너무도 진지/성실하게 불러 남들을 지겹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국가는 죽어도 4절까지 다 안 부르면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다섯 번이나 읊어대는 사람도 봤다. 위에서 발표한 ‘금지곡’ 중에서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이야기해볼까.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결혼식장에 가지 않고 돈만 부치는 경우가 많지만, 작년만 해도 10월이면 이 노래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하루에 두 번 들은 날도 있다. 클래식계의 ‘잊혀진 계절’이라나 뭐라나 10월만 되면 꼭 듣게 되는 ‘제철 음악’이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하루 세 곳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고 쓴 글도 보았다. 앙코르로 무슨 곡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 곡을 꼽는다고 한다. 대충 흘려들어서 가사도 외우지 못하지만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라고 시작해서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렇게 끝나는 노래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난 느끼하고 오글거리고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든다. 가사 중 ‘바람[願望]’을 ‘바램’이라고 하는 것도 영 귀에 거슬린다(차라리 안 부르고 말지!). 난 왜 이 노래를 싫어할까. 사랑과 행복한 만남을 이야기하는 노래이고 축가인데. 난 왜 이렇게 사람이 못되고 비뚤어졌지? 그래서 어느 날 가만히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노래에는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가 나오지만, 난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알아야겠더라. 결론은 뭔가 박제된 감성, 획일화한 도시락 정서, 상투적인 사랑 표현, 곡의 단조로움과 되풀이, 그리고 강제된 반복 청취, 이런 거 때문인 거 같았다. ‘세상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가사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알고 보니 이 노래의 원곡은 1995년 혼성 2인조 시크릿 가든이 발표한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였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봄노래를 가을노래로 싹 바꾼 건데, 그것 자체는 뭐라 할 수 없겠지만 나라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봄보다 가을이 더 좋을 수 있고, 결혼이나 만남에는 수확의 계절이 더 어울리겠지만. 나는 좌우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 ‘차카게 살자’류의 미담이나 교훈이 되는 에피소드 이런 걸 누가 보내오면 카톡이든 메일이든 대부분 삭제하기 바쁘다. 그중엔 가짜뉴스나 왜곡된 것도 많다. 자기 글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성품 인사(명절 때는 물론 입춘, 한로 이런 절기 때나 한 주일의 시작인 월요일에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도 받는 족족 삭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싫어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다. 그런데,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같은 노래는 왜 들어도 지겹지 않을까? 그 노래도 가사는 대충 뻔하고 교과서적인데,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 걸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노래를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유 레이스 미 업’(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도 싫어했었다. 어떤 여성에게 전화를 걸면 이 노래가 나오곤 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좀 지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네덜란드 가수 마틴 허킨스(67)의 목소리로 듣고부터 이 노래가 좋아졌다. 그의 살아온 이력까지 알게 되니 가사가 더 그럴듯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어느 날 좋아지게 될까? 1년의 가장 좋은 계절, 내 생일이 들어 있는 달, 그중에서도 한복판인 요즘, 이 눈이 부시게 삽상(颯爽)한 날씨와 정밀(靜謐)한 풍경에는 무슨 노래든 다 좋아져야 할 텐데. 그게 정상일 텐데 말이다.
- 2020-10-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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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애쓰는 닮고 싶은 진짜 어른
- 지성언 차이나다 대표는 과거 모 패션 대기업 중국 법인장을 지낸, 자타가 공인하는 1세대 중국통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통보된 퇴직 소식에 쓰라린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되려 적극적으로 제2의 인생 기회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중국어 교육 스타트업 기업 차이나다의 공동대표이자 SNS 시니어 패셔니스타, 그리고 안티에이징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 저자로 자리 잡았다. 그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와 묘미를 찾는 시간을 가졌다. “환갑이 되던 해에, 앞으론 매년 한 살씩 더 먹는 게 아니라 한 살씩 빼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주위에 공언도 했습니다. 덕분에 올해 주민등록증 나이 65세인 저는 아직 55세 팔팔한 청춘입니다. 그리고 이제 몇 해만 더 지나면, 드디어 40대에 진입하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젊게 살기 위한 고된 그러나 즐거운 행군(?)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중에게 지성언 차이나다 대표는 일반인임에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출판계에서, SNS에서 그는 이미 그 누구보다도 유명한 시니어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길거리 캐스팅이 돼 TV 광고를 찍을 정도로 성숙한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지만, 정작 자신은 옷을 그리 많이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의외다. 시니어 패셔니스타의 코디법 “제가 직접 작정을 하고 구매한 옷은 별로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패션 대기업의 중국 법인장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자사 브랜드 옷을 얻을 기회가 많았고 패셔니스타로 알려진 뒤로는 협찬도 꽤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옷은 많지만, 구매할 때부터 매칭을 고려하고 산 옷들은 별로 없어요.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매치해서 멋스러움을 창출할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지 대표는 단순히 옷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구두나 운동화, 양말 같은 소품으로 변화를 많이 주고, 팔찌 등의 액세서리로 살짝 에지를 더하는 방법을 애용한다. 그의 패션 포인트를 요약하면 ‘재킷은 기본에 충실하되 젊은 실루엣의 팬츠, 그리고 애교 있는 액세서리다.’ 그는 “그래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웃는다. “재킷은 가능하면 다소 짧은 기장으로 상하 비율이 좋아 보이게 하고, 팬츠의 밑단 폭은 18cm 전후로 하고 기장은 복숭아뼈가 보일락 말락 하는 정도로 맞춰야 전체적으로 젊고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상·하의가 다소 밋밋하면 과감한 신발로 액티브함을 더하기도 하고 재킷에 부토니에르를 꽂아 클래식함을 연출하기도 하죠.” 은퇴 후에는 ‘나눔’이 삶의 방향 패션 철학에 대한 단호하고 간략한 설명을 듣다 보니 지 대표의 경력이 다시금 떠올랐다. 과거의 경력과 함께, 그는 지금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이자 자신의 안티에이징 노하우를 소개한 책 ‘그레이트 그레이’의 저자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로 제2의 인생을 채우는 지금의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은퇴 후에는 ‘나눔’이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30년 넘게 중국 주재원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 경험과 노하우를 후학들과 나누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인생 2막의 큰 방향과 지금 하는 일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레이트 그레이’를 쓴 것도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경험, 특히 은퇴 후의 새로운 도전들과 그로부터 얻은 행복의 비결들을 여러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 후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제 강연을 들은 분들이 인생 2막 설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주실 때 더없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말로만 듣던 ‘선한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책을 낸 덕분에 방향을 다잡으며 삶에 대한 다짐도 한 번 더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책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포기했을지 모르는, 책 속에서 언급한 소위 ‘멋있게 나이 드는 법’들은 독자들과의 약속이니만큼 계속 견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설령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어도 저 자신은 알잖아요? 저부터 배신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위 마인드 에이지(Mind Age)를 매년 더 젊게 가지니, 자연스럽게 그에 걸맞은 피지컬을 갖추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패션 감각도 해가 갈수록 더 젊어졌다. 쉽지 않은 일들일 텐데,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무척이나 즐겁게 나이 들어가고 있기에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뛰는 일은 도전만으로도 승리한 것 “일단 초긍마(초긍정 마인드) 스위치를 켜야겠지요. 그러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크고 작은 재미 요소도 많아집니다. 그 재미 요소를 진짜 재미로 승화하려면 평소 습관이 중요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잖아요? 일상의 작은 것에서 자주 행복을 느끼는 소확행을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그게 일상이 되고, 행복한 일상이 모여 재미있게 나이 들어가게 되는 거죠.” 지 대표는 즐겁게 나이 드는 대단한 비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어쩌면 아는 사람한테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데, 모르는 사람들한텐 너무 어려운 게 재미있게 살면서 나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 그는 소확행이라는 단순하고 우직한 해법을 확고하게 믿기에 그게 가능한 사람인 듯했다. “먼저 자신을 살펴보세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가슴이 뛰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가슴 뛰고 즐거운 일들을 리스트 업한 후에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하나씩 해보는 겁니다. 은퇴 후의 이런 도전들은 굳이 대단한 목표일 필요도 없습니다. 도전해보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면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그 도전은 성공한 것이고 당신은 승리자입니다.” 부부관계의 해법은 ‘공감’과 ‘공간’의 조화 지 대표를 촬영하는 날, 아내도 함께했다. 그가 아내와 친구처럼 잘 지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부 사이는 곧잘 위기에 처한다. 그가 생각하는 중년 부부의 아킬레스건과 위기 대처 비법은 무엇일까? “은퇴 후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중년 부부들이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는 비법은 부부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친구처럼 잘 지내기 위해선 ‘공감’과 ‘공간’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고요.” 나이 들수록 부부 사이에는 대화가 줄고 공감 능력, 공감할 소재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는 부부끼리 할 수 있는 놀이나 취미를 일부러라도 갖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가 촬영 현장에 아내와 동행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남편이 하는 일에 아내도 참여하면 공감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부부가 함께하면 좋은 운동 중 최고는 걷기입니다. 같이 걷는 동안 그냥 걷기만 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쉼 없이 주고받습니다. 부부가 걷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 건강은 물론, 따로 소통의 시간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감 능력이 증가됩니다.” 아울러 지 대표는 중년 부부들에겐 ‘공감’, ‘함께하기’도 중요하지만 ‘공간’, ‘따로 하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년 부부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배우자와 아이들을 위해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야 아내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만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기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요. 각자 하고 싶고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배우자가 원한다면 딴지(?) 걸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그렇게 일정 부분 상대방만의 ‘공간’을 허락해야 친구처럼 잘 살 수 있습니다. 상대는 내 아내, 내 남편이기 훨씬 이전부터 독립된 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와 연결된 시니어가 돼라 얘기를 듣다 보니 그가 겉으로만 젊어지려는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젊어지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SNS를 계속 하고 있는 이유 또한 그러한 생각에서였다. “100세 시대죠. 아직도 몇십 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다가올 미래와의 접속은 꼭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거든요.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추억만 먹으며 살기엔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어요. 그러므로 SNS 같은 새로운 소통 도구들도 적극 활용하고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손주들과의 소통도 SNS로 해야 더 활발해지고 공감대도 넓어집니다.” 손주 얘기가 나오니 그에게서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시니어 패셔니스타에게도 손주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 존재인가보다. 그에게 손주의 존재는 지켜야 할 삶의 법칙을 다시금 되새기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목숨 다하는 날까지 멋진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애쓰다 떠난, 닮고 싶은 진짜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손주들아! 몇 년만 더 지나면 너희들은 훌쩍 클 것이고 할아버지는 오히려 작아지고 허리도 굽고 더 쭈글쭈글해지겠지. 그때 냄새 난다고, 말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고, 걸음 늦다고 타박하기 없기다. 그냥 지금처럼 할아버지를 보면 빛의 속도로 활짝 웃으며 달려와서 와락 안겨주렴. 그리고 귀에 대고 조금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해주렴.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 2020-09-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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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토론하는 꽃중년 공무원 "퇴직 후 작은 도서관 만들고파"
- 사십대 후반, 또래의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 독서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든 손문숙(51) 씨. 어느덧 4년째 모임을 통해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부터 퇴직 후 인생 계획까지 함께 나누고 있다. 퇴직 후에는 작은 도서관을 꾸려 회원들과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는 그녀.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의 저자 손문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4년 째 직장의 여성 동료들과 독서 토론 모임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임 소개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글쓰기 강사의 조언을 듣고 독서 학습 공동체에서 1년 동안 독서 토론을 공부했습니다. 독서 토론의 즐거움을 먼저 깨닫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그런 기쁨을 나눠주고 싶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들게 됐습니다. 여리 독서 모임은 인천광역시교육청의 사무관 이상으로 구성된 여성 관리자 네트워크에서 만든 동아리로 회원들은 여자이고 나이는 40대 후반 이상입니다. 1년 단위로 회원들을 모집하는데 매년 17명 정도 활동하고 있고 인천 북구도서관에 직장인 독서 동아리로 등록돼 있어 매월 1회 평일 퇴근 후 도서관에서 모임을 합니다. Q. 모임에서 주로 도서 선정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토론 방식은요? 토론할 책을 같이 의논해서 정하기 때문에 문학, 철학, 사회,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정 관념을 깨우치고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가 하는 토론은 찬반으로 나눠 경쟁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닌, 논제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비경쟁 방식입니다. 직장 동료들은 책 내용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정, 직장, 사회 문제 등 사적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풀어냅니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 자녀에 대한 고민, 남편과 시댁과의 문제, 직장 이야기, 퇴직 후 인생계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Q. 중년 이후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얻은 일상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또 동료들에게는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나요? 저는 40대 후반에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나를 찾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가정, 사회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인생 2막에 작가로 살고 싶다는 멋진 꿈을 가지고 제 인생에 첫 번째 단독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회원들 중에는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책을 잘 읽지 않는 회원들이 더 많았습니다. 독서 모임에 나오면서 1년 동안 같이 읽을 책 목록이 공지되면 시간 여유 있을 때 책을 미리 읽어둡니다. 매월 모임에 나올 때 한 번 더 읽고 토론 후에 블로그나 독서장에 기록을 남기면서 한 번 더 복기를 합니다. 그러면 한 책을 세 번 정도 읽는 셈이지요.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다보면 이해가 안 되던 것들도 알게 되고 본인의 생각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죠. 독서 모임을 통해 강제로라도 한 달에 한 권씩은 책을 읽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어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혼자 읽을 때는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독서 토론을 하게 되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도 하고요. Q. 이번에 펴내신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에 담고자 했던 주요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요? 저와 독서 모임 회원들이 독서 토론을 통해 깨달은 자아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긍정의 힘을 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면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카페에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나가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함으로써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이 소수의 고상해 보이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공기 마시듯 행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죠. Q. 독자로 책을 접할 때와 이번처럼 저자가 되어 책을 접할 때,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요? 독자로 책을 읽을 때보다 독서 에세이 작가로서 원저작을 읽을 때는 좀 더 꼼꼼하게 읽고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과 관련된 나의 생각과 통찰을 글로 담아내야 해서 일반 산문을 쓸 때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Q. 우리네 인생에서 ‘독서’(또는 책)가 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故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여성 중장년 독자들에게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입니다. 작중 니나를 통해 저자는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라는 말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들 중의 하나에 우리를 고정시키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을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죠. 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적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의 방식은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도 동경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Q. ‘내 인생의 책’이라는 타이틀로 한 권을 꼽는다면 어떤 책이 될까요? 그 이유는요? 인상 깊은 좋은 책들이 많지만 앞서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꼽고 싶습니다. 20년 20일이라는 긴 수형 생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간직하고 있는 작가의 마음을 통해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실천하는 지식인이셨고 “삶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가 변화와 창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공부이다”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Q.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등 SNS 활동도 하고 계신데요. 주로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계신가요? 동료들과 토론한 책 이야기를 주로 블로그와 브런치에 남깁니다. 처음에는 독서 토론을 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독서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정리해서 나중에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습니다. Q. 현재 교육행정공무원으로 일하고 계시는데요. 장차 퇴직 후에 작가가 되어 책을 쓰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퇴직 후에 집필실을 겸해 여자들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지금의 독서 모임 회원들과 퇴직 후에도 우리들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어서입니다. 퇴직이 8년 반 정도 남았는데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미래를 상상하며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도서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고 꾸준히 책을 쓰고 있고, 뜻을 같이 하는 동료는 사십 초반에 사서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 2020-09-2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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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에 구름 걷히면 부처가 보인다
- 청암사로 접어드는 길목부터 숲과 계류로 시원한 풍광이 펼쳐진다. 경내에도 다종다양한 수종이 아우러져 수목원을 연상시킨다. 비구니 행자들이 공부하는 아름다운 산사다. 내친김에 청암사에서 수도산 정상부 수도암 일대에 걸쳐 조성된 인현왕후길(총 9km)도 걸어볼 만하다. 장마로 불어난 수량에 계곡이 터질 듯 꽉 찼다. 억박적박 얽힌 바위들을 휘돌아 소쿠라지는 허연 물살로 음지이면서도 양양하다. 이쯤이면 절경에 맞먹어 폭염이 성가실 게 없다. 나무들은 궁금한가보다. 계곡으로 내뻗은 가지마다 살랑거리는 품이 은근한 손짓을 닮았다. 골바람이 스쳐 지나자 나무들이 사람처럼 들떴다. 출가도 설레는 여정일까? 세속에서 산문(山門)까지 멀리도 왔다. 이 절에 갓 출가한 수행자들이 산다. 청암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이다. 접때 왔을 땐 고요한 절이었다. 여린 싹눈 틔우는 봄나무처럼 청순한 행자들만 간혹 경내를 거닐더라. 오늘은 구경하러 온 사람이 숱하다. 김천시가 닦은 둘레길 ‘인현왕후길’에 청암사가 포함되면서 급작스레 드나드는 숫자가 늘었다. 찻집이 들어섰고, 현대식 해우소(解憂所)도 근사하게 새로 지었다. 뜨악하게도 경내의 일부 소로까지 아스팔트를 입혀 시커멓다. 원래의 흙길은 일부러 찾아와 걷는 이가 드문 덕분에 덜 밟혀 포근했다. 이 절이 그 절이었냐? 싱숭생숭하게 읊고 지나는 이가 있다. 그는 뭔가 섭섭한 게다. 불가에서 이르길, 외양에서 진리를 찾지 말라 했다. 부처마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했다. 알고 보면 다 편의시설이니 깐깐하게 따질 게 없다. 분에 넘치는 치레라면 허세이겠지. 그러나 그저 수수하며, 여전히 수려한 것은 나무들이 지천으로 어우러져서다. 청암사처럼 온갖 나무들이 길차게 자라 개운한 풍치를 이룬 산사가 흔치 않다. 물소리와 매미소리가 연신 귀를 따라붙는다. 극락전 구역에서 발길을 멈춘다. 청암사 풍경의 절정이 여기에 있어서다. 담장 안짝에 어느덧 늙어 고졸한 전각이 있고, 바깥으로는 소로와 텃밭이 정갈하다. 극락전 지붕 저편 위로 큰 구름덩어리 흘러 산을 넘어가자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법문이 따로 있겠는가, 내 마음에 구름이 걷히면 부처가 보인다. 극락전 담장에 기대어 붉은 꽃을 토해낸 놈은 배롱나무다. 껍질을 벗고 또 벗기를 거듭해 누드처럼 티 없이 말짱한 수피를 드러내는 나무다. 절집에서 흔히 배롱나무를 심는 건, 일념으로 번뇌의 껍질을 벗고 깨끗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기를 배롱나무처럼 하라는 경책에서다. 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쩌면 모두 경책이자 법어다. 제 몸을 녹여 주위를 밝히는 초처럼 나무들은 꽃으로, 열매로 세상을 밝힌다. 물은 유유히 흘러 물처럼 살라 한다. 산은 만고에 명증한 무자천서(無字天書, 하늘이 만든 글자 없는 책)라 하였으니 청할 만한 족집게 레슨교사다. 이 절의 신참 비구니 행자들은 허투루 살지 않기를 맹세했을 것이다. 삶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기로, 사사로운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기로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들을 내려놓기 쉬울까보냐. 맛난 음식을 먹고 싶고, 달콤한 영화를 보고 싶고, 멋진 옷을 입어보고 싶고, 세간에서 습이 된 중생 유락을 다 떨치기 어렵다. 그걸 떨치면 깨달음이라 했다. 게다가 깨달음마저 떨쳐야 비로소 무애(無碍)에 이르러 견성이다. 이거야 원,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해서, 공부하다 죽어라! 고승들은 그리 통렬하게 가르쳤다. 무슨 공부를? 혜암스님이라고,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일일일식(一日一食)으로 유명했던 이는 경전이나 선(禪)은 공부거리로 족하지 않다고 봤다. ‘중들이 불상인지 나무토막인지에다 대고 관세음보살이나 외는데 부끄러운 줄 알라. 남을 위해 쉴 새 없이 손발을 놀리는 게 공부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니라.’ 이타적 행실로 차가운 세상에 군불 지피기. 이게 승려만의 일이랴. 청암사에 가거들랑 신참 행자처럼 나를 내려놓아 남 좋은 일을 시키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한 번쯤 꿈꾸어볼 일이다. 인현왕후는 이 절에서 수행승처럼 살았을까. 숙종의 계비(繼妃)였던 그녀는 왕자를 낳지 못한 데다 당쟁에까지 휘말려 폐위된 뒤 청암사에서 3년을 살았다. 전해오는 행장이 없어 아쉽다. 어쩌면 불법에 의지해 사무치는 고독을 눌렀으리라. 스물세 살 나이에 긴긴 유폐라니. 나무들 무성한 저 뒷산 숲에서 몸을 떨곤 했으리라. 간혹 숲에서 번뇌를 잊었으리라.
- 2020-09-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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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왕 할머니가 되는 거 '진짜 멋진 할머니'로 살 거야!"
-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의 저자 김원희 씨. 나이 듦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쩐지 그냥 ‘할머니’는 아쉬워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일흔을 넘긴 나이, 혹자는 지팡이를 들어야 때가 아니냐고 묻지만,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여행용 캐리어를 끈다. 모닝 펍에서 즐기는 생맥주 한잔, 영화 같은 풍경 속 자유로운 젊은이와의 만남, 그리고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가 아니라는 확신, 김원희 씨가 오늘도 여행을 꿈꾸는 이유다. “육체가 허락하는 한 세상 전체를 다 돌아보고 싶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책 제목에 언급된 ‘진짜 멋진 할머니’는 어떤 모습을 의미하나요? A.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노년의 삶을 사는 것. 또 자신의 자리를 알고, 걸맞게 행동하며 받아들이는 삶이 ‘진짜 멋지다’고 생각해요. Q. 노년에 접어들어 젊은 시절 꿈꿔왔던 해외여행을 떠나셨지요. ‘나이’라는 제한에 막상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꿈을 이룬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결단의 문제이겠지요. 저는 자녀가 자립하는 시점에 내 꿈을 실행에 옮기리라 마음먹고 있었으니까요. 아들이 짝을 찾고 정신적으로 완전 독립하고 안정되었다는 확신이 섰어요. 이제는 더 주저할 게 없다는 생각에 결심을 하게 된 거죠. Q. 꿈을 이뤄 즐거웠겠지만, 아무래도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고생스럽다거나 특별한 고충을 느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물론, 음식이나, 언어, 피로감 같은 것이야 있었지만, 그것은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떠날 때 이미 각오하고 떠나는 것이니까요. 당연히 극복해야 해야 했죠. 오히려 어떤 어려움을 만나 극복하고 나면, 더 뿌듯하고, 삶에 감사하게 되더군요. Q. 젊은 시절과 비교해 현재 즐기는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A. 사실, 젊을 때는 사는 게 바빠서 해외여행을 가 본 경험이 거의 없어요. 국내여행, 아니면 패키지로 짧게 며칠 다녀왔기 때문에, 친구들과 뭉쳐서 떠들고 즐기다 온 것뿐이라, 특별한 의미도, 기억도 사실 나지 않아요. 나이 들어 여행은, 그것도 자유 여행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느낌은 참 경이롭습니다. 여행은 나이 들어 해야 제 맛이라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Q. 여행에서의 만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누구인가요? A. 많아요. 그중에서 꼭 꼽으라면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에 소개된 프라하에서 만난 각국의 신학생이에요. 광장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사랑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주었죠. Q. 버킷리스트가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라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A. 다리 운동이 필요하겠죠. 이 나이에 과격한 등산은 하지 않아요.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걷기를 합니다. 집 주위도 좋고요. 성당이 집에서 멀어요.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걸으면 1시간 정도예요. 왕복 2시간입니다. 평일 미사 때도 그렇게 합니다. 이렇듯 그냥 생활 속에서 걷기 운동 정도예요. 산티아고 관련된 책도 많이 읽고요. Q. 수많은 여행을 다니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동지애’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냥 그렇게 산다는 거예요. 우리처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인 거죠.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환경이 달라도 우리는 그냥 한 생을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인 거예요. 소매치기를 만나도, 친절한 사람을 만나도, 그들 모두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라는 거죠.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Q. 최근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여행이 어렵습니다. 본래 계획하셨던 일들을 잠정 미뤄두셨을 거 같은데요. 코로나19 기간은 어떤 즐거움으로 보내시는지, 또 사태가 진정되면 펼칠 꿈은 무엇인지요? A. 독서입니다. 독서가 주는 즐거움은 최고예요. 지금처럼 외출을 자제해야 할 때, 독서만큼 좋은 취미가 없죠. 언제든 하늘 길이 열리면 세상 구경을 하러 나갈 거예요. 코로나19가 끝났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마 제가 제일 먼저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을 것 같은데요!
- 2020-09-0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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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로 가는 섬 여행
- 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 시대를 맞아 외출이나 여행 방법도 확연히 달라졌다. 자신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여행으로 가장 쉬운 것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집콕에서 벗어나 자동차 차창 밖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드라이브 스루 여행지가 멀리 있지 않다. 자동차로 가는 섬으로 떠나보자.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섬 여행으로는 이야기를 품은 서해의 대부도 권역이 있다. 시화방조제와 연륙교가 건설된 덕분에 배를 타지 않고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세 개의 섬을 마치 육지인 양 이어서 오갈 수 있는 편리함이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더구나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을 돌려 귀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서울을 벗어나 시화방조제 위에 세워진 시화나래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바라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로 근처엔 붐비던 대부 여객터미널과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방아머리 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산하다. 그 옆의 텅 빈 방아머리 해수욕장도 역시 조용하고 푸르기만 하다. 달라진 세상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섬마을의 평온, 선재도 목섬 대부도와 영흥도를 잇는 징검다리 섬 선재도는 주변 섬과는 달리 작고 한적한 섬이었다. 선재대교를 건너자마자 내려다보면 홀로 떠 있는 동그란 섬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개 중 하나인 목섬.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곡선의 모래 갯벌이 나타난다. 그 길을 향해 걷는 이들에겐 멋진 추억의 길이 되고 목섬은 여전히 푸른 하늘과 갯벌과 해송이 함께한다.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선재도. 담벼락마다 동화처럼 아이들이 뛰놀고 봄날 꽃그늘 아래서 설레던 마음들이 피어나듯 고즈넉한 섬마을의 벽화가 정답다. 고양이가 조을고 있는 골목 옆으로 선재리 커피집의 잠자리 날개 같은 커튼이 저 혼자 바람에 날리고 있다. 모든 게 멈춘 듯 적막하다. 한때 인기 있던 마을의 갯벌체험이 잠잠하다. 입장료만 내면 호미와 장화를 빌려주고 1인당 1.5kg까지 바지락·동죽을 캘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적만 가득하다. 이국적인 감성 카페 그나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던 곳, 사진작가 김연용 씨가 운영하는 카페 선재도의 명물이었던 뻘 다방, 한때 줄을 서서 차를 주문했던 감성 카페의 앞마당은 해변과 갯벌이다. 갖가지 문화행사를 했던 이곳에 몇 명의 여행자만 오간다. 바다를 향한 풍경이 이국의 정취를 연상케 하고 곳곳이 사진 스폿이었는데 이젠 야외의 빈 의자에 뙤약볕만 내리고 있다. 나오며 돌아본 간판의 큰 글씨가 마음에 들어온다. "Hakuna Matata(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숨어들 듯 고요한 측도 뻘 다방 옆으로는 측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이 보인다. 밀물 때는 선재도와 분리되고 썰물 때는 잠수 도로를 이용해 도보나 차량 통행이 가능한 아주 작은 섬이다. 물속에 세워졌던 기둥이 바닥까지 드러나고 그 바닷길을 건너 측도에 드니 세상과 아주 뚝 떨어진 느낌이다. 인적 없는 조용한 섬마을 뒤편 산 아래에 서서 바다 건너편 마을을 딴 세상을 보듯 본다. 세상모르게 숨어들어 한적하게 쉬고 싶을 때 딱 좋을 듯하다. 물속 길 따라 박혀 있는 전신주 / 그 기둥에 새겨 넣었던 돌의 말 / 하루에 두 번 물이 길을 낳을 때마다 / 상처를 열어 말리며 / 달을 향해 푸르게 웃었을까 / 밖으로 드러난 불안을 어루만지며 / 흔적을 수장할 물때를 기록 중일까 / -박선희 시인의 '측도 가는 길' 중에서 배 타지 않고 다시 섬, 영흥도 그곳에 가면 100년이 넘은 꼬불꼬불한 소사나무 숲이 울창하고, 밀물과 썰물의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기다린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거점이므로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있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서해교전의 퇴역함인 참수리호를 보며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의 거대한 분재전시장 같은 소사나무 군락지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뒤틀린 기이한 형상이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담기 위해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는 자연스러운 방풍림으로 그 자리를 지켰는데 이번에 가보니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주변에 울타리가 생겼다. 지금은 소사나무 숲 주변 벤치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멋진 배경으로 든든하다. 염분이 많고 모래와 자갈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 100년이 훌쩍 넘는 소사나무가 아름다운 숲이 되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 되어주고 있다. 소사나무 저편으로 펼쳐진 십리포 해변에 더러 사람들이 보인다.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해서 십리포다. 마치 철 지난 바다처럼 한적하다. 덱의 파라솔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아무 말 없이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그 바다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의 흔적 켜켜이 쌓인 대부광산 퇴적암층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만 보이는 게 아니다. 세월을 품은 이색적인 숨은 명소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호수와 퇴적암층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대부광산 퇴적암층을 찾아갈 생각에 핸들을 돌렸다. 입구의 풀숲을 조금 지나면서 범상치 않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왠지 가슴이 뛴다. 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암층은, 짙은 녹색의 수면을 뚫고 공룡이라도 튀어오를 듯 원시적인 풍경이 압도한다. 옛날엔 광산이 있던 자리였는데 1997년 초식 공룡의 발자국과 중생대 식물화석이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 근교에서 중생대의 환경과 공룡의 생생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뒤편의 전망대에 오르니 호수와 퇴적층을 조망하기 좋다. 넓게 탁 트인 잔디밭으로 시원하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옆길을 돌아 호수 뒤편의 전망대에서는 탄도항과 제부도가 보이고 요트가 떠 있는 전곡항도 볼 수 있다. 세월의 한 지점에 서서 바라보는 기억 속의 하루가 또 한 겹 쌓인다. 공룡은 사라졌지만 켜켜이 쌓인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도 여기에 또 한 켜 쌓일 테고 우리네 삶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퇴적암층 주차장 옆으로는 제법 큰 규모의 대부도 365 시티 캠핑장이 있다). 바닷길 달려 섬 너머 제부도 예전 같으면 배를 타고 건넜을 섬 대부도와 선재도를 거쳐 영흥도까지 자동차로 휘익 달리니 시간이 여유롭다. 몇 번쯤 차에서 내려서 잠깐씩 둘러보았던 것 말고는 대부분 자동차로 달렸다. 길가에 바지락 칼국수 가게가 즐비했지만 떠나기 전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준비했다. 자동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소풍처럼 점심을 즐기고 커피 한 잔의 맛을 누렸다. 시간이 제법 남는다.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시간에 제부도로 가볼까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꿔 그 바닷길을 달렸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은 제부도의 매력이다. 2.3㎞의 열린 바닷길 양옆으로 펼쳐진 갯벌 위로 하늘이 끝없이 푸르다. 늦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두고 제부도의 바닷바람 속에 있다. 홀로 텐트 그늘에 앉아 바다를 향해 앉아 사색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섬 남단의 매바위 부근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모래 해변에 멀찍이 거리 두고 텐트가 몇 개 자리 잡고 있다. 물 빠진 너른 갯벌 위에선 진흙투성이의 아이들이 즐겁다. 북적이지 않아도 제법 계절이 느껴진다. 해안 따라 즐비한 그늘 의자가 비어있고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섬은 이럴 때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수도권에서 가까워 이따금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젠 발길이 닿는 곳들마다 예사롭지 않다. 낯선 듯 감사한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풀숲, 모래밭, 산, 나무, 하늘, 바다, 갯벌, 햇살, 구름, 바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신의 축복 탄도항 노을 느지막이 돌아가는 길이라면 탄도항의 일몰을 경험해볼 만하다. 일몰시간은 대략 저녁 7시 전후 즈음이다. 하루 두 번 물 빠짐 현상으로 바닷길이 열리면 건너편 누에섬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탄도항 제방둑에 미리 자리 잡고 앉으니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다의 하루가 저물고 노을 속 사람들의 실루엣도 풍경이다. 신의 축복처럼 번져가는 노을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다. 추천 코스 시화방조제→대부도 방아머리 해수욕장, 방아머리항 선착장→선재도 벽화마을→목섬, 뻘 다방→측도→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 소사나무 군락→대부도 대부광산 퇴적암층→제부도 해안→탄도항 노을→서울
- 2020-09-04 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