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 )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는 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자수성가한 한정현(67세, 남)씨의 돈에 대한 제1원칙은 ‘절약’이다. 평생 근검절약이 몸에 밴 한정현씨의 돈에 대한 태도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내 김혜숙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제 아이들도 독립하고 큰돈 들어갈 일도 별로 없으니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여행도 좀 다니면서 ‘적당하게 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남편 한정현씨의 생각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 친구 중에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는데 평생 힘들게 돈만 벌다가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친구가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재산을 두고 자녀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씨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노력하던 친구의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아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당하게 돈을 잘 쓸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재무상담을 받아봤다.
삶의 가치관 알기
“당신에게 돈이 왜 중요합니까?”
재무상담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한정현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돈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지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씨에게 돈은 왜가 아니라 무조건 중요했다. 돈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재무상담을 위해 한정현씨가 상담사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상담사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한정현 아직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상담사 네, 그러시군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드린 질문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신 후 답을 하셔도 됩니다.
한정현 (3분 정도 침묵 후)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좀 쓰고 싶습니다.
상담사 그 전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한정현 책임감 때문이죠.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게 마무리되어야….
상담사 책임감… 한정현씨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군요. 그렇다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한정현 짜릿하겠죠. 성취감도 들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울 것 같네요.
상담을 통해 드러난 한정현·김혜숙씨 삶의 가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제안
노후실손의료보험
노후실손의료보험은 50세 이상부터 75세까지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민간보험회사에서 판매하는 보험이다. 보험사에서 정한 건강기준에 적합하면 가입할 수 있으며, 입원과 통원을 합산해 연간 1억원 한도로 실제 발생한 의료비를 보장한다. 일반실손의료보험에 비해 자기부담금비율이 10~20% 높은 대신 보험료가 저렴하다. 자기부담금비율이 높아 치료비가 적게 발생하는 입원이나 통원 시의 혜택보다는, 고액의 치료비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해 가입을 고려해볼 만한 상품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9억원 이하의 주택 소유자나 배우자가 60세 이상일 때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다. 주택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하면 사망 당시에 주택 매도가격이 연금 총액과 이자 등 비용을 상계하고도 남으면 자녀들이 잔액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연금 총액과 비용이 주택 매도가격보다 더 높으면 자녀들이 주택 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의학적으로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전문의의 판단이 있을 때, 추가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의견을 미리 작성해둘 수 있다. 우리나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2018년 2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유언장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전 유언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우선으로 한다. 유언이 없을 때는 상속인들이 협의분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협의가 되지 않으면 법정상속을 한다. 이런 갈등을 방지하려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두는 것이 좋다. 다만 유언장은 법이 정해놓은 요식을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법률 전문가와 상담한 후 작성한다.
일시납 연금보험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면 피보험자가 사망하는 시점까지 연금이 지급된다. 피보험자가 55세가 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며 피보험자가 사망 시 연금액이 소멸하는 연금보험은 세법상 이자소득세가 비과세된다. 그러나 확정된 기간 동안 연금을 받거나 피보험자가 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 시 남은 금액이 상속인에게 지급되는 일시납 연금보험은 2017년 4월 이후부터 가입 금액이 1억이 넘으면 수령 시 이자소득세가 과세된다.
여가활동
시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활동 공간과 영역도 점차 늘고 있다. 시니어들의 여가활동 특징은 배움과 여가를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수입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각 지역 지방자치단체에 가면 시니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나 여가 프로그램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시 산하의 50+재단(50plus.or.kr)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
만 65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안전교육을 이수하면 자동차보험료의 5%를 할인해준다. 고령운전자 교통안전교육은 도로교통공단 13개 시도 지부에서 실시하며 비용은 무료다. 교육시간은 3시간 정도 이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 65세 이상 운전자가 교육이수 후 수료증을 보험사에 제출하면 자동차보험 5% 할인특약에 가입할 수 있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풍경소리도 잠이 덜 깬 조용한 아침.
바늘 끝 하나 박을 수 없을 것 같이 꽉 찬 세상을 뚫고 넓은 대웅전을 빠져나온 독경소리처럼 일주일에 두 번 거실에 울려 퍼지는 인터넷 영어방송.
기저귀 차고 출발해 수의라는 마지막 패션 쑈로 끝내는 게 인생인데, 젊음, 결혼, 고생자체가 마냥 즐거움이었고 재미였던 아이 키우기도 끝내고 이제 단 두 식구만 남았다.
우리는 장수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누구나 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단지 무엇을 할지 모를 뿐인 때 둘만이 남겨진 지금도 뭔가 또 해 보겠다며 뛰고 또 뛰는 일상에서 찾은 게 외국어 배우기라는 아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면 네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새로운 경로를 탐색합니다.
5km 이상 직진하십시오. 800m 앞에서 유턴하십시오.
누군가 우리네 인생길도 이렇게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내가 가고자 한 길인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네비게이션 같은 인연이 우연이란 이름으로 알려주는 내 인생이 마무리 될 때 장식할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배우는 것이라면 그 중 하나를 영어라 생각하고 싶다는 아내.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벨은 행복이란 내가 좋아서하는 일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란 내 한 사람의 생각의 한계가 있으니 행복의 양이 적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일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을 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도 흥미와 호기심이 생겨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까이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이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시너지 효과가 생겨 행복의 양은 무한대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본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와 달리 확률적으로 남은 시간이 적으니 얼마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위해 영어 공부 하겠다는 아내.
그렇다 보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 훌훌 털고 내가 행복이라 생각한 길을 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점점 설득력이 생기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적군의 입장에서 나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나를 공격해 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취약점과 나의 허점을 찾아 내 허점은 보강하고 적군의 취약점을 나도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찾아 효과적으로 공격해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영어공부하는 당사자보다 곁에서 침묵하고 도와주는 자의 고통도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과연 본인은 알까.
요즘처럼 청개구리 동화가 실감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오랫동안 교육 책임을 맡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20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교 성적이나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이 50세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의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의식과 삶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더 소중한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보람 있는 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러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자기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기도 하고 삶의 진로나 직업을 바꾸는 어려움과 세월의 낭비에서 오는 불행과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꼭 권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당신이 80세를 앞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출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는 충고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확실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50대부터 사회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일과 더불어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위한 가치의식도 없이 장년기 30년을 다 보낸다면 그것은 인생의 상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가치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기대와 존경심까지도 배신당하는 과오를 범한다. 70 평생의 업적과 노고를 부끄럽고 창피스럽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는 때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실망스러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다면 나는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면 된다. 나이 들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의 길과 목표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왜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60쯤이라고 본다. 그리고 75세쯤까지는 누구나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5세쯤까지 성장한 자세와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하는가 함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10년 정도는 연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80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는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은 60에서 80대 후반기까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기대가 가능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고 나 자신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라톤 경기를 위해서는 90을 목표선으로 삼고 누구나 열심히 달려도 좋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인생설계여서 타당하다고 본다.
가장 먼저 찾아드는 어려움은 건강이다. 많은 사람이 50대쯤부터 관리했다면 유지할 수 있었을 건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방치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또 평소부터 잘 조절했다면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장·노년기를 질병과 함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80이 넘으면 건강이 최고 제일이라고 해서 건강을 위한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듯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포기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소년 기간을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과 조심스러움으로 살았다. 50이 되면서 건강의 자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왔다. 산책과 수영이 건강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그때그때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짤막한 휴식이나 오수시간을 갖는다. 나는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을 즐길 수 있고 일이 다시 내 건강을 이끌어준다고 믿는다.
건강 이외에도 문제가 있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때는 손아래 가족들의 죽음에서 오는 어려움을 담당해야 한다. 그 고통과 불행은 경혐해본 사람이라야 안다. 그런데 80을 넘기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녀들의 사업이나 인생의 실패 때문에 그 짐을 분담하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때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체험을 거울삼아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 체념할 것은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운명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노력의 한계 이상의 사건들을 대하는 지혜다.
나는 90의 나이를 넘기면서 누구나 겪는 시련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먼저 갔기 때문에 혼자 남는 어려움도 겪었다. 평생을 함께 일해오던 존경하는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그렇게 힘겨운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던 학문과 인생의 교훈이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한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월만큼 행복한 때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와 섬김의 열매가 일을 통해 사회와 겨레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간절히 기원해왔던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해왔던 두 친구의 생애를 잊지 못한다. 우리 셋은 6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는 일과 학문적인 일에만 열중해왔다. 그러다가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한 대화와 걱정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사회와 겨레를 위한 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셋이 다 9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사회가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가 먼저 떠나면서, 우리 세 사람이 50년의 우정을 계속하면서도 셋을 위한 즐거운 시간도 못 가졌지만 이제는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조용히 서로 마음으로 위해주다가 차례가 오면 가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정을 쌓았다가 한 사람씩 가게 되면 남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남은 몇 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찾아올 이별을 슬픔 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교수가 먼저 떠났다.
몇 해 지난 후에 안병욱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너무 간단했다. “김태길 선생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김 선생이 혼자 남을 것 같아”라는 얘기였다 건강이 힘드냐고 물었더니, “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라면서 말을 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까지 가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당부다. ‘우리가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해주시겠기에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다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 이상의 인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안 교수를 보내면서 슬프지는 않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행복한 눈물이었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
올해 97세인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저서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이다.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모임에서 친목도 다지고 내년 모임의 방향을 잡는 행사를 열었다. 고문을 맡고 있는 H형이 소유하고 있는 가평 소재 별장 겸 연수원을 행사 장소로 추천했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과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수시설이 있는 펜션 스타일의 집이었다. 그런데 입구 간판에 적힌 이름이 ‘삶의 쉼표’였다.
행사 일정이 마무리되고 저녁을 먹고 즐거운 환담의 시간이 이어졌다. H형에게 펜션 이름을 삶의 쉼표라고 지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음악이나 글에는 쉼표가 있어요! 글에 마침표만 있고 쉼표가 없으면 너무 지루하지요. 또 문장이 길어지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요점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노래를 부를 때 쉼표가 없으면 숨이 막히고 말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인생을 살면서 쉼표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어요. 100세 시대에 더 멋진 인생,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쉼표가 있어야 합니다!”
H형에게는 더 큰 꿈이 있었다.
“그저 달리기만 하는 직장인들은 중간에 퇴직을 하거나 정년을 맞으면 제2의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간다는 것이 안타깝지요. 저는 이곳이 퇴직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명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기 퇴직이나 은퇴를 ‘끝이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은퇴를 ‘Re+tire’, 즉 ‘타이어를 바꿔 끼다’라는 의미의 Retire로 생각한다. 은퇴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중요한 메시지이자 새로운 출발의 휘슬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회사에서 오래 쓴 PC가 고장이 나면 업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수리를 한다. 그러나 직원들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 고민이 있을 때는 PC처럼 수리를 할 수 없다. 그러다보면 스트레스는 우울증이나 과로사 같은 돌이키기 힘든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경제 10대 강국을 자처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국가가 됐고, 하루 40여 명이 자살하는 ‘자살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강제된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유로운 상황에서의 몰입이 중요하다. 불안이 없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환경과 즐거운 웃음이 존재할 때 새로운 발상이 떠오른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지금 당장 산,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청산(靑山)이라 이름 붙여진 작은 섬 청산도로 달려가보자. 2007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 그리고 세계슬로길 1호로 지정된 곳이다. 쉼표가 있는 음악처럼,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