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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을 따라 걷다, 박완서 13주기 추모 공연
-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가 구리시 아치울에서 투병 끝에 타계한 뒤 13번째 봄날이 찾아왔다. 구리시에서는 올해도 그를 추모하는 낭독 공연을 열었다. 박완서 작가를 기리고 그의 문학을 잊지 않기 위해, 구리아트홀이 생기기 전 시청 한편에서부터 시작한 공연이 어느덧 12회 차를 맞았다. 구리아트홀 코스모스 대극장 앞은 공연 30분 전부터 중장년 관객들로 북적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포스터 앞에서 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관객들은 대극장 1층은 물론이고 2층까지 객석을 가득 채웠다. 공연은 영상, 노래, 연주, 연기, 낭독까지 다채롭게 구성됐다. 관객들은 웃기도 울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하며 공연을 즐겼다. 한 관객은 무대가 끝나자 “낭독 공연은 처음 보는데 색다르네”라고 평하기도 했다. 설교하지 않는, 그러나 여운 주는 동화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까닭 모를 쾌감을 회상한다. 마치 참았던 오줌을 내갈길 때처럼 무거운 억압이 갑자기 풀리면서 전신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그 상쾌한 해방감. 한번 맛보면 도저히 잊힐 것 같지 않은 그 짙은 쾌감. 아 나는 도둑질을 하면서 죄책감보다 쾌감을 더 짙게 느꼈던 것이다. -‘자전거 도둑’ 中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의 동화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수남의 독백이다. 토실하니 붉은 볼과 깨끗한 눈을 가진, 청계천 세운상가 뒷길 전기용품 도매상의 열여섯 살 꼬마 점원 수남이. 꼬마의 고백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자전거 도둑’은 1979년 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 들어 있던 작품이다. 이 중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것을 모아 1999년 다시 펴낼 때 책의 표제가 됐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기에 한 번쯤 읽어봤을 내용이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 수필 등 여러 분야의 글을 썼지만, 동화에 특히 애정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이야기꾼 할머니로 남고 싶었기 때문에 동화를 집필할 때는 특히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어느 한 작품을 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화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쓰기 마련인데, 그는 동화를 통해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어른들도 읽었으면 했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자전거 도둑’을 오히려 어른을 위한 동화 같다고 했다. 이날 낭독 공연 사회를 맡은 최지애 소설가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16세에 이미 깨달은 수남이가 2024년 우리 곁에 있다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텐데, 분명 좋은 어른으로 반듯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책 ‘박완서의 말’을 인용해 “박완서 작가님은 문학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교훈을 주려 하지 않는 동화는 참 드물다. 작품을 읽고 오래도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박완서 문학의 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 따라 걷는 길 1년에 한 번 열리는 낭독 공연 외에도 언제든 박완서 작가를 추모할 방법이 있다. ‘박완서 자료실’에서 그의 문장을 음미해보는 것이다. 자료실은 구리시 인창도서관 2층에 있다. 구리시 아치울에서 생을 마감한 박완서 작가의 발자취를 담은 공간이다. 자료실 입구에는 박 작가의 작품을 필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돼 있다. ‘박완서 필사’ 코너를 지나 자료실로 가는 길 벽면에는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마치 그의 삶을 따라가듯 걸으며 자료실로 들어서면 그의 등단작 ‘나목’부터 소설, 수필, 동화, 문학상 수상 작품 등 분야별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자료실 운영 시간 10:00~16:00) 올해는 ‘리멤버, 박완서’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주 토·일요일 하루에 네 번(가족 대상 : 10시·14시, 일반 대상 : 11시·15시) 구리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박완서 작가의 주요 작품과 일생을 연결 지어 해설한다. 주제는 △소녀,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여자, 박완서 : 나목 △엄마, 박완서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노인, 박완서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 네 가지다. 해설 프로그램은 박완서 자료실에서 진행되며, 구리시 문화예술과(031-550-2565)로 전화 예약을 하거나 구리시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호원숙 작가 딱 알맞은 사랑 주신 어머니를 그리며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작가는 책 ‘박완서의 말’을 엮으면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리워지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책을 펼치면 살아 계실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 생생한 목소리로 들릴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매년 열리는 박완서 작가 추모 낭독 공연에 참석하며 호 작가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번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에도 참석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을 맞이하는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코로나19로 공연을 올리지 못했던 한 번을 제외하고 1주기부터 매년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구리시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공연은 작품 ‘자전거 도둑’이 동화라는 점에서 조금 특별합니다. 어머니가 첫 손주를 보았을 때 쓴 작품이죠. 그야말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자전거 도둑’에는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어른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머니를 보며 좋은 어른의 역할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머니는 어른으로서 상대에게 알맞은 사랑을 주신 분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죠.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이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북돋아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거든요. 넘치도록 사랑을 붓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셨죠. 2023년 ‘어른의 부재’가 트렌드 키워드로 꼽혔어요.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님이 더 그립습니다. 그만큼 좋은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쇼츠라는 게 유행이라면서요? 저도 어떤 짧은 메시지를 보면 ‘어머 진짜 옳은 소리다’ 싶은데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휴대폰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누구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걸 배우면 좋겠어요. 가장 가까운 곳에 배울 게 많아요. 사실 70세가 다 된 제 나이에도 선택해야 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가 망설이거나 쉽게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배웁니다. 용기 내어 사랑을 주고, 받은 사랑에 책임지며 살면 좋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그런 것들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어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짧은 영상과 달리 작품 속 인물을 보며 생각하고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작품을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요즘 고전을 봐요. 전에 읽었던 건데도 다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요. 그 시절 작가와 책을 통해 공감하고 교감하며 대화하는 거죠. 어머니 작품 중에서는 ‘미망’을 추천하고 싶어요. 구한말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로,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지만 미래 주역이 될 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그냥 꿈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요. 딱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랑이요.
- 2024-04-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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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보검 뮤지컬 도전…가을과 함께 찾아온 9월 문화 소식
- ●Exhibition ◇삼국의 여인들, 새로운 세계를 열다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은평역사한옥박물관 국립한국문학관(이하 한국문학관)이 주최한 전시로, 삼국시대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여신’, ‘여왕과 왕후’, ‘신비로운 여인’ 등 여러 유형의 여성상을 살펴보는 기획전이다. 1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다’에서는 단군신화 속 웅녀, 고구려 주몽의 어머니 유화 등 건국 설화 속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본다. 2부 ‘운명을 개척하다’에서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삼국통일에 기여한 문희 등 삼국시대 여성들의 진취적인 목소리를 들어본다. 3부 ‘낯선 존재와 만나다’에서는 수로 부인, 처용의 아내 등 현실 세계를 넘어 낯선 존재와 조우했던 신비로운 여성들을 통해 고전문학의 상상력을 엿본다. 4부 ‘이야기를 남기다’에서는 한국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역옹패설’ 등 중요한 문학 원본 자료와 향가 및 설화를 모티브로 재해석한 근현대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문정희 한국문학관장은 “고대 사회 여성의 힘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2025년 개관될 한국문학관의 중요한 컬렉션을 엿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회화 아닌(Not Paingtings) 일정 10월 9일까지 장소 대구미술관 ‘모던 라이프’(2021년), ‘나를 만나는 계절’(2022년)을 잇는 대구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이다. 미술과 기술 매체의 만남이 가지고 온 미술 형식의 새로운 변화를 살펴본다. 개관 준비기부터 현재까지 수집한 작품 중 비디오 매체의 특성을 탐색한 미디어아트 초기 작품, 동시대 예술가의 뉴미디어, 사진작품 등 34점을 ‘확장하는 눈’, ‘펼쳐진 시간’, ‘경계 없는 세계’의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조명한다. 최근 현대미술의 동향 또한 소개한다. 이강소, 박현기, 김구림 등의 대구 작가들과 백남준, 김순기, 김해민 등으로 계승돼온 국내 미디어 1세대 작가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Stage ◇벤허 일정 9월 2일 ~ 11월 19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왕용범 출연 박은태, 신성록, 규현, 이지훈, 박민성, 서경수, 윤공주, 이정화, 최지혜 등 뮤지컬 ‘벤허’는 루 윌러스가 1880년 발표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유다 벤허’라는 한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 숭고한 휴먼 스토리를 담았다. 역동적인 액션, 홀로그램을 활용한 무대 영상, 전차 경주 장면 등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번 세 번째 시즌에는 뮤지컬 ‘마타하리’, ‘웃는 남자’ 등 대작을 빚어낸 EMK가 제작에 나서 높은 완성도를 예고한다. 벤허 역에는 박은태, 신성록, 규현이 캐스팅됐으며, 메셀라 역은 이지훈, 박민성, 서경수가 연기한다. 에스더 역은 윤공주, 이정화, 최지혜 등이 함께한다. ◇삼총사 일정 9월 15일 ~ 11월 19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연출 신성우·강봉훈 출연 박장현, 후이, 렌, 유태양, 민규, 이건명, 최대철, 김형균 등 뮤지컬 ‘삼총사’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2004년 체코에서 처음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왕실 총사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 달타냥과 전설적인 총사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가 루이 13세를 둘러싼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2009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는 9번째 시즌으로 초연부터 배우로 참여해온 신성우와 강봉훈 연출이 공동 연출을 맡는다. 달타냥 역에는 박장현, 후이(펜타곤), 렌, 유태양(SF9), 민규(DKZ)가 캐스팅됐다. ◇렛미플라이 일정 9월 26일 ~ 12월 10일 장소 예스24 스테이지 1관 연출 이대웅 출연 박보검, 안지환, 신재범, 김태한, 김도빈, 이형훈, 윤공주, 최수진, 방진의 등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3개 부문을 석권하며 2022년 최고의 창작 뮤지컬로 꼽힌 ‘렛미플라이’가 돌아온다. 1969년 보름달이 밝게 빛나던 어느 날 밤, 라디오 주파수의 영향으로 70살 할아버지가 된 남원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미래 탐사 작업에 돌입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다. 무엇보다 이번 시즌은 배우 박보검이 청년 남원 역할에 합류해 기대를 모은다. 데뷔 후 12년 만에 뮤지컬에 첫 도전한 그는 연기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힐 예정이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3-09-0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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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품었걸랑 정자에 오르라… 원림의 귀감, 남원 광한루원
- 비가 내린다. 비는 감정의 농도와 온도를 높여준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비 내리는 날에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에 장맛비가 내린다. 그래 사람이 거의 없어 적적하다. 비는 쉼 없이 내려 풍경을 변주한다. 미인은 주렴 사이로 보라 했던가. 그래야 운치가 돋는다 했다. 미인뿐이랴. 주렴처럼 드리워지는 빗발 사이로 보이는 광한루원의 풍경 역시 맑은 날과 달라 오히려 이색 정취를 자아낸다. 비에 흥건히 젖은 누정과 수목의 표정을 주시할 만하다. 육안보다 심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내향성이 서려 있다. 광한루원은 남원시의 자랑거리이자 관광명소다.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명해진 건 광한루원이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등장해서다. 사람들은 흔히 광한루원과 ‘춘향전’을 동격쯤으로 여긴다. 그래 광한루원에 와서 춘향과 이몽룡이 남긴 열애의 행적을 더듬는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본질은 ‘춘향전’과 무관하다. ‘춘향전’의 한 배경 장소로 쓰였을 뿐, 본래 조선 중기에 지어진 원림(園林)의 귀감이라는 데에 광한루원의 정체성이 있다. 사실관계가 그러하지만 흔히 간과한다. 광한루원에 와서 원림에 꾹 방점을 찍고 답사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 춘향의 상열지사를 염두에 두고 풍경을 바라본다. 유심히 살펴보고 감흥을 즐길 만한 조선 원림이 엄연히 이곳에 있으나 ‘춘향전’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이 혼재해 정작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조절이 필요할 텐데, 관광 소재로 들어앉은 시설물들을 시야에서 걷어낸 셈치고 원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그게 광한루원을 담뿍 마음에 담는 방법일 테다. 광한루원은 관아가 주도해 지은 관아 원림이다. 관아 원림이란 고을의 관원이나 시인 묵객들이 연회와 풍류를 즐긴 야외 정원이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원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다. 광한루의 스케일은 매우 웅장하다. 위엄이 넘친다. 상징과 지향을 담은 사물들의 디테일로 아름답기도 하다. 정원과 연못 역시 호방하고 수려하다.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각이다. 남쪽에서는 간결한 구조로 보이지만, 북쪽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인 외관에 눈길이 쏠린다. 거기에 세 겹의 작은 지붕 아래로 층계를 설치한 회랑이 있어서다. 월랑(月廊)이라 부르는 묘한 구조물이다. 이걸 조성한 이유가 있다. 광한루는 초창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정자의 총량이 너무 과중해 북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이 난처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계단이 있는 회랑을 덧대어 지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여느 정자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미와 기능성을 확보하게 됐다. 이와 같은 건축적 개성과 위트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한루엔 당대 문호들이 쓴 시문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멋들어진 정자가 있으니 드나든 시인이 한둘이었으랴. 여기에서 붓에 먹을 적신 묵객이 한둘이었으랴. 호남을 지나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고 한다. 지리산 솔바람이 드나드는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이 자주 오갔으리라. 끽다와 음풍영월이 있는 풍류도 다반사였을 테고. 조선의 문인 임제가 광한루에 올랐을 때엔 매화라도 피었나? 매화 가지에 달이라도 걸렸나?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깬 채 밤이 깊어졌다고, 함께 노닌 사람과 헤어질 땐 꽃이 지더라고, 임제는 그렇게 시로 노래했다. 광한루는 세종의 총예를 받았던 명재상 황희가 남원에서 유배를 살 때 지은 작은 누각 광통루에서 유래했다. 광한루라는 이름은 1444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아하, 여기가 바로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다!”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됐다. 정인지가 괜히 달나라 운운한 게 아니다. 광한루가 애초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지어졌으니까. 즉 광한루는 천상의 궁궐인 셈이다. 옛사람들은 상상력을 발동해 결국 천상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천상에 모래알처럼 무수히 뿌려진 것은 별인데, 광한루 전면의 넓고 유려한 연못이 바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 가운데엔 섬 세 개를 만들어 삼신산을 표상했다. 광한루원의 기저엔 이렇게 신선 사상이 깔려 있다. 도교, 유교, 음양론, 풍수지리 등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상징 구조들로 어우러져 있다. 안팎이 두루 광활한 세계관으로 상통하는 원림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앞줄에 설 조선 정원이다. 신선을 마음에 들여놓고 다시 빗속을 운전해 정자를 찾아간다. 지리산 기슭,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 있는 퇴수정(退修亭)이다.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 1825~1907)가 1870년에 지은 누정이다. 그는 토목건축을 관장하는 벼슬살이를 하다 은퇴하고 여기 후미진 산골짝에 은거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결국 자연으로 흘러가는가? 퇴직 뒤엔 정해진 순서처럼 산림에 여생을 의탁했던 선인들의 유전자가 후세까지 이어지나? 박치기의 고향은 함양군 안의면이다. 그러나 퇴직 후엔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박치기가 지은 퇴수정의 모습이 그의 선조 박명부가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지은 농월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닮아 흥미롭다. 경치 좋은 냇가에 지은 정자라는 점에서도 퇴수정과 농월정은 유사하다. 경관을 보는 취향과 정자를 짓는 경향에 집안 내림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싶다. 박치기는 널리 이름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근사한 정자를 지어 한몫 단단히 했다. 그의 전공이 건축이었으니 퇴수정에서 구현된 건축 미학의 완성도를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하지만, 실제 이 정자는 빼어나 인상적이다. 당대 누정 건축의 첨단 기술력으로 빚어낸 작품일 수도 있다. 명품 정자라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정자의 규모는 작아서 소박미가 물씬하고, 흠결 없는 비례로 조화롭다. 은근한 세련미로 우아하기까지 하다. 퇴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주목할 만한 요소가 많은 정자다. 가령 배흘림기둥을 구사해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했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막돌 초석 대신 사각 다듬돌을 놓은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 공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징을 꼽자면 훤칠한 냇물과 동행하는 정자라는 점이다. 지리산에서 굴러 나온 계류가 정자의 코앞을 흘러가는 게 아닌가. 기기묘묘한 물가의 암반들과 물속의 바위들까지 퇴수정의 동아리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숲과 물 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다. 자연과 긴밀하게 얽힌 집이다. 박치기의 생리는 초야를 닮아 거친 나물밥만으로도 자족했다. 퇴수정 마루에 올라서는 곧잘 객과 더불어 술과 거문고를 즐겼다지. 그는 신선을 닮고 싶어 산수에 묻혀 산 인물이다. 속세의 질서와 규율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 신선을 들여놓고 자연에서 노닐 경우엔 경지가 달라진다. 신선을 흠모한다는 건 이미 도(道)에 밝다는 뜻일 테니까. 김주완 남원문화원장 “남원 문화의 성장 지리산의 영향력 덕분” 예로부터 남원을 일컬어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의 고을’이라 했다. 하늘이 내린 땅이며, 비옥한 들판이 펼쳐지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저 옛날의 농경사회 시절,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풍부해 의식주가 넉넉할 경우엔 문화마저 덩달아 융성했다. 남원이 딱 그랬다. 농업이 발달한 덕분에 향토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에까지 상속된 유형・무형의 문화자산이 수두룩한데, 이를 견인차로 삼아 남원은 문화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이에 대한 김주완 남원문화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농업경제의 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먹고사는 게 무난해 예술이 발흥한 거다. 삼국시대부터 남원이 교통의 요충이었다는 점도 문화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교통로를 통한 인적・물적 교류는 물론, 외부의 다양한 문화 유입이 활발했으니까.” 남원은 지리산 자락에 있다. 지리산이 남원 문화에 미친 영향도 클 것 같다. “남원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어머니 산’이다. 삶의 희망과 안식을 지리산을 통해 얻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원의 문화예술 역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성장했다고 본다. 남성적인 판소리 동편제를 완성한 가왕 송흥록의 성취는 지리산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가능하기도 했다. 남원은 문학의 요람이다.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이자 발상지이며,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남원 사람이다. 이 모든 문학적 성장의 뿌리 역시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한다.” 6년째 남원문화원을 이끌고 있다. 그간에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큰 성과 하나를 소개하겠다. 과거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베 짜는 소녀가 있었는데, 우리 문화원은 이 소녀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전말기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조사단을 꾸려 일본 현지를 찾아가 여러 기록을 뒤지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마침내 영상 다큐에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다.” 매우 뜻깊은 발굴 사업을 성공시킨 셈이다. 소녀는 포로로 끌려갔으나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일어섰던 것 같다. 자신이 지닌 직조(織造) 재능을 일본 지역민들에게 전수해 직조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게 아닌가. 소녀의 사후, 일본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 추모비를 세웠다 한다.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의 명민한 자질에 감동할 수밖에. 소녀 관련 발굴 자료들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다큐 상영은 물론, 그림책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이다. 연극이나 창극, 혹은 소설로 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도 개발할 것이다.” 문화원마다 지역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화원의 사업과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 개발에 고심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엔 어떤 기법이 필요하다 보나? “외부에서는 문화원이 주민들의 참여나 관심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가까이에 있다고 본다. 미진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열린 문화원’을 지향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문화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 2023-08-0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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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와 이해 사이 줄 타는 곡예사, 김욱동 번역가
-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미국 고전을 즐겨 읽던 사람이라면 김욱동이라는 ‘옮긴이’가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는 ‘노인과 바다’, ‘위대한 개츠비’, ‘허클베리 핀의 모험’, ‘주홍 글자’ 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비롯해 ‘앵무새 죽이기’, ‘그리스인 조르바’ 등 대표적인 영·미 문학 작품을 다수 번역했다. 2013년 은퇴 후에도 번역가이자 영문학자로서 번역서와 문학 연구서를 출간해온 그는 신간 ‘번역가의 길’을 통해 번역 이론의 지평을 또 한 번 넓히고 있다. 진짜 사람처럼 맥락을 이해하고 대화한다는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가 영어로 쓰고, 인공지능 번역기 ‘파파고’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삶을 행복하게 꾸리는 방법에 관한 자기계발서다. 집필, 번역, 교정·교열, 편집 과정을 거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30시간. 기획부터 출간까지 걸린 총 시간은 7일에 불과하다. AI 기술, 기계 번역이 산업을 넘어 사회 전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가 빠지지 않고 포함된다. “번역가는 정말 없어지고 말까요?” 원로 번역가인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를 만나 물었다. 어쩌면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뗐다. “기계 번역은 문법 구조가 복잡하거나 상황과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문장, 중의적 표현이나 문장, 신조어나 고유명사 같은 낱말을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문학 번역에서는 더더욱 사람을 능가할 수 없죠.” 김 교수는 기계 번역의 한계를 증명한 사례로 2017년 열린 인공지능 번역기와 인간 번역가들 간의 대결을 꼽았다. 구글, 파파고, 시스트란은 ‘The dog was rude to the blanket’(강아지가 담요에 실례를 했다)이라는 문장을 ‘강아지가 이불에 예의가 없었다’고 바꿨다. 번역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일어나는 결과다. “가령 구글로 ‘나 말리지 마’라는 문장을 영어 번역하면 어처구니없이 ‘Don´t dry me’가 나와요. 옷을 말리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고유명사는 이보다 더 심각해요. 경남 진주를 입력하면 ‘Gyeongnam Pearl’로 나오기도 해요. 바다의 보석 진주라니, 황당하죠.”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가 번역한 작품이 처음 활자로 찍혀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이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미국 소설가 맥스 슐먼의 단편소설 ‘사랑은 오류’를 번역해 교내 잡지에 실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호루라기’에 관한 일화를 번역해 당시 월간 교양 잡지 ‘샘터’에 싣기도 했다. 어린 시절 프랭클린이 호루라기를 실제 값보다 네 배나 비싸게 샀던 일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이때까지도 그는 영문학자가 되려 했으나, 부실하게 중역한 작품을 새롭게 바꿔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번역가의 길을 택했다. 이제는 번역계에서 이름난 김 교수지만,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과 ‘반역’ 사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단다. 정확한 의미 전달과 동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가독성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번역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드높은 이상일지 몰라도 번역가는 ‘차선’을 향해야 합니다. 번역가는 육지와 육지 사이에 가로놓인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없다면 한 육지에 머물 수밖에 없듯이 번역가가 없다면 한 나라의 문학은 민족 문학의 울타리에 갇혀 있게 되겠죠. 우리가 침묵하며 변방에 살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사는 건 다름 아닌 번역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시대의 감수성을 옮기다 그는 번역에도 ‘소비기한’이 있다고 말한다. 번역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받기 때문에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은 기존의 번역을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한 시대에 좋은 번역으로 평가받던 작품도 다른 시대에서는 그러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별에 관한 번역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냥 ‘교사’, ‘검사’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여교사’, ‘여검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죠. 과거에는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히 많아 생겨난 단어라고 해도, 현재는 그 비율이 뒤집어져 ‘남교사’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여교사’라는 말이 여전히 자연스레 쓰이는 걸 보면 그만큼 언어에 남성 중심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어요. 시대를 거듭할수록 독자의 감수성도 바뀌니, 번역가들도 능동적인 태도를 취해야죠.” 책은 독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은퇴 후에도 김 교수는 독자에게 긍정적인 흔적을 남기고자 매일 개인 사무실에 나가 번역과 저술 작업을 하고 책을 읽는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거르지 않는다. 번역가는 낱말의 넓이를 키우고 깊이를 더해야 하며, 언어 감각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폭넓은 독서만큼 다양한 낱말을 익힐 방법은 없습니다. 대신 책의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한 번쯤 저자의 의견을 의심하며 비판적 사고를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한 권이라도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다 보면 깨닫는 것이 참 많죠. 지금까지 해온 만큼 앞으로도 오래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
- 2023-03-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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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생활 즐기기 좋은 날씨” 9월 문화소식
- ●Exhibition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 결정적 순간 일정 10월 2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세기 사진 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 발행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오리지널 프린트, 1952년 프랑스어 및 영어 초판본, 출판 당시 편집자 및 예술가들과 카르티에 브레송이 주고받은 서신을 비롯해 작가의 생전 인터뷰, 라이카 카메라를 포함하는 컬렉션을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집 ‘결정적 순간’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앙리 마티스가 직접 쓰고 그려준 제목과 커버로 장식됐다. 책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이 1932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인도,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촬영한 경이로운 삶의 순간들이 담겼다. 마하트마 간디 장례식,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 독일 데사우 나치 강제수용소 등 역사적 순간과 현장도 생생하게 녹아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사진에 담백한 시선을 담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글이 포인트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사진작가들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을 만큼, ‘결정적 순간’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사진작가들에게 큰 파급력을 불러온 책이다. 이번 전시는 책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찬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카르티에 브레송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전통예술에서 부채는 판소리뿐 아니라 한량춤, 부채산조, 부채춤 등의 전통춤과 줄타기, 탈춤, 굿 등 연희에서도 필수적으로 활용하는 소품이다. 국립국악원은 전통예술 명인·명창 58명의 부채 80여 점을 수집해 기획전을 열었다. 명인·명창의 부채를 통해 그들의 삶과 열정 또한 엿볼 수 있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의 100년 넘은 부채, 신영희 명창이 소리 인생 70년간 사용한 부채 중 닳아 사용할 수 없는 부채 24점을 모아 만든 8폭 병풍 등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전시명의 붓글씨는 한글 서예가로도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이 직접 썼다. ●Book ◇여성 50대를 위한 100세 시대 인간관계(오노데라 아쓰코·문학사상) “중년 여성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부모나 남편, 자녀 등 가족과의 관계가 그 선택을 좌우한다.” 책 ‘여성 50대를 위한 100세 시대 인간관계’는 50대를 중심으로 중년이라 일컬어지는 그 전후의 40대, 60대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여성 심리학자인 저자는 중년 여성의 인간관계와 앞으로의 삶의 방식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책의 부제는 ‘인간관계는 왜 이 나이가 되어서도 힘들기만 할까?’이다. 50대가 되면 인간관계로 고민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골치 아픈 일이 많다. 중년 여성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부모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 직장 내 인간관계, 친구 관계 등에서 다양한 문제가 존재한다. 저자는 인간관계 문제를 겪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명쾌한 해결법을 제시한다. 더불어 인생 후반부를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얘기한다. 저자 오노데라 아쓰코는 현재 메지로대학 인간학부 심리카운슬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발달심리학, 인격심리학이다. 저서로는 ‘비기너 심리학’, ‘아동발달과 아버지의 역할’ 등이 있다. ◇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정인호·센시오)- 저자는 “부자가 되려면 금리, 환율보다 사람들의 행동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자는 어떤 심리를 가졌는지, 어떻게 사람들의 심리를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지 소개한다.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폴 김, 김인종·마름모) 25년간 정신질환자 가족을 돌보고 있는 폴 김과 저널리스트 김인종이 함께 썼다. 책은 정신질환을 의학적·사회적인 관점과 영적·심리적인 관점에서 균형 있게 들여다본다.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이에게 도움을 준다. ◇고양이의 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강은영·좋은생각) 인스타그램 팔로워 10만 명에 달하는 ‘모리’ 강은영의 첫 번째 그림 에세이다. 저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업무 시간이 줄어 ‘1일 1고양이’ 그리기를 시작했고,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 과정을 그림과 글에 고스란히 담아 행복 에너지를 전한다. ●Stage ◇아트(ART) 일정 9월 17일 ~ 12월 11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1관 연출 성종완 출연 이순재, 노주현, 백일섭, 박은석, 조풍래, 최재웅, 최영준, 김도빈, 박영수, 박정복 등 블랙 코미디 연극 ‘아트’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이다. 세 남자의 오랜 우정이 그림 한 점을 계기로 드러난 허영과 오만에 의해 얼마나 쉽게 깨지고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일상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현재까지 15개 언어로 번역돼 35개국에서 공연했고, 몰리에르 어워드,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토니 어워드 등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니어 버전’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원로배우 이순재, 노주현, 백일섭이 새롭게 캐스팅됐으며, 최정상 배우들이 총출동해 기대를 모은다. 이순재, 박은석, 조풍래는 지적이며 고전을 좋아하는 항공 엔지니어 ‘마크’ 역을 연기한다. 예술에 관심 많은 피부과 의사 ‘세르주’ 역은 노주현, 최재웅, 최영준, 김도빈이 맡는다. 우유부단한 사고방식의 문구 영업사원 ‘이반’ 역에는 백일섭, 박영수, 박정복이 캐스팅됐다. ◇삼총사 일정 9월 16일 ~ 11월 6일 장소 유니버설아트센터 연출 유병은 출연 신성우, 이건명, 김형균, 김준현, 김신의, 김현수, 김법래, 장대웅, 정욱진, 최민우, 렌, 라키, 경윤, 민규 등 뮤지컬 ‘삼총사’가 2018년 10주년 공연 이후 4년 만에 돌아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삼총사’는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왕실 총사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 달타냥과 삼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가 루이 13세를 둘러싼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다. 국내 초연부터 출연한 배우 신성우와 함께 이건명, 김형균은 삼총사의 리더 아토스 역을 연기한다. 김준현, 김신의, 김현수는 로맨티스트 아라미스로 무대에 오르고, 김법래와 장대웅은 화끈한 바다 사나이 포르토스 역을 연기한다. 정욱진, 최민우, 렌, 라키, 경윤, 민규 등은 돈키호테 같은 성격의 쾌남 달타냥 역을 맡았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일정 8월 30일 ~ 11월 6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김동연 출연 임창정, 정성화, 양준모, 신영숙, 박혜나, 김다현, 김산호, 하은섬, 박준면, 임기홍 등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코믹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번 국내 초연은 전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이다. 이혼으로 양육권을 잃은 다니엘이 백발의 가정부 할머니 다웃파이어로 변장해 아이들을 돌보는 도우미로 취직하는 내용을 담았다. 故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다웃파이어 역에는 임창정, 정성화, 양준모가 캐스팅됐다. 특히 이 작품으로 10년 만에 뮤지컬에 복귀하는 임창정은 “다섯 아이의 아빠로서 가족의 정과 사랑을 듬뿍 담은 다웃파이어를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2-09-0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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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말, 영화(映畵)로운 도시 군산 여행 어때요?
-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는 애잔해도 때로 설렘을 던진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선 상상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扮)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울림이 남는 종소리처럼 여운이 길다. 때론 소리나 냄새로 또는 순간의 풍경으로 기억하는 여행이 있다. 군산은 영화 한 편만으로도 가능하다. 기억 속의 나만의 풍경이나 대사 몇 줄로도 군산을 떠올리게 하는 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 사진관은 군산 월명동의 어느 골목에 찰떡처럼 잘 어울리게 자리 잡았다. 그곳이 영화 속 정원과 다림(심은하 扮)이 정말 일상생활을 했던 곳인 양 착각하게 한다. 1998년의 영화였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제는 고전 명작이라 할 때가 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감정선을 조용히 담아낸 세련됨이 보는 이에겐 그저 잔잔하다. 어느 TV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어쩜 20년 전인데도 촌스러움이 1도 없어요” 란 말을 했던 이가 있었다. 드라마틱했을 사랑과 죽음을 다루었음에도 아릿하지만 도무지 신파스럽지 않다. 군산엘 가면 나만의 보폭으로 나만의 영화적 감성으로 그 골목을 산책하듯 정원과 다림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일 수 있다. 초원사진관은 여전히 소박하다. 영화 속에서도 수수해 보이지만 그 모습이 푸근하고 친근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진은 기획 당시 세트 촬영을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가 군산의 한 카페에 쉬러 들어갔다가 창 밖으로 내려다본 곳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것이다. 주인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개조하여 초원사진관이 되었고 영화 대부분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다시 영화 배경 속 모습으로 복원하는 탁월한 선택 덕분에 영화로운 군산을 찾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IMG::CENTER] 영화 속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환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다. 일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듯 주춤주춤 다가가게 된다. 스튜디오에는 8월의 더위에 지친 심은하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던 선풍기, 문틈으로 끼우던 편지, 영화 속의 스틸컷이 스토리 섹션별로 벽면에 그대로 붙어있고 심은하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 심은하처럼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잇는다. 사진관 주변으로 정원이 타던 스쿠터와 주차요원이던 다림의 근무용 소형차 티코, 심은하가 한석규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통과했던 해망굴,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을 하곤 했다.” 망연히 앉아 독백하던 초등학교 운동장, 삶이 다해 가는 정원이 창문 넘어 어렴풋이 다림을 바라보는 텅 빈 감성의 섬세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이 초원사진관 주변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자취를 따라 걸어볼 만하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이후 군산이 배경이 된 영화나 드라마가 늘어났다.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 말죽거리 잔혹사, 마더, 화려한 휴가, 마파도, 변호인, 남자가 사랑할 때. 시네마 투어를 떠나도 좋을 군산이다. 군산을 걷다 볼거리가 대부분 가까운 근처에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는 여행이 가능한 군산이다. SNS 명소인 경암동 철길마을은 조금 멀리 있으니 택시 이용이 좋겠다.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오감 만족의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지방 도시에서 보내는 하루는 여유롭다. 초원사진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 강점기에 유명한 포목상이던 일본인 히로쓰가 살던 목조 주택이다. 당시 호남지역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여서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빨간 담장 안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단정하다. 일본식 고급 주택 양식의 전통 가옥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와 같은 영화가 촬영되었다. 쭉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시는 분이 뒤편 뜰의 복(福)이라는 글자를 알려준다. 안으로 들고나는 뜰 바닥에 복(福) 자가 쓰였는데 복이라는 글자를 밟고 들어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신흥동 일본식 주택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있다. 그리고 부근에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금융시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금고 속 조선은행 이야기를 읽으며 분노가 치민다. 수탈의 잔혹사가 전해진다. 군산 근대건축관,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내항의 일명 뜬 다리 부잔교, 다다미룸 미즈 커피, 장미갤러리 근대미술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왼쪽으로 구 군산세관에서 거두어들이던 세금은 또 어땠을까. 지금 보아도 우리 민족의 고통이 피부로 느껴지는데 그 시절엔 얼마나 치를 떨었을지 짐작해 본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1908년에 지어진 옛 군산세관 창고가 정담(情談)이라는 인문학 창고로 재탄생되었다. 꽉 찬 서고의 든든함과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놀이문화가 명물이 된 오래된 창고에서 기다린다. 정담 앞의 잔디밭과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곳에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다는 커피 한잔의 휴식을 누려볼 일. 군산은 거리 곳곳의 표지판이 온통 근대 역사와 관련된 흔적과 문화들로 새겨진 도시다. 마침 이런 발자취를 따라 맘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가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는 걷기에 따라 약 2~3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니다 보면 스탬프 투어를 코스대로 관람하는 여행자들을 자주 본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스탬프 도장을 찍어가며 생기발랄한 촬영을 하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풋풋하다. 혹시 도보로만 다니기에 심심하다면 군산시에서 마련한 공용자전거 대여가 있다. 바람을 맞으며 달려보는 군산 거리도 즐거운 일이다. 이 밖에도 볼거리는 지천이지만 군산 여행도 식후경이다. 단팥빵 사러 이성당 빵집을 들러야 하고 짬뽕도 먹어야 한다. 탁류 길의 군산 짬뽕 특화 거리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인 빈해원이 있다. 실내는 흡사 홍콩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다. 요즘 멋지게 꾸며놓은 ‘신상’ 명소와 달리 오래된 집이 주는 깊이는 확실히 다르다. 이 또한 근대문화 거리 근처에 있으니 금방 찾아갈 수 있다. 귀갓길엔 금강 변에 정박한 배의 모양을 한 채만식 문학관에 들러볼 일. 풍자적 글쓰기로 근대문학을 일군 탁류(濁流)의 채만식 문학관은 작가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 코너에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나열되어 있고 '풍자적 작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료도 볼 수 있었다. 친일 활동에 참여한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철저히 반성하는 자의식은 의미 있다. 금강 들판이 내다보이는 문학관 광장을 나와 금강 갑문을 지나며 영화로운 군산 여행의 마무리를 한다. 군산 당일 여행 자동차: 서울 시준 약 두 시간 반 내외 기차: 군산역이 외곽에 있으므로 기차를 탈 경우 KTX 익산역 하차 후 군산행 시외버스가 용이함. 약 두 시간 강남고속터미널: 군산 약 2시간 30분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2길 12-1 초원사진관
- 2022-03-2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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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정동환의 지치지 않는 열정 “6시간 동안 1인 5역 소화”
-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다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친부 살인’을 소재로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탐구해왔던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녹여낸 작품이다. 2017년 초연 당시 고전의 무대화에 이상적인 표본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는 배우 정동환이 지난 공연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오른다. 6시간 동안 1인 5역을 소화하며 50년이 넘는 배우 인생의 끝없는 열정을 보여줄 배우 정동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선택한 이유는? 2017년 초연을 함께했어요. 그때 ‘아, 이게 연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50년 가까이 무대에서 연기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연극의 본질을 그 당시 7시간 공연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빨라지고 쉬워지는 세상에서 연극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인문학적 예술관이 가능한 장르라는 본질이죠. 그래서 나진환 연출이 재공연을 한다고 했을 때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진환 연출을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감탄할 때가 많을 정도로, 추구하는 인문학적 연극 세계가 아주 의미 있습니다. 그의 연극론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함께 치열하게 연극하고 싶어요. 1인 5역을 맡으셨는데, 이에 대해 설명한다면? 맡은 5개 역할은 도스토옙스키, 조시마 장로, 대심문관, 식객, 변호사입니다. 이들은 극의 화자이기도 하고, 상상의 인물이기도 하고, 극의 배경이 되는 마을의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죠. 각 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관객들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어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극의 중간중간에 나타나서 인물의 내면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연습 과정에서 어려움은? 이번에 제 대사가 더 늘어났다는 것이죠. 배우는 공연이 끝나면 다 잊어버려야 새로운 걸 채울 수 있어요. 그래서 초연 때 아무리 외웠어도 재공연을 하면 다시 새롭게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어난 대사량이 쉽지 않네요. 하지만 대사를 곱씹을수록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한 통찰력에 놀라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느꼈으면 하는 바는? 1부 3시간, 2부 3시간. 이렇게 시간만 생각하면 관람이 엄두가 안 나실 수 있어요. 요즘같이 바쁜 시대에 극장에서 6시간이라니 걱정이 되기도 하겠죠. 하지만 모든 것이 변화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끝나지 않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나란 존재, 인간이란 존재, 사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하신 분들은 극장을 찾아주세요. 그 답을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연극은 원작이 가지는 인문학적 힘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현대적인 연극 언어로 표현되어, 오늘날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 문제에 대한 예술적인 무대를 선사할 것입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연습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인상적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이렇게 연극을 준비하고 관객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작품 활동 계획은? 50년이 넘게 배우생활을 했지만 저는 제 생의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올해 유독 공연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내년에도 좋은 작품으로 관객과 함께하겠습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일정 10월 12일~10월 31일 장소 이해랑예술극장 연출 나진환 출연 정동환, 한윤춘, 정수영, 주영호, 박결이, 이기복 등
- 2021-10-2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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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기운과 함께 찾아온 6월의 문화 소식
- ● Exhibition ◇라이프 사진전 : 더 라스트 프린트 일정 5월 11일~8월 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상징인 ‘라이프’ 사진전이 4년 만에 돌아온다. 1936년 창간된 ‘라이프’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 곳곳에 뛰어들었고, 찰나의 순간을 역사로 만들어내며 세상을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바꾼 전설적인 사진 잡지다. 전성기 시절 총 1350만 부가량 발행하고 정기 구독자 수가 800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전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피, 땀, 눈물을 담은 이번 전시는 2013년 ‘하나의 역사, 70억의 기억’과 2017년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기 위하여’에 이은 마지막 시리즈로 3부작의 서사를 마침내 완성한다. 지난 두 번의 전시가 격동의 시대와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됐다면, 이번 전시는 우리 삶에 보다 가까운 일상을 포착한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선동하거나 미래를 자극하기보다, 혼란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에 맞설 여유와 원동력을 선사한다. 1000만 장의 방대한 사진 자료 가운데 엄선한 100장의 작품과 더불어 ‘라이프’와 함께한 사진가 8명을 조명해, 프레임 저 너머 그들이 추구한 가치를 이야기한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일정 5월 1일~8월 29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탄생 14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파리국립피카소미술관의 소장품 110여 점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70년에 걸친 피카소의 예술 인생을 살펴보고,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미술사에 혁명을 일으킨 입체주의 작품부터 신고전주의 화풍의 회화, 조각, 도자기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광범위하게 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국내 최초로 감상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전쟁의 잔혹성을 예술로써 고발한 이 작품은 ‘게르니카’, ‘시체구덩이’와 함께 피카소의 반전 예술 3대 걸작이라 불린다. 입체주의 시대를 함께한 페르낭드 올리비에, 피카소가 가장 사랑한 여인 마리 테레즈,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자클린 로크 등 그의 뮤즈를 그린 그림도 전시의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다. 총 7섹션으로 나눈 연대기적 구성을 통해 피카소의 전 생애를 탐험하는 듯한 신비롭고 생생한 시간을 선사한다. ● Book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 (김두엽 저·북로그컴퍼니) 미국에 ‘모지스 할머니’, 영국에 ‘로즈 와일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 할머니가 있다. 83세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 어느덧 12년 차 화가로 활동 중인 94세 김두엽 할머니다. 그녀의 소소하고 따뜻한 인생 이야기가 최근 110여 점의 작품과 함께 한 권의 그림 에세이로 탄생했다. 늦깎이 화가를 결심한 사연부터 아들, 며느리, 강아지와 함께하는 일상, 그리고 지난 90년 인생에 대한 반추가 알차게 담겨 있다. 김두엽 할머니의 인생은 그야말로 굴곡진 언덕길 같다.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에 가족과 귀국하고, 우리말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해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80세가 넘도록 나물 장사, 세탁소 운영 등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며 고된 나날을 보냈다. 힘들었던 삶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건만, 할머니가 그린 그림은 지난한 인생과 달리 화사하고 포근하다. 로즈 와일리의 화풍처럼 때로는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모지스 할머니처럼 일상 속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 그림을 보고 있자면, 아픈 날마저 고운 색으로 추억하고 아름다운 것만 눈에 담고자 했던 그녀만의 강인한 의지와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책은 83세에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딘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8세 일본에서 만난 첫사랑과 눈물겨운 시집살이,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는 오늘날의 일상까지 그녀의 삶 면면을 모두 담아낸다. 그 한 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훑고 나면, 영화 같은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힘들어도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할머니의 염원이 아주 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고독사를 피하는 법 (리처드 로퍼 저·민음사) 장례업에 종사하는 앤드루가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고독사를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 특유의 유쾌한 문체로 ‘관계 맺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살집팔집 (고종완 저·다산북스) 시니어가 만나고 싶은 인물 1위에 오른 저자가 아파트 매매의 ‘A to Z’를 말한다. 핵심 이론부터 전국 아파트 단지의 가치 분석, 슈퍼 아파트 목록까지, 뜨는 부동산 이슈를 총망라한다. ◇사라진 서울을 걷다 (함성호 저·페이퍼로드) 건축 평론가이자 시인인 저자의 서울 예찬기. 문학과 시, 역사 속에 그려진 서울로 그때 그 시절을 반추하는가 하면, 저자만의 시선으로 동네 곳곳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한다. ● Stage ◇레드북 일정 6월 4일~8월 22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박소영 출연 차지연, 아이비, 김세정, 송원근, 서경수, 김인성 등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독특한 여인이 있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문제는 이 여인이 신사의 나라 영국, 가장 보수적인 시기 빅토리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도 개의치 않고 뛰어난 상상력과 글재주로 외설적인 이야기가 가득 담긴 ‘레드북’을 출간한 그녀는 당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신성 모독죄로 법정에 서게 된다. 뮤지컬 ‘레드북’의 내용이다. ‘레드북’은 미래를 꿈꾸는 여성 안나와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이 잡지 ‘레드북’ 출간 후 벌어지는 사회적 파장과 그로 인한 편견에 맞서나가는 이야기다.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대, 갖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껏 욕망하고 표현하는 안나의 진취적인 모습이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주인공 안나 역으로 차지연, 아이비, 뉴 페이스 김세정까지 합류해 3인 3색의 매력으로 무대를 뜨겁게 달굴 예정이다. ◇완벽한 타인 일정 5월 18일~8월 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대극장 연출 민준호 출연 유연, 양경원, 유지연, 김재범, 박소진, 이시언 등 2018년 국내 개봉한 영화 ‘완벽한 타인’이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7명의 주인공이 저녁 식사 도중 서로의 휴대전화 알림을 모두 공개하는 게임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의 치밀한 심리전과 게임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비밀,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무대 위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로 극대화되며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1976 할란카운티 일정 5월 28일~7월 4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유병은 출연 오종혁, 이홍기, 산들, 김륜호, 안세하 등 1976년 미국 켄터키주 광산회사의 횡포에 맞선 노동자들의 함성과 투쟁을 그린다. 흑인 라일리의 자유를 위해 함께 뉴욕으로 떠나는 다니엘의 여정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광부들의 희망의 노래가 감동을 전한다. 배우와 무술감독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유병은 연출가와 젊은 창작진의 열정적인 협업으로 창작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인 스케일을 선보인다. ※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 2021-06-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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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로 떠나는 고전문학 여행
- 고전의 매력은 같은 작품을 연극, 뮤지컬 등 여러 방식으로 접하며 다양한 갈래로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특히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상상하며 읽어나가던 고전 소설의 주인공들을 생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만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영화로 재탄생한 세기의 고전 명작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제인 에어 (Jane Eyre, 2011) 고전문학을 이야기할 때 문학계의 거장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를 빼놓을 수 없다. 무성 영화 시절부터 현재까지 19세기에 쓰인 소설 중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품으로, 무려 20여 번이 넘게 재해석되었다. 조안 폰테인, 샬롯 갱스부르 등 당대 유명 여배우들이 ‘제인 에어’를 거쳐 갔으며, 그중에서도 2011년 개봉한 캐리 후쿠나 감독의 작품이 비평가들 사이 원작을 가장 잘 각색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내용은 언뜻 보면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와 비슷하다. 19세기 귀족 사회에서 고아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란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부임하고, 저택의 주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다만 제인 에어는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아닌 시대를 앞서가는 신여성의 모습에 가깝다. 불우한 환경을 탓하는 대신 자신의 힘으로 직업을 구해 자아실현을 하며, 사랑하는 남자에게 달려가 마음을 고백한다. 영화는 이 같은 제인 에어의 주체적인 삶을 한 폭의 유화처럼 서정적이고 잔잔하게 그려낸다. 몽환적인 영상미와 빅토리아 시대를 나타내는 소품, 의상 등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2.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2012)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안나 카레니나’도 지금껏 여러 차례 영화화되며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받았다. 1935년 그레타 가르보, 1948년 비비안 리, 1997년 소피 마르소 등의 버전이 대표적이다. 줄거리는 원작과 같다. 중년의 정치가 남편과 결혼한 안나 카레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눈이 맞아 금단의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21세기에 재탄생한 안나 카레니나도 원작과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보다 과감한 연출로 차별화를 더했다. 오프닝 장면부터 한 편의 공연이 시작되는 것처럼 빨간 커튼을 들어 올린 뒤 그 안에서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 뒤에도 세트장을 활용해 장면을 부드럽게 전환한다. 그 덕에 보는 이들은 연극의 관객이 된 듯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집중하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저 그런 치정극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극히 보수적이었던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전통과 규범 대신 사랑과 욕망을 택한 안나 카레니나의 삶이 그 자체로 놀랍게 다가온다. 조 라이트 감독의 말 그대로 ‘극적인’ 연출과 키이라 나이틀리의 매혹적인 연기가 몰입도를 더한다. 3. 오만과 편견 (Pride & Prejudice, 2005)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읽은 이들은 다아시가 고전문학 사상 손꼽힐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1995년과 2005년, 작품이 각각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진 후부터는 어떤 다아시가 더욱 매력적인 지에 대해 팽팽한 설전이 벌어진다. BBC 드라마 주인공이었던 콜린 퍼스와 영화에서 다아시를 맡은 매튜 맥퍼딘 모두 활자로 묘사된 다아시의 오만함을 완벽하게 재현해냈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은 18세기 영국 사교 파티에서 만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첫눈에 반하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로 다가서지 못하고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는 내용이다. 재해석된 작품들은 모두 원작을 기반으로 하되 드라마는 인물들의 감정을 긴 호흡으로, 영화는 압축적이지만 강렬하게 그려낸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남녀 간 사랑이 시작될 때의 감정을 무도회 장면으로 간결하게 담아내면서도, 성적인 긴장감은 증폭시킨다. 콜린 퍼스와 매튜 맥퍼딘 중 어떤 이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누구든 잠들어 있던 연애 세포를 깨워줄 것임은 분명하다. 콜린 퍼스 버전의 ‘오만과 편견’은 왓차에서 감상할 수 있다.
- 2021-05-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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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화 ‘어부 아내의 꿈’은 남자의 성적 판타지
- 최근 인문학이 대세다.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따라서 유행이다. 그런데 성만 한 인문학이 또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고, 사랑을 나누고, 종족을 남기고, 늙고 죽어가는 이야기는 다 성에 있다. 성을 한자로는 ‘性’이라 표기하는데 어찌 이렇게 적확한 표현을 찾았는지 놀랍기까지 하다. 성은 그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배정원의 성 인문학’은 역사, 예술, 사회 등 사람이 만들어가는 문화 속에서 성을 재미있게 풀어볼 것이다. 다시 춘화! 이번엔 일본 춘화다. 일본의 춘화는 유교적 영향으로 성을 은밀하고 숨겨야 할 것으로 대하던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성을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것으로 마주하는 성 문화가 반영되어 만화처럼 가볍고 웃음 나오게 하는 것이 많다. 또한 채색이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인물 묘사, 성기 페티시즘이라 할 만큼 과장해서 그린 커다란 성기, 화려한 의상과 가구 등이 특색이다. 서구에서 ‘슝가’(Shunga)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일본 춘화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파리박람회에 출품한 일본 도자기를 싼 포장지에 그려져 있던 춘화는 19세기의 모네, 마네,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강한 예술적 충격을 주었고, 이들은 일본 춘화를 보며 동양의 신비한 성 문화를 동경했다. 이 그림은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의 작품으로, 그가 그린 춘화(春畵) 중 가장 유명한 ‘어부 아내의 꿈’이다. 가츠시카는 일본의 일러스트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붉은 후지산’, ‘번개를 동반한 뇌우 속의 후지산’,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등으로 세계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일본 풍속화 작가다. ‘어부 아내의 꿈’의 에로틱함과 음란함은 세계적으로 이미 인정받았다. 미국 뉴스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에로틱한 고전미술품’으로 선정했으며,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은 이 그림을 특별 전시한 바 있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어부 남편이 바다에 일을 나간 지 오래되자 성적인 허기를 느끼던 어부 아내가 하루 일과에 지쳐 잠을 자다 꿈에서 문어에게 강간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는 단순한 논평부터, 어부 아내에게 가장 공포의 대상인 바다(문어)에게 강간을 당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황홀의 경지로 들어가 화합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자못 성 심리적인 해석도 있다. 또한 이 그림은 수간(동물과의 섹스)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면서, 일본에서 유독 인기를 끌고 있는 ‘촉수성애물’(Tentacle Erotica)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촉수성애물은 특히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 그러나 하나뿐인 인간 남자의 성기로는 불가능한 행위를 여러 개의 촉수를 이용해 여체를 감싸거나 애무하고, 심지어 여체의 항문과 질과 입을 통해 관통하기도 하는 사드마조히즘(SM)의 가학적인 면을 강조해 차용한 음란물이다. 그림 속에서 거대한 왕문어는 굵고 긴 다리로 여인을 삼킬 듯이 온통 감싸고 있다. 문어의 여덟 개 촉수는 여인의 하얗고 풍만한 몸을 끌어안듯 칭칭 감은 채 끈적하게 천천히 움직인다. 문어의 습격(?)이라지만, 그림을 조금만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문어 다리의 위치가 심상치 않다. 문어 다리는 여자의 동그란 어깨와 양팔, 다리를 감싸 잡고, 예민한 성기 부분을 애무하면서 입으로는 여자의 외음부를 애무하고 있다. 문어가 여자를 곧 잡아먹을 것 같지는 않고 희롱을 실컷 한 후에나 생각해보려는가? 그런데 그림의 분위기는 불안하고 공포스럽다기보다 오히려 눈을 꼭 감은 여자의 벌린 입에서 황홀한 신음소리가 감미롭게 나오고 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문어는 한 마리가 아니다. 작은 녀석 한 마리가 여자의 머리와 목을 스멀스멀 감싸 안고, 다리 하나로는 여자의 하얀 젖가슴 위 유두를 애무하면서 다른 다리를 여자의 입안에 넣고 있다. 수간에 스리섬?! 여자의 자세 또한 강간을 당하는 자세라기보다는 다리를 벌리고 문어의 오럴섹스를 즐기는 것만 같은데 그녀가 분명하게 성적 황홀경을 느끼고 있다는 증표는 하얀 가슴 위에 딱딱하게 봉긋 선 젖꼭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문어의 굵고 가는 다리들은 살아 있는 것이니, 계속 꿈틀대며 하얗고 부드러운 살갗을 애무하듯 쓰다듬을 것이다. 문어의 동그란 두 눈은 위협적이라기보다 애교를 부리는 듯하다. “나 잘하고 있지?”라고 묻는 것일까? ‘어부 아내의 꿈’은 꿈속 장면이지만 폭력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황홀한 정사를 즐기고 있다. 바닷가의 바위틈에서 거대 문어에게 포획되어 섹스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분명 즐기고 있다. 성기를 얼굴 크기만 하게 그리는 게 일본 춘화의 특색인데, 커다란 그녀의 성기를 애무하는 문어의 오럴섹스는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다. 여자는 눈을 감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몸의 모든 예민한 부분에 끈적한 애무를 받고 나른하게 늘어져 절정에 오른 모습이라 그야말로 에로틱하다. 실제로 이 춘화의 배경에 쓰인 글(가키이레)은 문어 머리에서 윗부분에 걸쳐 거의 의태어와 섹스 중에 나는 신음소리로 채워져 있고, 그 안에서 심지어 여자는 문어를 ‘얄미운 분’이라고 부르고 있다니, 여자는 분명 ‘작은 죽음’(Petite Mort, 프랑스에서는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 표현하기도 한다)을 겪는 중이겠다. 성 전문가의 시점에서 본 이 그림은 여자의 끈적한 성몽이라기보다는, 여자를 만족시키는 섹스에서 더한 오르가슴과 능력을 확인하는 남자의 성적 판타지를 간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여덟 개의 굵고 가는 촉수로 여체를 휘감아 성감대를 모조리 자극하면서 여자를 그야말로 실신 상태의 오르가슴으로 몰아가는, 환상적이고 주도적인 섹스를 상상하는 그 남자, 가츠시카는 분명 여자의 섹스를 아주 잘 아는 경험 많은 남자다. 여자의 오르가슴은 동시다발적인 애무가 필요하다. 아마 남자들은 파트너를 열심히 애무하다 거친 신음소리에 성기를 삽입하려고 상대의 몸에서 손이나 입을 떼는 찰나 식어버리는 냉정한 오르가슴을 마주할 때의 무력함을 기억할 것이다. 터치와 입맞춤에서 잠시 놓여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지는 여자의 오르가슴! 남자들은 그야말로 문어처럼 여러 개의 손, 그것도 빨판이 붙은 촉수의 다리가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팔이 모자라 슬픈 동물, 섹스에서 권력을 확인하고 싶은 약한 그대는 남자!
- 2021-03-11 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