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구에 위치한 ‘충장로’는 옛 모습을 간직한 보기 드문 상권이다. 현대적으로 개발된 신도시가 각광받는 요즘, 충장로는 쇠퇴한 도심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광주 시내’ 하면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충장로. 이곳에는 86년간 자리를 지킨 ‘광주극장’이 있다. 고화질 사진 대신 손그림 영화 포스터, 키오스크 대신 사람이 발권하는 매표소, 거대한 필름 영사기와 빨간색 벨벳 의자까지. 광주극장의 곳곳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자 예술영화전용관인 이곳 광주극장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독점한 지역 문화계 상황에 맞서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 운영된 호남 지역 최초의 극장이다. 광주극장이 개관한 1935년 10월 1일은 광주의 인구가 10만 명이 넘어 광주읍에서 광주시로 승격한 날이기도 하다.
광주의 빛과 그림자를 동행해온 단관극장
그만큼 많은 광주시민의 축하 속에서 개관했으며, 광주의 성장과 민족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25년째 광주극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형수 이사는 “1930년대를 생각해보면 1250명 수용 규모의 극장 건물을 조선인이 세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냐”라며 “당시 광주극장은 광주의 랜드마크였다”라고 설명했다.
일본인이 설립한 극장들은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것에 반해, 광주극장은 조선인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당시 극장 외에 시민회관이나 공연장 등 문화를 향유할 공간이 없어 지역의 모든 문화행사는 광주극장에서 진행됐다. 영화는 물론이고 한국 고유의 창극, 국극 등의 공연을 비롯해 판소리, 연주회, 그리고 예술대학의 졸업발표회까지 이곳에서 열리며 광주 지역의 다채로운 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이외에도 일본인의 눈을 피해 조선인들끼리 응집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목적으로 집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메달을 따온 선수들의 환영회도 암암리에 진행됐고, 해방되던 해에는 해방 축하대공연도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김 이사는 “광주극장의 역사를 들어보면 극장이란 공간이 참 다이내믹하다”라며 “한 편의 영화와 같이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극장이다”라고 설명했다.
1968년 1월 큰 화재로 건물 전체가 전소되면서 광주극장은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TV가 보급되던 1960년대 후반, 극장 산업이 크게 주춤했던 터라 극장을 접으라는 주위의 만류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 광주극장을 운영하던 설립자의 아들 최동복 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저버릴 수 없다며 극장을 개축해 같은 해 10월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다. 외관은 달라졌지만 더 튼튼한 건물을 세울 수 있었고, 1935년에 새긴 석각은 다행히 화재를 면해 건물 상단에 다시 세웠다. 이 석각은 광주극장의 상징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 5월엔 광주의 아픔도 함께했다. 광주시민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무차별 폭격을 피해 광주극장으로 숨어들었다. 해방 이후 벌어진 잔인한 사태에 광주극장은 다시 한번 시민들을 보호했다.
독립예술영화로 관객과 호흡
광주와 오랜 역사를 공유하며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 역할을 해오던 광주극장은 2000년대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했다. 기존의 단관극장과 달리 복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고, 첨단 시설로 영화 감상의 질을 제고하는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영화 산업의 성장과 함께 자본에 의해 극장이 운영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단관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고, 잘 만든 한국 영화들이 극장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상영 기간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내려가는 경우도 다수였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광주극장은 2000년부터 광주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화를 골라 심야에 상영하는 ‘레이트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등 뛰어난 작품성에도 주목받지 못한 영화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독립영화의 유통이 어려워진 구조적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는 2003년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을 실시했고, 광주극장은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선정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에서 극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여러 가지다. 김 이사는 “다채로운 영화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독립예술영화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 전부 극장의 역할이다”라며 “광주극장은 대중성은 부족해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극장이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상업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예술영화전용관은 보조금 없이 입장 수익만으로는 극장 유지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광주극장은 관람료도 매우 싼 편이다. 주말이면 1만 원이 훌쩍 넘는 멀티플렉스의 관람료에 비해, 광주극장의 관람료는 주말, 평일, 시간대에 상관없이 8000원이다. 65세 이상 노인은 5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물가가 크게 오른 최근 10년 동안 변동이 없는 가격이다. 관객이 많은 편도 아니다. 하루 관객이 몇 명 정도 되냐는 질문에 김 이사는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가 활개를 치는 코로나 시국에도 극장에 발걸음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라며 “독립예술영화를 통해 시민들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고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광주극장은 이곳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애정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광주극장은 입장 수익과 예술진흥위원회 사업 보조금, 그리고 440여 명의 후원자가 매달 1만 원 이상씩 기부하는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말이다.
상영할 영화가 마땅히 없었던 예술영화전용관 사업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관객들도 다양한 영화를 보고자 하는 니즈가 있어 독립예술영화를 수입하는 배급사, 만드는 제작사도 다양화됐다. 광주극장은 이왕이면 멀티플렉스에서 소외된 영화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매년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영화들이 나오는데 그런 영화들조차 생각보다 접근성 좋게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광주극장은 이렇게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대중성이 떨어지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상영하고 있다.
광주극장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작년부터는 젊은 세대에게 광주극장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기념품을 제작·판매한다. 주로 광주극장에 애정을 가진 광주시민 작가들과 협업하여 광주극장의 역사를 아카이빙하고 옛 디자인을 활용해 스티커, 포스터, 에코백 등 기념품을 만들었다. 광주극장의 오랜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도 판매 중이다. 김 이사는 “극장의 미래를 위해서는 젊은 관객이 필요한데, 기념품은 이들에게 극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극장의 역사가 쌓이니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 정체성을 표출할 수 있어 좋다”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극장 옆 골목을 활용해 문화예술 공간으로서의 정체성도 확장했다. 흉흉했던 골목길에 광주의 극장들과 영화문화사를 볼 수 있는 ‘메모리 월’ 등을 설치해 문화와 역사가 있는 골목길로 탈바꿈하고, ‘영화가 흐르는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골목이 정비되니 인문학 서점, 독립기획자들의 갤러리도 생겨났다. 김 이사는 “젊은 기획자들이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더 특색 있는 문화기획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이런 문화자원들이 몰려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충장로를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곳, 광주극장
한때는 광주의 자랑스러운 랜드마크였던 광주극장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건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가 광주극장의 가치를 알아줄까’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광주시민들의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세월이 긴 만큼 소년·소녀 시절부터 40~50년 동안 광주극장을 애용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단골손님들도 극장을 찾는다. 이들에게 광주극장은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이 충장로 5가를 지키는 반가운 공간이다.
김 이사 역시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시민 중 한 명이다. 그는 사원으로 입사해 이사직에 오르기까지 25년을 광주극장과 함께하고 있다. 그 25년에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며 극장이 위기에 처한 순간부터 예술영화전용관으로서 정체성을 키워오기까지 광주극장의 역사와 그의 청춘이 함께 맞물려 있다. 김 이사는 “일을 하면서 힘들 때는 극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극장에서 상영되는 많은 영화를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내가 느낀 영화의 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라며 살짝 웃었다.
광주극장에 대해 알면 알수록 광주극장이라는 공간과 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 간의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잔잔하게,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극장. 그리고 노후한 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변함없는 애정으로 극장을 찾는 지역시민들. 이들의 호흡이 광주극장에 쌓인 오랜 시간을 함께 지켜가고 있다. 올해 86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에 90주년, 100주년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사유를 함께했던 오랜 벗을 그리워하며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종택 소설가ㆍ고려대 명예교수
한형,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려니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줄을 서누만.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한심한 편인데도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60여 년 전의 자네 주소가 그대로 떠올랐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 12번지. 내가 자네에게 처음 쓴 편지의 지번이지. 우린 그때 중2였고 당시의 학생잡지 지에 다투어가며 소설(콩트)들을 발표했지. 그때 나는 자네의 인가 하는 작품을 읽고 긴 편지를 보냈고. 자네는 그보다 더 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우리는 그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그리거나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외롭고 허기에 찬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한형,
나는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었지 아마. 나는 천안에서 내려오는 자네를 마중하기 위해 옆구리에 이보 안드리치의 (아마 그즈음 노벨상 수상작이었을 거야)를 끼고 광주역 플랫폼에 서 있었지. 최인훈의 에 흥분하고 방 한 칸을 찾아 밤길 헤매는 마렉 플라스코의 의 젊은 애인들을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제는 이 아닌 이나 을 옆구리에 낀 채 담배를 넣고 다니던 오만방자한 고2의 겨울이었지. 진눈깨비 어지럽게 흩날리던 그해 겨울 역 광장에서 우리는 처음 수줍게 악수했고 악수가 끝나자마자 자네는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광주엔 클래식 감상실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충장로의 그 지하다방에서 자네가 리퀘스트 곡으로 써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그때 처음 알았지. 대학생이 되어 종로의 ‘르네상스’를 들락거리면서부터 나도 덩달아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대책 없이 감미롭고 경쾌해지기 시작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대책 없이 무겁고 둔중하게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네. 평생 이어폰을 끼고 지낸 나의 음악 사부인 한형의 후광이었지.
한형,
그리고 그즈음 나와 함께 아파준 한형께 감사하네. 청파동의 어느 대학에 우리들의 ‘그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기숙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하숙집을 함께 옮겨 다녔지. 한쪽이 각혈을 시작하자 의사의 휴학과 별거 권유를 무시한 채 우리는 국 따로 반찬 따로 먹기를 맹세했지만 이내 3개월 간격으로 결핵 감염을 확인했고 주사와 투약으로 병원을 함께 들락거렸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게 편했노라고 자네는 훗날 그때를 회고했고, 문단 데뷔도 못한 주제에 식민지 시대 작가의 폐결핵 동기들 흉내만 냈노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지. 우리가 앓았던 결핵은 그대로 60년대의 절망과 우울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어. 억압과 감시, 수배와 투옥, 휴교와 계엄령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문과대학의 실속 없는 문학청년의 꿈은 서서히 마모되고 스러지기 시작했지. 문청 시절의 자존심이 대학에서 구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고 말았지.
한형,
창작을 접어두고 대학의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우리가 보낸 세월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197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함께 데뷔했고 1980년을 전후해 함께 대학의 교수 자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논문에 각주를 달고 이론서를 꾸려내고 학생들에게 문학론을 강의했지만, 막을 수 없는 허허로움을 어떻게 삭이고 있었는지는 서로가 다 짐작하는 비밀이었지. 화려한 문청 시절은 추억으로 끝나고 동년배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서점가의 중심 코너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안타까움은 엉뚱하게도 강의실에서의 폭언으로 표출되기도 했어. 사실 어느 해 자네가 대학원 강의실에서 퍼부었다는 당시의 어떤 대하소설에 대한 폄하는 좀 심했었네. 자네는 그때 그 소설을 김승옥의 에 빗대면서 그 작품의 반만큼의 감동도 없는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고 당시의 소설을 비난했다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들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가령 어느 소설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고는 나는 짐짓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노라고, 한 권으로 마칠 이야기를 열 권으로 써내는 일은 창작가들이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하다고, 언어의 감각이나 경제성이야말로 서사미학의 종점이라고 갈파(!)했지. 창작보다는 비평에 몰두해버린 우리들의 파행(?)은 그러나 상실감이나 공허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네. 자네가 펴낸 은 서사학계의 쾌거이자 성과였어. 이 책은 서사에 관련한 용어를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형성된 배경과 이론의 전개 과정을 소논문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의 개념들과 그 쟁점들을 아울러 익히게 한 획기적인 책이었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창작과 비평의 어색한 동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정년을 맞았고, 문학은 써내는 즐거움 못지않게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었지.
한형,
자네가 보여준 그동안의 편식과 편애와 편파를 나는 존중하네. 그리고 자네의 폭력마저도. 그것은 자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이념이었어.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 어쭙잖은 선은 차라리 악함만도 못하다 했던가. 자네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기피했고 과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위선을 경멸했었지. 호불호가 분명했고 어떤 제자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은 징그러웠고 그 반대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 했고 60년 지기인 또 하나의 우리의 친구 오탁번은 그러한 자네를 대책 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연코 ‘개성’으로 결론지었다네. 이 편파적인 판정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네. 왜냐면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편식했지만 그 음식은 순정했고 편견은 심했지만 결백했으며 사람을 편애했지만 그들을 감식하지는 않았지. 폭력 교수로 몰아세우는 학생 대표를 폭력으로 제압했던 자네의 80년대식 무용담은 지금 들으면 자네는 운도 많이 따랐었지.
한형,
자네가 중환자실로 옮겨가기 하루 전, 자네는 나에게 “당분간은 죽을 기미가 안 보인다”고 껄껄 웃었고 나는 “그래, 우린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어쩌고 지껄였지. 그것이 자네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네. 자네는 그날 담당 간호사에게 생뚱맞게도 멘델스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지. 잠깐 당황하던 간호사가 이내 그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봄노래를 좋아하노라고 대답해 자네를 감동시켰고, 자네는 이런 병원이라면 편하게 입원할 수 있겠노라고 기뻐했다지.
한형,
아버지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후유증만을 허락해달라는 아들 근이 녀석의 기도도 헛되이 자네는 의식을 잃은 지 2주일 만에 먼 길 떠나고 말았지. 삼우제를 준비하면서 근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짧은 묘비명이 필요하다고 했네. 나는 주저 없이 자네의 짧은 소설의 긴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냈네.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서종택
1944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69년 , 에 첫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등의 창작집과 , , 등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