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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서 내려 북적이는 부산역 역사를 빠져나온다. 역 광장을 가득 채운 건 가을 햇살이다. 그것은 체로 거른 듯 맑아 상큼하다. 발길에 절로 탄력이 붙는다. 부산역 맞은편 초량동 골목엔 ‘이바구길’이 있다. 부산 동구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옛날 동네다.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동네의 근현대 문화와 풍속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초입엔 ‘구 백제병원’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근대건조물’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그런데 외관이 범상치 않아 도드라진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지은 건물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멀쩡한 외모를 유지한 게 아닌가. 100년 풍상에 시달린 건축이라면 보통 낡은 기미를 풍기게 마련이다. 시들고 삭은 기색으로 시간의 횡포를 웅변하거나 고색창연한 운치를 돋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애초 워낙에 잘 지은 덕분일까, 이 4층짜리 적벽돌집 외형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당대의 첨단 건축 기법을 통해 등장한 건물인 걸 직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부는? 아쉽게도 원형을 많이 잃었다. 1972년에 발생한 화재로 많은 것이 잿더미로 스러졌다. 외부와 달리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탓에 피해가 컸다. 이후의 보수 작업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건물주는 원형을 복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벽면과 바닥의 형태는 물론 천장을 도배한 그을음까지 그대로 놔두었다. 기본이 원체 튼실해 뼈대까지 손볼 필요는 없었다. 이를테면 벽체 거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콘크리트못 하나 박아 넣을 수 없었다니 말 다했다. 현재 이 빈티지한 건물 1층엔 카페가 있다. 묵은 세월이 새겨 넣은 신비감까지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재생 공간만이 가질 수 있는 투박함과 묵직함에 예술적 디테일, 나아가 건물 역사의 스케일까지 가세해 민감한 이들의 오감을 자극한다. 2층엔 창비출판사가 차린 복합문화공간 ‘창비 부산’이 있다.
저 옛날의 백제병원은 외과의사 최용해가 지은 대형 사립병원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용도 변화 여정이 다채로워 흥미롭다. 개업 5년이 지난 1932년, 최용해는 기묘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일본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러면서 건물은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갔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이름의 청요릿집이 들어섰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는 일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 해방 직후엔 부산 치안사령부 건물로, 1950년엔 중국 임시대사관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엔 개인에게 불하되면서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이후의 양상은 생략하더라도 어지러울 지경으로 변동이 잦았던 걸 알 만하다. 말하자면 ‘구 백제병원’은 부산의 사회사와 풍속사가 압축파일처럼 내장된 건물이다. 따라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모든 게 변한다는 걸,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걸, 세상에서 나그네 아닌 게 없다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승도 추락도, 기쁨도 슬픔도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련만, 고정불변의 것으로 바라보는 착시와 오해를 교정하라 묵시하는 곳일 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168계단’이 품은 사연
이바구길을 따라 이제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을 움켜쥐고 빼곡히 들어앉은 집들이 보인다. 간혹 새집도 섞여 있지만, 주로 자그맣고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간신히 숨을 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은 삶의 변방이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천신만고한 생활이 펼쳐졌던 곳이다. 의지가지없던 피란민들은 이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피란민뿐이랴. 부두 노동자, 자갈치시장 일꾼, 공장 근로자, 영세상인 등 중심부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초량동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간절한 삶을 꾸렸다. 이바구길은 이렇게 유적처럼 남은 과거사의 명암과 요철을 이바구하는 길이다. 동네에 고인 문화적 요소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가시적으로 재구성한 문화재생 테마길이다.
볼거리는 충분히 많다. 발목 잡힌 듯 딱 멈추게 되는 건 ‘168계단’ 앞에서다. 좁고 길고 가파르기 짝이 없다. 허공에 펼친 사다리처럼 아슬아슬한 계단이다. 산동네 사람들은 이 험악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면제받지 못한 채 생활을 도모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아래 있었던 우물물을 퍼 나른 루트였으며, 노동의 피로를 한잔 술로 달래고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발길에 닳고 닳은 계단길이었다. 희망을 품고 고역을 감수했던 주민들의 일상이 계단에 비쳐 먹먹하다.
‘168계단’ 옆에는 ‘김민부 전망대’가 있다. 부산에서 출생해 31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공간이다. 그의 시는 빼어났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거의 잊힌 시인이 됐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자로 알려진 게 고작이다. 일찍이 김민부 시의 천재성을 증언한 논자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그는 궁핍에 시달렸다. 시는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높이 날았으나 종단엔 실존의 비애로 무너졌다. ‘김민부 전망대’에 오르거든 그의 이름을 가슴으로 한번 호명해볼 일이다. 참으로 반가운 건 부산에서 ‘김민부 문학제’가 연례행사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속세란 더러 경박하지만 야박한 것만도 아니다. ‘168계단’을 거쳐 언덕 중턱에 이르면 ‘유치환의 우체통’을 만날 수 있다. 부산 동구에서 살다 타계한 유치환 시인을 추모하며 만들었다. 마음에 둔 이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과거나 미래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여도 좋겠다.
발길은 이제 ‘문화공감 수정’에 닿는다. 일제가 조선 침탈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엔 일본식 가옥이 여럿 있다. ‘문화공감 수정’은 개중 번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전통 목조주택이다. 창호 문양 같은 세부 장식의 다양성,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급변하는 실내 공간 구성이 특징적이다. 한옥과 달리 복도 공간을 정교하면서 활달하게 구사한 대목 역시 일식의 전형이다. 이모저모 본때 있게 지은 집이다. 관리 상태도 최상이다. 전국에 적산가옥(敵産家屋, 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 소유의 집)이 남아 있지만 이곳처럼 잘 보존된 집이 드물다고 한다.
1943년에 지어진 이 집은 해방 뒤 한국 사람에게 불하된 뒤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 쓰였다. 2007년에 이르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적산가옥을 쳐다보기조차 싫어했다.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로 인식해 철거나 개조를 능사로 삼았다. 그러나 적산가옥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그럼 일본 정부가 반색하지 않을까? 침략의 증거물이 사라지니까.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가 겹으로 엉겨 있는 ‘문화공감 수정’은 캄캄했던 전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이곳 내부는 기능성과 미학으로 빼어나다. 온통 유리창을 낸 전면으로 들이치는 정원 풍경도 수려하다. 한때 이곳은 카페 공간으로 소비되었다. ‘인스타 핫플’로 유명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상징성이 흐려졌는데, 2021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역사 전시공간으로 전환했다. 옳은 결정이다.
정정숙 부산동구문화원 원장대행
“부산 동구는 부산 문화의 본산지다”
‘부산 동구를 알면 부산 전체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역사와 문화 측면에서 동구에 유형・무형의 많은 자산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구엔 인적・물적 유입은 물론 문화 교류의 통로인 부산역과 부산항이 있다. 정정숙 문화원장대행은 이와 같은 정황을 근거로 ‘동구가 부산의 뿌리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동구는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래 명실상부한 부산의 관문으로 기능했다. 부산역 역시 문화자산을 축적하는 문물의 유입 경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동구의 문화가 성장했으며, 여기에서 나온 에너지는 부산 전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확산됐다. 동구의 문화는 한마디로 부산 문화의 본산이자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구에 있는 증산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동구의 문화 파워를 대표하는 공간을 꼽는다면?
“동구의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담은 문화재생 테마 골목길인 ‘이바구길’이다. 이 길은 부산시가 2011년부터 추진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탄생했는데, 매우 재미있고 매력적인 곳이다. 꼬불꼬불 연달아 이어지는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만날 수 있는 풍경과 명소마다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길을 걸으며 과거를 만나고, 그러다 문득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인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연계해 답사하면 한층 즐겁다.”
31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김민부 문학제’가 부산에서 운영되고 있어 반가웠다. 문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 한 이름이라서.
“김민부 시인은 우리 동구의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혼을 기리기 위해 이바구길에 ‘김민부 전망대’를 조성했지만 미흡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공간 확장이나 시인을 재조명하는 문학 행사 활성화 대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부산동구문화원이 추진하는 역점 사업을 소개해달라.
“우리는 25개의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구민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다. 특히 ‘노래교실’이 인기다. 무려 5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해 노래를 즐긴다. 옛 추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 역시 반응이 좋다.”
예술 프로젝트 ‘꿈의 오케스트라 부산’을 운영하는 목적과 성과도 궁금하다.
“‘꿈의 오케스트라’는 문체부가 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국가 사업으로 전국 여러 곳에서 펼쳐진다.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동구문화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한국형 모델이다. 음악의 힘으로 사회에 희망을 부여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단원은 오디션을 통해 뽑은 초2부터 고2까지 60명, 음악감독 1명, 강사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과는 매우 크다. 정기 연주회와 작은 연주회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들이 음악을 즐기며 밝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라 다행스럽다. 이 아이들 중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나올 수도 있을 테고.”
중장년층이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한다. ‘광고’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읽는 전시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告白)’이다.
대중문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중에서도 광고는 그 시대의 소비문화, 유행 등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우리나라는 광고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30초짜리 광고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문화를 주도했고, 세월이 지나도 광고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광고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는 전시다. ‘고백’은 우리말로 ‘아룀’으로 우리나라에서 ‘광고’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이전에 사용된 용어다.
이 전시의 특별한 점은 ‘실감형 영상전시’라는 점이다. 전시는 아나몰픽 기법(특정 지점에서 착시효과로 입체감을 극대화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벽면과 미디어 큐브 기둥에 영상을 투사해 광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현재 1부와 2부 전시가 진행 중인데, 각각 상영 시간이 7분으로 소개돼 있다. 실감형 영상 전시이기 때문에 전시는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과거를 추억하면서 전시를 관람하게 되기 때문에 전시 시간이 짧다고 느껴질 정도다.
먼저 전시 1부는 ‘광고합니다’로 광고에 담긴 시대별 소비문화의 변화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 근대와 신문물 시대는 개항기 때로 광고를 보면 신문물의 도입과 함께 의약품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 금계랍, 국산 소화제 활명수 광고가 많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당시 양복, 화장품, 조미료 등 소위 근대문물의 광고는 식민지의 소비 욕망을 자극했다. 1920~30년대에 외국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화려한 패션과 스타일 등을 광고를 통해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광복과 재건 시대는 1950~60년대를 말한다. 광복과 6⸱25전쟁을 경험한 후 일상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광고가 주류를 이룬다. 최초의 국산 치약 광고가 나왔으며, 라면은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본격적으로 광고가 대중에게 친숙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1970년대에는 아파트의 대중적 보급으로 주거환경이 변화하면서 가전제품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는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강조했다. 1970년대 말, 국산 자동차 광고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이 카(My Car)’ 문구로 샐러리맨의 욕망을 부추겼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 광고는 개인·개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소비와 유행에 민감한 신세대의 문화가 반영됐다. 패션과 화장품, 삐삐와 휴대폰과 같은 품목들은 단순히 제품이 아닌 문화를 소비한다는 전략으로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어 1990년 후반 신세대의 관심은 인터넷이 만든 사이버공간으로 옮겨졌고, 초기 인터넷 광고와 이동 통신 광고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특히 1990년대 광고가 현재의 중장년층에게 익숙해서 반가움을 산다. 타키온, 걸리버 등 추억의 휴대폰 광고들이 등장한다. “같이 들을까?”로 유명한 SKY 광고도 나와 눈길을 끈다.
2부 전시 제목은 ‘그래, 이 맛이야!’로 시기별 식품 광고를 통해 대중의 음식 소비문화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미료 광고, 광복과 6·25 전쟁 이후에는 밀가루 광고가 많이 등장했다. 밀가루가 영양가가 높고 여러 용도로 활용 가능한 재료임을 알리는 데 광고의 초점이 맞춰졌다. 설탕과 분유는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1960년대는 밀가루 식품 광고가 본격화된다.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식품이 우리 식생활의 주류가 됐기 때문. 특히 국수와 국수 기계 광고 등에 혼분식장려 문구가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 초 출시된 라면은 당시 혁명적인 식품으로 주목받았고, 카레라이스가 쌀의 대용식으로 떠올랐다.
1970~80년대는 경제성장과 함께 식료품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조미료⸱제과⸱통조림과 같은 품목들이 가정의 식탁을 차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CM송이 크게 유행했다. 오란씨, 롯데 껌, 브라보콘 CF 등이 이에 해당한다. CM송이 유행하면서 광고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광고 문화는 더욱 발전했다.
이어 서울올림픽(1988)과 해외여행완전자유화(1989)를 거치며 외국문화와 외식이 유행했다. 점차 선진국의 식생활과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추구함에 따라, 패스트푸드⸱베이커리⸱패밀리레스토랑 등의 외식문화가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 식품기업의 해외 진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의 음식도 세계 속에 확산되고 있다.
한편, 3부와 4부는 올 하반기 공개된다. 3부 '참 곱기도 하구나'는 패션과 화장품 광고, 4부 '기적인가 기술인가'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은 전자제품 광고에 주목한다.
전시가 열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광화문 역 인근에 위치한다. 광화문 일대로 나들이를 갈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들러 추억 여행에 빠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바다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서면 그립다. 인천의 바다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은 곳이거나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바라보아도 자신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인천을 거쳐간 근대 역사를 더듬어가며 그리운 바다를 가슴에 품고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 하루짜리 최고의 힐링 여행이 완성된다.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개항기 역동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국적 풍광의 인천개항누리길을 걸어보자.
코로나 시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행 기분은 제주를 가더라도 비행기도 타고 면세점도 들러야 제맛이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인천을 가는 여행은 비행기 타지 않고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겨울 오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인천역은 서울시청역에서 1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서해가 펼쳐질 것 같지만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서 내리니 차이나타운임을 알리는 황금빛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서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화교뿐만 아니라 여러 바다를 거쳐 건너온 사람들도 있다. 인천항은 조선시대에 근대 문물을 처음 받아들인 항구였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한 건축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현란한 붉은색 간판이 거리를 원색으로 물들인다. 반면 일본인 거리는 단색의 정돈된 이미지가 완연하다.
자장면 맛은 변함이 없지만
계단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가면 좌우의 석등이 다른 생김새로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 양식을 보여준다. 계단 끝부분에는 공자 상이 자리 잡고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이 방해받는 시대, 서해의 겨울바다를 보려면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30여 분 정도 걸어 다니다가 자유공원으로 올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던 이 지구는 지금 조용하다. 간간이 마스크를 끼고 방한 장비로 중무장한 산책자들만 보일 뿐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간신히 눈만 빼꼼하다.
평소에는 식사시간이 되면 긴 줄이 이어졌다는 유명한 중화요릿집도 점심시간인데 홀이 한산하다. 자장면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과장해서 말하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다. 차이나타운 상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영하 11℃의 한파도 한몫한 듯하다. 이 모든 현상은 전 지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서 비롯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문제가 발생하면 답을 구해 슬기롭게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인천은 최초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1882년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지, 이듬해 해관 설치, 1884년 청관(淸館)의 기원과 자장면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교회, 호텔, 공원, 전환국, 철도, 우체국 등 한국 근대사의 여명을 장식한 도시다.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근대의 전 지구적 접속은 항구가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이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 이동, 변화, 융합, 그리고 창조가 가능했던 국제도시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항구보다 세계적 허브공항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바다를 통해 문화는 교류되었고 이 도시는 교류 초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항도시 인천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처음 만난 도시가 인천이고 이후 천지개벽의 역사가 펼쳐졌다.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1883년에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속속 외세가 당도한다. 한국 화교의 태동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시작됐다. 화교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4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국 조계지는 상징적인 조세는 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경찰서, 감옥, 신문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중국이었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의미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항해의 수호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 같은 마조신을 모시고 있다. 화교들이 터를 잡으면서 중국 문화가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렇게 자장면과 같은 중국적인 것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북적이며 향불이 끊임없이 타올랐던 의선당의 향불도 코로나 시대인 현재는 꺼져 있다.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일본은 자본의 침탈을 개시한다. 일본의 조계지였던 개항장 일대는 현재 역사 문화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적산가옥이 즐비한 일본풍 거리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1882년에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고 산을 배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선점했다.
구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1888년에 건립되었다. 인천의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해운업을 독점했고 쌀과 잡화를 실어 나르는 기선을 운영했다. 인천은 대외 항구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 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운송까지 겸하는 요충지였다. 일본 해운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개항 초기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출장소로 출발했고 1883년에는 인천지점으로 승격해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주로 사금과 금괴의 업무를 봤다. 이후 해관세에 대한 업무도 개시했다. 화폐로 사용했던 은폐에 대한 업무도 진행했다. 개항 전에 상평통보나 당오전을 사용했던 조선은 개항 후 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의 자금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인천과 경성에 전환국을 설치해 일본과 같은 신식 화폐도 발행한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 은행이 제58은행이다. 이후에는 1은행과 18은행에서도 업무를 같이 수행한다. 근대식 금융권이 최초로 인천에 밀집돼 있었다는 것,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근대가 태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천은 자본가, 은행가 상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무역은 일본이 앞섰고 정치 외교에서는 청나라가 우세한 분위기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한다. 외국 자본의 횡포로 조선의 소가죽, 호피, 쌀 등이 헐값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항 이전의 인천은 200여 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곳에 일본 세력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의 쇄도가 이어지며 외국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맺고 건축을 했다. 차별을 두는 지배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도 변화를 맞는다. 은행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초기 일본은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우선 경제적 이익에 집중했다. 따라서 은행의 침투가 활발했다. 건축상의 변화는 벽돌을 쌓는 신기술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에 벽돌 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의 은행 건물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돌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도 기술 초기 단계여서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었다. 나무로 전환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인천에 많이 나타났다.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부 2m 정도는 화강석이고 상부는 벽돌, 출입구는 석재로 축조해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청일 조계지로 형성되었던 지역은 1910년 일본 상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일본은 인천 일본인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홍예문까지 뚫는다. 1906부터 1908년까지 3년간 이어진 공사였다. 돌산을 폭파하느라 많은 희생을 내고 준공도 늦어졌다. 일본 명칭은 아나몬[穴門]인데 조선에게는 혈문(血門)이다.
서양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는 각국 외국인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된 시설이었다.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이다. 전망이 빼어난 곳에 서향으로 지었다. 인천 앞바다로 열려 있는 구조다. 개항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영사관, 무역회사 등 서양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등 일제강점기 전의 개항 시기에는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조계지가 철폐될 때까지 중요한 외교 장소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조수간만의 차로 무역항으로서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를 건설한다. 조선과 세계를 잇는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조수간만의 차를 이겨냈다. 백범 선생도 이때의 작업에 강제동원됐다고 백범일지에서 고백했다.
개항장에는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역사적 상처도 있다. 이국적 공간이자 부인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긴 안목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효율적 공간으로 꾸려야 할 일이다. 문호개방으로 인천은 신문물을 처음 접했고 근대과학 산업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문명을 만나 근대도시가 된 인천에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 140년 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국제도시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개화시기보다 더 변화가 심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지하철 1호선 인천행 종점인 인천역에 내리면 눈앞에 바로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휘황찬란한 붉은색 패루가 보인다. 북적거리는 중국 거리를 지나 걷다 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의 거리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다. 예술가 창작활동 지원과 일반 시민을 위한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2009년 조성됐다. 인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알려지더니 차이나타운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급부상했다.
개항 역사와 함께하는 공간
인천아트플랫폼이 특별한 이유는 근대 건축물을 기반으로 리모델링하거나 그 분위기와 어우러지게 신축했다는 점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자리하고 있는 인천 중구 해안동은 1883년 개항기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와 건물이 잘 보존된 역사보존지구라고 할 만하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갑작스러운 문호 개방은 외국에서 들여온 신문물과 함께 건축 양식도 흡수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지나 맥아더 장군상이 있는 자유공원, 서양인의 사교장이던 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 제17호) 등을 찾아 걷다 보면 당시 인천의 모습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인천아트플랫폼도 옛 역사와 함께한다. 무엇보다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고 활용하기를 원하던 시민의 뜻과 인천시의 노력이 빚은 합작품이다.
1888년에 지어져 개항 이후 인천 해운업을 독점했던 일본 우선(郵船) 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 건물은 사무실(D동)로 리모델링했고, 1930~40년대에 창고나 각종 작업실로 사용했던 곳은 공연장, 전시실, 생활문화센터 등으로 모습을 바꿨다. 새롭게 단장한 건물 구석에는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부착해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게 해준다. 총 13개동, 다양한 공간과 규모로 꾸며진 아트플랫폼은 옛 향기와 현대적 감각이 교감하는 예술 문화 놀이터다.
예술을 만드는 문화발전소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서 작가를 선발해 창작활동을 지원한다. 마침 취재 당일 2018년도 입주 작가로 선발된 모 시라(Mo Sirra)를 만날 수 있었다. 취재를 위해 사진 한 장을 찍자고 했더니 어디선가 ‘예술가는 부재 중. 나는 공연 중(The artist is absent. I am performing)’이라고 쓰인 명찰을 가슴에 달고 나타난다. 말 그대로 그는 작업을 마치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전시가 이뤄지는 내내 끊임없이 작업에 참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공연자였다.
“요즘 예술은 꼭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같아요. 금방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세계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있는 거 말이죠. 저는 정크푸드 같은 예술에 저항합니다.”
리-퍼블릭 더 폴리틱스(Re-public the Politics)라고 이름 붙인 모 시라의 공연 전시는 익숙해져 가치를 잃어버린 정치와 예술 등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라고 했다.
“유럽의 경우 정치는 그저 정치가의 직업이 됐습니다. 예술 또한 지금의 정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즘 예술에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 예술의 의미는 도전이고, 도전을 현실화하는 것이고, 도전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돌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창작공간을, 관람하는 이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인천아트플랫폼이 아닐까? 날씨도 좋고 나들이 나가고 싶다면 역사와 예술이 제대로 배색된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가보시라.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전시인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하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25일까지 전시된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왔다고 해서 러시아 작품을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17,18세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에서 수집한 회화와 더불어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사서 모은 인상주의 회화, 조각, 소묘 작품 등 80여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이후 26년 만에 성사됐다. 당시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2010년 교환전시로 ‘솔숲에 부는 바람,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이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은 두 곳 간의 두 번째 협력전시다.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한국도자명품전’에 대한 교환전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에서 앙리 루소까지,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이 한 자리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은 300만 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박물관이며, 유럽미술 전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기초를 세운 예카테리나 2세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제들과 귀족, 러시아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프랑스 미술품을 수집한 결과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본관의 일부이자 로마노프 왕조시대의 황궁이던 겨울궁전에전시돼있는 프랑스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총 4부로 구성 됐는데 제1부인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제2부인‘로코코와 계몽의 시대’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들의 작품과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시의 3부인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의 마지막인 ‘인상주의와 그 이후’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에서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녀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수집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기간 ∼4월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관람료 성인 6천원 / 중, 고등, 대학생 5500원
전시문의 1688-0361
위치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버스 400번·502번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하차
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이다. 어린 시절 인근 지역에서 자랐어도 별생각 없이 다녔는데 삼랑진이라는 이름에 이런 아름다운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부산 구포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마다 삼랑진역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상 밀양 내에 있는 읍이지만 당시는 밀양역보다 더 크고 번성했던 곳이 삼랑진이었다.
삼랑진 옛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랑진은 매우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일본 상선이 삼랑진 포구까지 왔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다 보니, 삼랑진 지역 중심엔 일본인들 관사가 많이 지어져 현재에도 제법 남아 있다. 문화재보존정책 때문에 개·보수를 하지 못해 지금은 아주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지역의 근대화 문물들은 보수·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삼랑진장에 가자!
삼랑진장은 4일과 9일에 들어선다. 삼랑진이 쇠퇴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작아지고 사람 수도 줄었다. 최근엔 마트까지 생기면서 시골 장날의 분위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삼랑진장은 인근의 김해시 생림면 사람들과 삼랑진 지역의 연세 많으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어릴 적부터 발길이 닿은 곳이라 마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해 장을 이용한단다. 어르신들은 마트의 물건보다 찬거리 등을 푼돈으로 흥정하며 살 수 있는 삼랑진장을 좋아한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삼랑진에는 강바람과 산바람이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도시처럼 바람을 막아줄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차에서 내려 삼랑진 장터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외지인이 이리저리 다니니, 상인들 모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방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가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능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고 기뻐서 “네~”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더 붙였다. 잡지에 넣을 사진 촬영을 한다고 설명하며 할머니 모습을 찍었다. “찍지 마!” 하면서도 포즈를 잘 잡아주셨다.
추운 날 꽁꽁 얼은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할머니가 욕을 하신다.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4마리에 1만 원 하는 고등어를 사니까, 덤으로 작은 놈 한 마리를 끼워주신다. 고등어를 팔아주니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파는 생선들은 냉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냉동 생선을 녹여 손질해 판다. 이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손질을 하신다. “할머니 장갑 좀 끼시죠?” 하니 “장갑 끼면 잘 안 된다” 하신다. 조용한 시골 장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있다면 음악 테이프와 CD를 판매하는 트럭이다. 하루 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최신 트로트를 들려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트로트 노래들도 USB용으로 나온다. 뭔가 하고 둘러보는 사람은 있지만 구입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보니, 물건 파는 사람도 차 안에 들어가 있다. 날씨도 춥고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니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장터 사람들
삼랑진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젊은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것들이다. 주로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뿌리 식품이나 보신용 식품이 많다. 우엉과 말린 연근, 둥굴레, 돼지감자 같은 뿌리 식품이 많다. 장날의 자리에는 권리금과 자릿세도 있다 한다. 보통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할 경우엔 상권의 성향과 위치에 따라 자릿세 차이가 있다. 삼랑진장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온 한 분은 자릿세를 내기 싫어 장터 가장 끝 쪽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판다. 추운 날이라 구멍 난 깡통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요기를 하기 위해 고구마 몇 개를 넣어 굽고 있다. 그분에게 연근이랑 우엉, 돼지감자를 1만 원어치씩 구입하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날씨도 춥고 심심했는데 20분 동안 말동무도 되어주셨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오늘 펼친 물건들 재고가 많이 쌓였는지 상인들은 팔지 못한 물건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물물교환을 한다. 불과 몇십 분 전에 1만2000원에 팔던 김천촌닭을 5000원에 사가라고 한다. 삼랑진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잔영(殘影)첨럼 남아 있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