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승부수
-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류춘수 건축가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세상에는 ‘운이 좋았다’고 할 만한 일과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의 일생은 후자에 속한다. 언뜻 보면 그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 같지만 그의 인생과 건축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적 문고리가 설계되어 있다.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과 88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리츠칼튼호텔, 한계령휴게소, 박경리문학관과 사저, 동숭동 샘터사 등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국가의 위상과 국민의 일상에 맞닿아 있다. 한양대 건축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국내파 건축가로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이란 등지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영국, 미국,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강연한 그는 젊은 건축인이 뽑은 대한민국의 가장 바람직한 건축가에 두 차례나 선정되는 등 정상을 지키고 있다. 건축가의 꿈과 불교의 운명적 만남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1962년 대구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학생사생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안동에서 막 전학 온 ‘촌놈’이 대구, 경북의 미대 지망생들을 휘저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남고등학교 출신 이두호가 2등을 했으니. 이두호가 누군가? ‘임꺽정’을 비롯해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 전권을 만화화하고, 머털도사를 탄생시킨 한국 만화계의 국보급 작가가 아닌가. 더 재밌는 것은 당시 그가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친정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때 고교 2학년생 이두호가 거기서 그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두호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학생이 있었다니, 그것도 우리 집 하숙생 중에!’ 하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셨죠. 하하.”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기하, 수학 등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진로 적성검사를 할 때마다 뚜렷하게 건축과로 나왔다. 그의 꿈은 확고했지만 봉화 면서기였던 선친은 1남 2녀의 외동아들이 건축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건축가에 대한 변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상대 나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때였으니. 아버지를 설득해 정작 허락은 받았지만 대학 입시에서 연거푸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만다. “초라한 삼수생의 몰골로 고향 봉화 문수산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인 축서사로 들어갔지요. 마음 다잡고 공부하겠다고 2년간 절에 있었던 게 건축가로서 의미 있는 첫 단추를 꿰는 인연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민한 성정의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옮겨가는 변곡점에서 불교는 제 인생과 제 건축 밑그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졸업 작품부터 동기들과는 차별적이었다. 한국 불교의 중흥과 중생제도의 구심점을 세운다는 포부 아래, ‘대한불교조계종 대본산 계획안’을 설계했던 것이다. 불교와의 첫 인연의 고리를 꿴 순간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생활은 막막했다. “제 월급이 1만 원이었어요. 은행원은 3만 원을 받던 시절이었죠. 쪼들리며 살던 때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불교 미술 공모전을 하길래 졸업 작품을 응모해 1등을 했습니다. 상금이 5만 원이었으니 무려 제 한 달 급여의 다섯 배였죠. 덕수궁에서 전시도 했고요. 그런데 며칠 후 조계종 총무부장이 연락을 해왔어요. 부산 대각사의 10층짜리 불교회관 설계를 맡아달라고. ‘스님 돌았소?’란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죠. 그때까지 집 한 채도 설계해본 적 없는 초짜한테 할 제안인가요, 어디? 근데 스님 말씀이, 무조건 불자가 설계를 맡아줘야 한다는 거예요. 불교와의 인연이 또 들먹여진 거죠. 더 놀란 건 그때 부산까지 동행해준 스님이 축서사에서 동고동락했던 분이었어요. 스님도 ‘절에 있었던 그 춘수 학생이 설계를 맞게 된 거냐?’며 깜짝 놀라셨죠. 그때가 경부고속도로 개통 일주일째 된 때였어요. 멋들어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30만 원을 선금으로 받고 총비용 60만 원에 달하는 설계를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맡게 되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지요. 부처님의 가피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그가 살던 서울 휘경동 집값이 90만 원이었다. 그때 받은 60만 원으로 부친 생전에 진 본인의 학자금 빚을 갚고, 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댔으니, 홀어머니를 모신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투시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화여대 조감도를 그리는 데 합류하여 직장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월 5000원을 받는 ‘꿀 알바생’이었던 것. 졸업 후 3년 만에 집을 샀을 정도로 일이 넘치게 들어온 그때가 일생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때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동료들은 설계 사무실보다 봉급이 서너 배 많은 현대건설, 주택공사 등으로 이직을 했죠. 제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쇄도했지만 배를 곯아도 건축 설계를 한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 만약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류춘수는 없었겠죠.” 김수근의 ‘공간’에서 류춘수의 ‘이공’(異空)으로 20세기 한국 대표 건축가이자 건축계의 우상인 김수근의 ‘공간’에 새 둥지를 튼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변곡점이 되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를 하는 공간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자문이 강하게 일었다. 무작정 공간을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자 김 대표 왈, “자네가 지금 일하는 곳은 내 친구 회산데 의리상 그럴 수는 없지.” 그 길로 다니던 회사에 무작정 사표를 내고 다시 찾아갔다. 이제 입사 자격이 갖춰졌다고 하자,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또 이랬죠. ‘사표를 냈으니 좀 쉬었다가 일주일 후부터 나오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야, 이놈 봐라’였지요. 하하.” 1974년 9월에 입사, 김 건축가가 55세에 간암으로 타계한 1986년까지 만 12년을 함께 일하며 88서울올림픽공원과 체조경기장 등을 맡아 설계했다. 류 건축가는 돌아가신 스승을 대신해 잠시 공간의 대표직에 있다가 ‘이공’(異空)으로 독립한다. ‘이공’은 단순히 ‘다르다’(different)는 의미가 아니라 ‘다름 그 너머의 보다 나은’이라는 의미인 ‘비욘드’(beyond) 스페이스를 뜻한다. 의미심장한 이름의 ‘이공’은 그의 나이 41세였던 1986년에 탄생해 75세인 지금까지 35년째 대한민국 대표 종합건축사 사무소로 건재하고 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저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시로부터 VIP석에 제 이름을 새긴 ‘건축가의 의자’를 지정받기도 했으니까요. 전례가 없는 파격 대우지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거인 골리앗을 이긴 소년 다윗’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건축업계의 전설이다. 골리앗은 현대건설을, 다윗은 류춘수를 뜻한다. 1998년 IMF 경제위기 여파로 월드컵경기장은 애초 건설 계획이 없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고쳐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 작품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류 건축가가 당선된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은 김수근의 작품이니 제자인 그가 월드컵경기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 그런데 새로 짓기를 원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를 설득, 정부 3분의 1, 서울시 3분의 1, 축구협회 3분의 1 각출로 2000억 원 예산의 공사가 결정됐다. 시공은 당연히 현대건설 측이 맡는 조건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됐지요. 개조안이 무산되었으니. 게다가 시공회사가 설계회사를 지정하는 턴키 방식으로 공사가 확정됐지요. ‘턴키’란 설계와 시공을 패키지로 하여, 완공 후 발주자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된다’(Turn Key)는 의미의 건축업계 용어죠. 당시 현대건설은 건축계의 왕이었어요. 지금보다 100배는 센 기업이었던 무소불위의 현대건설은 ‘공간’을 설계 파트너로 지명했어요. 공간에 있을 때부터 원주체육관, 부산야구장 등 한국의 스포츠 건축물은 99% 제가 설계했어요. 말레이시아체육관 등 해외 스포츠 시설 설계 경험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제 존재는 깡그리 무시됐죠.” 턴키 방식은 설계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로비 실력으로 하는 거라는 말이 건축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던 때였다. 현대, 대우, 삼성, 엘지, 대림, 포스코 등 한국 6대 기업이 컨소시엄을 짰지만 현대의 들러리에 불과한 요식적 몸짓일 뿐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들과 함께 응모해보자고. 삼성 계열사라 하지만 공장이나 지어봤지 일반 건축은 해본 경험이 없는 곳이었죠. 맏형인 삼성이 이미 현대와 조인트를 한 상황인데 조무래기가 어디 감히 설치냐며 같잖다는 반응이 들렸어요. 같잖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죠. ‘일반 건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번 기회에 공부 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류 건축사님 설계를 부탁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전 이미 다 포기하고 머리 식히러 미국에 나가려던 차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더라고요. 1만분의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보고 싶었어요. IMF 사태로 제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이유도 한몫했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하기 위해 주머니 속 돌을 만지작거리는 순간이었죠.” 요식적이나마 실시한 현상공모 기간은 세 달, 그로서는 목숨을 건 3개월이었지만 같은 기간 현대건설은 대학의 건축과 교수 등 심사위원 내정자들을 해외 유람까지 시키며 로비를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도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라도 안면을 터야 했지만 기회는 어이없이 빗나갔다. 하필 박세직 월드컵조직위원장과 신라호텔에서 조찬 모임이 잡힌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수유리 아카데미 합숙에 들어가버렸으니 배는 이미 떠났다. 다 내려놓는 마음으로 박 위원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설계자가 자기 도면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국제적 관례가 그렇다는 근거를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 말을 하고는 한강을 건너는데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수유리에서 설명회가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그 ‘혹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시’로 드러났다. “제 순서가 먼저였어요. 발표 30분, 질의응답 30분, 한 시간이 주어졌죠. 어차피 두 팀밖에 없었으니 넉넉한 시간이었어요. 100% 현대건설 측으로 낙착된 일이니 들러리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갔고 저하고 현대만 남았던 거죠. 그때 ‘류춘수가 저리도 해박하게 강의를 잘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리더군요. 반면 현대 측 설계사는 엉망이었어요. 발표 준비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떼어놓은 당상이었으니까요. 설계자 둘 간의 실력 차가 너무 나니 안 뽑아줄 수가 없었던 거죠. 27명 심사위원 중 심사위원장, 부위원장을 제외한 25명이 저를 지지했습니다. 만장일치였다고 해야겠죠.”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니, 신문 등 매체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대서특필했다. 소감을 묻자 “골리앗,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류 건축가는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였다. 피 말리는 운명의 3개월, 그의 꿈은 월드컵경기장으로 실현되었고 현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대건설 측에서는 지금도 ‘류춘수’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턴키 방식에 의해 시공은 삼성물산에게 돌아갔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의 인연으로 영국의 필립 에든버러 공이 2020년 5월 그를 버킹엄 궁에 초청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방문 날짜를 세 개 주면서 그 가운데 가능한 날을 고르라고 했던 것. “정말 감동했어요. 박원순 시장과 비교되었기 때문이지요. 박 전 시장이 70여 명의 건축가를 초청한 일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날을 잡더라고요. 그러더니 하루 전날 취소 통보가 옵디다. 일주일 후로 연기하겠다고. 그러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안 된다며 무기 연기를 하더라고요. 필립 공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마음과는 대조적인 처사여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박 전 시장의 고마운 배려지요.” 박경리문학관, 한계령휴게소, 리츠칼튼호텔, 봉화 우리 집 “원주의 박경리문학관과 사저도 제가 설계해드렸는데, 작가님께 어떻게 짓길 원하시냐고 묻자, ‘지가 뭘 알아야지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이러시는 거예요. 모든 건축주는 자기가 더 잘 아는 줄 알지요. 그런데 천하의 박경리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범함이 느껴졌습니다. 문학을 안 했으면 건축을 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한편 1979년, 33세에 설계한 한계령휴게소는 40년이 지난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 도면이 전시되어 극찬을 받았다. 한계령휴게소는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아 철골과 목구조를 절묘하게 배치해 뼈대와 인테리어에 구분을 두지 않은 점이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가 설계한 호텔 중에 가장 큰 리츠칼튼호텔에도 범상치 않은 운명적 요소가 작용했다. 대형 설계회사의 도면으로 지하 7층까지 땅을 파고 공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후 그에게 설계 의뢰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때도 역시 산비탈을 살리는 오르막 콘셉트였는데 유니크한 그의 설계가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공모전 낙선작이 2년 후 당선작으로 뒤바뀌며, 진행되던 공사를 중간에 갈아엎고 류춘수 버전으로 지금의 리츠칼튼호텔을 세운 것이다. 운명의 무늬를 그려온 드라마틱한 건축 행로에서 류 건축가 스스로가 꼽는 가장 애착 가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봉화 우리 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그의 건축 정서를 또 한 번 느꼈다. 건축, 그 설계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적 노력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요즘, 유튜브 ‘류춘수 space TV’를 통해 대한민국 건축 역사와 오버랩되는 류춘수의 건축사를 편안하고 진솔하게 풀어내며 참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 2021-09-12 14:00
-
-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자…“다시 힘을 내 도전하라”
- “포기하지 않았기에 수상이라는 기쁨을 얻었다. 다시 힘을 내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받아들인다. 계속 글을 쓰며 시니어 문학의 한 장을 채워나가겠다.” 27일 열린 고품격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신한은행과 함께 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시상식에 참가한 시니어 수상자들은 공통적으로 이와 비슷한 수상소감을 밝혔다. 미니자서전 부문에 ‘대륙에서 길을 묻다’를 출품한 김영식 씨는 시니어들과 치열한 경쟁 끝에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식 씨는 “인생 이모작에 새롭게 도전하며 살아가겠다”며 “글쓰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숙제를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는 가치있는 글로 보답하겠다”고 동영상으로 수상소감을 밝혔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은 만 50세 이상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4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두 달 반 동안 ‘인생 이모작’, ‘앞으로 꿈꾸는 나의 모습’, ‘나를 30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들’, ‘퇴직 후 1년의 생활’, ‘마침내 무한변신’ 등 5가지로 주제로 진행됐다. 김주영 작가, 윤정모 소설가를 비롯해 장석주 시인, 안도현 시인, 부희령 작가, 신아연 작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 6명은 공모 작품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심사했다. 윤정모 소설가는 “대체로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사색의 깊이와 수사와 문장에서 갈고닦은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며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대륙에 길을 묻다’가 이후를 잘 마무리하길 바라며 대상으로 결정했다”고 심사평을 제시했다. 7월 15일 당선작 발표에 이은 8월 27일 시상식에서는 영광의 수상자들이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번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유행에 따라 방역 지침을 준수하며 대상과 최우수상, 쏠드상, 우수상 등 일부 수상자만 참석해 소규모로 진행됐다. 이날 자리를 빛낸 김상철 이투데이 대표는 “소설과 수필, 시 같은 작품이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 감동을 준다. 시니어 여러분들이 좋은 글을 써주셔서 수상작이 모두 훌륭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수상자들을 독려했다 최우수상과 쏠드상 수상자 시상에 나선 이병철 신한은행 부행장은 “코로나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에 희망을 갖고 이렇게 좋은 활동을 보여준 시니어들이 놀랍다”며 “신한은행이 이번에 처음 참여했는데, 계속 지원해 시니어들이 행복한 노후, 성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돕겠다”고 시니어들의 인생2막을 응원했다 단편소설 부문에서 ‘부적 쓰는 여자’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도열 씨는 “코로나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제게 최고의 선물”이라며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시 부문에서 ‘부록’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김귀순 씨는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비켜선 지 오래, 하마터면 주저앉았을 일상의 무기력한 안주. 어떤 경우든 포기했다면 얼마나 큰 낭비일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한 수상”이라며 시니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동화 부문에서 ‘마음우체통’으로 쏠드상을 수상한 박상미 씨는 “무엇을 하든 포기하지만 말고 꾸준히 하자고 오늘도 나 자신을 독려한다”며 “그러다 보면 나의 뮤즈를 만날 수 있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올해 수상자들에게 큰 기쁨을 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은 내년에 더 많은 시니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2021-08-27 18:05
-
- '50+ 신춘문예 시니어 공모전' 개최
- “나이로 주춤했던 마음이 공모전으로 활짝 열리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난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에 참가했던 시니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올해도 시니어들에게 자신감을 되찾아줄 시니어 공모전이 열린다. 이투데이피엔씨 관계자는 ‘나의 미래설계를 위한 브라보!!’라는 이름으로 신한은행과 함께 ‘50+ 신춘 문예 시니어 공모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대상 300만원 1명, 최우수상 2명, 쏠드(smart old)상 1명, 우수상 각 부문 1명, 장려상 20명 등 총 30명의 수상자에게 1200만원에 달하는 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또한 모든 수상작은 신한미래설계 온라인 플랫폼 업로드 기회와 수상자에게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고정 칼럼 게재 기회를 제공한다. 당선작품은 온오프 미디어에도 게재된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의 공모 주제는 ‘인생 이모작’, ‘앞으로 꿈꾸는 나의 모습’, ‘나를 30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들’, ‘퇴직 후 1년의 생활’, ‘마침내 무한변신’ 5가지로 진행한다. 공모 부문은 시, 단편소설, 동화, 산문, 미니자서전, 영상 등 총 6개 부문으로 진행한다. 시는 2편을 분량 제한 없이, 산문은 원고지 15매 이상으로 작성해 2편을 제출해야 한다. 또 동화와 단편소설, 미니자서전은 1편을 원고지 30매 이상으로, 동영상은 HD이상의 영상을 3분 이내로 구성해 제출하면 된다. 1971년 1월 이후에 태어난 만 50세 이상 시니어라면 누구나 이번 시니어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다. 단 등단 문인은 제한된다. 이번 공모전은 4월 15일부터 시작해 6월 30일까지 이메일(bravo@etoday.co.kr)과 우편 두 가지 방식으로 접수를 받는다. 응모작을 담은 컴퓨터 파일(HWP, Word)을 이메일에 첨부하거나 A4용지로 출력한 뒤 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응모작은 미발표 작품이어야 하며, 접수된 작품은 돌려주지 않는다. 당선작은 7월 15일 신한미래설계 홈페이지와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수상자에게 개별적으로도 수상 결과를 알릴 예정이다. 당선작은 주최사 콘텐츠에 활용될 수 있으며, 지적재산권 침해소지가 있는 작품은 수상이 취소된다. 접수 주소 등 브라보와 신한은행이 함께하는 시니어 공모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5월호와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 2021-04-16 15:25
-
- 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 마지막 소를 실어 보낸 그날 이후 석 달이 지났다. ‘젖소는 내 운명’ 그 40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게 지난 초봄이었다. 수많은 톱니가 맞물려야 돌아가는 목장에서 문제가 생긴 올 2월 초 갑자기 남편이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생명을 거두는 녹록지 않은 ‘먹고사니즘’의 긴장을 더는 겪고 싶지 않은 데다 10년 전에 다친 다리 상태도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일생을 바쳐온 일이니 느긋하게 그만두자고 맘먹고 있었는데 한순간 결정을 내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몇 날 며칠을 불면으로 새야 했다. 축사와 하고 많은 장비, 꾸준히 이뤄졌던 투자를 버리는 것은 물론 소가 맺어주었던 촘촘한 사회관계를 허무는 일이며 소 없는 인생, 빈 우사를 견디는 허무감은 깊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만둔다고 석삼년은 결심해야 겨우 해치울 일이 그렇게 끝났다. 촌 나이로는 이른 나이에 소를 내려놓는 일은 당사자인 우리나 같은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날씨 때문에 하늘 바라보며 조바심칠 일도, 우유가 남아돈대도 가슴앓이 할 일도 없고 목장 관리 때문에 속 썩을 일도 없이 홀가분한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줄기차게 해대던 목장 식구들 밥에서 놓여난 것은 해방 중의 해방이었다. 목장을 정리하며 들어온 소위 노후자금을 이리저리 나누어 통장에 넣었지만 이자가 바닥이니 원금을 조금씩 잘라먹을 게 눈에 선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냐며 만만했던 맘 위로 남모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일방통행이 돼버린 돈이 너무 낯설었고 걱정스러웠다. 지난 40년 동안 늘 한 달에 두 번씩 우유 값 정산한 목돈이 들어와서 나가는 사이로 스쳐가던 푼돈들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자연스레 윤활유처럼 생활을 반들거리게 하던 씀씀이를 주저하며 쩨쩨해(?)지는 중이다. 인생에 계획이란 있기나 한 걸까. 서울 사람이 생면부지 땅에 소 키우러 들어와 40년을 살았는데 소도 안 키우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하는 게 다음 순서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긴 은퇴를 책임져줄 자금의 어느 부분이 이 땅에 있으니 그건 우리 생애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산 널찍한 시골집 살림에 눈길이 멈췄다. 어떤 장래에 우리가 이사라는 걸 하게 된다면 한숨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 쓸쓸함이 어떨지 미리 겁이 났다. 손때 묻으며 나이 들어간 물건들은 대개는 분리수거라는 이름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니 미리 버리고 비우자며 책부터 손을 댔다. 책 욕심이 유난히 많은 내게 서재 가득 들어찬 책은 한순간 무거운 짐으로 변할 터였다. 마당의 묵은 갈잎을 태우는 속에 먼지가 풀풀 나고 냄새가 나는 책을 한 권씩 던졌다. 차곡차곡한 물건들을 덜어내며 책은 최소한으로 사되 남을 것, 즉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으리라고 새삼 맘을 먹었다.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은 물질뿐이 아니었다. 평생을 임무와 도리에 매여 안달한 몸에게 시간을 오롯이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남짓 목장 관리인들 밥을 해준 것도 모자라 유난했던 도시 손님치레들로 삶은 더욱 번잡했다. 며느리는 엄마, 아내, 목장 집 아낙, 심지어는 이름자보다도 앞서 내 노동을 규정하는 명사였다. 아버님은 시골에 사는 자식들이 자랑스럽다 하셨고, 집안 대소사를 한 손에 거머쥐고 막힘없는 시어머니는 따로 살았어도 언제나 고달프고 힘에 부쳤다. 자랑의 얼굴은 연이은 손님치레로 드러났다. 내 생각은 아랑곳없이 ‘어느 날 어느 시 몇 명’ 이런 통보가 날아오곤 했다. 상다리가 휠 정도라야 흡족해하는 분들이 말씀은 언제나 ‘김치에 된장이면’이었다. 승합차도 오고 승용차도 오고 버스가 올 때도 있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나 이분들을 거스르지 않아야 겉으로라도 평화가 왔다. 나의 사람 됨됨이는 어른들의 만족에 달려 있었다. 누구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서울 사람들의 밥을 차리며 나는 흔들려야 하는가. 무의미하고 동의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내색도 못 하는 반감이 꼿꼿하니 여기저기가 자꾸 아팠다. 며느리 도리에 결박당해 젊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마흔 후반이 지났다. 이런 와중에 잡은 공부라는 지푸라기로 오십 넘어 박사가 되었으니 평생을 모자란 시간에 애걸하고 매달린 셈이다. 영화 한 편을 봐도 평이 좋은 안전한 것을 봐야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안심을 했다. 그렇게 육십 평생 관계가 얽어맨 도리에 치인 삶, 목적지향형 삶에 복무하느라 닦달했던 시간과의 화해가 필요했다. 모든 노동이 의미로 치환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조급함을 내던지는 중이다. 내 식구만의 밥상을 차리니 한평생 바다를 걸레질하듯 맥 빠지고 지치던 부엌일이 할 만해졌다. 요즘 같은 여름날 텃밭의 펄펄한 채소들을 밥상에 올리니 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냉장고를 뒤적여 요모조모 반찬을 만들며 진정한 부엌의 회복을 꿈꾼다. 내 인생에서 추구했던 의미는 이미 총량을 넘어선 느낌이다. 어느덧 예순셋,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는 자각이 또렷해지니 더 이상 나를 혼내며 괴롭히지 않기로 한다. 미리 앞질러 돈 걱정하지 말 것. 짜장면을 먹으러 가도 귀걸이를 달고 나서는 예쁘고 쾌활한 할머니가 되자. 박사가 된 후 나가는 학교 강의가 아직은 중요한 일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무용한 즐거움으로 채우고 싶다. 어찌 의미를 좇는 일만이 삶이랴. 더 이상 효율이라는 이름을 인생에 들이대지 말 것. 심상히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노을 녘의 산책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다 눈부신 인생이려니. ‘은퇴는 무릇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번개처럼 스친 문장 하나로 돈 걱정에 사로잡혔던 맘속이 비로소 환해졌다. 치열하고 빛나게, 남다르게 살고 싶었던 인생의 등성이를 넘어서니 102호도 103호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란 말을 알겠다. 명주 같은 삶을 살고자 안간힘을 썼던 긴장감에서 벗어나 무명 같은 헐렁함으로 살아보려 걸음마를 뗀다.
- 2021-04-02 11:21
-
-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시상식 “이제 ‘마이 라이프’는 ‘브라보’”
-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창간 5주년을 맞아 열린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산문‧미니자서전‧국문 서예 등의 분야에 시니어를 비롯한 초등학생, 청년 등 전 세대가 지원했다. 9월 1일 홈페이지를 통한 당선작 발표에 이어, 10월 16일에는 시상식이 마련돼 영광의 얼굴들과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역 지침 준수 하에 소규모로 진행됐다. 자리에 함께한 임혁 이투데이PNC 대표는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에 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청춘이다”라며 수상자들을 독려하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나이 듦의 품격’, ‘대한민국 시니어로 산다는 것’, ‘새로운 시니어의 정의’ 등 세 가지 주제로 펼쳐진 이번 공모전을 통해 우리 중장년 세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다. 전 연령대가 참여한 수많은 작품은 윤정모 소설가를 비롯한 문인, 서예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상에는 산문 부문의 ‘울퉁불퉁 삶을 품어주는 보자기’가 올랐다. 대상 수상자 정순옥 씨는 “50대 중반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정을 표출할 통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글이었다”며 “60대에 들어서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자꾸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번 대상을 계기로 큰 자신감을 얻었고,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써서 내 이름이 박힌 수필집을 두 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아울러 “공모전의 주제를 고민하며 나이 듦의 소중한 가치에 눈 뜰 수 있었다. 단순히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뒷걸음치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부문별로는 시 이춘실(다시 피고 있었다), 산문 윤여임(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미니자서전 이호권(마늘이 잘 마르듯 그렇게 나이가 든다), 국문 서예 이은희(한글 판본체) 씨가 수상했다. 이춘실 씨는 “떫은 감처럼 덜 익은 시를 뽑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100세 시대에 앞으로 20~30년을 어떻게 살까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이번 공모전 당선이 ‘나이 들어도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라는 희망과 용기를 줬다”며 제2청춘을 잘 살겠노라는 다짐을 내비쳤다. “최근 뜻하지 않게 생업을 접게 돼, 글로써 마음을 정리해보고 싶었다”는 윤여임 씨는 “한때 글을 쓰다가 3년 정도 절필했는데, 이번 계기를 통해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이 라이프가 브라보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다”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남편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한복을 입고 고운 자태로 참석한 이은희 씨는 “붓을 잡은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동안 숱한 공모전에 참여했지만 낙선이 허다했다”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으니 제2인생에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붓을 내려놓지 않고 앞으로도 나만의 개성과 생각을 알리는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다지기도 했다. 이날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이호권(43) 씨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노후 대비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이번 공모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2인생을 고민하고 그릴 수 있었다. 이런 계기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전화로나마 소감을 들려줬다. 수상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주춤했던 마음이 공모전을 통해 활짝 열리며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내놓았다. 이들이 그러했듯, 수많은 시니어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할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의 다음을 기대해본다.
- 2020-10-22 10:19
-
- 극단 세로보기, <남편을 죽이는 서른가지 방법> 21일 개막
-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동문을 중심으로 구성된 극단 세로보기(대표 주종현)가 오는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연극 을 선보인다. 주종현 대표는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설립 25주년을 기념한 공연으로 소통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이번 작품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연극 은 평범해 보이는 부부 사이의 감춰진 갈등을 여성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이 작품은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원작자인 서미애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연출은 연극 ‘썬더스’, ‘웰컴투 아라다이스’, ‘러브좀비메모리’ 등을 연출한 최지환씨가 맡았으며 배우와 스태프으로는 고재진, 송글송글, 이상돈, 정주란, 주종현, 신표, 서빈씨가 참여한다. 한인수 역을 맡은 고재진은 “무대 연기에 숨어 있는 인문학적인 면을 공부할 때마다 연극이란 장르의 위대함을 느낀다”며 이번 공연에 임하는 소감을 전했다. 연극 은 평일 오후 8시, 공휴일 오후 3시와 6시 총 4회에 걸쳐 무대에 오른다.
- 2017-09-15 13:42
-
- “영원한 나의 영웅, 인호 형 보고 싶어요”
-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 2017-08-28 09:28
-
- [BML 칼럼] 단풍에 대하여
- 한국과 일본에 분포돼 있는 홍단풍은 단풍나무과의 낙엽활엽 교목입니다. 처음엔 가지가 녹색이었다가 차츰 회색이 됩니다. 새로 난 잎은 붉은색인데, 자라면서 다른 나무들처럼 녹색으로 바뀌었다가 가을이면 문자 그대로 빨간 단풍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유치환의 시 ‘춘신(春信)’에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가지’라는 표현이 있지만, 홍단풍은 나무등, 나무불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그 빨강이 깊고 강렬합니다. 올해에도 홍단풍은 온 산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단풍의 楓이라는 글자는 나무[木]와 바람[風]으로 돼 있습니다. 나무에 가을바람이 스며들면 잎 색깔이 달라집니다. 빨간색, 노란색,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은 이제 나뭇잎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잎이 활동을 멈추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자가분해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안토시안이 생성되는 종은 붉은색 또는 갈색 계열의 단풍이 들고, 그렇지 않은 종은 노란 단풍이 듭니다. 노란색 색소는 원래 잎 속에 있었으나 그동안 엽록소의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본색(本色)이라고 합니다. 올해 단풍은 9월 27일 설악산을 떠나 하루 20~25km씩 남하해왔습니다. 여름철 가뭄이 심해 첫 단풍은 예년보다 1주일가량 빨랐고, 색깔도 어느 해보다 더 선명합니다. 단풍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홍엽(紅葉)입니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닙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단풍 시는 중국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의 작품입니다. “멀리 가을 산 위로 돌길이 비껴 있고/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네/ 단풍든 숲의 저녁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더니/서리 맞은 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 붉은 단풍을 노래한 마지막 행이 천하의 명구로 꼽히고 있습니다. 왕희지(王羲之)의 7남이며 아버지처럼 서예로 유명했던 왕헌지(王獻之)는 회계산(會稽山) 북쪽의 산음(山陰)을 여행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음의 길을 가노라면 산과 강이 서로 마주치면서 어우러져 하나하나 볼 틈이 없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때에는 마음속의 정회를 표현하기 어렵다.” [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 이 말에서 응접불가(應接不暇)라는 성어가 생겼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응접불가인 단풍의 명소는 요즘 가을 정취를 즐기는 행락객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갈수록 가을이 짧아져 단풍은 더 황홀하고 소중한 선물처럼 보입니다. 인간에게도 ‘꽃의 나이’가 있고 ‘단풍의 나이’가 있습니다. 인간도 식물처럼 잎이 나고 꽃이 피어 푸른색으로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하다가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색깔의 단풍이 되느냐는 그 자신의 기질과 천성, 서식하고 활동해온 곳의 기후 환경 등 외부 여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식물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늘 향해 팔 벌리고 서 있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은 나무’라는 생각을 펼친 문학작품도 많습니다.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한광일)를 읽어봅니다. “나뭇잎은 어쩌면/나무들의/생각인지도 몰라//봄/뾰족뾰족/돋는 생각//여름/푸릇푸릇/펼쳐낸 생각//가을/알록달록/재미난 생각//‘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온갖 생각/다 떨쳐버리고/다시 생각에 잠기는/겨울” 단풍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단풍이 든 인간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면 어떻게 아름다운가, 나무가 단풍 든 잎을 드디어 다 떨구고 겨울을 준비하듯이 사람도 그렇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붉다가 푸르다가 다시 붉어지는 홍단풍의 본색은 어떤 것일까.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모습이 고유한 나인가, 어떤 게 나의 진면목인가, 남들이 나를 어떤 얼굴로 기억할까.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은 여러 가지이지만 사람들은 수염을 기른 얼굴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대푯값입니다. 이런 조어가 가능하다면 초단풍(初丹楓), 만단풍(晩丹楓)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잎이 날 때의 모습과 단풍이 들었을 때의 모습이 다르듯 인간도 초단풍과 만단풍 시절의 모습이 같지 않습니다. 풍모는 물론 풍격도 달라집니다. 젊어서 무슨 일을 했든 사람을 평가하려면 다만 그 말년을 보라고 했습니다. 만단풍이 아름답고 멋져야 합니다. 최근 조선 선비들의 풍류와 우정을 알게 해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정조~순조 연간의 김조순(1765~1832) 서영보(1759~1816) 이만수(1752~1820)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고, 아주 친한 벗들이었습니다. 1806년 10월 중순(양력), 금강산 유람을 떠난 서영보가 서울에 있는 김조순과 함흥에 관찰사로 가 있는 이만수에게 금강산 단풍을 시와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가 모두 이 단풍잎으로 덮여 있음을 멀리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단풍을 받은 이만수는 마침 짓고 있던 건물에 홍엽루(紅葉樓)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벗이 보내온 단풍잎과 편지를 ‘홍엽첩(紅葉帖)’이라는 시집으로 엮어 서영보는 물론 김조순에게도 보냈습니다. 이만수는 당대 최고의 고문가(古文家)로 명성이 높던 홍석주(1774~1842)에게도 글을 부탁해 홍엽첩에 얹었습니다. 김조순은 이와 별도로 화가를 시켜 그 단풍을 그리게 하고 글을 붙여 ‘홍엽전조첩(紅葉傳照帖)’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824년, 단풍으로 물든 묘향산을 여행하던 김조순은 단풍가지 하나를 꺾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시를 썼습니다. 시에 붙인 주석에 서영보가 금강산 단풍을 보내온 일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단풍잎을 연적의 갑 안에 넣어두었더니 지금까지 손상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무려 18년입니다! 단풍은 선비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시서화로 유명한 표암 강세황 등 많은 사람의 집이나 누각에 홍엽루, 홍엽정 등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단풍을 보면서 200여 년 전에 단풍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더듬어봅니다. 삶의 성숙과 아름다운 우정, 소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벗끼리 서로 통하는 것을 신교(神交), 그런 만남을 신회(神會)라고 한다는데, 홍석주는 ‘단풍의 우정’을 “천고의 풍류요 운치 있는 일”이라고 홍엽첩에 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풍은 떨어져 장차 사라지지만 그 정화(精華)만은 남아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쳐도 그 색은 더욱 선명하게 됩니다. 군자의 만절(晩節)이 이와 같은 법입니다.”
- 2015-11-05 07:42
-
- [우리 세대 이야기] 한국전쟁의 악몽을 딛고선 ‘호랑이들’
- 그날 동네 꼬맹이들은 죄 동구 밖 팽나무 숲 그늘에 모였다. 스무 명은 족히 될 성싶었다. 읍에서 나왔다는 아저씨 둘이 아이들을 줄지어 앉혔다. 자 자, 꼬맹이들은 앞쪽에 앉고 큰 놈들은 뒤쪽에 앉아, 알았지? 이 더운 날 흰 와이셔츠에 양복저고리까지 걸친 걸 보면 아저씨들은 분명 읍내의 큰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분명했다. 글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그 더운 여름날 팽나무 숲의 기억 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라는 아저씨들 따라 찬송가 몇 구절을 부르고 나면 공책과 연필, 운 좋으면 초콜릿까지 얻어 걸릴 수 있었다. 땅바닥에 퍼질고 앉은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저씨들을 보고 있는 사이 한 아저씨가 먼저 왜 이리 덥지? 하면서 천천히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얼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아저씨의 어깨를 한 바퀴 두르고 겨드랑이 아래로 내려온 건 벨트.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집이며 거기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빛나는 권총 손잡이까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다른 아저씨도 저고리를 벗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권총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만 봤던 권총의 실물을 내 동네에서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볼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미군 열차에 돌멩이 던진 놈, 누구야?” 두 아저씨가 우리들 앞에 굳건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좀 전 같이 웃음 띤 얼굴이 아니었다. 노여움을 가득 묻힌 낯빛, 무서운 눈초리... 금방이라도 빵빵, 우리를 향해 총을 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쥔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요란한 매미소리도 귓전에 들리지 않았다. 한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나온 아저씨들이다. 우리가 왜 너희를 여기 불러 모았는지 알겠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모조리 경찰서로 끌고 갈 것이다. 알겠어? 응, 그저께 저녁 여기 동네 앞을 통과하는 미군 열차에 돌멩이 집어 던진 놈, 누구야? 돌 던진 놈 있지, 어느 놈이야?”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옆 자리 경렬이가 바르르 몸을 떨었고 내 앞의 용수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쟁쟁한 적막이 흐르는 사이 다른 아저씨가 말했다. “허, 요놈들 봐라. 말을 않겠다 이거지?” 그가 가볍게 오른손을 옮겨 제 권총집을 쓰다듬는 순간이었다. “얘가 그랬어요! 얘가 돌 던졌어요!” 누군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뒤쪽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등하교 때마다 곧잘 우리에게 제 책보자기를 떠맡기던 민호였다. 그가 온몸을 떨면서 제 옆의 경수를 가리켰다. “넌 안 그랬니? 너도 했잖아! 얘, 얘도 돌 던졌어요. 나만 아니에요!” 튕기듯 일어난 경수는 민호뿐만 아니라 제 앞뒤 애들까지 한꺼번에 짚었다. 그게 신호였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발광하듯 제 동무들을 고발하기. 마침내 내 단짝 경렬이 나보다 먼저 나를 가리켰고 나 또한 약간이라도 늦으면 죽을세라 앞의 용수를 지적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이내 팽나무 숲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치며 자란 세대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산골 마을 앞에는 경부선 철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해질 무렵이면 미군들을 잔뜩 태운 군용열차가 마을 앞을 통과했다. 열차가 오기 전부터 철둑 이편저편에 서 있던 마을 아이들은 열차가 다가오기 무섭게 두 팔을 흔들어대며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쳐댔다. 그러다보면 실제로 열차에서 초콜릿이며 오렌지가 던져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뚜껑을 따지 않은 C레이션이 통째로 얻어 걸리는 횡재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무렵 난생 처음 본 일회용 종이컵, 플라스틱 스푼 등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열차를 탄 미군들의 숫자며 그들이 던져주는 ‘물건’의 양이 눈이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동네 아이들은 예사로 기차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감자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미군들 또한 감자로 응수해 오자 급기야 돌멩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형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은 누구 하나 동무를 찾는 법 없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골목을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의 소리조차 한 달 넘게 사라졌다. 아이들보다 닭이 더 많았던 교실 많은 또래의 아이들이 통학 열차를 타고 대구를 내왕하며 중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폐광이 있는 산 아래의 농림학교에 다녔다. 비인가 중학 과정의 이 학교의 교실엔 아이들 숫자보다 닭들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영어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추 모종내기, 깻잎 따기, 염소 키우기, 하천 부지 개간에 동원됐으며 따로 닭들을 책임진 나는 틈날 때마다 사료를 주고 닭똥을 치웠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계란을 싣고 자갈 많은 신작로를 달렸다. 볕 좋은 날이면 유치환 시집이며 봔 루운의 같은 책을 들고는 닭들을 피해 폐광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일제 때 코발트를 캐냈다는 이곳엔 고대의 성전 같은 건조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고 그 아래에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캄캄한 갱들이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더러 애들과 함께 관솔불을 켜서 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인체의 해골이며 뼈다귀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뒤 내가 고향을 떠난 뒤에 알았다. 명색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입을 것이 마땅찮았으며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양은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간장에 비벼 먹는 꿈을 꾼 날에도 나는 계란을 싣고 읍내에 갔으며 구판장에 그것을 넘긴 뒤에는 또 하릴없이 4학년 때 짝꿍이었던 수리조합장 딸이 살고 있는 기와집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호롱불 켜진 대밭 아래 초가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 맞춰 역으로 가면 통학열차에서 내리는 교복 입은 그 아이를 먼 데서라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내겐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해 고생 끝 대학 입학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쥔 뒤 나는 무작정 서울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았던 못된 아줌마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점심 저녁을 건너 뛴 아이가 혼자 꼬르륵 소리를 내며 옆에 앉아 있는데도 그녀는 삶은 계란 네 개를 차례차례 혼자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용산역에 내린 나는 멀리 인왕산만 바라보며 독립문까지 타박타박 걸어 형님의 셋방을 찾아 들었다. 형들 덕에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행운이었다. 간신히 교복을 걸치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공부와 무관하게 대학 진학을 할 만한 집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더러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문학을 해보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등록금 적은 국립대학 역사학과를 지망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곤 낭인 생활을 했다. 입시학원에 가는 대신 2본 동시상영의 싸구려 영화관을 전전했으며 노모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차례 공무원 시험을 보기도 했다. 다음해 간신히 대학에 적을 올려놓고는 가정교사, 무허가 학원 선생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대학은 학기 중에도 수시로 교문을 닫았기에 출석일수를 걱정할 일은 드물었다. 간혹 선배들에게 끌려가서 통일, 노동, 매판자본 등등의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거창한 담론들이 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지하 유인물을 펴낸 주모자로 오인 받아 성북경찰서 취조실에서 하룻밤을 자는 때에는 까닭 없이 그 어린 날 팽나무 숲의 광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더 이상 형사들이며 권총조차 무섭지 아니한데 수치심이 온몸을 감싸왔다. 갈래머리를 한 뽀얀 피부의 조합장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마흔넷에 청상이 되어서도 아들 아홉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해 가을, 종로 3가의 한 찻집에서 그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런데 딴 애들 몰래 지우개를 쥐어주던 그녀의 손길 하나까지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대학 강단 떠난 후 소설에 새삼 감사 몹시 소설이란 걸 쓰고 싶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던 듯싶다. 정한숙 선생 담당의 ‘소설창작실습’의 과제를 닷새 만에 완성했다. 바닷가 결핵환자 요양소가 이야기의 주 무대로 돼 있지만 거기엔 내 고향의 코발트 광산은 물론 동구 밖 팽나무 숲과 조합장 딸아이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생전 처음 단편소설의 분량을 채운 그 소설이 그해 겨울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올해가 내 정년이다. 8월 말일자로 나는 34년간 몸담았던 대학의 교단을 떠나는 것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50대 초 중반에 직장을 떠난 것에 비하면 나는 ‘참 길게도 해먹은’ 셈이다. 쥐뿔의 학위도 없는 내가 일찌감치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다 문학 덕이었다. 스무 해 넘게 문학 강의만 해 오던 내가 정년 10년을 남겨 놓고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학생들만을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수업했으며 그 인연으로 중국 백주(배갈)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갖게 되었다. 백주 관련 책을 내고 바깥으로 백주 강의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두 나라 관계 인사들과 함께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렇듯 중국을 새롭게 만난 것도 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된다. 퇴직 후에도 나는 서울 집에만 머물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계룡산 줄기 끝에 앉은 농가 한 채를 빌려 일주일에 사나흘을 거기서 지내기로 한다. 텃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또 좀 더 깊이 중국을 공부하면서 내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부끄럽고 고단했던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이 내 인생의 남은 세월에서도 각성과 용기의 원천이 돼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최 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 저서: 창작집 ‘식구들의 세월’ ‘손님’ 등. 장편소설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산문집 ‘시가 있는 간이역’,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 2015-03-0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