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4

어머니의 느린 걸음이 가르쳐준 인생의 속도

입력 2026-06-14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행복상]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나의 유년은 대전역 중앙시장 언저리, 회색빛 보도블록 위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대전역은 언제나 이별과 만남의 소음으로 가득했고, 그 소음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가족은 생존이라는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신체적 장애를 얻으셨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진 자리, 어머니는 그 무너진 기둥을 온몸으로 떠받치며 가장이 되셨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포대기는 나의 집이자, 세상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아직 별빛이 가시지 않은 산등성이를 헤매며 고사리·쑥·달래 같은 나물을 보따리 가득 뜯어 오셨다. 그러고는 대전역 광장, 사람들의 발길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인도 구석에 낡은 신문지를 깔고 좌판을 펼치셨다. 어머니의 무릎은 늘 차가운 아스팔트와 맞닿아 있었고, 그 차가움은 포대기를 통해 어린 내게도 전달되곤 했다.​

종일 길바닥에 앉아 나물을 파는 어머니의 유일한 성찬은 역전 매점에서 산 삶은 계란 두 알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끼니를 위해 쓰는 백 원, 이백 원을 피 같은 돈이라며 아까워하셨다. 하지만 등에 업힌 내가 배고픔에 지쳐 울음을 터뜨리면, 어머니는 서둘러 계란을 까서 노란 알맹이를 내 입에 밀어 넣어주셨다. 퍽퍽한 노른자가 어린 자식의 목에 걸릴까 봐, 어머니는 당신의 마른침을 몇 번이고 모아 삼키며 나를 달래셨다. 정작 본인은 흰자 한 점조차 입에 대지 않으셨다. 껍질에 붙은 아주 작은 조각까지 손톱 끝으로 긁어 내 입에 넣어주던 그 손길은, 가난이라는 괴물 앞에서도 자식만큼은 지켜내겠다는 한 여자의 처절한 기원이었다. 지금도 삶은 계란의 냄새를 맡으면, 대전역의 매캐한 공기와 어머니의 마른 등에서 나던 땀 냄새가 섞여 기묘한 슬픔이 밀려온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의 이른 봄날이었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대전역 광장에는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생리 현상 때문에 화장실에 가야 했다. 나물 보따리와 어린 나를 좁고 지저분한 역 화장실 칸까지 데려갈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근처에서 동냥하던 낯선 아주머니에게 잠시 나를 부탁하셨다. “아지매, 우리 애 잠깐만 봐줘유. 금방 올게유.” 그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뻔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어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여자의 눈빛이 돌변했다. 여자는 내 고사리 같은 손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역 광장 너머로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여자는 내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길가에 서 있던 택시에 나를 밀어 넣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장실에서 맨발로 뛰쳐나온 어머니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신발 한 짝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른 채, 헝클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비명을 질렀다. ​“내 새끼 내놔! 이 도둑년아! 내 새끼 살려내!” ​어머니는 달리기 시작하는 택시 앞을 온몸으로 가로막으셨다. 쇳덩어리 차체가 어머니를 칠 듯이 다가왔지만,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 보닛을 두드리며 절규했다. 당황한 여자는 나를 택시 밖으로 거칠게 밀치고는 차 문을 닫고 도망쳤다.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를 품에 안고, 어머니는 대전역 광장 한복판에서 짐승처럼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장사를 할 때도 내 손목과 당신의 옷자락을 튼튼한 무명실로 묶어두셨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무명실의 팽팽한 장력이 어머니의 허리에 전달됐다. 가난은 견딜 수 있어도 자식의 부재는 죽음보다 깊은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 무명실은 단순한 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한 여자의 눈물겨운 사투이자, 끊어지지 않는 운명의 탯줄이었다.

유괴 미수 사건 이후 어머니의 삶은 더욱 독해졌다. 아니, 치열해졌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식을 온전히 지켜내고 남부럽지 않게 교육해야 한다는 일념은 어머니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노동 현장으로 몰아넣었다. 대전역 행상이 없는 날에도 어머니의 손에는 물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새벽 4시, 마을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우리 집 마당 가마솥에서는 여물 끓는 소리가 하루를 깨웠다. 어머니는 남의 집 소를 대신 키워주는 ‘고지’를 하며 생계에 보탰다. 자욱한 수증기와 매캐한 장작 연기 속에서 어머니는 눈을 비벼가며 불을 지폈다. 솥 안에서 펄펄 끓는 여물의 열기보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속 타는 마음이 더 뜨거웠으리라.​

농번기가 되면 어머니의 몸은 열 개라도 부족했다. 모내기 철이면 허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거머리가 득실거리는 논바닥에서 하루 종일 모를 심으셨고, 가을이면 당신 몸집보다 몇 배나 큰 볏단을 짊어지고 논두렁을 누비셨다.

한번은 가을 수확철에 낫질을 하다 손가락을 깊게 베인 적이 있었다. 선홍빛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어머니는 병원에 갈 돈이 아까워 논둑의 흙을 상처에 짓이겨 바르고, 땟자국 묻은 헝겊으로 질질 동여맨 채 다시 낫을 드셨다.​ “엄마, 피가 계속 나잖아. 병원 가야 해.” 내가 울먹이며 말하자 어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으셨다. “안 아프다. 내 새끼 공부만 잘하면 엄마는 하나도 안 아파. 이까짓 거 흙 바르면 금방 낫는다.” 그때 어머니가 상처에 발랐던 것은 흙이 아니라 당신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이었음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손가락에 남은 그 삐뚤삐뚤한 흉터는 내가 받은 그 어떤 훈장보다 고귀한 헌신의 증표였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집안 형편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어머니 몰래 새벽 신문 배달 일을 시작했다. 새벽 4시, 고요한 골목을 가로지르며 나는 자전거 뒷좌석에 무거운 신문 뭉치를 실었다. 겨울 새벽의 칼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돼 뺨을 할퀴었고, 잉크 냄새 밴 신문지는 손끝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차가웠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신문을 던지며 달리던 중 멀리서 머리에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물을 이고 역으로 향하시는 길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재빨리 전신주 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들이 이 추운 새벽에 고생하는 것을 알면 어머니의 가슴이 미어질 것을 알았기에, 나는 숨을 죽이고 어머니의 지친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자박, 자박, 자박….”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어머니의 고단한 발소리가 귓가를 때릴 때마다, 나는 차가운 신문 가방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의 땀방울이 절대 헛되지 않게 하겠노라고. 반드시 공부해서 어머니를 저 무거운 보따리 아래서 내려오게 해드리겠노라고.

그 새벽, 신문지에서 나는 잉크 냄새는 나에게 세상 그 어떤 향수보다 강렬한 각성제였다. 나는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으며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 되고자 나의 모든 사춘기를 학업에 쏟아부었다.

국가고시를 치르고 최종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어느 초여름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집 앞 금강변으로 향하셨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강물은 평소보다 불어 있었고 흙탕물이 거세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 아들 고생했는데 다슬기국이라도 한 사발 끓여줘야지” 하시며 허리까지 오는 깊은 물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셨다.​ 그 순간 예기치 못한 급류가 어머니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이끼 낀 바위에 발을 헛디딘 어머니는 순식간에 거센 물살에 휩쓸려 하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허우적거리면서도 한 손에 든 다슬기 망태기를 차마 놓지 못하셨다. 망태기가 물을 먹어 무거워질수록 어머니의 몸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인근에서 낚시하던 사람들에게 극적으로 구조되어 목숨은 건지셨지만,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에 멍이 가득했다.​

나는 화가 나서 어머니께 소리쳤다. “그깟 다슬기가 뭐라고 목숨을 걸어! 엄마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어머니는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내민 망태기를 보며 힘없이 웃으셨다. “이거 해주고 싶어서…. 괜찮다, 안 죽었잖니. 우리 아들 합격하면 이 다슬기로 국 끓여서 동네 사람들한테 자랑해야지.”

그날 오후 기적처럼 합격 통지서가 배달됐다. 어머니는 대전역 광장에서 나를 부여잡고 “내 새끼, 장하다.”며 엉엉 우셨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자식의 앞길만 바랐던 한 여자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승전보였다. 그날 우리가 먹은 다슬기국은 세상에서 가장 비리고도 달콤한, 어머니의 목숨값과도 같은 성찬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의료기관의 전문가가 됐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나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얻었고, 어느덧 모든 현상을 효율성과 수치로만 환산하는 차가운 도시인이 돼 있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금이었고, 환자는 데이터였으며, 나의 하루는 1분 1초 단위로 쪼개진 효율의 시계에 맞춰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생을 철인처럼 일만 하셨던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패혈증으로 쓰러지셨다. 중환자실(ICU) 대기실,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직 하루 세 번 주어지는 5분간의 면회만 기다리는 절박한 보호자가 된 후에야 나의 오만함을 깨달았다.​

어느 새벽 3시, 어머니의 침상 옆 모니터 비상등에 빨간불이 켜지고 의료진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보호자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분들의 시간을 믿고 기다려줘요. 저분들이 쓰는 저 치열한 시간이 환자분에게는 생명의 줄이니까요.”

그 순간 나는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 저 안에서 의료진이 사투를 벌이는 1분 1초는 30년 전 대전역에서 택시를 가로막았던 어머니의 시간과 같았다. 금강의 차가운 급류 속에서 다슬기 망태기를 놓지 않았던 그 필사적인 사랑의 시간과 닮았다. 나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그 귀한 시간들을 난도질하며 살아왔던 나의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긴 후 항균제 부작용과 합병증으로 고통받으실 때, 나는 매일 다루는 영상 이미지(MRI, CT) 뒤에 숨겨진 인간의 비명을 직시했다. 예전에는 그저 ‘병변’으로만 보였던 흑백의 그림자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한 인간이 겪는 지옥 같은 고통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퇴원 후 어머니를 ​6개월간 집으로 모시고 요양하며, 나는 내 생애 가장 느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의 마비된 다리를 주무르고, 한 숟가락의 죽을 떠먹여 드리며 나는 비로소 ‘존재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아들아, 천천히 정성을 담아야 따뜻함이 전달되는 거란다. 기계로 찍는 사진도 사람 마음이 담겨야 병이 보이는 법이야.”

​어머니가 힘겹게 내뱉으신 그 한마디는 나의 직업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나는 더 이상 단순히 장기를 촬영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와의 느린 걸음을 통해 배운 ‘공감의 빛’을 환자들에게 투사하는 의료인이 되었다. 내가 찍는 영상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대전역 광장에서의 절규일 수도, 금강의 급류 같은 절박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에 새겼다.

어머니는 결국 긴 투병 끝에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 하지만 당신이 남긴 교훈은 내 삶의 모든 세포 속에 살아 숨 쉰다. 대전역 광장에서 삶은 계란 두 알로 허기를 달래며 자식을 품으셨던 어머니, 새벽의 칼바람을 뚫고 신문을 배달하던 아들의 비밀을 말없이 지켜주셨던 어머니, 금강의 거친 물살 속에서도 자식의 찬거리를 놓지 않으셨던 그 위대한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효율이라는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내어주는 ‘절대적인 시간’과 ‘존재’ 자체에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어머니, 이제는 당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나물 보따리도, 차가운 강물도, 숨 막히는 병실의 산소호흡기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당신이 어린 내 손목에 묶어주었던 그 사랑의 무명실을 이제는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이제 그 실을 환자들의 아픈 부위를 잇고, 누군가의 꺼져가는 생명을 보듬는 데 쓰겠습니다. ​어머니가 묶어주신 그 튼튼한 무명실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의 아들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영원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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