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던 인사, 특히 고령 유명인의 이름이 인터넷에 회자되면 ‘혹시 돌아가셨나?’ 생각한다. 몇 년 사이에 생긴 달갑지 않은 버릇이다. 지난 일요일 밤, 그렇게 김금화 만신의 부고를 접했다. 23일 새벽에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매체가 실시간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그저 됐다 싶었다. 88년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으니 고인은 참으로 편하겠다. 만신의 지인에 따르면 22일 점심식사 뒤 호흡 곤란으로 119 구급대에 실려 인근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콩팥 기능은 이미 망가진 후였고 혈액 투석으로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운명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김금화 만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 무당이라지만 신앙적 의미를 떠나 우리 무속을 문화예술의 경지로 이끈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굿판은 곧 무대였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명 나는 오페라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수차례 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미와 전통예술을 전파해온 '한류의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김금화 만신과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바로 나인 듯싶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18년 2월호에 게재한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란 제목의 기사가 최근 인터뷰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와의 인터뷰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세가 많으시고 몸도 쇠약했다. 혹여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면 도리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참이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김금화 만신의 무릎은 말을 안 들었고, 입 속 상황도 좋지 않았다. 특히 얘기하거나 먹을 때 고생이 심했다. 오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손님들을 만나 점을 쳤으니 힘들게 뻔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재를 고사하면 물러나야지 싶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했고 사진작가와 함께 자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너무 시간을 뺏지 말아달라”는 김금화 만신의 말로 시작한 인터뷰. 지금까지 많은 기자를 만나와서일까? 취재 왔다는 말에 늘 했던 옛 얘기를 꺼냈다. 일반적으로 아는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 무병을 앓고 외할머니에게 신을 받고 큰무당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생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선생님 그런 거 말고요. 다른 얘기 해주세요. 요즘 사는 얘기요.”
막상 요즘 얘기하라고 하니까 말문이 막혔나 보다. 그렇게 첫 만남은 20여분만에 끝이났다. 두 번째에 만나 어릴 적 꿈에 대한 이야기와 소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과 함께 하는 만신 말고 여자로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인터뷰의 의도 자체가 ‘신 말고 김금화’였으니 나름 신선했던 인터뷰가 됐다. 그가 나온 잡지가 발간 됐을 때 또다시 찾아가 만났다. 달콤한 케이크도 사 들고 말이다. 같이 밥도 먹고, 떡도 나눠 먹었다. 김금화 만신을 3번 이상을 만났으니 복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입이 참 아플 텐데 기운이 어디서 나는지 많은 조언을 해준 기억이 난다.
김금화 만신의 근황을 접한 것은 돌아가시기 딱 한 달 전인 1월 23일. 회사 이메일로 누군가 간곡하게 김금화 만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잊지 말고 연락을 해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 이메일을 받은 상황을 전할 겸 김금화 만신의 일을 돌보는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은 “현재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병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한 상황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나라도 가서 만나겠다고 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조만간 슬픈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부고를 접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그때 걸었던 전화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장 말에 의하면 곱고 예쁜 모습만 남기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나 또한 눈물 보다는 미소가 지어진다. 류머티즘으로 다 굽은 손가락이 펴지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무릎도 곧게 펴진 김금화 만신을 상상하니 말이다. 부디 꽃신 신고 사뿐사뿐 세상 소풍가시길 바란다.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