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인간관계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낀 세대’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부장급 위치인 그들은 베이비붐 세대 상사와 MZ세대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고, 가정 내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부양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는 양쪽에 악영향을 끼치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패션·음악 등 취향을 드러내며 ‘나’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들. 지금의 ‘낀 세대’는 1990년대 20·30대를 보낸 X세대(1965~1979년)다. 대한민국에 등장한 첫 개인주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려했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현재는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 IMF 직격탄을 맞은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조직에 순응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성세대가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구독자 19만 명의 유튜브 채널 ‘유세미의 직장수업’을 운영하는 유세미 작가는 “낀 세대라는 표현은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본전을 찾겠다는 ‘본전의식’이 강한 X세대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마지막 세대다. 기성세대와 생각이 비슷한 그들은 후배인 MZ세대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MZ세대는 관계에 있어 당연히 개인이 중요하다. 그런 그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바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서 “이러한 괴리감이 X세대를 번번이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안 그랬는데’라며 억울함을 표현해봤자 세대 차이만 확인하고 마음만 공허해질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X세대 마음의 짐
1974년생인 김재완 작가는 2021년 X세대 헌정 에세이 ‘나 아직 안 죽었다’를 펴냈다. 어른들의 말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 일했더니 어느덧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된 그는 지난 인생을 돌아본다. 어느 날 갑자기 팀장에서 좌천되면서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다시 일어섰고, 그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X세대를 대표하는 김재완 작가와 소통 전문가 유세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202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중위 연령은 46.1세다. X세대는 사회·경제적으로나 중심부를 차지하는 허리 세대다. 김재완 작가는 X세대 마음의 짐 첫 번째로 ‘부모에게 가진 부채감’을 언급했다. “X세대는 부모 부양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책임감이 크며,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다”라는 그는 부채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완 작가의 어머니는 고향인 경북 상주에 홀로 거주한다. 김 작가는 효도하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집에 가면 피곤해져서 괜히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는 “나도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몇 년 전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오히려 좋아졌다. 자주 못 찾아뵙는 대신 한 번 갔을 때 얘기를 더 나누려고 하고, 전화도 자주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더 잘 통하더라”라면서 “표면적으로는 불효자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효자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대홍기획 데이터 인사이트 팀의 책 ‘세대 욕망’에서는 “X세대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있다면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관념을 형성한 것”이라면서 “X세대는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로망을 대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주의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은 부모에게 경제적이든 정서적이든 충분히 지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에게는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관련해 김재완 작가는 “우리는 자녀 교육과 관련해 오만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짚었다. 39세에 결혼해 딩크족이라는 그는 다소 조심스러워하면서, 사회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세상의 풍파로부터 애들을 막으려고 할 게 아니라,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을 전했다. 유세미 작가는 자녀와의 소통법에 대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가 아니라,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에 대해 얘기해야 가족 관계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재완 작가는 회사에서는 ‘격차감’을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라떼는 말야’(나 때는 말야)라면서 꼰대같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김 작가는 “핵개인화 시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MZ세대 후배들과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면서 “책, 야구, 고양이 등 무엇이든 좋다. 그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악하고 얘기를 나누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유세미 작가도 조언을 전했다. MZ세대는 과거와 달리 직장 상사를 명령과 통제하는 윗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코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유 작가는 “자신의 역할을 코치라고 정립하면, MZ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훨씬 수월해진다. MZ세대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상사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나에게 달린 솔루션
낀 세대가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김재완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전했다. 김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군대 제대했을 때, 두 번째는 결혼했을 때, 세 번째는 43세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을 때다”라고 밝혔다. 당시 ‘글을 써보라’는 아내의 추천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역사 관련 글을 쓴 그는 딴지일보에 연재하게 됐고, 이후 책도 펴냈다. 그러면서 ‘작가’라는 부캐(부캐릭터)를 갖게 됐고,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본캐는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다 선택당했지만, 부캐는 내가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김재완 작가는 60대가 되기 전에 부캐를 만들 것을 추천했다. 사실 김 작가는 한 달 전 퇴사했다. 회사 생활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했지만, 더 늦기 전에 꿈을 펼쳐보고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올해까지는 여유롭게 글을 쓰며 부캐가 본캐가 될 수 있을지 알아볼 계획이다. 김 작가는 “앞으로는 70대, 80대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이것저것 해보면서 찾아야 한다”면서 “내가 행복해야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인간관계도 좋아진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취미활동 또는 봉사활동 등을 하다 보면 마음 맞는 친구가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세미 작가는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에 매달리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작가는 “별 의미 없는 모임, 단톡방, 각종 경조사를 챙기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을 더 귀하게 챙기고 돌봐야 한다”라면서 “나이 들수록 넓고 얕은 인맥보다는 좁고 깊은 인맥이 중년의 안정감과 만족감에 더 영향을 끼친다”고 인간관계 솔루션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중심이 ‘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유세미 작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관계의 스트레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신경 쓰면서부터 발생한다. 효도하는 자녀, 자랑스러운 부모, 일 잘하는 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낀 세대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관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만약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판단된다면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작은 목표라도 세워보세요. 목표를 달성하면서 성취감을 느껴보는 거죠. 점점 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남에게 휘둘리면 재미없습니다. 휘둘리면 그게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죠. 그것을 피하려면 타인의 평가나 시선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일상의 방식을 고수하세요.”
유세미 작가의 상황별 꿀팁
회사 스트레스, 집에 가져가지 않기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혼자 삭히다 보니 화병이 생기죠.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임원한테 매출 때문에 온갖 모욕적인 잔소리를 들은 김 부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는 저녁 먹는 와중에도,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속에 품어온 검은 봉지를 열어 회사 쓰레기를 봅니다. 임원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나한테 실망해서였을까? 아니면 나가라는 시그널인가? 별생각을 다 하죠. 그러나 그 시간에 임원은 뭘 하고 있을까요? 예능 프로그램을 신나게 웃고 떠들며 보다가 기분 좋게 잠들었을 겁니다. 김 부장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한 채 말이죠. 결론은 회사 쓰레기를 가슴에 품고 집에 와서 꺼내보고 또 꺼내본 김 부장만 손해라는 겁니다. 회사 쓰레기는 회사에 두고 오세요. 집에 와서 회사에서 있었던 부정적인 일이 생각나면 ‘아, 내가 또 회사 쓰레기를 가지고 왔구나’ 떠올리고 거기서 멈추는 마음 훈련을 해보세요. 한두 번으로 되지는 않지만 자꾸 연습하면 회사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게 됩니다. 회사와 집을 분리하는 연습이 스트레스를 막는 데 가장 좋습니다.
신뢰받는 ‘일잘러’식 말하기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직장에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상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직장 생활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말하세요. 누가 들어도 오해하지 않게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세요. 두괄식으로 표현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에게 보고할 때 ‘상무님, OO업체 미팅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3가지 정도로 묶어서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둘째, 애매하게 피드백하지 마세요. 핵심과 근거를 들어 명확하게 이야기하세요. 셋째, 시니컬한 말투는 버리세요. ‘그거 어차피 안 돼’, ‘하기는 하겠는데 되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누가 일하고 싶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개선할 수 있을까’,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마련입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티끌 모아 태산’ 전략이 주목받는 짠테크 시대. 애먼 돈을 낭비하지 않고 숨은 돈까지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절약 방법을 소개한다.
PART1 | 복지 & 금융 | 무심히 방치한 돈, 몰라서 지나친 혜택. 유심히 알아보자.
[1] 정부 보조금 찾기
정부 지원금 혜택을 모르고 지나친다면 아까울 것이다. ‘정부24’ 홈페이지 내 ‘보조금24’ 메뉴에 접속해 연령, 거주지, 소득 등의 정보를 입력하면 개인 맞춤형 정부(지자체) 보조금 정보를 한 번에 볼 수 있다. 진행이 어렵다면 ‘보조금24 활용안내서’ 앱을 찾아보거나, 주민센터에서 ‘보조금24 정보제공 동의 신청서’ 작성 후 자녀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국민비서 구삐’ 알림 신청 또는 ‘보조금24 신청알리미’ 앱을 설치하면 관련 정보를 때맞춰 알려준다. 복지로 홈페이지를 통해 ‘맞춤형 급여안내’(복지멤버십) 서비스를 신청하면 개인 맞춤형 복지 정책을 생애주기에 따라 안내받을 수 있다.
[2] 카드 포인트 현금화하기
야금야금 쌓인 카드 포인트도 모이면 쏠쏠하다. 카드사마다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이, 금융결제원 ‘계좌정보 통합관리서비스’ 또는 여신금융협회 ‘카드포인트 통합조회 시스템’을 이용하면 된다. 모아둔 카드 포인트를 확인해 현금화(계좌이체) 또는 기부도 가능하다. 금융결제원 사이트에는 카드 및 계좌 자동이체 목록도 나오니 불필요한 건은 해지 신청해 새는 돈을 막자.
[3] 숨은 보험금 받기
‘내보험 찾아줌’ 사이트에서는 보험 가입 내역과 미청구 보험금, 휴면 보험금 조회가 가능하다. ‘연락처 한번에’ 서비스를 신청하면 추후 숨은 보험금 발생 시 안내를 받아볼 수 있다.
[4] 무료 법률·세무상담 서비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무료 법률상담을 받아볼 수 있다. 전국 150곳 공단 사무소를 방문하거나, PC·모바일·전화 등을 통해 비대면 상담도 가능하다(예약 필수, 문의 :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세무 관련 상담은 ‘마을세무사’를 이용한다. 행정안전부와 지방자치단체 누리집에서 마을세무사 연락처를 확인한 후 전화·팩스·이메일로 상담 신청하면 된다(문의 : 읍면동 주민센터).
[5] 통신비 미환급금 돌려받기
‘스마트 초이스’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통신 미환급액 및 유료방송 미환급액을 조회할 수 있다. 휴대전화 구입 시 지원금을 받지 않았다면 선택약정 할인 25%를 받는데, 이 부분도 확인 가능하다. 그밖에 요금 감면이나 멤버십 혜택 등 통신비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6] 본인부담액상한제 확인하기
건강보험 가입자가 부담한 연간 본인일부부담금 총액이 본인부담상한액(소득 구간에 따라 상이)을 넘었을 경우, 초과액은 공단에서 부담한다. 사전급여(의료기관에서 처리)와 사후환급으로 나뉘는데, 사후환급은 직접 신청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 홈페이지를 통해 조회 및 신청 가능하다. 접속할 때 본인부담금 환급금(이중납부, 착오납부로 발생한 금액)도 확인해보면 좋다.
[7]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로 의료비 할인
만 65세 이상 고혈압·당뇨병 환자라면 월 3500원(진료비 1500원, 약제비 2000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질병관리청). 지역 내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 의료기관 및 약국에서 신청 가능하며, 해당 기관 정보는 지역 보건소에 문의하면 된다.
[8] 틀니·임플란트 70% 지원
만 65세 이상 건강보험 대상자라면 틀니와 임플란트 진행 시 본인부담금 30%만 내면 된다. 진행 후에는 지원받을 수 없으니, 계획이 있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 또는 보건복지상담센터(129)로 문의해보자.
[9] 휴면계좌 잔금 찾기
서민금융진흥원 ‘휴면예금 찾아줌’에 접속하면 휴면예금 계좌 목록을 알 수 있다. 확인된 잔고는 본인 계좌로 이체하거나, 기부금으로 전환 가능하다.
[10] 내일배움카드로 지원받기
자격증 취득 등 뭔가 배우려 한다면 해당 기관이 ‘내일배움카드’ 사용 가능처인지 알아보자. 카드 발급 후 5년간 300만~500만 원의 직업능력훈련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11]약국 할증 시간 피하기
약국 조제료 야간가산제도에 의해 평일 오후 6시(토요일은 오후 1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 사이 또는 일요일·공휴일에는 조제료의 30%가 할증된다. 일반의약품은 제외되며, 처방약이나 처방 일수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
PART2 | 쇼핑 & 여가 | 즐거움을 위한 소비. 쇼핑과 여가 활동에도 틈새 절약법은 있다.
[12] 유통기한 임박, B급 상품 저렴하게
요즘 마트에서는 유통기한 임박 제품이나 못난이 채소·과일 등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다. 쿠팡 등 온라인 마켓에서도 하자 없는 반품 상품 등을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다. 이러한 B급 상품 아이템을 모아 판매하거나 정보를 알려주는 ‘떠리몰’, ‘임박몰’, ‘이유몰’, ‘라스트오더’ 등의 플랫폼(앱)도 살펴보면 좋다.
[13] ‘1+1 제품’ 보관하기
편의점에서도 ‘1+1’, ‘2+1’ 등 덤 이벤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통기한이 짧아 소진이 어렵거나, 딱히 당장 필요 없는 덤 제품이라면 잠시 보관해두자. ‘우리동네GS’(GS편의점), ‘포켓CU’(CU편의점) 앱을 활용하면 가능하다.
[14] 기프티콘도 사고팔고
당근마켓, 번개장터 등 몇몇 중고거래 앱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사고파는 경제적 효과와 더불어, 자원 활용의 측면에서도 유익하다. 최근에는 기프티콘(모바일 상품권)도 중고거래가 가능하다. 일상카페, 니콘내콘, 기프티스타 등의 앱을 이용하면 된다. 카카오톡으로 받은 기프티콘의 경우 유효기간이 지나면 상품가의 90%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으니 이점 참고하자(선물 구매자가 아닌 수신자에게 입금, 앱 내 선물하기 메뉴에서 진행).
[15] 유류비 아끼고, 가벼운 드라이브
주유하고 나왔는데 근방에서 더 값싼 주유소를 발견했다면, 안타깝지만 손해를 본 것이다. 주유할 일이 있다면 한국석유공사 ‘오피넷’ 사이트또는 앱을 먼저 살펴보자. 시도별 최저가 주유소와 가격 정보, 현 위치를 중심으로 주변 가장 저렴한 주유소 등을 알 수 있다.
[16] 비교 쇼핑 생활화
같은 제품이라도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값이 다르다. 다양한 상품의 최저가를 알려주는 ‘비교 쇼핑’ 앱을 활용하자. 쿠차, 쇼핑스캐너, 다나와 등이 대표적이다. 핫딜 노마드족(특정 시간대에만 할인하는 핫딜 제품을 찾아다니는 소비자)을 위한 ‘세일포유’ 사이트에는 실시간 할인 정보가 올라온다.
[17] 돈·건강·환경 1석 3조, 알뜰교통카드 마일리지
만 65세 이상이라면 지하철이 무료지만, 그 이전 세대라면 ‘알뜰교통카드’로 교통비를 아껴보자. 버스·지하철 정류장까지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한 거리만큼 마일리지를 적립해주고(앱과 연동), 카드사의 추가할인 혜택 포함 최대 30% 대중교통비가 절감된다. 미세먼지 발령일에는 마일리지를 2배 제공하고, 모인 마일리지는 캐시백으로 전환해 교통비에 충당할 수 있다. 후불카드(신용카드, 체크카드)와 선불카드(티머니, 캐시비, 원패스) 중 신청 가능하다.
PART3 | 생활 & 관리비 | 1와트의 전력, 한 방울의 물도 아끼는 절약 고수를 위한 관리비 절감 노하우.
[18] 겨울철 난방비 폭탄 막기
가스비는 온도에 비례한다. 보일러 온수 온도를 40℃정도로 설정하고, 중간 수압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온수 온도를 55℃에서 40℃로 줄이면 월 8610원가량 요금이 덜 나온다(일 온수 사용량 200kg 가정). 빈방의 난방밸브를 잠그거나(월 2만5923원 절감 예상) 보일러를 청소해도(월 1만3007원 절감 예상) 가스비를 아낄 수 있다. 보일러 실내 온도는 20℃를 기준으로 1℃ 올라갈 때마다 난방비가 15% 상승한다. 18~20℃로 맞추면 적당하다. 보일러를 끄면 재가동 시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돼, 10시간 이내로 귀가한다면 외출 모드를 이용한다. 한파에는 외출 모드 대신 15~17℃ 정도로 설정하면 동파를 막으면서 집안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19] 졸졸 새는 대기전력 차단하기
세탁기,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등 대기전력이 있는 가전제품의 경우 전원을 껐더라도 콘센트를 꽂아둔 상태면 전력이 소비된다. 가정 내 대기전력왕은 바로 셋톱박스. TV(1.27W)의 10배(12.27W)에 이른다. 일일이 콘센트 관리가 어렵다면 대기전력을 차단해주는 콘센트타이머나 스마트 플러그를 사용하자.
[20]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 인센티브
전기, 상수도, 도시가스 사용량을 절감하고 감축률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부여하는 제도다. 온라인 탄소포인트제 누리집(서울시 거주자는 에코마일리지 홈페이지) 또는 관할 시·군·구 담당 부서를 방문해 신청 가능하다. 과거 1~2년간 월별 평균 사용량과 현재 사용량을 비교해 연 2회(6월, 12월) 현금, 상품권, 지역화폐 등의 형태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21] 돈 내고 버리는 폐가전, 무료로 처분하기
대형 생활 폐기물을 버리려면 시·군·구청을 통해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구매해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전제품의 경우 ‘폐가전무상배출예약시스템’을 이용하면 무료로 처분 가능하다. 회원 가입 절차와 수수료 없이 원하는 날짜에 예약 후 지정된 장소에 폐가전을 내놓으면 된다.
[22] 전력피크대 피하기
전력피크대에 전기를 사용하면 전기요금이 높게 나온다. 생산단가가 높은 발전기가 가동되기 때문이다. 겨울철 전력피크대는 오전 9~12시, 오후 4~7시이니 급하지 않다면 이 시간대를 피하자(봄·여름·가을은 오전 10~12시, 오후 1~5시).
[23] 마트 갈 때 들르는 빈병 무인회수기
고전적인 짠테크 방법으로 알려진 빈병 팔기. 최근에는 대형마트(롯데마트, 이마트 등)를 중심으로 빈병 무인회수기가 설치돼 있다. 보증금액은 빈병 용량에 따라 1병당 최소 70원부터 350원까지다(하루 최대 30병). 모아둔 빈병을 마트에 가져가 돌려받은 보증금을 장 볼 때 보태면 쏠쏠하다.
●Exhibition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예술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출품작은 174점으로 박수근 전시 사상 최대 규모다.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됐다.
유화 7점, 삽화 원화 12점도 최초로 공개된다. 특히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박수근 작품 33점 중 31점이 출품됐는데, 그중 ‘세 여인’, ‘마을풍경’, ‘산’ 등 3점은 최초 공개작이다.
미국 미술관에 소장됐던 ‘노인들의 대화’(1962년), ‘귀로’(1964년)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박수근의 은사인 오득영 유족이 소장해온 ‘초가’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 ‘웅크린 개’, ‘노상의 소녀’ 등도 첫 공개 작품이다. 2007년 5월 경매에서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된 이후 8년간 한국 미술 최고가 자리를 지킨 ‘빨래터’도 만날 수 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데뷔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서구의 추상미술이 급격히 유입되어 화단을 풍미했지만, 박수근은 시종일관 서민의 일상생활을 단순한 구도와 거칠거칠한 질감으로 표현한 그림을 고수했다.
◇가야인, 바다에 살다
일정 2월 6일까지 장소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가야 유물 57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1부 ‘남해안의 자연환경’, 2부 ‘관문: 타고난 지리적 위치’, 3부 ‘교역, 가야 제일의 생업’으로 구성됐다. 관람객은 각종 유물을 통해 바다에 깃든 가야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은 특히 바다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가야인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했다. 또 옛 김해만의 자연경관 복원에 대한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남해안 일대에 축적된 고고학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해상왕국’으로도 불리는 가야 문화의 특성을 관람객이 쉽고 재밌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Book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동양북스)
저자 에디 제이쿠는 1920년생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그의 인생을 집약해놓은 회고록으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에디 제이쿠는 19세이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약 7년 동안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폴란드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겼다. 부모를 가스실에서 잃고, 나치 간수가 되어 수용소를 관리 감독하는 대학 동기도 만나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며 민가에 도움을 청하다 다리에 총을 맞기도 했다. 특히 수용소 안에서 친구와 동료가 날마다 죽어나가고, 부모를 학살한 자들을 위해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면서 날마다 모멸감을 느꼈던 하루하루가 책 안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참혹한 일을 겪었지만 에디 제이쿠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운이 오더라도 자신의 삶을 사랑해보세요”라고 메시지를 전한다. ‘오늘 집에 가서 당신의 어머니를 꼭 안아주세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등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얘기한다. 이 책은 그가 100세가 되던 해인 2020년에 출간된 후 호주 아마존 1위에 올랐고 미국, 영국 등에서도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면서 전 세계 37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2021 올해의 자서전상, 2021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유럽에서 대한민국만세(송일국·상상출판)
배우 송일국이 유럽에서 삼둥이 아들 대한·민국·만세를 직접 찍고 글로 쓴 유럽 여행 화보 에세이다. 1년간 생활한 프랑스부터 스위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아이슬란드까지 총 8개 나라의 여행기가 실렸다.
◇오십부터는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다(오츠카 히사시·한스미디어)
“50대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고민한다.” 저자는 수십 년간 50대 1만 명의 이야기를 듣고 ‘후회하지 않고 50대를 사는 법’을 정리했다. 50대는 ‘인생의 디톡스 기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일, 업적, 인간관계를 결산하고 앞으로의 50년을 계획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스필버그의 말(스티븐 스필버그·마음산책)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74년부터 2021년까지 48년 동안 그의 인터뷰 스물한 편을 소개하는 책에는 ‘죠스’, ‘쉰들러 리스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유명 영화의 제작기도 포함돼 있다. 또한 그동안 공개된 적 없는 그의 개인적 삶까지 담았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프렌치 오리지널
일정 2월 25일 ~ 3월 13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질 마으
출연 안젤로 델 베키오, 막시밀리엉 필립, 엘하이다 다니, 젬므 보노 등
프랑스 3대 뮤지컬 중 하나인 ‘노트르담 드 파리’가 대구, 부산 공연에 이어 서울 앙코르 공연을 펼친다. 지난해 세종문회회관 대극장에서 유료 점유율 99%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노트르담의 꼽추’가 원작이다. 추한 외모의 꼽추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대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의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그 안에서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시기의 사회상과 이교도들의 갈등, 부당한 형벌제도, 인간의 욕망, 삶과 죽음까지 다각도로 담아내며 시대를 뛰어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특히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뤄진 ‘성스루’(Sung-through) 작품의 백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뮤지컬로, 낭만적인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안무, 30톤의 거대한 무대 세트가 감동을 전해준다.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전 세계 23개국, 1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난 세기의 역작이다.
◇프리다
일정 3월 1일 ~ 5월 29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추정화
출연최정원, 김소향, 전수미, 리사, 임정희, 정영아 등
‘프리다’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선보이는 첫 중소극장 작품이다. 제14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멕시코의 위대한 여성 화가이자 혁명가인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액자 형식으로 그린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았지만, 자신의 지난한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에게 세리머니 같은 최고의 쇼를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추정화 극작가는 프리다의 마지막 생애를 쇼라는 독특한 콘셉트와 형식으로 풀어낸다. 또한 주인공 프리다 칼로 역에 배우 최정원, 김소향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높였다.
◇B클래스
일정 2월 25일 ~ 5월 15일
장소 브릭스씨어터
연출 오인하
출연 최정헌, 이지현, 지호림, 김찬종, 노태현, 류찬열, 한선천 등
2017년 초연 이후 매 시즌 관객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연극 ‘B클래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연극의 배경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만 갈 수 있는 예술인 양성학원 ‘사립 봉선예술학원’이다.
B클래스에 속한 학생 네 명이 실력이 아닌 능력과 조건만으로 평가받는 봉선예술학원의 기준을 넘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합동 졸업 공연’을 준비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는다. 청춘의 자화상이 큰 울림을 안겨줄 예정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유튜브를 운영하는 1인 미디어 시대다. 최근 유명 유튜브 채널에는 대선 후보가 나란히 출연하는 등 기존 레거시 미디어 못지않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러 유튜버 사이에는 중장년들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무기로, 젊은 창작자 사이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재천 교수 '최재천의 아마존'
교과서에서 나오는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을 쓴 최재천 교수. 그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다. 최재천 교수는 1년 전부터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을 운영 중인데,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채널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며칠 전 구독자 10만 명을 돌파했고, 현재는 11만 명을 넘어섰다.
최재천 교수의 채널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지난 달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면서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 61만 명을 돌파했다.
최 교수는 한국 사회의 저출산 현상에 대해 "진화생물학자인 제가 보기에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화적 적응 현상"이라며 "주변에 먹을 것이 없고 숨을 곳이 없는데, 번식을 하는 동물은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애를 낳는 사람은 바보다"라며 "머리가 얼마나 나쁘면, IQ가 두 자리가 안 되니 애를 낳는 것이냐. 애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아무리 계산해봐도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와 같은 최 교수의 의견에 대해 네티즌들은 "세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젊은 생각이 멋지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최재천 교수는 10만 구독자 돌파 소감에 대해 "1년이 훌쩍 넘도록 이게 언제 구독자 수가 늘어나냐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정말 감사하다"면서 "제가 최근에 팀원들에게 '뭔일이냐'라는 말을 많이 했다. 저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일환 변호사 '차산선생법률상식'
대법관을 지낸 박일환(70) 변호사는 지난 2018년 12월부터 '차산선생법률상식'을 운영 중이다. 30년 이상 판사로 일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법률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법률 상식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현재 구독자는 13만 명을 넘어섰다. 초반에는 법에 문외한 딸이 영상 편집을 맡았고, 손주도 종종 출연해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현재는 법률 방송과 함께해 영상 퀄리티가 좋아졌고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이다. 박일환 변호사는 일을 그만둔 이후에는 유튜브 운영에 더욱 힘쓸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김양수 농부 '귀농TIME'
전남 귀농 산어촌 서울 센터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귀농TIME'. 여기에서 '농부의 정석' 시리즈를 맡고 있는 김양수 씨(54) 씨는 가장 인기 스타이다.
그가 지난 4월에 올린 '진딧물의 정복자, 숨겨둔 비법 대공개' 영상은 27일 현재 조회수 43만 명을 돌파했다. '귀농TIME' 콘텐츠 중 누적 조회수 1위다. 매우 간단하면서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법은 많은 귀농·귀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귀농TIME'에서 '뚝심으로 70대에 토종 다래 명인이 되다'는 누적 조회수 13만회, '직접 만든 강력한 천연 기피제로 해충들을 몰아내는 비법 대공개'는 10만회, '꿀고구마 1년 순수익 1억 달성, 3가지 핵심 키워드'는 7.4만회를 각각 기록하며 그 뒤를 이었다.
고수·도사·달인의 '고도달TV'
'고도달TV'의 운영자는 '고수' 최종찬 씨(71), '도사' 유시탁 씨(72), '달인' 정상곤 씨(72)다. 이들은 경복고, 서울대를 졸업한 동문으로 오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주변에 도움이 되는 노년'이라는 목표로 의기투합한 세 친구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겠다는 각오다.
'고도달TV'에서는 키오스크 사용법, 건강검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 추억의 먹거리, 자녀·손주들과 잘 지내기 등 같은 생활 밀착형 소재들을 다뤘다. 시니어들에게 많은 정보와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7월 첫 영상을 올렸고, 현재 구독자 수는 2천 명이 채 안 된다. 지난달 '2021 제1회 시니어유튜버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더욱 주목 받고 있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나무를 좋아해 나무와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다. 늘 나무를 심었다. 애지중지 가꾸고 돌보고 어루만졌다. 몸뿐인가. 마음까지 나무에게 바쳤다. 그 결과 들판 가운데에 있던 황무지가 장엄한 숲으로 변했다. 거대한 정원이 태어났다. 들어보셨는가. 나주시 금천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한국화가 박태후(64).
사건? 그렇다, 가히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초대형 개인정원을 만든 게 아닌가. 정원 면적은 자그마치 14만㎡(약 1만2000평). 대략 축구장 6개를 합친 크기의 정원이다. ‘이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나와 팔자 좋게도 평생토록 정원을 즐기나보다.’ 그렇게 지레짐작을 하는 이도 있을 테지. 돈이면 무엇이건 다 해낼 수 있다는 미신이 만연한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박태후는 가난한 농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간신히 밥 먹고 자랐다. 줄곧 손에 거머쥔 것 없이 살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하게도 거대한 정원 조성에 인생을 던졌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죽설헌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으로 개성적인가? 일단 줏대 넘치는 정원이다. 전국 곳곳엔 개인이 조성한 화려한 정원이나 수목원이 많다. 대체로 서양식 아니면 일본식 정원, 또는 이도저도 아닌 짬뽕이다. 박태후의 정원은 다르다. 한국 정원의 전통과 양식을 추구해왔다는 게 아닌가. 외제와 외풍과 외래종을 얕잡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다. 본때 있는 토종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정신과 고유성을 탐구해 나름대로 구현하는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스스로 과제를 부여한 셈이며,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스스로 배웠고, 배운 대로 밀어붙였다. 줏대 아니면 푹 쓰러질 인물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특징엔 어떤 게 있죠?”
“자연을 존중하는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 게 한국식 정원입니다. 서양식 정원은 달라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서구의 사고 전통이지요. 정원의 구조에도 정복의 정신이 고스란히 서려 있어요. 성(城)을 건축하듯이 과감한 기하학적 기법으로 정원을 만들어요. 일본 정원은 자연의 최대 축소치를 추구합니다. 자연을 넘어 우주까지를 축소시켜 집 안에 끌어들이고자 해요. 그 축소 노력을 통해 발달한 게 전지(剪枝) 기술이죠. 고도의 인위를 구사하는 겁니다. 반면 전래의 한국 정원은 나무를 가급적 있는 그대로 놔뒀어요. 자연스럽게 자라 어우러지도록 존중, 인위적 변형이나 관리를 자제하는 거죠.”
“지친 마음을 나무 그늘 아래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정원이지 않을까? 굳이 한국적 정원을 한사코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지 않겠어요? 조경이건 미술이건 뭐건, 세계 속에서 최고를 구가하려면 전통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일테면, 대통령 부부가 외국 순방을 할 때 한복을 입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마찬가지로 고유의 한국적 정원이 아닌 일본풍과 서양풍 일색으로 변한 조경 관습에 개탄을 금할 길이 없어요. 오늘날의 정원 99%가 남의 나라 방식을 따르고 있다니, 이게 정상일까?”
“말하자면 죽설헌이 한국적 정원의 본보기라는?”
“아, 그렇진 않아요.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식 정원이지만, 온전히 규범적인 한국식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지향한다, 한국적 자연 정원을 지향한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만약 죽설헌을 전형적인 한국 정원이라고 내세운다면 학계로부터 쏟아지는 신랄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조경 학자들의 이론(異論)이 난무할걸요. 아마도 게거품을 물고 덤비지 않을까.(웃음)”
정원 조경의 실제 경험에 관한 한 박태후를 능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재야 조경가다. 고독한 고수다. 일쑤 삐딱한 눈총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때가 오면 ‘대한민국을 통째 디자인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박태후가 제도권 전문가들을 바라보는 태세에도 날카로운 게 들어 있다.
“이론들끼리 기탄없이 다투어야 답이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원탁회의라도 열어 토론을 해봅시다! 제가 자주 그런 얘길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이 없다는 거. 오늘 저는 또다시 토론을 제안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요점이 뭐냐면, 대다수의 학자나 이론가들은 비원 같은 궁중정원이나 사대부들의 별서정원(자연에 귀의, 유유자적하기 위해 지은 별장에 딸린 정원)을 한국 정원의 원류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저는 서민들이 누린 토속적 정원에서 원형을 봐요. 장독대와 텃밭까지를 포괄한 자연 정원에 더 흥미와 애정을 느껴요. 정원을 일부 상층부의 전유물쯤으로 국한하는 견해에 동감할 수 없는 겁니다.”
모네의 정원 답사하고 감명받아
남도에 태풍이 스쳐지나가는 날이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죽설헌 숲이 출렁인다. 둥근 야산 하나가 통째로 몸을 떠는 것 같다. 개인 정원이 어이 이토록 동산처럼 방대한가? 한국적인 걸 지향하는 데에 규모화가 기본일 리는 없을 것이다. 방대할 뿐 아니라 어느 한구석 허술한 게 없으니 놀랍다. 나무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은 걸 원칙으로 삼았다지만, 정원다운 운치와 구성과 미학이 생동하니 손길과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번듯한 정원을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게 좋아 그냥 심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심으면 자라고, 가꾸면 꽃피어나는 식물들의 질서정연한 생리와 생태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본격적으로 한국적 자연 정원이라는 것에 착안하고 올인하기 시작한 건 중년에 접어들어서였지요.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정원을 답사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서였어요. 같은 화가로서 강렬한 매혹을 느꼈어요. 비록 일본식 정원이었지만.”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 건 언제였죠?”
“제가 가정형편상 원예고등학교에 진학해 과수, 채소, 화훼 재배기술을 배웠어요. 재학 중에 이미 나무를 심는 재미를 알았지요. 저희 집 소유의 황무지에 틈만 나면 달려가 나무를 심었으니까. 그게 죽설헌의 시발입니다. 졸업 뒤엔 관공서 정원사를 거쳐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했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나무를 가꿨고요. 40대 초반엔 사표를 던졌습니다. 이후론 정원 가꾸기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죠. 낮에는 정원 일을, 밤에는 그림을. 이건 지금까지 사오십 년째 반복되어온 일상이에요.”
박태후는 제대 뒤 의재 허백련의 조카 허의득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우면서 한국화에 입문했다. 늦깎이로 미술 관련 석사학위도 받았다. 끔찍한 노력파다. 조경과 그림, 그 둘에 쏟은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자기 자신에게 입증해 보인 열혈한이다.
정원을 산책해볼까. 폭염이 살갗을 굽는 여름 한낮이지만 정원의 공기는 서늘하다. 저녁 으스름처럼 어둑한 건 나무들이 허공을 가려서다. 박태후의 몸은 대나무처럼 늘씬해 나무숲에 어울린다. 잔인한 세월이 내려앉은 머리칼은 허옇지만, 자신의 평생 동행인 나무들을 바라보는 표정엔 온정이 가득하다.
백련이 벙그러지는 연못가. 못을 빙 에두른 노랑꽃창포 군락이 싱그럽다. 또 다른 연못가엔 왕버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수면에 어린 제 그림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둘 다 박태후가 각별히 아끼는 초목이다.
“5월이면 한 달 내내 노랑꽃창포들이 꽃피어 연못물마저 노랗게 물들입니다. 장관이죠. 저는 이 꽃을 ‘습지의 여왕’이라 불러요. 왕버들과 마찬가지로 물가에서 잘 자라고 병충해에도 아주 강합니다. 뿌리의 수질정화 능력도 탁월해요. 생태조경에 적격이죠. 이 좋은 노랑꽃창포가 예전엔 너무도 흔해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어요. 그 바람에 요즘은 흔히 보기조차 힘들어졌어요.”
“정원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수종을 권한다면?”
“최상의 정원수는 유실수예요. 감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살구 등등 꽃도 즐기고 과실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열매를 쪼아 먹으려고 새들이 날아듭니다. 새들의 노래마저 즐길 수 있으니 일석삼조라 해야겠네.”
‘시행착오’가 가장 유능한 교사
죽설헌의 풍치엔 허전한 게 없다. 있을 게 다 있으니까. 200여 가지의 수종들, 수백 종류의 야생초들, 여섯 개의 인공 연못, 고와(古瓦)로 야트막이 쌓은 울, 숲의 사방으로 뻗어나간 산책로…. 가지를 잘라내거나 솎아주기를 극도로 삼갔으니 나무들은 자유롭게 자랐다. 저마다 길길이 가지를 뻗어 허공을 움켜쥔다. 나무 아래에선 꽃들이 병아리처럼 종종대며 형형색색의 물감을 짜낸다. 백련과 홍련이 맑고 고운 얼굴을 수줍게 드러내는 연못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련된 인공 정원이다. 그러나 인위가 세월에 발효되어 자연과 동화해서일까. 일부러 애써 꾸민 티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야생의 숲이라 해두자. 간섭받지 않고 성장한 나무들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 자잘한 꽃들과 키 작은 음지식물들이 도란거리는 속삭임까지 귓가에 고이는 기분이다. 이토록 천연스런 숲 정원을 만든 건 여기가 피안이라는 뜻인가.
“나무를 가꾼 지 반세기가 지났군요. 어떤 일이든 하나에 평생을 바쳐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건 영혼이 움직이고서야 가능하겠죠. 죽설헌을 만든 당신의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이라 보나요?”
“시행착오. 바로 그거예요. 저는 전문적인 조경 교육을 받은 게 없이 일체를 혼자 해결해왔어요. 당연하게도 갖가지 오류가 빈발했죠. 쉬운 예로, 초기엔 외래종 화초와 토종 화초의 구분조차 하질 못했어요. 그걸 깨닫고 공부하며 초목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수시로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쳤지요. 인생에서 시행착오보다 더 유능한 교사는 없다고 봅니다.”
“이 너른 정원을 조성하기까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겠죠? 자금 조달엔 문제가 없었을까?”
“가장 난감했던 게 바로 그 대목이었어요. 수입이라곤 얼마 안 되는 연금뿐, 부부가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왔습니다. 감자나 참깨를 농사지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어요. 그러나 빚을 얻어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무를 계속 심자면 주변 땅을 사들여야만 했으니까.”
어렵사리 터를 매입해 나무들을 심는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나무들의 키가 커지고 둥치가 불어나면 적절히 이식을 해줘야만 했다. 그러자면 다시 땅을 확보해야 했으니 주기적으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것 같다. 간벌(間伐)로 쉽게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박태후는 나무를 베어내거나 파내는 행위를 금기로 삼고 있다. 나무와 혈맹조약을 맺은 것처럼.
“저것들도 엄연한 생명인데, 저것들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베어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옮겨 심을 터 마련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 욕심을 너무 부리는 거 아니야? 라는 투로 바라보지만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나무와 함께 살다 보면 나무에게 많은 이치를 배우게 됩니다. 세상을 진정 잘 사는 길을 숲의 자연 생태에서 깨닫게 되는 거죠. 이게 자연 정원을 가꾸는 최상의 목적이자 낙이에요.”
자연에의 외경을 지닐 경우,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의 과욕과 과속은 마음속에 자연을 들여놓지 못해 생기는 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살기는 사실 어렵다. 사람이 나무처럼 살 수 있겠나. 가을마다 잎을 모조리 털어내는 나무의 허심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채 혹한을 묵묵히 견뎌내는 겨울나무를 시늉할 수 있겠는가. 박태후는 나무들의 생태에 인간사의 고통과 한계를 대입하고 그 치유책을 찾아 나선 사람이진 않을까.
“피고 지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며 과욕이란 헛된 거라는 걸 자주 느껴요.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저승까지 가져갈 길이 있던가요? 결국엔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명백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게 아닌가요?”
예술계에서 정중헌(74)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은 현재까지도 대기자(大記者)로 불린다. 지금도 꾸준히 기사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미술, 방송 분야 전문기자로 언론계와 문화계에 깊숙이 몸담아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서 일하다가 60세되던 해인 2006년에 퇴사를 하고, 2007년에 서울예대 부총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때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공연예술합동과정에 지원했습니다. 시간을 쪼개어 쓰며 ‘1970년대 한국 영화사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도 힘겹게(?) 받았지요. 2013년에는 부총장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인생에서 두 번째 은퇴를 했습니다. ”
66세 현역 은퇴. 자신의 노후만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은퇴하고 얼마 후 대학로의 한 극단과 함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다녀왔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연극 축제입니다. 그때 경험이 한국생활연극협회를 만드는 큰 계기가 됐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토론하다 보니 생활문화에 대한 고민이 생겨났다. 그리고 생활문화란 생활인이 전문가처럼 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해보는 것이라고 개념을 세웠다.
마침 생활연극과 관련해 인터넷을 찾으면서 공부하다보니 2014년에 이미 지역문화 진흥법이 발효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활문화’란 지역의 주민이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하여 자발적이거나 일상적으로 참여하여 행하는 유형·무형의 문화적 활동을 말한다”라고 2조 2항에 명시돼 있었다.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함께 다녀왔던 극단과 합심해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서 연극계에 입성했다. 한국생활연극협회를 만들고 쉼 없이 공연하고 시니어들을 위한 축제를 기획해온 정중헌 이사장은 큰 소망이 하나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생활연극인이 참여하는 ‘대한민국생활연극제’를 만들고 싶습니다. 전문 연극인들의 제일 큰 행사인 ‘대한민국연극제’처럼요. 서울연극협회가 주관하는 ‘서울시민연극제’가 있기는 합니다. 저는 연극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인접 예술도 같이하는 놀이 형식의 축제를 했으면 합니다. 작게라도 1회 행사를 할까도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힘겹게 생활연극협회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알려왔으니 ‘대한민국생활연극제’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싶어요. 그런데 전국 규모의 문화 축제를 작은 단체가 여는 것은 무리입니다. 공연예술을 좋아하는 시니어의 멋진 인생을 응원해주시고 관심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강물에 패이고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온 세월. 아팠던 일은 아프지 않게 마음 속에 저장한다. 잊고 싶은 순간은… 담담하게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과거는 낭만으로 포장돼 기억되기 마련. 그게 나이 듦의 특권일 수도 있다. 평양식 맛집으로 소문 자자한 봉화전 주인장 김봉화(金鳳華) 씨를 만났다. 고운 얼굴 수줍은 미소가 기억하는 옛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봤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 내려 멀지 않은 거리에 봉화전이 있다. 강남이라고 해서 멋들어진 건물 자태 운운하면 곤란하다. 건물만 똑 떼어 어느 시골 마을 장터에 갖다 놔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 정감 가는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 봉화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사진작가를 앞에 두고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봉화 씨. 주제는 전쟁이었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6·25전쟁 때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과 드라마보다 더 무거운 옛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심히 들려줬다. 직장인들이 시끌벅적 점심을 먹고 돌아간 후, 피곤할 만도 할 텐데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 좀 끝내는가 싶더니 음식 솜씨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다.
“저희 집안이 경주 김 씨 왕손 집안입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왔어도 음식은 고급스럽게 먹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잡아두고 요리를 가르친 건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가져다 먹고 또 나이가 들다 보니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요리나 하면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정말 우연하게 봉화전을 열었습니다.”
평양식 온반과 어복쟁반, 특히 부침 전이 맛있기로 소문난 봉화전.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봉화전이 ‘경북 봉화 지역의 전’을 말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김봉화(봉화)가 전하는 이야기[傳]’란 의미다. 광고기획사 다니던 큰아들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고민해서 만들었다.
“한 학생이 그러더래. ‘봉화전’ 어떠냐고요.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나는 싫었거든요. 어쨌든 봉화전이 식당 이름이 된 거예요.”
평양 양반댁 요리의 정갈함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췄기에 그녀 스스로도 전통이라는 말로 봉화전의 요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요즘 스타일이에요. 옛날 잔칫집에서는 고기를 꼬치에 크게 꼽고 전을 부쳐냈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음식은 그저 먹기 좋게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북식 배추김치는 여기처럼 배추 전체에 양념을 치대지 않아요. 이파리 속에다 단정하게 넣어요. 그 상태로 자르면 정말 꽃 같아요. 예쁠 뿐만 아니라 아삭아삭하고 맛있어요. 그런데 싱겁죠. 평안도 사람 입맛에는 맞겠지만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창기에는 전 부칠 때 전통식대로 돼지기름도 써봤지만 제가 직접 기른 돼지도 아니고 못 믿죠. 지금은 콩기름에 부쳐요. 최대한 평양 맛을 고수하되 요즘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을 많이 고려합니다.”
요즘은 봄철이라 두릅전을 계절 음식으로 내놓는데 인기가 좋아서 금방 동날 정도란다. 그녀는 매일 시장에 가고, 전과 함께 먹을 반찬도 그날그날 바꾼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아야 하잖아요. 촌 음식 그대로 해주면 안 먹어. 내가 여기에 오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고민하게 돼요. 젊은 사람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고맙죠. 잘해주고 싶고 과일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요. 이 나이에 돈만 벌겠다고 나와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날 찾아온 인생 일탈 ‘봉화전’
봉화전을 열기 전까지는 가족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였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막내아들 때문이었다며 또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 자리가 원래는 곰장어 집 자리였대요. 2011년에 막내아들이 ‘엄마 나 조그마한 가게 두 개 계약해놨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그러는 거야. 여기 와서 보니까 엉터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들한테는 표시 안 했어요. 그런 얘기하면 실망하잖아요. 이미 돈도 다 줬더라고요. 여기서 식당했던 사람마다 망했다는 얘기도 들렸어요. 일단 다른 가게는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포기했어요. 이것만 남겼죠. 아무 경험도 없는데 자신감이 있었겠어요?”
자리만 봐주고 발을 빼도 되나 싶었는데 아들이 다시 부탁을 해왔다.
“아들이 ‘엄마, 3일만 봐주세요. 여기 일하시는 분들한테 요리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셔요’ 그러는 거야. 내가 속으로 3일 가르쳐서 되면 뭐든지 잘되게?(웃음) 그랬어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들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투자했는데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약속한 3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사할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손님들이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잠깐 동안 80만 원어치 팔았어. 막 음식을 해 달라는데 어쩌겠어.”
정작 일을 벌인 아들은 개업 한 달 만에 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가버렸다. 첫날부터 대박식당으로 소문이 나더니 문 연 지 얼마 안 돼 방송사에서 촬영까지 해갔다. 맛집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난 ‘수요미식회’(tvN)에 소개되면서 대한민국 맛집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어느 날 가수 이현우가 왔다는 거야. 누군가 하고 봤더니 여기서 먹고 가곤 했대요. 그 사람이 ‘수요미식회’에 소개한 거예요. MC인 신동엽 씨랑 전현무 씨도 와서 우리 음식 먹어보더니 정말 맛있다는 거야. ‘우리 아들 망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집을 떠나면 안 되겠구나’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요리하다
봉화전을 열 때 아들이 그녀에게 알려 달라는 요리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집에서 노상 해주던 음식이었어요. 그게 가장 맛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제가 요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젊었을 때는 남편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을 다녔어요. 남편이 방산사업을 했는데 외국 바이어들을 저희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호텔에 가봤자 별 볼일 없잖아요. 그때마다 남편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 우리나라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업도 잘 풀렸습니다. 방부제 들어가지 않은 빵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어서 오븐을 사서 빵도 구웠습니다. 제빵사 자격 이런 건 없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몇 년 전 오랜만에 아들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만든 빵을 기억하더라고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 피란 통에도 좋은 것 먹고 곱게 자란 그녀였지만 과감한 면이 있었다. 좋은 선 자리 마다하고 연애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잘사는 집안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어요. 서너 군데서 선도 들어왔고요. 그때는 스무 살만 넘어도 빨리 시집가라는 분위기였잖아요. 근데 제가 꿈에서 어떤 키 큰 남자를 봤는데 누군가가 ‘저 사람이 네 신랑감’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 꿈을 꾸고 나서 한 일주일 됐나? 키 큰 공군사병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리고 3년 동안 저를 쫓아다녔어요. 제 남편이요.”
열두대문집 손자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내세울 것 없었던 남편을 어느 날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내심 걱정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사람 괜찮구나”였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큰 회사의 커리어우먼이었던 김봉화 씨는 남자 친구이던 남편이 군 제대를 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에 용돈까지 줘가며 연애에 푹 빠져 살았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생각날 정도.
“결혼식은 워커힐에서 했어요. 앙드레 김 웨딩드레스를 입었어요.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짧은 드레스였습니다. 훗날 남편에게 들었는데 돈 엄청 썼더라고요. 다 늙어가지고 얘기하더군요.”
사실 그녀는 돈에 대해 신경 쓰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편도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려 늘 최선을 다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남편은 살아 계신가요?”
기자의 질문에 김봉화 씨는 순간 멈칫했다.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다 포물선을 그리며 손을 내렸다. 눈가가 촉촉해지기에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에 가 있어요.(웃음) LA에 몸 관리하느라고요, 늙어빠져가지고서는. 거기 사촌들이 다 있어요. 나는 어딜 가도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여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친정에서도 못 자봤고요.”
어디든 함께 다녔던 남편은 환갑을 넘기고 몇 년 뒤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LA는 남편 살아생전 함께 다녀온 마지막 여행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상상하며 사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속 편한 방법이리라.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가 봉화전이다. 홀로 남아 방황하는 그녀를 위해 아들딸들도 발 벗고 나선다. 매일 추억을 다듬고 고향 음식과 벗하며 하루하루 예쁜 모습 유지하며 살아가길 자식들은 바란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 죽고 싶지 않아요.(웃음) 시장에 갔을때 새로 나온 봄나물 보면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요. 매일 여기에 나와서 메뉴 개발하고요.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제 인생이 아까워서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아야겠어요. 젊은 마음으로 살면서 아들딸하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연세를 물으니 “아직 백 살 되려면 한참은 남았다”며 한사코 나이 공개를 하지 않는 그녀. 과거를 추억하기보다 이제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마음 변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봉화전이 자랑하는 메뉴
깻잎전, 육전, 돼지고기전, 고추전
봉화전 인기 메뉴. 깻잎전과 고추전에는 소고기가 들어간다. 비결은 두껍지 않게 부치는 것. 평안도식 돼기고기전도 인기가 좋다. 삶은 돼기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사용한다. 원래 평안도 잔칫상에는 더 크게 꼬치에 꽂아서 내놓던 요리다.
평양식 온반
이북에서 잔칫날 먹는 대표 음식으로 원래는 꿩고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구하기 쉽지 않아 소고기를 쓴다. 육수는 삶은 양지머리와 꼬리뼈를 우려서 낸다. 삶은 소고기를 손으로 찢은 후 소금, 참기름,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대접에 밥을 퍼 담고 그 위에 소고기와 알맞은 크기로 부쳐낸 녹두전, 지단을 순서대로 올린다. 여기에 맑게 끓인 뜨끈한 온반육수를 부어 먹는다.
“먼 길 오셔서 뭐라도 건져 가셔야 할 텐데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바느질하듯 상대를 배려하는 목소리는 촘촘하고 결이 고왔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이 조각보를 구입해 소장할 만큼 경지에 이른 솜씨이지만 헝겊 자투리 갖고 잘 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소라(53) 섬유공예작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을 앉아 바느질을 해도 지루하지 않다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고수 아닌가. 그녀의 손바느질이 피어나는 공간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놀아본(?) 사람의 방이 맞았다.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 조각 천이 수북이 쌓여 있는 낮은 나무 탁자, 바늘 바구니, 작고 오래된 분홍색 라디오 하나, 그리고 막 구상을 끝낸 듯한 조각보 도면 위로 감칠질한 조각 천들이 알록달록 놓여 있다.
삶의 공간은 주인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녀 방에는 유별난 포즈도 없고 포장된 풍경도 없다. 그저 반짝이는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한 사람이 앉으면 종종 시간을 잊어버리는 곳이다. 하루는 거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매일 바느질만 해대는 이소라 작가에게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당신은 한 평짜리 인생이야.”
그러나 한 평짜리에서 시작된 그녀의 바느질은 10여 년 전부터 전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일 공예특별전, 프랑스 보졸레 섬유엑스포 등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 걸려 있을 만큼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바느질 놀이가 좋았다
뭐든 만들어 남 주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의 매력은 퀼트를 배우면서 알았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손수 예쁜 이름 수놓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불도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바느질이 조각보로까지 이어질 줄은 그녀도 몰랐다.
“딸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남편과 주말 부부가 됐어요. 남편도 없고 아이가 일찍 자면 할 일이 없어 너무 무료한 거예요. 그때 문득 ‘아이가 다 커서 내 손을 안 타고 직장도 관두고 나면 난 뭘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에 들어가 산업공예를 배웠어요.”
그러나 대학원 공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심지어 실크스크린을 공부할 때 맡게 되는 물감 냄새조차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현희 자수 명장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하는 단기 강좌 정보를 접하고 서울까지 올라가 수강을 했는데 그 뒤 조각보 바느질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조각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세 번 기초 강의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 공부하며 바느질 기법을 터득했어요. 더 배우고 싶었지만 수강료가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냈거든요. 비록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좋아서 하는 거라 열정이 넘쳤죠. 청주에 천연염색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염색을 조각보에 응용하면 좋겠다 싶어 배워뒀지요. 나중에 여러모로 도움이 됐어요.”
조각보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10만 원 어치 재료만 사면 몇 달 잘 놀 수 있어서” 바느질을 했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자꾸 이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점점 조각보의 세계로 그녀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옻칠을 적용해 모시의 단점 보완과 함께 개성 있는 조각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상도 했다.
2007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구입했을 때는 뉴스 보도가 쏟아졌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청주시가 2년마다 개최하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사전홍보행사 일환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한·미보자기-동서의 만남’ 특별 전시회가 열렸는데, 저명한 대학교수들 작품과 함께 출품된 50여 점 중에서 그녀의 작품이 박물관 관계자 눈에 띈 것이다.
“죽기 전에 개인전 한 번 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당시 청주시 담당자가 특별 전시회에 참가할 작가 선정을 할 때 평소 조각보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배제했대요. 저로서는 특별한 기회가 된 거죠. 그게 인연이 되어 해외 전시회에 계속 참여하게 됐어요.”
조각보와 함께 써나가는 이야기
우리의 조각보는 조선시대 때 서민들이 자투리 천도 버리기 아까워 만들어 쓴 물건이지만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이소라 작가는 요즘은 생활문화가 바뀌어 조각보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의 전통 규방공예를 세계에 알리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강조한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보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각보를 보며 많이 놀라워해요.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다며 감탄도 하지만 홑보자기의 바느질 앞뒤가 없는 게 굉장히 신기한가봐요. 믿기 힘든지 정말 손으로 바느질한 게 맞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바느질 기법으로 보면 별것 아닌데 말이죠. 서양의 퀼트는 홈질이 많고 조각보는 감칠질이 많아요. 그 차이로 보면 돼요. 조각보를 바느질할 때는 바늘땀을 뒤로 숨기기도 하지만 실 색깔을 달리해서 아예 장식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도 써요. 서양 사람들은 그런 바느질 기법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20여 년간 바느질을 해온 그녀의 손끝은 오래전부터 굳은살이다. 간혹 바늘에 찔려 고통스러워도 골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골무를 끼면 섬세한 바느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의자 위에는 똬리방석도 놓여 있다. 작업량이 많아 하루 10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가 짓물러 사용하고 있단다. 그래도 여전히 손바느질이 고달프거나 지루하지 않다니 그녀의 조각보는 아무래도 유희의 물건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녀 스스로도 ‘놀이’에 적극 비유하곤 한다.
“저는 자투리 천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잘 놀아요. 제 주변엔 골프 치는 지인도 있고 이틀만 집에 있어도 못 견뎌하는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일 행복할 때가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때예요.(웃음) 뭔가 조몰락거리며 혼자 노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그러나 8000여 개의 조각 천을 이어 붙이고도 “어느 날 한번 세어보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놀이’라는 저 의미심장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놀이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이었을 결기의 시간들을 자꾸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조각보가 그녀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생’이라는 답변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저는 조각보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 인생은 조각보를 떼어놓고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보석처럼 발견해낸 이 황홀한 놀이가, 우연이 빚어준 조각보와의 필연적인 동행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궁금하다. 놀이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작품세계도 확대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