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직장인의 90%는 기회만 된다면 이직하고 싶어 한다. 평생직장의 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분야에서 베테랑이 된다는 건 ‘시간’을 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투입 시간 대비 산출 결과의 효율을 생각하는 시대, 다양성이 더 중요한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이 사람을 대체할 거라는 이 시대에 베테랑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누군가의 노하우를 배우려면 베테랑이 있는 현장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유튜브, SNS 등에 ‘꿀팁’(매우 유용한 정보나 조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수없이 올라오는 통에 굳이 베테랑을 찾아가지 않아도 배울 방법이 많다. 그런 데다 시대 변화는 어찌나 빠른지 4차 산업혁명으로 2030년이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직업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어쩐지 베테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라지는 영역의 베테랑은 디지털 시대에 다른 형태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새로 등장하는 분야에서는 새로운 베테랑이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시간이 빚는 베테랑
베테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이다. 의미상 숙련자, 전문가와 비슷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인다는 뜻이 조금 더 강하게 녹아 있다. 그렇기에 베테랑이라면 누구나 그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방법이나 요령은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기술이다.
한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을 만나보니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휴, 그때는 누가 옆에 앉혀놓고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매일 청소하면서 어깨너머로 눈동냥하며 공부했죠.(웃음) 그렇게 종일 눈으로 배우고 일과 끝나면 무작정 따라 해보는 거예요.” 베테랑의 노하우를 얻으려면 눈치가 좋아야 했다. 알려주지 않아도 혼자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면 어느새 베테랑이 다가와 자신의 노하우를 하나씩 알려줬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다. 특히 기술이 필요한 곳에서는 이렇게 도제식(徒弟式) 교육이 이뤄졌다.
그렇기에 베테랑의 노하우에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의 감(感)이 녹아 있다. 요리책에 나온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이유는 개인의 손맛 때문이다. 같은 기술을 배워도 기술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제식 교육 하면 ‘무형문화재’ 같은 ‘장인’(匠人)이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기술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많은 영역에서 도제식 전수가 이뤄진다.
영화 제작, 검사나 경찰의 수사, 기자나 PD의 취재, 조향사의 조향 과정 등에도 사수(師授)의 노하우가 입으로 전해진다. 사수는 ‘스승에게서 학문이나 기술의 가르침을 받음’이라는 뜻이다. 일터에서는 스승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일을 가르치고 배운다. 요즘 버전으로 말하자면 ‘멘토링’(Mentoring)이다. 멘토링은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멘토, Mentor)이 지도와 조언을 통해 멘티(Mentee, 멘토링을 받는 사람)의 실력과 잠재력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바뀌고 있다. 한 분야의 베테랑은 오랜 시간을 들여야 빚어지는데, 일자리가 아예 사라진다면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제빙기 개발은 얼음 장수를 사라지게 했다. 냉장고나 제빙기가 없던 시절에는 한강이 얼면 강의 얼음을 깨 파는 얼음 장수가 있었다. 하지만 냉장고와 제빙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정에서 얼음을 얼려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얼음 장수는 사라졌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온다고 한다. 또 한 번 사회가 크게 발전하는 시기다. 2016년 다보스포럼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에서는 “2020년까지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약 710만 개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분야의 베테랑은 더는 ‘시간’을 누적할 수 없어 도태될 것이고, 새롭게 생긴 일자리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베테랑이 생겨날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칼 베네딕트 프레이와 마이클 오즈번 교수는 논문 ‘고용의 미래’에서 △정교한 손가락 움직임 △손재주 △좁은 작업 공간과 불편한 자세 △독창성 △순수예술 △사회적 지각 △협상 △설득 △타인의 배려 및 보살핌이 필요한 영역은 기계나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렵다고 봤다. 아무리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결국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베테랑의 감(感) 입는 디지털
단순·반복적이거나 숙련도가 떨어지는 일이 대체로 자동화되고 있는데, 이 자동화에도 베테랑이 필요하다. 바로 그들의 ‘감’이 자동화를 더 정교하게 만들기 때문. 포스코는 베테랑 근로자의 경험과 감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베테랑의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 데이터를 객관적 데이터로 바꾸어 ‘스마트 고로’를 만들고 AI가 학습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 결과 품질 불량률이 63% 감소했다. 사람이 아닌 AI가 베테랑의 노하우를 배우는 셈이다.
현대건설도 현장 베테랑의 지식과 노하우를 디지털화하고 있다. 특히 안전·품질 분야를 스마트화해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데 공들이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노하우를 빅데이터화하면 신입 직원에게 밀려날까 불안해하던 중장년 베테랑도 이제는 스마트 기술에 적응하며 새로운 변화를 따라가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베테랑이 오히려 단순노동에서 벗어나 더 가치 있고 창의적인 일을 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 역시 숙련 기술의 디지털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 일본의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는 생산 현장을 강조하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제조 설계부터 고객 만족까지 통합된 하나의 흐름을 가리킨다. 설계, 생산, 서비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 되었다. 최근에는 모노즈쿠리 혁신을 외치며 베테랑의 노하우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은 보고서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데이터 활용이 새로운 부가가치의 원천인데, 모노즈쿠리 과정에서도 수많은 데이터가 발생한다”면서 “일본 제조 기업은 이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생산 효율화를 목적으로 내세운 ‘스마트 팩토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제는 내부에서만 공유하던 데이터를 산업의 경계를 넘어 기업이 상호 거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단순한 생산 효율화가 아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구축 등 오픈 이노베이션 추진이 목표”라고 분석했다. 베테랑의 노하우를 공유함으로써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노하우를 이어가는 베테랑도 있다. 과거 도제식 교육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베테랑이 필요하다. 노하우를 축적한 베테랑과 그들을 찾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 생겨난 이유다.
‘탤런트뱅크’는 전문 인력 상시 고용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에 고도의 비즈니스 문제가 닥쳤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를 프로젝트별로 연결한다. 현장에서 은퇴한 베테랑이 전문가로 투입되는 것. 재의뢰율이 60%를 넘어설 만큼 기업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클래스101’은 중장년 베테랑의 노하우를 교육과 강의 형식으로 전한다. 음악·미술·운동 등 취미 관련 강의부터 부업·재테크 노하우, 업무 능력 향상 등 일 잘하는 방법, 인문·사회·예술을 비롯한 교양 강의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숨은 고수라는 뜻의 ‘숨고’에서는 900여 분야의 매칭 서비스를 제공한다. ‘반려견 산책’, ‘주례’, ‘게임 레슨’ 등 소소한 영역까지 포함된다. 베테랑 전업주부의 노하우를 살려 ‘정리수납 고수’로 활동하거나, 기업에서 인사관리와 교육 일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취업 컨설팅 고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은 다양한 직종, 여러 분야의 베테랑을 사라지게도 하지만, 그들의 노하우는 무형의 가치로 남아 디지털과 융합해 또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줄광대 김대균(중요무형문화재 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53). 그가 줄타기를 배운 건 9세 때였다. 거의 평생을 줄 위에서 살아온 인생이다. 줄에 취하고 미쳐, 줄 위에서 울고 웃고, 뛰고 솟고, 날치고 판치고, 그렇게 살아온 외길 인생. 한 우물을 팠으니 이룬 바가 자명하다. 해서, 그는 굳이 낮추거나 은근히 감출 것 없이 내세운다. “내가 줄타기 수장이오!” 자신의 눈으로나 세상의 잣대로나, 줄타기에 관한 한 비길 자가 다시없다는 자부심의 표명이다. 무릇, 예로부터 재인(才人)이란, 제 안에서 들솟는 기와 신명에 추동된 흥겨운 도취로 세상의 파도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타고난 재능이 일러주는 대로 찾아간 길이 아니다. 취미 삼아 올라탔다가 끝내 들입다 내닫은 길도 아니다. 거미처럼 허공을 희롱하는 찬연한 기예에 홀려 입문한 길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접어든 길이 평생 업이 됐다. 우연한 시발이었으나 우연만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다. ‘우연’이 바뀌어 필연이 됐으니, ‘필연’을 불러들인 임자는 오직 김대균 자신이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가는 인생은 있을 수 없는 법. 그는 필연과 사필귀정의 공리를 염두에 두고서 줄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걸어왔다는 게 아닌가. 들어볼까? 일찍이 아홉 살 그 어린 나이에 줄을 만난 내력부터.
“부친께서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일을 하셨다. 민속촌 전시가옥이라는 곳에서 일가가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민속촌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던 김영철 선생(작고, 줄타기 초대 인간문화재)께서 내 손을 잡아끌더니 줄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연히 접어든 줄타기 도제수업이 평생의 공부이자 직업으로 이어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김영철 선생은 왜 하필 당신에게 줄타기를 가르쳤을까?”
“그걸 잘 모르겠으나 진정 모를 일은 아닌 것이, 내겐 황소처럼 우직하게 뚜벅뚜벅 가는 근성 하나는 있다. 날마다 놀이판이 펼쳐지는 민속촌에서 그냥 뛰어놀던 철부지였을 뿐이지만 선생께선 뭔가 자질을 봤을지도 모르지.”
“쓸 만한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후계자라는 의식조차 없이 가르치시는 대로 반항 없이 받아들이며 훈련에 임했다. 열네 살 때의 어느 날, 짓뭉개진 내 엉덩이를 바라보며 스승께서 말했다. ‘야야, 내가 60년간 줄을 탔지만 너처럼 고지식한 놈은 처음 봤다!’(웃음) 줄 위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까지고 터진다. 동아줄에 쓸리고 깨지고, 피 터진 볼기짝에 팬티가 들러붙어 피범벅 오방난전(‘나한전’의 방언)이 되더라고.”
“능란해지면 매혹되게 마련이다. 혹독한 수련을 통해 기량이 늘며 서서히 줄타기에 빠져들었나? 이게 내 길이구나, 그런 필연을 느낀 건 언제였지?”
“매력을 느끼긴 어려웠다. 스승의 가난, 외로움, 서러움, 그런 걸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첫 공연을 해 내가 출연료라는 걸 받는 일이 생겼다. 아하, 이걸 하면 살림에보탬이 되겠구나, 그런 기대가 생기더라고. 우리 집안이 너무 가난해 아버지가 빚을 지며 살았지. 그걸 중3 때 출연료를 모아 갚아드렸다. 밥벌이 수단으로만 줄타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가물거리는 전승 민예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스무 살 지나서부터 찾아왔다.”
용렬한 잔꾀 한번 부리는 일 없이 스승을 섬기어 묵묵히 따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취월장이 있었겠지. 줄은 통상 3m 허공에 걸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가 있다지만, 줄에서 허투루 실족하는 줄광대는 줄광대도 아니다. 약식 줄타기인 ‘도막줄’이 아니라 완판 공연을 할 경우엔 무릎 꿇고 걸어가기· 거미줄 내리기·뒤로 훌치기·앉아서 돌기·콩 심기·쌍홍잽이·난간치기 등 40가지의 난해한 기예를 줄줄이 펼쳐야만 한다. 하수에겐 작두날처럼 긴장이 될 외줄. 그러나 고수는 줄 위에서라야 신명이 뻗친다. 동으로 서로 풀을 눕히거나 일으키거나, 자유자재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줄을 가지고 논다. 혹은 치닫고 내닫고, 혹은 설치고 까불고, 혹은 떴다가 내려앉는다. 오두방정과 너스레로 표출되는 재담의 해학으로 관중을 사정없이 휘어잡아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 호흡의 리듬, 막대한 힘과 균형감각, 그리고 샘솟는 기지와 언어적 순발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줄이 내 생명줄이다”
김대균의 기량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부터. 그즈음 고향과도 같았던 민속촌과 결별한 건 자유롭고도 본격적인 줄판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그래 전국 곳곳의 문화 행사나 축제 현장을 돌며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기량을 과시했다. 덩달아 기능도, 연행 구성 솜씨도 날로농익어 가는 곳마다 대중의 갈채가 쏟아졌더란다. 서른네 살 땐 마침내 줄타기 2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당시 언론들은 최연소 인간문화재 김대균에 관한 보도를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내딛었다. 특유의 뚝심을 발동,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던 것.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연희과에 입학, F학점을 수시로 받으면서도 공부에 열을 내 무사히 졸업했다. 안주하지 않는 정신이비치는 행장이다. 그제야 비로소줄 아래 세상을 쿵덕거리는 마음으로 또렷이 내려다봤던 모양이다. 가슴으로 차오르는 자부심과 희열에 행복했다는 게 아닌가.
“스승이 자주 홀대 당했듯이, 줄타기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도가 낮아 섭섭한 대접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전통 연희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문화재를 대하는 눈빛들이 달라졌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 그러자 새삼 절박한 사명감이 느껴지더라고.”
“줄광대의 울분과 욕망을 다룬 영화 ‘왕의 남자’를 계기로 줄타기에 대한 인식이 별안간 높아졌다지?”
“탄탄한 시나리오, 빼어난 영상미학으로 재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녹여낸 영화였다. 이 영화의 히트와 함께 줄타기 공연 환경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전국 각처에서 펼쳐지는 축제들도 비슷한 작용을 했다. 줄타기만큼 민속축제에 적격인 장르가 어디 있겠는가?”
“줄에 오를 땐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줄이 내 생명줄이다, 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처자를 먹여 살릴 방편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죽을힘을 다해 완성도 높은 공연을 해야 한다는 다짐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그래서 무수히 거듭해온 공연이지만 늘 긴장돼 스트레스가 쌓인다. 공연이 없을 땐 하루 한 갑 정도 담배를 피우는데 줄 타는 날엔 세 갑씩 피운다.”
이미 피부처럼 몸에 붙은 기예를 실컷 즐기면 그만일 것 같지만, 줄타기란 원천적으로 아슬아슬한 곡예라 방심은 금기다. 긴장을 면제받을 길이 없다. 연희란 또한 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작업과 달라서, 행위자의 노출증과 관찰자의 관음증이 맞부딪쳐 교감과 만족을 야기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긴장감이 자글거릴 수밖에 없다. 매번 청심환을 먹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처럼 말이다. 한 발 삐끗해 낙상이라도 한다면 스스로를 모독한 죄의식에 겨워 남몰래 슬플 게다.
“관객은 가급적 많은 게 좋겠지? 북새통을 이룬 다중의 호응과 박수소리에 힘입어 신바람이 날 테니까.” “예전 어릴 적 공연에선 박수는커녕 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질리기도 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회의가 밀려올 정도로. 그러나 그건 다 지나간 일이다.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일에 귀신처럼 능한 게 줄광대다. 관객 수에 흔들릴 게 없다는 거. 그런데, 오늘 공연이 잘될지 말지는 현장에 도착 즉시 정확하게 가늠되더군. 공연장의 환경, 바람의 동향에 따라 공연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건 지역 정서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난히 점잖은 사람들만 사는 지역에선 썰렁한 반응이 돌아오더라고.” “나무토막 같은 사람마저 요절복통하게 만드는 게 줄광대의 의무 아닌가?”
“재담이 관건이다. 줄 아래서 양념을 치는 어릿광대와 주고받는 재담에 폭소가 터지는 것이지. 작고한 발탈의 명인 이동안 선생을 아는가? 남사당패 출신의 위대한 재인이었던 그는 줄타기에도 능했다. 난 선생을 쫓아다니며 판줄 재담과 타령을 배웠다. 그러나 재담에 빼어나기는 쉽지 않다. 부단히 아이디어를 찾으며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평소 애용하는 짤막한 재담 한 토막을 소개한다면? 가급적 웃기는 걸로.”
“흠. 일테면 다음처럼 사설을 늘어놓는다. ‘어떤 사람이 그럽디다. 줄 하나 잘 타면 출세한다고. 그래서 아홉 살 때 줄에 올라 한평생 줄을 타고 있지만 별 볼일 없더라고! 매번 엉덩이나 깨지고 줄광대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고 말여.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건 있더라고! 여러분들이줄 아래서 저를 올려다본다는 것말여! 얼쑤! 자 그럼, 넋두리 그만하고, 잘하면 살판이요, 잘못하면 죽을 판이로구나, 어디 한번 살판이나 놀아볼까?’ 이런 식으로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결례되는 얘기지만, 그 정도의 재담으로 폭소 유발이 가능한가? 아마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사하는 재담이 진국일 것 같다.”
“다분히 형식화된 게 전통 연희다. 과거의 틀을 보존해야 하는 당위에서 초래된 박제화 경향이 있다. 이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 그건 내가가장 진력하는 부분이지.”
줄광대 나이 서른이면 환갑
저 옛날의 광대들은 비록 천대받고 살았으나, 그 반동으로 숙성한 꿈과 갈망과 해학은 옹골찼다. 들려오는 얘기에 이런 게 있다. ‘백정은 썩은 기둥에서 나오는 노래기이고, 광대는 똥에서 나온 파리다. 노래기는 사람 눈에 띄면 밟혀 죽지만, 파리는 임금님 용안에도 앉을 수 있다.’ 광대의 숙명과 지향을 꿰뚫은 황금 언설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대들의 기량과 배포와 정신의 대륙붕을 어지러이 급변하는 현대에서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김대균의 고민도 이 대목에 있는 것 같다.그는 해외 공연을 수십 차례 해왔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전통문화의 무한한 잠재력에 관한 자각이라지. 서양인들이 오히려 더 줄타기에 열광하더라는 것이다.
“즉각 즉각 반응이 오더라고. 그들이 워낙 공연문화에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한국의 줄타기에 서린 섬세한 예술성에 감동하는 것 같았다. 재담 없이도 통했다. 몸짓 언어만으로도 다 이해하는 분위기였으니.”
“가사, 발탈과 더불어 줄타기 종목이 ‘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맥이 끊길 가능성은 없을까.”
“줄을 배우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나에겐 현재 겨우 다섯 명의 전수자가 있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수자 등 10여 명이 있었으나 이탈했다.”
“왜지?”
“훈련이 너무 빡세거니와 긴 세월을 수련해야 수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다고들 하면서도,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는 걸 알아 재주 용한 아이들까지 빠져나가더라. 원래 소년 명창이 대명창으로 성장하기 힘든 법이다. 심지어 내 아들놈도 전수 장학생으로 줄을 배우다 달아나 미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한다. 아들 인생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회계학이 뭐시여? 맘에 안 든다.(웃음)”
“이상하다. 당신의 몸이 비대해지고 있다.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워야 줄을 탈 수 있지 않나?”
“발목 골절로 근 1년 놀았더니 부풀었다. 사실 난 늙었을지도 모른다. 줄광대의 기량은 젊어 무르익는다. 이바닥에선 줄광대 나이 삼십 줄에접어들면 환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살을 빼고 다시 줄에 올라야만 한다. 불쏘시개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전수관 건립을 위한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욕이야 위험하지. 평생 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배운 거 하나는 ‘가운데 중(中)’ 의 지혜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시골집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휘영청, 밝은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혼마저앗아갈 듯 황홀한 저 달빛. 마당 연습장에 설치된 동아줄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보름달 아래의 줄타기는 어떤가?” 그리 건네자 돌아오는 답이 허무하다. “아이고, 이젠 늙은 것을.”
내 인생의 전환점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200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내 나이 5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때까지 사내 회의 자료나 외부 강의용 PPT 자료는 직원들이 다 만들어줬다. 문서를 만들거나 심지어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직원들이 대신 해줬다. 프리핸드로 건축 기본 스케치를 해서 넘겨주면 직원들이 캐드로 말끔하게 도면을 그려냈다. 사실 건축 기본 콘셉트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초기 단계에서 삼각자를 이용하거나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면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전개에 방해가 된다. 그런 습관 때문에 나는 컴퓨터와 오래도록 친하지 못했다.
그날도 외부 강의를 준비하면서 여느 때처럼 디자인 부서 여직원에게 강의 교안을 부탁했다. ‘아름다움의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한 강의 슬라이드에 오드리 헵번 사진을 넣고 싶었다. 머리에 보자기를 멋지게 둘러쓴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강의 자료에 넣어 달라고 했더니 “사진을 캡처해서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간단할 텐데요!”라며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이메일도 주고받지 못하는데 캡처는 또 뭔 말인지. 여직원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나는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책상에서 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커먼 컴퓨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홀로 서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컴맹 탈출이었다. 내 아이들을 가르쳤던 컴퓨터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기초부터 배우기로 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먼저 말했다. 한글 문서를 만들고 싶고, 이메일을 주고받고 싶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싶고, 강의용 PPT 자료를 만들고 싶고, 원하는 사진을 자유롭게 캡처해서 편집하고 싶고, 포토샵과 엑셀도 어느 정도 하고 싶다며 꽤 많은 걸 요구했다. 그리고 몇 개월 개인지도를 받았고 놀랍게도 이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친김에 실행 가능한 목표를 매년 한 가지씩 정하고 퇴직 목표 나이 60세까지 10년 동안 10가지를 이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전문강사자격 과정을 수료했다. 머지않아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러시와 함께 평생학습에 대한 수요가 많을 것이니 그때 필요할 전문 강사의 기본 소양 등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강사자격 과정에 참여하기 전에 컴퓨터의 기본을 배워둔 것이 주효해 이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원고를 쓰고 사진을 편집하면서 컴퓨터 사용 능력도 한층 향상되었다. ‘무지개 공감’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나의 건축인생 이야기’를 썼다. ‘시니어 비즈니스 스쿨’은 실버산업 분야의 교수, 요양원 등의 시설 운영자, 실버용품개발 디자이너가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시니어의 주거 문제를 다뤘다. 책을 같이 내니 출판비용 부담도 줄었고 멤버들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블로그에 틈틈이 글을 올리면서 신문이나 문예지에서 공모전을 하면 응모했다. 금융위기와 관련한 수기를 모은 책 ‘희망편지’와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펴낸 책 ‘내가 만난 추기경’은 그때 채택된 작품들이다. 블로그를 운영한 지 10년이 지난 2017년, 저장해놓은 포스트를 보니 1700개가 넘었다. 10년 동안 이틀에 한 편꼴로 포스팅을 한 셈이다. 그렇게 모아둔 글 몇 편을 다듬어 계간 ‘문학의 강’ 수필 부문에 응모를 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수필가 등단도 이뤄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상담사 활동을 하고 싶어서 심리학 공부도 시작했다. 시동을 건 김에 심리상담사,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결혼상담사, 이혼상담사 자격증까지 땄다. 상담사 공부는 내 문제와 직면하게 해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반대로 미대에 가지 못했다. 그 한이 수십 년 동안 맺혀 있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석고 데생부터 시작해 기초를 배웠다. 늘 도전해보고 싶었던 목조각도 배웠다. 기타 치는 시니어를 꿈꾸며 중고등학생들이 다니는 기타 학원도 다녔다. 그렇게 10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59세가 되던 해인 2017년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30대 초반에 건축사를 취득해 건축사사무소를 개설했다. 도제생활까지 합하면 35년 가까이 한 분야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당시에는 건설 경기가 호황이어서 30대를 화려하게 보냈다. 그러나 날벼락 같았던 IMF로 40대가 저당잡혔고 그 뒤 10년은 빚 청산하는 데 바쳤다. 그래도 2007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 부서 여직원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현역을 더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미련 없이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1년 동안은 상당히 불안했다. IMF 때 겪었던 공황장애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10년을 준비했는데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은 사람들과의 교류였다. 그 판단은 옳았다. 만남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관계를 확장시켜줬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들이 실타래 풀려나가듯 하나씩 해결되었다.
지금은 현역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다. 준비해둔 대로 여러 기관에서 시니어 대상으로 주거 관련 강의를 한다. 우리의 주거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이한 글을 모아 ‘모두의 집’도 출간했다. 몇 군데 언론사와 기관에 글도 기고하고 있다. 답답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듣기 봉사’도 한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지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나를 찾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다녀야 하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다. 언제까지 왕성하게 활동할지 알 수 없다. 초고령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살아가야 할 미래가 가끔은 두렵다. 그러나 지나온 날들처럼 미래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안전망이 되어줄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을 만난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수십 년 건축설계를 하면서 언제나 잠에 늘 허기졌다. 학창 시절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설계과제 때문에 수시로 밤을 새웠다. 건축 작품전을 준비할 때는 몇 달씩 집에 들어가지 않고 써클 룸에서 먹고 자면서 전시 준비를 했다. 건축설계사무실 도제 생활을 할 때도 야근과 철야를 반복했다. 건축설계 사무실을 개업하고 나서는 밤을 새는 날이 더 많았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작업으로 도면을 그려야 하므로 절대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착공 날짜에 맞추어 도면을 납품하려니 야근 철야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형상공모를 할 때는 납품 전 며칠간은 직원들이 전부 집에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공사감리를 다닐 때도 새벽에 움직여야 한다. 현장은 보통 새벽 일찍 일이 시작된다.
필자는 젊은 시절 술을 많이 먹고 다녔다. 먹는 양도 많았고 술자리 횟수도 잦았다. 술자리는 언제나 새벽이 가까워져야 끝이 났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서 잠시 눈 붙이고 출근하곤 했으니 늘 잠이 부족했다. 종일 숙취로 헤매다가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 또 술 생각이 나곤했다. 어디선가 걸려올 것 같은 술 전화를 기다리다가 급기야 참지 못하고 필자가 전화를 돌리곤 했다. 그렇게 술을 먹고 다녀도 지각은 안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늘 잠이 부족할 수밖에….
요즘엔 밤늦게까지 술도 거의 먹지 않는다. 아침에 좀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지만 해가 뜬 후 집을 나서는 것은 영 어색해서 요즘도 새벽에 출근한다. 대체로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을 못 잔다. 건축을 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지만 그 전날 술자리가 늦었거나 잠을 잘 못 잔 날 새벽에는 정말 힘든 경우가 있다. 이렇게 늘 잠이 부족한 상태인데도 예민한 성격의 필자는 평소에 잠을 잘 못 잔다. 잠이 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많다. 잠이 깊게 들지도 않는다. 자다가 몇 번씩 깬다. 젊어서는 잠 잘 시간이 없어서 못 잤지만 지금은 불면증 증상으로 잘 못 잔다.
이렇게 잠이 부족한 필자에겐 특별하게도 숙면을 취하는 환경이 딱 하나있다. 흔들리는 열차다. 물론 지하철도 해당된다. 지방 출장을 다닐 때는 꼭 열차를 이용한다. 열차를 타자마자 골아 떨어진다. 부산 출장을 갈 때는 잠을 제대로 잔다. 누군가 깨워서 일어났더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내리라고 한 적이 있다. 열차가 부산 역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 승객들은 전부 하차하고 필자 혼자 텅 빈 객차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출근길 지하철 소요시간이 40분 정도 되는데 자리에 앉으면 내려야 하는 역까지 푹 잔다. 다음 정차할 지하철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은 의외로 데시벨이 높다. 지하철 객차 안의 소음도 많다. 그런데 가는 동안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숙면 상태를 취한다. 더 희한한 일은 내려야 하는 역 이름이 나오는 방송은 꼭 들린다는 것이다. 수 년 동안 이렇게 지하철 숙면을 취하면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경우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잠은 길게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숙면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비슷한 시간에 출퇴근 하는 사람들 중에 필자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완전 꿀잠에 빠진 머리 희끗희끗한 시니어….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만화계의 거장 장태산이 웹툰 로 돌아왔다. , 등 굵직한 작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만화가 장태산 그가 맞다. 말이 필요 없다. 지난 1월 연재를 시작한 이후 반응이 뜨겁다. 어린 독자들은 그런다. 내가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니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겠다고.
“선생님, 이거 배경 다 안 그리셔도 돼요.”
포털사이트의 웹툰을 담당하는 젊은 직원의 눈에 만화가 장태산은 괴짜다. 컴퓨터 조작 몇 번으로 만화 한 컷의 배경을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을 일일이 수작업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작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후배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냥 그것이 40년 동안 우직하게 만화책을 만들어 온 그만의 방식이다. 베테랑 만화가인 그가 포털 사이트 직원에게 대답한다.
“내가 밥 지어 보니까 가스보단 장작으로 밥 짓는 게 더 맛있더라고.”
그래서인지 장태산의 첫 웹툰 데뷔작 은 다른 웹툰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평이 많다. 스토리와 데생부터 캐릭터의 표정까지 옛 무협 만화책 보듯 섬세하고 날렵하다.
장씨는 자신을 ‘미련한 놈’이라고 표현한다. 평생 만화를 그리며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게 그리면 될 일이지만, 여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다룬 웹툰 에도 이런 의지가 투영돼 있다. 인생의 반 이상 펜과 붓을 잡았던 만화가 장태산. 이제 그의 무기는 전자펜과 키보드다.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 미련하다? 틀린 것 같다. 그 미련함에 대한 독자들의 대답은 환호와 찬사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화책을 향수하기 시작했다.
◇ 도제식 만화책 vs 나홀로 웹툰
“어느 날 강풀이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림을 못 그려서 선생님들이 문하생으로 안 받아주신 덕분에 저만의 색깔을 가진 작가로 살아남은 것 같아요’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장씨는 요즘의 웹툰 작가들이 순발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부족한 점은 최소화 하고, 장점은 부각시켜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웹툰계의 현실도 한 몫 한다. 도제식으로 문하생들과 함께 팀을 꾸려 만화책을 냈던 옛날 방식은 스토리와 데생, 펜 터치 등이 분업화돼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반면에 혼자서 그 모든 것을 1주일 안에 토해내야 하는 웹툰 작가들에게는 단점을 일정 부분까지 끌어올리는 것보단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저는 이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죠. 김두호 선생님 밑에서 문하생으로 13년을 했고 그 방식 그대로 40년 동안 만화를 그렸으니까요. 만약 그림 실력이 떨어진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지. 근데 웹툰은 또 다르더라고요. 그림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남다른 공감 능력이나 스토리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탁월한 친구들이 많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 세대 만화가 들은 필요 이상으로 엄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랑, 복수 등의 명제로만 작품을 다루려 했지. 근데 지금은 소재가 너무나 자유롭고 다양해요. 도제식 방식이 어쩌면 너무 우리를 획일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 만화책 이 아닌 웹툰
“예전에는 세상의 변화에 쉽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 최근 10년의 변화는 너무 빨라 따라가기 힘들더라고요. 만화도 그래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독자층이 어리다는 것이죠. 근데 지금 어린애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만화를 보더라고요. 만화책은 몰라도 웹툰은 안다는 것이죠.”
장씨의 웹툰 입성은 이러한 사회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사실 은 10년 전에 출판을 하려고 했다. 여러 출판사와 조율했지만 결렬의 연속이었다. 종이시장의 몰락으로 출판사는 장편보다는 단편으로 만들기를 원했지만, 장씨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버리면서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즈음해서 그도 갈팡질팡했다. 작가로서 작품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생명력을 다했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세월이었다. 정교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만화 작업에 노안(老眼)은 불편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곳을 확대해서 볼 수 있는 컴퓨터 작업은 그래서 안성맞춤이었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편한 점도 많은 것이었다.
“컴퓨터 작업이 좋긴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기껏 다 그려놓고 하나 실수하면 종이를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이건 그냥 취소해버리면 되니까. 근데 그런 건 있지. 손맛이 약간 떨어진다는 거?”
◇ 창녀를 취재한 이야기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연기가 방 안 곳곳에 가득하다. 그 연기와 냄새를 오랫동안 머금은 빛바랜 사진과 책들은 한곳에서 오래 끓여진 사골처럼 장태산의 만화에 깊은 맛을 내주고 있다. 어떤 만화가나 그렇겠지만 책이든 신문이든 사진이든 직·간접적인 사건들은 작품에 중요한 재료가 된다. 그래도 역시 그중의 으뜸은 오감을 이용한 취재다.
“시리즈는 나중에라도 꼭 완성하고 싶습니다. 성인 단편 만화였는데 그것을 위해 창녀와 깡패를 직접 만나 취재한 적이 있었죠.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드러내보고 싶었거든요.”
그녀들은 장태산을 쫓아내기 일쑤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같이 술 마시고 만나서 회유하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만 해주면 내 모든 것을 말해주겠다고 하면서.
“차 한 잔 마시고, 밥 같이 먹고, 영화 보면서 데이트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까짓 것 어려운 것 아니니까 함께 했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고요. 정말 인생 공부 많이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꾸준히 책을 읽고, 사회를 탐구하는 것은 작품에 독자들이 생각해 볼 만한 화두를 던지기 위해서다. 도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칭기즈칸의 일대기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읽는 독자, 그리고 인간들을 향해 있다.
“에 야만스럽고 척박한 땅 몽골에서 살아남은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통해 극한에 다다랐을 때 인간의 현실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의 감성을 말이죠. 그 처참한 현실을 더럽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현실은 그보다 더 비참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