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현림(申鉉林·57) 시인은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 2편을 엮었다. 저마다 인생의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이 세상 딸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녀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앞날이 캄캄하게 여겨졌던 어린 시절, 지혜를 갈망하며 시를 읽었다. 삶의 경구로 삼을 시구를 모으며 나약한 정신을 탄탄히 다졌고, 긍정적인 시의 리듬은 자연스레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깃들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늙어도 늙지 않고, 절망스러울 때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신현림 시인. 그녀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3년 전,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들려줬던 신현림 시인. 이번에는 자녀 세대를 위해 새롭게 엮은 시집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개정판, 이하 ‘딸아’)과 ‘아들아, 외로울 때 시를 읽으렴’(이하 ‘아들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베스트셀러인 ‘딸아’를 읽은 독자들이 종종 아들을 위한 시집도 엮어 달라고 했는데, 그 바람이 ‘아들아’로 이뤄진 셈.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전과 같은 인터뷰 장소에서 신 시인을 만났다. 변함없이 호쾌한 특유의 미소에는 그녀의 파란 카디건처럼 청아하고도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한쪽 손의 커다란 캐리어가 눈에 띄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느냐 물으니 기부할 새 시집들을 배송하고 오는 길이라고. 미혼모의 집, 소년원, 해바라기 센터 등 기부처를 직접 찾아 정리했는데, 40곳이나 된단다.
“요즘 애들이 입시에 관한 것 외에는 책을 잘 안 읽는대요. 물론 이 책들도 곧바로 읽히고 위안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공짜로 온 책이니 어디 한구석에 처박아두겠죠. 언젠가 비 오고, 쓸쓸하고, 잠이 안 올 때 불현듯 들춰볼 거예요. 한 장, 두 장 넘기다가 ‘어? 괜찮네?’ 하고 시가 와 닿으면 그때부터 읽는 거죠. 그러다 ‘시가 좋은 거구나’ 알게 되면, 뭔가 쓰고 싶고, 표현하고 싶어져요. 그렇게 한두 줄 일기라도 쓰게 되고요. 글을 쓰는 여유를 찾았다면, 그 자체로도 인생의 중심을 잡는 데 효과가 있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괴롭고 슬플 때마다 시를 읽으며 자신을 위로한 신 시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시는 정신의 양식이며 구원의 등불이었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말을 절감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좌절을 느끼게 마련. 그녀는 특히 인생의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이 장차 살아가며 버팀목으로 삼을 수 있는 시 한 편을 간직하길 바랐다.
“부모와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들 만큼 절망스러울 때, 자기 마음을 다스릴 시가 있으면 좋아요. 누군가에게 듣는 잔소리가 아닌 글로 보는 시구는 오롯이 나와의 침묵 속에서 읽힙니다. 내 안에서 진정 위로받는 시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정말 대단하죠.”
신현림 시인의 인생에 버팀목이 돼준 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위로받은 여러 작품 중에서 그녀는 시의 경이로움을 처음 느끼게 해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꼽았다. ‘잎은 무성해도 뿌리는 하나/ 거짓 많던 내 젊음의 나날/ 햇빛 속에서 잎과 꽃들을 흔들었지만/ 이제 나는 진실을 찾아 시들어가리’라는 단 네 줄의 시가 소녀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읽으면서, 막연하게나마 늙음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아, 내가 나중에 나이를 먹겠지만, 그래도 지혜를 얻을 수 있겠구나. 늙는다는 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구나. 아주 짧은 시인데도, 긴 여운이 남았었죠. 또 그때부터 시를 사랑하게 됐고요.”
열일곱 소녀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쉰일곱이 됐다. 40년 전 읽었던 시 덕분에, 나이 듦이 꼭 두렵지만은 않았다. 시의 제목처럼, 그녀가 나이 듦을 통해 얻은 인생의 지혜는 무엇일까?
“아픔까지 놓아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젊을 땐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한 일주일을 끙끙 앓잖아요. 나중에 보면 별거 아닌데도 당시엔 너무나 크게 와 닿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잖아요. 괴로운 건 툭툭 내려놓고 집착하지 않으려 하죠.”
그녀는 평소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얼마나 줬는가’를 자문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더불어 “이제는 주는 나이”라고 강조하는 신 시인. ‘주는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으니 숫자보다 명쾌한 대답을 들려줬다.
“‘선생님’ 소리 듣기 시작할 때부터죠.(웃음) 내게도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선생님, 선생님,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돈도 쓰고, 밥도 사고, 그렇게 사랑을 줘야 할 때가 온 거죠.”
슬픔 없는 앨리스는 없다
신현림 시인을 만나보면 그녀가 시를 아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고 말하자 “아름다우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눈을 반짝인다.
“시를 사랑한다는 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거죠. 아름다움은 규정된 게 아니에요. 또 계산 없이 순전한 마음에서 오는 사랑이 아름답듯, 순전한 영혼의 상태에서 써지는 게 바로 시가 아닐까요? 사랑, 아름다움, 시, 이 모든 게 다 같은 거라고 봐요.”
신 시인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는 아마 하나뿐인 딸일 것이다. ‘딸아’의 초판본이 나왔을 때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엄마와 입시제도에 관해 논담할 만큼 성숙해졌단다. ‘딸아’ 개정판에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추가됐다. 물론 시집은 세상의 수많은 딸을 위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진짜(?) 딸은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엄마가 엮은 시집을 읽고 딸이 가장 위안을 얻은 시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맨 처음 시집이 나왔을 때는 어린 나이라서 읽기 어려웠죠.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새로 나온 책도 어제야 줬어요. 딸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거든요. 아직은 시집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못해봤네요. 그런데 나도 참 궁금해요. 우리 딸이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할까? 꼭 물어봐서 알려줄게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그녀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수많은 작가의 수많은 시 중에서 딸이 꼽은 최고의 작품은 바로 엄마 신현림의 ‘슬픔 없는 앨리스는 없다’였다. ‘매일매일 축제이니/ 우울해하지 마/ (중략)/어디에 있든 태양 장미를 잃지 마/ 너를 응원하는 나를 잊지 마’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 속 ‘너’라는 주체에 대해 딸은 이 세상 어느 독자보다도 가깝게 느꼈을 것이다. 딸을 위해 시를 쓰는 엄마, 엄마의 시를 읽는 딸, 이 뜨겁고 오묘한 감정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세상 모든 엄마가 시인처럼 자녀를 위해 시를 쓸 수는 없다. 그녀는 좋은 시집을 읽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아들딸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해보세요. 재미있는 영화를 함께 보면 그것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잖아요. 시집을 읽고 좋은 시를 공유하며 서로 인생의 덕담을 나눠봤으면 해요. 부모와 아이 모두 영혼이 유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되도록 많은 이가 시를 가까이하길, 또 시처럼 살아가길 바란다.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 짧고 명쾌한 깨달음을 주는 장점도 있지만, 시의 연과 연 사이 공간처럼 이따금 쉬어가는 쉼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매몰되기 쉬운 일상에 시로 브레이크를 걸면 잠시나마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요.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스스로 묻거나, 잠깐 멈춰 서서 피부에 닿는 바람도 느껴보기도 하고요. 군더더기가 없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삶에서 쓸데없는 걱정과 부정적인 것은 모두 덜어내고 군더더기 없는 인생을 살면 좋겠어요.”
‘내 엄마의 이름은 김정숙. 고향은 평북 선천군 선천면 일신동. 이십대 중반에 남편 신하철을 만나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남에서 살아왔어도 늘 꿋꿋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38년 야당투쟁을 했고 민주화의 대부로 국회의원직을 지냈던 남편이 서울대총학생회장을 숨겼다가 잡혀 고문 받고 시달릴 때도 경찰들에게 고함을 팍팍 지를 정도로 용감했다. 연약했지만 단단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을 때, 시인 신현림 (申鉉林·54)과 자매는 약소하나마 장례식장에 어머니의 일대기를 걸었다. 수많은 영웅의 인생이 전기로 남듯, 자신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어머니의 인생을 글로 써내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어떤 영웅보다 위대했고,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남문시장
딸아이와 함께 시장을 갈 때면, 어린 사 남매를 데리고 장을 보러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시골 약사로 생계를 유지했던 어머니는 때때로 아이들의 손을 맞잡고 인근 대도시 수원으로 약제를 떼러 가셨다. 그 시절 신현림 작가의 고향인 의왕에는 큰 시장도 없었고 마땅히 서점도 옷가게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장을 보러 가는 날은 소풍과도 같았다.
“엄마랑 수원 남문시장을 누볐던 기억이 참 사랑스럽게 남아 있어요. 같이 가면 옷이나 학용품을 꼭 하나씩은 사주셨는데 그게 무척 신났고, 길가에 앉아 엄마와 함께 먹던 순대, 떡볶이, 번데기도 참 맛있었어요. 가끔씩 좋은 영화를 보면서 군고구마와 오징어를 부스럭거리며 먹던 기억도 애틋해요. 단골로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강서면옥’도 떠오르네요. 지금 다시 엄마와 손을 잡고 강서면옥에 들러 자장면 곱빼기를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는 엄마에게 시장이란 ‘내 가족에게 가장 좋은 걸 입히고 먹이고 싶은 욕망, 바로 사랑이 투영된 신성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딸아, 외로울 때면 시를 읽으렴
그렇게 시장에 가는 날엔 어머니와 서점에 들르곤 했다. 여고생 시절, 어머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은 그녀에게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설처럼 긴 글은 부담스러웠던 입시생 초기, 짧은 시만큼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고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인터뷰를 할 때나 책장에 쌓인 시집들을 보면 엄마랑 서점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요. 우리 동네엔 서점이 없어서 수원을 가면 꼭 그 동네 서점을 들렀어요. ‘세계시인선집’같은 시 모음집을 사주셨는데 그때 읽은 시들이 저를 시인으로 이끈 거 같아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대들고 마음 아프게 한 적이 많은데, 그런 괴롭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게 바로 시였죠. 그렇게 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고, 지혜롭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분명 책 읽기의 소중함을 알고 제가 책을 가까이하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녀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담아 그녀는 4년 전 이라는 시집을 엮어내 장기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어머니는 책 읽기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강조하셨고, 교육열 또한 높으셨다.
“엄마는 의대를 2년간 다니기도 하셨지만,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의식이 깨어있는 신여성이셨어요. 사실 저는 대학 진학을 안 하려 했는데, 그때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대학을 안 가면 형제간에 학벌 차이로 의가 상하고, 차이 나는 사람이 외로워지게 된다. 그러니 대학을 가거라.’ 그때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면, 어쩌면 정말 그런 외로움에 휩싸였을지도 몰라요.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셨어요.”
중년의 엄마 그리고 중년의 딸
어머니가 떠난 뒤, 영영 만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시로 썼다. 그 마음은 그녀의 시 ‘엄마의 유언, 너도 사랑을 누려라’에서 짙게 우러난다. 엄마로서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나아가던 그녀는 중년 이후 어머니와 점점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예전에는 엄마와 안 닮아서 힘든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엄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내가 나이가 들수록 중년의 엄마 모습과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요.”
닮아가는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생활, 엄마의 삶을 이해할수록 그 마음까지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돼봐야 엄마를 알게 된다죠. 내가 자식을 키우니까 엄마 생각이 매일 나요. 딸이 속 썩일 때면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얼마나 혈압이 올랐을까? 엄마도 힘들고 가슴 아팠을 텐데’하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돼요. 딸이 행복을 주고 웃음을 줄 때면 ‘나도 우리 엄마에게 그런 딸이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고요.”
닮아버린 취미, 닮아버린 마음
“또 한 가지 닮은 점이 우리 모녀가 영화를 참 좋아한다는 거예요. 전에 TV에서 이 할 때면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곤 했는데, 한번은 가 하고 있었어요. 여느 때처럼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가 ‘비비안리랑 로버트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새삼 엄마 입에서 영화배우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이 신기했어요. 생각해보면 옛날 우리 집 다락방에는 엄마가 모아둔 영화 팸플릿들이 가득했어요. 가끔 수원 중앙극장에 가서 엄마와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그게 엄마에겐 해방구였고, 창이었죠. ”
하지만 그런 일상도 아주 옛날 일이고, 집안이 기울어 어머니가 가장이 되신 뒤로는 좋아하던 취미도 다 잊고 사셔야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볼 시간도 없이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도 지금 그녀의 삶에 묻어나고 있었다.
“엄마와 영화 이야기도 자주 나눴는데 그럴 때면 엄마의 눈은 더욱 또렷하게 빛났어요. 그렇게 엄마 덕분에 나도 영화광이 되었죠. 사춘기 때는 영화배우 사진으로 방에 도배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저도 영화 볼 시간 내기가 참 어려워요. 혼자 딸을 키우며 비디오로 보는 영화로 마음을 달래던 때를 생각해보면, 그 옛날 엄마도 우리를 키우며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어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
“엄마가 쓰러지시기 전 딸아이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던 적이 있어요. 탕을 가득 메운 수증기 속에서 엄마의 야윈 몸을 보니 너무 안쓰럽고 슬펐어요.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힘이 좋았던 엄마가 혈압 때문에 몸을 움직이고 숨쉬기도 곤란해 하시던 모습에 가슴이 아팠죠. 그렇게 ‘작별의 시간이 멀지 않았구나’하는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함께한 목욕탕에서의 그날도 이제는 아껴먹던 빵처럼 소중한 추억이 됐어요.”
그때서야 그녀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한 몸처럼 지내왔다는 것을. 그리곤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행운에 더 없이 감사할 수 있었다.
“고향에 엄마 가게 있던 자리가 없어졌어요. 엄마와의 보물 같은 추억이 가득했던 공간이었는데, 그게 없어지니 가슴 먹먹하더라고요. 엄마의 가게처럼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때도, 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엄마의 존재도, 우리의 유한한 삶 속에서 함께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엄마를 뵐 수만 있다면 엄마의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그 외로움과 슬픔을 하나하나 헤아려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