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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귀함 되찾는 말의 힘 “추앙합니다! 반갑습니다!”
- “딸아, 되는 대로 살아. 걱정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그만하면 됐니라.” 아침 안부 전화 끝에 여든 중반을 넘긴 아버지, 툭 한마디 던지십니다.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져 휴대전화 바탕화면이 부옇게 번집니다. 우리는 가끔, 어쩌면 자주 마음이 바닥을 치고 속절없이 주눅 들 때가 있습니다. 보잘것없이 초라해진 자신에게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살아보니 별것 없다고 끌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누군가 곁에 계십니까? 이런 물음으로 마음 미장공 일곱 번째 이야기 열어봅니다. 왜 ‘추앙’ ‘추앙’ 하는 걸까요? 5월 29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화제와 열풍 속에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jtbc). 4년 남짓 공들여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는 박해영 작가가 이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내세운 것이 ‘추앙’입니다. 텔레비전 뉴스 자막은 물론이고 프로야구 경기장 응원 구호에도 ‘추앙’이 등장하고, 광고 문구에서도 ‘추앙’이 빠지면 섭섭할 만큼 대세 중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는 것을 뜻합니다. ‘새가 앞으로 날 수 있도록 손으로 밀어준다’는 추(推)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표현한 앙(仰)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다른 삶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주 네 병씩 마시는 남자 구 씨(손석구 분). 공장일도 밭일도 없는 날은 아침부터 마신 술로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얼굴이 깨진 채 피를 흘리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띈 순간. 나도 딱 그런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빚까지 떠안아 신용불량자가 되기 일보 직전인 데다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일하며 폭언과 모욕을 일삼는 팀장에게 영혼마저 빼앗길 지경인 여자 염미정(김지원 분). “날 추앙해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절벽 밑바닥으로 추락한, 텅 비어버린 자신을 ‘추앙’으로 채워달라고, 자기 밑바닥까지 보여준 남자에게 명령합니다. 그것은 아마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고 선언이며 다짐에 진배없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눈길이 갔으니까요. 원래 나와 당신은 하나니까요.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요. 인간(人間)이란 말처럼 우리는 사이에서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예전과 달라진 나를 경험하는 방법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확실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인생 종점에 도착한 것마냥 지리멸렬한 두 남녀가 그렇게 서로 ‘추앙’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법이 시작됩니다. 자책과 자학이 일상이던 자신이 어느 순간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러다가 상대방도 예뻐 보입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이런 보복은 안 해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당신 톡이 들어오면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아무리 지랄 맞은 성미도, 문자 메시지를 읽고 씹든 안 읽고 씹든 그냥 웃으며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이 내뱉는 말에 휘둘리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행간을 읽을 줄 알게 됩니다. 말 자체,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괄호 안에 숨어 있는 속뜻을 보물찾기처럼 찾아내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드라마 속 구 씨와 미정은 달라집니다. 화려한 겉모습이나 남 부러워하는 직업, 유창한 말솜씨 같은 포장지 따위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나와 남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참사랑, 추앙이 싹트니까요. ‘추앙’ 그리고 나마스테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TV 뉴스를 통해 인도 거리에서 두 손 모아 인사하는 맨발의 간디를 봅니다.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에게도 합장하며 절을 하던 간디. 그가 뭐라고 인사하는지 궁금해진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보내고, 간디는 이렇게 답장을 합니다. “나는 온 우주가 거하는 당신 내면의 장소에 절합니다. 빛과 사랑, 진리와 평화, 그리고 지혜가 깃든 당신 내면의 장소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것이 ‘나마스테’의 뜻입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문안드립니다. 인도와 네팔에서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로, 만났을 때나 작별할 때도 사용합니다. 다신교인 힌두교 문화권에서는 수많은 신이 각자의 몸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을 신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은 물론 상대가 숭배하는 신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이 인사에 깔려 있습니다. 유일무이한 우주적 가치를 지닌 당신에게 온 마음으로 경배를 드린다는 뜻의 ‘나마스테’. 상대의 존재 가치에 가장 높은 존경을 나타내는 말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간디의 답장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우주의 신비를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찾아 헤맨 답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마스테’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있습니다.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가 그렇습니다. ‘반’이나 ‘고마’는 우리 고대 선조들이 신(神)을 뜻하는 인칭대명사로 썼다고 합니다. ‘당신은 반(신)과 같습니다’, ‘당신은 신과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상의 인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반’은 ‘환하다’, ‘하늘의’라는 뜻으로 넓어져 지금까지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품이 바를 때 우리는 ‘반듯하다’고 하고, 신의 뜻이나 약속처럼 꼭 이루어지는 것을 ‘반드시’라고 말합니다. ‘반짝반짝’, ‘반딧불’처럼 밝고 온전한 신의 속성을 표현한 말에도 ‘반’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뜻이 우리말에 들어 있는 줄 저 역시 잘 몰랐습니다. 내 마음 밭에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게 아니라 나와 상대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말씨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지닌 참뜻을 새기면서 승강기에서 마주친 새로 이사 온 이웃께 먼저 인사를 건네볼까요. 반갑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 미장공 올림. ---------- ‘추앙’하는 마음을 꼭 닮은 노래 내 마음속 성역에 누가 있습니까? 섣불리 충고나 조언하지 않고 원치 않는 평가나 판단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 사람 인생에 개입해서 간섭하지 않고 있습니까? 원망 한 톨 없이, 미움 한 줄기 없이 그저 아낌없이 사랑만 줄 수 있다면, 나도 당신도 그 누구라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이고 쌓인 증오를 딱 멈추고, 눈 뜨자마자 달려드는 내 생애 침입자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웃으며 환대할 때 진정한 사랑, 추앙이 완성되지 않을까요. 1981년 당시 라트비아 가요 콘테스트 우승곡 ‘마라가 준 인생’()에 1997년 심수봉이 직접 가사를 붙여 새롭게 부른 ‘백만 송이 장미’. ‘추앙’도 ‘나마스테’도 ‘반갑습니다’도 절묘하게 담겨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중략)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린 인연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 2022-07-1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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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리가’
-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 2018-11-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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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성 높고 감각적인 백팩 패션
- 필자는 평소 백팩을 메고 다닌다. 캐주얼 의상이든 정장이든 항상 백팩을 멘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패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팩이 아직 낯선 모양이다. 백팩을 애용하는 이유는 양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양손이 자유로우면 위기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원래는 댄스 하는 날 댄스용 신발과 의상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백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백팩은 큰 편이라 쇼핑 물건을 담을 때도 편리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재질이나 크기도 중요하다. 한때는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주로 메고 다녔으나 숄더백은 한쪽에 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007 백’이라 불리는 서류가방도 마찬가지다. 신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게다가 내용물을 넣을 공간이 부족하다. 서류가방에 수박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팩은 다르다. 내용물의 형태에 관계없이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필자의 백팩은 명품 가방들의 역사를 볼 때 원조 백팩에서 진화된 형태의 디자인이다.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고 윗부분을 끈으로 조인 뒤 뚜껑으로 덮게 되어 있다.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백팩의 디자인을 보면 99%가 지퍼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야 가방 안의 내용물이 빠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상단이 뚜껑으로 되어 있어도 백팩을 뒤집지 않는 한 중력의 작용으로 내용물이 빠져 나올 일은 없다. 지퍼로 되어 있는 가방은 열고 닫을 때 양손을 써야 한다. 한 손으로는 가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지퍼 고리를 잡고 당겨야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뚜껑으로 디자인된 백팩은 집어넣기도 빼기도 쉽다. 또한 옆쪽으로 지퍼가 달려 있어 아래쪽에 있는 내용물도 쉽게 꺼낼 수 있다. 필자가 메고 다니는 백팩의 단점은 인조 가죽이라 수명이 짧다는 데 있다. 인조 가죽은 늘어나기도 하고 습도 때문에 오래 쓰면 껍질이 벗겨진다. 발트 연안에 있는 라트비아로 여행을 갔을 때 같은 모양의 가죽 백팩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100달러를 불렀다. 그러나 가죽 소재가 너무 무거워 결국 사지 않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실용적이어야 한다. 몸통 바깥쪽으로 사이드포켓이 있어야 좋다. 한쪽에는 물병을 넣어 다니고 한쪽에는 삼단 우산을 넣고 다니면 편리하다. 생수병과 삼단 우산이 들어갈 만큼 깊이도 있어야 한다. 그 외의 잡동사니는 정면의 사이드포켓에 넣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면 곤란하다. 몸통에 온갖 내용물을 다 넣으면 찾기가 어렵다. 수납공간이 따로 없어 마구 뒤섞여버리는 것이다. 물건이 섞이지 않을까 우려되면 부직포로 된 별도의 작은 가방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필자의 백팩은 디자인 면에서는 명품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게 많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도 같은 백팩을 멘다. 어지간한 필수품은 백팩 안에 다 들어간다. 해외여행 때는 세면도구와 양말, 여벌의 옷가지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한번은 초봄에 서울 근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날씨가 추웠다. 눈도 왔다. 일행 중 추위를 유난히 타는 사람이 있어 우산도 꺼내주고 장갑도 꺼내줬다. 가볍고 부피도 크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바람막이도 꺼내줬다. 필자는 모자를 꺼내 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도 잡아주고 눈발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사람들은 백팩 안에 없는 게 없다며 놀라워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3kg 정도인데 더 무거울 경우 어깨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는 들었다.
- 2017-09-0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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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3)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관광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발트 3국의 중간에 위치한 라트비아로 들어갔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나름대로 국경을 넘을 때 입국 수속이나 검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싱겁게도 버스가 그냥 지나쳤다. 검문소가 있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국경선 개념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첫 방문지는 바우스카의 룬달레 궁전이었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만들었다는데 규모만 작을 뿐 정말 비슷했다. 아름다운 궁전도 그랬고 뒷마당의 정원도 그랬다. 댄스를 알고 나서 보니 과연 궁전 내부가 그 옛날 귀족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없다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이 오렌지 나무를 심어 놓은 정원에 숨어 볼일을 봤겠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유르밀라 해변이었다. 발트해가 바로 보이는 휴양지라서 근사한 집들이 많았다. 다만, 큰 기대를 했던 발트해는 모래는 아주 작은 입자라서 좋은데 굴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해변을 걷다가 곧바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아직 낮 기온이 22도 정도라서 수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다음에 가본 곳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피터 대성당, 상인들이 700년간 사용했다는 검은 머리 전당,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정복자 스웨덴의 문, 돔 성당, 구 시청사 등을 돌아 봤다. ‘한자동맹’이라 하여 학창시절에 얼핏 들었으나 ‘한자’의 뜻이 ‘상인의 친구’라는 뜻이란다. 상공업이 발달한 무역도시라서 무역상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리가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 한쪽의 구 시가지, 반대편의 신 시가지를 감상하는 코스도 있었다. 우리 일행 30명만 타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라트비아의 스위스라는 시굴다, 라트비아의 허파라는 체시스를 둘러 봤다.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독일기사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독일과 발트 3국 사이에 폴란드가 위치해 있는데도 독일은 틈만 잇으면 폴란드를 침공했으니 발트 3국도 독일의 영향력이 컸다는 얘기이다. 발트 3국의 특산품으로 호박이 있다. 소나무의 송진이 열과 압력을 받아 굳어져 만들어진 천연 보석이란다. 자연산이라 조금씩 색이 달랐다. 싼 것은 10유로 목걸이부터 크기와 모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옛날 소나무가 많던 육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가라앉은 소나무들이 호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발트 3국의 호박은 바닷물에 뜨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열이 나도록 문지르면 한약재 냄새가 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이날 밤은 변두리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방이 넓고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세미나 실이 있었다. 낮의 룬델라 궁전을 떠올리며 귀족들 춤을 춰보자며 모였다. 30명 중 남성들은 피곤하다며 빠졌고 여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비엔나 왈츠를 가르쳤다. 전진하며 회전하면서 발 모으고 후진하며 역시 회전하면서 발을 모으면 되는 간단한 춤이다. 전진 스텝은 잘 했다. 그러나 후진 스텝이 조금 어려웠는지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 것만 빼고는 모두 무난히 소화했다.
- 2017-06-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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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2) 리투아니아 여행기
- 발트 3국을 가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에서 12시간 비행하여 이스탄불에 도착한 후 환승하여 다시 3시간 반을 더 가서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작은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과 6시간 늦은 시차라서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못 잔 사람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출입국 심사는 좁은 대합실에 승객들을 몰아넣고 한 시간이나 걸렸다. 자동입출국 시스템이 있는 인천공항에 비해 한참 후진국 형 시스템이라며 투덜댔다. 인천에서 밤 12시에 출발한 비행기였으므로 빌뉴스에 도착하니 아침 시간이라 호텔 체크인도 못하고 막 바로 관광에 들어갔다. 리투아니아의 첫 인상은 다른 유럽국가와 별 차이는 없었다. 현재 수도인 빌뉴스, 그전 수도였던 트라카이,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카우나스를 둘러보면서 세 도시 공통점이 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은 역시 돌로 만든 석조건물들이 많아, 오래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구 시가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입구에 ‘새벽의 문’이 있다. 빌뉴스의 구 시가지는 서울 성곽 같은 성곽이었는데 서울의 숭례문처럼 여기만 남아 있다고 했다. 성 오나 성당, 버나딘 성당, 빌뉴스 대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등 성당이 많이 남아 있다. 카우나스에는 독일군 침공을 막기 위해 축조한 카우나스 성, 중세에 지어진 구 시청사, 그 외 고딕양식의 집들이 볼만 했다. 트라카이에서는 호수 가운데 위치한 고성이 볼만했다. 가장 인상적인 관광지는 라트비아와 국경 지역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이었다.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나지막한 언덕에 놓여 있다. 5만개라는 설도 있고, 10만개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온통 십자가이다.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므로 희생자도 많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글자가 써져 있는 걸 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다. 무덤이 따로 없고 십자가만 그렇게 모여 있다.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그랬지만, 산이 없다. 한참을 가도 양쪽으로는 자작나무와 키가 큰 리기다소나무가 줄지어 있고 길가에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도로도 고속도로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그래도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으니 이동시간은 도시간 거리가 길어야 약 2시간 정도 걸렸다. 유럽 관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다. 가끔 무료 화장실도 있지만, 대부분 유료 화장실이다. 30센트에서 50센트 종전을 따로 준비해 가야 한다. 단체 버스로 가면 한꺼번에 내리므로 여성들은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매우 불편하다. 발트 3국의 특징에 대해 이미 갔다 온 사람들 얘기가 멋진 남자와 여자들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보니 피가 많이 섞여서 그렇다는 해석이다. 과연 좋은 체형에 옷도 깨끗하게 입으니 볼만했다. 다만 인구가 적다 보니 그곳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침 백야의 시즌이라 낮이 길다. 밤 9시면 해가 아직 서쪽하늘에 떠 있고 밤 12시가 넘어도 해가 어스름할 정도라서 관광에는 좋았다.
- 2017-06-2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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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1)
- 올해부터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던 여행을 위하여 일찍부터 점찍어 두었던 나라가 발트 3국이었다. 발트 3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서 유럽은 재직 시 독일 주재원을 인연으로 직무 상 여러 번 갔었지만, 나머지 유럽은 직무상 다녀 올 일이 없었다. 발트 3국은 지도를 보니 유럽에서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가 있는 북유럽도 아니고 동유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동북유럽이라 해야 한다. 북쪽에는 핀란드, 스웨덴이 있고, 동쪽에는 러시아가 있고 남쪽으로 폴란드가 둘러싸고 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도 작아서 생소한 나라들이었다. 비슷한 면적 세 나라 합해서 한 반도의 3분의 2 정도이고 인구도 각국이 각각 리투아니아 300만 명, 라트비아 200만 명, 에스토니아 125만 명으로 세 나라 합계가 625만 명 정도이다. 가이드에게 한 첫 질문이 “발트 3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였다. 대답은 “별 다른 특징은 없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나라가 발트 3국입니다”였다. 그만큼 특별히 볼 것도 없고 빼놓자니 아까운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로마를 먼저 보면, 다른 나라는 시시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랬다. 그래도 유럽은 유럽이다. 오랜 역사가 있고 석조문화 덕분에 고성, 대성당 같은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종교의 힘 덕분에 불가사의 같은 대성당 등이 지어졌다. 지정학적으로 강국의 틈새에 있으면 시련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소국이라면 우리나라의 운명과 비슷할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당연히 이웃나라인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좀 떨어져 있는 독일에게도 침략 당해 속국이 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구가 적으면 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1차 대전 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1939년 2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밀약을 하여 발트 3국을 제멋대로 소련 땅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동쪽의 소련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91년이므로 이제 겨우 26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독립을 위하여 벌인 인간 띠 행사가 1989년 8월23일 독소조약 50주년에 맞춰 600km, 200만 명이 참가했다. 3국의 수도를 인간 띠로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행사였다. 인구가 적으니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숲과 도로에 사람이 이어서기 위해 인구의 1/3이 나서는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소련 강경파가 제압하려 했으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의회와 방송국들을 시민들이 막아서는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친 고르바초프를 연금 시킨 3일천하 쿠데타가 있었고 이후 소련 연방 공화국들은 속속 독립을 선언했다. 발트 3국은 각각 각국의 특징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식민지화 했던 일본을 미워하듯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니 소련에게 적대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의 유물과 잔재가 존재한다. 에스토니아는 국민의 20%가 러시아계이며 러시아 접경에 몰려 살고 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자립해야 하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 할 제조업은 없고 50%가 서비스업, 20%가 농업인데 농업조차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일인당 국민소득은 1만5천불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살만한 나라들이다. 기후는 서울보다 약간 서늘하다. 6월인데도 아침 온도는 10도 이하이고 낮 기온도 22도 정도였다. 서울 날씨와 여러 번 유럽에 기본 경험만 믿고 반팔만 갖고 가기 쉬운데 필히 긴팔 옷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은 서유럽과 비슷하다. 입맛에도 잘 맞는 편이지만, 매일 하루 세 끼를 그렇게 먹다 보니 맵고 짠 한식이 생각난다.
- 2017-06-2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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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어드바이스] 시니어는 뭐든 잘한다! 배낭여행 베테랑이 되어보자
- 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퇴임 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西安)을 잇는 1만2000km에 이르는 길을 걷는다. “침대에서 죽느니 길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한 그는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여행을 통해 꼼꼼히 기록했다. ‘나이 듦’은 생각하기에 따라 젊음보다 오히려 장점이 많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 살고 여유 있게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이미 쓴 노트의 페이지는 되돌릴 수 없다. 아직 남아 있는 빈 여백에 새로운 인생 이야기를 쓰는 일, 지금 바로 시작하자. 이 글은 필자의 현장 경험을 가감 없이 반영한 ‘생생 정보’다. 여행지 선택, 어떻게 해야 하나? 전 세계의 유명인들이 망명국으로 선택한 곳은 유럽이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그들이 유럽을 정착지로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은 소도시별로 다양한 매력이 있다. 유럽 여행 좀 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여행지를 나라가 아닌 도시로 구분 짓는다. 다양한 ‘인문’을 접할 수 있는 것 이 유럽 여행의 큰 매력이다. 또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라서 운치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계절이 여행하기 좋을까? 여행 갈 때는 좋은 계절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봄이 가장 좋다. 여름이나 가을도 무난하다. 유럽의 여름은 지중해성 기후라 한국보다 훨씬 뜨겁지만 대신 습도가 낮다. 더우면 바닷가 근처에서 머물며 해수욕을 즐기면 된다. 가을 단풍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며, 겨울에는 설경을 감상할 목적이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북유럽 쪽의 겨울은 낮이 아주 짧다. 오후 3시쯤 해가 지기 때문에 관광할 시간이 너무 짧다. 겨울 여행은 긴긴 밤 속에서 보내는 날이 많을 수도 있다. 젊은 나이도 아닌데 굳이 타지에서 돈 써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비자 등 각 나라별로 주의해야 할 사항 유럽의 많은 나라가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을 맺었다. 솅겐조약은 180일 이내에 90일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는 규정이다. 그래서 솅겐국 내에서 총 체류가 90일을 초과하지 않으면 된다. 한 달 체류는 문제되지 않는다. 참고로 유럽연합(EU)은 회원국 총 28개국에서 영국이 탈퇴(2016년)하면서 27개국이 되었다. 알기 쉽게 권역별로 정리하면, 서유럽권(프랑스, 이탈리아, 몰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동유럽권(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체코,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 북유럽권(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이다. 숙소 구하기와 추천 사이트 소개 여행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박이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겠지만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독채를 빌려 쓰는 게 좋다. 외국에는 캠핑시설이 엄청 잘되어 있다. 자동차를 렌트해서 여행할 경우 캠핑장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외국의 시니어들은 값싼 호스텔을 많이 애용한다. 단, 호스텔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숙박기간은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일단 며칠 동안 지내보고 더 연장할 것인지는 그때 정해도 늦지 않다. 사람 마음은 늘 바뀌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숙소를 서로 바꿔서 지내는 방법도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이동을 많이 하지 않으면 경비 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 추천할 수 있는 대표적 해외숙박사이트 에어비앤비www.airbnb.co.kr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익스피디아www.expedia.co.kr 부킹닷컴www.booking.com 여행 경비 줄이는 방법 우리나라 환율을 기준해서 환율이 낮은 나라를 선택하면 된다. 참고로 동유럽이나 발트 3국은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피서철의 유명 관광지를 피하는 것도 경비를 아끼는 방법이다. 환율이 낮은 나라라도 피서철에는 여행객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행태가 일상화되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선진국도 다르지 않다. 신용카드와 현금,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여행 중에 쓸 카드는 미리 만들어가는 게 좋다. 분실이 염려되겠지만 해외 현지인들이 한국에서 만든 카드를 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비상시에 쓸 현금은 옷 속이나 자신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에 넣어둔다. 여행 가방은 최대한 간편하게 싸라 여행은 가볍게 해야 한다. 휴식을 하러 떠난 여행지에서 많이 가져간 짐 때문에 이런저런 부담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럽의 골목들은 한국과 달리 엄청나게 울퉁불퉁하다. 옛것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에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부족한 물품은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 실제로 의류 등은 한국보다 훨씬 싸다. 최악의 영어 실력, 여행지에서 괜찮을까? 각 나라별 언어를 익힐 시간은 없다. 영어만 할 줄 알면 어디선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이 최악이라면 짧고 간단하게 말하면 된다. 어린아이가 이해할 정도로 쉽게 언어를 구사하면 상대가 충분히 알아듣는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의 현지인들도 영어 실력은 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 영어를 못한다고 절대 고민하지 말라. 무엇보다 전 세계 공용어인 ‘제스처’가 있으니 여행에 있어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해본 적 없는 배낭여행, 어떻게 하나? 모든 일이 숙달되기까지는 누구나 초보 시절을 겪어야 한다. 처음부터 베테랑은 없다. 패키지여행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배낭여행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생하고 돈 많이 쓰는 여행을 왜 하는지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배낭여행의 매력을 백번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지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방법이 있다. 패키지여행을 자유여행으로 바꾸면 된다. 패키지여행을 가서 가이드 안내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일행들에서 빠져나와 자유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패키지여행 반 자유여행 반으로 구성된 이색적인 여행 프로그램들이 많다. 패키지여행이 온전한 배낭여행보다는 안전성을 보장해주니, 그렇게 몇 번 실행해보라. 어느새 배낭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여행자 보험, 반드시 들어야 하나? 여행자 보험은 3개월을 기준으로 한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지역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오면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험을 청구하면 의외로 황당할 때가 많다. 잃어버린 물건 가격에 상관없이 소정의 액수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건 변상은 기대 이상으로 박하지만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 또 현지에서 몸이 아플 경우 병원에 가는 데 도움을 준다. 강도를 만났을 때 대처법 여행지에서는 가끔 ‘강도’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치안이 안 좋은 나라에서는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행지의 도둑들은 혼자 행동하지 않고 대부분 두세 명이 함께 움직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여행자’인 척하고 따라 붙는다. 그러고는 경찰이라고 하면서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럴 때는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 제복을 입었는지 확인부터 하라. 말대꾸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 그들의 허점을 먼저 공략하면 된다. “제복을 입지 않았군요?”라고 말하거나 ‘경찰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하면 그들은 도망가기 바쁘다. 동양인들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푼돈’을 뜯으려는 자들이지 사람까지 해치려는 생각은 안 한다. 예방접종주사, 꼭 맞고 가야 하나? 예방접종을 하고 가면 훨씬 안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주사 비용은 생각보다 비싸다. 특별히 ‘위험지역’이라는 보도가 없는 나라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지역을 자주 이동하지 않는다면 전염병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아플 때 도움 받는 법 현지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 젊은 약사가 있는 곳을 선택하라. 나이든 약사는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해서 설명이 어렵다. 현지에서 병원에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픈 곳에 대해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치료를 안 해주는 병원도 있다. 이럴 때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집 도움을 받아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으로 찾으면 가능하다. 교통수단 이용 방법 여행지에서 이동은 필수다. 인터넷으로 미리 교통 정보를 알아보고 가겠지만 이 방법보다 유용한 것은 현지에 도착해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찾는 것이다. 친절한 가이드가 있는 곳도 있고 달랑 지도 한 장만 주는 곳도 있다. 상황에 따라 가이드에게 질문을 하면 된다. 특히 어려운 지명은 발음이 어려워 상대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으니 메모지에 써서 보여줘라. 그들은 전문가다. “싼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 2클래스를 알아서 척척 끊어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익숙해져도 직접 티켓 창구로 가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라. 자동기계를 잘못 이용하면 티켓 값을 순식간에 날릴 수 있다. 티켓을 발부받으면 정확한 날짜에 예약이 되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정확한 날짜가 아닌 ‘이틀 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날짜 계산이 잘못될 수도 있다. 여권을 잊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여행 중에 여권은 생명줄과도 같다. 복사본을 준비해가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경우를 대비해 증명사진 두 장 정도는 미리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하는데, 큰 도시의 경찰서는 이런 과정이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작은 파출소를 선택해서 신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신고 후 그 나라의 수도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면 임시 여권을 만들어준다. 계획했던 여행 날짜만큼 충분히 머물 수 있다. 국세환급금(Tax Refund) 받는 요령은? 여행지에서 특산물을 살때는 ‘Tax Refund’가 표시된 현지 숍에서 사라. 물건을 구매했다고 말하면 영수증을 발급해준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 영수증 발급을 안 해준다. 영수증은 모아놨다가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나라 공항에서 제출하면 된다. 대부분은 자국의 영수증만 환급해준다. 다른 나라의 영수증은 ‘Tax Refund’ 바로 옆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푼돈이라도 아끼면 적지 않은 돈이 된다. 기타 주의해야 할 사항들 여행지에서는 늘 변수가 있다. 이럴 때는 벌어진 상황에 맞춰 계획을 빨리 바꿔야 한다. “끝까지 해볼 테야” 하는 고집이 더 큰 변수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에 한국에 비상연락책을 두어 명 구해놓는다. 현지에서 일이 생기면 필자의 블로그(www.sinhwada.com)에 댓글을 남겨도 된다. 인터넷의 세상은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고 가깝고 빠르다.
- 2017-02-0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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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발트 3국에서 가장 으뜸, 에스토니아 탈린
-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나라다. 멀게만 느껴지고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이 세 나라는 실제로 접해보면 매력이 넘친다. 이 중 으뜸은 에스토니아다.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덴마크 왕이 만들어낸 성채 도시 ‘탈린’ “탈린은 꼭 가봐. 아름다운 도시야.” 발트 3국을 여행하겠다는 필자에게 여행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순전히 편리한 이동을 위해 정한 버스터미널 근처 숙소의 스태프는 친절하다. 교대로 바뀌는 중년 여성 스태프들은 한결같이 영어를 잘한다. “일찍부터 영어를 배워서.” 순조로운 언어 소통은 여행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달랑 탈린 교통카드만 사서 여행하기로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충전해서 또 쓰면 돼”라고 매표소 중년 여성은 친절을 보인다. 이 생애에는 다시 오지 못할 에스토니아.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네 나라를 각인시켜주고 있다.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소련’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20세기 들어 1918년을 기점으로 발트 3국은 각각 독립해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다 1940년 또 소련에 합병되었다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 영향으로 1991년 8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가난을 면치 못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여행할 때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인 탈린은 뱃길이 발달되어 이웃하고 있는 ‘잘사는’ 스칸디나비아 국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탈린은 생각보다 많이 세련되어 있다. 탈린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들이 만든 성채 자리를 성으로 삼은 데에서 시작되었다. 탈린(Tallinn)이라는 이름도 ‘덴마크인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로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보존이 잘된 이유엔 ‘안 좋은 기후’가 한몫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초토화하기 위해 탈린에 접근했다. 그날 안개가 많이 끼어 도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전투기는 발트 해에 폭탄을 쏟아붓고 돌아갔다. 이런 경우를 놓고 전화위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드타운의 저지대는 상인과 서민의 옛 중세 분위기 탈린의 여행 시작은 구 시가지(old town)의 진입로인 쌍둥이 비루문(Viru Gate)에서 시작된다. 비루문은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는 6개 문의 하나로 1355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성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파괴되고 현재 쌍둥이 탑만 남아 있다. 올드타운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성곽으로 이어져 있는데 뿔 모양의 붉은 탑만 해도 46개. 일일이 세어볼 필요 없고 애써 구획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보고 느끼면 된다. 반질반질한 조약돌이 박힌 좁은 골목길에는 옛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카타리나(Katariina) 골목엔 중세 분위기가 여전하다.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은 골목 자체로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된다. 골목 벽에는 중세기에 만들어진 듯한 석조물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러시아 점령 시기에 러시아 군들이 세워놓은 안내 팻말에도 눈길이 간다. 입으로 유리를 불고 있는 그림 숍은 유리공예품을 전시해 팔고, 생선이 그려진 식당 앞에서는 메뉴판과 가격을 헤아려보게 된다. 오래되었다는 입간판이 달린 카페 앞에서 ‘커피 한잔 마실까’ 하며 어색하게 실내를 기웃거려본다. 손뜨개 상점 앞에 서 있는, 눈송이 스웨터를 입은 큰 인형을 보면 사고 싶은 욕망에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똑같이 생긴 세 개의 건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세 자매(15세기 건축물)’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은 현재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가장 넓은 시청사 광장(Raekoja Plats)은 여러 번 맞닥뜨리게 된다. 올드타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1406년에 세워진 시청사는 현재 콘서트홀로 쓰이며 고딕 첨탑에 오르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오래전 시청사 근처를 저지대 거리라고 했다. 주로 상인과 일반인들이 이용했다. 성 올라프 교회(St. Olav’s Church), 각종 길드들의 회관, 카페, 식당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이 광장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마기스트라트(Magistrat) 약국이 있다.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다. 약국 간판에는 징그러운 뱀 형상이 있다. 관광객들은 이 오래된 약국에서 약 사는 것보다 그저 구경하기에 여념 없어 보인다. 일찍도 찾아온 한겨울 어둠 사이로 거리 악사는 영화 주제가를 연주한다. 그 음률은 시청사 넓은 광장에 애달프게 퍼진다. 향수병에 젖은 여행객은 악사의 트럼펫 선율을 따라,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함께 부유한다. 영주나 귀족들의 영역, 토옴페아 언덕 저지대를 걷고 나면 으레 고지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토옴페아(Toompea) 언덕이라고 불리는데, 거의 영주나 귀족들이 살았다. 이곳은 두 개의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짧은 다리라는 뜻의 ‘뤼히케 얄그(Luhike Jalg)’와 긴 다리라는 의미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다. 언덕배기에는 19세기에 세워진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 Nevsky) 성당이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 성당은 에스토니아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축물이다.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 최고 권력기관인 리이키코쿠(Riigikogu) 의회 앞에 보란 듯이 러시아 성당을 지은 것이다. 에스토니아 의회는 스웨덴 점령기부터 모든 주요 결정이 이뤄진 의사당이었다. 의회 옆으로는 집회 장소인 토옴페아 성이 있고 1233년에 세워진 루터교 성당 토옴키리크(Toomkirik)는 현재 길드 유물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외 18세기 귀족의 저택에 세워진 에스토니아 미술박물관, 1475년경에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탑, 키에크-인-테-셰크(Kiek-in-de-Kok) 등이 있다. 무엇보다 고지대에 서면 탈린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가면서 조망하면 된다. 길을 따라 탈린 항 쪽으로 내려가면 16세기 탈린을 방어하던 요새 중 하나인 ‘뚱땡이 마가렛(paks margareeta)’ 성벽이 보인다. 1592년에 바다를 지키는 포탑으로 세워졌는데 성 안에는 감옥이 있었고 그 감옥의 교도관이 뚱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공원을 지나 복잡한 도로를 건너면 탈린 항으로 이어진다. 항구 쪽에서 더 위쪽으로 가면 발트 해변(Lennusadam Seaplane Harbour)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있다면 발틱 역(Baltic Station) 맞은편에 서는 러시아식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앤티크 제품부터 채소, 과일, 생필품까지 50여 개 상점이 문을 여는데 탈린 시내와는 전혀 다른 옛 소련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또 로카 알 마레(Rocca al Mare) 야외 박물관은 한적한 여정은 물론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트 해를 가까이 산책하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가는 길목에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흔적 남은 카드리오르그 공원 또 하나 탈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구 시가지에서 동쪽, 약 2㎞에 있는 카드리오르그(Kadriorg) 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호수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곳. 이 공원은 18세기 제정 러시아 시절, 표트르 대제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바로크 양식의 카드리오르그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1718년에서 1736년 사이에 이탈리아인 니콜로 미케티(Niccolo Michetti)의 설계로 건축되었으며 표트르 대제 자신이 직접 벽돌 3장을 쌓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표트르가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는 모스크바에서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하고 당시 해상무역의 중요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탈린은 유럽 진출의 요충지였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궁전 내부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러시아의 16~19세기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표트르가 건축 당시 거처했던 조그만 오두막집은 표트르의 개인 박물관이 됐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공간이다. 해설사가 설명도 해준다. 그 외 건물 형태부터 현대적인 쿠무(Kumu) 미술관이 있다. 2006년에 문을 연 에스토니아 최대의 미술관으로, 2008년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품들을 접하는 공간이다.
- 2016-03-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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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월평균 노후연금, 남성의 41% 수준 불과 "여성 수급권 확대해야"
- 우리나라 여성의 월평균 노후연금이 남성의 4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공적연금 제도 내에서 여성 수급권을 확대하고 사적 연금을 활성화 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20일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인구 중 정기적인 연금소득이 있는 경우, 남성은 월평균 36만4000원, 여성은 15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은 전체 월평균 연금은 25만4000원이다. 특히 여성의 월평균 연금액은 1인 가구 월 최저생계비(2014년 기준 60만3403원)의 4분의 1 이하로 여성이 노후 빈곤에 더 취약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성별의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연금을 받고 있는 비율은 75.6%에 달하지만, 대부분(57.3%)이 금액이 작은 기초노령연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연금액은 적은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 65세 이상 남성의 34.9%와 여성의 53.5%는 다른 연금 없이 기초노령연금만 받고 있었다. 민간보험인 사적연금을 받는 전체 비율은 0.1%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반면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경우 65세 이상 인구의 월평균 연금은 남성이 199만원, 여성이 121만원으로 여성의 연금이 남성의 61%에 달해 성별 격차가 적었다. 연금액도 우리나라보다 남성은 5.5배, 여성은 8.1배 많다. EU 회원국과 비교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의 연금은 적고, 성별 격차는 가장 컸다. 또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간 연금소득의 비율도 EU 27개 회원국과 비교해 가장 낮았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의 연금 수준은 EU 회원국 중 라트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1인당 GDP가 이들 국가의 1.6~3.2배 수준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국민의 노후소득 하락률은 이들 국가보다 훨씬 큰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관계자는 "우리나라 노인의 연금소득이 적은데, 이마저도 남녀간 불평등이 존재한다"며 "여성이 그동안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않아 소득이 낮았고 이 때문에 노후에 받게 될 연금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2014-07-20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