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바다를 찾고, 누군가는 숲으로 갈 것이다. 바쁘게 사는 세상, 멀리 훌쩍 떠나기엔 살짝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거야? 가만히 앉아 여름 타령만 하기엔 아까운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고’ 하며 투명한 햇살이 부추긴다. 초록 물이 듬뿍 올랐다. 퍼석한 시간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끄집어내 주기로 한다.
당진은 서울과 수도권 기준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남짓 거리다. 무심히 그냥 떠나면 된다. 무심코 떠난 곳에서 맞는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하루가 행복하다.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에 굳이 의미를 담는다. 알고 보면 그럴 일은 아니다. 마을 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지역 들판이나 노포에 주저앉아 바라보는 느린 풍경에 세상 스트레스 날리면 되는 것 아닌가. 당진은 그러기에 적당하다.
당진에서 여름을 맞는 법, 왜목마을 바다와 갯벌
제법 덥다. 아무래도 바다를 먼저 봐야겠다. 충남 당진은 서해와 아산만을 경계로 절반 이상이 바다와 접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비릿한 포구와 너른 들길이 번갈아 나온다. 당진의 왜목마을 해수욕장에선 바다와 갯벌, 일출과 일몰뿐 아니라 해안가 절벽 쪽의 해식동굴을 비롯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한 왜목마을 앞바다는 예부터 많은 배의 왕래가 있었다. 해안가에 해상 조형물 ‘새빛왜목’이 우뚝하다. 왜목의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생겼다는 유래에서 착안하여 꿈을 향해 비상하는 왜가리를 표현한 작품이다. 모래사장이 워낙 넓고 갯바위가 공존하는 왜목마을 해변은 바다의 즐거움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모래밭에 그늘막과 파라솔이 즐비하다. 해변에 서면 바닷바람에 금방 땀이 마른다. 바닷가는 일반 지역보다 기온이 내려간다. 바닷물에 발 담그고 잠깐만 서 있어도 서늘하다. 물이 빠지면 갯벌 위에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즐겁다. 다시 물이 차오르면 푸른 바다와 시원한 파도 소리가 일품인 왜목마을 바다 풍경이 청량하다.
당진 바다의 대표적인 왜목마을과 난지섬은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기도 하다. K팝 스타 BTS의 슈가가 앨범 작업으로 며칠 머무르며 조용히 머리 식히기 좋았던 당진 바다를 추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해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맞을 수 있는 왜목마을을 지나면서 이근배 시인의 ‘왜목마을에 해가 뜬다’는 시비를 만난다.
여기 왜목마을에 와서/ 백두대간의 해는 뜨고 진다/ 저 백제, 신라의 찬란한 문화/ 뱃길 열어 꽃 피우던 당진….
푸근한 시간여행, 레트로 감성의 면천읍성 마을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당진이다. 성안마을로 불리는 면천읍성(沔川邑城)일대는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따사로운 마을이다.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 지역의 대표적인 요충지였다. 그 옛날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고 국방상 거점이었다. 평탄한 지형에 축조되어 면천군을 방어하는 성곽으로 기능이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그 후 동학운동과 항일의병 활동지였고, 성 안쪽에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진 걸 볼 수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조선왕조의 정통성이 깃든 공간 면천 객사 앞에 천년 세월을 넘긴 은행나무 두 그루가 노구를 지지대에 받친 모습으로 울울창창하다. 바로 옆 계단 밑에 자리한 군자정 역시 고려 공민왕 시절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부근에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 재직 시 세웠다는 골정지가 있다. 봄과 여름이면 벚꽃과 연꽃으로 절경을 이루고, 당진의 걷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 안으로 들어왔으면 지나치지 않고 돌아볼 곳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당진이라면 폐교를 이용한 아미미술관이 많이 알려졌지만, 우체국이 미술관으로 예쁘게 변신한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의 앞마당과 정원의 쉼도 좋다. 언덕길의 낡은 자전거포는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로 바뀌어 동네 사람들의 문화 마실터이기도 하다. 책방 옆집의 감성 소품 진달래상회, 공출판사, 그야말로 옛날식 ‘별다방’, 시장제분소 떡방앗간 골목을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기에 딱 좋다. 걷다가 허기질 때쯤 되면 초록색 쑥면의 초원콩국수집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음 챙김의 시간, 성지 순례길
당진을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아보다 보면 내심 수긍이 된다. 천주교가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분들이 순교한 유적지 신리성지,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충청 최초의 본당인 합덕성당,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솔뫼성지 등이 있다. 세 군데 각각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성지 방문만을 목적으로 하루를 계획해도 좋을 듯하다. 또 다른 길이 있는데 바로 버그내 순례길이다. 버그내는 합덕의 오래된 장터 이름이다. 순교자들의 길을 따라 고요하고 평온하게 자연 속을 걷는다.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까지 13.3km 코스로 비순환형 길이다. 대략 4~5시간 걸으며 차분히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다. 당진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챙김의 시간도 갖는다.
하얀 연꽃잎이 스며든 맛, 신평양조장
당진의 술도가 신평양조장 역사는 90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발효된 술맛은 더 깊어졌다. 하얀 연꽃잎을 발효 과정 중에 곁들여 빚어내는 백련막걸리로 지금껏 맛을 지켜왔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3대째 이어온 가업은 장인정신으로 양조 문화를 계승해나가는 중이다.
오래된 한옥 고택 옆으로 신평양조장 뮤지엄이 먼저 보인다. 해풍을 맞고 자란 당진의 품질 좋은 쌀로 오랜 세월 동안 백련막걸리와 백련맑은술을 어떻게 빚어왔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백련막걸리는 한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여전히 전통주 명가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양조갤러리에서는 술의 제조 공정, 역사의 흐름에 따른 술의 변화, 세상의 술 이야기를 꼼꼼하게 보여준다. 술 한 모금 시음도 하고, 막걸리 만들기 체험과 소믈리에 교실 등의 참여 시간도 준비되어 있다. ‘시간이 익어가는 양조장’이라는 테마로 돌아보는 옹골찬 예술 감성 공간이다. 술과 인문학에 관한 공부, 하얀 쌀과 그에 대한 가치 또한 비로소 새롭다. 하얀 꽃 백련잎과 연잎주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신평양조장의 꿈도 쉼 없이 발효되고 익어간다.
불꽃 같은 삶, 작가 심훈의 필경사
신평양조장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필경사(筆耕舍),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촌 소설 ‘상록수’가 탄생했다.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고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필경사 마당에는 당시 농촌 계몽 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전시되어 있다. 마당 옆에 자리한 심훈기념관에는 작가 심훈의 활동이 전시물과 영상, 디오라마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되어 전시되었다. 작가이면서 영화감독이기도 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당시 경성방송국 조선어 아나운서까지 맡았던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아나운서로 뉴스를 읽던 중 ‘황태자 폐하’라는 부분을 도저히 읽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불편한 기분을 참지 못해 3개월 만에 해고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산 아래 소박한 작가가 직접 설계했다는 ‘심훈의 집’. 전통적인 외관과 내부는 오밀조밀 짜임새 있고 정갈하다. 집 앞으로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으로 서해가 보이도록 자리 잡아, 문학적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초가집 뒤편으로 그가 심었다는 대나무 숲이 가끔 바람에 일렁인다.
일본은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으로 매년 약 450개의 학교가 문을 닫는다. 일본 정부는 2010년부터 폐교를 활용해 지역 재생을 하는 '모두의 폐교'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문을 닫은 학교를 다른 시설로 재활용하는 프로젝트다.
문부과학성의 2022년 ‘폐교시설 등 활용 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폐교 전국 활용률은 80%에 이른다.
공립 폐교는 영어마을, 드론 조종사 양성 교습소, 스타트업 육성시설, 자동차 전시장, 양조장, 물류 센터, 고령자 주택, 숙박 시설, 글램핑장, 레스토랑, 목공실, 수족관, 체험형 농업 테마파크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도심에서는 사무실, 요양 시설, 대학 캠퍼스 등으로도 사용된다.
폐교가 새로운 시설로 활용될 수 있는 건 2010년부터 문부과학성이 ‘모두의 폐교’(みんなの廃校)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부과학성은 폐교 정보를 공유하면서 시설 활용을 원하는 희망자와 폐교를 소유한 지방 자체 단체를 연결해주고 있다. 지자체의 귀중한 재산으로서 폐교가 지역 특성에 맞게 재활용됨으로써 지역 활성화나 산업 진흥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각 지자체는 폐교가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토지 용도 변경, 리모델링이나 증축에 필요한 서류 등 소통해야 하는 행정기관 창구를 일원화해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출산율은 0.8명으로 우리나라도 문을 닫는 학교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폐교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참고할 수 있도록 문부과학성에서 공유한 대표 폐교 활용 사례를 소개한다.
1. 오와니 자연 마을 생햄 공방
(おおわに自然村 生ハム工房)
아오모리현 오와니초 오와니 제3초등학교는 생햄을 만드는 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오모리현에서 나는 원육을 생햄이나 비엔나 등으로 가공하는 공장이다. 이 학교는 목조 건물이어서 통기성이 좋아 생햄 제조에 적합했다고. 더불어 생햄을 만드는 과정 중 초기 작업을 체험하는 공방도 운영한다. 교무실은 냉장실로, 보건실은 작업실로, 각 교실은 햄 건조장으로, 현관은 훈연고로 리모델링 했다. 농업을 가공 산업 및 서비스업과 융합해 농촌에 새로운 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을 6차 산업이라고 하는데, 이 사례는 지역의 원육을 사용하고, 햄으로 가공하면서 지역에 고용 창출까지 할 수 있는 6차 산업 사례로 꼽힌다.
2. 나메가타 파머스 빌리지
(なめがたファーマーズヴィレッジ)
이바라키현 나메가타시 야마토 제3초등학교는 체험형 농업 테마파크 ‘나메가타 파머스 빌리지’로 변모했다. 나메가타시의 특산물은 고구마다. 폐교가 된 야마토 초등학교에 고구마를 주제로 식품 가공 공장, 뮤지엄, 레스토랑, 카페를 설치했다. 학교 주변에는 숙박시설, 클럽하우스, 고구마 농장, 고구마 저장고 등을 지어 학교를 중심으로 농업 테마파크를 만들었다. 학교의 현판을 그대로 두어 학교라는 흔적을 보존했고, 학교를 둘러보면서 고구마에 얽힌 역사와 지식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했다.
3. 드론 기술연구소
(サイトテック㈱本社・技術研究所)
야마나시현 미노부초 나카토미 중학교는 주식회사 사이트텍의 본사이자 기술연구소로 사용된다. 현재로써는 기술연구소로 드론의 시험비행 등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드론 개발, 제조, 검사, 연수 등 다양한 업무에 활용할 예정이다. 바람의 영향이 있어 학교 체육관과 같이 드론을 비행하면서 시험할 수 있는 대형 공간이 필수적이라고. 다만 학교였던 곳을 사업장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소방법 규제 등을 지자체가 조율해주며 폐교 활용에 도움을 줬다.
4. 나라현 카시하라 종합 청사
(奈良県橿原総合庁舎)
나라현 구이세이 고등학교는 나라현 카시하라의 종합 청사로 이용된다. 나라현 중부 지역의 행정 시설을 집약한 종합 청사다. 약 8개의 사무소가 모여있는 곳이다. 이를 통해 행정 서비스를 일원화할 수 있었으며, 행정시설 관리 경비 절감 등의 효과를 얻었다. 넓은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활용, 휴일이나 주말에는 민간에 개방해 야마토 미야마(大和三山) 산의 절경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5. 히카리 양식장
(ひかり養殖場)
시마네현 이즈모시 광중학교는 카와하기(カワハギ, 취치의 일종)를 기르는 육상 양식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바다에서 양식하는 것이 아니라 육상에서 새로운 어종을 키우는 방식으로 쇼와 개발공업소와 JR서일본 이노베이션즈가 새롭게 제안한 비즈니스다. 쇼와 개발 공업의 아라키 카츠유키(荒木克之) 사장은 광중학교 졸업생으로 폐교가 된 곳을 어떻게든 다시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키운 카와하기는 지역 음식점, 간토·간사이 지역으로 출하된다. 새로운 산업의 발전과 함께 고용창출, 민간사업자 등과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다.
6. 글램핑장
(グランピング)
시즈오카현 시마다시 유니치초등학교는 글램핑장으로 거듭났다. 후지산 시즈오카 공항 등에서 이용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5종류의 21개 텐트 등을 설치했다. 교내에는 교실과 교장실 등을 리모델링해 샤워룸, 대욕장을 만들었다. 기존 체육관에서는 각종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다. 글램핑장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시마다시의 지역 식재료 등을 이용하거나 주변 시설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교류인구 증가나 지역 이주로의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또한 학교 시설을 이용해 지역 주민 커뮤니티로 활용 등도 고려하고 있다.
늘 그곳에 있지만 보여주는 모습은 늘 다르다. 갈 때마다 바닷빛은 새롭고 숲은 바람결의 맛이 또 다르다. 섬 전체가 여행길이고 단 한 군데도 빠뜨릴 수 없는 천혜의 경관이다. 섬 속에 딸린 자그마한 섬들이 또한 볼거리이고, 유구한 세월이 담긴 생태 숲과 치유와 명상의 숲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소소한 힐링 코스와 제주의 자연을 간 김에 모두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적당히 게으른 여행이 제맛이므로.
제주는 서부권과 동부권으로 나뉜다. 동서남북으로 빙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우왕좌왕할 수도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여유롭게 힐링하려면 동선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걷기 좋은 길을 다 욕심낼 일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다 먹을 수도 없다. 에너지를 막 쓸 나이도 아니고, 2~3일 정도 제주의 바람결 따라 몸을 옮긴다. 이번엔 제주 서쪽이다.
은빛 일렁임, 새별오름
제주 애월의 평화로를 달리다 보면 봉긋하게 삼각형으로 솟은 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와~ 제주구나’ 이런 생각이 확 드는 순간이다. 얼핏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서 제주는 바다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나, 이제는 이렇게 억새가 반짝이는 오름이나 둘레길이 제주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제주 서부 중산간 오름 지대의 저녁 하늘에 샛별처럼 외롭게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도 예쁜 새별오름이다. 해발 519.3m라고는 하나 경사를 겁낼 정도는 아니다. 굳이 정상까지 꼭 가야 할 일도 아니고. 오름길에 억새의 숲을 마음껏 누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산 위로 오르면 분화구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럿임을 비로소 보게 된다. 멀리 한라산과 비양도도 볼 수 있으며 상쾌함의 절정이다. 탁 트인 새별오름의 전망과 바람결에 은빛 털북숭이처럼 일렁이는 억새 물결의 군무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오름에 올랐으니 잠깐 머무르면서 실컷 바람을 맞아야 제맛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제주의 대표 축제인 들풀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이곳 새별오름이다. 여행 기간이라면 꼭 경험해볼 만한 축제다.
제주의 건축 기행,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
여행 중에 찾아가는 전시장은 유난히 행복감을 준다. 이런 여유로움이라니… 하면서 말이다. 그뿐 아니라 다니다 보면 비가 오거나 악천후를 만날 때가 없으란 법 없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이럴 때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 실내와 실외가 각기 다른 공간이 아닌 함께 어우러지는 건축 예술의 멋을 보게 된다.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지어진 신비로운 건축물이다. 물 위로 교회가 떠 있고 노을이 담기기도 하는 시각적인 묘미를 보여준다. 이런 독특한 풍경으로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실내를 들여다보면 개인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조용하고 신성한 시간 속의 여행이다. 교회 옆으로 수(水)·풍(風)·석(石) 뮤지엄, 포도호텔도 들러볼 만하다.
중문 위 중산간에 위치한 본래의 형태를 뜻하는 본태박물관, 건축의 철학자라 일컫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건축이다. 제1전시관 한국 전통 수공예품, 제2전시관 현대 예술 작품 등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진다. 공간들이 얽힌 듯 미로 속을 걷는 듯하다. 잠깐씩 길을 잃을 뻔했다. 파격적인 느낌의 공간과 복잡하게 연결된 길에서 알 수 없는 느낌에 빠져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 기왕이면 조금 공부하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으로 제주 동쪽 섭지코지의 글라스하우스와 유민미술관도 특별하다.
자연 친화적 건축 속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질 만하다. 저지리의 현대미술관과 공공수장고, 승효상 건축가의 추사관이나 미스터밀크, 정기용 건축가의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 조민석 건축가의 오설록 티 뮤지엄 다도 체험관, 박현모 건축가가 지은 애월의 빵집 ‘버터 모닝’ 등. 제주 섬의 자연과 멋스럽게 어우러지는 다양한 건축물 덕분에 제주의 건축 기행이 따로 있을 정도다.
길에서 만난 평화 순례자의 교회, 명월국민학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라는 순례자의 교회는 올레길 13코스에 위치한다. 덥거나 추울 때, 마음이 외로울 때 한경면 외딴집처럼 저편에 예쁜 교회가 보일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라 해도 고개 숙여 좁은 문을 통과해 한 번쯤 쉬어갈 수 있도록 제주의 벌판에서 기다리는 듯하다. 여행 중에 거리낌 없이 들어가 3평 남짓의 작은 기도처에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 평안히 머물다 나올 수 있다.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 잠시 기도하고 차분히 비워내고, 작음이 주는 커다란 느낌도 담아올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명명된 지 오래지만 여기는 명월국민학교다. 이미 폐교한 지 30년이라고 했다. 명월리 마을회가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여행자들에게 그 옛날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로 만들어냈다. 삐걱대는 낡은 복도 바닥을 밟으며 걸어 들어간 교실은 아기자기한 소품 갤러리가 되었고, 색다른 분위기의 카페가 되었다. 너른 운동장에는 앞마당에서 뛰어놀듯 아이들은 자유롭고 어른들은 추억을 더듬는다. 이곳의 운영 수익은 마을에 환원되어 마을 발전 기금으로 쓰인다.
낙천 아홉굿마을의 의자공원
여러 가지 의자들로 공원을 이룬 곳, 예쁘고 신기하고 다양한 의자들이 무수하다. 앉아보거나 쉬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새 오래 머물게 된다. 올레길 13코스 중간 지점의 의자공원은 아홉 개의 샘이 있다 하여 아홉굿마을로 불리는 곳에 자리한다. 천 개가 넘는 의자에 앉아 바쁘거나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시간이다.
이윽고 한낮의 햇살이 옅어지며 뉘엿뉘엿 하루가 저물 때. 협재해수욕장을 옆으로 끼고 차귀도를 향해 달린다. 옛날 송나라 호종단이라는 사람이 제주 땅의 지맥을 끊기 시작했는데, 차귀도의 지맥과 수맥을 끊어놓고 돌아가려 할 때 한라산 날쌘 독수리가 이들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섬이다.
저무는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이날따라 조금 이르게 해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조금 더 가야 하는데 3, 4분 정도 늦게 차귀도 해안에 들어선 까닭이다. 도중에 어디든 무조건 내려서 바닷가로 뛰어 내려갔더니 이미 중간쯤 해가 떨어지고 있다. 밤낚시에 몰두한 강태공은 낚싯줄을 던지고, 잔잔한 바다 위로 고깃배가 지나가는 풍경이다. 멈춰 서서 넋을 잃을 수밖에.
적당히 드리운 구름과 고요함 속으로 일몰이 진행되는 중이다. 하늘과 바다가 순간순간 달라진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이 바다에 닿을락 말락 한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죽여 보다가 오메가 현상을 이루는 경이로운 찰나를 맞는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제주의 차귀도에선 이런 벅찬 순간을 기대할 수 있다.
현자가 말했다. 헌것에서 새것을 보라 했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으라 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삼탄아트마인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 뮤지엄이다. 쓸모를 잃고 퇴기처럼 버려진 폐탄광(구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을 볼 것 많고, 놀 것 많고, 느낄 것 많은 곳으로 리뉴얼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폐탄광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잡초와 이끼와 뒤엉긴 거미줄이 주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낡고 시든 사물에서도 쓸모를 발견하는 눈을 가진 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 김민석(작고)은 폐탄광을 깊숙이 바라봐 역사를 건져 올리고 예술을 새겨 넣었다. 공간이 통째 관점의 이동으로 길어 올린 창의의 산물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삼탄아트마인은 재생 공간이다. 즉 다시 살려낸 공간이다. 그러나 폐허인들 죽어 나자빠진 무생물일 리 있으랴. 폐탄광은 그것대로의 마지막 숨을 지니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닐까. 유형무형의 자취로 웅얼웅얼 과거를 두런거리고, 손을 뻗어 흥망성쇠의 허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이런 폐탄광의 고즈넉한 은유를 예술로 북돋운 게 삼탄아트마인이다. 유별나게 외진 곳을, 세속 도시를 저 아래로 밀어내는 고원을, 첩첩이 겹친 산과 물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부터 구미에 맞아 즐거울 테지. 함백산 자락의 고지대에 있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단층 건물이 보인다. 실은 경사지에 세운 4층짜리 본관 건물의 맨 위층이다. 입구에서 표를 끊은 뒤 중앙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차례로 관람할 수 있게 돼 있다. ‘삼탄아트센터’라 이름 붙은 본관 건물은 낡았다. 하지만 탄광 시절의 골격과 구조를 그대로 고이 간직했다. 부분적으로 모던한 장식을 살짝 양념처럼 뿌렸을 뿐, 원형을 흩뜨리는 변형만큼은 자제했다. 모든 사물과 풍경을 가급적 그대로 살려 예술의 범주 안에 폐탄광을 수렴한 셈이다.
로비, 카페, 아트 레지던시룸 등이 있는 4층에서 눈에 띄는 건 광원(鑛員)을 그린 대형 초상화다.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얼굴은 밤처럼 어둡다. 눈빛만 퍼렇게 살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역의 피로와 신산이 서린 눈이다. 풍요 따위와는 거리를 두고 살 수밖에 없었던 광원 인생의 애환을 드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삼탄아트마인의 반쯤은 여전히 탄광이다. 광부들의 실상과 동향을 실감나게 유추할 수 있는 구조물과 유물이 가득하니까. 오늘날 석탄 산업은 거의 숨이 넘어간 채 미미하게 잔존할 뿐이다. 만약 탄광과 광원들에 관한 썩 괜찮은 보고서를 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리서치를 통해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삼탄아트마인을 관람하는 재미의 하나는 머잖아 전설 정도로만 남을 과거의 탄광 시대로 회귀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스케일과 디테일 함께 살려
3층엔 ‘삼탄역사박물관’이 있다. 광원들이 사용했던 채탄 장비는 물론 방대한 분량의 갖가지 서류와 책자들까지 충실하게 보존해 전시했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을 볼 수 있는 ‘현대미술관 캠’도 3층에 있다. 2층에는 광원들에게 요긴하게 쓰였던 필수 시설들을 재생한 ‘마인갤러리’가 있다. 광원들이 하루의 작업을 마친 뒤 몸을 씻었던 공동 샤워장엔 나신 조각상을 전시해 볼거리를 제공했다.
화장실이었던 공간엔 중세 서양의 기사들이 착용했던 갑옷을 설치해 눈길을 끈다. 웬 갑옷? 뜻이 있다. 갑옷이 감옥인 것은 갑옷이 몸을 가두기 때문이다. 행군을 하거나 전투를 할 때 기사들은 용변을 그대로 갑옷 안에다 봐야만 했다. 화급한 용무마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광원들에게 주어진 조건 역시 열악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지하 갱도에서의 채탄 작업 중에 용변인들 자유로웠으랴. 그렇다면 광원들에게 지상의 화장실은 갑옷에서 벗어나 비로소 후련하게 용무를 볼 수 있는 일종의 구제소. 이렇게 전시 공간 곳곳에 탄광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설치 작품과 스토리텔링을 실어 디테일을 살렸다.
스케일은 또 어떻고? 일단 폐탄광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이에 조응하며 채워 넣은 전시물들의 규모 역시 거대하다. 2층에 있는 수장고가 그 하나의 예다. 이 수장고에는 지구를 종횡으로 누비길 무른 메주 밟듯이 한 설립자가 반평생에 걸쳐 수집한 오만 가지 미술품과 공예품이 보관돼 있다. 컬렉션에 대한 설립자의 놀랄 만한 집념 이상의 광적인 몰입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손화순 삼탄아트마인 관장에 따르면, 이 수장고는 국내 최초로 등장한 ‘보이는 수장고’다. 미술관 수장고는 원래 직원들조차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통제된다. 그러나 이 뮤지엄은 관람객들이 유리벽 너머로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게끔 개방적인 구조를 조성한 것이다.
1층에도 전시실이 있다. 광원들이 장화를 씻었던 세화장을 재활용한 공간이다. ‘예술, 그거 어렵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걸까? 누구나 소소한 예술적 행위를 만만하게 즐길 수 있는 ‘예술놀이터’ 역시 1층에 있다. 여기에서 긴 통로를 따라 본관 건물을 벗어나 이제 삼탄아트마인의 노른자와 만난다. 바로 ‘레일바이뮤지엄’이다. 광장처럼 널찍한 공간이다. 바닥에는 광차가 움직였던 레일이 호흡을 멈춘 긴 꼬리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시커먼 탄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컨베이어 벨트 역시 한편에 누워 영원한 잠에 들었다. 이곳은 조차장이다. 광원들을 지하 채탄막장까지 실어 나르기 위한 플랫폼이었다. 마치 번지점프대처럼 허공으로 우람하게 치솟은 권양기(捲揚機, 무거운 짐을 움직이거나 끌어올리는 데 쓰는 기계)의 기능이 집약적으로 작동한 센터였다. 즉 탄광의 심장부였다.
폐탄광이 폐탄광인 건 심장이 꺼져서다. 모든 것은 흘러 마침내 심장을 잃고 어둠 속에 깃든다는 걸 웅변하나? 삼탄아트마인을 휘어감은 바탕색은 석탄가루가 착색한 검정이다. 그래서 뮤지엄의 어느 공간이든 검은빛으로 어둡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판화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가 말하길, ‘고통의 빛깔은 아주 어둡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삼탄아트마인이 도입한 오브제의 하나는 ‘고통’이기도? 예술을 보기 위해 뮤지엄에 왔지만, 예술 못지않게 가슴을 치는 건 광원들의 족적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막장에 삶을 걸었던 광부보다 더 절박한 고통은 흔치 않을 테다. 그들이 캔 무연탄은 제 몸을 불살라 세상을 도왔다. 광부도 석탄도, 인신공양에 맞먹을 행장을 남겼다.
흰쌀밥과 검은 김이 동시에 나는 고장, 당진시 신평면. 이곳에는 막걸리와 함께 시간이 익어가는 양조장이 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대물림된 방식을 고집한다. 해풍 맞은 쌀과 산에서 기른 연잎으로 익어간 세월만 100년이다. 참기름 바른 김이 흰쌀밥과 어울리듯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양조장, 바로 신평양조장이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술이다. 술은 즐거운 자리, 위로가 필요한 자리에 함께했다. 이 중에서도 막걸리는 오랜 시간 서민의 곁을 지켜준 좋은 벗이다. 이런 서민의 술이 대기업 회장단의 건배주, 청와대 만찬주로 거듭나기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킨 아버지들이 있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고 상쾌한 바닷바람이 부는 어느 가을날, 시간이 켜켜이 쌓인 신평양조장을 찾았다.
전통 연잎주에 오늘을 입히다
‘아버지들의 익어가는 시간’. 신평 양조뮤지엄 전시 제목 중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양조장의 역사를 썼던 술독, 장인이 한 권씩 모았을 주조법이 담긴 고서… 잠시 자리를 비운 김동교 대표를 기다리며 조용하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좇았다. 얼마 뒤 도착한 그는 신제품 연구가 한창이라 많이 바쁘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소탈한 차림에 어울리는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늦춰진 시간을 무마하려 서둘러 양조장 투어에 나섰다. 그냥 시간도 아니고, 왜 하필 ‘아버지’의 시간일까. 양조뮤지엄 전시실 안 양조장 연대표 앞에 선 김 대표의 설명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돈과 땅을 기부해 창건된 사찰이 있습니다. 여기서 5분 거리에 있는 흥국선원이라는 곳이에요. 그곳에서 기른 연꽃으로 술을 빚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사찰로부터 전수받은 연잎 활용법에 아버지께서 현대적 양조 기술을 적용해 지금의 백련막걸리가 탄생했습니다.”
예부터 주조에 사용하는 연꽃은 하얀색 꽃잎의 백련(白蓮)이었다.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 등 연잎주 빚는 방법이 담긴 18세기 문헌에서는 공통적으로 술 빚는 시기를 강조한다. 전통 연잎주는 늦여름 채취한 생연잎으로 발효하고, 서리 내리기 전에 빚는 세시주(계절에 맞게 빚는 술)다. 하지만 현재는 발효 과정에서 건조시킨 연잎을 활용한다. 술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양조장에서 매번 생연잎을 사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잎의 전통과 현대의 양조 방식이 만나 더욱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의 백련막걸리가 탄생했으니, 전통과 현대의 바람직한 조우라고 봄직하다.
‘문화’라는 술독에서 미래를 빚다
해풍 불어오는 비옥한 평야와 물이 좋은 고장에서 나는 술이라 맛으로는 이미 정평이 났다. 김 대표의 조부이자 신평양조장의 1대 대표 김순식 씨 생전에는 막걸리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김 대표는 어릴 적부터 주전자에 막걸리를 떠다드리며 막걸리 맛을 보곤 했다. 나고 자랄 때부터 전통주 문화를 접한 그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양조장으로 돌아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가 연잎주의 전통을 이어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10년의 세월을 거쳐 백련막걸리를 개발해냈듯, 그 역시 백련막걸리를 생산해 판매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양조장을 전통문화의 장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에 첫 번째로 선정된 뒤 신평양조장은 체험관광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미곡창고로 쓰던 건물을 전시관으로 개조하고, 최근에는 현대적 설비와 체험관을 갖춘 양조센터도 세웠다. 한국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손님들이 전통술을 배우며 신기해하면서도 즐거워했다. 구수한 냄새에 홀린 듯 밥덩이를 집어먹는 어린 손님도, 전통주를 낯설어하던 파란 눈의 외국인 손님도 막걸리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폴란드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백련막걸리의 가치와 정신,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2대 김용세 장인과 그에게 축복의 노래를 불러준 일도 더러 있었다.
중장년층 방문객에게는 ‘연잎주 막걸리 빚기 체험’이 인기다.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식으로 직접 술을 만들기 때문에 옛 정취와 맛을 느낄 수 있어서다. 김 대표는 “고객들을 직접 마주하며 그들에게 연잎주의 문화와 역사적 가치를 전하는 일”이라며 “수익성이 높진 않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양조장 주인으로서 또 다른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평양조장 바로 앞 골목에는 1930년대부터 들어선 신평5일장이 있다. 그만큼 목 좋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양조장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던 우리 민족은 이웃과 노동 공동체인 두레를 결성했고, 고된 농사일 중간중간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말하자면 ‘농주’(農酒) 막걸리는 노동력 공유와 이웃과의 교류를 위한 매개체였고, 흥겨운 잔치의 핵심이었다. 김 대표가 어렸을 때는 양조장이 지역사회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주택에서 아파트로 환경이 옮겨져 공동체의 의미가 흐릿해졌다. 물 좋고 바람 좋은 고장에서 신평양조장은 스러져가는 옛 가치를 되살리려 한다. 100년의 세월을 품은 술독에 과거를 빚어 미래를 만들고자 함이다. 매일 항아리 속 막걸리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장인의 한결같은 겸손함이 막걸리에 가 닿는다면 충분하다. 오늘도 고두밥 찌는 구수한 내음 사이로 건강하고 향긋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다.
남원 하면 추어탕부터 떠오르나? 그럴 사람이 많겠다. 널리 이름난 향토음식이니까. 소리의 본향으로도 유명한 게 남원이다. 동편제 판소리 가왕 송흥록과 명창 박초월을 길러낸 민속국악의 옥토이자 산실이다. 광한루와 지리산도 남원의 얼굴이다. 이래저래 여간한 고장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게 많다. 여행자들의 기쁜 순례지다. 최근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사람들을 줄줄이 끌어들이는 똘똘한 공간이 하나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하 ‘김병종미술관’)이 바로 그렇다. 요천강변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다.
8월의 땡볕이 가혹하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돌아다녀야 하니 이거 참 ‘병맛’이다. 세상은 알고 보면 아름다워 희망과 긍정을 노래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요즘은 뭐 좀 그렇다.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모두 시난고난, 실의에 빠진 도스토옙스키의 표정처럼 우울하다. 의연한 건 자연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자연 풍광이 싱그러운 김병종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생기가 돋는다. 야산 언덕배기에 있는 미술관 저 멀리로 지리산 연봉이 보인다. 천하제일 방랑 나그네인 구름이 살랑살랑 산을 넘는다. 흰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새파란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순수하다. 미술관 인근에서도 푸른 숲이 술렁거린다. 자리 한번 옳게 잡았다. 이 미술관은 전원형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2018년 3월에 개관했다. 한국화가 김병종이 기증한 작품 400여 점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이후 길차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성장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해 서러운 게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다르다. 개관 이래 다녀간 관람객이 17만여 명에 이른다. 유별나게 화려하거나 거대한 미술관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변에 가깝다. 내실과 매력을 갖추면 지방 미술관에도 근사한 피드백이 돌아온다는 걸 입증했다. 작가의 예술과 대중의 일상이 겉도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명소로 떠오른 까닭이 이렇게 완연하다. 미술관을 통해 남원을 홍보하고, 지역 발전의 동력 하나를 보태고자 한 설립 주체 남원시의 의도가 빗나가지 않은 셈이다.
올봄 이 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21~2022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명소들의 탐방객 숫자 등 빅데이터를 근거로 고른 이 ‘100선’에 든 미술관은 세 개다. 김병종미술관 외에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원주의 뮤지엄 산이 뽑혔다. 한국의 열악한 문화적 풍토를 병증으로 진단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미술관에도 관광지처럼 일쑤 인파가 몰려드는 게 아닌가. 억눌린 일상의 출구를 예술작품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무려나 김병종미술관은 탕탕 기세 좋게 행진한다.
그렇다면 이 미술관은 무엇을 연료로 항진하나? 우선 김병종의 작가적 무게가 헤비급이다. 그는 자기만의 날개를 휘저어 미술의 창공을 비상하는 화가다. 재미와 재치로 터진 실밥 없이 잘 바느질한 스테디셀러 ‘화첩기행’으로도 지명도가 높다. 호젓하고 청명한 분위기에 감싸인 미술관의 입지와 미니멀한 노출콘크리트 건축물의 미감도 감성을 자극해 호감을 산다.
무엇보다 물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무와 잔디로 채운 정원의 일부는 평범하지만 조경의 축을 이룬 물 정원은 기발하다. 사각형 수조 형태의 얕은 못 다수를 계단식으로 배열해 만들었다. 그 절묘한 물 공간 복판으로 난 동선을 따라 건물로 진입하게 돼 있는데, 관람객들은 이 대목에서 가벼운 설렘 이상의 매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잔잔한 수면엔 햇살이 아롱지며 연신 신비한 무늬를 그린다. 물에 드리워진 나무와 구름과 하늘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미묘해서 아름답다. 굴레가 없어 자유롭고 무방비 상태로 완전한 게 물이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다. 목줄 매단 강아지처럼 끌려다니는 삶일지라도 내면에 물의 정신을 담고 살면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물의 정원은 물을 명상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낭만과 추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겠지.
동화책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들
2층으로 지은 건물 안에는 전시장 세 개가 있다. 당연하게도 김병종미술관에서는 김병종 외에 다른 작가들의 기획전도 빈번하게 열린다. 지금은 김병종의 기증 작품 특별전 3차 시리즈 ‘생명의 숲과 바다’전(10월 17일까지)이 펼쳐진다. 기증 작품 중 90여 점이 나왔다. 대다수가 미공개작이라 애호가들의 구미에 맞을 전시회다.
화가란 다르게 보는 눈과 다르게 생각하는 머리를 장착한 존재다. 현상의 외피를 걷어내고 본질을 발굴해 캔버스에 옮긴다. 자신만의 인생관과 심미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것인데, 김병종의 초기 작품 ‘바보 예수’ 시리즈는 흑인 예수를 그리는 등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사뭇 독자적인 수묵 기법을 구사해 국내 화단은 물론 유럽 일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생명’을 화두 삼아 자연을 그리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맸던 경험이 야기한 전환이었다. 이번 특별전에 걸린 작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생명 작가’라 불리기 시작한 시절의 그림들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김병종의 그림을 보자면 그건 환희이자 순수이며, 존엄이자 행복이다. 신이 고안해 삼라만상에 고루 주입한 사랑의 발현이며, 비루하거나 고통스러울 일이 없는 화평의 지속 상태다. 흥미로운 건 술술 읽히는 동화책처럼 쉽게 다가오는 그림이라 감정이입이 쉽다는 사실. 아이들, 꽃, 학, 토끼, 닭, 물고기, 산, 물, 구름 등이 등장하는 화폭마다 소박하고 밝고 따뜻하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휘갈긴 그림처럼 천진하다.
딱한 건 그림을 보는 사람 쪽이다. 그림은 생명의 생명다운 힘으로 저토록 아름다운데 나의 삶은 왜 피폐하지? 그런 상념, 문득 들솟기 십상이다. 우리는 모두 오욕칠정의 탁류를 헤엄치는 가여운 존재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쯤에서 멈추면 멍청이의 잡념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성격이 좋아진다. 김병종의 그림을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어느덧 열린다. 잃어버린 동심과 행복을 돌아보는 사이에 삶의 쇠사슬 같은 게 풀려나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김병종의 환한 그림이 주는 자극과 감흥의 약발이 이렇게 세다. 가슴속에 고인 불만과 불안을 털고 돌아가게 한다.
산 좋고 물 좋으니 그냥 놔둘 리 없다. 용인시 고기동 산간에 있는 뮤지엄 그라운드로 접어드는 들머리의 풍경이 가히 난리 블루스다. 산자락 물가에 마음 내려놓고 쉬기 좋았던 이곳에 요즘 개발 바람이 한창이다. 보이느니 빈틈없이 들어선 카페와 식당, 부동산 업소들이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용케도 이 난장의 끝자락, 비로소 시퍼런 산과 하늘이 후련하게 펼쳐지는 고샅에 있다. 폐부로 스며드는 산기운이 맑아 기분을 돋워준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화가 전광영(79)이 설립한 사립미술관이다. 그는 이름을 좀 날린 정도에 그치는 화가가 아니다. 해외 화단에서도 알아주는 눈이 많다. 미국 뉴욕의 5대 미술관에 속하는 브루클린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미술관을 개설한 이유가 있다. ‘후배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 이게 무슨 얘기? 열정과 재능을 다해 성장을 도모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사심 없는 멍석을 깔아주겠다는 뜻이다.
인생 문제의 대부분이 노력 여부, 또는 운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전광영은 화가들에겐 노력과 운보다 공정한 전시 기회를 부여받는 일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건 그의 생생한 체험에서 유래한 진단이자 처방이다. 뮤지엄 그라운드 개관식 때 가진 간담회에서 그는 죽을힘을 다해 작업을 했지만 찬밥처럼 괄시받았던 젊은 날엔 ‘너무도 외롭고 힘들었다’며 개관의 변을 이렇게 토로했다.
“대한민국은 화가가 작업하기 어려운 곳이다. 학연과 지연,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 않은가?”
이런 발설은 드문 게 아니다. 미술동네에도 너절한 승자독식의 풍조와 무리 짓기의 쇼가 일각에서 판을 친다는 걸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전광영은 이 코믹한 고질을 소리 소문 없이 조금치나마 깨트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다 할 전시 공간을 부여받지 못해 남몰래 애태우는 젊은 후배들에게 뮤지엄 그라운드를 ‘선물’로 제공, 거침없이 날아오르라 등을 밀어주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해서 미술관을 개관한 게 2018년. 그의 아들 전용운이 관장 직분을 맡았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2500여 평 부지 안에 지은 지상 3층, 지하 2층 건물, 그리고 야외 잔디광장으로 구성됐다. 건축 설계를 맡은 사람은 전광영의 막내아들 전용천으로, 그는 ‘미술관 건물 자체를 작품’으로 생각하고 설계했다고 한다.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틀을 깨고 개성 넘치는 미술관 건물을 짓고 싶었다는 얘기다. 말은 그러했으나 묘한 발상과 기발한 파격 따위를 동원하는 일은 자제해서인가, 건물의 안팎 모습은 대체로 평범하고 수굿해 밋밋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개성을 추구하되 자칫 요란한 치레로 흐를 경우 오히려 건물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 미감을 돋우되 기능성과 실용성을 중심에 둔 설계에 방점을 찍었던가 보다.
재미있는 건 미술관 건물 입구로 연결되는 통로다. 건물 외벽과 병행하는 가벽 형태의 구조물을 덧대어 조성한 좁고 어둑한 뜻밖의 통로. 관람객은 잠시 골목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이 통로를 통해 마치 물살에 쓸려 흐르듯 미술관 현관문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위트와 센스가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이왕 미술관에 왔으니 딴 생각 말고 미술과 만날 즐거움 하나로 설레어보라는 뜻으로 만든 통로라 보면 되겠다.
개관 이후 뮤지엄 그라운드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19년 7월,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사진 작품 130여 점과 영상을 전시한 특별기획전을 통해서였다.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마그리트는 기상천외한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상식 파괴를 본령으로 삼고 마치 가상현실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마그리트의 사진 작품과 영상을 국내 최초로 애호가들에게 선보인 뮤지엄 그라운드의 특별기획전은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알아서 찾아오는 관람객 수가 확 늘었다는 게 아닌가. 기획전의 품질이 미술관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주요 변수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옥상에서 커피 한잔을
이제 그림 구경을 해볼까. 전시실은 지하 2층에 있으며 모두 세 개다. 현재 세 가지 전시회가 펼쳐지는데 전부 2021년 10월 3일까지 계속된다. 제1전시실에선 설치미술가 정찬부의 ‘곰돌이 J의 2050년으로부터 온 초대장’전을 볼 수 있다. 정찬부는 다량의 플라스틱 빨대를 꼼꼼히 잇고 붙이고 색칠해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현시대를 플라스틱 문명기, 또는 플라스틱 천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플라스틱만큼 현대를 사는 인간의 편리와 복리에 기여한 물건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해양의 물고기들 뱃속에서조차 미세플라스틱이 나온다. 인간은 그 위험한 물고기를 먹는다. 사용엔 편리하나 사후 쓰레기 처리엔 난감해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게 플라스틱이다. 정찬부의 작품은 이 미워할 수 없으나 끌어안고 살 수만도 없는 플라스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환경 메시지를 담은, 이를테면 ‘플라스틱 프리’ 운동 차원의 작품이 아니다.
정찬부는 플라스틱 빨대를 촘촘히 엮어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을 만들어 흥미롭고 어여쁘게 재생시켰다. 보잘것없는 쓰레기로 전락할 운명을 지닌 빨대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폐기될 사물마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머리와 영혼을 쥐어짜는 심각한 창작 행위만이 예술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주변에 흔하디흔한 재료마저 흥미진진한 미술 작품의 원천이 된다는 걸 무언중에 귀띔하면서 삶의 모든 현상과 물상을 예술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달아준다.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을 탕! 치고 들어오는 뭔가 짜릿한 맛은 없어 아쉽다.
제2전시실에선 설립자 전광용의 작품전이 펼쳐지고 있다. ‘전광영 Chapter3: 집합 화법의 완성기 1996~2003’이라는 타이틀로. 그는 우리의 전통 한지를 오브제로 평면과 입체 작품을 해온 작가다. 어렸을 때 본 한약방의 약봉다리에서 영감을 얻은 그만의 한지 작업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자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번 ‘집합’ 시리즈에 나온 유별한 작품들을 보면 그가 상상력의 대가임을 직감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스티로폼들을 고서 한지로 일일이 싸맨 무수히 많은 조각들을 프레임에 깨알처럼 촘촘히 붙여 대지의 원초를 느끼게 하거나, 한국적 전통 정서의 끌텅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건 다분히 실험적인 형태의 조형물이다.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장악하고 허공에 매달린 구체(球體) 작품은 시공의 벽을 뚫고 외계에서 날아와 멈춘 별똥별 같은 걸 연상시킨다. 전체적으로 모든 작품이 아름답다기보다 신비로우며, 추상적이지만 거침없는 직정(直情)의 산물이라서 감정이입이 수월하다.
그림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걸 포기할 각오가 돼 있는 게 화가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림 하나에만 들입다 몰입하는 게 진짜 그림쟁이다. 전광영은 그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극단적인 시도까지 두 차례나 했던 인물이다. 목을 걸고 그림에 매달렸으니 독종이다. 매너리즘을 극구 경계하며 작풍의 변신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작품 세계의 확장과 성장에 대한 본능이 그토록 강렬하다. 그는 미술관 뒤편에 있는 대형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다. ‘하루에 다만 1cm라도 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조형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거다. 애석하게도 이 치열한 사람과의 인터뷰가 예정됐었으나 불발에 그쳤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하니 어쩔 수 없다.
미술관 건물 옥상 테라스는 ‘카페 그라운드’다. 그림을 감상한 뒤 향긋한 커피 한잔 즐기기에 적격인 공간이다. 저만치 사위에서 술렁이는 산야와 흰 구름, 그리고 햇살과 바람…. 근사한 세상을 여기에서 다 보고 느낄 수 있다.
바다가 발밑으로 떨어지는 언덕 위에서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예술작품들을 만나며 그 기발함에 놀란다. 깜짝 놀랄 만큼 신기해하다가, 숨겨진 위트에 웃고, 예술성에 감탄하며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모른다. 몇 시간의 짧다면 짧은 관람시간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나긴 예술기행을 나선 듯하다. 현대미술품과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들이 삭막한 현실에 웃음을 찍는다.
가을 바다가 보고파서 간 강릉
그곳에서 만난 아트 뮤지엄. 횡재했다는 기분이 든다. 바다를 마주하며 예술작품과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하슬라(何瑟羅)란 말이 외국어인가 싶었는데 순수한 우리말, 그것도 고구려 때 강릉을 부르던 이름이다. 하슬라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도 불리었는데 ‘큰 바다’,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슬라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 만한 곳이 어디일까?
이름을 내건 만큼 자부심 가득한 복합예술공간, 하슬라아트월드에 답이 있다. 푸르디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절벽 위에 우뚝 선, 외관이 유리로 된 사각형 건물이 하슬라아트월드다. 그 안에 뮤지엄 호텔, 현대미술관, 피노키오&마리오네트 박물관, 20’s 카페가 있고 외부에는 야외 조각공원과 바다카페가 있다. 바다를 품고 산허리를 안은 복합예술공간에서 촘촘하게 예술이라는 보물찾기에 나선다.
지금은 복합예술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첫 시작은 야외 조각공원
실내 전시장에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지만 아껴두고 호흡부터 가다듬을 겸 야외로 나가 조각품들을 만났다. 통나무와 빛이 만드는 최옥영의 ‘우주’라는 작품은 쏟아지는 햇살 그림자 위에 의자를 놓아둠으로써 우주 안의 휴식을 부른다. 오른쪽의 바다카페를 지나 언덕을 따라 솔숲 사이로 난 덱 산책길을 걷다 보면 풍요와 바다를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하슬라아트월드 건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일품 전망을 볼 수 있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 바다와 하늘은 드넓은 스케치북이 되어준다. 그 위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예술성이 결합된 작품들을 곳곳을 채운다.
입구에는 붉게 단풍이 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것은 무엇일까? 해시계다. 양철통을 사선으로 절단한 것 같은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나온다. 터널 너머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 같은 남자와 상하 대칭의 자전거, 하늘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 등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산책로 따라 이어지듯 나타난다.
자연의 숨결을 음미한 후 현대미술관에 들어서면
하슬라아트월드의 공간 디자인이 강릉의 바다와 햇살이 비쳐 든 창가 안에서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비지 갤러리이자 현대미술관 1관은 색색의 타일과 곡선미가 흐르는 작품들이 골동품, 커피 소품, 도자기, 난로 등 옛것들과 혼재한다. 2관으로 가기 전 화려한 실과 소금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에 멈춰 선다. 2019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Personal Structures’에 참가한 최정윤 작가는 소금으로 만든 청동 검에 우주의 무한한 색을 담은 실을 휘감아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나만의 보물을 찾아낸다. 평소에 좋아하던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살포시 미소 지었고, 에밀리아노 로렌조(Emiliano Lorenzo)의 빙하 위 북금 곰들을 볼 때는 집에 있는 폴라 베어 인형을 떠올렸다.
키네틱 아트 작품과 설치미술, 수학과 예술이 만나는 프랙털 아트를 관람하며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러 들어갔던 고래 뱃속을 연상시키는 터널설치미술을 통과한다. 현대미술관 3관을 지나면 피노키오 박물관이 나온다. 바다가 도화지처럼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전 세계 예술가의 피노키오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리오네트와 함께 동화와 현대미술의 만남이 줄 끝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하슬라아트월드는 보물찾기를 하듯 한 곳 한 곳 시선을 가벼이 둘 수 없다. 예술품에 집중하다가 휴식하고 싶다면 뮤지엄 안의 카페나 바다 전망이 펼쳐지는 야외 카페에서 가을 햇살을 음미하면서 가을을 즐겨도 좋다.
주소 : 강원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 1441
관람시간 : 09:00~18:00 (매주 수요일 휴관)
관람요금 : 성인 1만2000원, 어린이 1만1000원
주변 맛집 : 바다마을횟집(강릉시 강동면 정동등명길 23)
등명해변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섭해장국과 물회로 부담스럽지 않은 점심을 먹기에 좋다. 섭은 강원도 사투리로 시장에서 흔히 보는 홍합의 열 배는 됨직한 자연산 홍합을 말한다. 섭해장국은 커다란 홍합 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어 끓인 해장국으로 시원한 맛보다는 듬직한 맛이 난다. 회무침을 곁들이면 궁합이 잘 맞는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여행 풍속도도 달라졌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점차 사라지고 혼자 혹은 둘이 떠나기 좋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렇게 훌쩍 떠나 갑갑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당일치기로 놀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령이 살았던 터전, 용흥궁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당시 강화도령은 가족이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4세 때 이곳 강화로 유배되었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훗날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집을 보수 단장해 용흥궁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좀 휑한 모습이지만 관리는 잘되어 있었다. 150년 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를 보며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철종의 모습이 느껴져 짠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기도 하며 평민으로 살았던 터전이다. 강화도령 이원범, 철종의 이야기가 깃든 용흥궁 담장에는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흥궁은 강화 나들길 1코스다. 강화읍 관청리 441-0
한옥의 멋,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담 넘어 건너편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의 외양이 독특하다. 얼핏 보면 성당 같지 않고 마치 절처럼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 불교 사찰 양식을 융합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 보리수가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찰의 범종처럼 생긴 종도 보인다. 분명 성당인데 절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서로 다른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남다름을 본다.
성당 입구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상사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엔 초대 주교 고요한 신부의 비석과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강화 시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목재로 이루어진 깔끔한 실내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동서양의 오묘한 분위기가 잘 조합된 실내다. 열린 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한가득 들어온다. 양 벽면에는 강화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밖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낮은 담장의 사제관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계단 난간 등 건축물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소창길’을 아시나요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1960~70년대에 강화도 산업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심도직물의 흔적이다. 직물 공장은 강화도 경제의 대표적 징표다. 강화도서관 옆으로 이화직물 터가 있고, 아기들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였던 친환경 직물 ‘소창’을 만들어내던 유명 직물 업체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 골목에 ‘소창길’ 코스가 새롭게 더해졌다. 강화 중앙시장 B동 3층에 위치한 ‘관광플랫폼’이 스토리워크 길 출발지다. 1960년대의 직물공장 전경과 소창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산하다. 가는 길에는 100년의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낙원 떡집’이 있다. 순수한 떡 맛을 자랑한다. 질 좋은 강화 쌀에 첨가물은 소금 한 가지밖에 안 넣는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읍내 중심에 있는 50년 전통의 ‘강화국수’ 집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에 가면 알싸한 순무김치 맛도 봐야 한다.
※소창길 코스 중앙시장 관광플랫폼에서 출발해 심도직물 굴뚝 -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 이화직물 터 - 금융상사 - 조양방직 - 동광직물 - 남화직물 - 상호직물 - 경도직물 - 소창체험관으로 이어진다. 2시간 정도 소요.
빈티지 감성 카페, 조양방직
과거의 방직 공장을 그대로 살려서 빈티지한 매력을 보여주는 레트로 감성 카페다. 조양방직은 1933년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한때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시절의 흔적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탈바꿈해 핫한 카페가 됐다. 그 옛날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기계를 돌리던 시절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평화로운 궁궐터, 고려궁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 고려 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8년간 머물렀던 궁궐의 터다(사적 제133호). 당시의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고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봤던 이방청만 남아 있다.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자연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화읍 강화대로 394
조용한 마음의 울림, 교동마을과 향교
느릿느릿 옛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마을로 가볼 일이다. 예스럽고 정감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 향교(고려 전기에 창건)와 우리나라 최초 향교인 교동 향교 방문도 빠뜨릴 수 없다. 강화나들길 1-18코스다. 강화군 교동남로 229-49
해안도로 따라 의미 있는 드라이브 코스, 덕진진
강화도에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강화 12진보(鎭堡)가 있다. 그중 덕진진은 김포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포대였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볼 수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전적 시설 풍경은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 의미 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섬에서 즐기는 슬기로운 문화생활 ‘도솔미술관’, ‘해든뮤지엄’, ‘전원미술관’
최근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떠나 작품 전시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즈넉한 강화 땅에서 감상하는 개성 있고 멋진 미술관. 언택트 여행으로 유유자적 멋진 시간을 누려보자.
도솔미술관은 초지진과 가깝고 고즈넉해서 좋은 사람과 조용히 산책할 겸 가보면 좋은 장소다. 강화 들판을 달려 소나무가 예스러움을 더해주는 작은 마을에 다다르면 단정한 한옥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총 4개의 전시관이 있는 도솔미술관은 야외전시관, 2개 층의 실내 전시장, 별관으로 나뉘어 있다.
뜰안채 야외전시장에서는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별관을 비롯해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서 매달 바뀌는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창가에 걸터앉아 강화 들녘을 유유자적 내다보며 함께 온 사람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풍경이 아름답다.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 210번길 52-71
해든뮤지엄은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의 긴 경사면에서부터 설레게 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축물로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뽑히기도 했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돼 아쉽지만 야외의 조각작품과 설치미술, 그리고 대형 미러가 볼 만하다. 정원의 휴식공간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 강화군 길상면 장흥로 101번길 44
전원미술관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유광상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그림 등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이색적이고 따뜻한 ‘동네 책방’
강화군청 부근엔 볼거리가 많다. 강화성당과 용흥궁, 중앙시장, 궁터, 중앙시장 청년몰, 소창길…. 이곳들을 다 돌아본 뒤 한숨 돌리며 조용히 서점을 들러보는 건 어떨까. 소금빛 서점, 국자와 주걱, 책방 시점 등은 강화도 간 김에 누리는‘소확행’이다.
‘소금빛 서점’ 이 있는 고택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 바로 앞 양옆으로 ‘그 여자 그릇 유림상회’와 ‘그 남자 책방 소금빛 서점’이 있다. 그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이 진열된 소금빛 서점은, 얼마 전 방영 종료된 SBS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배우 이민호가 책 읽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 더 알려졌다. 그 여자의 그릇 유림상회는 채색이 독특한 그릇 한 점쯤 갖고 싶게 하는 곳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책과 그릇이 있는 감성 공간이다(서점과 그릇가게 앞의 대문을 열면 100년 고택 대명헌을 만난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운치 있는 한옥 숙박업소로 예약제로 운영된다).
강화읍 남문안길 7
‘국자와 주걱’은 한적한 마을의 한옥을 책방으로 꾸민 시골 책방 겸 북 스테이다. “작은 책방. 작고 불편함. 그러나 좋은 책. 따뜻한 밥상. 깨끗한 잠자리. 그리고 많은 정”이라는 책방 소개글이 다정하다. 책만 보러 갔다가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에 다시 찾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꼬불거리는 좁은 길로 주춤주춤 운전해 들어가면 이 특별한 책방과 만난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428번길 46-27
아름다운 일몰에 반하다, 장화리
강화도의 마지막 코스는 누가 뭐래도 일몰 풍광이 장관인 장화리다. 강화도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강화 갯벌과 서해의 해넘이는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이곳에서의 일몰 시간은 아주 짧다. 찰나의 장화리 노을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도 경건한 시간을 맛보며 강화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파주시 광탄면 야트막한 산 앞, 3305㎡(약 1000평) 규모의 야외 스튜디오에 푸른색의 인사하는 조각품들이 서 있다. ‘그리팅맨’(Greeting Man, 인사하는 사람)과 ‘월드미러’(World Mirror, 세계의 거울)의 조각가 유영호(55) 씨가 작업 중인 작품들이다. 유 작가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유영호 작가는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년에는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다수의 수상 경력도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행사와 교류가 중단된 초여름 날 만난 유영호 작가는 여전히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가 제일 바빠야 하는 해였어요. 연초부터 해외에 작품 설치가 계획돼 있었는데 다 연기됐죠. 베트남에도 3월에 보내려고 포장까지 해놨는데 미뤄졌어요. 멕시코 메리다에서는 아직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인데도 8월 말까지 작품을 보내달라고 해서 다음 주 중 컨테이너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6월에 프랑스 노르망디 쿠탕스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작품은 1월 말에 자리만 잡아놓은 상태다.
자비로 해외에 ‘그리팅맨’ 설치
유영호 작가가 그리팅맨 해외 설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뭘까.
“미술계에서 작가가 성장해가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뮤지엄에서 작품 발표를 해서 이름을 알리고 경력을 쌓는 것이죠. 선진국들은 그런 루트가 확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작가, 갤러리, 컬렉터가 어우러져 작품의 가치가 책정되는 케이스죠.”
그런데 한국은 대부분 국공립 뮤지엄이어서 작가들이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다음 국내에서 전시하는 방법을 선호한단다.
“국내의 조각작품 시장은 협소해요. 해외 극소수 작가의 작품만 거래되는 정도죠. 한국에서 조각가로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해외로 보내는 방식을 선택한 거죠.”
그가 자비를 들여 해외에 작품을 설치하는 이유는 기증 프로젝트가 아니면 힘들어서다. 어느 한 장소에 영구적으로 외국 작가의 작품을 설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 작가가 그리팅맨을 제작하게 된 동기도 궁금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할 당시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깊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큰절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시하자 그것을 본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 헨크 비스가 “그 행위가 인사가 맞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유럽 사람들은 인사를 잘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관계가 시작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죠.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관계의 출발은 인사로부터 시작된다고 봤어요. 우리의 큰절 문화가 유럽인들에게는 낯설었겠지만 인사에는 어떤 보편성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는 헨크 비스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고 인사에 대해 재인식을 하게 됐다. 그리팅맨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대방도 존중하는 자세는 고개를 15° 숙인 각도예요. 너무 낮추는 건 가식적으로 느껴지거나 비굴해 보일 수 있거든요. 정치적 행위로도 인식되죠. 그리팅맨의 15° 각도 인사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온 결과예요.”
이 작품의 푸른색은 인종을 초월한 중립적인 색으로 전 인류를 의미하며, 고려청자의 빛깔을 띤 색은 작품 배경인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해외의 폭발적 반응
2012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그리팅맨을 처음 세운 후, 지금까지 국내외 10여 곳에 작품을 설치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는 라디오 생방송에서 찬반토론을 할 정도로 반대가 극심했다.
“어느 곳이든 이질적인 것들에는 반감이 있기 마련이죠. 그러나 그리팅맨이 설치된 후에는 시민들 반응이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다음 해에 우루과이 관광청에서 만든 책자 앞 페이지에 그리팅맨이 소개될 정도였어요.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거죠. 작품이 설치된 자리는 우루과이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인데 현재 ‘대한민국 광장’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어요. 해외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면 힘이 나요. 모두 자비로 설치하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얻고 있죠.”
설치비보다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일 게다. 해외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고, 유 작가는 그리팅맨이 전 세계 소통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설치되는 도시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선정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한 지역, 분쟁으로 고통을 겪었던 곳, 그리고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들입니다.”
조만간 작품이 들어설 멕시코 메리다는 한국과도 관계가 있는 도시다. 1905년 ‘지상낙원’이라는 말만 믿고 멕시코 이민선을 탔던 조선인들이 애니깽(선인장의 일종)이라는 농장에서 노예처럼 지낸 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5~6세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수만 명이 그곳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고요. ‘대한민국로’로 이름이 바뀐 거리의 원형 광장에 그리팅맨을 세울 겁니다.”
연천 옥녀봉의 화해 메시지
국내에서는 2007년 파주 헤이리에 처음 그리팅맨을 세운 후 분단의 현장에도 작품을 설치했다. 유 작가에게 제일 의미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2016년에 10m짜리 그리팅맨을 세운 연천 옥녀봉이에요. 북한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곳이죠.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담았어요.”
북녘을 향한 그리팅맨은 현재 연천의 랜드마크로 불리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북한에도 그리팅맨이 설치되어 남과 북이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하기를 바란다.
“옥녀봉은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으로, 남북 간 DMZ에서 6km 정도 거리에 있어요. 그리팅맨을 남과 북에 설치한다는 것은, 70년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이 작은 힘을 보탠다는 걸 의미하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평화의 작가’라고 부르는데 그는 아니라며 겸손해한다. 단지 분단 시대를 사는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2014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 광장에 세운 월드미러는 영화 ‘어벤져스2’에서 소개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명 ‘미러맨’(Mirror Man)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붉은 사각 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거울이 없지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우리는 결국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재작년에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월드미러를 설치했어요. ‘세상의 거울’이자,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도 있죠. 에콰도르는 적도에 위치한 나라여서 남반부와 북반부가 만난다는 의미도 됩니다.”
현재 터키 북서부의 항구도시 차낙칼레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최장 길이의 다리를 만들고 있다. 내년에 다리가 완공되면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만남을 상징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세울 예정이다. 그리팅맨은 형태가 둥글둥글한 반면 월드미러는 각과 면으로 이루어졌다. 누드를 부담스러워하는 나라에서는 각이나 면으로 그런 느낌을 순화한단다. 그래서인지 월드미러를 원하는 나라들이 꽤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이슬람 국가들을 위해 옷을 입힌 작품도 만들고 있다.
5년 안에 20개국에 그리팅맨 세우겠다
그는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 여러 지역에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공공미술은 보기에 편안하고, 내용도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젊은 시절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품들도 많이 만들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요.”
공공미술로 선정된 작품들의 수익금은 해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 이러한 뜻에 공감하는 지인들이나 친목 단체가 후원도 한단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역시 그리팅맨에 관한 이야기다.
“5년 안에 20개 나라에 그리팅맨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이에요. 지금의 시공간에서 선택한 특별한 일이기도 하죠.”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다.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 말년에는 은둔자로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 공감 등을 추구하는 그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젊은 시절에는 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요즘엔 글을 쓴다. 최근에는 그리팅맨 프로젝트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리팅맨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서 그가 직접 낭송한 자작시 ‘프란체스코’, ‘형과 누나’ 등은 미세한 울림을 준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기자가 출발할 때까지 배웅하며 그는 그리팅맨처럼 15°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