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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영미문학 번역 대가가 사랑한 고전4
- 1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민음사 “호메로스 이후 그리스가 낳은 최고의 작가로 일컫는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입니다. 화자 ‘나’는 현실에 만족하며 충실하게 살아가는 조르바의 삶에 영향을 받고 태도를 바꿔나가요. 번역을 하며 다시금 훌륭한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지 깨달을 수 있는 작품이니, 제가 번역한 책이 아니더라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 열린책들 “미국 작가 하퍼 리의 장편소설로, 1960년 출간 직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금까지도 미국에서는 매년 10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죠. 스카웃 핀치라는 아홉 살 소녀의 눈에 비친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데, 작가는 비단 흑백을 둘러싼 미국의 인종 문제뿐 아니라 전 세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촉구합니다.” 3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 에코리브르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충제를 비롯한 화학약품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서서히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어요. 카슨처럼 문학가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죠. 카슨은 정책 변화와 현대적 환경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4 토지 박경리 / 마로니에북스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위치한 최참판댁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으로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작품 속에는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 청일전쟁, 간도협약, 만주사변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등장하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돋보입니다.” 김욱동 시대의 감수성을 옮기는 영미문학 번역가. 번역에도 ‘소비기한’이 있다고 말하는 그는 매일 개인 사무실에서 낱말의 넓이를 키우고 깊이를 더하며, 언어의 흐름을 읽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노인과 바다》, 《위대한 개츠비》,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비롯해 《앵무새 죽이기》, 《그리스인 조르바》 등이 있다. 에디터 조형애 취재 문혜진 디자인 유영현
- 2024-05-2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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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주의와 부조리 연극의 이상야릇한 만남, 동양레퍼토리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
- 연극이나 문학을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이름,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와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이들은 사실주의극과 부조리극의 대가이다. 생몰연도를 보아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데 산책을 하다니. 연극 제목이 희한하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가 배역으로 등장하는 창작극? 각자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작가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연극의 제목이 궁금해 공연장 문을 두드렸다. 물과 기름 같은 연극, 해설로 만나다 한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 매일 밤 150여 개의 극장에서는 뮤지컬을 비롯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그 화려한 틈새에서 연극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이 공연됐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라니. 고리타분한 교과서 속 인물을 누가 소환했을까. 원로 배우 권성덕이 고문으로 있는 동양레퍼토리다. 신구세대 연극인이 조화를 이룬 극단으로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와 ‘두 영웅’ 등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묵직한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해설을 통해 고전 연극을 만나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 체호프의 각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해설자가 무대에 나와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이다. ‘청혼’과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중견 연극인의 해설을 곁들여 무대에 올렸다. 고전의 딱딱함과 무게를 살짝 걷어내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연극으로 말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이 연극을 관객들은 보고 웃어댄다. 관객의 마음으로 풀어준 해설이 친밀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청혼’, 고집불통 노처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매년 크고 작은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4대 장막인 ‘갈매기’나 ‘벚꽃동산’, ‘세자매’와 ‘바냐아저씨’는 풍월로라도 듣지 않았을까?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안톤 체호프. 그의 직업은 사실 의사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의과대학 시절 문학잡지에 단편과 수필을 기고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신인작가로 이미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장막을 쓰기 전 체호프는 단편 희극을 쓰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청혼’(1889)이다. ‘청혼’은 지병이 있는 데다 뚱뚱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젊은 지주 로모프가 이웃의 지주 추푸코프의 노처녀 딸인 나탈리아에게 청혼을 하러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추푸코프는 로모프가 혹시나 돈을 꾸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경계하지만 딸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는 말에 기뻐한다. 나탈리아 또한 결혼할 생각에 기뻐서 로모프를 만나지만 토지사유권 주장을 하면서 언쟁을 한다. 이 와중에 지병이 있던 로모프는 쓰러졌다 극적으로 되살아나지만 또 다른 언쟁에 부딪히며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모를 결말로 끝을 맺는다. ‘청혼’은 동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젊은 배우들과 중견 연극배우의 조합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려줬다. 특히 25세 노처녀를 연기한 60대 연기자 장연익의 소녀 같은 연기가 압권. 영화나 드라마가 해결할 수 없는 연극 최고의 판타지는 ‘배역’은 있어도 배우 나이의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말대잔치 흠뻑 즐겨라 ‘대머리 여가수’ 안톤 체호프의 연극이 사실적인 상황과 이야기 전개로 이어졌다면, 뒤이어 공연된 이오네스코의 초기작 ‘대머리 여가수’(1950)는 배우의 등장부터 파격적이다. 남녀 배역 모두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여자 배역의 남자 배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붙이고 진하게 화장을 했다. 남자 배역은 수염 없이 깔끔하게 등장해 소극적인 자세로 사건에 개입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전개와 인물 구성, 역할 파괴로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나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한다. ‘대머리 여가수’를 번역한 순천향대학교의 오세곤 교수는 극의 이해를 도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오네스코가 처음 극작을 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합리적이라 믿고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는 달랐다.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 부조리극의 태동과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된다. 부조리극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공연된 극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이들이 표출해낸 예술이다. 전쟁 이후 세상은 부조리 그 자체. 극 속에서도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지 않고 아무 말이 튀어나와도 이해가 강요된다. 논리의 허무 속에서 부조리극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낸 것. 부조리극의 대표작인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또한 여전히 매력적인 희곡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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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해지고, 새고, 가늘어지는 자존심 전립선 비대증
- 미칠 노릇이다. 살면서 ‘힘’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소변마저 시원하게 해결하기가 어렵다.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민망하다. 아내는 소변 하나 제대로 못 봐 속옷에서 냄새가 난다며 핀잔을 주기 일쑤다. 바로 전립선에 문제가 생긴 사내들 이야기다.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이 노화 과정에서 피하기 어려운 것이 전립선 비대증이다. 이 질환을 정말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있다면 해결 방안은 무엇인지 한양대학교병원 비뇨기과 조정기(趙正琪·39) 교수의 도움으로 알아봤다. 전립선은 최근 전립샘으로도 불린다. 영문 의학 용어가 일본식으로 번역된 것을 그대로 도입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실제 전립선 모양이나 기능을 고려할 때 샘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기사에선 아직 독자 편의를 위해 전립선으로 표기한다). 전립선이 샘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유는 실제로 전립샘이 정액의 우윳빛 액체(전립선액)를 생성해 정자의 운동을 돕는 역할을 하고 남성호르몬 생성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전립선은 부피로 따지면 약 20cc 정도의 크기로 밤톨 하나만 한 크기를 상상하면 된다. 방광 바로 밑에서 요도가 시작되는 부위를 감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모양이 하트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랑의 장기’로 불리기도 한다. 중년 남성의 삶의 질 무너뜨려 조정기 교수는 전립선 비대증의 원인 중에서구화된 식생활 등도 있지만 노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피해갈 수는 없을까? “실제로 발병률을 조사해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이 병을 앓는 비율도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대략 60대에는 50%, 70대에는 70%, 80대에는 80% 정도의 조사결과를 보여요. 결국 대부분의 남성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립선 비대증을 피하기 어려워진다는 얘기죠.” 전립선은 맨 가운데의 중심부와 이를 감싸고 있는 이행대 그리고 이행대를 다시 감싸고 있는 말초부로 구분하는데 비대증의 경우는 이행대가 부풀어 오르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증상이다. 전립선 비대증이 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부피가 커지는 과정에서 요도를 압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방광까지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일을 보고 나서도 잔뇨감이 들며, 자주 마려운 증상이 나타난다. 모두 소변과 관계된 증상들뿐이다. 특히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게 되는 ‘야간 빈뇨’는 시니어들의 삶을 떨어뜨리는 전립선 비대증의 대표적 증상이다. 이밖에 소변을 다 보고 난 후 방울방울 떨어지는 증상(배뇨 후 요점적), 소변이 마려우면 참지 못하는 증상(요절박), 소변을 참지 못해 옷에 묻히는 증상(절박성 요실금) 등도 중년 남성의 자존심을 뭉개곤 한다. 조 교수는 “실제로 저를 찾아오시는 환자 중 상당수는 수면장애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니 낮의 일상생활에도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죠. 대수롭지 않은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참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급적 초기에 치료를 받길 권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라고 조언한다. 비대한 전립선은 종양과 유사 그렇다면 전립선 비대증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조 교수는 소변과 관련해 불편함이 생겼을 때 비뇨기과 전문의가 직접 만져보는 촉진을 통해 검사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고 설명한다. 정식 명칭은 ‘직장수지검사’라고 불린다. “경험 많은 비뇨기과 전문의는 손으로 만져보고도 전립선 비대증인지 아닌지 혹시 전립선암은 아닌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또 전립선 비대증이라면 그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이 가능해요. 환자 입장에선 검사 과정이 부끄러울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웃음).” 이외에도 소변검사와 혈액검사, 소변의 배출속도를 측정하는 요속검사, 초음파검사 등으로도 진단을 한다. 그런데 조 교수는 전립선 비대증이 일종의 종양과 비슷하다며 재밌는 설명을 한다. “결국 궁극적인 방법은 수술을 통해 절제해내는 것이 최선이니까요. 전립선 비대로 인해 요로가 눌리는 것을 물리적으로 속 시원히 해결하기 위해선 수술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종양과 비슷한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즘엔 좋은 약물이 많지만, 혈압이나 당뇨 등으로 평소 드시는 약이 적지 않다면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물론 악성종양인 전립선암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갖는다. 전립선암은 비대증과 달리 말초부에서 발생하고, 대부분의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자각증상이 거의 없다. 제대로 된 진단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전립선의 약물치료가 의료 현장에서 선호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장기 복용해야 하고 부작용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약물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이지 물리적인 개선 방법이 아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같은 증상에 시달려야 한다. 또 약물로 인해 기립성 저혈압이나 성기능 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치료를 위한 수술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요도로 내시경 장비를 넣어 전립선 일부를 절제하는 경요도 전립선 절제술과 레이저를 사용한 수술법이 널리 쓰인다. 레이저 수술은 레이저로 태워 없애는 KTP 레이저 수술과 사과의 속을 파듯 레이저를 이용해 양성종양만 절제해 방광안에 넣고 갈아서 꺼내는 홀뮴 레이저 수술이 있다. 100cc 이상으로 부풀어오른 전립선에서 양성종양만을 적출해버리는 전립선 적출술도 있다. 최근에는 절개를 적게하는 최소침습적 수술방식이 선호되는데, 레이저 수술이나 경요도 전립선 절제술이 여기에 속한다. 최신 치료 방법으로는 좁아진 요도의 공간을 확보하는 스텐트 삽입술이 있다. 비용이 비싼 것이 단점이지만, 반영구적인 사용이 가능한 전립선 결찰술도 개발되어 대중화를 앞두고 있다. 쏘팔메토 너무 의존하지 마세요 전립선 비대증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쏘팔메토다. 쏘팔메토는 오래전 북미 인디언들이 민간요법으로 썼던 작은 야자나무 열매로 건강식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미국 식약청(FDA)의 판매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조 교수는 지나친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환자 중에도 쏘팔메토를 드시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효능은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보다 훨씬 약한 수준이에요. 배뇨 증상을 겪는 환자가 많아지면서 전립선 비대 관련 시장도 커지고, 제약회사에서는 건강식품을 많이 내놓고 있어요. 하지만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드셔도 큰 효과는 보기 어려울 겁니다. 정확한 진단 아래 치료를 받으시는 게 회복이 훨씬 빠를 겁니다.” 전립선 비대증과 관련한 조 교수의 당부는 계속됐다. 바로 수술 후유증에 대한 선입견이다. “전립선 비대증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으면 요실금이 생길까봐 많이 걱정하시는데요. 일부 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시적인 증상입니다. 수술 후 성기능 장애에 대해 걱정하시는 분들은 전립선결찰술도 적극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삶의 질에 크게 영향을 주는 전립선 비대증을 더 이상 간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궈서야 되겠습니까(웃음).”
- 2017-07-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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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재능도 거래가 가능하다
- 글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 전략명함 코디네이터 사소한 재능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능력이다 재능기부란 말이 있다. 주변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재능기부는 내가 갖고 있는 재능 혹은 능력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대가 없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재능기부가 아닌 재능을 사고파는 곳이 있다. 재능을 사고파는 게 아직은 낯설긴 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비용을 받는 틈새시장이 있다. 거창한 재능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재능이라면 ‘재능마켓’에서 거래 할 수 있다. 타이핑 치는 간단한 것부터 번역이나 통역처럼 전문적인 재능도 있다. 내가 만약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속도가 느리거나 펜으로 글을 쓰는 게 더 편하다면 종이에 글을 쓰고 타이핑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비용도 생각보다 저렴하다. 타이핑 10장에 5000원 정도 한다. 비용이 저렴한 이유는 이곳에서 재능을 올리는 사람들은 기업이 아닌 일반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타이핑이 필요한 개인과 타이핑을 해주는 개인이 만났기 때문에 저렴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재능마켓은 새롭게 시작할 때 더 요긴하다 재능마켓은 일상적인 생활보다 사업을 할 때 더 요긴하다. 최근에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 중·장년층이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다섯 명이 모이면 협동조합을 쉽게 만들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이후다. 협동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면 로고도 필요하고 명함도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단체를 알릴 수 있는 광고지나 홍보용 동영상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디자인 회사나 동영상을 만드는 회사에 의뢰하면 비용이 비싸다. 협동조합 하는 분들 말을 들어 보면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 너무 큰돈은 쓰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일단 최소비용으로 단체라는 구색만 갖추고 싶은데 일반 회사는 생각보다 비용이 비싸서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그런데 재능마켓에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단체에게 필요한 명함, 로고와 같은 디자인을 저렴하게 만들어 준다. 더 나아가서 회사소개서, 자기소개서, 홍보문구 등 글을 매끄럽게 다듬어주는 재능도 있어 글쓰기가 어려운 분들은 글쓰기 재능을 도움 받기도 한다. 상상력과 표현할 만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재능마켓에는 다양한 재능들이 있다. 프로필 사진을 찍어 주거나 영상을 편집해 주는 재능도 있고 성우가 목소리를 녹음해 주는 재능도 있다. 무언가 표현할 게 있으면 재능마켓에 모인 재능인의 도움을 받아서 결과물로 완성된다. 이런 사례도 있다. 악보도 쓸 줄 모르고 악기도 다뤄 본 적이 없는 어떤 분이 자신의 행사 때 직접 음악을 만들어서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재능마켓을 검색해 봤더니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으로 음악을 만들어 주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이분은 카페에서 재능인을 만나 곡을 만드는 도움을 받아서 직접 자신이 곡을 완성했다. 한 번쯤 음악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직접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쓸 줄 몰라도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면 나만의 곡을 만들 수 있다. 시니어들이 갖고 있던 경험과 노하우가 표현하는 재능과 만나면 상상하지 못할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재능이 필요한 분들은 재능마켓을 이용해보자. 재능마켓에서 삽화 그리는 재능 구매하기 1. 검색창에 ‘재능마켓’을 검색한다 ● 재능을 올리는 사람들은 여러 곳에 비슷한 재능을 올린다. ● 자신에게 필요한 재능이 있는 ‘재능마켓’을 이용하는 게 좋다. 2. 필요한 재능을 검색한다 ● 타이핑, 명함, 로고, 글쓰기, 편집, 출판 등 필요한 단어를 검색한다. 3. 마음에 드는 재능을 선택하고 구매를 한다 ● 기본 수량을 선택한다. ● 빠른 작업이나 추가 수정이 있을 경우 옵션을 선택하여 금액을 더 지불한다. 4. 결제를 하면 작업이 시작된다 ● 결제가 완료되면 재능인의 연락처가 공개된다. ● 일정, 요청사항 등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하며 결과물을 기다린다. ● 결과물을 받고 만족도를 평가한다.
- 2016-10-0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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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결핍과 허기의 시대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 2016-06-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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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사]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 고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열정
-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 2015-10-26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