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변희봉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변희봉은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한 끝에 18일 사망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변희봉은 앞서 지난 2018년 방송된 tvN ‘나 이거 참’에서 “지난해 ‘미스터 션샤인’ 캐스팅 요청을 받으면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때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며, 이후 관리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밝힌 바 있다.
변희봉은 1963년 DBS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했으며, 이후 1966년 MBC 2기 공채 성우로 이적했다. 1970년 MBC 드라마 '홍콩 101번지'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드라마 ‘욕망’ ‘질주’ ‘1%의 어떤 것’ ‘늑대’ ‘위대한 유산’ ‘하얀거탑’ ‘공부의 신’ ‘울랄라 부부’ ‘오로라 공주’ ‘불어라 미풍아’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또한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에 그는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렸다.
변희봉은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로 제21회 백상예술대회 TV부문 인기상을 받았으며, 영화 ‘괴물’로 제27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대중문화 각계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발인은 오는 20일이며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방송이 너무 안되고 하는 일마다 자꾸 어긋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개그맨으로서 온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어요.”
한국 예능계의 최정상에 올라 예능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스타 유재석(45)의 말이다.
“칸 영화제에 오는 것은 배우로서 로망이다. 연기자로서 오래 일했지만, 칸에 온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꼭 벼락 맞은 것 같다. 마치 70도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다.”
5월 20일 70회 칸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 선 중견 배우 변희봉(75)이 한 말이다.
연예계에는 한 작품 성공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 이내 사라지는 벼락 스타가 적지 않다. 노래 한 곡 히트로 반짝 스타가 됐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가수도 있다. 물론 오랜 기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성(巨星)도 있다. 그리고 유재석과 변희봉처럼 오랜 세월 무명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스타 반열에 오른 대기만성 스타도 있다. 최근 들어 대기만성 스타들이 대중문화계에서 맹활약하며 경쟁력 있는 연예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1년 KBS 1회 ‘대학개그제’ 입상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오랫동안 무명생활을 하며 남희석, 김국진, 김용만 등 동기의 화려한 스타 부상을 묵묵히 지켜봤다. 7~8년 동안 발버둥을 쳤는데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바로 유재석이다. “노력과 실력 부족으로 저에게 온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절망도 했지요. 게스트 등 작은 역할이라도 전력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임했지요. 그러다 보니 대중과 팬들이 많이 좋아해주셨지요.”
짧지 않은 무명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다 스타가 된 유재석은 스캔들 한 번 내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항상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력으로 10여 년 넘게 최고의 예능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소원이 이뤄지고 난 후 만일 내가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유재석이 무명생활 탈피 이후에도 방송활동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다.
최고의 연기력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믿고 보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타가 김명민(45)이다. 김명민 역시 오랜 무명생활을 견뎌내고 스타가 된 대기만성 배우다. “무명일 때 매니저와 코디가 없어 의상 등을 직접 구해 드라마 촬영장에 갔더니 PD가 출연자가 바뀌었다며 집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자괴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무명의 고통과 가장의 책임 때문에 꿈을 접고 이민까지 갈 생각을 했지요.”
10여 년 동안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무명의 설움을 겪었던 김명민. 그는 드라마 에서 혼신의 연기로 시청자의 박수를 받고 연기대상을 거머쥐며 스타가 됐다. 스타가 된 뒤에도 볼펜을 물며 발성 연습을 하고 캐릭터 소화를 위해 20kg 이상을 감량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김명민은 “무명의 고통이 저를 늘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작품에 임할 때 무명 시절을 생각하며 열심히 합니다”라고 말했다.
1966년 MBC 성우로 출발해 연기자로 전업한 중견 배우 변희봉은 대기만성 스타의 전형을 보여준다. 변희봉은 수많은 드라마에서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줬으나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해 스타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드라마 , 등에서 잡범 등 악역을 연기하고 사극에선 개성 강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대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수많은 작품을 소화하며 연기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름 없는 중견 연기자는 생계의 위협을 받고 배우 자존심에 상처받기 일쑤다. 변희봉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IMF로 방송사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중견 연기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변희봉을 한동안 TV에서 볼 수 없었다. 변희봉을 재발견하고 스타화를 이끈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다. 2000년 를 시작으로 ,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변희봉은 비로소 대체불가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섰다. 3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무명의 고통을 견딘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을 만난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오랫동안 아웃사이더 연기자로 살아왔기에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싶다”라며 웃는다.
요즘 에 남편 우효광과 함께 출연하고 있는 배우 추자현(37) 역시 파란만장한 연기 인생을 살아온 대기만성 스타다. 1996년 드라마 로 데뷔한 뒤 등에 출연해 중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와 관객에게 존재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보여주지 못해 스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점차 배역의 비중이 떨어지고 출연 기회가 줄어들었다.
“출연 기회가 줄면서 연기자로서 자신감도 사라지고 배우로서 위기감을 느꼈어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죠. 중국 진출은 배우로서 마지막 몸부림이었어요.”
중국으로 건너가기 직전 추자현이 한 말이다. 그녀는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맨땅에 헤딩하며 단역부터 다시 시작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연기 스타일을 익히며 닥치는 대로 오디션에 임했다. 2005년 을 시작으로 중국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류 스타로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 아니잖아요. 무명 연기자로 중국에 건너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단역부터 출발했지요. 힘들고 서러워 많이 울기도 했어요.”
추자현은 2011년 중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의 중국판 드라마 주연을 맡아 한국과 중국에서의 길고 긴 무명 배우의 설움을 털어내며 스타 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회당 1억원을 받는 한류 스타로 화려하게 비상한 추자현은 “한국과 중국에서 관심을 받는 것이 꿈만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초심을 잃지 않고 배우로서 임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대기만성 스타들은 죽음보다 더하다는 무명의 설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정상에 오른 만큼, 탄탄한 실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까지 갖춰 경쟁력 있는 스타로 군림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요즘은 장마가 계속되어 야외 활동이 제약을 받는다. 갑자기 스케줄이 취소되고 나면 막상 할 일이 없다. 아까운 하루를 그대로 보내고 나서 영화라도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메이저 상영관은 볼만한 영화가 없고 서울극장,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옥자’가 눈에 띄었다. 영화 배급사 넷플릭스와 국내 3대 메이저 상영관이 서로 갈등하면서 마이너 상영관으로 밀려난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서울극장을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 가봤던 영화관이라 여기쯤이겠지 하고 갔는데 종로5가까지 갔다가 다시 종로 3가 서울극장에 겨우 도착했다. 바지와 신발이 다 젖어 꿉꿉했다. 영화관은 에어컨 시설은 잘 되어 있어 서늘한 온도였다. 5층에서 티켓을 사고 다시 지하 1층으로 가서 보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관객을 많지 않았으나 시니어들이 입소문을 타고 자리를 채웠다. 원래 티켓 값은 9,000원인데 경로할인을 받으면 4,000원이다. 영화가 시작되었는데도 계속 관객들을 입장시키는가 하면 자리에 앉아서 계속 얘기를 해대는 시니어들 때문에 감상 분위기를 거슬렸다. 청력이 떨어지니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이다. 휴대폰 통화소리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만들고 미자 역에 안서현, 할아버지 역에 변희봉 등이 출연했다. 세계적인 화학회사 미란도 그룹은 화학제품이 환경 파괴 제품이라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며 칠레의 한 농장에서 돼지 한 마리를 친환경적으로 품종 개량하여 보통 돼지보다 엄청나게 큰 동물을 만들었다. 전 세계 사육업자에게 보내 10년 동안 키우게 한 후 이를 알려 본격적인 마케팅을 하려는 의도였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미자는 옥자를 가족처럼 키우며 평화롭게 산다. 옥자는 온순한 돼지이다. 그러나 몸집이 코끼리만 하다. 어느 날 미란도 그룹은 사람을 보내 옥자를 뉴욕으로 데려 가려 한다. 본격적인 마케팅에 등장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옥자가 끌려가는 동안 여러 가지 소동이 난다. 서울시내 상점가를 질주하는가 하면 카 액션도 나온다. 이때 복면을 쓴 무리들이 나타나 미란도 그룹의 추악한 실상과 옥자의 태생의 비밀을 미자에게 알려준다. 동물자유연맹 회원들이다. 작전은 옥자를 뉴욕에 보내되, 옥자의 귀 쪽에 달아놓은 미란도 그룹의 블랙박스를 자기네 블랙박스로 바꿔 미란도 그룹의 실험실의 실체를 공개하자는 것이다.
미란도 그룹은 미자도 뉴욕에 데려와 옥자와의 극적인 상봉 장면을 마케팅에 활용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동물자유연맹은 미란도 그룹의 추악한 실체를 알리고 난장판이 된다. 옥자도 다른 슈퍼 돼지처럼 도살장에서 도살당하기 직전 미자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금 돼지와 바꾸자는 협상에 성공한다. 옥자는 다시 강원도산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산다.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2006년도에 만든 ‘괴물’을 연상하게 만든다. 상상의 동물도 그렇고 한강의 다리, 서울의 거리 풍경도 그렇다. ‘괴물’에 나왔던 변희봉씨가 다시 할아버지로 나온다. 영화 ‘킹콩’에서 거대한 오랑우탄을 현대판 마케팅에 활용하기 위해 뉴욕에 데려 오는 설정과도 비슷하다. ‘킹콩’도 인간과의 따뜻한 교류를 보여줬지만, 이 영화도 미자와 옥자의 교류가 따뜻하다. 특히 이번 옥자라는 상상의 동물을 실감나게 만든 봉준호 감독의 솜씨가 볼만하다. 상상의 동물인데도 질감이 사실적이다. 이런 발전은 상상의 호랑이가 나오는 영화 ‘대호’에서 이미 봤다.
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대중은 이 말을 이 전 대통령의 육성이 아닌 한 성우를 통해 더 많이 들었다. 1964년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 등에서 이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성우 구민(92)이다. 아직도 구민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아저씨, 나 추워요.” 1964년 개봉된 영화 의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다. 이 대사의 목소리 주인공은 배우 엄앵란이 아니다. 성우 고은정(80)의 목소리다. 1950~1970년대는 화면을 먼저 촬영하고 그 화면에 따라 대사, 음악을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때 화면 연기는 배우가, 대사 연기는 성우가 담당했다. 1960년대 최고의 여자 스타, 문희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의 대사 연기는 모두 고은정이 도맡았다.
무명 신인이던 최진실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89년 삼성전자 CF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진실에 대중은 환호했다. 그런데 이 광고 목소리 연기를 한 사람은 최진실이 아닌 성우 권희덕이었다. 권희덕(60)은 유지인 임예진 등 1970~1990년대 스타들이 모델로 나선 CF의 목소리 연기를 한 유명 성우다.
라디오 시대이자 후시녹음 영화 시대였던 1950~1970년대 최고의 대중문화 스타는 성우였다. ‘얼굴 없는 배우’라 불리던 성우들은 ‘영화와 방송의 꽃’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 성우의 역사는 라디오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일본어로 방송하던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부터 한국어 방송을 시작하며 등 라디오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제작해 청취자의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성우의 어머니’로 불리 우는 복혜숙 등 성우들이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해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1954년 기독교방송, 1959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잇따라 개국하면서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1953년 성우를 최초로 채용하면서 성우라는 직종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수를 놓겠소’로 시작되는 주제가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1956년 10월~1957년 4월 방송)을 비롯해 등 라디오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 각 방송사들이 한 해 평균 150여 편의 라디오 드라마를 내보냈을 정도다. 청취자들은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펼쳐지는 다양한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들었고 성우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중 스타로 우뚝 섰다.
1963년 동아방송 공채 1기로 성우가 된 박웅(76)은 “30여 명 뽑는 성우 시험에 3500여 명이 몰렸다. 1960년대 성우의 인기는 엄청났다. 성우의 수입이 탤런트 등 다른 연예인의 수입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또한, 1950~1970년대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성우들의 활약은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영화가 성우들의 대사 연기로 완성됐다. 의 신성일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대사 연기는 성우 이창환이 한 것이다.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 연기는 고은정이, 트위스트 김이 연기한 건달 역의 목소리 연기는 오승룡(81)이 각각 했다.
고은정은 “1950~1970년대 한국영화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어 배우들이 연기한 뒤 성우들이 화면을 보고 대사를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이었다. 이 당시 신성일 씨가 연기하는 모든 영화의 배역은 성우 이창환 씨가 맡아 대사 연기를 한 것처럼 특정 배우와 특정 성우 관계가 형성됐다. 나는 문희 엄앵란 김지미 남정임 안인숙 등 여자 주연 목소리 연기를 전담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패러디되는 영화 의 안인숙이 맡은 여자 주인공, 경아의 “꼭 안아주세요”라는 대사 연기는 바로 고은정이 한 것이다.
성우들은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뿐만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맹활약했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방송된 MBC 시사고발 라디오 프로그램 은 서민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줬는데 이 프로그램을 이끈 주역이 성우 오승룡이다.
오승룡은 “은 서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해 준 프로그램으로 청취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플 수도 없었고 휴가도 갈 수 없었다. 방송사고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청취자의 열띤 반응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50~1970년대 최고의 수입과 인기를 누리며 성우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성우는 구민 고은정 장민호 신원균 정은숙 김소원 윤미림 이혜경 남성우 심영식 주상현 오승룡 오정한 천선녀 이춘사 김영옥 사미자 김용림 나문희 전원주 등이었다.
청취자들은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듣고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하거나 멋진 혹은 예쁜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에게 팬레터가 쏟아졌고 심지어 연인이 돼 달라며 방송사를 찾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미자는 “청취자들은 목소리만으로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파악했다. 목소리가 예쁘면 외모도 성격도 예쁠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소리와 다른 외모를 가진 일부 성우들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는 청취자들도 적지 않았다”며 웃었다.
1980년대 들어 TV 수상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라디오는 대중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영화가 동시녹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성우들의 인기가 급락하며 존재감도 급감했다.
1980년대 이후 성우들은 명맥을 유지하던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하면서 TV에서 방송하는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더빙,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병행했다. 이 시기 김기현, 송도순, 박일, 배한성, 양지운 등이 외화 더빙이나 라디오 연속극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 성우로 눈길을 끌었다.
배한성은 “라디오 전성시대가 가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성우의 존재감은 축소됐지만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목소리 연기 등으로 외화 더빙과 내레이션 부분에선 성우들의 역할은 커졌다”고 말했다. 또한, 권희덕을 비롯한 일부 성우들은 각종 CF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권희덕은 “목소리 출연 CF는 3000여 편에 달하고 더빙한 외화 작품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의 강희선, 의 이규화와 서혜정, 의 최덕희를 비롯해 김영선, 김승준, 정미숙, 구자형, 김서영 등이 외화와 애니메이션 더빙 등을 통해 인기 성우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성우로 활동하다 라디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영화와 텔레비전 연기자로 전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7월 끝난 tvN 드라마 에 주연으로 나선 것을 비롯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문희,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변희봉을 비롯해 정혜선, 김영옥, 남일우, 한인수, 김용림, 사미자, 전원주 등이 성우 출신 연기자들이다. 이들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1년 MBC라디오 공채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성우로 일할 때 외화 더빙을 많이 했는데 이것이 연기자로 전업하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외국 여배우의 캐릭터가 제각각이잖아요.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캐릭터를 분석할 기회를 얻었지요.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 연기할 때 큰 힘이 됐지요”라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한석규 역시 성우 출신 연기자다. 한석규를 드라마 에 처음 발탁해 연기자로 데뷔시킨 장수봉 전 MBC PD는 “한석규를 비롯한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대사 연기가 뛰어나다. 오랫동안 발성 훈련을 받아 감정의 결을 살리는 대사 연기를 잘한다”고 말했다.
방송사가 성우 공채 제도를 폐지한 2000년대 들어서도 성우들은 게임과 외화, 애니메이션 더빙과 CF, 라디오 연속극의 목소리 연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등에서 활약하며 여전히 대중화의 주역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