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산중 살림이 어언 30여 년째. 이력이 길어 쌓인 내공도 겹겹일 터다. 따라서 번듯한 집과 농장을 갖추었을 성싶지만 웬걸, 거처의 모습에 애써 다듬거나 꾸민 흔적이 거의 없다. 원래 화전민이 살았다는 집부터 옛 모습 그대로다. 1000평 규모의 농장 역시 야생 초원에 가깝다. 그렇다면 천하태평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집? 또는 못 말릴 자연주의자의 거처? 후자가 정답이다. 즉 안희상(76, 다락골 구름밭 농장)과 아내 정선희(71)는 외진 산골에서 자연과 동행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데에서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고수해왔다. 농사도 유기농보다 한층 진보적인 자연농법을 구사한다. 자연의 생태 그대로를 존중하는 천연농법으로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삶과 생각의 대부분을 자연으로 채워 만족스러운 나날을 누린다.
서울에서 살았던 안희상은 대형 건설사 직원이었다. 그는 수시로 해외 근무를 했는데 45세 때의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게 산골로 이주한 계기였다. 폐 하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산이라는 요양소에 입소했다. 무너진 건강을 산에서 회복하기 위해 귀농을 했던 것. 그리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암을 물리쳐 안정적인 건강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고, 지난 30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만약 산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안희상의 답은 이렇다.
“도시 생활을 지속했다면 일찍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복잡한 일상과 식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살 길이라고 봤는데, 그게 입증된 셈이다. 자연이 주는 산나물 중심의 음식을 먹고, 번잡한 문화생활을 배제하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면서 뇌가 편해졌는데, 이 역시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준 제철 식단의 힘도 컸다.”
집이 인상적이다. 작고 낡아 불편해 보이지만 고색창연해 정겹다. 옛날 집을 원형 그대로 두고 사는 이유가 있겠지?
“100여 년 전에 화전민이 지은 토담집이다. 요즘처럼 흙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에 지어진 황토집인데, 헐어내고 새로 짓기엔 아까웠다. 8평짜리 본채에 툇마루를 보탰을 뿐 본래의 구조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 난방은 아궁이에 군불을 때 해결한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원래 있는 조건 그대로를 수용하며 살기로 했다. 이 집에서 살았던 화전민들의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자, 도시에서 익숙해진 습관과 사고를 싹 바꾸자, 그러면 병이 낫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다.”
반듯한 냉장고가 없는 대신 작은 김치냉장고 하나만 가지고 산다지?
“최대치의 간소한 생활을 한다. 적은 소유로 적은 소비를 하기 위해서다. 쓰레기 배출에 따른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도 적은 소비는 당연한 거라 봤다. 우리는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쓴다. 세탁기 없이 사시사철 손빨래를 하며, 원초적인 형태의 생태 화장실을 집 밖에 설치해 배설물을 퇴비로 바꾼다. 농사용 장비는 기계톱이 유일하다. 호미와 괭이로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온 셈인데, 그러한 육체노동이 암을 낫게 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건전한 노동은 떳떳해서 아름답다. 그런데 부인을 너무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웃음)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산다. 다행히 그의 기질은 강인하고 투철하다. 때로 파이터로 변한다.(웃음) 한편 아내 역시 불편하고 간소한 산중 살림의 긍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매사 쾌활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산에 살면서 산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대해서도 부부가 공감대를 갖고 실천해왔다.”
야생 조수는 산골의 원주민
2월 말의 산중을 채운 공기는 차갑지만 봄기운이 이미 흥건하다. 여기저기 수선화 새잎들이 소복이 올라와 솔바람에 설레어 살랑거린다. 머잖아 온갖 봄꽃들이 다투어 우르르 피어나면 숫제 야생 화원으로 바뀔 거란다. 다종다양한 약초, 야생화, 꽃나무 등속이 어울려 꽃 정원을 연출하는 것인데, 이 가상한 꽃밭이 바로 안희상 부부의 농토이자 일터다. 고구마, 마늘,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은 물론, 갖가지 산나물이 산재한 채 마음껏 활개 치는 식의 자유로운 성장을 해 결실을 맺는다. 농약을 치거나 비닐 멀칭을 해주는 식의 요령은 전혀 동원되지 않는다. 그래 자연농법이다.
안희상은 자연의 생리와 기법을 존중하는 한편 인위와 간섭을 배제하는 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농부가 해야 할 진정한 업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농부라야 비로소 이상적인 먹거리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며, 나아가 식물들이 성황리에 펼치는 순수한 생명 이벤트를 즐겁게 관람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사가 동화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즐겁기만 하랴. 농장이 자리 잡기까지 고생도 적지 않았으리라.
“구체적 계획 없이 산에 들어온 탓에 처음엔 막막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무질서한 주거 환경에서 하나하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실은 즐거웠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는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건강 문제를 잊을 정도로.”
초보 농부로서 겪은 애로점은?
“돌이 많은 밭이라 돌을 캐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았다. 초기부터 시도한 유기농법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 자라는 건 산나물들이었다. 결국 농장의 절반을 산약초로 채웠고, 유기농법을 자연농법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해서 야생에 가까운 농원이 형성됐다. 문제는 실로 낮은 소출 수준이었다. 따라서 잠시 실망도 했지만 적은 생산일망정 자연이 베푸는 선물임을 자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소출이 적다면 소득도 적을 텐데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산에 들어올 때 가져온 자금에 여유가 있어 한동안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궁색해지더라. 해법은 소비를 줄이는 데 있었다. 도시에 사는 아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건 사실 30여 년의 산중 생활 중 유일하게 낭패스러운 대목이다. 자급자족을 추구했지만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으니까.”
근래의 기후 변동으로 농부들의 애환이 많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를 불러들이는 건 건 결국 인간이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생활습관의 변화가 대안일 테고. 농사 역시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가는 게 옳다. 독성을 품은 화학농약에 의존하는 농사는 결국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를 양산할 뿐이며, 동시에 토질을 망쳐 자연 생태를 깨트린다. 관행농법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귀농인이라면 마땅히 자연농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야생 조수에 의한 농사 피해를 호소하는 농부들도 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우리는 초기에 부엌도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천장에 걸어둔 냄비에 뱀이 들어앉아 있더라.(웃음) 이걸 어쩌나. 죽여?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면 원래 이 산골에 자리 잡고 산 건 사람보다 짐승들이 먼저였다. 야생 조수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를 내쫓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멧돼지를 죽인다. 원주민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야생 조수들이 자연 속에서 하는 선한 몫까지 고려하면 해결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이 답이라는 얘기다.”
상생의 가치는 귀하지만 자신하고도 불화하며 사는 게 사람이다. 상생을 염두에 두고 내려온 귀농인조차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고심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웃과의 갈등.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도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불합리한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태와 맞닥뜨리곤 했다. 완고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겐 사실 대책이 없다. 그런데 이건 있다. 도시 사람들의 큰 이기심에 비할 때 시골 사람들의 작고 단순한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럼에도 갈등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부족하고, 재주 없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난항은 어쩌면 순항으로 데려가는 징검돌이다. 안희상은 초기의 개척시대를 통과한 탄력으로 산중의 삶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운항, 일찌감치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불편하고 낯설고 거친 생존 조건조차 ‘자연스럽게,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야생의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그는 굳이 이를 악물고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자연의 감화력에 흡수되었고, 자연농법 삼매경을 경험했으며, 건강을 회복했고, 결핍과 불만이 없는 영일(寧日)을 누린다.
“불편한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느끼며 살았다. 어떤 논문에 이런 게 있더라. 윤택한 밭과 거친 밭에 시금치 씨앗을 나누어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해 분석한 결과 거친 환경에서 자란 시금치의 약성이 더 뛰어났다는 거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한 게 아닐까? 산속에서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안분지족(安分知足)할 경우엔 삶의 질이 높아진다.”
자연의 모든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반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속에 살면서 나는 자연에 대해 외경과 감사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어떨 때 외경의 감정이 일어나나?
“가령 밭에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작은 싹이 자라 열매를 맺을 때 경이롭다. 뇌우가 쏟아지는 밤, 마루에 앉은 나의 옷깃에 날아와 앉아 비를 피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볼 때도 환희를 느낀다. 이럴 때면 성찰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꽉 막힌 산골에서 원초적인 스타일의 삶을 구현하는 일. 적게 먹고 담백하게 사는 일. 그걸 30년째 즐겁게 지속하다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삶의 관성을 넘어선 안희상의 ‘도발’이 놀라워서.
안희상이 주는 귀농 Tip
•자연은 예술을 뛰어넘는다. 자연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귀농하는 게 현명하다. 도시에서 몸에 밴 놀이 문화를 싹 버리고 시골 생활에 입문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철저하게 결여된 사람이라면 귀농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옳다.
•도시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귀농귀촌을 하면 원주민들의 문화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재능이나 자금력보다 자연에 의지하자. 자연 생태에 관한 안목과 사랑이 생기면 도시에서보다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강도 높은 노동이 요구되는 게 농사다. 따라서 50세 이전에 귀농하는 게 좋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귀농을 삼가라.
•집을 크게 짓지 말자. 철수할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매도가 어려워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유념하자.
•몸에 좋은 먹거리를 거둘 수 있는 자연농법을 하라. 그러면 오지 산골에 살더라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자연농법을 위해서는 생태 화장실이 필수품이다. 배설물로 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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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귀농·귀촌을 꿈꾸지만 막막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특히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왔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에 정부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 귀농·귀촌 인구 증진에 힘쓰고 있다. 다만,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정부 지정 교육기관에서 관련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귀농, 귀산촌, 귀어로 세분화해서 자세히 살펴봤다.
정부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인구가 농가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이수’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농지와 농가주택 마련 방법, 작물 재배 방법, 판매와 홍보 방법 등을 배운다. 귀농·귀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귀농과 귀촌, 뭐가 달라?
귀농 농어촌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것.
귀촌 농·어업을 직업으로 삼지 않고 전원생활 등을 이유로 농어촌으로 이주하는 것.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채우기
농림축산식품부(농정원 포함), 농촌진흥청, 산림청 및 지자체가 주관 또는 위탁하는 귀농·영농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하면 된다. 단,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주관하는 농업교육포털(www.agriedu.net)에 등록된 교육 이수와 수료증만 인정받을 수 있다.
때문에 귀농·귀촌을 희망한다면 농업교육포털 가입과 이용은 필수다. 온·오프라인 교육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온라인 교육은 참여 시간의 50% 범위만 인정해주며, 최대 40시간만 인정된다는 점이다.
즉 온라인 교육으로 최대 40시간을 인정받으려면 80시간 이상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프라인 교육을 60시간 이상 들어야 100시간을 채울 수 있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각 지자체에서는 10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했는지, 농지원부·농업경영체에 등록된 주 경작자인지, 생산물에 대한 증빙자료를 갖췄는지, 경작 규모가 기준 이상인지 등의 조건을 충족한 경우 자금을 지급한다.
대표적인 혜택은 농업 창업자금과 주택 구입자금 지원이다. 농업 창업자금은 대출 한도 3억 원 이내에서, 주택 구입자금은 7500만 원 이내에서 가능하다. 대출 금리는 연 2% 고정 또는 변동금리이며, 대출 기간은 15년 만기다.
농업 창업자금은 농지 구입, 온실·하우스·저장 시설 설치 및 구입, 농기계 구입, 농식품 가공시설 설치, 축사 구입 등을 지원한다. 주택 구입자금은 주거 전용면적 150㎡ 이하 주택을 대상으로 한다.
지자체마다 귀농·귀촌지원센터, 아카데미 등이 있을 정도로 귀농과 관련된 교육 과정은 많고 다양하다. 그중에서 시니어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교육 과정을 꼽아봤다.
귀농·귀촌 맞춤형 교육
전직 창업농 교육은 40·50세대를 대상으로 하며, 농업인으로서 삶과 변화 관리, 농산물 유통 전략, 농촌에서의 가족 생활 등에 대해 배운다. 은퇴 창업농은 6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하며, 농촌에서의 보건의료, 자산관리와 재테크 등을 배울 수 있다.
농업 일자리 체험 교육
농업·농촌 이론 교육 5일, 농작업 실습 교육 5일로 구성되며, 총 80시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지자체마다 교육이 진행 중이다. 교육비는 국비 100%로 무료다.
지자체 귀농학교
봉화비나리귀농학교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다. 봉화의 주요 농산물인 사과, 고추, 수박 등에 대한 농사 기술과 현장실습 위주로 교육이 진행된다. 5박 6일 과정이며, 60시간 인정된다. 현재 8월, 9월, 10월 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창녕생태귀농학교 매년 200명의 수강생이 거쳐가는 곳이다. 8월 26일부터 10월 28일까지 9주 동안 100시간의 교육이 진행된다. 귀농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농장 견학과 체험을 할 수 있다.
임업(林業) 관련 일을 하는 귀산촌은 귀농 안에 속하고, 농업교육포털에도 교육 과정이 등록돼 있다. 다만 귀농은 농업진흥청이, 귀산촌은 산림청이 주무 관청이자 지원기관이다.
귀산촌은 행정적으로 산림기본법상 산촌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산림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산림 관련 커뮤니티 활동이나 생활·생업을 위해 산촌으로 이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전원생활, 나무·열매·버섯류·산나물류·약초류 등의 임산물 재배, 산촌 유학, 체험농장 운영, 농·임산물 유통 등의 일을 한다.
임업후계자 교육
임업후계자 교육은 예비 귀산촌인을 위한 대표적인 교육이다. 임업후계자란 임업의 계승·발전을 위해 임업을 영위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산림청 소속 기관인 산림교육원과 전문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을 수 있다.
한국임업진흥원 산림청과 함께 귀산촌 교육을 기획·운영하는 곳으로,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귀산촌 아카데미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무료 공개 강좌로 귀산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더불어 산양삼과 산나물 재배기술 과정도 진행한다.
경남귀산촌학교 퇴직 후 제2의 삶을 찾는 사람,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귀산촌 정착에 관련한 교육·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농장디자인 과정, 산림경영 과정 비대면 교육도 있으며, 6월에는 야생화 소득증대 과정 교육이 열린다.
귀어업인은 농어촌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어업인이 되기 위해 농어촌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을 의미한다.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어촌어항공단이 귀어귀촌종합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지자체마다 귀어귀촌지원센터가 있다.
어촌에서 어업, 양식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3단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먼저 이론 교육을 받고, 이어 단기 기술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업, 양식업 분야 현장견학 및 체험 위주의 단기 기술 교육으로 창업 업종을 선택하기 전 다양한 어업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그 다음에는 장기 실습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어업, 양식업 기술 등을 배우는 교육이다. 귀어학교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다.
귀어학교
이론부터 실습, 어업 소득 기반 실현을 위한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는 장기 실습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귀어학교는 경상남도 귀어학교로, 2018년부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인천시에서 8번째 귀어학교가 개교한다.
인천시 귀어학교 2023년 하반기에 문을 열 예정으로, 연간 80여 명의 수산 전문 인력을 배출할 계획이다. 어업과 양식업을 포함해 어촌 관광·서비스업 등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
어촌체험휴양마을
본격적으로 귀어업인이 되고자 마음먹기 전, 어촌체험휴양마을을 찾는다면 어촌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어촌체험휴양마을은 어업 체험을 중심으로 어촌 자연환경과 생활문화 등을 연계해 관광 기반시설을 조성한 곳이다. 현재 전국 121곳의 어촌마을이 체험휴양마을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남해 문항어촌체험마을 우럭조개잡이, 쏙잡이, 개막이 체험, 자연산 돌굴까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더불어 직접 잡은 해산물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재미를 더한다.
울산 주전어촌체험마을 육지에서 유일하게 30년 이상의 베테랑 해녀 선생님들로부터 물질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해녀 밥상 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스킨스쿠버, 투명카누도 즐길 수 있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가 더욱 심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농촌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역대 가장 높은 46.8%를 기록했다.
통계청이 12일 발표한 '2021년 농림어업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일 기준 전국 농가는 103만 1천 가구, 농가 인구는 221만 5천 명으로 집계됐다.
고령에 따른 농업 포기와 전업 등으로 전년보다 농가는 4천 가구(0.4%), 농가 인구는 9만 9천 명(4.3%) 줄었다.
농가 비율은 총가구의 4.4%로 전년 대비 0.1%포인트, 농가 인구 비율은 총인구의 4.3%로 전년 대비 0.2%포인트가 감소했다. 농가 인구 중 남자는 110만 명, 여자는 111만 5천 명으로 성비는 98.6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농가 인구 분포를 보면 60세 이상이 138만 1천 명으로 전체 농가의 62.4%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70세 이상이 전체 농가 인구의 32.5%인 72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농가 인구 3명 중 1명은 70세 이상인 셈이다. 그 뒤를 60대 66만 1천 명(29.9%), 50대 37만 3천 명(16.8%) 순으로 이었다.
70대 이상은 4만 1천 명, 60대 이상은 1만 9천 명이 각각 늘었다. 반면 50대 이하의 모든 연령에서는 인구가 줄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농가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전년 대비 4.5%포인트 증가한 46.8%로 집계됐다. 우리나라 고령 인구 비율이 17.1%인 것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높다.
시도별 농가 규모는 경북(17만 가구), 전남(14만 6천 가구), 충남(12만 가구) 순으로 많았다. 전체 농가의 58.4%는 전업농가였지만 41.6%는 겸업농가였다. 농가의 경영 형태는 논벼(37.8%), 채소·산나물(23.8%), 과수(16.6%) 순이었다.
농가의 평균 가구원은 2.1명으로 1년 전보다 0.1명 줄었다. 2인 가구가 전체의 56.8%로 가장 많았다. 1인 가구(21.1%), 3인 가구(12.5%)가 뒤를 이었다. 전년보다 1·2인 가구는 증가했지만, 3인 이상 가구는 감소했다.
농축산물 판매 금액이 1천만 원 미만인 농가는 65만 9천 가구(63.9%)였고, 1억 원 이상인 농가는 4만 가구(3.9%)로 집계됐다.
한편, 지난해 어가와 어가 인구는 각각 4만 3천 가구, 9만 4천 명이었다. 1·2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전년 대비 어가는 200가구(0.4%) 증가했지만, 어가 인구는 3천300명(3.4%) 감소했다. 어가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0.2%, 어가 인구는 총인구의 0.2%를 차지했다.
어가 인구를 연령별로 보면 60대가 3만 1천 명(32.8%)으로 가장 많았고, 70세 이상이 2만 4천 명(25.6%)으로 뒤를 이었다. 65세 이상 어가 고령 인구 비율은 40.5%로 전년 대비 4.5%포인트 올랐다.
수산물 판매 금액 1천만 원 미만인 어가는 1만 6천 200가구(37.3%)이고, 1억 원 이상은 7천 100가구(16.5%)로 파악됐다.
임업 가구와 인구는 각각 10만 4천 가구, 21만 9천 명이었다. 전년 대비 가구는 400가구(0.4%) 늘었지만, 인구는 1만 4천 명(5.9%) 감소했다. 임가 비율은 총가구의 0.4%, 임가 인구 비율은 총인구의 0.4%였다.
임가 인구를 연령별로 보면 60대가 7만 2천 명(33.0%)으로 가장 많았고, 70세 이상이 6만 5천 명(29.5%), 50대 4만 4천 명(20.1%)순이었다.
한결 가치 있는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의 귀촌을 부추겼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인생을 한번 획기적으로 바꿔보자는 욕심으로 부푼 건 아니었다. ‘느림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며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즐기자는 쪽에 무게를 두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귀촌을 통해 가급적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똑떨어지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다. 그 용무란 서점 일이었다.
시골에서 서점을?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새들이야 지천이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라야 마을 원주민 몇몇에 불과한 후미진 산골에서? 이건 무인도에서 혼자 ‘전국노래자랑’을 공연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기획일 수 있다.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일처럼 요상한 이벤트이기도. 소비자들의 호응이 있고서야 생존이 가능한 게 서점 사업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김미자(59, ‘그림책 꽃밭’ 사장)에겐 남다른 속대중이 있었다. 믿는 구석이 다 있었던 거다. 그 믿음이란 오직 자신의 경험과 능력에 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가늠하는 내공까지는 아닐망정, 적어도 서점에 관한 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바탕 제대로 붙어볼만한 게임으로 여겼던 것 같다. 미리 말하자면 그의 산골 서점은 놀랍게도 탕탕 잘나간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아동 그림책 관련 직업 활동을 했었다. 공공도서관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했으니까. 그림책 커뮤니티를 만들어 동네 엄마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지속했으며, 그림책 카페를 7년간 운영한 경험도 있다. 머릿속에는 항상 시골 생각이 들어 있었다.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그림책과 시골살이를 아우를 수 있는 삶을 늘 꿈꾸었던 것이지.”
김미자가 남편과 함께 이 시골로 내려온 건 2017년.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편의 퇴직금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고서였다. 흔히들 귀촌지를 결정하느라 진을 뺀다. 첫 단추부터 똘똘하게 끼우기 위해 해부학 교실의 연구원처럼 면밀히 분석하고 평가해 장소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지루한 물색의 과정을 싹둑 잘라냈다. 숲이 있는 시골이면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그리 여겼다. 경륜과 자신감을 완비했으니 어디에 갖다놓아도 승산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리서치를 통해 몇 군데 시골 서점의 순항 분위기를 미리 눈치채기도 했다. 그는 지인이 소개한 경매 토지를 덜커덕 사들여 집을 지었다. 서점과 살림채, 그리고 북스테이 공간을 마련해 영업을 개시한 게 만 3년 전.
“처음 한동안은 손님이 오지 않았다. 날마다 매상과 마진을 계산하며 고민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덩달아 매출이 늘더라. 수익의 절반은 책 판매에서, 나머지 절반은 북스테이에서 발생한다. 이젠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없는 날은 없다. 덕분에 부부 둘이 먹고사는 데엔 아무런 불편이 없지. 이쯤이면 노후 생계 대책으로 충분하기에 안도감과 만족을 느낀다.”
단기간에 자리 잡다니. 이 서점은 어떤 힘과 매력을 지녔기에?
“가급적 질적 수준을 높게! 풍경은 예쁘게! 그런 모토를 정하고 충실하게 구현한 결과물이다. 예전에 일본의 숲속 도서관들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감흥이 컸다. 모델로 삼을 만했지. 아무리 외진 시골이라도 구색과 내용이 충실하면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걸 확인했던 셈이다.”
도시에도 특별히 공들인 서점들이 있지만 흔히 불황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다. 이곳의 자연경관이 유력한 재료라 봐야 할까?
“아동 그림책에 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자연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시골 서점은 그 자연과 생명에 관한 아이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환경 여건으로 한몫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림책에 나오는 자연을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연과 함께 펄펄 뛰노는 아이들과 얘기하고 싶었다.”
숙박을 하거나 책을 구입하는 고객층은 어떤 이들인가?
“주 고객은 30~40대 부모와 아이들이다. 그림책 관련 각종 자격증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학습 차원에서 찾아오고, 시골 서점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방문한다.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선생님 손에 이끌려 찾아오는 당진시 일대의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아동들이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다락을 구비한 책방 공간은 동화처럼 아기자기하되 품격을 돋워 꾸몄다. 아이들의 구미에 어울리게. 엄마들의 호감을 살 수 있게. 그림책 일색의 도서들은 모두 5000여 권.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온 2000여 권과 새로 구입한 3000여 권을 합쳐 공간을 채웠다.
그림책을 좋아하던가? 게임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아닌가?
“아동들은 순식간에 알아차린다. 엄마가 왜 나를 책방에 데려왔나를. 그러고서 하는 말이 이렇다. 나, 책 안 봐! 오나가나 아이들은 휴대폰 게임에 몰입하는 거다.”
그럴 때면 어떤 처방을 사용하지?
“책이 싫으면 고양이하고 놀아! 마당에 나가 뛰어놀아! 그렇게 말해준다. 그러나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다.”
엄마들은 책이 싫다는 아이들을 왜 굳이 이곳에 데려올까? 책을 강요하면 자칫 책을 더 징그럽게 여길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든 책을 접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겠나? 그러나 엄마들의 방법엔 문제가 있다. 책을 학습이나 훈육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나는 늘 한다. 연령에 맞는 책을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나직이 읽어주라고 권한다. 아이들에겐 가르침보다 위로가 필요하니까.”
마을 풍경을 볼까? 딱히 빼어나거나 미묘한 설렘을 자아내는 풍치는 아니다. 변방의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농촌 마을이다. 야트막한 야산들이 강강술래를 하듯이 1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을 빙빙 감싸고돌아 푸근하다. 김미자는 이 평온한 풍경에 안심을 느끼는 것 같다. 쉽게 오를 수 있는 산과 숲이 있으니 불만이 있을 때면 애먼 남편에게 툴툴거리기보다 나무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해소하겠지. 그에겐 자연과 사계의 순환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사실 김미자의 귀촌은 자연에 가까이 가자는 목적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그게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연이 좋다지만 날마다 산을 바라보다 보면 권태감이 밀려들기 십상이다. 거칠지만 생동하는 도시의 풍속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긴 어렵다.
“권태를 느낄 겨를 없이 분주한 게 시골 생활이다. 하지만 문화적 충격과 자극이 하나도 없다는 건 큰 단점이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나 전시를 볼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아쉽다. 주변에 예술가라도 하나 산다면 해갈이 될 테지만.”
마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 시골에도 지혜로운 이들이 있기 마련인데.
“시골 할머니들의 평온하고 깨끗한 삶의 태도에 느끼는 게 많다. 대체로 할머니들은 인간관계에서보다 땅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생을 사는 것 같더라. 그들은 아무리 노쇠했더라도 호미를 놓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호미로 땅을 긁는다.”
도시의 노인들에게선 보기 어려운 야생의 에너지. 시골 노인들에겐 그런 육화된 근성이 있다.
“맞다. 처신에 깨끗하고 이치에 밝은 할머니들과 사귈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이 주는 값진 행복의 하나다.”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은 놀이로
시골이라고 눈 밝고 경우에 환한 이들이 흔할 리 없다. 도시든 시골이든 ‘삐딱이’ 그룹이 있어 활약을 하는 게 아닌가. 김미자도 초기 한동안 유별난 이웃에게 좀 시달렸지만 적절히 타협하며 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포용했다. 보다 덜 소중한 것에 보다 더 소중한 걸 훼손하고 싶진 않았던 것일 텐데, 그에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소박한 삶의 지속이다. 물구나무 선 세상을 뒤집을 힘이야 없지만, 최소한 자신만큼은 악다구니와 돈과 허영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귀촌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는 예상은 딱 적중하진 않았다. 그러나 거둔 성과와 만족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뭐냐면,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 그리고 헨리 니어링 부부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을 닮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안 되더라. 우선은 돈벌이를 하는 내가 돈에서 해방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도시 생활과 자본에 길들여진 남편과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귀촌으로 부부가 함께 도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만도 어디인가?
“나는 오늘도 들에서 냉이를 캐왔다. 시골에 살며 산나물 채취로 식사를 한다는 것, 육식을 덜 하고, 덜 소비하고, 덜 욕심부린다는 것, 이건 뿌듯한 일이다.”
한때 암과 싸웠다지? 고통이 극심할 때면 어떤 생각을 하나?
“암! 무서웠다. 자주 권정생 선생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지극히 병약했지만 엄격한 절제로 삶을 완성한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성찰의 습관도 그에게서 얻어왔다.”
심지어 가뭄에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도 가여워 눈물을 흘렸던 권정생. 그는 성자가 아니었을까.
“평생 병고에 시달렸지만 강하고 꼿꼿한 분이었다. 한번은 외투를 사다드렸더니 고사하더라. 이미 있는 외투 하나로 충분하다며. 스콧 니어링도 소유에 무심해 옷 한 벌로 살았다. 그러니 어떻게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무욕으로 살았던 고수들을 무슨 수로 따를까.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나?
“돈은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을 놀이로 즐기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다르다. 일에 치여 산다. 속엔 답답한 게 많지만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겉으로는 웃는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갖고 산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나를 맞춰 살고 있으니 크게 어긋난 건 아니다.”
인생을 깊이 읽고 있다는 안도감. ‘나’를 진정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속에 산다는 확신. 귀촌의 나날을 선용하고 있다는 자부심. 속세에서 흔히 맛보기 어려운 감흥들로 김미자는 기쁜 것이다. 표정은 근엄하지만, 내부는 햇살로 밝아 바야흐로 인생의 봄날을 다시 만난 셈?
김미자 씨가 주는 귀농 Tip
시골에서 작은 서점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지만 함부로 덤벼들 일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성향 하나만 믿고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좋은 책을 고르는 능력, 인문학적 소양과 실력, 그리고 예술적 눈썰미를 미리 갖추는 게 중요하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기 전에 까먹어도 무방할 정도의 소자본으로 도시에 작은 북카페를 차려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 장소 선정도 매우 중요하다. 가급적 자연환경이 뛰어난 곳을 찾자.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나 명소 인근도 잘만 하면 유망하다.
적막한 산촌이다. 길섶은 잔설로 하얗다. 해발 50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이곳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친다. 좀 전에 빠져나온 문경의 도심이 현세의 바깥처럼 멀어진다. 세사의 아귀다툼도, 부질없는 불화도 틈입할 수 없는 오지이니 소란과 소동을 싫어하는 이에겐 낙원? 이창순(67, 흙집펜션 산모롱이 대표)에겐 그랬다. 조여진 마음의 현(絃)을 탁 풀어놓고 느린 선율처럼 여생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적지라 봤다.
“귀촌지를 물색하다가 이 마을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야, 여기다! 더 볼 것도 없다! 내심 환호성을 질렀지.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셈이다.(웃음)”
건설회사 토목 담당 직원이었던 남편 이경구(69)를 따라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던 이창순에게 귀촌은 오래 묵은 숙원이었단다. 나, 언젠가 시골에서 살리라. 새들이 지저귀는 뒷산을 산책하고,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음악을 즐기고, 밤엔 별처럼 떠오르는 상념을 건져 올려 새끼줄을 꼬듯 긴 글을 쓰며, 나 마침내 산골 자연의 일원으로 돌아가리라. 그런 염원이 샘물처럼 퐁퐁 솟았던 모양이다. 진심으로 간절하면 뛰어들게 마련이다. 그는 상주시에 있었던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과녁을 향해 직진하는 화살과도 같은 쾌속질주로 귀촌을 결행했다.
이창순이 이 산촌에 옴짝달싹 못 하게 꽂힌 건 수려한 산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착한 가격으로 나온 너와 지붕 황토집이 그를 행운처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준공검사도 마치지 않은 신축 흙집의 평화롭고 참신한 자태에 억누르기 어려운 감흥을 받았던 것. 결함이나 난관이 없는 귀촌이었던 셈이다. 매사 꼼꼼하면서 과묵한 성정의 소유자라는 남편 역시 아내의 주동에 선선히 따랐단다. 결국 이창순은 이상적인 귀촌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며, 이제 낭만과 만족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때로 따분하면 변덕을 부리는 법. 인간의 반응이 어떠한지 조사하기 위해 심술쟁이가 된다. 뜻하지 않게 남편이 너무 이른 실직을 했다는 게 아닌가.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우리가 귀촌한 게 15년 전이다. 당시 남편은 겨우 50대 초반이었다. 한창 일할 때라 상주시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 주말부부로 살기로 하고 귀촌을 했던 거다. 그런데 귀촌 1년 만에 남편이 실직했다. 좋았던 시절이 단 1년 만에 끝날 줄을 어떻게 알았겠나?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생계가 순식간에 막막해지더라고.(웃음)”
미리 모아둔 생활자금이 없었나?
“가진 재산 전부를 긁어모아 540평 대지에 지은 황토집을 샀다. 남편의 수입으로 살면서 은퇴 이후를 대비할 경제활동을 천천히 모색하면 된다고 구상했었는데, 돌연한 실직으로 비상 상황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기죽어 지낼 일도 아니지. 뭔가 돈벌이를 찾아내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외떨어진 적막강산 시골에서 호구책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결혼 이후 난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식 농사가 최고려니 하고 집 안에서만 살았으니까. 이런 내가 시골에서 가능한 돈벌이가 무엇일까? 궁리 끝에 답을 찾았다. 전에 곶감 명산지인 상주시에 살며 감 깎기 알바를 했던 경험을 살려 곶감을 만들어 팔면 되겠다는 착상이었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론이었나?
“아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역할 바꾸기를 하기로 했다. 남편에게 기대나 원망을 가질 거 없다, 이제부터 돈은 내가 벌겠다! 이런 결심을 한 뒤 내가 찾아낸 아이디어였다.”
수고한 당신, 이제는 쉬라? 그 진취적인 발상에 부군의 반응은 어땠나?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부러워할 제안인데.(웃음)
“별 뚜렷한 반응이 없었다.(웃음) 우리 세대 남성들이 흔히 그렇듯, 남편 역시 지독한 가부장적 위신을 중심에 놓고 살았다. 그게 하루아침에 변하겠나? 그러나 시골에서 15년을 살면서 긍정적으로 변하더라. 이건 귀촌으로 얻은 소중한 선물의 하나다.”
과거에 견줄 바 없이 원만한 부부 관계를 누린다는 얘기다. 도시에서와 달리 부부가 하루 24시간을 거의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게 시골 생활이다. 이는 금슬을 북돋울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정반대로 상대의 단점을 새삼 적나라하게 감상하고 괴로워 악몽을 꾼 사람처럼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이창순은 후자의 늪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거다. 스스로 먼저 변함으로써 남편의 변화까지 유도하고자 했다. 이 웅장한 의도가 귀촌의 한 가지 목표였는데 결국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발효곶감’을 개발해
곶감 사업은 어땠을까? 우아한 전원생활을 밑그림으로 삼은 그의 귀촌은 곶감 생산에 뛰어들면서 돌연 귀농으로 선회했다. 감나무 과수원에서 붉게 영근 감을 사들여 곶감으로 가공 판매해 수익을 거두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농사치고 만만한 게 있던가. 시행착오가 많았다. 강인한 체질과 바지런한 기질로 안팎을 이룬 그였지만 힘에 부쳐 고꾸라질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허! 그거 집어치우라니까!” 듣느니 매양 남편의 퉁바리였다. 그러나 그는 귀를 틀어막고 탕탕 행진했다. 남편의 핀잔을 차라리 응원의 함성으로 받아넘겼다.
“나에겐 장점이 하나 있다. 뭐 하나에 몰입하면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른다. 일단 곶감 농사에 뛰어들었으면 10년은 맞붙어봐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덕분에 이젠 알아주는 이가 많은 곶감 생산 농가로 도약했다. 그러기까지 시련이 숱했지만.”
어떤 시련이었나?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첫해엔 초보자로서는 과도한 물량인 감 4만 개를 사다가 곶감을 만들었다. 근데 별로 판 게 없었다. 초기 한동안의 연매출이 불과 기백만 원에 불과했다. 판로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이상 기온으로 5만 개의 곶감이 상해 모조리 폐기한 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SNS 마케팅을 적극 구사했다. 그보다 유력한 건 재래식 발효곶감을 개발한 데에 있다. 곶감 농가들이 다들 유황 훈증을 해 상품을 만든다. 유황을 써 주황빛을 내고 곰팡이도 잡는 것인데, 자칫 과도하면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유황 훈증이 위험하다 판단한 나는 자연 건조 방식을 활용했다. 유해균 제거를 위해 오미자액과 식초를 감 표면에 도포했고. 이렇게 해서 시장에 내놓은 게 ‘이창순 발효곶감’이다. 이건 차별화된 고품질 곶감이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 소비자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곶감을 전공으로 삼아 오랫동안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좋은 학점을 받았다. 이창순의 종목은 곶감에 그치지 않는다. 투 트랙 전략으로 귀농 열차를 가동해 달린다. 민박을 병행하고 있으니까. 민박 영업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손님이 넘쳐 방이 부족했던 이웃의 민박집에서 이창순의 방 하나를 빌려 쓴 게 동기였다. 옳다구나, 이제 민박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황토집은 물론 주변의 순수한 자연환경이 민박의 최적 조건에 해당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민박 사업에 시동을 걸었던 거다.
“남편을 설득해 집을 증축했다. 토목 전문가인 남편이 직접 황토방 세 칸을 지었다. 이름을 지어 붙이고 블로그에 스토리를 올리는 것으로 민박을 시작했지.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즐거움에 힘든 줄 모르고 땀을 쏟았다. 당장의 성과가 어떻게 나오든 10년은 밀고 가야겠다는 각오로.”
펜션이나 민박집의 경쟁이 치열하다. 업체들의 운영 실정은 어떻다고 보나?
“내가 한때 문경시 민박협회 대표를 맡았는데, 다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잘되는 곳은 대략 10%에 불과할 정도지. 우리 집처럼 잘되는 곳은 드물고.”
인터뷰 중에도 예약 전화가 걸려오고, 투숙객들이 들이닥친다. 겨울철 비수기임에도 씽씽하게 돌아가는 것. 이 민박집은 어떤 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일까?
“‘조용하게 제대로 쉬어가는 민박집’이라는 테마를 정해 퀄리티를 높였다. 가령 방에 TV를 들여놓지 않았는데, 고요한 산골에서 가족들이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즐기길 바라서다. 원하는 이들에겐 산나물 일색의 자연 밥상을 조식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요소들에 만족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자리가 잡혔다.”
성장 과정은 순조로웠나?
“곶감 사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엔 어려웠다. 집어치우라는 남편의 볼멘소리를 번번이 들었거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블로그 마케팅이다. 블로그 관리에 잠시만 소홀해도 손님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고서 운영에 충실을 기했다. 그게 성장의 토대였다.”
성공한 귀농 사례로 이름났더라. 소득은 얼마나 올리지?
“곶감과 민박을 합친 작년 매출이 1억 1000만 원이다. 강소농 대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연매출 목표치 3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달려가야 한다. 요즘 내가 생각한다. 아하, 나도 부자가 될 수 있겠구나!(웃음) 얼마든지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는 거다. 귀농으로 나를 재발견한 셈이지. 사업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는 자신에게 찬사를 바친다. 어라, 내 안에 사업 기질이 있었네? 긴 잠에서 퍼뜩 깨어난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자신이 거둔 성과를 돌아보며 남모를 도도한 성취감을 느낀다. 밝은 미래에 관한 비전으로 설렌다. 한없이 수동적으로 소심하게 살았던 과거의 이창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없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장부 이창순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삶은 상처의 전시장에 가까웠던가? 그는 여성이자 아내로서 괴롭게 감내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일상의 구속과 아픔을 이 산촌에서 글로 써 청산한 걸 귀농이 준 최상의 선물로 여긴다. 그가 쓴 글 더미들은 책으로 출간됐다.
이창순 씨가 주는 귀농 Tip
•반드시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부부 협업이 아니고선 난관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귀농엔 강인한 체력도 필수다. 나만의 건강법을 고안해 일상적으로 실천하자.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귀농은 위험하다. 자칫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 있어서다.
•민박을 할 경우 무엇보다 입지 여건부터 따져야 한다. 맑은 계곡을 낀 곳이라면 최적지다. 청결한 침구, 따뜻한 사교, 고객 불편 사항의 신속한 처리 등도 관건이다.
•SNS 마케팅을 구사하라. 판로 확보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귀농 생활을 근사한 쪽으로 끌어가기 쉽지 않다. 물이야 고수라서 거침없이 순행하지만, 그래 물을 스승으로 삼아보지만, 정작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르기 십상인 게 귀농이다.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고, 예상보다 더 까다롭다. 기대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계획대로 수익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폭풍 속의 질주다. 광주광역시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여장부’로 살았던 박선주(50, ‘들꽃다물농장’ 대표)의 귀농 경력은 올해로 6년 차. 그는 비바람 속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가 믿은 건 자신의 야무진 근성 하나였으며, 그걸 아낌없이 꺼내 썼던 것 같다. 덕분에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산을 무척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산에서 살기를 꿈꾼다. 박선주가 그랬다. 산 아니고 다른 데서 살까 보냐! 동갑내기 남편 고광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촌 귀농을 염두에 두고 살던 중에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부부의 건강에 상당히 심각한 이상이 생겼던 거다. 옳다구나! 이제 지리산으로 가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귀농에 시동을 걸었고, 지체 없이 일을 서둘러 드디어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산자락에 살게 됐다.
“지리산 근처에 경치 좋은 터를 잡고 살며 부부의 건강을 되살리고 싶었다. 지리산을 수시로 오르내리고, 산나물들을 가꿔 먹고, 정직한 노동으로 땀 흘리고, 그러면 까짓것 뭐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귀농을 하고 보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 펑펑 눈물을 쏟은 날이 많았다. 어라, 이게 왜 이런 거야? 이러자고 내가 귀농했나?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귀농을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리산은 자주 올랐고?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이지만 일에 치어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2019년 내 생일날 천왕봉을 한 번 올랐을 뿐이니까.(웃음)”
박선주는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농장으로 가꾸었다. 2만 6000평에 달하는 너른 규모다. 허리 휘어질 신역이 실로 자심할 걸 짐작할 만하다.
건강은 좋아졌나? 때로 위중한 사람도 살리는 게 산인데.
“좋아지는 것 같더니만 더 나빠지더라고.(웃음) 남편은 허리디스크에 시달렸고,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게 다 스트레스 탓인 것 같다. 농사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몸이 아프더라도 작물이 성장하는 걸 바라볼 때면 행복하니까. 문제는 역시 스트레스의 강도다. 도시에서보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욕심을 줄이면 스트레스 관리가 좀 쉬워진다고 한다. 과중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과욕? 외부의 횡포?
“스트레스 유발인자가 한둘이 아니다. 난 욕심 많은 여자는 아니다. 기질적으로 어지간한 상처엔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민과 갈등하면서 오는 상처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더라. 예를 하나 들어볼까? 귀농 초기에 지방신문 기자의 고발로 곤욕을 치렀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훼손했다는 죄목이었다. 이 가당찮은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상처가 컸다. 무섭기도 했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지역 일각의 풍토를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지역에 귀농인이 등장하면 주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를 바라보듯 주시하기 마련이다. 이 무대에서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일단 자세를 낮추는 게 현명하다고들 한다.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돌아오는 대가는 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귀농 초기부터 친목과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갖가지 단체에서 열심히 뛰었다. 리더로도 활동했다. 지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에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탱크처럼 과감하게 밀고 나가다
박선주 부부는 광주에서 그들의 전공인 기계설비업을 지속해 기반을 잡았다. 남편에 이어 그 역시 ‘기계가공 기능장’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여성 3호’ 기능장을 받았다. 아마도 뭐 하나에 꽂히면 들입다 파고들어 끝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일 게다. 두둑한 배짱을 장기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산을 정리해 만든 13억 원쯤의 자금을 임야 구입과 토목공사에 썼다. 그리고 ‘탱크처럼 매사 과감하게’ 밀고 나갔단다. 그 저돌적인 행진으로 ‘성공한 강소농’이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원주민과의 관계에선 한숨이 폭폭 터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지경으로 겪은 애환이 많았다. 세태란 원래 어딜 가나 사특한 것. 저기는 안 그런데 여기만 그럴 리야 있겠나? 저기는 낙원이고 여기는 지옥일 리 있겠나? 그저 내가 처신하기 나름이거니, 그리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박선주가 귀농으로 경험한 세태는 얄궂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제2의 삶을 위해 도시에서 찌들었던 마음을 미리 내려놓고 온다. 대부분 순수한 마음으로 농촌의 정과 인심에 녹아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지역 현실은 차가웠다. 거의 모든 게 토박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더라.”
토박이 그룹이 먹이사슬의 상위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은연중에 발동하는 텃세. 이건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 흔히 고착된 폐습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한답시고 단체에 슬쩍 발을 담근 채 영악하게 혜택만 찾아 누린다. 이기적이며 순수하지 않다. 귀농인에겐 좋은 정보나 마땅한 권한조차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원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결론이 그렇게 나더라고.”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토박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이들도 많으니까. 그들의 우정에 힘을 얻으니까. 그러나 별수 없다. 발을 빼는 수밖에. 이젠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건 귀농하려는 이들이 참고하길 바라서다. 성급하게 귀농지를 정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 거다. 지역의 인심과 풍토부터 미리 파악하는 게 그 무엇보다 앞서 중요하다.”
부부가 부업에 나서기도
겨울바람이 맵차다.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 잠들어 고즈넉한 나무들. 외진 산기슭의 외딴 거처에 감도는 적막감. 농장의 겨울 풍경은 잠잠해 고독해 보인다. 그러나 수려한 산간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낸 길에선 과도한 인위가 느껴지지만 생산의 기지로 변환한 노고는 더 큰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 산에 사는 텃새들은 알까? 박선주 부부가 야산 개간에 과연 몇 톤 분량의 비지땀을 쏟았는지.
산에 심은 주 작목은 호두나무다. 어린 것들을 심었으니 여러 해가 더 흘러야 수확을 볼 수 있다. 박선주는 당장 생산이 가능한 작목들도 재배했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따위를.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용케도 잘 팔려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촉매가 됐다. 현재까지 각별히 공을 들이는 건 비타민 C 함량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블랙커런트. 즙, 잼, 곤약젤리 등으로 가공해 유통한다. 이 농장의 모든 작물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된다. 해섭(HACCP,식품위생안전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경험을 살리고 식견을 돋워 일궈낸 성과다. 농업 공부도 그 기반이 됐다.
“귀농 이후 건축법이나 산지관리법 등을 배워 숙지했다. 전국 곳곳의 수많은 농업 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이론과 기술도 습득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무상 교육의 경우 대형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결 실속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익 상황은 어떤가?
“2018년 총매출은 2400만 원이었다. 2019년엔 6800만 원, 2020년엔 9800만 원이었고, 2021년엔 1억 원을 넘어섰다. 순수익은 매출의 60% 정도다. 연도별 증가율로 보면 고속 성장이다. 그러나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한참 미달한 상태다. 워낙 많은 자금을 초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지속적인 재투자가 필연이라 버겁다. 그나마 좀 안도하는 건, 처음엔 지니고 온 자금을 털어 투자했지만 지금은 소액이나마 돈을 벌어 투입한다는 점이다.”
귀농인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농사로 먹고살기 쉽지 않다는 거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먹고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물정 모르고 덤볐다가는 파탄 나기 딱 좋은 게 농사다. 문제는 판로다. 우리는 공격적인 SNS 마케팅을 구사해 그나마 수입을 거둔다. 그러나 농사일에 정신없이 바빠 SNS에 충실을 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열악해 때로 눈물 나는 것이지.(웃음)”
어떤 방법으로 현실을 타개하지? 무슨 수가 있기는 있나? 귀농의 명암이야 이미 또렷이 인식했을 텐데.
“멀리 보고 긴 호흡을 하며 달려간다. 미래적 비전은 사회적 농업이나 치유 농업에 두고 있다. 당장 급박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농외소득을 벌어들인다. 우리 부부가 농사만 짓는 건 아니라는 얘기지.”
농사 외에 어떤 일을 하지?
“내가 알바를 뛰곤 했다. 광주시에 가서 전공인 기계설비 분야의 수업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식으로. 남편은 더 많은 일을 한다. 오늘도 그는 인근 양계장에서 병아리 입출 일을 도와주고 일당을 받아왔다. 이런 식의 부업으로 부부가 매월 벌어들이는 수입이 200만 원 정도다. 농업소득에만 의존하는 귀농은 낡은 방식이다.”
귀농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각도로 모색하며 멀리 넓게 보라! 박선주가 털어놓는 언설의 행간에 비친 메시지가 그렇다. 이런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귀농을 한다면? 답은 이렇다.
“돈 들이지 않고 귀농 생활을 시작하겠다. 300평 정도의 농토를 임대해 농막에 살며 농사 경험부터 쌓을 것이다. 농외소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필수고. 자금을 왕창 쏟아붓는 귀농은 미련한 귀농이다.”
박선주 씨가 주는 귀농 Tip
•승률 높은 농업을 원하면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자. 판로 확보가 용이하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유리하다.
•대규모 농업도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 지역 특산물을 규모화할 경우엔 승률이 더 높아진다.
•농촌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은 깨끗이 버려라.
•농업정책자금을 함부로 받지 말자. 자립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지원금 운용은 빚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농사만 믿지 말고 농외소득 획득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하자. 찾으면 일은 얼마든지 있다.
산촌 체험의 범위는 넓지 않고 의외로 단순하다.
① 임산물 채취 및 요리 : 알밤 줍기, 두릅 따기, 산양삼·버섯·산나물 캐기
② 숲길 탐방 : 숲 해설 및 삼림욕, 숲 놀이터, 숲속 음악회
③ 나무공예 : 목공예품 제작, 나뭇잎 조각 및 프린팅
이 중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산촌 체험은 숲길 탐방이다. 숲길 탐방 중 할 수 있는 체험은 딱 두 가지다. 걷기와 머물기. 세상에 이렇게 쉬운 체험은 없다. 이 중 숲에 그냥 머무는 것을 최근의 신조어로 ‘숲멍’이라고 한다. ‘숲멍’은 사람이 휴양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차원 높은 힐링이다. ‘숲멍’의 명소를 몇 군데 소개한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숲멍’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전나무숲길을 추천하겠다.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 경기도 포천의 광릉수목원, 전라북도 부안의 내소사를 흔히들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길이라고 부른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수도권에 위치한 광릉수목원 전나무숲이다. 500년 넘게 왕실의 능원으로 관리돼온 덕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규모가 가장 크다.
월정사 전나무숲은 천천히 30분 걷기 코스로서 규모도 적당하고 옆으로 오대천의 맑은 물을 끼고 있어 풍광 또한 다채롭다.
내소사 전나무숲은 이들 중 규모는 제일 작지만, 차에서 내려 내소사로 향하는 진입로를 겸하고 있어서 동선 손실이 없는 가장 효율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전나무, 소나무, 편백나무숲길 등 다양
숲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것을 삼림욕이라 하여 목욕에 비유한 것은 나무가 사람 몸에 좋은 피톤치드를 내뿜기 때문이다. 피톤치드를 마시거나 피부로 접하면 살균 작용을 통해 장과 심폐 기능이 좋아지고 스트레스 또한 해소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좋은 피톤치드의 뜻풀이는 의외로 살벌하다. 피톤(phyton)은 식물체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치드(cide)는 죽인다는 뜻을 지닌 접미사다. 따라서 나무가 사람 좋으라고 피톤치드를 뿜어댄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곰팡이 등 병원균이나 해충 따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독성 물질이 마침 사람에게 약이 됐을 뿐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우리는 나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산림이 체험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피톤치드만이 아니다. 알밤, 두릅, 산양삼, 버섯, 산나물 등 다양한 임산물을 얻어갈 수 있다. 물론 임산물을 얻어가는 체험에는 제약이 많이 따른다. 우선 산림보호법에 따라 산나물을 포함한 임산물 채취에는 법적 제재가 따른다. 또한 대개의 유실수는 주인이 따로 있는 사유물이므로 함부로 채취했다가는 절도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한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산촌 체험이란 것이 일정 금액을 내고 제한된 시간 동안 알밤 줍기, 두릅 따기, 고구마 캐기를 해보는 정도에 그친다.
숲길 탐방과 임산물 채취 외에 다른 한 가지의 산촌 체험은 나무공예다. 나무를 재료로 공예품을 깎거나 조립해보고, 나뭇잎 등 부산물을 활용하여 조각을 하거나 프린팅을 해보는 체험이다. 주로 유치원과 초등생을 위한 체험일 것으로 지레 한정짓기 쉽지만 나뭇잎 프린팅은 의외로 성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으며, 특히 나뭇잎에 음각으로 그림을 새겨 넣는 나뭇잎조각은 최종 성과물이 높은 가격에 팔려나가는 등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국가 자산 활용 측면의 산촌 체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산촌에서 할 수 있는 체험이라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며, 관점에 따라서는 농촌 체험과 구분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산촌에 대한 관심의 문제다. 우리나라 국토의 70%가 산지인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국민 상식이다. 국토의 70%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시각을 달리해서 바라보면 국가 자산에 대한 방치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국민들에게 치유와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숨겨진 자원으로서 산촌을 바라보며 산촌 주변 관광 자원을 매력 있는 체험 콘텐츠로 발굴해야 한다. 그 시작은 산촌 체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될 것이다. 산촌 및 산촌 체험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면 산림청과 임업진흥원 홈페이지를 적극 활용하길 권한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귀에 익숙한 노랫말에 나오는 산 너머 남촌은 산촌일까?
산촌일 가능성이 높지만 산촌이 아닐 수도 있다. 산자락 마을일지라도 개간을 통해 넓은 경지를 품고 있다면 산촌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살기 좋아져 인구가 많아진다면 이때도 산촌은 아니다. 이런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산촌의 구체적인 법적 정의가 대통령령(산림기본법 시행령 제2조)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제1호. 행정구역면적에 대한 산림면적의 비율이 70% 이상일 것
제2호. 인구밀도가 전국 읍·면의 평균 이하일 것
제3호. 행정구역면적에 대한 경지면적의 비율이 전국 읍·면의 평균 이하일 것
우리가 정서적으로 인식하는 노랫말이나 서정시 속의 산촌과 산림기본법에서 정하는 법적인 산촌은 이렇게 다르다. 지역 사례를 통해 산촌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가지 법적 조건 충족돼야 산촌
인제, 양구, 화천은 강원도 북부 내륙에 자리한 산골 중의 산골이지만 이곳에도 산촌이 아닌 곳이 있다. 펀치볼로 유명한 양구군 해안면은 면 전체가 너른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산림면적 비율이 70%에 미치지 못한다. 3개 군의 나머지 14개 읍면은 모두 산촌이다.
김제는 경지면적 비율, 즉 농사짓는 땅이 많기 때문에 산촌이 아닌 농촌이다. 전북 김제시의 1읍·14면·4동 중 산촌은 금산면 한 곳이다. 금산면은 모악산을 포함하고 있어서 예외적으로 산지 비율이 높다.
그럼 섬 지역도 조건만 충족된다면 산촌일까?
물론 그렇다. 홍어로 유명한 흑산도와 주변 부속도서를 묶은 행정명칭이 전남 신안군 흑산면인데, 섬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데다 경지는 적고 인구밀도도 낮아 산촌에 해당한다.
신안군 흑산면뿐 아니라 영광, 진도, 완도, 고흥, 여수, 남해, 거제, 통영 등에는 이처럼 바다에 뜬 산촌이 흔하다. 다도해를 품고 있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 해당하는 얘기다.
정리하자면 오지가 곧 산촌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섬도 산촌이다.
오지가 곧 산촌이 아닌 경우도
통상적인 인식과 실제가 다른 것은 산촌의 정의뿐만이 아니다. 산촌 체험의 범위 또한 모호한 것은 매한가지다.
산촌에서 할 수 있는 체험이란 어떤 것이며, 이런 체험을 통해 방문객과 산촌민은 각각 어떤 이득을 얻게 될까?
우선 산촌 체험의 대강을 살펴보자.
① 임산물 채취 및 요리 : 알밤 줍기, 두릅 따기, 산양삼·버섯·산나물 캐기
② 숲길 탐방 : 숲 해설 및 삼림욕, 숲 놀이터, 숲속 음악회
③ 나무공예 : 목공예품 제작, 나뭇잎 조각 및 프린팅
이들 체험의 공통 요소를 꼽자면 산림이다. 산림은 국토환경을 보전하고 임산물을 생산하는 기반으로서 국가발전과 생명체의 생존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산림기본법 제1장 제2조)이다. 이런 소중한 자산을 기꺼이 체험 소재로 활용하는 활동이라면 그 결과는 어떠한 형태로든 체험 당사자에게 이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체험 당사자란 체험자인 방문객과 체험 제공자인 산촌민을 두루 아우른다.
이들 두 당사자를 주체로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산촌 체험을 정의하자면, ‘산촌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치유와 즐거움을 제공하고 산촌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산촌 지역의 진흥을 가져다주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산촌이 진흥된다는 것은 산촌의 소득이 늘어나고 산촌주민의 복지가 증진되는 것(산림기본법 제8조)을 말한다.
시야를 넓혀 산촌 체험을 바라볼 경우, 체험자에게 치유와 즐거움을 주는 행위를 넘어 귀산촌의 전초 과정이 되기도 한다. 한국임업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귀산촌 준비의 8개 단계(① 귀산촌에 관심 갖기 ② 산촌 체험 ③ 가족 동의 ④ 작물 선택 ⑤ 기술 습득 ⑥ 정착지 물색 ⑦ 주택·임야 매입 ⑧ 산림 경영계획 수입) 중 두 번째 단계가 산촌 체험이다. 다시 말해 산촌 체험은 자신이 귀산촌 생활에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므로 한국임업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귀산촌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등 현장 실습을 해보는 것도 중장기적으로 산촌 체험의 부가적인 이득이 될 수 있다.(강원도 평창은 군 전체가 산촌이지만 고랭지 채소를 임산물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산촌의 소득과 복지 증진이 과제
산촌 체험이 활성화되면 체험자(방문객)도 좋고 체험 제공자(산촌민)도 좋은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산촌 체험이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임산물 채취, 숲 탐방, 나무공예 등이 산촌 체험의 대표적인 형태이지만 이들은 태생적으로 농촌 체험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비근한 예로 나물을 산에서 캐면 산나물로서 임산물이지만 밭에서 길러 수확하면 농산물이 된다. 도라지나 곤드레를 밭에서 캐보고 요리를 해보는 체험은 산촌 체험일까? 농촌 체험일까? 감자와 고구마는 분명한 농산물이지만 산자락 밭에 심은 감자나 고구마를 캔다면 과연 농촌 체험일까? 산촌 체험일까?
이처럼 농촌 체험으로부터 산촌 체험을 골라내는 것은, 농장에서 사육하는 멧돼지가 산돼지냐 집돼지냐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산촌생태마을이라 알려진 곳을 찾아가 보면 마을의 운영 주체는 대부분 영농조합법인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산촌 체험은 별도의 입지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상황이 이렇다면 산촌 체험은 장소가 아니라 재료를 기준으로 정의 내려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해 산촌에서 진행하는 체험이 아니고 산림자원을 재료로 하는 체험을 산촌 체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돼지에 비유하자면 집에서 기르더라도 멧돼지는 재료(?)를 기준으로 그냥 멧돼지로 보자는 것이다.
자, 이제 재료를 기준으로 산촌 체험을 다시 분류해보자.
① 임산물로 분류되는 은행, 밤, 잣, 더덕, 도라지, 각종 나물, 구기자, 오미자 등은 자연산이 아닌 밭작물일지라도 산촌 체험의 대상으로 본다.
② 산촌 지역이 아닌 곳에 조성된 숲과 가로수에서 삼림욕 등을 하는 것도 산촌 체험으로 본다.
③ 목재를 체험 소재로 하는 목공예품 제작과 나뭇잎 조각 및 프린팅 등도 산촌 체험으로 본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논의 과정과 그에 따른 정교한 정의가 필요하다. 산촌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KBS TV에서 PD로 근무하던 심웅섭(62)은 어느 날 퇴근길에 뜬금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였다. 저 메마른 잿빛 콘크리트 상자 안에 살다니, 이거 실화냐? 그렇게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심웅섭의 말에 따르면 눈물까지 핑 돌더란다.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나 아파트에서 못 살겠어!” 이후 그는 도시 변두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그즈음 내심에선 귀촌을 향한 희망의 싹눈이 돋았다.
말하자면 심웅섭에게 귀촌은 일종의 묵은 숙원이었다. 늘 시골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니까. 그의 근무지는 서울에서 충주로, 다시 청주로 바뀌었다. 청주에 살면서는 시골티가 나는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마침내 꽤 깊숙한 산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의 산촌으로.
“내가 시골 태생이다. 과수원집 막내아들이었다. 과수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며 사과를 따 먹던 추억이라거나, 그리운 게 너무도 많았다. 때가 되면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이 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렇다고 미루기도 싫어 보은에서 청주로 출퇴근을 하기로 하고 이주했던 거다. 물론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였다.”
당시 불운하게도 그의 아내 홍근옥(59)은 암 투병 중이었다. 아내의 요양을 위해서도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살이가 이상적이었을 테다. 청주로 출퇴근을 하며 시골 맛을 누리는 생활은 길게 이어졌다. 2년 전에야 퇴직을 하고 온전한 산골 생활로 접어들었으니까.
부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氣) 수련에 열중했다. 계룡산에 있는 수련원을 드나들면서였다. 귀촌을 추동한 요인 중에는 자연 속에 살며 영성이라는 걸 북돋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귀촌지를 아예 수련하기 좋은 계룡산 자락으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적당한 터를 찾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나기도 했으나 계약 단계에서 확인해보니 집을 지을 수 없거나 길이 없는 터였다. 부부 연분처럼 땅하고도 인연이 돼야 일이 성사되는 것 같았다. 이곳 보은의 터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난 셈이다. 수월하게 터를 잡았으니까.”
어떤 경로로 매입했기에?
“인터넷에 나온 매물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용케 호의를 베푸는 주민을 만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초면임에도 가격을 좀 깎아서 살 수 있도록 땅 주인에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해주었다. 집을 지을 때도 이모저모 도움을 받았다.”
집이며 조경이며 수려하고 안락한 모습이다. 어떤 기본 구상을 가지고 집짓기에 착수했을까?
“생태주의랄까, 생활 방식은 좀 간결한 게 좋다는 생각을 평소에 지녔기에 가급적 작은 집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바닥 면적 18평짜리 목조주택을 지었다. 나중에 자그만 황토방을 추가로 지은 건 필요성이 커서였다. 남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일단 작게 짓고, 차후 꼭 필요하다면 부속 건물을 지으라고.”
목공실도 있네?
“집짓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일찍이 목공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덕분에 갖가지 생활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수 있게 됐다. 집 안에 있는 탁자, 의자, 책장은 모두 직접 만든 것들이다. 문짝도 만들어 쓴다. 나무로 뭔가를 만든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직접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즐거워지거든.”
도시보다 생활비 30% 덜 들어
심웅섭이 손수 가구를 만들어 쓰는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렇다. 그는 알뜰한 소비를 지향한다. 무슨 ‘짠돌이’ 계열의 성향이어서가 아니다.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재미로 낙을 삼는 습성의 소유자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빠듯하게 살 뿐’이라는 얘기로 보자면 쟁여놓은 부가 있는 것도 아닐 거다. 여하튼 돈에 관한 주관이 뚜렷하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고 믿는 그는 과도한 물욕의 추구만큼은 자제하고 싶다.
“농사엔 햇빛이 필수지만 지나치게 높은 광도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이걸 광포화(光飽和) 현상이라고 하더라. 돈이나 물질도 마찬가지다. 과잉 추구하느니 자제하는 게 낫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믿음을 진심으로 간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건 이상적인 신념이지만 돈이라면 영혼까지 거래하는 게 현실이다.
“돈이 안 들거나 덜 드는 방식의 삶이 그래서 필요하다. 가령 내가 필요한 가구를 마트에서 사들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에도 진땀을 쏟아야 하고, 여기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도시에서보다 30%쯤 생활비가 덜 드는 것 같다. 돈이 덜 들어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원하는 일에 선용할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의 큰 장점이다. 우리 부부는 가급적 산길을 많이 걷고자 한다. 여기에 무슨 돈이 들겠나?”
그의 집 주변은 온통 산이다. 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이 솔향기를 흩뿌린다. 숲속의 인기 가수들인 온갖 새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구재재구 명랑한 노래를 협연한다. 이 찬탄할 만한 오케스트라 공연엔 입장료가 없다. 산나물은 또 어떻고? 아내 홍근옥은 귀촌 이후 완연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가 누리는 최상의 기쁨은 산나물 뜯기인데, 앞산 뒷산에서 얻어온 풋것들로 몸도 씽씽해졌다. 그렇더라도 때로 무료하지 않을까? 산중의 반복되는 일상에 심심하지 않을까?
“귀촌 5년 차쯤 되면 슬슬 심심해진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긴 하다.(웃음) 그렇다고 심각하게 무료한 건 없다. 사실 시골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차로 40분이면 닿는 청주로 나가 갑갑증을 해갈하는 식으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늘어날 수 있는 게 귀촌 생활이다.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불편한 일도 생기는 거라서. 상대의 장점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뭐든 항상 같이 한다. 소소한 다툼은 있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태도로 풀어나간다. 세상에 부부 사이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게 있을까?
햐, 부부간에 ‘귀차니즘’이 증대될 나이인데.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함께 영성 수련을 해왔다. 영성, 이건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영성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좋은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산다. 배우자는 물론 모든 사람이 영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독서는 주로 어떤 분야의 책으로 하지?
“우주에 관한 책이 재미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평행이론을 알게 하는 책들을 좋아한다. 우주에 관심을 갖다 보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깨우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영적인 존재든 우주든 그것들이 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럴 때면 깊은 위안을 얻는다.”
산야의 들풀 한 포기와 인간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도 뭔가 삶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더라.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 생활의 유익함은 한둘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산중의 낙은 달밤에 한잔 마시는 데에도 있다. 음주는 간혹 즐기나?
“술은 전혀 못 마신다.(웃음) 명상 수련을 하면서 생활 패턴이 조용한 쪽으로 바뀌기도 해 술자리에 섞이지 않는 편이다.”
시골에서도 다이내믹한 삶이 가능하다
살면 살수록 더 가지고 싶고, 더 벌고 싶고, 더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게 필부의 속성이다. 심웅섭은 여기에서 좀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때로 산골 생활이 무료하지만 방안을 찾아 해소한다. 오디오 장비를 마련해 레코드 음악 감상에 입문하는 식으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을 삼가는 데에서 나아가,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방송사 PD로 일할 때 휴먼 영상 다큐를 자주 만들었다. 이 경험을 살려 요즘 농촌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영상 자서전’ 강의를 하고 있다. 인근의 젊은 귀촌인들과 함께 ‘해바라기 문화공작소’를 만들기도 했다. 영상을 매개로 지역 문화를 돋우는 활동을 하기 위한 동아리다. 아내 역시 면 소재지에 꾸린 ‘작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이건 봉사활동이자 알바다.”
시골이 따분한 곳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심웅섭에 따르면 그건 좁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생각과 행동의 외연을 확장할 경우 다이내믹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는 게 귀촌 생활이라고 본다.
“집에 폭 파묻혀 풀만 뽑는 식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삶을 시도해볼 만한 게 시골이다. 이 점에서 귀촌은 하나의 도전 행위다. 그 무엇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커진다.”
심웅섭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귀농인들이 겪는 애환 중 가장 큰 건 원주민과의 갈등에서 발생한다.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편에만 있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알력과 닮았다. 일단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배운 건 많지 않더라도, 대체로 나쁜 맘 없이 진솔하고 순수한 면이 있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지혜를 배운다는 태도로 존중해주는 게 현명하다. 좋은 관계 맺기에 정 자신이 없다면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