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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세 이상 주축으로 한반도 평화 만들기 ‘은빛순례단’
- SNS를 통해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시절, 사회에서 한몫 제대로 하던 시니어들이 뭉쳐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고 했다. 앉아서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대와 이념, 종교를 떠나서 터놓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이 모였다. 열정만큼은 청춘인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축인, 이름하여 ‘한반도평화만들기 1000인 은빛순례단(이하 은빛순례단)’이다. 갈등을 넘어서 마주 보다 “걸으면서 세상과 나누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자.” 이런 의견이 모인 것은 작년 9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있었던 연찬 모임에서였다. 남북에 불어온 훈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이 땅을 물려받을 미래 세대를 위해 뭔가해보자며 의견을 모은 것이 ‘은빛순례단’을 탄생시켰다. 지난 3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성대하게 출발 행사를 치르고 난 뒤 은빛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국립 현충원 참배였다.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은 엄숙한 장소이면서도 정치 대립이 극명한 곳이다. 소위 내 편의 영령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은빛순례단으로 발을 떼면서 난생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민주당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 그가 박정희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하면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이부영 이사장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서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뿐이라 생각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인해 마음속 무엇인가가 씻겨나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 현재의 과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일생 지켜왔던 자기 원칙을 깨기란 쉽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은빛순례단의 운영단장을 맡고 있는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도 현충원 방문이 꽤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임정요인(臨政要人) 묘역에서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역 말고도 신돌석 의병장, 홍범도, 김규식 등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지킨 분들 또한 잠들어 있는 곳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새해 어떤 정당인이 누구의 묘소에 참배했는지 그 사실에만 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부정적 시각으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인정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은빛순례단의 생각이다. 이후 은빛순례단은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4·19 기념탑을 참배하고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등 비교적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 충북 음성, 옥천, 영동 등지에서 걷기 순례와 연찬, 방문 순례를 했다. 5월에는 전남 일대를 돌며 평화의 소중함을 알렸다. 도법 스님과 느리게 함께 걷는다 인천 지역에서 은빛순례단 걷기 모임이 있던 날, 도법 스님과 수지행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으며 개항의 역사를 비롯해 한국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역사 탐방으로 꾸며졌다. 60세 이상을 은빛, 이하를 금빛이라 칭하는 은빛순례단.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신구 세대가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걷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은빛순례단은 3·1운동 100주년인 내년까지 연찬 모임, 방문 순례, 걷기 모임 등을 통해 세상과 경계 없이 나누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이날 모임에는 도법 스님 외에도 이삼열(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손이덕수(디자인 아티스트) 부부, 정세일(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 씨 등 은빛순례를 함께하고자 하는 50여 명이 동참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든 것은 20여 년 전. 지리산 댐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시절이었다. 2004년에는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탁발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깨달음과 가르침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과 마주했다. 수지행은 도법 스님을 도와 일정을 짜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수지행이 일정을 짜주면 도법 스님은 따져 묻지 않고 순례길에 응했다. 매일같이 10km를 걷는 강행군을 계속해온 순례의 달인들이다. 인천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궁금해 도법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길에서만 사시냐?”고 말이다. 도법 스님은 “나는 할 줄 아는 게 걷는 것밖에 없다”며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을 하다 “순례, 즉 걸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순례는 꼭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있는 활동도 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경청 순례’라고 했다. “우선 각 종교계를 먼저 만나고 있어요. 천주교 주교회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은빛순례단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종교계가 우리 사회 통합에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단체들도 만나볼 생각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마음을 잇고 벽을 허물어 넘어설 것인가가 화두이자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연찬 순례다. 대중을 상대로 평화의 한반도로 만들려면 과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현장을 찾아가는 걷기 순례를 한다. 걷게 되더라도 많이 걷지는 않는다. 시니어가 주축이다 보니 걷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있다고. 매일 8km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으나 좀 더 시니어 세대의 상황에 맞게 계획을 바꿨다. 도대체 왜 걸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걷지 않고 편히 쉬면 그만 아니냐? 걷는 행위를 거스를 수 없는 순례길. 다리도 성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길 위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장수시대인 만큼 환갑을 넘겼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안주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도법 스님은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해 뭔가 할 일이 없는 세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할 게 많은 시대인데 그것을 못 찾고 있는 것이죠.” 은빛순례단 중심에서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이부영 이사장에게서 들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불안이 고조되니 자녀들 입에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부영 이사장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뭘 한다고 설치고는 다녔는데 결국 내 손자, 손녀들한테 전쟁 불안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이구나.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헛살았나? 하는 자괴심이 컸다더군요.” 이부영 이사장은 남은 세월이라도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순례가 시니어에게 더욱 적합한 사회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고 했다. 세대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다 도법 스님 눈에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포착됐다. 은빛순례단이 출범식을 하던 날, 태극기와 함께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한쪽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과 적개심을 표출하던 모습.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이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모든 종교와 이 편과 저 편이 벽을 넘어서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리는 날 후손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개심을 표출했죠. 독립선언을 했던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 반목하는 모습, 이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려면 누군가가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바로 어른들이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든 다 만날 겁니다.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도법 스님은 사회를 좀 더 종합적으로 균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새의 날개 이야기를 했다. “흔히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온몸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아요. 대한민국이라는 새도 온몸으로 날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좌우 갈등만 있었는데 지금은 세대 갈등도 있습니다. 어른과 젊은이들 사이가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죠. 모든 관계가 소중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그런 마음들이 깨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삶의 모든 과정을 평화롭게 다뤄갈 수 있는 실력과 방법, 정화의 체질화, 문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이 돼야 한다. 평화운동은 통일이 돼도 지속돼야 한다. 일상의 평화. 결국 은빛순례단이 미래 세대를 위해 다지고 싶어 하는 기본이란 일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평화가 아닐까.
- 2018-06-2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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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죽비가 그립습니다”
- 을 집필한 김택근 작가가 성철 스님께 보내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요즘, 세상을 깨웠던 스님의 장군죽비가 그립다는 사연을 소개합니다. 김택근 작가·언론인 성철 스님, 감히 스님의 삶과 사상을 들춰서 을 출간했습니다. 책은 쇄를 거듭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자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남김없이 비우고 떠났지만 저는 스님의 생을 완전히 태우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비를 들어 이렇게 일갈하셨을 것입니다. “어찌 사량분별로 허튼짓을 했단 말인가.” 일개 서생이 글자를 동원하여 고승의 생을 옮겼으니 실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워보겠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생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는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곧장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얘기하셨지요.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갔지만 책은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를 읽다가 한 곳에 눈이 딱 멈췄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 자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발한다(我有一券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글자가 없는 경전. 스님의 수행은 결국 문자를 버리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깨달음은 책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글자로는 이룰 수 없는[不立文字] 것이었습니다.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다.’ 아, 얼마나 명징한 비유입니까. 이 구절을 읽으며 무릎을 쳤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마음을 닦는 참선에 들었습니다. 스님의 수행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당시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스님께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신 지 벌써 24년이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이렇듯 시간을 헤아리지만 스님께서는 시간을 벗어나 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1993년 11월의 해인사가 떠오릅니다. 다비식 날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찬비는 남은 자들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람 불고 잎이 지고 사람들은 오열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난날 지구라는 별에서 성철이라는 이름의 스님과 함께 또 다른 진리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 간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음식 또한 가장 적게 드셨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머문 자리가 가장 적게 패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의 향기는 가장 멀리 날아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숱한 법어를 남기셨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82년 부처님오신날에 발표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였습니다. 스님, 다음 구절을 기억하시지요.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저는 이 법어를 읽으며 스님의 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습니다.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중생이 부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만 뜨면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를 볼 수 있으니, 내가 있는 이곳이 부처가 사는 불국토요, 극락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은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먼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이 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지구라는 별에서 선포한 사람은 부처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분명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스님께서는 눕지 않는 수행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 10년 등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께서 주도하신 봉암사결사야말로 비할 수 없는 위대한 불사(佛事)로 여깁니다. 마침 올해는 봉암사결사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산중의 포효는 지금도 선승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먹고살 길이 없으면 강도짓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한국 불교는 봉암사결사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봉암사에서는 법당에서 불교 아닌 것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오직 부처님과 그 제자들만 모셨습니다. 가사, 장삼도 새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원색을 추방하고 괴색으로 통일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의 장삼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했습니다. 당나라 때 백장 스님의 청규정신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공주규약에 담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봉암사결사의 공주규약은 오래된 법이었지만 삿된 것들을 물리친 새 길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우리 불교계에 삼천 배를 남기셨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요.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가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 어찌 보면 절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흙덩이나 썩은 나무에게 절을 했더라도 성심을 다했다면 그 간절한 마음이 자신을 정화시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지은 삼업(三業)의 몸뚱이를 아래로 내던지는 자체가 바로 참회입니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앞세우고 세상에 머리를 치켜든 사람들이 절을 하면 아만(我慢)이 사라집니다. 절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삼천 배를 하면 비로소 이웃과 생명이 보인다고 합니다. 삼천 배를 마치면 거의가 눈물을 쏟습니다. 참회의 눈물이며 환희의 눈물이며 고마움의 눈물인 것입니다. 삼천 배를 마친 신도들을 스님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삼천 배는 분명 나를 씻기는 기도입니다. 스님께서 또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모르게 남을 도우라’고 이르셨습니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깨친 사람은 은둔의 도사가 아니고, 신통력을 지녀 이를 과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도를 얻었으면 중생을 사랑하고 제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면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남을 돕는 것도 어려운데 남몰래 남을 돕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도왔다는 자국 자체가 없어야 진정한 불공입니다. 도와주었다는 뿌듯함이나 숭고함이 남아 있다면 진정한 보살도를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님의 호통이 귀에 쟁쟁합니다. “아까운 돈과 몸으로 남 도와주고 왜 입으로 공덕을 부수어버리는가?” 남을 돕고 불공을 자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성철 스님은 그래서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이르셨습니다. 요즘 특별한 스님들, 목소리 큰 스님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저마다 이름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 큰 밥그릇을 찾고 포만감에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는 놔두고 밖에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삼 스님의 죽비가 그립습니다. 스님,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편지를 보낸다면 부칠 곳이 어딘지 생각해봤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 2017-06-17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