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하면 그녀의 연인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떠올린다. 그녀를 비롯한 당대 여성 예술가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빛에 가려 탁월한 예술성이 평가절하되곤 했다.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 프리다 칼로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녀들의 작품도 속속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독자적인 아티스트로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로랑생의 작품에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 특유의 그루미한 무드로 녹아 있다. 특히 그와 이별한 후의 작품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한층 두드러진다. 주로 핑크, 블루, 그레이 등 파스텔 톤을 사용해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미묘한 나른함에 취하고, 때론 쿨한 색조 안에 스며든 사랑스러운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지난해 코코 샤넬(Coco Chanel, Gabrielle Chanel, 1883~1971)의 일생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Coco Before Chanel, 2009)을 봤다. 패션의 아방가르드이며 모더니스트인 샤넬의 삶이 어쩐지 로랑생과 퍽 닮아 보였다. 짧지만 연인과 열렬히 사랑했고 온 열정을 쏟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해낸 강인함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들. 사실 두 여인에겐 한 가지 사연이 있다. 로랑생이 무대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을 즈음, 샤넬이 로랑생에게 직접 초상화를 의뢰했던 것. 그런데 완성된 초상화를 본 샤넬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쓸쓸하면서도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그림 속 자신이 실제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에도 로랑생은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다. 두 여인의 팽팽한 신경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샤넬의 초상화(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는 로랑생이 평생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로랑생의 그림을 내키지 않아 했던 샤넬의 심정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명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녀원의 고아원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샤넬은 그곳에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패션업에 뛰어든 그녀는, 모진 세파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일궈나간 당찬 여인이었다. 모던하면서도 우아한 샤넬의 디자인은 화려한 오브제를 포인트로 단조로움을 없애며 절제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생전 그녀가 구축한 샤넬 디자인은 현재 ‘샤넬’ 브랜드 패션쇼에서도 명맥을 잇는 고유의 콘셉트가 됐다.
“심플함은 우아함의 열쇠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성공은 종종 실패를 모르는 사람에 의해 달성된다”, “나는 당신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도 당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까” 등 샤넬이 남긴 수많은 명언 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내가 바로 스타일이다”(Style, that’s what I am)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여성성 안에서 여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자존심과 당당함을 패션으로 승화하며 현대 여성을 대변했다.
샤넬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반해버린 까닭일까? 개인적으로 로랑생이 그린 샤넬 초상화도 좋아하지만, 샤넬이 그토록 거부했던 마음도 절절히 이해가 간다. 아마도 그녀는 백년전쟁의 선두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처럼 자신감이 충만한 진취적 신여성의 모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려냈을까? 한국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전시회는 이렇듯 가벼운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한다. 전시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듯 초기작을 접하고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감상하니 점점 그 이름이 각인된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화가, 사랑에 기뻐하고 아파한 여인의 대서사시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을 통해 펼쳐진다.
마리 로랑생에 대해…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우선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보기에 앞서 그의 인생 이야기와 연애담을 조금이라도 알면 좋겠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이자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마리 로랑생 감정 변화는 깊이가 더해지며 다양한 색채로 화폭에 담겨갔다. 1·2차 세계대전 시대를 산 인물로서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아왔던 예술가,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100여 년 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교육받았다. 입체파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화가가 된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업실이자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에 다니며 활동했고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이곳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5년 여 뜨거운 열애를 나눴던 이들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연루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인 남작과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가다 이혼한다. 이후 마리 로랑생은 색채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의상과 무대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56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됐다.
파리지엥 작가의 인생 궤적을 쫓다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은 마리 로랑생의 20대 무명 시절부터 73세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작품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다섯 개의 섹션이 친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하게 구성돼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 로랑생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옛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사진 19점이 전시 돼 있다.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니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화상과 피카소의 초상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열애시대’로 구별한 2부. 입체파와 야수파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마리 로랑생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난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3부 ‘망명시대’는 마리 로랑생 인생 중 역경의 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 신혼생활을 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난 시기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있을 수 없어 택한 망명길이었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을 자신만의 색깔로 더욱 강하게 작품 안에 표현했다.
4부 ‘열정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시기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 유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공연 영상과 의상 도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5부 ‘콜라보레이션’에는 작가 앙드레 지드의 ‘사랑의 시도’, 오페라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잡지 ‘보그’ 등 마리 로랑생이 북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할 때 발표된 작품 38점이 전시돼 있다. 이밖에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과 마리 로랑생의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있고, 그의 시를 직접 필사해보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 정보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관람시간 2월 오전 11시~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
3월 오전 11시~오후 8시 (입장 마감: 오후 7시)
입장권 성인 1만 3000원 / 청소년 1만 원 / 어린이 8000원
‘영화 같은 삶’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예술인, 변종곤(67세). 극사실화의 대가인 변종곤은 사물(오브제)을 활용한 아상블라주와 조각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를 만난 브루클린 코블 힐의 스튜디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이었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이 인기를 끌면서 가장 뉴욕스러운 곳으로 자리매김한 코블 힐에서 울고 웃으며 변종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는 1978년 나이 스물아홉 최초의 민전인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신예 화가로 급부상했다. 고교시절부터 신문사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현대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에콜 드 서울’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때늦은 수상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미술인 등용문이었던 국전은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아 아예 출품을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동아미술대전은 그에게 구세주였던 동시에 파란만장한 삶의 신호탄이었다. 미군 철수 후 황폐화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 대상작품이 문제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용납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혼혈아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에 분노해 그린 작품이었다.
굶주리고 헐벗던 시절, 그의 할머니는 대문을 항상 열어 두셨다.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지와 한센인을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냈던 할머니. 부처님과 예수님은 물론이고 달과 해와 별, 그리고 서낭당의 고목과 바위에도 두 손 모아 절을 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촉망받는 화가로 성장한 그에게 내팽개쳐진 아이들의 상황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회 부조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 당시 북한은 그의 작품을 칭송하면서 우리 정부와 미국을 비판하는 대남방송을 계속해댔다.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언론 탄압에 맞서 언더우드 타자기를 초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비롯해 사회·정치적 이슈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자 정보기관의 압력과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1981년, 배낭 하나에 1인용 전기밥솥과 화구, 그리고 작품 몇 점을 챙겨 야반도주를 하듯 예술적 망명을 했습니다. 미군은 싫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와 히피문화에 끌려 미국을 택했지요.” 그는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때는 여권 발급받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문희 대주교께서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도와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미국행이었습니다.”
미국의 삶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를 아꼈던 변종하 화백(전 국전 심사위원)의 도움으로 비가 새는 할렘의 다락방이었지만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한대수(가수·사진작가) 부부는 미국생활의 안내자였다.
지하철 비용을 아끼면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한 아트 스튜던트 리그(ASL)를 다녔다. 체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감 사는 것도 부담되자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이 작품의 소재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재조차 재사용했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예술인에게 깨어진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인체였고 고장 난 시계의 톱니바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인 잃은 인형에서는 못내 그리운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오브제를 서로 결합하고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변종곤의 아상블라주는 이때 시작됐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교수와 작가들은 그의 실력과 경력을 높이 평가해 줬다. 하지만 그가 굶주리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결국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으니 호주머니에 작가들이 몰래 넣어 둔 수백달러가 있었어요. 호의는 고마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되돌려주려 했지만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돈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뛰쳐나왔습니다.” 변 화백은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화가는 먹고살려고 고귀한 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접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한대수 부부가 애써 생선가게에 일자리를 찾아줬지만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나에게 펄떡이는 생선을 자르는 일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난방도 수도도 없는 싸늘한 할렘의 다락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이시여, 저를 얼마나 위대한 작가로 키우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낙이었다. 밤새 그린 그림을 생선가게 벽에 걸어 놓고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 애썼다.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가게를 찾은 한 신사가 벽에 걸린 ‘할렘가 풍경’을 보고는 가게 주인에게 누가 그린 것인지 물었다. 그의 작품인 것을 알고는 가게 주인도, 신사도 놀랐다. 그 신사는 리버데일 갤러리의 헬무트 지츠위츠 대표로 미술계의 마당발이었다.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당장 벗고 따라 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돕고 그림도 그리면서 망가진 몸과 생활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츠위츠 대표는 그의 작품을 눈 높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보였다. 언더우드 타자기 그림 등 몇 작품이 거래되면서 3만달러를 손에 쥐게 됐다. 뉴욕의 웬만한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리버데일신문은 ‘한국에서 사라진 화가, 미국에서 성공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 재외작가 초청 전시회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와 함께 초대됐다. 금의환향이었다. 그는 이때 인형의 몸통에 섬뜩한 소리를 내는 시계를 얼굴로 결합한 아상블라주 등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고 귀족생활이 시작됐다.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 미용실의 VIP고객이 되었고 휴가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古城)에서 보냈다.
하지만 귀족생활은 시작부터 파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쓰레기 나뒹구는 할렘을 고집스레 그리니 후원자도 수집가도 몇 년간 참다가 결별을 선언했다. 변 화백도 라면조차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지츠위츠 대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반겼다.
그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여행을 하고 극사실화를 그렸다. 10여 년 전 그는 미국 서부 사막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버림받은 인디언 원주민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영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굿모닝 아메리카’이다. 흑백기념사진 같은 침울한 인디언 군상과 황금빛의 샤넬 향수병을 대비해 그린 이 작품은 미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샤넬의 회장이 스튜디오에 찾아와 값에 관계없이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팔지 않았다. 분신을 팔 수는 없었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포스코가 소장하고 있는 고 박태준(朴泰俊. 1927~2011) 명예회장의 초상화다. 인물이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져 박 회장의 겸손함을 저절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철의 정밀성과 전진을 상징하는 18세기 독일 시계가 가운데 더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초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수시로 소개되고 프랑스의 마리 로지에 감독이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가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는 등 국내보다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명성이 더 높다. 2011년 프랑스문화원과 브루클린의 인비지블 독 아트센터가 공동 주최한 ‘30주년 개인전’은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찰이 교통정리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변 화백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억대를 호가하는 귀한 책을 비롯한 수만 가지 오브제가 발 디딜 틈 없이 진열되어 있다. “이 오브제를 보면 심장이 뜁니다. 오브제는 고유한 기운이 있고 이야기도 합니다. 나 자신도 하나의 오브제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사는 동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과 진귀한 오브제를 보다 널찍한 공간에서 세계인들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