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 일부를 옮겨 싣는다. 열두 번째 주제는 ‘니트’다.
1 ‘김우일 작가님’. 어느 날 길을 걷다 꽃 모양 자수가 인상적인 재킷을 입은 분이 눈이 띄었다. 사진 요청에 그분은 “너 진짜 운이 좋아. 나도 사진 찍는 사람이야”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알고 보니 1세대 광고사진 작가인 김우일 작가님이었다. 여전히 노출과 핀에 대해 고찰한다는 작가님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시간의 대화는 선물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2 ‘스트라이프 아버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스타일링이다. 무엇보다 스트라이프 니트와 양말 색깔을 맞추셨는데, 패션 센스가 엿보인다.
3 ‘주황 카디건 어머님’.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원색으로 멋을 낸 어머님의 패션은 봄나들이 갈 때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동묘 칼라 카디건 아버님’. 카디건을 재킷처럼 매치해 전체적으로 댄디한 스타일을 연출했다.
5 ‘다홍색 조끼 아버님’. 가까이서 보니 조끼 안의 니트에는 영국의 빅벤 시계탑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영국 감성의 패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맨투맨 아버님’. 한눈에 봐도 이 구역의 패셔니스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맨투맨 니트와 함께 레드로 포인트를 준 패션이 멋스럽다.
7 ‘동묘 흰색 카디건 아버님’. 패션 트렌드인 올 화이트(All-White) 룩을 소화하셨다. 카디건 문양이 심심할 수 있는 패션에 포인트가 됐다.
올해부터 혼인공제제도가 신설됐다. 자녀의 결혼 전후로 증여가 이루어지는 경우 최대 1억 원까지 추가 공제해준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의 특성과 혼인 장려 등을 감안해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처럼 결혼이나 이혼 등 혼인 생활과 관련해 종종 발생하는 세금 이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결혼 축의금이나 혼수용품은 증여세 부과 대상이 될까? 축의금은 말 그대로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고, 선물로서의 성격이 있다. 혼수용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과 같은 법 시행령은 사회 통념상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축의금이나 혼수용품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축의금에 대해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축의금이나 혼수용품이 지나치게 고가라면 증여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축의금 중 결혼 당사자(신랑, 신부)와의 친분에 기초한 부분이 아닌 몫은 혼주인 부모에게 귀속된다고 본다. 따라서 부모에게 귀속되는 축의금을 부모가 자녀에게 무상으로 준다면 이것은 부모의 자산을 자녀에게 준 것이 되어, 증여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결혼과 세금
올해 신설된 혼인공제제도에 따르면, 직계존속으로부터 혼인신고일 전후 2년 이내에 증여받는 경우에는 기존의 증여재산 공제(직계존속으로부터 증여받는 경우 10년간 5000만 원)와 별개로 1억 원을 증여세 과세가액에서 공제한다. 자녀가 결혼할 때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제도를 잘 활용하면 세금을 아끼면서 자녀를 도와줄 수 있다. 공제한도액 1억 원은 직계존속 전부에 대한 액수이니, 직계존속별로 각각 1억 원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만약 각자 주택을 1채씩 소유한 두 사람이 결혼해서 1세대가 된다면(경제력이 상당하거나 재혼의 경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1세대 1주택 양도소득세 비과세를 위해 혼인 전에 급히 부동산을 처분하거나 결혼을 미루어야 할까? 무언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1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1주택을 보유한 다른 사람과 혼인함으로써 일시적으로 1세대 2주택이 되는 경우, 혼인일로부터 5년 이내에 먼저 양도하는 주택은 1세대 1주택 비과세 규정이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양도하는 주택에 대해 다른 비과세 요건(보유 기간, 거주 기간 등)은 갖추어야 한다.
혼인 생활 중 부부간 재산 이동
case 01
남편이 2006년 3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약 2년 8개월간 35회에 걸쳐 자기앞수표 입금이나 계좌이체 방법으로 전업주부인 부인의 계좌에 13억 원가량을 입금했다. 세무서는 2012년 5월 남편이 부인에게 증여했다는 이유로 세금을 부과했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은 2015년 9월 ‘부부 사이에서 일방 배우자 명의의 예금이 인출돼 상대방 배우자 명의의 예금계좌로 입금되는 경우에는 증여 외에도 단순한 공동생활의 편의, 일방 배우자 자금의 위탁 관리, 가족을 위한 생활비 지급 등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예금 인출 및 입금 사실이 밝혀졌다는 사정만으로는 배우자에게 증여되었다는 과세 요건 사실이 추정된다고 할 수 없다’라며 증여세 부과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요즘 젊은 부부 사이에서는 각자 자신의 소득과 재산을 관리하면서 공통되는 생활비만 갹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부부가 경제적 공동체로서 공동생활 중에 형성한 재산을 명의에 관계없이 같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위 판결은 이러한 부부 생활의 실상을 반영한 셈이다.
다만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부부 사이에 양도한 재산은 양도한 때에 배우자에게 증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외관상 양도의 형식을 빌려 증여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서 양도가 있으면 해당 양도가 증여가 아니라는 점(대가를 받고 양도한 것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증빙할 필요가 있다. 법원의 결정으로 경매 절차에 따라 처분된 경우, 공매되거나 파산선고로 인해 처분된 경우, 증권시장을 통해 유가증권이 처분된 경우 역시 위 증여추정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편 배우자에 대한 증여재산 공제액은 10년 기간 내에 6억 원이라는 점도 알아두면 유용하다.
이혼·사별과 세금
협의나 재판을 통해 이혼하면 위자료, 재산분할 문제가 통상 수반된다. 이혼 시 위자료란 혼인 생활의 파탄에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가 상대방 배우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이다. 따라서 위자료 지급은 유상으로 대가를 지급하는 것(채무를 변제하는 것)이니 증여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위자료를 지급받는 사람이 증여세를 부담하지 않는다. 다만 부동산 등 양도소득세, 취득세 과세 대상인 재산을 위자료 명목으로 넘겨줄 경우 유책 배우자는 위자료 채무를 대물변제(유상 양도)한 것이 되어 양도소득세를, 그 재산을 넘겨받는 배우자는 취득세를 부담하게 된다.
이혼 시 재산분할은 부부가 혼인 생활 동안 서로 협력하여 형성한 재산을 청산·분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배우자 일방이 다른 배우자에게 재산을 넘겨준다고 하여 이를 매매·교환 등과 같은 양도나 무상의 재산 이전인 증여로 보는 것은 재산분할의 실질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재산분할에 대해서는 부부 쌍방에게 양도소득세나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다만 부동산 등 취득세 과세 대상인 재산을 재산분할 명목으로 넘겨받으면 취득세를 납부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저율의 특례세율이 적용된다.) 일방 배우자의 사망으로 상속이 개시되는 경우, 즉 사별의 경우에는 배우자를 비롯한 상속인들에게 상속세가 부과되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혼인 생활 동안 함께 노력하여 재산을 형성했는데 일방 배우자가 사망했다고 하여, 남겨진 배우자에게 거액의 상속세를 부과한다면 법 감정에 어긋날 수 있다. 더구나 이혼과 사별이 세금 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면, 세법이 이혼을 권하는 꼴이 될 수도 있어 불합리할 수 있다. 이에 우리 법은 배우자 간 상속이 세대 간 이전이 아니라 수평적 이전이라는 특성을 감안하여, 배우자 상속공제제도를 두고 있다. 배우자 상속공제제도의 취지는 관계 법령에 따른 금액(최소 5억 원, 최대 30억 원)을 상속세 과세가액에서 공제함으로써 남겨진 배우자의 상속재산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고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case 02
원고는 1982년 5월 망인과 혼인신고를 한 후 약 30년간 혼인 생활을 해왔다. 혼인 당시 망인은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5명의 자녀가 있었고, 원고와 망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2011년 3월 원고(당시 만 62세)는 망인(당시 만 82세)과 전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과의 상속재산 분쟁을 피하고자 망인을 상대로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를 했다. 참고로 당시 망인의 재산은 100억 원이 넘었는데, 원고가 망인을 대신해 약 10년간 망인의 병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재산 증식에 상당히 이바지한 상황이었다. 2011년 4월 ‘원고와 망인은 이혼하되, 망인이 원고에게 재산분할로 현금 10억 원을 지급하고 액면금 40억 원의 약속어음금 청구 채권을 양도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되어 그에 따라 현금 지급 등이 모두 이행되었다. 그런데 원고는 이혼 후에도 망인이 사망할 때까지 망인의 수발을 들고 재산을 관리하면서 망인과 함께 종전과 같은 주소지에서 동거했다. 망인은 이혼 후 약 7개월이 경과한 2011년 1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망인의 상속인들은 2012년 6월 원고와 위 분할재산을 상속인 및 상속재산에서 제외하고 상속세를 신고했다. 이에 대해 세무서는 원고가 망인의 사망 직전 가장이혼을 하고 재산분할 명목으로 재산을 증여받은 것으로 보아 36억 원의 증여세를 부과했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은 2017년 9월 ‘법률상의 부부관계를 해소하려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이혼이 성립한 경우 그 이혼에 다른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 간에 이혼 의사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이혼이 가장이혼으로서 무효가 되려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어야 한다’라며 위 사안의 재산분할금은 증여세 부과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가장이혼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다만 대법원은 ‘재산분할에 관한 민법 규정의 취지에 반하여 상당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과대하고 상속세나 증여세 등 조세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여 그 실질이 증여라고 평가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상당한 부분을 초과하는 부분에만 증여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라고도 덧붙였다. 즉 조세 회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과대한 몫의 재산분할은 예외적으로 증여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
백년해로할 반려자를 맞이하는 결혼이나, 혼인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혼, 배우자의 사별만큼 인생에서 큰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러한 인생의 중대사와 관련하여 골치 아픈(?) 여러 세금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면,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혼인 생활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세금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미리 알고 전문가와 상의하거나 관련 법률에 관심을 가진다면, 원만한 혼인 생활의 시작과 마무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 가운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대표 인물로 꼽아봤다. 그들은 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통법
“여기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넘어 신세계백화점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졌죠. 지금도 장례식 때의 장관을 잊지 못합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이자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를 담당한 허영엽 신부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 5일간 명동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기간 동안 방문한 추모객은 약 40만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허 신부는 “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추기경님의 존재감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허영엽 신부. 신학대 학생 시절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한 그는 김 추기경과 처음 만났는데, 당시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학생인데도 편안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홍보팀에 있으면서 김 추기경과의 만남이 종종 있었지만, 같은 성당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얘기하는 대표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되며, 대표적으로 1987년 6·10 항쟁이 언급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피신을 위해 명동대성당에 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품어줬다.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김 추기경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추기경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했다.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달동네를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연민이 많고 늘 베푸시는 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선종 당시 김 추기경의 통장에는 1000만 원 정도의 잔액밖에 없었다. 그 돈마저도 신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왜 어른으로 통했을까. 허영엽 신부는 ‘소통법’이 답이라고 봤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대화의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을 느끼셨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에게 그동안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값진 선물이다. 허 신부는 “크리스마스 때 신부, 수녀 등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셨는데,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한 내용이 담겼다”면서 본받고 싶은 인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무엇이 됐든,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상대방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그 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으면 바꾸기도 한다. 생각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영엽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대 갈등이 악화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5060세대와 2030세대 간 갈등 요인을 묻는 질문에 ‘소통이나 세대 이해의 부족’(36.0%)이 1위를 차지했다. 나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 아닐까요? 추기경님께서는 선종을 앞두고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큰어른이었던 추기경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집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요.”
◇이어령 장관의 감수성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문학관’. ‘영인’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붙였다. 이곳에서는 이어령 장관의 문화적 업적과 철학을 되새길 수 있다. 현재도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시간이 갈수록 선생이 더 그리워진다. 60여 년을 늘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기에 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강인숙 관장은 동갑내기 남편을 ‘이어령 선생’이라고 불렀다. 남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관장은 “한눈 팔지 않고 원하는 길만 걸어간 선생의 용기를 존경한다”면서 “그와 함께하면서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정직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삶에서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가장으로서도 어른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강 관장은 “선생은 평생 직장 두 곳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고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도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답했다.
문학인부터 문화부 장관까지 직업도 다양했던 이 장관은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따른다는 그는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장관이 즐기면서 일하는 시간이 쌓이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의 글과 말, 즉 생각에서 배움을 얻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 선생은 팬이 많았다.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서 “팬은 정신적인 면에서 친지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유에 대해 강인숙 관장은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지식, 미래를 투시하는 안목, 독보적인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 이 장관은 고독했던 것 같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저)을 보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척을 할 뿐이라면서, 모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질문자의 삶을 산 이어령 장관은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고 고백했다. 또한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이어령 장관은 존경받았으나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까. 강인숙 관장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얼마 전에 이 선생의 2주기였어요. 어느 회사의 회장인 제자가 큰 꽃을 집에 보내왔어요. 당시 저밖에 없어서 꽃을 방까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죠. 연세가 많은 기사분이 꽃을 나르다가 선생의 사진을 보더니 짐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애독자였다’면서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꽃 보내는 사람과 꽃 배달하는 사람 모두 진심으로 선생을 사랑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지금도 선생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제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 선생은 잘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그의 산중 살림이 어언 30여 년째. 이력이 길어 쌓인 내공도 겹겹일 터다. 따라서 번듯한 집과 농장을 갖추었을 성싶지만 웬걸, 거처의 모습에 애써 다듬거나 꾸민 흔적이 거의 없다. 원래 화전민이 살았다는 집부터 옛 모습 그대로다. 1000평 규모의 농장 역시 야생 초원에 가깝다. 그렇다면 천하태평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집? 또는 못 말릴 자연주의자의 거처? 후자가 정답이다. 즉 안희상(76, 다락골 구름밭 농장)과 아내 정선희(71)는 외진 산골에서 자연과 동행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데에서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고수해왔다. 농사도 유기농보다 한층 진보적인 자연농법을 구사한다. 자연의 생태 그대로를 존중하는 천연농법으로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삶과 생각의 대부분을 자연으로 채워 만족스러운 나날을 누린다.
서울에서 살았던 안희상은 대형 건설사 직원이었다. 그는 수시로 해외 근무를 했는데 45세 때의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게 산골로 이주한 계기였다. 폐 하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산이라는 요양소에 입소했다. 무너진 건강을 산에서 회복하기 위해 귀농을 했던 것. 그리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암을 물리쳐 안정적인 건강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고, 지난 30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만약 산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안희상의 답은 이렇다.
“도시 생활을 지속했다면 일찍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복잡한 일상과 식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살 길이라고 봤는데, 그게 입증된 셈이다. 자연이 주는 산나물 중심의 음식을 먹고, 번잡한 문화생활을 배제하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면서 뇌가 편해졌는데, 이 역시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준 제철 식단의 힘도 컸다.”
집이 인상적이다. 작고 낡아 불편해 보이지만 고색창연해 정겹다. 옛날 집을 원형 그대로 두고 사는 이유가 있겠지?
“100여 년 전에 화전민이 지은 토담집이다. 요즘처럼 흙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에 지어진 황토집인데, 헐어내고 새로 짓기엔 아까웠다. 8평짜리 본채에 툇마루를 보탰을 뿐 본래의 구조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 난방은 아궁이에 군불을 때 해결한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원래 있는 조건 그대로를 수용하며 살기로 했다. 이 집에서 살았던 화전민들의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자, 도시에서 익숙해진 습관과 사고를 싹 바꾸자, 그러면 병이 낫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다.”
반듯한 냉장고가 없는 대신 작은 김치냉장고 하나만 가지고 산다지?
“최대치의 간소한 생활을 한다. 적은 소유로 적은 소비를 하기 위해서다. 쓰레기 배출에 따른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도 적은 소비는 당연한 거라 봤다. 우리는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쓴다. 세탁기 없이 사시사철 손빨래를 하며, 원초적인 형태의 생태 화장실을 집 밖에 설치해 배설물을 퇴비로 바꾼다. 농사용 장비는 기계톱이 유일하다. 호미와 괭이로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온 셈인데, 그러한 육체노동이 암을 낫게 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건전한 노동은 떳떳해서 아름답다. 그런데 부인을 너무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웃음)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산다. 다행히 그의 기질은 강인하고 투철하다. 때로 파이터로 변한다.(웃음) 한편 아내 역시 불편하고 간소한 산중 살림의 긍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매사 쾌활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산에 살면서 산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대해서도 부부가 공감대를 갖고 실천해왔다.”
야생 조수는 산골의 원주민
2월 말의 산중을 채운 공기는 차갑지만 봄기운이 이미 흥건하다. 여기저기 수선화 새잎들이 소복이 올라와 솔바람에 설레어 살랑거린다. 머잖아 온갖 봄꽃들이 다투어 우르르 피어나면 숫제 야생 화원으로 바뀔 거란다. 다종다양한 약초, 야생화, 꽃나무 등속이 어울려 꽃 정원을 연출하는 것인데, 이 가상한 꽃밭이 바로 안희상 부부의 농토이자 일터다. 고구마, 마늘,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은 물론, 갖가지 산나물이 산재한 채 마음껏 활개 치는 식의 자유로운 성장을 해 결실을 맺는다. 농약을 치거나 비닐 멀칭을 해주는 식의 요령은 전혀 동원되지 않는다. 그래 자연농법이다.
안희상은 자연의 생리와 기법을 존중하는 한편 인위와 간섭을 배제하는 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농부가 해야 할 진정한 업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농부라야 비로소 이상적인 먹거리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며, 나아가 식물들이 성황리에 펼치는 순수한 생명 이벤트를 즐겁게 관람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사가 동화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즐겁기만 하랴. 농장이 자리 잡기까지 고생도 적지 않았으리라.
“구체적 계획 없이 산에 들어온 탓에 처음엔 막막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무질서한 주거 환경에서 하나하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실은 즐거웠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는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건강 문제를 잊을 정도로.”
초보 농부로서 겪은 애로점은?
“돌이 많은 밭이라 돌을 캐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았다. 초기부터 시도한 유기농법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 자라는 건 산나물들이었다. 결국 농장의 절반을 산약초로 채웠고, 유기농법을 자연농법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해서 야생에 가까운 농원이 형성됐다. 문제는 실로 낮은 소출 수준이었다. 따라서 잠시 실망도 했지만 적은 생산일망정 자연이 베푸는 선물임을 자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소출이 적다면 소득도 적을 텐데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산에 들어올 때 가져온 자금에 여유가 있어 한동안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궁색해지더라. 해법은 소비를 줄이는 데 있었다. 도시에 사는 아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건 사실 30여 년의 산중 생활 중 유일하게 낭패스러운 대목이다. 자급자족을 추구했지만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으니까.”
근래의 기후 변동으로 농부들의 애환이 많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를 불러들이는 건 건 결국 인간이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생활습관의 변화가 대안일 테고. 농사 역시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가는 게 옳다. 독성을 품은 화학농약에 의존하는 농사는 결국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를 양산할 뿐이며, 동시에 토질을 망쳐 자연 생태를 깨트린다. 관행농법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귀농인이라면 마땅히 자연농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야생 조수에 의한 농사 피해를 호소하는 농부들도 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우리는 초기에 부엌도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천장에 걸어둔 냄비에 뱀이 들어앉아 있더라.(웃음) 이걸 어쩌나. 죽여?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면 원래 이 산골에 자리 잡고 산 건 사람보다 짐승들이 먼저였다. 야생 조수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를 내쫓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멧돼지를 죽인다. 원주민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야생 조수들이 자연 속에서 하는 선한 몫까지 고려하면 해결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이 답이라는 얘기다.”
상생의 가치는 귀하지만 자신하고도 불화하며 사는 게 사람이다. 상생을 염두에 두고 내려온 귀농인조차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고심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웃과의 갈등.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도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불합리한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태와 맞닥뜨리곤 했다. 완고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겐 사실 대책이 없다. 그런데 이건 있다. 도시 사람들의 큰 이기심에 비할 때 시골 사람들의 작고 단순한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럼에도 갈등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부족하고, 재주 없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난항은 어쩌면 순항으로 데려가는 징검돌이다. 안희상은 초기의 개척시대를 통과한 탄력으로 산중의 삶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운항, 일찌감치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불편하고 낯설고 거친 생존 조건조차 ‘자연스럽게,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야생의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그는 굳이 이를 악물고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자연의 감화력에 흡수되었고, 자연농법 삼매경을 경험했으며, 건강을 회복했고, 결핍과 불만이 없는 영일(寧日)을 누린다.
“불편한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느끼며 살았다. 어떤 논문에 이런 게 있더라. 윤택한 밭과 거친 밭에 시금치 씨앗을 나누어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해 분석한 결과 거친 환경에서 자란 시금치의 약성이 더 뛰어났다는 거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한 게 아닐까? 산속에서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안분지족(安分知足)할 경우엔 삶의 질이 높아진다.”
자연의 모든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반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속에 살면서 나는 자연에 대해 외경과 감사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어떨 때 외경의 감정이 일어나나?
“가령 밭에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작은 싹이 자라 열매를 맺을 때 경이롭다. 뇌우가 쏟아지는 밤, 마루에 앉은 나의 옷깃에 날아와 앉아 비를 피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볼 때도 환희를 느낀다. 이럴 때면 성찰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꽉 막힌 산골에서 원초적인 스타일의 삶을 구현하는 일. 적게 먹고 담백하게 사는 일. 그걸 30년째 즐겁게 지속하다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삶의 관성을 넘어선 안희상의 ‘도발’이 놀라워서.
안희상이 주는 귀농 Tip
•자연은 예술을 뛰어넘는다. 자연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귀농하는 게 현명하다. 도시에서 몸에 밴 놀이 문화를 싹 버리고 시골 생활에 입문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철저하게 결여된 사람이라면 귀농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옳다.
•도시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귀농귀촌을 하면 원주민들의 문화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재능이나 자금력보다 자연에 의지하자. 자연 생태에 관한 안목과 사랑이 생기면 도시에서보다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강도 높은 노동이 요구되는 게 농사다. 따라서 50세 이전에 귀농하는 게 좋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귀농을 삼가라.
•집을 크게 짓지 말자. 철수할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매도가 어려워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유념하자.
•몸에 좋은 먹거리를 거둘 수 있는 자연농법을 하라. 그러면 오지 산골에 살더라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자연농법을 위해서는 생태 화장실이 필수품이다. 배설물로 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오고 오는 칭찬
많은 직장인이 그러하듯 에디터가 업무 도중 칭찬받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취재원과는 일로 만나 일을 하고 쿨하게 헤어진다. 시니어 매거진에서는 다르다. 첫 만남부터 칭찬이 오간다. 칭찬받는 쪽은 거의 에디터다. 시작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나이 있는 사람이 오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젊은 분이!”
칭찬은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더 후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칭 ‘초고령자 전문 인터뷰이’ 문혜진 기자는 자존감을 충전해 올 정도다. “어르신이 그래요. ‘키도 크고 얼굴도 귀엽네.
몇 살? 아이고, 애기다. 애기!’라고요. 뭐랄까, 되게 귀하게 대해주는 느낌?”
일이 끝난 뒤엔 감사 인사도 받는다. “이런 기회 아니었으면 나 같은 늙은이가 젊은 사람하고 언제 또 이야기해 보겠어요.” 칭찬에 민망해하다가 뒤돌아 콧잔등이 시큰한 것이 우리에겐 예삿일이다.
간단한 심층 인터뷰
에디터는 취재원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슬쩍 시간을 체크하는 버릇이 있다. 섭외 당시 약속한 시간에 맞춰 취재를 마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시니어 매거진에선 넘기기 일쑤다. 어르신 말씀 끊기 어려워서 30분, 질문 잊어버리셔서 30분, 인생 조언 듣다가 30분… 그렇게 삼천포로 빠진 인터뷰 방향을 되돌려 마감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부담될까 “간단히 이야기 좀 들으려고요” 하고 갔다가 깊고 길게 이야기하는 게 일상이다.
자주 간식, 가끔 식사
대개 인터뷰는 목을 축이면서 이뤄진다. 커피나 차. 그것도 아니면 생수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시니어 매거진에선 간식이 추가된다. “출출하겠다”면서 하나둘 내오는 먹거리를 완곡히 거절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어느 순간 아기 새 마냥 받아먹는 모양새가 된다. 우리는 이런 걸 먹었다. 깨찰빵, 수박, 고구마(까주심), 귤(까주심), 장어(구워주심) 등등등. 그 결과 취재팀은 입사 초기보다 조금씩 확대됐다.
뜻‘밭’의 선물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은 현장에서 잘 지켜지고 있다.
시니어 매거진에서도 마찬가지다. 뭐라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 없진 않지만 마음만 받겠다고 하고선 얼른 내뺀다.이따금 그 마음은 택배 상자에 담겨 편집국에 도착한다. 직접 밭에서 키웠다는 상추, 쑥갓 등 농산물이다. 그런 날엔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르신의 사랑을 한 줌씩 들고 퇴근한다.
시니어 매거진에서는 다반사지만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다.
탑골미술관은 어르신들의 어릴 적 꿈을 작품으로 풀어낸 ‘꿈을 다시, 봄’ 기획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문화예술 생산자로서 어르신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들이 잊고 있던 꿈들을 되새기고자 기획됐다. 박미라, 유기남, 이재영 등 작가 3인은 물감과 색연필을 소재로 그동안 가슴 속에 묻고 지냈던 어릴 적 꿈을 화폭에 펼쳤다.
박미라, 유기남 작가는 부부작가로 알려졌다. 이들은 퇴직 후 동창들과 부부동반 그림모임을 시작, 이후 유 작가 어머니의 추천을 통해 복지관 미술수업에 함께했다. 어머니인 이근숙 여사는 만 90세로, 20년째 서울노인복지센터 회원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유 작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진다”고 그림을 통한 행복감을 전했다. 박 작가는 “산에서 찍은 꽃과 풀 사진들을 그림에 옮겨 담고 있으면 꿈 많았던 나의 봄날이 떠올라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설렌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이재영 작가는 잠시 잊고 지냈던 화가라는 꿈을 손자와 함께 이루고자 한다. 신문 기자 출신인 이 작가는 막 태어난 손자에게 ‘서울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꿈을 갖고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 작가는 현재 5살이 된 손자와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젠 손자와 함께 전시를 여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 실버도슨트의 상시 해설과 함께 진행된다. 개최 당일에는 ‘오프닝 행사’로 작가와의 대화를 마련, 작품과 그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오는 4월 4일에는 ‘부부작가와 함께하는 아크릴화 체험 프로그램’을, 4월 11일에는 ‘이재영 작가와 함께하는 색연필로 서울 도심 그리기’ 등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의 의미를 더하고자 한다.
탑골미술관 관장 지웅스님은 “부부가 함께, 손자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60세를 훌쩍 넘어 새로운 꿈을 꾸는 작가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어르신들이 동기부여를 받아 새로운 취미 생활을 통해 활기찬 노후를 즐기길 바란다”고 밝혔다.
2013년에 개관한 탑골미술관은 지역주민들과 어르신들에게 미술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전시를 비롯한 연계 프로그램, 강연, 워크숍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실버도슨트 해설을 비롯해 한뼘미술관을 통한 온라인으로 전시 관람도 가능하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는가? 혹시 알음알음 퍼진 부정확한 기준과 정보 탓에 서로를 질책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쪽만의 문제,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던 섹스는 잊고 인생 2막, 3막을 위해 다시금 사랑의 도움닫기를 해보자.
섹스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은 예전에 비해 완화됐지만 아직 사람들은 ‘이 주제’를 스스럼없이 말하길 꺼린다. “에이,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나이 들어서 가족끼리 왜 그래? 주책이야”라며 서로를 등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섹스는 단순히 쾌락만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과 ‘관계’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합쳐진 삶의 소중한 자원이다. 전문가들은 성적으로 친밀할수록 두 사람 사이가 건강하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자아 존중감 회복, 삶의 의욕 증가 등 정서적 효과를 누리는 건 덤이다. 성생활을 슬기롭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섹스=거시기하다’는 인식의 오류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섹스로부터 태어났다. 2차 성징을 겪은 뒤 어른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섹스를 한다. 성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삶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인간의 근원인 셈이다. ‘거시기하다’며 민망하고 쑥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또한 ‘거시기’(성기)를 통한 삽입 성교만이 전부라 여기기도 하지만, 이는 섹스의 한 종류일 뿐이다. 애무, 오럴섹스, 키스, 포옹, 손잡기 등도 모두 섹스다.
건강한 섹스 경험의 부재
‘나이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와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성행위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기부전이나 질 윤활액 분비 감소, 감각 둔화 등으로 한계를 느낄 때도 있지만, 의학 기술의 발달로 치료를 통해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과거의 정서와 경험이 현재와 미래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 75세 노인이라도 청년 시절 행복한 섹스를 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기대와 욕구가 커지고, 25세 청년이라도 관련된 트라우마나 혐오가 있다면 몸과 마음이 섹스를 거부하는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현대로 오면서 유튜브,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쾌락이 늘어난 까닭에 점점 섹스를 경험할 기회가 줄었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현재 한국은 성관계를 적게 하는 섹스리스를 넘어 아예 성관계를 하지 않는 섹스오프 상태에 봉착했다”며 “코로나 시대와 불경기를 지내면서 연애나 사랑이 필수라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면 개인뿐 아니라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없다
‘섹스에는 정년이 없다’는 말, 이제는 흔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러 원인으로 성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랜 시간을 한 상대와, 같은 방식으로, 매번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젊을 땐 좋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되는 패턴에 만족도가 떨어진 사람, 특정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져 성생활까지 타격받은 사람, 사소한 습관이나 외모 결함 때문에 몸의 대화 자체가 단절된 사람 등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사실 좋은 섹스는 침대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함께 멋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좋아하는 꽃을 선물하고,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는 태도가 선행돼야 한다. 관계 시에도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섹스만이 쾌감을 주는 건 아니다. 섹스는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스한 온기, 떨리는 마음, 촉촉하고 매끄러운 느낌 등으로도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원하는 횟수나 시간대, 자극받고 싶은 부위, 성적 취향 등이 있다면 솔직하게 요구해야 한다. 서로의 신체적·정신적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단계다.
유외숙 상담21 성건강연구소장은 “연애·결혼 초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도 오랜 시간 불만이나 욕구를 참으며 한쪽 또는 둘 다 불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는 사람이 많다”며 “좋으면 좋고,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모 아니면 도’라 여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관계의 주체는 언제나 나여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고 만족을 위해 열심이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대화와 소통으로 중간중간 점검하며 개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유 소장은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건강한 노후를 위해 욕구와 방식을 조율하며 서로 잘 싸워야 한다”며 “한 꺼풀, 두 꺼풀 덜어내다 보면 사람 관계의 본질은 같다”고 조언했다.
중년 이후의 행복한 성을 위해 알아야 할 8가지
●부부 사이 성생활의 질은 서로의 친밀감이 좌우한다.
문제가 있을 때는 섹스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 방법을 개선하는 등 친밀감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성생활은 중년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섹스가 면역력 향상, 노화 방지, 통증 감소, 심장질환 예방, 자궁질환과 전립선질환 예방,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고 수명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중년 이후 성기능 장애 예방을 위해서는 운동이 중요하다.
운동은 남녀 모두의 성기능 장애를 예방할 수 있다. 남성의 걷기·달리기 등 유산소 운동은 발기부전 예방에, 여성의 케겔운동은 실금을 줄이고 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발기부전 같은 남성 성기능 문제는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도록 하자.
중년 이후 발기부전은 당뇨, 심장질환, 고지혈증 등의 첫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어 성인병의 신호탄이다. 발기부전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거나 친구와 상의하지 말고 전문의와 상담하자. 먹는 약이나 주사제로 발기부전을 해결할 수 있고, 성인병 동반 여부도 확인 가능하다.
●중년 여성에게 나타나는 성교 시 통증은 해결할 수 있다.
중년이 되면 질 윤활액 분비가 감소해 성교통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때 윤활제를 사용하면 된다. 이후에도 성교통이 계속된다면 전문의의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충분한 애무를 할 때 만족도가 높아진다.
여성은 삽입 성교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힘들다. 성행위 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애무해야 여성의 성적 만족이 높아진다. 가장 예민한 성감대는 질 속이 아니라 음핵(클리토리스)이다. 애무는 길게, 삽입은 늦게, 삽입 시기 결정은 여성에게 맡기기를 권한다.
●성적 호기심이 유발되도록 창조적인 변화를 시도하자.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체위,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는 활력을 주기도 한다. 부부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멋진 장소에서 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등 판타지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다.
●용불용설(用不用說), 규칙적인 성생활 여부에 따라 성기능이 유지되거나 퇴화한다.
중년 이후에도 꾸준한 성생활을 통해 성기능이 향상되고, 성적 만족도 높아질 수 있다. 중년 이후 많은 부부가 젊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다.
출처 ‘2015 대한성학회 추계학술대회’, 정리 이범석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교수
보건복지부와 대한노인회가 경로효친의 전통 미덕을 기르고, 어르신에 대한 정서적 지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제52회 어버이날 기념식 행사를 실시한다.
해당 행사는 오는 5월 3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서울 중구 장충동 동호로 241)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식전 행사와 기념식 1부, 기념식 2부 순으로 이어지며 식전 여흥을 위한 부스 운영, 레크레이션과 축하 공연, 유공자 포상, 카네이션 달아드리기 및 선물 전달, 생신 어르신을 위한 축하 케이크 커팅, 오찬 등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돼 있다.
초청 대상 인원은 노인, 정부, 국회, 노인 단체 관계자, 포상 대상자 등 약 5천 명이며 행사 현장은 실버itv와 유튜브를 통해 중계된다.
한편 행사를 주최한 대한노인회는 올해 27개 지자체를 시작으로 대한노인회가 권고한 표준안 중심의 스마트 경로당 권고모델을 전국 7만여 경로당으로 점차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표준안이 담긴 모바일 플랫폼도 상반기 중 구축, 300만 회원들에게 배포한다.
올해에는 글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바로 글감이다. 무엇에 관해 쓸지가 문제다. 사실 글쓰기는 ‘어떻게’보다 ‘무엇’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글을 ‘어떻게’ 해야 잘 쓰나요?” 질문의 순서가 잘못됐다. “‘무엇’에 관해 글을 쓸까요?” 이 물음이 먼저여야 한다.
무엇에 관해 쓸지 고민하는 이에게 나는 자신 있게 권한다. “자신에 관해 쓰세요. 자신에 관해 쓸거리는 세 가지가 있어요.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느낌, 자신의 경험이죠. 이 중 가장 쓰기 쉬운 게 자신의 경험입니다.”
누구나 쓰기 쉬운 ‘경험’
생각과 느낌을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험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이만큼 있다. 내 경험은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다. 경험은 또한 차등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방끈이 길든 짧든 경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사람이 경험은 더 풍부하다. 또 그렇게 아프고 슬픈 경험, 굽이굽이 험난한 경험이 탄탄대로를 걸은 경험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많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명상과 모방과 경험이 그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이 세 가지 가운데 경험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글을 쓰는 데는 명상이나 모방이 더 어렵다.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경험이 더 쉽다.
인생은 경험의 모음이다. 산다는 건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이 모여 삶을 이룬다. 첫사랑, 첫 출근, 첫 등교 등과 같은 첫 경험을 비롯해 숱한 만남과 선택의 경험 등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걸 글로 써보자.
경험을 쓰는 일곱 가지 방법
첫째, 기억을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경험을 회상해보라. 떠오르는 기억이 없으면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도 들어보고, 빛바랜 사진첩과 일기장도 들춰보자. 당시 기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둘째,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가장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은 무엇인가요?’, ‘그 당시로 돌아가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반대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고마웠던 사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요?’,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던 사건이 있다면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등등.
셋째, 탐문한다.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수집해보는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그분들에게 여쭤보고, 형제자매, 과거 직장 동료,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에 잠겨도 보자. 스스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혹은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용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경험만 글감이 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 글을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된다. 무엇보다 이런 기억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넷째, 새로운 경험을 한다. 과거 기억만 쓰면 소재의 한계에 부닥친다. 밑천이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살고 있는 현재를 써야 한다. 현재를 쓰기 위해선 시도하고 도전해야 한다. 나는 매일 한 일을 기록한다. 기록이 없는 날은 허전하다. 기록이 빼곡한 날은 왠지 뿌듯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서 흐뭇하다. 마치 고기 잡는 어부가 만선을 이룬 기분이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경험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경험이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많다. 현업을 떠난 사람은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그 나이까지 해온 경험이 있어 보다 원숙하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직장에 다닐 때까지는 경험이 제약된다. 맡겨진 일, 시키는 일에 한정된다. 나를 위한 경험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경험이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는 경험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 남의 생각을 읽는 경험이다. 나이 들어 하는 경험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어차피 덤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의 시도는 하는 만큼 남는 장사다.
다섯째, 미래도 괜찮다.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일, 바라고 소망하는 일도 훌륭한 글감이 된다. 10년 후,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꿈과 목표를 이뤘을 때의 상황을 그려보자. 미래는 상상의 결과물이고,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말이다.
여섯째, 하지 못한 경험도 글의 재료가 된다. 나는 할 수는 있었으나 하지 않은 일이 있다. 정치인의 일이다. 아마 했으면 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고 싶었으나 못 한 일이 있다. 언론인이 되는 것이다. 아마 했으면 잘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 내용을 글로 쓰면 된다. 이처럼 한 일만 경험이 아니다. 하지 못한 일, 하고 싶었던 일, 안 한 일 모두 경험이다. 미련의 경험, 희망의 경험이다.
일곱째, 독서다.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내 몸으로 한 경험이 직접경험이요, 다른 사람의 경험은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은 책에 널려 있다. 이런 간접경험을 글에서는 사례라고 한다. 사례가 풍부할수록 글은 더 풍부해진다. 책을 읽고 사례를 찾아보자.
경험을 쓰는 방법
이렇게 쓸거리가 마련되면 ‘무엇’이라는 걸림돌은 사라진다. 다음은 ‘어떻게’ 쓸 것인지, 그 문제에 봉착한다.
먼저, 솔직하게 써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첫 관문은 솔직함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경험을 말하는 용기로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오감을 모두 동원하고 육하원칙을 다 집어넣어 써라.
이야기 순서와 비중도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과거에서 미래로 비약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지금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면 좋다. 시간뿐 아니라 좋은 일과 궂은일, 도와준 사람과 해코지한 사람, 친구와 천적이 번갈아 등장해야 한다. 또 어떤 이야기는 비중 있게 다루고, 어떤 이야기는 살짝 맛만 보여주는 식으로 무게를 달리해야 글에서 입체감이 느껴진다.
경험을 얘기한 후에는 그걸 겪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써야 한다. 독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읽고도, 그것에서 얻는 게 없으면 실망한다. 다행히 모든 경험에는 시사점이 있다.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충분히 숙고해서 숙성시키면 깨달음과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바로 그 경험의 의미를 담으면 된다. 같은 경험도 각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음으로, 경험의 배경과 맥락을 추가한다. 그 경험이 어떤 배경에서 왜 일어났는지, 무엇이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했는지, 경험이 일어난 사회적·경제적 맥락과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학교에 진학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끝으로, 경험을 일반화해줘야 한다. 자신의 경험만 쓰고 말면 독자들이 “왜 당신 얘기를 내게 하는 거야?”라고 물을 수 있다. 그때 일반화를 통해 “이건 나만의 얘기가 아니고,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유사한 경험을 한 유명한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경험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된다.
경험이 주는 혜택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선사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쉰 살 전까지 말하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떻게든 말하는 자리를 피했다. 말 안 해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쉰 살 넘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말을 해보니 내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니, 말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만약 쉰 살 넘어서도 직장에 계속 다녔으면 말없이 살았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강의나 방송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경험은 나조차 몰랐던 나를 아는 기회가 된다.
경험은 또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나의 마지막 직장은 출판사였다. 거기서 불과 일 년 좀 넘게 일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출판업계를 알게 됐고, 내 책을 쓰게 됐다. 당시 나는 새로운 우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우주가 있을까. 정유소, 편의점, 마트, 음식점 등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안에 우주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세계에 들어가 경험해보면 밖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가 모르던 신천지가 펼쳐진다.
경험은 치유의 메시지도 준다. 지난 기억을 곱씹어보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럽고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기억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런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픈 상처가 아물고 치유된다.
경험은 다음 세대에게 본보기도 된다. 이 땅에 와서 살았으면 뭐라도 남기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경험이 개인에 머물면 기억에 불과하지만 이걸 글로 쓰면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고,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전승된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다. 나만의 경험을 기록하자. 기자같이 오늘의 나를 쓰고, 사관처럼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