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도 함께 즐겨보세요.할머니는 매일 쓴 편지지를 봉투가 미어터지게 넣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색 노트를 매일 한 장씩 세로로 길게 반 접어 착착 개어둔 편지. 할머니는 매일 편지를 쓰면서 나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를 살리고 있었다. 이제야 나도 할머니를 떠올리며 늦은 답장을 쓴다. 할머니가 외로워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 ‘오늘내일하는 사이’, 17p
1931년생 임봉근, 1991년생 임다운은 친할머니와 손녀 사이다. 같은 성씨를 써서일까. 두 사람의 관계는 유독 친밀하고 특별하다. 6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인생 최고의 길동무’라 부른다.

할머니와 손녀가 같은 성씨를 쓰는 사연은 책 ‘오늘내일하는 사이’의 출발점이다. 과거 임봉근은 가정을 기울게 한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며, 자녀들의 성까지 자신의 성인 ‘임’으로 바꿔버렸다. 손녀 임다운은 그런 할머니를 ‘신여성’이라 부르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임씨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놀랄 만큼 잘 통한다. 웃음 포인트와 식성은 물론, 책을 사랑한다는 점까지 닮았다. 임봉근은 “그 누구보다 손녀와 대화가 잘 통한다”고 말한다. 임다운에게 할머니는 “인생 최고의 길동무”다. ‘길동무’는 임봉근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여러 친구를 먼저 떠나보낸 노년의 시간 속에서 길동무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 길동무인지도 모른다.
외동딸 임다운은 부모가 편히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2020년 결혼하며 할머니를 독립시켰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날만 기다리는 할머니는 가끔 손녀에게 전화를 걸어 먹고 싶은 음식이나 필요한 물건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쓴다. 그리고 손녀가 오면 차곡차곡 모아둔 편지를 건넨다.
손녀는 그런 할머니의 편지에 늦은 답장을 썼고, 두 사람의 편지가 묶여 ‘오늘내일하는 사이’가 됐다. 같은 일화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과 다정한 사랑이 이 책의 매력이다.

두 분의 편지가 한 권의 책이 됐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봉근 갑자기 작가 소리를 들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내가 말년에 책을 좋아한 덕을 이렇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주도 없이 쓴 글을 출판사 대표님께서 책으로 만들어주시니, 참 감사했어요.
다운 책을 엮으며 편지를 다시 읽다 보니, 할머니에게 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새삼 느꼈어요. 할머니가 매달 저와의 만남을 무척 기다리고 계셨더라고요. 저 역시 책을 쓰면서 제 삶의 많은 부분이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죠.
책이 나온 뒤 주변에서 “그렇게 속 깊고 착한 사람이었냐”는 연락도 많이 받았어요.(웃음) 사실 저는 그 정도 사람은 아닌데, 할머니가 저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기록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은 평생 간직할 보물처럼 느껴져요.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다운 저의 결혼식 축가 얘기가 생각나네요. ‘웨딩 싱어’ 파트에 쓴 이야기죠. 결혼식 축가를 부탁하자 할머니는 고민 끝에 결국 “죽기 전에 이거라도 해줘야지”라면서 승낙하셨어요. 할머니는 편지를 통해 ‘3개월간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화장실에 있을 때마다’ 축가 연습을 하셨다고 하셨죠. 그리고 ‘할머니 말년에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표현하셨고요. 같은 일을 두고도 미처 몰랐던 할머니의 마음이, 기록을 통해 더욱 크게 와닿더라고요.
봉근 다운이가 한 달에 한 번씩 꼭 보러 왔는데, 어느 날은 두 달 만에 온 적이 있었어요. 나는 속으로 ‘아이고, 이제 지쳤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다운이가 “할머니, 나는 안 지쳤어. 회사 일이 바빴을 뿐이야”라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어요. 지금도 그때의 눈물이 잊히지 않아요.

어떻게 손녀가 할머니의 성을 쓰게 됐나요?
봉근 남편이 집안을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났어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봤죠. 남편을 보내버리고 나는 나대로 살자고 돌아왔는데,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바로 아이들 성이었죠. 그래서 아이들 성까지 제 성인 ‘임’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손녀가 당시의 결정을 많이 이해해 주더라고요. 그게 참 고마워요.
다운 그 시대에 여성이 그런 결단을 내린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사람이죠. 저는 할머니가 고분고분 참고 살지 않고,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대차게 살아온 게 너무 멋있어요.
다음 세대에도 ‘임씨’ 성을 잇기로 한 이유는요?
다운 남편도 할머니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해요. 그래서 제가 ‘엄마 성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지지해줬어요. 족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이미 ‘성’이라는 게 절대적인 질서가 아니라는 걸 할머니를 통해 배웠어요. 제 아이도 이 특별한 역사를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봉근 다운의 얘기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랐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지만, 다운이는 남편이 반듯하고 좋은 사람인데 왜 그랬을까요? 혼인 신고를 하면서 결정한 터라 행정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저는 지금도 “증손주는 임씨 성을 따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95세에도 건강한 노년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봉근 저는 고독하게 사는 시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사람을 성장시키더라고요. 결국 노년은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독서가 제 건강 비결이에요. 책은 정신의 약이거든요.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고 눈을 뜨게 되죠. 저는 어릴 때부터 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지금도 책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요.
(주민욱 프리랜서)딴 사람과는 딱히 할 말이 없는데도 다운을 만나 손을 잡고 걸으면 생수처럼 솟는 사랑의 언어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것도 친구도 아닌 자식도 아닌 손녀인데 가장 배짱이 맞는 명콤비가 되었으니 내가 널 만나면 행복하고 살맛이 나서 말이야. 먹거리도 같이 먹으면 맛나고 젊어지는 마음이야.명을 이어주는 너의 언어들은 하늘의 축복이지. 좋은 일도 못 하고 살다 가는 보잘것없는 할매인데 하느님께서 손녀 복을 주시매 감사 기도 드릴 뿐이야.
- ‘오늘내일하는 사이’, 238p
할머니와의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계신 것 같아요.
다운 할머니가 늘 “많아야 1년 더 산다”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섭고 싫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별 역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있을 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함께 잘 지내고, 내일까지 무사하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할머니를 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책 제목이 ‘오늘내일하는 사이’죠.
서로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봉근 우리 다운이는 손녀라기보다는 ‘나의 사색적인 친구’예요. 나하고 비슷한 점이 많은데, 무엇보다 언어가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가 엉뚱한 데로 흘러가 싸움이 되기도 하는데, 다운이는 제 말을 다 받아주죠. 둘 다 책을 좋아해서 세계가 통하는 것 같아요. 매달 만날 때 책을 사오니 더할 나위 없는 손녀죠.
다운 할머니는 제 인생 최고의 길동무죠. 저는 ‘길동무’라는 할머니의 표현이 참 좋아요. 친구들도 그 말을 많이 따라 쓰더라고요.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길을 함께 걷는 동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서로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요?
봉근 다운이는 참 기특하고 고마운 손녀예요. 손주 사위도 참 좋은 사람이에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천국 같아요. 앞으로도 서로 존중하며 살았으면 해요. 다운이가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요.
다운 할머니가 95년 동안 대차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오늘내일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할머니한테 이 말을 전하고 싶어요. “나의 길동무가 돼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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