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의 저자 김원희 씨. 나이 듦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쩐지 그냥 ‘할머니’는 아쉬워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일흔을 넘긴 나이, 혹자는 지팡이를 들어야 때가 아니냐고 묻지만,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여행용 캐리어를 끈다. 모닝 펍에서 즐기는 생맥주 한잔, 영화 같은 풍경 속 자유로운 젊은이와의 만남, 그리고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가 아니라는 확신, 김원희 씨가 오늘도 여행을 꿈꾸는 이유다. “육체가 허락하는 한 세상 전체를 다 돌아보고 싶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책 제목에 언급된 ‘진짜 멋진 할머니’는 어떤 모습을 의미하나요?
A.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노년의 삶을 사는 것. 또 자신의 자리를 알고, 걸맞게 행동하며 받아들이는 삶이 ‘진짜 멋지다’고 생각해요.
Q. 노년에 접어들어 젊은 시절 꿈꿔왔던 해외여행을 떠나셨지요. ‘나이’라는 제한에 막상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꿈을 이룬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결단의 문제이겠지요. 저는 자녀가 자립하는 시점에 내 꿈을 실행에 옮기리라 마음먹고 있었으니까요. 아들이 짝을 찾고 정신적으로 완전 독립하고 안정되었다는 확신이 섰어요. 이제는 더 주저할 게 없다는 생각에 결심을 하게 된 거죠.
Q. 꿈을 이뤄 즐거웠겠지만, 아무래도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고생스럽다거나 특별한 고충을 느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물론, 음식이나, 언어, 피로감 같은 것이야 있었지만, 그것은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떠날 때 이미 각오하고 떠나는 것이니까요. 당연히 극복해야 해야 했죠. 오히려 어떤 어려움을 만나 극복하고 나면, 더 뿌듯하고, 삶에 감사하게 되더군요.
Q. 젊은 시절과 비교해 현재 즐기는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A. 사실, 젊을 때는 사는 게 바빠서 해외여행을 가 본 경험이 거의 없어요. 국내여행, 아니면 패키지로 짧게 며칠 다녀왔기 때문에, 친구들과 뭉쳐서 떠들고 즐기다 온 것뿐이라, 특별한 의미도, 기억도 사실 나지 않아요. 나이 들어 여행은, 그것도 자유 여행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느낌은 참 경이롭습니다. 여행은 나이 들어 해야 제 맛이라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Q. 여행에서의 만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누구인가요?
A. 많아요. 그중에서 꼭 꼽으라면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에 소개된 프라하에서 만난 각국의 신학생이에요. 광장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사랑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주었죠.
Q. 버킷리스트가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라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A. 다리 운동이 필요하겠죠. 이 나이에 과격한 등산은 하지 않아요.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걷기를 합니다. 집 주위도 좋고요. 성당이 집에서 멀어요.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걸으면 1시간 정도예요. 왕복 2시간입니다. 평일 미사 때도 그렇게 합니다. 이렇듯 그냥 생활 속에서 걷기 운동 정도예요. 산티아고 관련된 책도 많이 읽고요.
Q. 수많은 여행을 다니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동지애’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냥 그렇게 산다는 거예요. 우리처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인 거죠.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환경이 달라도 우리는 그냥 한 생을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인 거예요. 소매치기를 만나도, 친절한 사람을 만나도, 그들 모두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라는 거죠.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Q. 최근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여행이 어렵습니다. 본래 계획하셨던 일들을 잠정 미뤄두셨을 거 같은데요. 코로나19 기간은 어떤 즐거움으로 보내시는지, 또 사태가 진정되면 펼칠 꿈은 무엇인지요?
A. 독서입니다. 독서가 주는 즐거움은 최고예요. 지금처럼 외출을 자제해야 할 때, 독서만큼 좋은 취미가 없죠. 언제든 하늘 길이 열리면 세상 구경을 하러 나갈 거예요. 코로나19가 끝났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마 제가 제일 먼저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을 것 같은데요!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온갖 꽃과 새들이 인사하고 잠이 덜 깬 고양이는 주인의 등에 기대 졸고 있다. 전신줄을 달리는 것은 놀랍게도 쥐가 아닌 다람쥐다. 태국 음식점의 아낙네는 요리 재료 파인애플을 싣고 가게로 향하고 기타를 맨 연주자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치앙마이 올드시티의 아침 풍경. 오늘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왓치앙만 사원에 들러 진한 향의 프렌지파니(참파꽃)로 지인을 추모하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늘 가는 카페로 가는데 골목길 벽화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소원하기를 멈추고, 실행하기를 시작하라(stop wishing. and start doing).”
치앙마이를 설명하는 두 개의 말은 ‘사바이 사바이(천천히 천천히)’와 ‘마이 밴 라이(괜찮아요)’다. 겨울에 힘 빼고 살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겨우내 추위와 미세먼지로 움츠렸던 어깨와 관절이 다 아파오는 것 같다. 맹세코 다음 겨울엔 따뜻한 나라로 피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시니어에게 최적의 체류 여행지로 각광받는 태국 북방의 장미 ‘치앙마이’를 소개한다. 사방 어디에 눈을 둬도 초록이어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곳. 특히 건기인 12월에서 2월은 한국의 강추위와 미세먼지를 피해 최고의 쾌적함을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아침엔 20℃, 낮엔 30℃까지 올라가는 일교차가 큰 날씨이지만 건기라서 습하지 않다. 오히려 아침저녁으로는 약간 쌀쌀하기까지 한 쾌적한 날씨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한두 차례 방문 경험이 있는 겨울 휴양지이기도 하다. 치앙마이에 한 달에서 석 달 혹은 일 년 이상 머무는 장기투숙객이 많은 이유는 장기투숙을 할수록 저렴해지는 숙박비와 한식 생각이 안 날 만큼 입맛에 맞는 음식, 맨발로 화장실을 들어가도 될 만큼의 청결한 숙박 시설, 그리고 긴장을 놓고 있어도 소매치기당할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안전함 때문이다.
사바이 사바이, 슬로 라이프!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목소리와 미소로 응대하는 태국인들은 길을 막고 선 차가 비켜주면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다. 스쿠터나 오토바이 소음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아무리 길이 막히고 답답해도 경적을 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인도나 횡단보도도 제대로 없고 오토바이 소음이 심해 처음엔 다소 불편함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순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평화로워진다. 잘못 계산한 커피 값도 너무 많이 냈다며 굳이 찾아와 돌려주는 곳. 물건을 놓고 나간 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 가도 그 자리에 곱게 놓여 있는 곳. 라오스와 미얀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그곳은 다 같이 가난한 나라여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데서 오는 행복이라 여겼다. 치앙마이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있는데도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욕망이 뿜어내는 독소가 안 느껴져 평화롭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답답한 면도 있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 예의 바름과 친절함은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을 내 집처럼 편하게 느끼도록 해줬다. 카페도 밥집도 다섯 시면 문을 닫는 곳이 많고 일부를 제외하면 허름한 가게와 유명한 가게의 음식 값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받을 만큼만 받고 필요한 만큼만 벌 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워라밸을 실천하는 사람들. 아무리 바쁜 마사지사도 연말 대목은 가족과 함께 보내느라 일을 쉰다.
‘한 달 살기’를 작정해도 가자마자 어찌 현지인 코스프레(?)가 가능하겠는가. 한국에서 딴 동네로 이사를 가도 주변 파악에 한 달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과욕은 금물이다. 이곳 레지던스 대여 단위대로 석 달이나 일 년 이상 산다면 모를까. 한 달을 살기에는 여전히 여행자의 마음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다만 지내는 동네가 산티탐처럼 좀 더 주택답거나 아파트형 레지던스처럼 한국에서 살던 구조와 비슷하다면 빨리 안정을 찾을 수도 있겠다. 소소한 골목 탐험이나 카페 탐험, 뒷골목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올드시티에 집을 얻는 게 좋다. 한 달 살기는 어떤 조건으로 사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한 달 기준 장기 렌트 시 30만 원에서 60만 원이면 부부가 살기에 괜찮은 숙소를 구할 수도 있다. 저렴한 생활비로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아보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교통은 한국처럼 지하철이 있거나 버스 노선이 다양하지 않아 처음엔 적응이 안 되고 불편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썽태우(합승택시)나 그랩(일명 태국판 카카오택시)으로 목적지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렌트카는 우리와 반대쪽 핸들인 데다 일방통행이 많아 활용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 가장 저렴할 것처럼 보이는 툭툭은 바가지가 심하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요가 학교에서 투어 프로그램까지
장기 체류자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요가나 태국 마사지를 배우기도 하고 쿠킹 클래스에서 팟타이나 양꿍 같은 태국 요리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올드시티의 토요시장, 일요시장을 비롯해 왓(wat)이라 불리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원만 방문해도 다 못 볼 만큼 볼거리가 충분하다. 가는 곳마다 산재한 여행사에서 치앙라이, 치앙다오, 빠이 등으로 가는 근교 여행 프로그램은 물론 무아이타이, 카약, 집라인, 자전거, 에코 트레킹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해 심심할 틈이 없다. 태국 북쪽 라오스 국경에 있는 우돈타니에서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꽃바다를 볼 수 있다. 걷다가 피곤하면 타이 마사지를 받고 아름다운 카페에서 재충전하기 좋은 곳. 머물수록 점점 더 있고 싶어지는 쉼터 같은 곳이 치앙마이다.
언제나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와디카(안녕하세요)”, “코쿤카(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 극성스럽게 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음을 알게 해주는 곳. 그래서 치앙마이에 처음 오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달만 있어보려고 왔는데 몇 달째 있네요”라거나 “치앙마이만 다섯 번째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 살이 팁
숙소의 선택 인터넷만으로는 주변 환경(소음이나 분위기. 교통편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직접 가서 보고 고르길 추천한다. 장기 입주의 경우 협상에 따라 할인 폭이 크다.
교통 택시인 툭툭, 합승택시인 썽태우, 최근엔 버스도 생겼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저렵한 가격에 이동하는 수단은 그랩(grap, 동남아의 우버)이다. 렌트카는 오른쪽 핸들이니 참고할 것. 스쿠터도 외국인의 경우 오토바이 면허가 있어야 대여 가능하다.
나에게는 조그만 여행용 가방이 있다. 벌써 몇 년째 충실한 동반자 역할을 하며 지구 반대편을 함께 다녔다. 서유럽, 북유럽 등 여러 나라를 다녔고 터키에도 10여 일이나 넘게 동행했다. 옛날에 가지고 다니던 가방은 좀 낡고 작아 새로 구매했는데 귀중품을 넣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애용했다. 여행할 때는 어깨걸이 멜빵을 하고 허리띠에 끼워 덜렁거림을 방지하면서 도난의 위험을 막았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했어도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 여행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이 열린 것이다. 여행 중 가이드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소지품 조심하라는 말이다. 가방 속에는 여권, 신분증, 신용카드, 현금 등 귀중품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면 어렵게 온 여행을 망치게 된다. 여권 없이는 꼼짝도 못한다. 유럽은 이러한 가방을 노리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떠돌이 집시들이 많다. 가난한 나라에서 넘어와 일자리 없이 방황하거나 쉽게 돈 버는 일에 빠져든다. 그래서 도난사고가 잦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내 가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지나쳤던 걸까? 스페인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꽃보다 할배’라는 모 TV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누에보다리’에서였다. 신구 시가지의 경계인 120m 협곡에 놓인 다리 길이는 얼마 안 되었는데 아래로는 완전 벼랑이었다.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벼랑 위 양쪽에는 조그만 집들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카페도 있어 차를 한잔하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 기이한 장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나도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겨가며 열중했다.
이때 어디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저씨~” 마치 비명소리 같았다. “저 사람이 아저씨 가방에서 검은 지갑을 꺼냈어요~” 돌아보니 신혼부부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와 시어머니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있었다. 그중 젊은 여자가 내 가방을 뒤졌다고 했다. 곧바로 외국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한 뒤 뭘 가져갔느냐고 보디랭귀지로 따지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무기력한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가방 속을 살펴보니 다행히 지갑은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의 외침을 듣는 순간 도로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혼자 하지 않고 신혼부부나 가족처럼 여행객을 가장한 3인조 전문 털이범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행운이었다. 만약 지갑이 털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팔을 잠시 올렸을 뿐인데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주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작전 성공이었을 것이다.
여행 관련 격언이 떠오른다. “등 뒤에 있는 물건은 공동의 것이고, 옆에 있는 것은 나눠 쓰는 것이며, 앞에 있는 것만이 내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를 가기 위해서는 로마나 파리를 경유해야 한다. 나는 그중에서 파리 경유를 선택했다. 나만의 이유가 있다. 아주 오래 전의 파리 여행을 했을 때는 어린 두 아들을 챙기며 사진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깃든 파리 사진이 얼마 없다. 이번엔 잠깐이지만 파리 사진을 많이 찍어보고 싶었다.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도 여유 있게 더 준비했다. 늘 간단히 하나 들고 나섰던 카메라에 이번엔 렌즈도 하나 더 넣었다.
그날따라 파리 드골 공항에선 공연히 분주했다. 트렁크 속의 카메라 가방을 꺼내어 따로 메고 가려했지만 어쩐지 공항의 심란한 상황으로 그럴 틈이 안 생겼다. 마음이 분주하다 보니 진땀나고 정신도 없었다. 이날따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줄도 길어서 지쳐버렸다. 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예약해둔 숙소에 가서 어서 빨리 짐을 풀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RER기차의 B노선은 문이 활짝 열린 채 출발지의 여유를 보여준다. 이 여유로움이 문제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긴 비행시간과 입국절차의 피로가 방심을 만들었을까.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가끔 이때를 생각해 본다.
파리의 도둑놈은 재빨랐다
도둑을 도둑님이라 할 수도 없고 도둑이라고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놈'자를 써 보고 싶다. 기차에 올라 트렁크를 내 자리 옆에 놓고 출발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지 휴대폰 시계를 잠깐 보며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 불과 10초나 20초 정도였을 것이다. 내 옆에 있던 트렁크가 순간 없어졌다. 어? 둘러보아도 없다. 내 비명에 모르는 주변 사람들도 일어나 친절하게 이쪽저쪽 찾아봐 준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출발 전 기차에서 얼른 내렸다. 그리고 무전기 들고 오가는 공항직원에게 말했더니 안내데스크에 우릴 데려다 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하는 그들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어 직접 물어물어 미로 찾듯 공항경찰을 찾아갔다. 이때쯤 난 가방 찾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냥 맥없이 포기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파리 사람들의 이런 짓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분노와 멍청함으로 온전치 않은 정신의 내게 친절히 길안내를 해준 지나던 멋진 조종사와 젊고 착한 어느 공항직원이 그나마 미쳐버릴 것 같았던 나를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육중한 철문의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인터폰으로 연결해줘야만 하는 또 다른 공항직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겁 없이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니 건장한 흑인 경찰이 우릴 맞는다. 경찰복으로 무장한 그 모습에 조금 두려움이 생겼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미 피곤하고 지쳤다. 정수기가 보이기에 물 좀 먹어도 되는지 물었더니 직접 한 잔 받아다 준다. 친절하군...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정식 절차에 따라 분실 신고를 하면 된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째야 하나 막막했지만 영어를 그런대로 받아주어 남편이 한참을 설명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있더니 전화를 받아보라고 한다. 한국인 여자 불어 통역사였다. 세계 각국의 통역 장치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파리 경찰과 통역사를 중간에 두고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했고 연락처와 연결방법 등을 남겼다. 전화를 끊기 전 그 통역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데요... 크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각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서요." 아무튼 파리 공항경찰에서 마음껏 한국말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무조건 고마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경찰은 그것을 한 시간 정도 서류화 하느라 바빴고 우린 기다려 여러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서야 끝이 났다.
공항열차를 타러 밖에 나오니 캄캄했다
기진맥진했지만 분풀이하듯 공항경찰에 모든 걸 털어내고 나서 그런지 시원했다. ‘까짓 가방 하나 잃어버릴 수도 있지 뭐, 살다 보면 별별 일 다 있는데 여행 중에 이런 일 정도 해프닝이라 해 두자...’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호텔에서 잠들라치면 속이 뒤집히며 화병을 일으키듯 속상하기를 몇 번이었지만 이런 여행도 해 본다 하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참아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여권이나 여행에 필요한 중요물품은 모두 남편 가방에 있었다. 오직 내 가방만 분실했기에 여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잊어버리라 누누이 말한다. 하지만 내 옷가지와 필요물품 정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카메라 관련 일체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가끔 유럽 여행 중에 생기는 도난방지 꿀팁이라거나 소매치기 체험기를 듣곤 했다. 그러나 나는 무심히 다녀도 그런 일은 여태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고 잘난 척했다가 이렇게 크게 당한 꼴이 되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더없이 소중하고 아까운 내 카메라 생각에 속병이 날 지경이었지만 이젠 분통 터지는 내 여행의 경험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종종 메일을 뒤적이며 프랑스 경찰의 소식이 없나 찾아본다. 혹시라도 본분에 충실한 파리의 어느 경찰 덕분에 내게 연락이 오는 기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는 중이다.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리아다. 면적은 156만7000㎢로 한반도보다 7배 정도 크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거주자는 124만 명이다. 인구 밀도는 1.78명/㎢이고, 평균수명은 65.2세로 남자 62.9세, 여자 67.6세다. 몽골인들은 주로 염소, 양, 소, 말, 낙타 등을 키운다. 가축 수는 총 3270만 두에 이른다. 몽골인의 90%가 라마불교를 신봉하며, 이슬람교도가 5%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개신교 및 가톨릭 등이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약 2%(약 4만 명 추산)에 이른다. 나머지 3%는 무신론자다. 몽골의 국화가 연꽃인 것도 불교의 영향이다.
몽골 표준시는 한국보다 1시간 느리고, 한국과의 거리는 약 2000㎞다.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몽골 정보
국명 몽골(Mongolia(영어), МОНГОЛ(몽골어))
위치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에 위치
면적 156만 7000㎢, 세계 19위
민족 할흐 몽골족(90%), 카자흐족(5.9%), 브리야트계(2%) 등 17개 부족
언어 할흐 몽골어 90%, 키릴문자, 문맹률 5% 이하
종교 라마불교 53%, 무교 39%, 이슬람교 4%, 기독교 4%
기후 건성 냉대기후
인구 약 300만 명, 세계 138위
수도 울란바토르(Ulan Bator)
국가 형태 공화국
정부 형태 의원내각제적 성격이 강한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중간 형태
국내총생산 (GDP)US$ 102억(2012년), 1인당 국내총생산 US$ 3575(2012년)
화폐단위 투그릭(Tg, Tugrik), 1미국달러 = 2458투그릭(2018년 6월 기준)
독립일 1921년 7월 11일(중국으로부터 독립)
국가선포일 1924년 11월 26일
몽골의 날씨 6~8월 몽골 여행의 베스트 시즌. 초원에는 풀이 자라고 맑고 쾌적한 날씨가 계속된다. 한국의 화창한 가을날과 유사한 날씨로 낮에는 해가 강하지만 그늘은 시원하다. 습도가 매우 낮은 여름의 몽골은 고온 다습한 한국의 여름을 피하기 가장 좋은 피서지다. 일교차가 심하고 한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두꺼운 파카가 필요하다. (평균기온 최고 30℃ 최저 15℃) 9~10월 몽골의 가을은 한국의 가을보다 일찍 찾아온다. 약간 쌀쌀하지만 여름 성수기를 지났기 때문에 여행자로 북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액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중부지역과 남쪽 고비 사막 지역의 경우 9월 말까지도 여행이 가능하지만, 추위가 일찍 찾아올 경우 북부 홉스골 지역은 여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승마와 트레킹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몽골의 기념품
캐시미어 의류 캐시미어용 염소(산양)의 털을 빗겨 채취한 최고급 100% 캐시미어는 국내 시중가의 절반 가격이다. 여행자들에게는 목도리, 니트류, 숄, 양말 등이 인기가 많다. 고비 팩토리숍, 국영백화점 2층, 서울의 거리 로드샵에서 구입할 수 있다. 여성용 목도리는 한화 약 3만~5만 원 정도. 제품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다.
펠트 소품 양털을 압축한 펠트로 만든 컵받침, 몽골인형, 열쇠고리 등 제품이 다양하다. 국영백화점 6층 기념품 숍에서 개당 한화 3000~7000원 정도다.
보드카 몽골 북부 셀렝게 지방의 질 좋은 밀로 만든 몽골 보드카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 여행자 인기 품목이다. 700ml 1병에 한화 약 2만 원가량 하며, 소욤보, 칭기즈칸, 벌러르 같은 브랜드를 추천한다. 그러나 매월 1일은 몽골 전 지역에서 주류 판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여행기간 중 매월 1일이 포함되어 있다면 사전에 구입하길 추천한다. 또한 국내 입국 시 1인당 휴대품 면세 범위 규정에 따라 주류는 1인 1ℓ 1병까지만 허용되니 이 점도 유의.
초콜릿과 과자류 단것을 좋아하는 몽골인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초콜릿과 과자가 많다. 특히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초콜릿 등은 선물용으로 좋다.
차가버섯 건강식품류 몽골에서 생산되는 차가버섯을 이용한 차, 분말 등의 건강식품도 최근 들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몽골의 드럭스토어인 모노스 숍에서 판매한다.
립밤, 수분크림 등 보습제품 겨울이 길고 추운 몽골에서는 다양한 보습 제품이 한국보다 저렴하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히말라야 립밤, 수분크림 등은 국내 시중가의 절반 정도다.
테를지 국립공원
테를지 국립공원은 힌티 산맥 산기슭에 위치한 몽골 최고 휴양지로 울란바토르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으며, 승용차로 약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기암괴석, 숲, 초원,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툴 강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여름철에는 에델바이스를 비롯해 각양각색 야생화가 피어난다. 말타기 체험, 야생화 트레킹 등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거북바위
테를지 국립공원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거북바위는 이름 그대로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 웅장한 규모의 거북바위 주변에는 항상 관광버스와 단체 여행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들도 있으니 한 곳쯤 들러 맛보길 권한다. 테를지 최고 관광지답게 여름 성수기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소지품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엘승타사르하이
엘승타사르하이는 멀리 남고비 사막까지 가지 않아도 대규모 사구 지역을 볼 수 있다. 사막 체험을 할 수 있어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모래 사막은 약 7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초원, 실개천, 사막 지형이 한데 섞여 있는 풍광을 자랑한다. 사막 주변으로는 낙타, 염소, 양을 키우는 유목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지천으로 핀 에델바이스를 만끽할 수 있다.
천진벌덕 칭기즈칸 대형 동상
칭기즈칸 대형 동상은 울란바토르에서 100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천진벌덕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볼 수 있다. 칭기즈칸 대형 동상은 최근에 생긴 몽골 랜드마크 중의 하나이며 4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이다. 칭기즈칸 거대 동상은 고향 힌티 아이막을 바라보고 있다. 내부에서는 칭기즈칸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과 전망대를 관람할 수 있다.
몽골의 예술문화
몽골 전통 공연에는 한국 탈춤과 비슷한 ‘참(Tsam)과 오직 사람 목청만으로 소리 내 연주하는 ’흐미(Khuumii)‘가 있다. 전통 악기로는 마두금이 대표적이다. 현이 2개인 찰현악기로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해금과 같은 방식으로 연주한다. 현 위쪽 끝에 말 머리 모양을 새겨놓아 마두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5년 동안 15번의 방어전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챔피언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장정구(張正九·56). 사각 링 위에 올라서면 그는 한 마리의 야수로 변했다. 상대가 주먹을 맞고 쓰러지면 장내는 “장정구! 장정구!” 그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체육관 입관비로 1500원을 겨우 냈던 그가 대전료로 7000만 원을 받는 복싱 스타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0년대 복싱 인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십니더. 그때만큼의 인기를 되찾긴 힘들 거라 봅니더. 그래서 기분이 좀 그렇십니더.”
강렬한 사투리 뒤로 오늘날의 복싱을 생각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야구선수의 연봉이 2000만 원이었던 시절, 장정구의 대전료는 한 경기당 7000만 원, 방어전 후반에는 1억 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 액수만 봐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당시의 복싱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복싱 중계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는 한산했다. 대신 TV가 있는 전파상과 다방에는 경기 중계방송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린 시절의 장정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TV 앞에 서서 주먹을 뻗으며 복싱선수를 흉내 내던 그는 그렇게 복싱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나의 은인, 심영자 사모님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별명 ‘짱구’는 그의 이름 ‘정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생긴 호칭이었다. 천방지축이었던 그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싸움이라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그가 복싱에 흥미를 느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열두 살 짱구는 어머님께 조르고 졸라 1500원을 얻어 부산 극동체육관에 입문했다. 그는 “나에겐 공부가 아니라 복싱이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열네 살 때에는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데뷔해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꼬맹이치고는 제법이었다. 하루는 체육관에 ‘소매치기 복서’로 불리던 故 김성준 선수가 방문했다. 스파링 상대를 찾던 도중 장정구가 파트너로 지목됐고 이 사건은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하는 데 물꼬를 틀어준 계기가 됐다.
“당시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님의 부인인 심영자 사모님이 김성준 선수를 후원하고 계셨어요. 그날 사모님의 오빠인 심준섭 씨가 구경하러 오셨는데 스파링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추천을 한 거죠. ‘부산에 짱구라는 놈이 있는데 눈여겨봐라’ 하고 말이죠.”
이후 문덕만 내외는 장정구의 두 주먹을 믿었고 그가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택으로 불러들여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정구는 마치 친아들처럼 자신을 돌봐준 그녀를 ‘어머니’,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스무 살 장정구, 정상에 오르다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한 뒤 드디어 첫 번째 타이틀전이 잡혔다. 상대는 8차 방어를 기록했던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다(Hilario Zapata).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경기를 12라운드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판정패. 프로 데뷔 2년 만에 처음으로 당한 패배이자 18전 18승 무패 행진이 깨진 날이기도 했다. 분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날의 패배가 이후 15차 방어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시합 올라가기 전에 대충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싸웠거든요. 근데 한 번 지고 나서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거죠. 지고 난 이후론 상대방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어요.”
운이 좋게도 사파다와의 재대결이 성사됐다. 1983년 3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은 4000명이 넘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마치 그가 이길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심이 장정구에게 다가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3라운드 만에 KO승이었다.
“챔피언이 되던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우연히 위를 올려다봤는데 뿌옇게 보이는 게 마치 꿈결 같았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는데 귀는 윙윙거리고, 당시에는 실감이 잘 안 났어요.(웃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세월 참 빠르죠.”
열다섯 번을 지켜낸 챔피언 벨트
타이틀 방어전만 15차까지 치른 그다. 분명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터. 챔피언이 되던 순간이 최고였다면 최악의 상황은 언제였을까. 그는 일본 도카시키 가쓰오(渡嘉敷勝男)와의 4차 방어전을 꼽았다. 이 경기는 복싱 팬들이 꼽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포항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기온이 35℃까지 올라간 날이었어요. 게다가 몸무게는 14kg이나 뺐지, 날씨는 너무 덥지, 상대는 쓰러지지도 않지… 경기 후반엔 냅다 도망가고 싶었죠.”
1라운드부터 수십 번의 주먹이 오고 갔다. 1라운드 종료 직전엔 다운을 얻어냈지만 도카시키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맞으면 맞을수록 지독하게 더 달라붙었다. 경기 후반엔 때리다 지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정도였다.
“정말 징그러운 선수였어요. 마음 같아선 주저앉고 싶었는데 하필 광복절이 지난 지 3일밖에 안 된 날이었거든요. 일본인하고 겨룰 때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포기하면 국민한테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온힘을 다해 싸웠죠. 이기고 나서 엎드려 우는데 탈진돼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힘을 쏟고 나면 그는 항상 혈뇨를 봤다. 경기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경기 전까지 이어지는 체중 관리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컸죠. 특히 갈증과의 싸움. 물을 한 모금만 마셔도 체중이 변하니깐요. 공부할 때 여자를 돌같이 보라고 하잖아요. 복싱선수들은 물을 돌같이 봐야 합니다.”
일명 ‘김밥 세 조각’ 사건이 있다. 그가 스파링을 준비하고 있는데 트레이너가 먹고 있는 김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결국 사정사정해서 세 조각을 얻었다. 스파링이 끝나면 먹으려고 고이 모셔놨는데 김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다. 범인(?)은 체육관 동료. 동료고 뭐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같이 성질을 내고 그대로 체육관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김밥 세 조각이 뭐라고… 그런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죠. 못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김밥 세 조각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체중과의 싸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내복에 땀복을 입고 뛰어야 했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또 비 오는 날이라고 운동을 쉴 순 없잖아요. 그럼 반포터미널로 가는 거예요. 그곳 지하에서 뛰는데 먼지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집에 와서 가래를 뱉으면 시커맸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운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짠합니다.”
은퇴 그리고 복귀
16차 방어전을 앞두고 장정구는 챔피언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챔피언 벨트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각종 개인사가 겹치면서 복싱을 계속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싱을 그만두니 경제적인 문제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1989년 다시 링으로 복귀한 장정구. 그러나 움베르토 곤살레스(Humberto Gonzalez)와의 재기 전에서 판정패를 당하고 1990년과 1991년 연달아 패배하며 42전 38승 4패의 전적에 3패의 오점을 보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선 KO패를 당하며 사실상 복서생활을 마감했다.
“복싱선수에게 가장 창피한 일은 지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복귀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복싱뿐이었으니깐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복싱밖에 몰랐어요. 장정구에게 복싱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현재 그는 ‘장정구복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운동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점점 뒤안길로 밀려나는 듯한 복싱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시합 때 찍은 사진, 시상식 때 찍은 사진, 그 수만 해도 엄청나거든요.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1980년대 복싱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장정구 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입장료는 받아야죠. 비싸진 않을 거예요. 대신 모든 수익은 불우이웃에게 쓰이는 걸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꽤 괜찮은 계획 아닌가요?”
동창 모임이 있는 날이다. 여러 명의 친구 중에 강북에 사는 사람은 단 세 명이다.
학교 다닐 때만해도 모두 강북에 살았는데 결혼 후라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도 강남으로 옮긴 친구가 대다수였다.
예전엔 모임장소는 명동이 대부분이었다. 모이기 좋고 모두의 청춘이 담겨있는 곳이라 만장일치했다.
언제부터인지 강남 사는 친구가 늘어나서 모임장소를 강남으로 옮기게 되었다.
쓸데없는 자가용 운행을 자제하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강북인 우리 집에서 강남에 가려면 지하철로 한 번 환승해야 한다. 오늘도 늦지 않게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했다.
이상하게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탈 때는 항상 승객이 많아서 굉장히 혼잡하다. 점심때인 이시간이 왜 이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대체로 혼잡한 시간을 피하면 지하철은 재미있는 공간이다.
한 때 지하철 안 잡상인의 물건 파는 것도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그런데 요즘엔 그런 광경을 볼 수가 없어 좀 심심하기도 하다.
아마 지하철 물건 파는 게 금지되어 단속하기 때문에 없어진 것 같다.
승객이 많아 복잡한 시간을 피한다면 잡상인의 구수한 물건 설명 듣기도 재미있고 어떨 땐 정말 필요한 물건을 팔기도 해서 기분 좋게 사기도 했다.
커다란 짐 가방을 끌고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올라오면 어떤 물건을 팔 것인지 귀를 세웠다.
좋은 점은 물건 값이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 어떨 땐 꼭 필요한 물건을 판다는 것이다.
품질이 어떨지 의심하면서도 한 다발에 2천원이라는 반양말도 샀고 식탁 위 뜨거운 냄비를 올릴 때 필요한 대나무로 만든 받침대는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요즘 그런 잡상인을 볼 수 없어 서운한데 만원지하철이 아닐 때 이야기다.
오늘은 승객이 꽉 차 부대끼고 있었다.
사람들끼리 꽉 끼어서 꼼짝 못하는 상황인데 내 앞쪽에 서있는 아가씨의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이 신경 쓰였다. 내 눈앞에 가방이 활짝 벌어져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슬쩍 가방 속 내용물을 꺼내도 주인은 모를 것 같다. 어깨에 멘 가방을 신경도 안 쓰고 서 있는 아가씨가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핸드백이나 가방을 잘 간수해서 아직은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했거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주변 친구나 조카들에게서 핸드백이 찢어지고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한다. 그런데 어떡하지? 이 아가씨 가방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만약 소매치기라도 있다면 손쉽게 당할 것 같은데. 가방 조심하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 해버릴까 갈등이 생겼다.
주위에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너무 오지랖 넓은 아줌마라고 눈총이라도 받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되었지만 벌써 나는 그 아가씨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가방이 많이 벌어져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을 하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남의 일에 관심을 안 가졌을 텐데 이제 나이가 이만큼 되니까 참견을 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 주제넘은 걸까? 그래도 나는 엄마의 입장에서 할 일을 한 것 같다. 내 딸 같은 그 아가씨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으니,... 그래도 오늘은 좋은 참견이었으니까 잘했다고 나 자신을 격려해주고 싶다.
오지랖이 넓어졌지만 남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 흡족하다.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대부분 잃어버린 물건을 아깝게 생각하고 지금의 것보다 예전의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내가 직접 겪고 보니, 위 속담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진다.
주로 지하철로 출ㆍ퇴근하는 필자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5호선 전철을 이용해 퇴근하고 있었다. 여의도역에서 환승해 전철 안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본 후 느낌이 이상해 윗주머니에 손을 댔더니 지갑이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소매치기를 당했나“ 등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지갑을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늦은 밤임에도 아들에게 전화했다. “00카드 분실신고는 1588-0000번으로 아빠가 직접 신고하시고 혹여 찾을 수도 있으니 지하철분실신고센터는 네이버에서 확인 후 연락하고, 기타 행정적인 사항은 아마도 내일 아침에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라는 아들 답변이 돌아왔다. 필자는 아들 말대로 네이버를 검색해 지하철분실신고센터가 있는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내려 카드 분실신고를 마쳤다. 그리곤 마음을 추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지갑이나 잃어버릴 정도로 나이가 들었나. 만일 소매치기에게 당한 거라면 그 정도로 내가 어수룩해 보이나.’
집에 도착해서도 내가 아끼고 아끼던 소중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이튿날 무거운 몸으로 잠을 깨 아내와 아침을 먹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어제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에 다녀가신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전화기로 흘러나왔다. “네, 제가 어제저녁에 그곳에 가서 공부하고 왔어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라며 말끝을 흐리자, ”네, 제가 지갑을 주워서 가지고 있어요.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서 청소 일 하는 사람인데, 오늘 아침 청소하려고 교실에 들어갔더니 의자 밑에 밤색 지갑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있다가 찾아가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필자는 십 년 체증이 풀리듯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로 향하는 동안 필자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우선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먼저 하고 지갑에 들어 있던 돈 일부를 감사 표시로 드려야지”라는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와 약속한 4층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4층 현관에 아주머니가 서 계셨는데 필자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아주머니께서는 “지갑 안을 살펴보니 명함이 있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연락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후, 감사의 표시로 현금을 조금 드리자, 아주머니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래서 인근 영등포시장으로 가서 화장품과 사탕, 그리고 과자를 사서 드렸다.
아주머니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 따스하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